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이혼 얘기에 미쳐 버린 내 남편: Chapter 111 - Chapter 120

146 Chapters

제111화

“할머니, 어떻게 오셨어요?”강덕순은 못마땅하다는 듯 유한을 노려봤다.“네가 네 아내를 안 챙긴다고, 이 늙은이가 손주며느리 챙기는 것도 못 보겠다는 거냐?”입술을 굳게 다문 채 유한의 시선은 다시 병상으로 향했다. 리은의 까만 정수리를 보는 순간, 가슴 안쪽에 뭔가 걸린 것처럼 그대로 막혀 버렸다.토해내지도 못하고 다시 삼켜야 하는 기분. 이게 편할 리가 없었다.“연세도 있으신데, 혼자 이렇게 다니지 마세요. 위험하잖아요.”“흥, 내가 살 날이 얼마 안 남았다는 건 알긴 아는 모양이지?”“할머니!”“할머니라고 부르지도 마. 나 그런 손주 둔 적 없어. 진짜로 이 늙은이를 괴롭히고 싶지 않으면, 나 속 뒤집는 짓 좀 그만해. 말로만 걱정하면 뭐 하겠어?”유한은 반박하지 않았다. 강덕순의 말이 끝난 뒤에야 낮게 말했다.“사람 보내서 모셔다 드릴게요.”“뭐? 너 지금 무슨 생각이야?”“제가 뭘요?” 유한은 답답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뭐긴 뭐야. 방에 들어올 때 살기 어린 표정이던데, 너 지금 뭐 하려고 온 거야?”“저는...”유한은 좀처럼 말을 잇지 못했다.유한의 말문을 막히게 만든 여자는 두 사람뿐이다.그런데 하필이면 그 두 사람이 지금 같은 공간에 있었다.그제야 고개를 든 리은이 무표정하게 유한을 힐끗 보고 강덕순을 향해 말했다.“할머니, 저랑도 한참 계셨으니까 이제 돌아가서 쉬세요.”강덕순은 리은을 바라보다가 손을 가볍게 두드리며 달랬다.“그래, 우리 리은이 말을 들으마. 근데 겁낼 건 없어. 이 녀석이 또 널 괴롭히면 할머니가 대신 혼내 줄 테니까.”리은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할머니.”“착하지. 푹 쉬어. 루이는 내가 데리고 있으니까 신경 쓰지 말고.”“네. 조심해서 가세요, 할머니.”“그래, 그래!”병실을 나서다 말고 유한 앞에서 일부러 멈춰 선 강덕순이 위아래로 유한을 한 번 훑어본 뒤 말했다.“너, 나하고 얘기 좀 하게 밖으로 나와.”유한은 리은을 힐끗 봤다. 시선을 느낀 리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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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2화

리은은 강덕순과 유한이 모두 병실을 나간 뒤 혼자 화장실에 다녀왔다.그리고 화장실 문을 열고 나오면서, 바로 앞에 서 있는 유한을 보자 걸음을 멈췄다.짧은 하루 동안 두 번이나 나타난 유한을 보자, 더는 참지 못하고 리은이 물었다.“안 바빠?”“나 보기 싫어?”유한을 보지도 않은 리은이 고개를 돌려 병상 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이렇게 자주 나타나는 거, 나 익숙하지 않아.”리은의 말은 사실이었다.몇 년 전까지만 해도 유한을 더 자주 보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어느새 일주일에 몇 번도 얼굴을 보지 못하는 생활에 익숙해졌다.그게 리은의 일상이었다.그런데 최근 들어 두 사람이 마주치는 횟수는 분명히 많아졌다.유한은 굳은 표정으로 비웃듯 나지막하게 말했다.“그럼 지금부터 익숙해져.”침대에 앉으려던 리은은 그 말에 멈칫했다가, 고개를 돌려 유한을 바라봤다.‘무슨 뜻이지?’“나랑 이혼할 생각... 없는 거야?”유한의 시선이 리은에게 깊게 내려앉았다. 어둡고 깊은 눈동자는 끝이 보이지 않는 구덩이 같았다.“이 결혼은 네가 하고 싶다고 하고, 네가 원한다고 끝낼 수 있는 게 아니야. 내 말을 아직도 못 알아들었나 보네.”리은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불만이 있으면, 아니면 다른 생각이 있으면 말해. 뭐든.”리은이 끝까지 이혼 이야기에 집착하는 모습에 유한의 표정이 다시 차갑게 가라앉았다.“말이 안 통하네. 난 이혼 안 해.”가슴 속이 꽉 막힌 느낌이었지만, 리은에게는 방법이 없었다.유한이 서명하지 않으면 이혼은 성립되지 않으니까.“하지만 난 이혼하고 싶어.”유한의 입꼬리가 비틀리듯 올라갔다. 조롱이 가득 담긴 웃음이었다.“그래? 이번엔 또 누굴 시켜서 나를 속이려고? 이혼합의서에 사인하게?”리은은 그 말에 굳어 버렸다.“너... 알고 있었어?”‘설마 계획이 들킨 건가?’‘허인영이 들킨 거야?’리은이 부정하지 않는 모습을 보자, 가라앉았던 유한의 분노가 다시 타올랐다. 유한은 다가와 리은의 턱을 거칠게 붙잡았다.“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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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3화

리은의 눈에 서린 불안과 공포를 본 순간, 유한은 잠시 멈칫했다.“나...”말을 잇기도 전에 리은의 손이 올라갔다.찰싹- 소리와 함께 유한의 뺨이 돌아갔다. 힘껏 유한을 밀쳐내고 침대 머리맡으로 물러난 리은은, 환자복 깃을 움켜쥔 채 경계하는 눈길로 유한을 노려봤다.“다시 손대면 바로 경찰 부를 거야!”유한의 표정이 단번에 굳어졌다. 차갑게 가라앉은 시선으로 리은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화를 억누른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말했다.“손대려고 한 거 아니야.”리은은 시선을 피한 채 담담하게 말했다.“나가. 지금 너 얼굴 보기 싫어.”유한이 여전히 리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을 때 병실 문이 열렸다.간호사가 연고 하나를 들고 들어왔다.“이제 약 바를 시간이에요.”잠시 리은을 보면서 간호사가 물었다.“도와드릴까요?”리은은 급히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괜찮아요. 감사합니다.”간호사는 유한을 한 번 흘끗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보호자가 있는 경우 보호자가 도와주는 일도 흔했다.간호사는 연고와 면봉을 침대 옆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먼저 소독하고 바르세요.”리은은 고개를 끄덕였다.간호사가 나가자마자 리은이 다시 말했다.“이제 가도 돼.”유한은 테이블 위의 연고를 힐끗 보았다. 어디에 쓰는 약인지 모를 리가 없었다.“혼자 바를 거야?”리은이 곧바로 미간을 찌푸렸다.“네가 뭔 상관이야. 빨리 나가.”리은을 잠시 바라보던 유한이 다가가서 연고를 집으려고 했다.그 의도를 알아차린 리은은 재빨리 연고를 움켜쥐었다.“뭐 하려고?”리은의 극단적인 경계와 거부하는 모습을 보면서 유한이 조용히 말했다.“약 발라주려고.”리은은 즉각 거절했다.“필요 없어. 내가 알아서 해.”‘수술한 것도 아니고, 손이 없는 것도 아니야.’‘이 정도는 혼자 충분히 할 수 있어. 누구 도움도 필요 없어.’리은은 손을 들어 병실 문을 가리켰다.“당장 나가 줘.”“보이긴 해?”손에 쥔 튜브가 일그러질 정도로 리은은 연고를 꽉 움켜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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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4화

다음 날, 광윤이 직접 병원을 찾았다.“몸은 좀 괜찮아졌어요?”“네, 괜찮아요. 며칠 수액 맞고 염증만 가라앉으면 퇴원해도 된다고 하셨어요.”“무리하지 말고 푹 쉬어요. 출근은 급하지 않아요.”리은은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대표님, 전에 말씀하신 큰 프로젝트 건은...”“그건 서두를 필요 없어요. 리은 씨 퇴원한 뒤에 진행해도 충분해요.”그제야 리은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알겠습니다.”광윤은 곁에 두고 온 꽃다발을 들어 올렸다.“이건 리은 씨한테 주려고 가져왔어요. 어떤 꽃을 좋아하는지 몰라서, 꽃집에 알아서 예쁘게 해 달라고 했어요.”탐스럽게 묶인 꽃다발을 본 리은의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여자라면 꽃을 싫어할 이유가 없었다.리은은 마지막으로 꽃을 받은 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감사합니다, 대표님. 꽃 정말 예쁘네요. 마음에 들어요.”“다행이네요.”그때, 비아냥 섞인 목소리가 병실 안에 울렸다.“어이쿠, 우리가 타이밍을 좀 잘못 맞췄나?”고개를 돌리자 태현의 옆에 서 있는 인영이 보였다.예고도 없이 나타난 두 사람을 본 리은은 미간을 찌푸렸다.솔직히 말해, 리은은 이 사람들과 엮이는 것 자체가 불편했다.먼저 광윤을 훑어본 인영은 다시 리은이 안고 있는 꽃다발을 바라봤다.“진리은 씨, 다른 남자가 준 꽃을 이렇게 받으셔도 되는 거야? 유한 오빠한테 미안하지도 않아?”광윤은 태현과 인영을 알고 있었다. 같은 업계, 같은 인맥 안에 있는 사람들이었다.“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요. 저는 그저...”설명하려는 광윤의 말을 리은이 손으로 막았다.그리고 인영을 향해 차분하게 물었다.“내가 이러는 게 남편에게 미안한 일이라면, 허인영 씨가 매년 다른 사람의 남편한테 꽃을 받는 건 누구한테 미안한 거지?”그동안 인영은 SNS에 수없이 자랑해 왔다.누군지 정확히 밝히지는 않았지만 다들 알고 있었다.인영이 올리는 명품 시계, 희귀 가방, 한정판 스포츠카.그리고 끊임없이 올라오는 꽃과 케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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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5화

“오늘 신태현 씨, 양치도 안 하고 나오신 것 같아서 입 헹구시라고.”태현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이어서 분노가 폭발하듯 주먹을 움켜쥔 채 팔을 들어 올렸다.“진리은, 이 X발! 나한테 물을 끼얹어? 오늘 제대로 혼나 봐야 정신 차리겠네!”그때 병실 안에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내가 누굴 혼내는 꼴을 보게 될까?”인영의 얼굴이 순간 하얗게 질리면서 급히 뒤를 돌아봤다.“아, 할... 할머니? 여긴 어떻게...”강덕순은 인영을 한 번 흘겨봤을 뿐이었다.“그건 내가 묻고 싶은데, 인영아. 네가 왜 여기 있냐?”“할머니, 저희는 진리은 씨가 아프다고 해서 걱정돼서 찾아온 거예요...”“찾아온 게 아니라 시비 걸러 온 거 아니고?”강덕순의 말은 한 치의 완곡함도 없었다.인영의 얼굴은 더 창백해졌고, 손에 쥔 가방 끈을 꽉 움켜쥐었다.“할머니, 오해세요. 정말 문병하러 온 거예요.”“내가 아직 눈이 멀진 않았다. 그리고 난 너랑 안 친해. 함부로 할머니라 부르지 말고,’사모님’이라고 불러.”인영이 억울한 표정을 짓자 태현이 곧바로 앞으로 나섰다.“할머니, 사실 인영이는...”“너, 내 손주며느리를 혼내려고 했어?”태현의 표정이 굳어졌다.“아, 아닙니다. 할머니. 제가 말을 좀 험하게 한 것뿐이지...”강덕순은 더 따질 생각이 없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인영은 이를 악물고 고개를 숙였다.시선은 리은을 향해 스쳤고, 속이 뒤집히는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대체 이 늙은이는 진리은 저 여자의 뭐가 그렇게 마음에 드는 거야.’‘나보다 나을 것도 없으면서.’“할머니, 저랑 유한 오빠도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랐고요. 저희에겐 할머니도 가족 같은 분이에요. 전 항상 존경해 왔어요.”강덕순은 고개를 기울이며 인영을 바라봤다.“그래? 그럼 호칭부터 바로 잡아야겠네.”“네...?”“네가 나를 진짜 존경한다면, 앞으로는 증조할머니라고 불러. 그리고 유한이는 네 삼촌뻘이야.”인영은 말문이 막혔다.“뭐... 뭐라고요?”“말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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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6화

강덕순의 말은 정말 한 치의 체면도 고려하지 않았다.그 바람에 리은은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예전엔 저 얼굴들을 마주할 때마다, 늘 손해 보고 억울함을 삼키는 쪽은 리은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달랐다. 강덕순에게 제대로 눌린 채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리은의 속이 다 시원했다.리은의 웃음소리에 인영과 태현의 시선이 동시에 날아왔다.인영은 지금 당장이라도 리은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그걸 겉으로 드러낼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결국 꽉 쥔 주먹을 천천히 풀며 고개를 숙였다.‘진리은, 너 두고 봐. 이렇게 오래 잘난 척하게 두진 않을 거니까.’“다들 안 가고 뭐 해? 우리랑 같이 밥이라도 먹고 갈 생각이야?”수혁이 어색하게 웃으며 앞으로 나섰다. 두 손으로 태현과 인영을 끌어당기면서도 강덕순에게는 고개를 숙여 예를 갖췄다.“할머니,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그 말을 끝으로 임수혁은 두 사람을 끌고 그대로 병실을 나갔다.문이 닫히자 리은은 숨이 트이는 느낌이 들었다. 공기마저 한결 맑아진 것 같았다.리은은 웃음을 머금은 얼굴로 강덕순을 바라봤다.“할머니, 저 대신 나서 주셔서 감사합니다.”강덕순은 자애로운 손길로 리은의 손을 토닥거렸다. 그리고 시선을 허광윤에게로 옮겼다.“리은아, 이분은...?”광윤은 곧장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안녕하십니까? 저는 허광윤이라고 합니다. 진리은 씨의 직장 상사인데, 오늘은 병문안을 겸해 들렀습니다.”“아, 자네가 리은이 상사라는 사람이구먼. 허 대표가 참 마음을 썼네.”“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허광윤은 더 머물 생각이 없는 듯했다.“리은 씨, 그럼 이만 가볼게요. 몸 잘 회복하시길 바라요.”“네, 대표님. 감사합니다.”광윤은 두 사람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 병실을 떠났다.모든 사람이 나간 뒤에야 강덕순은 다시 리은의 손등을 다정하게 두드렸다.“자, 할머니가 국 끓여 왔어. 뜨거울 때 마셔.”“감사합니다, 할머니.”...병원 밖.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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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7화

말을 마친 수혁은 두 사람을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고는 그대로 돌아섰다.그제야 태현은 인영을 향해 몸을 돌렸다.“괜찮아?”인영의 눈가는 이미 점점 붉어지고 있었다. 인영은 억울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안 괜찮아. 너무 속상하고... 너무 힘들어.”인영이 울기 시작하자 태현은 순간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아니, 인영아. 왜 울어? 갑자기 왜 그래? 무슨 일인데?”“오빠는 알아? 진리은이 먼저 유한 오빠한테 이혼하자고 했대. 그런데 유한 오빠가 끝까지 거절했어.”“유한 오빠는 왜 이혼을 안 하는 걸까? 분명히 그 결혼 생활이 싫다고 했잖아. 나 정말 이해가 안 돼. 오빠는 이유를 알 것 같아?”태현은 손을 들어 인영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진짜... 유한이가 이혼을 안 하겠다고 한 거 확실해?”허인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흐느꼈다.“유한 오빠는 진리은이 아프다고 병원에 입원하자, 나를 M국에 혼자 두고 돌아갔어. 그동안 유한 오빠 곁에 있었던 건 나였는데... 내가 몇 년을 더 기다려야 해?”말을 마치자 인영은 태현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울음은 점점 더 커졌고, 감정은 걷잡을 수 없이 쏟아져 나왔다.태현의 몸이 순간 굳었다. 팔을 들어 안아 주려다 결국 그러지 못하고, 대신 인영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정말 유한을 그렇게 좋아해? 유한이랑 꼭 함께하고 싶어?”“당연하지. 난 원래 우리 집안 때문에라도 유한 오빠랑 결혼하게 될 거라고 믿었어. 그런데 진리은이 나타나서... 다 망쳐 버렸잖아.”인영의 목소리는 점점 날카로워졌다.“진리은만 아니었으면, 유한 오빠 옆에 있는 사람은 나였어. 진리은이 다 빼앗아 간 거야.”“태현 오빠, 나 진짜 진리은이 너무 싫어.”태현은 이를 꽉 깨물었다.“알아. 나도 다 알아. 인영아... 울지 마. 네가 원하는 거라면, 내가 꼭 도와줄게.”그 말을 듣는 순간, 인영의 눈동자 깊숙한 곳에 미묘한 빛이 스쳤다.인영은 고개를 들어 태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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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8화

“사모님, 설령 이사를 나가라고 하셔도 제 짐을 허락 없이 옮기시면 안 되죠. 그리고 최소한 새로 살 곳을 구할 시간은 주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이건 너무 과한 처사잖아요.”리은의 목소리는 최대한 차분했지만, 감정이 억눌려 있는 기색은 숨길 수 없었다.“리은 씨도 좀 이해해 줘요. 저도 어쩔 수가 없어서 그러는 거예요. 정 안 되면 제가 몇 달치 월세를 더 얹어 줄게요.”리은은 미간을 깊게 찌푸린 채 집주인을 바라봤다. 표정은 단호했고, 눈빛은 차가웠다.“돈 문제가 아니에요. 사모님께서 이렇게 하시면 안 되는 거예요.”“아이고, 이미 이렇게 했고요. 위약금 낼 거 다 낼게요. 계약 위반인 거 인정하고, 계약서대로 배상도 할 거니까 더 할 말 있으면 소송을 하든가요. 어쨌든 오늘 안에 나가야 해요. 내일이면 새 주인이 바로 들어옵니다.”“사모님...”리은은 이쯤 되자 말문이 막혔다. 대화가 통할 상대가 아니라는 걸 분명히 깨달았다.집주인 옆에는 체격이 크고 인상이 험한 남자 둘이 서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리은은 더 이상 맞서 봐야 소용없다는 걸 알았다.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짐을 하나씩 밖으로 내오는 광경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위약금이랑 월세는 지금 바로 송금할 테니까 얼른 나가세요. 운 좋으면 오늘 바로 들어갈 집도 찾을 수 있을 거예요.”그 말을 끝으로 집주인은 현관문을 거칠게 닫아 버렸다.리은은 굳은 얼굴로 문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불과 이틀 전에 병원에 들어갔다 나왔을 뿐인데, 돌아올 집이 사라질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문 앞에 쌓인 짐들을 바라보던 리은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답답함과 허탈함이 동시에 밀려왔다.잠시 후, 핸드폰 알림이 울렸다. 집주인은 말 그대로 깔끔하게 처리했다. 남은 월세와 위약금이 한꺼번에 입금돼 있었다.‘더는 방법이 없겠네.’리은은 결국 돈을 받았다. 이 상황에서 버틴다고 달라질 건 없었다.짐을 하나씩 챙겨 들고 단지를 빠져나온 리은이 아파트 정문 앞에 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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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9화

리은이 고개를 들자, 운전석 쪽에 앉아 있는 사람은 선호였다.‘그럼 뒷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 굳이 안 봐도 알겠네.’리은은 선호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 핸드폰을 집어넣고 캐리어 손잡이를 끌어당겼다. 그대로 자리를 뜰 생각이었다.조금 전 확인했을 때, 앞쪽 골목에 중급 규모의 호텔이 하나 있었다.우선 거기서 하룻밤 묵고, 내일 천천히 집을 알아보면 됐다.마침 루이는 며칠 동안 본가에 머무를 예정이라 아이를 데리고 이동할 필요도 없었다.선호는 앞으로 걸어가는 리은의 뒷모습을 보면서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시선을 백미러로 옮겼다.불과 5분 전, 허광윤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그 통화 이후, 허광윤이 리은에게 했던 말은 전부 지시된 내용이었다.차 안에서 유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선호는 어쩔 수 없이 차 속도를 줄인 채 리은의 뒤를 천천히 따라갔다.리은이 4성급 호텔로 들어가는 모습을 확인한 뒤에야, 선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대표님?”대답은 없었다....리은은 선호의 차가 계속 뒤에 붙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걸음을 더 재촉해 로비로 들어갔다. 우선 방부터 잡아야 했다.“싱글룸 하나 부탁드릴게요.”“잠시만 확인해 드리겠습니다.”컴퓨터 화면을 한 번 훑어보던 프런트 직원은, 갑자기 울린 전화벨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잠시만요.”직원은 전화를 받으며 로비 한쪽으로 물러났다.“네, 안녕하세요.”직원은 통화 도중 리은을 한 번 힐끗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네, 알겠습니다.”전화를 끊은 직원은 다시 자리로 돌아와 키보드를 몇 번 두드린 뒤, 미안한 표정으로 리은을 바라봤다.“죄송합니다. 오늘은 객실이 전부 예약이 차서 남은 방이 없습니다.”“방이 다 찼다고요?”“네, 정말 죄송합니다.”리은은 곧장 핸드폰을 꺼냈다.“근데 방금 전까지만 해도 예약 사이트에 빈 방이 있었는데요.”“아, 그건 시스템 반영이 아직 안 된 것 같네요. 바로 내리겠습니다.”리은은 더 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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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0화

그 이후로 리은은 정말 많은 말을 했다. 부드럽게 낮은 자세로, 거의 애원에 가까울 정도로 유한을 붙잡았다.리은은 그 집이 어린 시절부터 살아온 곳이라고 말했다.그곳에는 가장 행복했던 기억들이 남아 있고 부모님의 흔적이 남아 있어서, 그저 추억으로라도 남겨 두고 싶었다고 했다.대단한 걸 바란 것도 아니었다.그저 ‘집’이라는 이름의 공간 하나를 잃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하지만 리은이 무슨 말을 하든, 유한은 끝까지 미동도 하지 않았다.오히려 더 차갑게 잘라 말했다.부모가 살던 집은 리은의 집이 아니라는 것.유한과 결혼한 순간부터, 라에르 몬테라 파크에 있는 신혼집이 리은의 집이라는 것.하지만 그곳 역시 리은의 집이 아니었다.리은은 한때 정말 그렇게 믿었다.라에르 몬테라 파크의 그 집이... 유한과 리은, 그리고 루이가 함께 살아갈 집이라고.하지만 현실은 달랐다.그곳은 집이 아니라 리은을 가두는 차갑고 숨 막히는 공간일 뿐이었다.‘차라리 그때 할머니한테라도 매달릴 걸.’그때 리은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체면을 버리고서라도 강덕순에게 부탁했더라면, 부모가 남긴 그 집만큼은 지킬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네가 그렇게 집이라고 부르는 그곳은 나한테는 감옥일 뿐이야.”유한의 얼굴도 잔뜩 굳어 있었다.어둡게 가라앉은 시선으로 리은을 꿰뚫듯 내려다봤다.“감옥?”“그래. 감옥이야.”리은은 흔들림 없이 말했다.보이지 않는 감옥... 리은은 그 감옥에 5년이나 갇혀 있었다.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갇혀 있고 싶지 않았다.유한의 눈빛이 순식간에 차가워졌다.비웃듯 짧게 숨을 내뱉더니, 갑자기 리은을 거칠게 끌어당겼다.그리고 그대로 차 안으로 밀어 넣었다.“감옥이어도 상관없어. 계속 거기서 살아.”“놔! 주유한! 지금 뭐 하는 거야? 놓으라고!”눈치 빠르게 차에서 내린 선호가 리은의 짐을 전부 트렁크에 실었다.그리고 운전석으로 돌아오자마자 말 없이 차 안의 칸막이를 올렸다.분이 풀리지 않은 리은이 창문을 세게 두드렸다.“내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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