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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91화

전용기는 짙은 구름층을 뚫고 긴 항로 끝에 마침내 제연 상공에 도달했다.어느덧 해질 녁, 비행기가 활주로에 닿자마자 심성빈은 숨을 고를 새도 없이 곧장 병원으로 달려갔다.겨우 그녀가 있는 병실을 찾아냈을 때, 노크할 겨를도 없이 값비싼 시계가 채워진 손으로 문을 열고 들어섰다. 남자의 손은 여전히 마디가 선명하고 깔끔할 따름이었다.부드러운 조명이 드리워진 병실 안, 송하나는 막 잠이 든 듯 침대에 누워 있었다.창백한 안색 아래 긴 속눈썹이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가녀린 손이 이불 위로 힘없이 놓여 있었는데 손등에 꽂힌 링거 바늘과 밴드가 유독 거슬렸다. 또한, 이불 속에 감춰진 몸은 이상하리만큼 여려 보였다.그런 그녀의 모습을 본 심성빈의 눈빛에는 형언할 수 없는 안쓰러움과 뒤늦은 공포가 일렁였다.그의 등장은 너무나 갑작스러웠고 내뿜는 아우라 또한 지나치게 압도적이었다. 병실 안의 공기가 한순간 얼어붙는 듯했다.차정원은 거의 본능적으로 침대 옆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은근하게 반걸음 앞으로 나서더니 병상과 문 사이에 단호하게 자리를 잡으며 심성빈의 시선을 막아섰다. 그 자세는 미묘하지만 엄연한 보호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얼굴에는 언제나처럼 온화한 기색이 감돌았으나 렌즈 너머의 시선은 다가오는 상대를 고요하게 응시하며 명확한 ‘소유권’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심 대표님께서 귀한 걸음을 하셨네요. 하나 방금 잠들었어요. 의사 선생님께서 절대적인 안정을 취해야 한다며 특별히 당부하셔서 지금은 면회가 어려울 것 같네요.”심성빈은 마지못해 송하나에게서 시선을 떼고 차정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입꼬리를 씩 끌어올렸지만, 미소가 탐탁지 않았다.“괜찮아요. 아무 소리 없이 하나 깨어날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면 돼요.”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병상 옆의 다른 의자를 향해 발을 옮기려 했다.다만 차정원은 그 자리에 못 박은 듯 명백한 거절 의사를 드러냈다.“장거리 비행으로 지쳤을 텐데 거처로 가서 푹 쉬셔야죠. 하나 언제 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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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92화

결국, 이 팽팽한 침묵의 대치는 교착 상태로 끝이 났다.심성빈은 망설임 없이 침대 끝 의자를 끌어당겨 자리에 앉았고 시선은 다시 고요하게 잠든 송하나의 얼굴로 향했다.차정원은 씁쓸한 기색이 역력한 눈빛으로 그를 잠시 응시했지만 결국 그녀를 깨울까 염려하여 침묵 속에 제자리로 돌아갔다.그렇게 병실 안에는 기묘한 균형이 자리 잡았다.송하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평온하게 잠들었고 그녀의 양옆에는 장관을 이뤘다. 한쪽에는 온화하고 우아하면서도 차가운 표정의 차정원이, 다른 한쪽에는 먼지 묻은 옷차림 그대로 위압적인 기세를 뿜어내는 심성빈이 앉아 있었다.이건 마치 두 명의 침묵하는 기사가 하나의 성채를 수호하는 형국이었다.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칠 때마다 소리 없이 천둥이 번쩍이는 것처럼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얼마나 지났을까. 송하나의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천천히 눈을 떴다.시야가 아직 흐릿했지만 무심코 몸을 움직이려 할 때 양옆에 앉아서 동시에 자신에게 집중하고 있는 두 남자를 보게 됐다.그녀는 완전히 얼어붙었고 잠이 확 달아나는 기분이었다. 이어서 저도 모르게 깊은숨을 들이켰다.“두 분 지금...”“하나야, 깼어? 배고프지? 내가 뭐라도 좀 시켜 올게.”차정원이 즉시 몸을 기울이며 한없이 다정한 목소리로 바뀌었다.거의 동시에 심성빈의 목소리도 흘러나왔다.“하나야, 좀 어때? 아직도 많이 아파? 의사 불러서 다시 검진받아 볼까?”두 목소리가 동시에 귓가에 쏟아지자 송하나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움 그 자체였다.두 남자를 번갈아 보다가 끝내 심성빈에게 멈추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대표님이 왜 여기 계세요? 창현 삼촌이 분명 해외에 계신다고 했는데...”“너 사고 난 영상 보고 바로 달려왔어.”심성빈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그의 시선은 송하나에게 단단하게 고정되었는데 눈빛 속에 소용돌이치는 감정의 파도가 너무나 강렬해서 그녀는 차마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네가 무사한 걸 두 눈으로 확인하지 않는 한 마음을 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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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93화

결국, 차정원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여전히 우아하고 침착한 제스처로 외투를 챙기고 송하나를 향해 나직이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 금방 사 올 테니 푹 쉬고 있어. 너무 오래 말하지 말고.”남자는 어두운 눈길로 심성빈을 힐긋 쳐다본 뒤 병실을 나섰다.문이 가볍게 닫히자 실내에 순간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심성빈도 방금 차정원과 대치했을 때의 날카로움이 사그라들며 서서히 마음을 가라앉혔다.그는 자신의 행동이 다소 무모했음을 깨달은 듯했다.목소리는 아까보다 한층 낮아졌고 희미한 씁쓸함이 묻어났다.“미안해, 하나야. 아까는... 쉬는데 방해됐지?”송하나는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아니요. 멀리서 일부러 날 보러 와줘서 고마워요, 성빈 씨.”그녀는 부드러운 말투로 대답하며 시선은 평온하게 남자를 향했다.“마침 잘 됐어요. 성빈 씨한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거든요.”심성빈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그녀가 이토록 진중하게 대화를 시작하니 이어진 말들이 결코 자신이 듣고 싶은 얘기가 아닐 거란 예감이 들었다.심성빈은 대답 대신 침을 꿀꺽 삼키곤 자리에서 일어나 탁자로 향했다. 그는 다소 굳은 몸짓으로 온수를 반 컵 따랐다.컵 온도를 신중히 확인한 뒤에야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건넸다.“말을 꽤 많이 했으니 물부터 마셔.”심성빈은 애써 침착한 척, 심지어 더 자상하게 행동하려 노력했다.하지만 물컵을 건네는 순간 손끝에서 느껴진 미세한 떨림이 평정심 아래의 휘몰아치는 폭풍을 여실히 드러냈다.송하나는 물을 받아 조용히 한 모금 마셨다.컵을 다시 침대 옆 탁자에 내려놓자마자 남자가 또다시 재빨리 입을 열었다.“과일 좀 깎아줄까? 사과라도...”“성빈 씨.”과일 바구니를 훑어볼 때 송하나가 부드럽지만 단호한 어투로 말을 잘랐다.“일단 앉아요.”남자가 지금 이 상황을 회피하는 걸 너무 잘 알지만 언젠가는 해야 할 이야기였다.심성빈은 온몸이 미세하게 굳어버렸다.그는 천천히 의자에 다시 앉아 두 손을 무릎 위에 포개고 손가락 마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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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94화

병실 안에 싸늘한 정적이 흘렀다.모든 조급함과 변명, 놓치고 싶지 않은 미련이 그녀의 말 한마디에 부질없게 돼버렸다.심성빈은 입술을 달싹였지만, 목이 바짝 타들어 가서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뜨니 눈가에 핏발이 서 있었다.“하나야.”가슴 깊은 곳에서 억지로 쥐어 짜낸 듯 목소리가 한없이 갈라졌다.“난 말이야, 다른 누군가의 꼬리표가 아닌 독립된 인간, 널 사랑하는 남자 심성빈일 뿐이야... 그래, 알아. 강현이 네게 얼마나 쓰라린 추억을 안겨줬는지. 상처투성이가 된 결혼생활까지도 전부 과거에 묻어두면 돼. 앞으로 내 사업이고 삶의 중심이고 전부 제연으로 돌릴 수 있어. 그리고 강우랑은... 얼마든지 절교할 수도 있어.”송하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부터 직감이 왔다. 이강우와의 20년 넘는 우정은 아마도 끝장날 터였다.그녀에게 다가설 수 있는 단 한 줄기 희망이라도 있다면 사업이든 인맥이든 기꺼이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송하나의 손끝이 미세하게 움츠러들었다. 이 남자가 이렇게까지 집요하게 굴 줄은 예상치도 못했다.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남자를 말렸다.“성빈 씨, 이러지 말아요... 나 때문에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어요. 성빈 씨처럼 훌륭하고 정직한 사람은 따르는 여자들이 엄청 많을 거예요. 앞으로 서로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을 거예요...”“널 위한다면 그럴 필요 있어!”심성빈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눈동자가 섬뜩할 정도로 충혈되었고 억눌렀던 고통이 마침내 폭발하며 목소리가 다 떨렸다.“그 모든 걸 잃는 것보다... 평생, 네 곁에 설 자격조차 없을까 봐 그게 더 두려워.”송하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는 숨길 수 없는 고통과 절망적인 사랑이 가득했다.“하나야, 난 평생 누군가에게 이렇게 마음을 쏟아본 적도 없고 이성을 잃어본 적도 없어. 나는 쉽게 마음을 주지 않지만 한 번 주면 평생 가. 누가 뭐래도 꿈쩍하지 않고 끝까지 안 놔줘, 아니 못 놔줘...”“남은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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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95화

“알았어요.”심성빈의 팽팽했던 긴장감이 드디어 조금 풀렸지만, 그와 동시에 조심스러운 자제가 배어 나왔다.“그럼 이만 푹 쉬어.”나지막이 말을 마치고 그녀의 얼굴에서 시선을 뗐다. 한 번 더 쳐다보는 것도 고문일 것 같아 감히 더는 머물지 못했다.심성빈이 몸을 돌려 문으로 향했다.걸음걸이가 휘청거리지는 않았으나 내딛는 발자국이 엄청 묵직했다.차가운 문고리에 손을 얹자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이 쫙 들어갔다. 잠시 멈칫하던 그는 결국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부드럽게 닫히는 병실 문과 함께 으스러질 듯한 남자의 마음도 차단되었다.심성빈은 벽에 기대 눈을 질끈 감고 가슴속을 휘젓는 먹먹한 고통과 공허함을 가라앉히려 애썼다.아직 이 맺힌 숨을 천천히 내뱉지도 못했는데 문득 고요한 시선이 그에게 꽂혔다.심성빈은 화들짝 놀라 두 눈을 떴다.복도 저편 창가에 차정원이 조용히 서 있었다.그는 방금 사 온 죽을 들고 있었고 다른 한 손은 코트 주머니에 대충 찔러 넣은 채 곧은 자세로 이쪽을 바라보았다.자세를 보니 저기 서서 꽤 오랫동안 기다린 모양이다.두 남자는 몇 걸음 간격을 두고 침묵 속에 서로를 응시했다.결국, 먼저 움직인 것은 차정원이었다.그는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성큼성큼 걸어와 심성빈과 딱 한 걸음 떨어진 곳에 멈춰 섰다.남자의 일그러진 얼굴에 시선이 머물자 안경 너머의 눈빛이 한없이 짙어지고 좀 전까지 보였던 방어 태세나 거부감마저 조금 옅어진 듯했다.“심 대표님, 이야기 다 나누셨어요?”심성빈은 입꼬리를 끌어당겼지만, 그 미소가 실로 차가웠다.“차 변호사님, 타이밍 하나는 기가 막히네요.”“식은 죽 먹으면 속 버리잖아요.”차정원은 들고 있던 봉투를 가볍게 흔들었다.“그럼 이만 가보시죠, 심 대표님. 멀리 배웅 안 합니다.”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심성빈의 곁을 지나 병실로 들어가려 했다.서로 어깨를 스치는 순간, 심성빈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고 애써 억눌렀던 짜증과 고통이 또다시 솟구쳤다.그는 옆으로 한 걸음 나서며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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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96화

심성빈은 고맙다는 말에도 꿈쩍하지 않았다. 오히려 날카롭고 냉소적인 비웃음이 입가에 걸렸다.그의 시선이 차정원에게 꽂혔고 말투에도 노골적인 조소가 담겨 있었다.“차정원 씨, 뭔가 착각한 모양인데 당신 아직 아무 명분 없어. 끽해야 ‘테스트 기간’인데 대체 무슨 자격으로 하나 대신 나한테 고맙다고 하는 거지?”그 말을 끝으로 심성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차정원은 꿈쩍 않고 심성빈의 그림자가 모퉁이 너머로 완전히 자취를 감출 때까지 텅 빈 시선으로 응시할 뿐이었다.안경을 밀어 올렸지만 날카로운 질책에 분노하는 기색은 없었다.솔직히 말해서 심성빈이... 너무 밉지는 않았다.라이벌 관계만 아니었다면 둘은 좋은 친구 사이나 협력자가 될 수 있었을 텐데 아쉽게도 세상에 만약이란 가정은 없다.차정원은 죽을 챙겨 들고 살며시 병실 문을 열었다.안에서 송하나는 침대에 멍하니 기대고 미간을 약간 찌푸린 채 하얀 얼굴 위로 옅은 허망함이 감돌았다.심성빈이 고통으로 눈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던 순간을 떠올리자 괜스레 마음이 저릿해졌다.몇 번이고 자신을 위험에서 벗어나게 해준 남자이지만 반드시 거절의 말을 꺼내야 했다.질질 끄는 것보단 짧고 단호하게 끊어내는 것이 서로에게 좋은 법이니까.남자의 눈에 담긴 희망의 빛이 처참하게 부서지는 순간, 송하나는 차오르는 죄책감과 안쓰러움을 쉽게 가라앉히지 못했다.복잡한 감정에 휩싸여서 차정원이 언제 들어왔는지조차 알아채지 못했다.심성빈이 병실을 나올 때부터 차정원은 짐작이 갔다.그녀가 둘의 관계를 완전히 정리했다는 것을 말이다.송하나는 겉으로 차갑고 자제하는 듯 보여도 속은 너무나 여리고 착한 사람이다.현명한 선택을 했지만, 그로 인해 상대가 마음 아파할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시큰거려 견디기 힘들었다.차정원은 조용히 침대 맡으로 다가가 죽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뚜껑을 열자 은은한 죽 향이 병실 안에 퍼져나갔고 송하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왔어요, 정원 씨.”“죽 사 왔어. 식기 전에 얼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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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97화

“이... 대표님?”정신을 차린 이강우는 황급히 휴대폰을 간호사에게 돌려주며 잠긴 목소리로 사과했다.“죄송해요.”그는 몸을 돌려 곧바로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하나가 어제 제연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당장 조사해! 세부 사항까지 낱낱이 알아 와!”기다림의 매 순간은 숨 막힐 듯 길게 느껴지는 법.다행히 비서가 금세 도착하여 목소리를 낮추고 황급히 보고했다.“대표님, 확인했습니다. 송하나 씨가 어제 확실히 제연에서 물에 빠진 아이를 구했는데 본인도... 물에 들어갔습니다. 다행히 제때 구조되어 병원 치료 중이고 현재 몸 상태는 큰 이상 없습니다. 차정원 변호사님이 줄곧 병원에서 간호하고 있어요.”앞부분은 듣는 내내 심장이 옥죄어왔다.송하나가 물을 얼마나 무서워하는지 누구보다 잘 아니까.그 추운 날씨에 감히 물속에 뛰어들어 사람을 구하다니.하지만 뒷부분은 명치 끝에 주먹을 맞은 것처럼 둔탁한 통증이 전해졌다.그의 아내였던 송하나가 지금은 다른 남자의 보살핌을 받고 있다니...뒤늦게 밀려온 후회와 무력감에 이강우는 숨이 턱턱 막혔다.바로 그때 중환자실 문이 열리고 간호사가 급히 걸어 나왔다.“대표님, 환자분 깨셨어요. 활력 징후가 정상 범위이니 일반 병실로 이동 가능합니다!”이강우는 끓어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 곧장 따라 들어갔다.VIP 병실 안.홍경자는 병상에 힘없이 누워 있었다. 막 의식을 회복한 탓에 시선은 아직 초점이 풀린 상태였다.이강우는 침대 옆 의자에 앉아 할머니의 마른 손을 꼭 잡으며 나직이 물었다.“할머니, 괜찮으세요? 어디 더 불편한 데는 없으세요?”홍경자의 시선이 천천히 그의 얼굴에 머물렀다.“할미가 늙어서 이제 쓸모가 없구나... 또 우리 강우 걱정하게 했네...”그녀는 습관처럼 이강우의 등 뒤를 바라보며 나지막이 물었다.“하나는 오늘 왜 안 왔어?”별안간 할머니의 어조가 날카롭게 바뀌었다.“망할 놈! 또 하나 괴롭히고 화나게 했지?”연로하신 할머니의 머릿속에 자리 잡은 관념은 확고했다. 몸이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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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98화

어둠이 드리워진 밤, 최시훈이 혼자 차를 몰아 직장을 빠져나왔다.어제 물에 뛰어들어 사람을 구한 여파였을까. 뼛속까지 파고든 냉기가 감기 기운처럼 맴돌았지만 일하는 데 지장은 없었다.그는 오늘 종일 사무실에서 당직을 섰다.밖에 나올 때 비서를 대동하지 않았고 운전기사도 부르지 않은 채 목적지 없이 혼자 차를 몰았다.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덧 송하나가 입원한 병원 근처 길가에 멈춰 서 있었다.그녀의 몸 상태를 보러 올라갈까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시기상조임을 깨달았다.한밤중에 무슨 명분으로 올라간다는 말인가?상사로서? 생명의 은인으로서? 아니면 그 이상의 관계라도 되는 것처럼?운전석에서 잠시 침묵하는 이 남자, 차창에 비친 무표정한 옆 모습, 결국 그는 시동을 걸어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마치 이곳에 온 적도 없는 것처럼.30분 뒤, 최시훈은 본가에 도착했다.거실에는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고 황윤미와 진서영이 소파에 앉아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최시훈이 들어오자 진서영이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며 단아한 미소를 지었다.“오빠, 왔어요?”“응.”최시훈은 덤덤하게 대답하곤 코트를 벗어 가정부에게 건넸다.“시간이 늦었으니 저도 이만 돌아가 봐야겠네요.”진서영은 적절한 타이밍에 황윤미를 향해 다소곳하게 말했다.“어머님도 일찍 쉬세요.”이에 황윤미가 만류했다.“벌써 가게? 주방에 전복죽 끓여놨는데 그거 먹고 가.”“아니요, 어머님. 번거롭게 그럴 필요 없어요.”진서영은 사양했다.그녀의 시선이 무심코 최시훈에게 닿았다. 남자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눈가에 희미한 실망감이 스쳤다.하지만 여전히 단정한 미소를 유지하며 말을 이어갔다.“시훈 오빠랑 어머님 모두 편히 쉬세요.”황윤미는 아들을 곁눈질하며 그녀를 배웅하라고 신호를 보냈다.그러나 최시훈은 아무것도 못 본 척 계단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진서영은 입술을 앙다물고 가방을 챙겨서 예의 바르게 작별 인사를 한 뒤 자리를 떴다.문이 닫히자마자 황윤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목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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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99화

거실이 삽시간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최시훈은 천천히 몸을 돌리고 어머니의 매서운 눈빛을 마주하며 몇 초간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별 사이 아니에요. 그 아이는 연구 센터의 부연구원이자 제 부하 직원이에요. 어제 그 상황에 어떤 동료였든 저는 다 구했을 겁니다.”“부하 직원이라고?”황윤미는 당연히 믿지 않는 눈치였다.그녀는 몇 걸음 다가와 아들의 눈을 뚫어지라 응시하며 감정의 동요를 캐치하려 했다.“그런 뻔한 변명으로 얼버무릴 생각 마. 넌 내 아들이야. 남들은 몰라도 나까지 모를까? 네가 언제부터 부하 직원한테 마음 썼다고 그래? 한겨울에 제 몸 내던져서 얼음물에 뛰어들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 여자를 안고 병원 가는 게 말이 돼? 이게 단지 상사가 부하를 챙기는 방식이라고? 너라면 그 말을 믿겠니?”황윤미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더니 밤잠을 설치게 만든 바로 그 질문을 내던졌다.“너 혹시... 그 여자아이 좋아하게 된 거니?”순간 공기 속에 팽팽한 긴장감이 맴돌았다.최시훈은 사생활에 간섭받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고 특히 결혼까지 정해준 대로 진행하는 게 너무 끔찍했다.엄마의 노골적인 추궁 앞에서 그도 더는 피하고 싶지 않았다.고개를 들어 어머니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며 또렷한 발음으로 아주 차분하게 한 글자를 뱉어냈다.“네.”황윤미는 마치 믿을 수 없는 대답이라도 들은 것처럼 동공이 아찔거렸다.늘 침착하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아들이 이토록 서슴없이 인정하다니!황윤미는 제대로 충격에 휩싸였다.놀라움이 가신 뒤, 격한 반대의 물결이 일렁였다.“안 돼!”그녀가 소리치며 단호하게 부정했다.“절대 안 돼! 그런 생각이라면 당장 접어둬! 내가 허락 못 해. 그런 여자는 우리 최씨 가문에 발을 들일 수 없어.”최시훈이 마침내 미간을 구기며 음침한 눈길로 되물었다.“왜요? 이유가 뭐죠?”청초한 미모에 업계 최고의 연구 능력, 지혜롭고 강인한 성품과 선한 마음까지 지닌 그녀가 대체 왜 이런 취급을 당해야 한다는 말인가?“이유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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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00화

“어림없는 소리! 절대 그렇게 안 둬. 내가 막을 거야, 내가!”송하나가 입원해 있는 며칠 동안, 차정원은 한시도 그녀 곁을 떠나지 않았다.미룰 수 있는 업무는 전부 미루었고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중요한 일들은 그녀가 잠시 쉬는 틈을 타 병실 밖에서 조용히 처리했다.그녀가 눈치채지 못하게 모든 일을 완벽하고 세밀하게 처리해나갔다.하지만 전화를 받기 위해 자리를 뜨는 횟수가 점점 잦아졌고 목소리를 낮춰도 바쁘고 긴박한 기색은 문틈으로 고스란히 전해졌다.송하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이 남자가 자신 때문에 얼마나 귀한 시간을 허비하는지 깨달았다.그녀는 차정원의 업무에 방해가 되고 싶지 않았고 연구 센터의 진척을 늦추고 싶지도 않았다.몸 상태가 조금 호전되자마자 차정원과 의사에게 퇴원 의사를 밝혔다.차정원은 며칠 더 병원에서 요양하기를 바랐지만, 그녀의 태도가 워낙 단호했고 의사도 큰 문제가 없다고 하니 결국 고집을 꺾고 퇴원을 동의했다.퇴원 당일.차정원이 아래층에서 마지막 수속을 밟는 동안 송하나는 병실에서 얼마 되지도 않는 개인 물품을 정리했다.문득 누군가 병실 문을 조용히 노크했다.“들어오세요.”간호사가 마지막으로 검사하러 들어온 줄 알았는데 문이 열리자 최시훈의 훤칠한 실루엣이 눈앞에 나타났다.깔끔한 핏의 짙은 색 수제 코트를 입어서 훤칠한 몸매가 더욱 돋보였고 얼굴에는 늘 그렇듯 무심한 표정이 감돌았다. 그의 손에는 평범한 크라프트지 봉투가 들려 있었다.“국장님께서 여긴 어쩐 일로...”송하나는 약간 의외라는 듯 수중의 물건을 내려놓고 똑바로 섰다.“퇴직하신 옛 상사분 병문안 왔다가 잠깐 들렀어.”덤덤한 목소리에서 어떤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송하나가 환자복 대신 자신의 옷으로 갈아입은 모습에 남자가 담담하게 물었다.“퇴원하는 거야?”이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이제 다 나았어요. 계속 병원에만 있으려니 답답해서요.”최시훈은 그녀의 안색이 괜찮아진 것을 확인하고는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이때 송하나가 그를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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