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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71화

이후로 그의 세심한 배려와 친구 이상의 애틋함과 보살핌 때문에 송하나는 마음속 깊이 은근한 추측이 생겨났다.어쩌면 차정원이 자신에게 호감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다만 남자가 이토록 진지하게 고백했을 때, 그녀는 머리가 하얘져서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긴 침묵이 두 사람 사이를 맴돌았다.차정원의 시선은 줄곧 그녀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 눈빛에는 진지함 외에도 은근한 긴장감이 섞여 있었다.원래는 모든 것이 순리대로 이루어진 후, 조용히 고백할 생각이었다.하지만 오늘 밤, 최시훈의 갑작스러운 등장이 그에게 강렬한 위기감을 안겨주었다.행여나 자신이 보지 못하는 곳에서 통제할 수 없는 변수가 생겨날까 두려웠다.계속 미뤘다가 또다시 그녀를 놓칠 것만 같았다.그녀의 긴 침묵에 차정원의 마음은 천천히 가라앉았다.다시 입을 열었을 때, 목소리는 아까보다 한결 부드러워졌다.“하나야, 나랑 사귀어 줄래?”송하나는 심호흡을 하며 스스로를 진정시키려 애썼다.차정원에게 호감이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그와 함께 있을 때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편안함과 안정감은 지난 수년간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이다.그의 앞에서는 모든 방어막을 내려놓을 수 있고 심지어 자신의 연약함과 난처함까지도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었다.이러한 신뢰와 아련해지는 기분은 더없이 소중한 것이지만 그녀는 아직 확신할 수 없었다.이게 과연 남녀 간의 설렘일까?실은 차정원에게 감사, 신뢰, 의존이 지나치게 뒤섞여 있어 본질이 무엇인지조차 분간하기 어려웠다.더 현실적인 고민은 그녀 자신의 상황에서 비롯되었다.송하나는 한번 이혼한 여자이다.실패한 결혼 생활과 세상에 태어나지도 못했던 아이까지...아픈 과거가 낙인처럼 가슴 깊이 새겨졌으나 그에 반해 차정원은...업계에서 명성이 자자한 스타 변호사라 재능이 넘치고 앞날이 창창하다.유복한 집안에 태어나 배경도 깨끗하고 품행도 바른 청년이 분명 더 나은 선택이 많을 테지만 왜 굳이 자신을 택했을까? 그녀는 의구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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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72화

그는 몸을 살짝 앞으로 기울이며 더욱 간절한 어조로 말했다.“이 밖에도 네가 뭘 더 걱정하는지 알아. 우리 부모님 모두 개방적인 분들이시고 나의 선택을 존중하셔. 결혼 문제에 대해서 이미 부모님과 솔직하게 이야기 나누었어. 두 분 모두 달갑게 널 받아들이실 거고 가족처럼, 날 대하듯 널 아끼고 소중히 여기실 거야.”그는 잠시 멈췄다가 말을 이었다.“일이나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는... 네가 만약 제연에서 자리 잡고 싶다면 나도 사업 기반을 이쪽으로 옮겨 재배치할 수 있어. 만약 지치고 힘들어서 환경을 바꾸고 싶다거나 잠시 쉬어 가고 싶다면 그동안 내가 쌓아둔 커리어나 자산이 있으니 우리 두 사람 모두 얼마든지 여유롭게 선택할 수 있을 거야.”“네가 어딜 가서 어떤 생활 패턴을 시도하고 싶든 곁에 함께 할 능력이 있고 그렇게 할 의향도 있어. 이러한 현실적인 문제들은 이미 수도 없이 고민해 봤어. 우리는 이런 문제들을 해결할 역량과 공간을 충분히 갖추고 있으니 절대 우리 사이의 걸림돌이 되진 않을 거야.”송하나는 완전히 넋이 나간 채 와인잔을 쥔 손가락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그녀가 스스로를 의심하는 동안 이 남자는 소리 없이 앞으로 닥칠 모든 문제를 하나둘씩 짚어보고 해결책까지 찾아 놓았다.송하나는 엄청난 충격과 감동에 휩싸였다.이토록 깊은 애정은 감당하기가 어려웠다.“변호사님...”그녀는 심호흡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하려고 애썼다.“저에 대한 마음과 배려까지 정말정말 감사드리고 또 깊이 감동했어요.”하지만 지난번의 성급했던 결혼 생활에서 비롯된 트라우마가 여전히 그림자처럼 그녀를 따라다녔다.또한, 그에 따른 자기 보호 본능이 계속 이성을 일깨워주고 있었다.“하지만, 저는...”그녀는 남자의 밝은 시선을 피해 고개를 떨구고 목소리도 한층 낮아졌다.“이혼한 지 두 달도 채 안 됐고 실패한 결혼 생활 때문에 새 출발이 더더욱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어요. 마음의 준비가 완전히 되지 않은 상태에서 섣불리 새로운 감정을 시작하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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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73화

그녀는 마치 중대한 약속을 하듯 심호흡을 한번 했다.“저에게 석 달만 시간을 주세요. 이 석 달 동안 마음 정리도 하고 최대한 워라밸을 실현할 수 있도록 노력해볼게요. 석 달 뒤 오늘, 제가 어디에 있든 변호사님께 명확한 대답을 드릴 거예요. 그때까지 심사숙고할 시간을 주세요. 그 석 달 동안은... 지금처럼 자연스럽게 지내는 게 어떨까요? 변호사님 고백에 좀 더 적극적으로 임해보고 싶어요.”그야말로 이성적이고 진심 어린, 그리고 뚜렷한 계획이 담긴 대답이었다.그녀는 쉽게 약속하지는 않았지만, 구체적인 시간과 긍정적인 태도를 보여줬다.차정원은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눈가에 서린 긴장감이 풀리고 잔잔한 빛으로 변했다.그는 천천히, 그리고 매우 엄숙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입가에 온화한 미소가 걸렸다.“좋아.”단 두 글자에 수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석 달이든 그 이상이 걸리든 상관없어.”남자는 부드러운 시선으로 그녀를 감싸고 다정하게 속삭였다.“네가 이렇게 진지하게 임하고 나랑 함께 이 시간을 마주할 성의를 보여준 것만으로도 이미 최고의 대답이야.”레스토랑을 나서자 어느덧 새벽 한 시가 다 되어갔다.차 안에는 따뜻한 히터가 그녀를 감쌌다. 송하나는 뻑뻑한 눈을 비비며 얼굴에 옅은 잠기가 드리워졌다.“졸려?”차정원이 바로 눈치채고 음악 볼륨을 낮췄다.“기숙사 가는 길에 좀 자. 도착하면 깨워줄게.”“괜찮아요.”송하나는 고개를 저었지만, 목소리가 나른해지고 몸이 노곤해지며 푹신한 가죽 시트 등받이에 편안하게 기댔다.차가 화려한 불빛을 밝히는 도로 위를 부드럽게 달렸다.썰렁한 골목길을 지나갈 때, 송하나가 무심코 창밖을 내다보았는데 백발의 할머니가 두꺼운 솜옷을 껴입고 탕후루를 팔고 있었다.길가에는 아직 문을 닫지 않은 구멍가게들이 몇 개 있었는데 편의점, 꽃집 두루두루 영업 중이었다.“탕후루 먹을래?”문득 차정원이 속도를 늦추며 고개를 돌렸다.이에 송하나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그러죠.”“그럼 잠깐만 기다려.”남자는 능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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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74화

“뭘 이렇게 많이 사셨어요?”송하나는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이에 차정원은 묵직한 꽃다발을 그녀의 품에 안겨주고는 운전석에 돌아가 안전벨트를 맸다.“할머니 연세도 있으신데 이 추운 날에 늦게까지 밖에 계시니 참 딱해 보여서 남은 거 전부 싹쓸이해 왔어. 그래야 할머니도 빨리 가게 정리하고 들어가 쉬시지.”그는 별것 아니라는 듯 가볍게 말했다.의도적인 동정심은 없었으나 그 행동에 담긴 숨겨진 선의는 송하나의 마음을 묘하게 움직였다.그녀는 품에 안은 독특한 꽃다발을 바라보았다. 코끝에서 설탕의 달콤한 향과 유칼립투스의 청량함이 감돌았고 입가에는 저도 모르게 미소가 걸렸다.이 꽃다발은 그녀가 받은 중에 가장 특별하고 또 가장 맛있는 선물일 터였다.송하나는 참지 못하고 휴대폰을 꺼내 각도를 잘 잡고서 아름다운 꽃다발을 사진으로 남겼다.이어서 아무런 글귀 없이 곧바로 SNS에 사진을 올렸다.피드를 올린 지 불과 몇 초 만에 차설아에게서 폭풍 같은 메시지가 쏟아졌다.[이 꽃다발! 이 탕후루! 딱 봐도 뭔가 있네!][솔직히 말해! 나 몰래 우리 오빠랑 사귀는 거지? 오빠 맞지? 당장 말하라고!]송하나는 그녀가 따지러 온 줄로 알고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손가락이 화면 위에 머문 채 무심코 옆을 흘끗 보았다.어둠 속에서 침착하게 운전하는 차정원의 옆모습을 보다가 다시 차설아에게 질문을 건넸다.[어떻게 알았어?]차설아의 답장은 놀라울 정도로 빨랐고 문자 하나하나에 흥분이 묻어났다.[헤헤, 역시 그랬구나!][빨리 말해봐! 오빠가 끝내 못 참고 고백했어? 나의 새언니가 돼줄래요, 하나 씨?]간절하게 기도하는 이모티콘까지 보내는 차설아, 그런 그녀의 반응이 송하나는 실로 의외였다.차정원이 자신에게 고백할 것을 이미 짐작한 뉘앙스, 흥분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메시지 내용과 과거의 순간들이 구슬처럼 엮이고 있었다...차설아는 늘 무심한 듯 두 사람을 엮어주었고 단둘이 있을 기회를 만들어주려 했던 것 같았다.송하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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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75화

이보다 더 애틋한 호칭은... 아직 서두를 필요가 없다.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으니 충분히 인내심을 가지고 있었다.차정원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새로운 호칭을 더없이 소중하게 받아들였다.“얼른 올라가서 쉬어, 하나야.”중저음의 감미로운 목소리로 말한 뒤, 자연스럽게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손바닥의 따뜻한 온기에 애틋한 기류가 잔뜩 묻어났다.“네.”송하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꽃다발을 챙겨서 기숙사 건물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한편 차정원은 그 자리에 서서 그녀의 가녀린 뒷모습이 텅 빈 홀을 가로질러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물끄러미 지켜보았다.창문 너머로 집안에 불이 환하게 켜지고 나서야 안전하게 도착했음을 확인하고 자리를 떠나는 남자...그 시각, 기숙사 건물 맞은편.줄지어 선 상록수들이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고 그 아래에는 차가운 기운을 내뿜는 검은색 세단 한 대가 웅크린 맹수처럼 소리 없이 멈춰 있었다.차창이 소리 없이 절반 정도 내려갔다.이강우는 손가락 사이에 이미 다 타버렸지만 재조차 털지 않은 담배를 물고 있었다. 긴 손가락이 휘몰아치는 찬바람에 얼어붙었으나 전혀 개의치도 않았다.그의 시선, 그의 온 신경이 방금 건물 앞에서 목격한 짜릿한 광경에 못 박혀 있었다.차에서 내린 송하나는 과장되게 화려한 탕후루 꽃다발을 안고 얼굴에 보기 드문 편안한 기색을 드러냈다. 아니, 심지어 부드러운 미소까지 어려 있었다.단정하고 온화한 기품을 내뿜는 남자는 자상하게 그녀를 위해 차 문을 열어주며 보물을 다루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송하나가 그 남자를 향해 환하게 웃다가 부드러운 어조로 이름까지 불렀다.마지막으로 그 남자는 매우 자연스럽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놀랍게도 송하나는 전혀 거부하지 않고 묵묵히 받아들였다.애틋하고 자연스러운, 실로 눈에 거슬리는 광경이었다.모든 장면이 얼음을 입힌 칼날처럼 이강우의 심장을 난도질하며 날카롭고 질식할 듯한 둔통을 안겨주었다.이혼한 지 두 달이 다 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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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76화

묵묵히 운전석에 앉아 있던 비서는 백미러로 조심스럽게 대표님의 미세한 표정 변화를 관찰하고 있었다.텅 비어버린 건물 문을 뚫어지라 응시하며 칼날처럼 날카로운 턱선이 잔뜩 긴장되어 있었고 어둠 속에서 차가운 곡선을 그려냈다.하지만 눈가에는 어쩐 일인지 억지로 참아내는 듯한, 뭔가 뒤틀린 핏발이 서서히 번져왔다.비서는 마음속 깊이 연민의 감정을 느꼈다.이강우를 수년간 모시면서 상권을 휩쓸 때의 서늘한 결단력도 보았고 성공에 도취해 뽐내던 호기도 수없이 보아왔다. 하지만 이렇게 실의에 빠져 고통을 억누르는 모습은 처음이었다.한참 망설이던 끝에 그는 결국 목소리를 낮추고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대표님, 송하나 씨는 이미 올라가셨습니다. 만약... 한번 만나 뵙고 싶으시다면 제가 가서 얘기라도 전해볼까요?”“필요 없어.”이강우의 목소리가 심하게 잠겨 있었다.“날 반가워하지도 않을 거야.”갑작스러운 방문은 오히려 그녀를 더 귀찮게 하고 증오만 쌓아갈 뿐이다.이강우는 결국 따스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창문을 한 번 더 바라본 후 천천히 차창을 올렸다.“가자.”그는 눈가에 아득하게 소용돌이치던 고통과 핏발을 완벽하게 차단해버리려는 듯 두 눈을 질끈 감았다.“네, 대표님.”비서는 감히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즉시 시동을 걸었다.뒷좌석에 기댄 이강우는 마치 온 힘을 다 쏟은 사람처럼 축 늘어져 시트에 깊숙이 파묻혔다.비서는 운전에 집중했지만, 마음은 여전히 무거웠다.송하나를 만나려고 지친 몸을 이끌고 그 먼 강현에서 제연까지 달려온 이강우인데, 칼바람 속에 새벽까지 애태우다 맞닥뜨린 장면이라곤 그녀가 딴 남자와 다정하고 행복하게 지내는 모습이었다.이제 이강우는 너덜너덜해진 심장을 부여잡고 또다시 밤새 강현으로 돌아가야 한다.이 모든 수고로움과 심신의 피로를 다 참아냈는데 왜 그토록 가슴을 찌르는 광경만 보고 돌아가야 하는 걸까?이강우는 어느덧 송하나에게 품은 애정이 뼛속 깊이 스며들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자존심과 품위마저 완전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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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77화

심성빈은 절대적인 지분권을 쥐고 있어 모든 반대를 짓누르고 강행할 수도 있었다.하지만 그는 누구보다 깊이 깨닫고 있다. 억압은 반드시 곪아 터지게 마련이며 그 방식은 그룹의 미래와 경영의 근간을 갉아먹는다는 것을 말이다.모두의 신뢰를 얻기 위해 그는 스스로에게조차 가혹할 정도의 성과 보장 계약서를 작성했다.구정이 오기 전까지 해외 핵심 지역의 사업 규모와 이익을 두 배로 늘려야 한다는 조건이었다.만약 이 목표를 달성한다면 심성빈이 국내외를 동시에 운영하며 새로운 영토를 개척할 능력이 완벽하게 증명되는 것이니 주주들은 더 이상 제연시 개발에 반대하지 않을 터였다.하지만 실패한다면 그는 주요 결정권을 자진해서 내려놓고 스스로를 옭아매는 족쇄를 차야 할 것이다.계약서에 서명이 끝난 순간부터 심성빈은 거의 일하는 기계가 되어 전 세계를 쉴 틈 없이 오가며 스케줄이 숨이 막힐 정도로 빽빽했다.협상, 인수합병, 자원 통합... 단 한 순간이라도 멈출 수가 없었다.지금 막 힘든 싸움을 끝냈지만, 자신에게 진정한 휴식을 허락할 수 없었다.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몇 번 더 문질렀다. 날카로운 통증이 겨우 가라앉자 그는 다시 몸을 곧추세우고 다음으로 처리해야 할 긴급 문서를 펼쳤다.이때 비서가 문을 열고 들어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뜨거운 블랙커피 한 잔을 책상 가까이에 조용히 내려놓았다.대표님의 눈에 역력한 피곤함과 충혈된 핏줄을 보며 비서는 또다시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대표님, 지난 사흘간 총 수면 시간이 열 시간도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이대로는 강철 같은 몸이라도 버티기 힘들어요. 제발 잠시라도 멈추고 쉬세요, 네?”한편 심성빈의 시선은 단 1초도 문서에서 떨어지지 않았다.그는 손을 휘저어 비서에게 커피를 내려두라고 지시했다.“먼저 나가봐. 이것들 다 처리하고!”그는 더 빨라야 했다. 남들보다 훨씬 더!이 승부에서 하루라도 빨리 이겨 제연시로 향하는 통행증을 손에 넣어야만 했다.그녀를 하루라도 빨리 만나기 위해, 그녀의 곁으로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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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78화

심성빈은 한참 후에야 휴대폰을 천천히 뒤집어 책상 위에 놓았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통유리창 앞으로 다가섰다. 텅 빈 사무실을 등진 채 정장 안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 입에 한 대 물고 고개 숙여 불을 붙였다.가느다란 손가락 사이에서 붉은 불꽃이 희미하게 타올랐다. 이내 옅은 푸른 연기가 피어올라 그의 선명한 윤곽을 흐릿하게 만들었다.“하나야.”형언할 수 없는 씁쓸함을 담아 마음속으로 나직이 되뇌었다.“제발 나 좀 기다려줄래? 길어야... 딱 한 달이야. 이쪽 장애물을 깨끗이 치워버리는 대로 즉시 제연으로 널 찾아갈게. 그러니까 아무와도 약속하지 말고 부디 나를 기다려줘...”그는 송하나가 얼마나 아름다운 여인인지 너무 잘 안다.그녀를 진정 알고 있는 자라면 그 누구든 끌리지 않을 이유가 없다.기다림은 지독히도 길었고 마침내 그녀의 이혼 소식을 접했다. 겨우 다른 이들과 같은 출발선에 설 수 있는, 공정한 경쟁의 기회를 얻었다고 희망했다.혹 자신이 너무 늦을까 봐 늘 초조했다. 그녀에게 다가가기도 전에 다른 남자의 손을 잡고 떠나버릴까 봐 두려웠다.다음 날, 제연시.송하나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겨울의 햇살은 이미 커튼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마루 위에 몇 줄기 밝은 빛을 그리고 있었다.그녀는 나른하게 몸을 뒤척이며 졸린 눈을 비비고는 밤새 무음으로 설정해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화면이 켜지자 차정원이 보낸 모닝 인사가 한눈에 들어왔다.[깼어, 하나야?][어젯밤에 늦게 잤을 테니 아침은 배달시켜뒀어. 문 앞에 놓았으니 꼭 챙겨 먹어.]글귀 하나하나에 묻어나는 다정함과 배려심에 송하나의 가슴에는 온기가 피어올랐다.[고마워요. 방금 일어났어요.]답장을 보낸 후에야 침대에서 일어나는 그녀였다.방 문을 열자 아니나 다를까 문 옆 선반에 크림색 보온 백이 놓여 있었다.봉투를 열어보니 김이 솔솔 나는 해산물 죽 향이 확 풍겨왔다. 수정처럼 투명한 새우 딤섬과 정갈한 밑반찬 몇 가지도 함께였다. 모두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다.그녀는 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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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79화

뭇사람들과 한참 더 얘기를 나눈 뒤, 송하나는 작별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떴다.실은 제연시에 온 이후로 안다미와 딱 한 번 쇼핑한 것 외에 외출다운 외출을 하지 못했다.마침 연휴에 맡았던 연구 업무까지 일단락되었으니 기분 전환할 겸 혼자 바람 쐬러 나가보고 싶었다.신정 연휴는 단연 나들이 인파가 몰리는 시기라 이름난 관광지는 발 디딜 틈도 없을 것이다.송하나는 사람이 붐비는 곳을 좋아하지 않는다. 전에 우연히 저장해 두었던 여행 가이드 정보를 따라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아 발길 뜸한 고즈넉한 옛 정원을 찾아 나섰다.이곳은 한때 왕가의 별궁이었다고 한다.비록 이름난 황실 정원들만큼 웅장하진 않아도 정원 안의 정자와 누각, 하늘을 찌를 듯한 아름드리나무들은 오랜 세월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었다.겨울의 정원은 인적이 드물어 다소 쓸쓸해 보였지만 그 나름대로 맑고 고요한 운치를 풍겼다.그녀는 걸음을 늦추고 구불구불한 오솔길을 따라 느긋하게 걸었다.가끔 휴대폰을 들어 눈앞의 아름다운 풍경을 카메라에 담기도 했다.어느덧 걷고 또 걸어 정원 깊숙한 곳에 있는 넓은 호숫가에 다다랐다.호수 표면은 이미 꽁꽁 얼어붙었고 그 위로 쏟아지는 햇살은 푸르스름한 빛으로 반짝였다.송하나가 아름다운 풍경에 잠시 시선을 빼앗긴 그때, 문득 정적을 찢는 혼비백산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그녀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멀지 않은 얼음판 위에서 몇몇 어린아이들이 천진난만하게 장난치며 놀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그중 한 남자아이가 발밑의 얼음을 밟는 순간, 쨍그랑 소리와 함께 얼음 구멍 속으로 빠져버렸다!다른 아이들은 너무 놀라 자빠질 듯이 허둥거리며 기어서 언덕 쪽으로 달아났다.아이들은 물속에서 버둥거리는 친구를 보며 두려움에 울부짖기만 할 뿐 차가운 얼음판 위로는 단 한 명도 다시 발을 디딜 엄두를 내지 못했다.이 광경을 본 송하나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곧장 달려갔다.“누나! 살려주세요! 우주가 저 안에 빠졌어요!”아이들은 그녀를 보자 구원의 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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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80화

그녀는 이를 악물고 구명 튜브의 부력을 이용해 뻣뻣해진 팔로 얼음물을 저으며 머리까지 거의 잠긴 아이를 향해 조금씩 움직여갔다.그 시각, 정원의 다른 쪽에서 최시훈이 한창 어머니를 모시고 한적한 별채 앞에 도착했다.이곳에는 도사 같은 분이 숨어 사는데 이분은 일의 귀추를 점치는 데 묘한 능력이 있었다.제연시 상류층 인사들은 이분을 만나기 위해 줄을 섰지만 정작 그는 별 볼 일 없는 외부인을 냉정하게 돌려보내는 편이었다.최시훈의 어머니 황윤미는 그분의 안목을 완전히 신뢰했다. 매년 한두 번씩은 꼭꼭 찾아와 인생의 길흉을 여쭙곤 했다.이번에는 특별히 아들 문제로 걸음 하신 참이었다. 장래 사업이 어떨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아직 소식이 감감한 녀석의 혼사가 가장 큰 걱정이었다.최시훈은 무신론자라 이런 것들을 안 믿지만, 어머니의 고집을 못 이기고 아들로서 마지못해 함께 왔다.어머니를 입구까지 모셔다드리고 정정한 모습의 거사와 정겹게 인사를 나누며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수행 비서와 함께 멀지 않은 곳에서 천천히 시간을 보냈다.별안간 어디선가 흐릿하게 도와달라고 애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비서가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국장님, 저기 누군가... 살려달라고 소리치는 것 같은데요?”최시훈은 대뜸 걸음을 멈췄다.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가보자.”두 사람은 소리 나는 쪽으로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호수에 가까워질수록 목소리는 더 선명하게 들려왔다.도착해 보니 아이들 때문에 물가에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다급하게 손가락질만 할 뿐 차마 뛰어들지 못하고 망설였다.얼어붙은 호수 정중앙에 펼쳐진 모습은 보는 이의 숨통을 끊어놓을 듯 처참했다.물에 빠진 아이가 속절없이 가라앉았다 떠오르기를 반복했고 그 곁에서 가녀린 몸매의 여인이 구명 튜브를 꽉 붙잡고 사력을 다해 허우적거리며 아이에게 다가가려 애썼다.하지만 그녀 역시 이미 기력이 다한 듯 한 번 물을 밀어낼 때마다 버거운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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