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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1화

곧 경호원 두 명이 임세빈을 데려왔다.임세빈은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송여준의 안색을 보고 깜짝 놀랐다.한 사람의 얼굴에 절망과 피로, 그리고 분노가 이토록 적나라하게 드러날 줄이야.이내 저도 모르게 숨을 헉하고 들이켰지만 곧바로 여유를 되찾고 물었다.“저한테 볼일이라도 있나요?”송여준은 주먹을 불끈 쥐고 임세빈을 응시했다.“솔직히 대답해줘요. 우리 와이프랑 가까이 지낸 거, 혹시 하늘이가 병에 걸렸기 때문인가요?”임세빈을 데리러 간 동안 그는 최근에 벌어진 일들을 계속 되뇌고 있었다.유하늘은 시도 때도 없이 코피를 흘렸고, 얼굴빛도 창백하니 기혈이 허한 사람처럼 보였다.따라서 그녀의 건강 상태가 걱정되어 병원에 가서 진료받으라고 거듭 강조하곤 했다.하지만 그럴 때마다 다른 일에 치여 미뤄지거나 유하늘이 펄쩍 뛰며 검사를 완강히 거부했다.그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설마 병이라도 있겠냐고 생각했다. 기껏해야 코피를 자주 흘려 몸이 조금 약한 정도라고 여겼을 뿐이다.그러나 우물쭈물하며 말을 아끼는 권아람의 태도는 분명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느낌을 줬고, 유하늘의 몸 상태가 결코 좋지 않다는 의심이 들게 했다.임세빈의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아, 그거 물어보려고 날 부른 거였어요?”이내 눈썹을 까딱했다.“직접 물어보면 될걸, 왜 굳이 나한테...”“지금 여기 없어요. 어디 있는지도 모르겠고, 당장 무슨 병에 걸렸는지 알아낼 방법도 시원치 않으니까 순순히 실토하는 게 좋을 거예요.”송여준은 임세빈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분노와 살기가 가득한 눈빛은 마치 상처를 입고도 어떻게 처리할지 모르는 맹수를 연상케 했다.임세빈은 팔짱을 끼고 무덤덤하게 대답했다.“몰라요.”“모른다고?”송여준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의 말은 귓등으로 들은 채 한 걸음씩 다가갔다.“장난해요? 요즘 하늘이랑 가장 가깝게 지내는 사람이 임세빈 씨잖아요. 게다가 뇌센터에서 제일 실력 있는 의사인데 아무것도 모른다라...”그러나 말을 마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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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2화

“대답해요.”이내 거만한 표정으로 눈앞의 남자를 내려다보았다.임세빈은 눈을 스르륵 감더니 피식 웃었다.송여준이 어리둥절했다.두 경호원도 서로의 눈치를 보면서 등골이 오싹해졌다.이 상황에서 웃는다고?임세빈은 바닥을 짚고 겨우 몸을 일으켰다. 초조한 송여준을 보자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당신한테도 이런 날이 오는군요.”송여준은 눈을 가늘게 뜨고 싸늘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임세빈이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키더니 대뜸 외쳤다.“당신 그냥 쓰레기야, 알아? 당신 같은 인간에게 하늘 씨처럼 착한 여자가 오히려 아깝죠. 그렇게 좋은 사람을 자기 손으로 망쳐놓다니, 이제 살날이 얼마 안 남았는데... 차라리 당신이나 죽어버리지.”송여준은 여전히 실눈을 뜬 채 쌀쌀맞게 말했다.“어서 대답해요! 설마 부모님까지 데려와야 입을 열겠다는 건가?”임세빈은 전혀 겁먹지 않았다.이내 눈썹을 까딱이며 비아냥거렸다.“하늘 씨가 무슨 병 걸렸는지 알고 싶은 거죠? 좋아요, 얘기해줄게요.”그리고 주머니에서 진단서를 꺼내 송여준에게 던졌다.“뇌종양 말기, 앞으로 한 달 남았어요. 이제 만족해요?”송여준의 몸이 흠칫 굳었다.고개를 숙이자 바닥에 떨어진 진단서에 적힌 문구가 또렷하게 보였다.[뇌종양 말기. 보존적 치료. 예상 생존 기간 한 달.]결국 다리가 풀리며 그대로 무릎을 바닥에 세게 부딪쳤다.그는 통증조차 느끼지 못하는 듯 손을 내밀어 진단서를 주워 들었다.내용을 확인하자 손이 걷잡을 수 없이 떨렸다.“아, 아니야... 그럴 리가...”가슴이 미어질 듯 아팠다.송여준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거짓말! 나 보라고 일부러 꾸몄지? 하늘이가 요즘 몸이 좀 허하고 밥도 잘 안 먹고 코피도 나긴 했지만... 암 말기라니, 말도 안 돼.”“뇌종양 대표적인 증상이 코피 나고 구토를 동반하는 거 몰라요?”임세빈은 충격을 금치 못하는 송여준을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속으로는 이루 형언할 수 없는 통쾌함을 느꼈다.유하늘의 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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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3화

유하늘은 떠나기 전에 이미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송여준이 그녀를 찾기 위해 어쩌면 자신에게 물어볼 수 있다는 것도 이미 예상했다.그래서 임세빈은 어제 유하늘과 만났다.만약 송여준이 굳이 그에게 자신의 행방을 묻는다면 사실대로 말하라고 했다.또한, 절대 찾아낼 수 없으니 걱정하지 말라고도 덧붙였다.임세빈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내 송여준을 밀치고 일어나 괴로움에 일그러진 그의 얼굴을 보며 피식 웃었다.“오빠 따라 이미 해외로 나갔어요.”송여준이 흠칫 놀랐다.“오빠?”임세빈이 쌀쌀맞게 말했다.“당신한테서 벗어나게 하려고 하늘 씨 오빠가 해외에서 일을 제쳐두고 직접 데리러 왔어요. 그렇게 잘났으면 어디 한 번 찾아봐요. 과연 가능할지 두고 보자고.”말을 마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송여준은 주먹을 꽉 쥔 채 임세빈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노려보며 입을 꾹 다물었다.두 경호원이 서둘러 다가와 그를 부축했다.“사모님 해외 집 주소랑 오빠 회사 이름은 알고 계시죠? 대표님한테 사모님을 찾는 건 완전 식은 죽 먹기잖아요.”송여준은 풀이 죽은 모습으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리고 한참 뒤에야 천천히 말했다.“몰라.”두 사람은 어리둥절했다.“유하늘 집이 어디 있는지, 오빠 회사 이름이 뭔지 몰라.”순간 눈앞이 깜깜해졌다.유하늘을 찾지 못한다는 공포와 함께 자신에 대한 혐오감도 밀려왔다.결혼한 지 7년 동안, 월요일마다 어떤 넥타이를 좋아하는지까지 유하늘은 속속들이 알고 미리 준비해두었는데, 정작 그는 유하늘의 과거를 전혀 몰랐다.더욱이 처가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했고, 관심을 가진 적도 없었다.일개 보석상인 유시훈이 무려 한 회사의 오너일 줄이야!결혼할 때도 유하늘은 짐만 챙기고 집에 들어와서 같이 살기 시작했다.단지 해외가 너무 멀다는 이유로 그녀를 데리고 처가에 가본 적도 없었고, 유시훈과 연락하지도 않았다.그동안 명절이나 기념일마다 해외에 있는 처가를 챙기는 건 늘 유하늘의 몫이었고, 남편과 자식이 고생할까 봐 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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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4화

이내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그런 뜻이 아니라...”“아직도 이혼을 미루려고 핑계를 대겠다는 거야?”송여준이 비아냥거리는 눈빛으로 조소를 머금었다.권아람은 억울한 듯 말했다.“내가 언제? 오해하지 마. 난 항상 협조해 왔어. 이혼? 하면 되잖아! 내일 바로 구청 가서 신청해. 됐지?”그녀의 눈이 싸늘하게 식어갔다.지금 송여준이 이혼을 고집하는 건 단지 유하늘의 비보를 접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내일 송우주를 데려와 그를 설득해 없던 일로 하면 그만이다.게다가 유하늘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설령 송여준과 이혼하더라도 나중에 다시 재혼해도 되었다.어차피 곧 죽을 사람인데 다시 돌아올 꿈조차 꾸지 못하게 할 것이다.송여준은 권아람을 무시하고 밖으로 나가 운전기사와 함께 호텔로 향했다.프런트 여직원은 좀비처럼 다가오는 송여준의 모습을 보고 잔뜩 겁을 먹었다.“무엇을 도와드릴까...”말을 마치기도 전에 송여준이 끼어들었다.“혹시 유하늘이 체크인할 때 함께 온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해줄 수 있을까요?”여직원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눈앞의 남자는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한 모습이었다.그녀는 급히 투숙 정보를 확인했다.“유시훈 씨라고 나와 있습니다.”송여준은 눈을 질끈 감고 주먹을 쥐었다.역시나였다.유하늘과 함께 호텔에 들어가는 모습이 찍힌 남자는 애인이 아니라 그녀를 데리러 온 오빠였다.그러다 문득 무언가 떠올리고 곧장 위층으로 달려가 유하늘이 묵었던 방을 찾았다.청소 중인 아주머니가 갑자기 들이닥친 그를 보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손님, 뭐 찾으세요? 제가 도와드릴까요?”송여준은 아무 말 없이 테이블과 침대 밑을 뒤지기 시작했다.머릿속에는 오직 유하늘 앞에서 던져버렸던 그 반지 생각뿐이었다.바닥을 샅샅이 살펴보던 와중에 갑자기 시선이 멈췄다.거실 한가운데 아직 마르지 않은 선명한 핏자국이 있었다.송여준은 당황했다.‘나 때문인가?’어젯밤 유하늘을 몰아붙이고 차마 입에 담기도 힘든 말을 쏟아낸 탓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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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5화

3일 후.“아가씨, 방은 이미 다 정리해 놨습니다. 마음에 드시나요?”집사 서영준이 방문을 열며 자상하고 애정 어린 미소를 지었다.유하늘은 유시훈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 주변을 살폈다.방은 그녀가 떠나기 전과 똑같이, 제일 좋아하던 빈티지 스타일로 꾸며져 있었고 바뀐 곳이 하나도 없었다.하지만 7년이란 세월이 흐른 지금, 지난번에 돌아왔을 때만 하더라도 분명 인테리어가 완전히 달랐던 것으로 기억했다.지난 사흘 동안 서영준과 가정부들이 그녀가 예전의 느낌을 되찾게 하려고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지 알 수 있었다.유하늘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정말 고마워요, 서 집사님. 7년 전과 똑같네요. 보는 것만으로도 과거로 돌아간 기분이에요. 마치 한 번도 떠난 적 없는 것처럼. 여러분 정말 대단하세요!”“아가씨께서 만족하시고 편안하게 지내주신다면 저희는 그걸로 충분합니다. 계속 저희랑 함께 여기 머물러 주셨더라면 좋으련만...”말을 마치기도 전에 서영준의 눈시울을 붉어지더니 목이 메어왔다.이내 고개를 돌려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 한편이 왠지 모르게 씁쓸했다.유하늘이 불치병에 걸려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 그녀가 자라온 모습을 지켜본 산증인들로서 매일 눈물로 밤을 지새웠다.마치 친손녀가 곧 세상을 떠날 것처럼 마음이 아팠다.“자자, 그만! 하늘이가 돌아와서 같이 살게 됐는데 기뻐해야지, 왜 울고 그래요?”유시훈이 한마디 거들었다. 괜히 유하늘의 기분을 망칠까 봐 조심스러워하는 눈치였다.서영준은 재빨리 눈물을 닦았다.“죄송합니다, 아가씨. 제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그냥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괜찮아요.”유하늘은 대수롭지 않은 듯 피식 웃었다. 서영준이 자신을 걱정하는 마음 때문에 그런 것임을 알고 있었다.이내 따뜻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앞으로 그냥 편하게 절 대해줬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제가 보수적 치료를 선택한 것도, 마지막 시간을 여러분과 함께 보내는 것도 헛되지 않겠죠?”부드러운 눈빛과 평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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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6화

오후.유하늘은 푹 자고 일어났다.역시 집이 제일 편했다. 꼬박 네 시간 동안 한 번도 깨지 않았고, 눈을 뜨자 마음조차 맑아지는 기분이었다.그녀는 미소를 띠며 침대에 앉아 기지개를 켰다.침대에서 내려오자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노은결의 이름이 화면에 뜨는 순간 유하늘의 표정이 환해졌다.그리고 통화 버튼을 누르고 한껏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은결 씨! 나 이제 일 다 보고 돌아왔어요. 복귀 첫 전시회가 3일 뒤라면서요? 그날 가서 응원해줄게요.”그러나 휴대폰 너머로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유하늘은 어리둥절했다.‘뭐지? 내가 뭐 잘못 말했나?’이내 헛기침하고 다시 물었다.“왜 그래요? 기분 안 좋아요?”“아니에요.”노은결은 마음이 착잡했다. 대체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결국 한숨을 내쉬며 다시 입을 열었다.“송여준 때문에... 사실 하늘 씨 기분 망칠까 봐 얘기 안 하려고 했는데 그래도 알려야 할 것 같아서요. 송여준이 지금 온갖 방법을 동원해 하늘 씨 소식을 알아내고 있거든요.”유하늘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그녀는 국내에 친구가 별로 없었다. 이미 해외 생활에 익숙해져 송여준과 결혼한 뒤에도 잘 적응하지 못했다.이제 와서 보면 참 다행이었다. 덕분에 번거로운 일에서 제외될 수 있었으니.지금도 임세빈 빼고 아무도 그녀가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송여준은 자신을 찾을 수도, 연락할 방법도 없었다. 그래서 이판사판식으로 노은결까지 연락한 것이다.유하늘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송여준 얘기가 나오자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지금 이 상황이 너무 싫었다. 이제 국내를 벗어나 해외까지 왔는데도 왜 송여준이라는 이름은 그림자처럼 계속 따라다니는 걸까.노은결은 유하늘이 화난 줄 알고 얼른 설명했다.“걱정하지 마요. 나 아무 말도 안 했어요. 대신 전시회는 오지 않는 게 어때요? 송여준이랑 마주치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유하늘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마지못해 동의했다.“알았어요. 원래는 직접 가서 응원하려고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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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7화

유하늘은 유시훈을 따라 차에 올라 목적지로 향했다.누구를 만나러 가는지 관심이 없었고, 창밖을 바라보며 경치를 즐겼다.이게 대체 얼마 만인가.지난번에 돌아왔을 때도 오빠 회사 일을 돕느라 풍경을 제대로 감상하지 못했다.어린 시절을 보낸 곳으로 돌아와 시한부 인생 속에서도 예전처럼 조용히 경치를 감상하고 삶을 즐길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차는 곧 목적지에 도착했다.한 아파트 단지였다.유하늘은 한 번도 와본 적 없는 곳임을 확신했다.이내 유시훈을 따라 내리면서 의문을 감추지 못했다.“친구네 집에서 만나기로 한 거야?”“응. 지금 막 퇴근하고 돌아왔대.”유시훈이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고 계단을 올라갔다.유하늘은 어이가 없었다. 자신이 이 정도로 약해진 건 아닌데 말이다.하지만 지극정성으로 챙기는 오빠를 보자 차마 거절하기는 힘들었다.유시훈이 문을 두드렸다.문이 열리자 3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가 나타났다.사전에 얘기를 나눈 듯 그는 유하늘이 올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건넸다.“어서 와.”유하늘은 의아한 표정으로 유시훈을 바라보았다.유시훈은 문을 닫고 그녀를 거실로 데리고 가서야 마침내 이 남자의 정체를 소개했다.“하늘아, 이쪽은 내 친구 양재혁이야. 대학교 동기고, 지금은 중앙병원에서 근무 중인데 신경외과 전문의야.”유하늘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이내 유시훈을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나 약 충분히 챙겨왔으니까 의사 안 봐도 돼.”“진료받으러 온 게 아니야. 내 친구가 뇌종양 전문가 한 분을 아는데 수십 년 동안 이 분야 수술을 해온 사람이래. 오늘 너랑 같이 수술에 대해 상의해보려고 여기 왔어.”유시훈은 진지하게 설명하며 다짜고짜 유하늘을 붙잡고 자리에 앉혔다.유하늘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표정은 짜증이 묻어났고 의자에서 일어나 한 걸음 물러섰다.그리고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나 수술 안 할 거야. 오빠한테도 얘기했잖아. 보존적 치료하면 한 달은 살 수 있지만 수술은 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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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8화

유시훈은 한숨을 내쉬며 쓴웃음을 지었다.“나 하늘이 오빠로서 꽝이지? 이 세상에 조금이라도 더 살겠다는 동생을 수술대에 보내지 못해 안달인 오빠가 어디 있냐?”양재혁이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위로했다.“아니야, 너도 동생 인생이 이렇게 시들어가는 걸 보고 싶지 않아서 그런 거잖아. 이해해.”유시훈은 굳이 달래줄 필요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표정은 한결 어두워지더니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한편, 밖.유하늘은 무작정 길을 걷고 있었다.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스쳤고 머릿속은 뒤죽박죽 했다.그러다 발길이 닿는 대로 한 카페에 들어가 창가 자리에 앉았다. 바깥을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울적한 마음을 추슬렀다.유하늘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이런 기분이 싫었다.모든 시간을 스스로 계획해둔 상태였는데 오빠가 그걸 지지해주지 않는다니.생각에 잠긴 찰나, 거리 한복판에 자리를 잡고 앉아 오가는 사람들을 향해 하모니카를 불고 있는 노숙자가 눈에 들어왔다.음악 전공자로서 그녀는 단번에 알아챘다. 이 곡은 유명 음악가 오르딘의 대표작이다.제목도 공교롭게 [꽃 피는 봄]이다.유하늘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내 밖으로 나와 지갑에서 지폐 두 장을 꺼내 노숙자 앞에 내려놓았다.남자는 감사의 뜻으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유하늘은 자리를 뜨는 대신 사람들이 분주히 오가는 길가에 털썩 주저앉았다. 치마가 더러워지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진지한 눈빛으로 남자를 바라봤다.“뭐 좀 여쭤봐도 될까요?”노숙자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그럼요.”유하늘이 물었다.“만약 당신이 불치병에 걸려서 절반의 확률로 살 수 있는 수술과 남은 시간을 가족과 함께 보내는 보존적 치료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어떤 쪽을 택하시겠어요?”노숙자는 멈칫하더니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봤다.그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수술하면 살 확률이 절반밖에 안 된다고요?”“네.”유하늘이 고개를 끄덕였다.“당신은 무엇을 선택할 거예요?”이 노숙자가 어떤 대답을 할지 궁금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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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9화

유하늘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유시훈을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오빠, 그때 임 선생님이 나한테 수술할 최적의 시기가 있다고 했어.”“뭐라고?”유시훈의 눈이 번쩍 뜨이더니 그녀를 진지하게 바라보았다.유하늘이 말을 이어갔다.“지금 뇌종양이 계속 커져서 신경 눌리면 수술도 못 한대. 그게 이제 1센티밖에 안 남았다고 하더라. 내가 혹시라도 마음 바꾸면 그래도 한 번 걸어볼 마지막 기회는 있다고 했어.”그리고 앞으로 다가가 다시 입을 열었다.“나한테 일주일만 주면 수술할지 말지 결정할게.”그녀의 말에 유시훈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이내 한 걸음 나아가 유하늘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물었다.“진짜?”유하늘은 고개를 끄덕였다.“응.”유시훈이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외쳤다.“그럼! 당연히 줘야지. 일주일 동안 꼭 잘 생각해봐.”“알았어, 오빠.”유하늘도 덩달아 웃었지만 눈동자 속에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다만 왜 마음이 바뀌었는지는 설명하지 않았다.아마 노숙자의 말에 감명받았을지도 모른다.설령 위험한 선택을 하더라도 삶의 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일주일 안에 생각이 정리되고 심경의 변화가 생기면 바로 수술받겠다고 결심할 수도 있으니까.그녀에게 주어진 시간은 한정적이다.지금 먹는 약으로는 뇌종양의 진행을 막을 수 없다.따라서 고민할 시간은 길어야 일주일뿐이다....그 이후로 유하늘은 틈만 나면 놀러 나갔다.음악회도 가고, 전시회도 가고, 오빠와 함께 영화도 봤다.가끔 회사에 들르면 직원들이 극진한 태도로 그녀를 맞이했다.이틀 동안 유하늘이 느낀 건 세상이 건네는 선의뿐이었다.셋째 날.유하늘은 잠에서 깬 뒤 창가에 서서 눈을 감은 채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상쾌한 공기를 마시고 있을 때 귓가에 휴대폰 벨 소리가 들렸다.그녀는 뒤돌아서 휴대폰을 집어 들고 전화를 받았다.휴대폰 너머로 유시훈의 다정하지만 어딘가 난처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하늘아, 지금 바빠? 부탁할 일이 있어.”유하늘이 웃으며 대답했다.“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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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0화

그녀는 다가가서 문을 벌컥 열었다.“죄송합니다, 오래 기다리셨죠? 이쪽은 저희 대표님 여동생 유하늘 씨예요. 회사 협력 관련 업무를 가끔 맡아서 하고 있어요.”뒤따라선 유하늘은 형식적인 미소를 지었다.그러나 마주 앉은 사람을 보는 순간 흠칫 놀라며 걸음을 멈추었다.정장 차림에 넥타이까지 맨 남자는 올백 머리를 하고 말끔한 인상을 주었다.유하늘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고,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눈앞의 남자를 그녀는 알고 있었다.홍이수의 사촌 남동생, 홍서운이다.두 형제는 최근 2년간 회사의 경영권을 두고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다.그 때문에 홍이수는 툭하면 집에 찾아와 송여준에게 푸념하곤 했다.둘은 소꿉친구로 어릴 때부터 친했기에 자연스럽게 홍서운과는 거의 왕래가 없었다.그럼에도 그녀와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었다.이번에 협상하러 온 사람이 홍서운일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혹시라도 자신을 알아보고 다른 사람에게 행방을 흘리면 어떡하지?유하늘은 생각하면 할수록 불안감이 커졌다.정작 홍서운의 얼굴은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끄덕였다.“안녕하세요, 유하늘 씨. 처음 뵙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처음 뵙겠다니?유하늘은 깜짝 놀라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자주 보는 사이가 아니라 벌써 얼굴을 잊은 걸까?이내 걱정은 눈 녹 듯이 사라지면서 자연스레 걸어가 자리에 앉았다.“안녕하세요, 홍 대표님. 송강 그룹을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홍서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시계를 흘끗 확인했다.“제가 이따가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도 괜찮죠?”유하늘은 재빨리 마음을 가다듬고 업무 모드로 전환했다.두 사람은 보석 홍보 협력 건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의를 시작했다.어느새 30분이 훌쩍 지났고, 협상은 놀라울 만큼 순조롭게 진행되었다.유하늘은 기쁨을 숨기지 못하는 페로나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회사 직인 가져다주세요. 바로 계약서에 도장 찍으면 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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