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이혼 후 전설이 된 여자: Chapter 11 - Chapter 20

30 Chapters

제11화

임지민이 허둥대다가 몸이 휘청였고, 곁에 있던 남자가 긴 팔로 허리를 감아올려 제때 붙잡았다.“조심해.”임지민은 가슴을 진정시키듯 손으로 눌러 잡고 서정혁을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낮게 말했다.“나 괜찮아. 고마워... 정혁아.”이 장면을 본 강시원은 어지러운 현장을 돌아볼 겨를도 없이 당장이라도 서정혁의 눈앞에서 사라지고 싶었다.하지만 양서연은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번개처럼 앞을 막아서서 눈을 부릅떴다.“시원 씨, 뭐 하는 거예요? 이렇게 큰 실수를 저질러 놓고 그냥 가려는 거예요?”강시원의 눈빛은 차갑게 가라앉았고 목소리는 서릿발이 서렸다.“부장님이 제 팔을 잡아당기지만 않았으면, 이렇게 안 됐을 거예요.”양서연이 분개했다.“아직도 책임을 회피하겠다는 거예요?!”“나는 책임을 떠넘기지 않아요. 다만 내 책임만 인정하죠.”강시원은 미동도 없이 맞섰다.사람들이 멍해졌다.‘이게 어디서 튀어나온 아가씨야? 감히 서 대표님 앞에서 이렇게 까분다고? 어디 소속이야?!’서정혁은 온몸에 가시를 세운 강시원을 노려보았다. 길게 찢긴 눈매에 어둑한 빛이 스쳤다.양서연은 슬그머니 남편 쪽으로 눈짓을 보냈다.“임지민 씨 옷을 더럽혀 놓고, 아직도 임지민 씨한테 사과 안 할 거예요?”“그래요, 원래 아가씨 잘못이잖아요. 이렇게 많은 눈이 보고 있는데 말 바꿔 봤자 소용없어요.”오 이사가 곧장 맞장구쳤다.“임지민 씨한테 제대로 사과해요. 임지민 씨는 아량이 넓어요. 이런 사소한 일로 곤란하게 하지는 않을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아가씨처럼 무례한 직원은 우리가 엄중히 처리할 수밖에 없어요.”한 수컷 한 암컷, 닭이 우니 돼지가 뒤따르는 꼴이었다.그런데도 강시원은 고요했다.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무표정한 서정혁만 또렷이 바라봤다.임지민이 두어 번 가볍게 기침하고 눈매를 부드럽게 낮췄다.“이분도 일부러 그런 건 아니니까... 그냥 넘어가죠.”“오 이사, 방금 말했죠? 사과하지 않으면 엄중히 처리하겠다고?”서정혁은 시선을 거두며 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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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그 종이는 가볍게 허공을 돌아 남자의 번들거리는 구두 앞에 내려앉았다.거기에는 단단한 세 글자가 적혀 있었다.[사직서]‘강시원!’사람들 사이로 냉기가 한 번에 빨려 들어갔다.‘공개석상에서 염라대왕과 맞짱을 뜬다고? 이 아가씨, 엄청 대담하네!’서정혁의 관자놀이가 불끈거렸다.“임지민 덕 좀 봤네. 나 같은 말단이 그룹의 큰어른들을 이렇게나 한꺼번에 뵐 줄이야. 서정에서 일한 게 아주 헛수고는 아니었어.”강시원의 눈매는 붉고도 차가워 눈부시게 빛났다. 남자의 드러난 놀람을 똑바로 보며 고운 미소를 그렸다.“그럼, 여기서 작별하자. 다시 볼 일 없을 거야.”말을 마치고 그녀는 돌아섰다. 숲속에서 일직선으로 솟은 나무 같은 뒷모습이었다.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저 강시원 정말 도를 넘었어! 누구를 빽으로 믿고 저렇게 설치는지 원...!”양서연이 이를 갈며 말했다.“서 대표님, 이제 면전에서까지 저렇게 까부는데, 제가 반드시 본때를 보여 주겠습니다! 사직서를 냈어도 그냥 안 둬요. 서정을 떠나면 다른 회사도 못 데려가게 할 겁니다!”“빽으로 설친다?”서정혁의 검은 눈이 천천히 돌아갔다. 온몸에서 찬 기운이 솟구쳤다.“양 부장이 여기서 고성만 지르고, 회사 절차는 무시한 채 제멋대로 직원 처분을 운운하는 건... 누구 빽으로 그러나요?”양서연의 어깨가 퍼뜩 굳었다.‘대표님 얼굴이 왜 편치 않아 보이지? 내가 어디 틀렸나?’“대표님, 양 부장도 잠깐 성급했던 겁니다. 다 대표님을 위한 마음에서 그랬으니, 너그럽게 봐 주시죠.”오 이사가 얼른 자기 마누라를 옆으로 끌어냈다.“정혁아...”임지민이 남자의 곁으로 바짝 다가와 걱정스레 속삭였다.“나 언니가 여기서 일하는 줄 정말 몰랐어. 알았으면 오늘은 안 왔을 거야.”남자의 잘생긴 얼굴은 냉담했다.“너랑 상관없어. 오늘이 아니면 언젠가는 마주쳤을 일이지.”“만약 언니가 나 때문에 사직한 거라면 정말 마음이 불편해.”임지민은 수줍게 눈길을 내리깔고 낮게 말했다.“언니가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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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강시원은 사직하며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았다. 오직 자신이 개발한 칩의 핵심 데이터만 챙겼다.그것은 생전에 어머니가 그녀에게 남겨 준 빅데이터 모델이었다. 원래는 서정 그룹이 새로 생산하는 신에너지 차종에 적용할 생각이었고, 구축도 거의 마무리되어 있었다.그러나 지금 와 보니, 더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서정 그룹 건물을 나설 때, 하늘은 음울했고 가느다란 비가 내렸다.바로 그때 굉음이 터졌다. 멀리서 붉은 페라리가 불꽃처럼 번쩍이며 바람을 가르고 달려와 마침내 그녀 앞에 정확히 멈춰 섰다.차 문이 열리더니 질 좋은 검은 구두 한 켤레가 물웅덩이를 아랑곳하지 않고 밟았다. 잘 맞춘 수트를 입은 호리호리한 키의 남자가 천천히 내렸고, 선이 또렷한 손으로 검은 우산을 펼쳤다.그가 깊게 강시원을 바라보며 성큼성큼 마치 참지 못하겠다는 듯 그녀를 향해 걸어왔다.“시원아!”강시원은 남자를 향해 눈웃음을 지었다. 눈매는 누구와도 견줄 수 없이 환하고 빛났다.“선배, 오랜만이야.”동시에 공장 구역 3층의 유리 복도 위.서정혁은 비 내리는 아래에서 마주 보는 둘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차가운 잘생김은 서릿발처럼 굳어 있었다.눈으로 보지 않았더라면 나무말뚝 같은 무정하고 재미없는 여자가 저런 웃음을 지을 수 있다는 것을 그는 알지 못했을 것이다.날이 흐린 비의 세계 속에서도, 분 하나 바르지 않은 그녀는 활짝 핀 붉은 장미처럼 생생했다. 남자의 눈동자 밑에 조용히 잔물결이 번졌다.“저놈 누구야?”서정혁은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낮고 차갑게 물었다.한수현이 고개를 빼고 아래를 보았다.“어... 어디서 본 듯한데요. 대표님, 잠시만요.”그는 곧바로 남자의 모습을 찍어 최신 개발한 안면 인식 시스템에 넣어 검색했다.“대표님, M국 KT 그룹의 수석 법률고문, 유재윤입니다. 최근 반년 사이에 막 귀국했고, 변호 업계에서 가장 뜨거운 신성입니다. 귀국하자마자 수많은 시선이 주시했고, 다들 자기편으로 데려가려 난리죠. 진짜로 청년 재주꾼...”서정혁이 싸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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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스포츠카가 점점 멀어지는 동안, 강시원은 자신이 2년 동안 온 힘과 땀을 쏟아부었던 서정 그룹 빌딩을 바라보았다.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어서야 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시선을 거두었다.“시원아, 자.”유재윤은 전방을 보며 왼손으로 핸들을 잡고, 오른손으로 페라리 차 키를 내밀었다.“며칠 전 내가 해외에 있어서 선물을 제때 못 줬어. 생일 축하해.”강시원의 맑은 아몬드 빛 눈이 커졌다.“선배, 이건 너무 비싸. 나는 못 받아.”“왜 못 받아? 내 기준으로 이 정도 급은 너한테 한참 모자라.”유재윤의 맑은 눈매는 다정하고도 진지했다.“사실 짐작했어. 이 차 정도도 네가 거절할 거라서 더 비싼 건 아예 엄두도 못 냈지. 미리 주문해 둔 거야. 정말 나를 선배로 생각한다면 받아. 거절하지 마.”강시원이 난처해했다.“그렇지만...”“내가 지금 너한테 하는 건, 너희 어머니가 예전에 나에게 베풀어 준 도움에 비하면 발끝에도 못 미쳐.”유재윤은 그녀를 깊이 한 번 바라보고 목이 약간 멘 소리로 말했다.“어머니가 나를 대학에 다니게 도와주지 않았다면, 또 해외 유학을 보태 주고, 로펌 차리는 것도 밀어주지 않았다면... 나 유재윤은 어느 도랑에서 썩어 들어갔을지 모른다. 아마 지금도 뜨거운 밥 한 숟가락 먹겠다고 소나 말처럼 부리고 있었겠지. 너희 어머니는 내 은인이야. 너에게 해 주는 건 그 은혜를 갚고 싶어서야. 시원아, 제발 나한테도 기회를 줘.”강시원은 어머니가 남학생 셋을 도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다만 그때는 너무 어려서, 어머니와 가장 가깝게 지내던 유재윤 말고 나머지 둘은 어디에 있는지, 이름이 무엇인지, 어떻게 지내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그럼... 선물 고마워, 선배.”강시원은 더 이상 거절하기 어려워 키를 받아 들고 눈을 한 번 깜박였다.“근데 나 색은 바꿔도 돼? 이 색은... 너무 요란해서, 내가 못 소화하겠어.”“색만 바꾸긴, 차 자체를 바꿔도 돼.”유재윤이 웃음을 터뜨렸다.“네가 즐겁기만 하면 돼.”강시원의 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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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식당에 도착해 두 사람은 자리에 앉았다. 완벽하게도 손님은 오직 그들 한 테이블뿐이었다.유재윤은 좋은 레드와인 한 병을 주문해 자기가 보며 자란 여동생 같은 그녀가 마침내 혼인의 무덤에서 기어 나와 다시 햇빛을 보게 된 일을 축하하고 싶었다.하지만 강시원은 막 아이를 잃었고 아직 회복 중이라 곧장 그를 말렸다.“선배, 밥만 먹자. 술은 마시지 말자.”유재윤이 약간 놀랐다.“시원아, 너 예전에는 조금은 마셨잖아.”강시원은 슬쩍 둘러댔다.“돌아가서 처리할 일이 좀 있어. 술 마시면 일 그르친다.”“그렇기도 하네.”유재윤은 다정히 따뜻한 물을 따라 주고 물었다.“시원아, 앞으로 뭘 할 생각이야? 어딘가에 지원할 거야, 아니면 네가 창업할 거야? 선배가 전력으로 밀어줄게!”강시원은 물 한 모금을 삼키고 눈썹을 모아 잠시 생각한 뒤 담담히 말했다.“나는 어머니 회사 영원 테크를 맡고 싶어.”유재윤의 눈빛이 잠시 멈췄다.“시원아, 진심이야?”“당연하지. 사실 하루이틀 생각한 게 아니야.”강시원은 가볍게 속눈썹을 내리며 빛을 머금은 표정으로 이어 갔다.“나는 1년이 넘도록 영원 테크를 계속 지켜봤어. 경영 상황이 아주 안 좋아. 이모부가 엄마 생전 특허를 팔려 한다는 말까지 나왔어. 어찌 되었든 특허는 절대 팔 수 없어. 그건 엄마의 아이이자, 영원 테크의 뿌리야. 그래서 돌아가서 영원 테크를 다시 일으킬 거야.”유재윤은 짙은 눈썹을 살짝 모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런데 네 이모부가 십수 년 동안 이사회를 책임졌잖아. 네가 하루아침에 돌아간다고 해서 쉽게 권한을 내놓을까? 게다가 그 사람은 너를 제외하면 너희 어머니의 이 세상 유일한 혈육이고, 네 윗사람이기도 해.”“회사를 제대로 운영하면 나도 건드릴 생각 안 했어.”강시원의 늘 잔잔하던 눈이 이 순간 매처럼 날카로워졌다.“내가 돌아가서 문제가 드러나면 공사 구분해서 처리할 거야. 혈연이라고 봐주지는 않아.”유재윤은 눈앞의 소녀를 바라보며 놀람과 감탄을 함께 담았다.이제 그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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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임지민은 강시원과 유재윤이 다정히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며, 그 언제나 무르기만 하던 여자 얼굴에 자신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화사함과 자신감이 떠오르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그녀는 미간을 바짝 좁히고 반투명 분홍빛 뾰족한 손톱을 손바닥에 깊게 박아 넣었다.유재윤이 누군지 임지민은 알았다. 갓 귀국한 법조 엘리트, 해외에 있을 때부터 연봉이 억대로 알려진 인물이었다.작년에 운도 테크가 경제 분쟁에 휘말렸을 때, 그녀의 아버지는 큰돈을 들여 유재윤에게 소송을 맡기려 했지만 차갑게 거절당했다.회장인 아버지는 유재윤의 얼굴조차 보지 못했다. 생각만 해도 분에 겨웠다.그런데 지금 이 순간 강시원이 유재윤과 함께 있고, 두 사람은 보기에도 꽤 친숙해 보였다.임지민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서정혁을 향해 부드럽게 말했다.“정혁 오빠, 언니가 여기 있으니까... 셋이서 밥 먹어. 나는 먼저 갈게.”남자의 얼굴은 벼리를 세운 칼처럼 차갑게 굳었고 미동도 없었다.“안 돼, 이모!”서도훈이 입을 삐죽 내밀고 임지민의 손을 꼭 잡았다.“이 레스토랑 이모가 먹고 싶다 해서 아빠가 일부러 예약한 거야. 어떻게 가? 이모가 안 먹으면 나도 안 먹을 거야!”“도훈아, 그러지 마.”임지민은 허리를 굽혀 아이의 뺨을 가만 쓰다듬었다. 유치원 선생보다 더 다정했다.“네 말로는 엄마가 며칠이나 집에 안 왔다며? 보고 싶었지? 겨우 만났는데 엄마랑 많이 있어야지. 이모는 방해하지 않을게.”서도훈은 그녀가 못 떠나 아쉬웠지만 작게 중얼거렸다.“그렇게... 그렇게까지 보고 싶지는 않아...”사실은 전혀 아니었다.요 며칠 그의 하루는 거의 이모로 가득 찼고, 엄마가 곁에 없어도 별로 대수롭지 않았다.“지민아, 너는 남이 아니야. 이럴 필요 없어.”서정혁의 음침한 시선이 매니저에게로 옮겨 갔다.“나는 낯선 사람이랑 같은 공간에서 식사하는 거 익숙하지 않아요. 오늘 밤 여기는 내가 전부 잡았어요. 사람들 비워줘요.”매니저는 창가 쪽의 강시원과 유재윤을 힐끗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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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서도훈, 너는 아빠랑 잘 먹어. 엄마는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그러나 두 걸음 떼자마자, 서정혁이 그녀의 손목을 거칠게 움켜잡았다. 힘은 섬뜩할 만큼 세찼다.“강시원, 너 지금 나한테 삐진 거야?”강시원은 아파 어깨를 떨고 손을 뿌리치려 하며 낮게 깔린 목소리에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아이 앞이야. 서 대표, 자중해.”‘자중이라니?’서정혁은 어이가 없어 웃음이 새어 나왔다.그의 아내가 다른 남자와 애매하게 얽혀 같은 식탁을 마주하고도, 감히 그에게 자중하라 했다.‘그 입으로 그 말을 어떻게 내뱉지?’“저 남자, 꺼지라고 해.”서정혁의 음성은 한 음절 한 음절 깊이 가라앉았다. 인내심은 끝에 다다랐다.그는 팔을 홱 잡아당겼고, 강시원은 그의 가슴팍으로 불시에 부딪혔다. 커다란 손은 그대로 그녀의 허리 오목한 곳에 박혔다.여자의 부드러움과 남자의 단단함이 무자비하게 밀착되었다.임지민의 눈이 커다랗게 치떴고, 온화하던 얼굴이 보이지 않게 일그러졌다.강시원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있는 힘을 다해 그의 구속을 밀쳐냈다.부부로 오래 살았어도, 심지어 침대 위에서도, 절정에 이르는 동안에도 서정혁은 그녀를 껴안거나 입을 맞춘 적이 없었다.그녀도 욕망을 가진 여자였다. 한때는 진심으로 그를 원했다.하지만 지금은 원하지 않았다.그래서 서정혁의 손길이 닿는 순간 몸속에서 격렬한 생리적 거부감이 치밀어 올랐다.“선배, 우리 가.”강시원의 눈가가 붉어지며 유재윤의 팔을 붙들고 밖으로 걸음을 떼었다.“엄마! 잠깐만!”서도훈이 맑고 또렷한 목소리로 불렀다.강시원의 발걸음이 멎었다. 그녀는 천천히 돌아서 수많은 밤 품에 안고 조심조심 길러 온 작은 아이를 바라보았다.서정혁에게는 마음을 단단히 다질 수 있지만 서도훈에게만은 망설여졌다. 끝내 매정해질 수가 없었다.서도훈이 그녀 앞에 다가와 차갑게 물었다.“엄마 바람났지? 저 사람 엄마 남자야?”유재윤의 동공이 번뜩 좁아졌다.서정혁도 전율하듯 굳어지며 이를 악물고 내질렀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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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연안 빌리지로 돌아가는 길, 서정혁은 내내 먹구름을 이고 있었다. 호화로운 차 안은 얼음 창고처럼 싸늘했다.서도훈은 좌석에 몸을 잔뜩 웅크리고 숨소리조차 죽였다.“정혁 오빠... 아직 언니한테 화났어?”임지민이 살살 떠보았다.“그런데 정말 뜻밖이네. 언니가 유재윤 변호사를 알 줄이야. 언니의 인맥은 오빠가 아는 것보다 훨씬 깊은 것 같아.”“서도훈.”서정혁은 아들의 하얀 얼굴을 똑바로 겨누었다. 목소리는 매섭고도 압박감이 들이쳤다.“바람났다는 그 막말, 누가 가르쳤어?”아버지의 새까맣게 굳은 낯빛에 질려 서도훈은 덜덜 떨기 시작했다.“아빠... 나...”“오빠, 요즘은 매체가 워낙 발달해서 아이가 이런 것을 알기 어렵지 않아. 누가 일부러 나쁘게 가르쳤다고만 볼 일은 아니야.”임지민이 서도훈의 정수리를 쓰다듬고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아이 생각은 원래 천방지축이잖아. 자기 엄마가 모르는 아저씨랑 같이 있고, 요새 자주 집에 돌아오지도 않으니 소외감을 느껴서 삐뚤게 생각한 거지. 오빠, 제발 도훈이를 탓하지는 마. 도훈이는 평소에 아주 착하잖아.”서정혁의 얇은 입술은 일자로 굳었다.서도훈은 임지민의 품에 기대어 작은 강아지처럼 그녀에게 머리를 살짝 비볐다.처음에는 방금 자신이 너무 심하게 말했다 싶어 엄마에게 조금 미안했다.그런데 이모가 이렇게까지 자신을 감싸고 편을 들어 주니 용기가 다시 불끈 솟아 중얼거렸다.“아빠, 원래 엄마 잘못이잖아... 아빠도 엄마가 알 수 없는 남자랑 있는 것 때문에 화난 거잖아.”“그것도 네가 입에 올릴 일은 아니야!”서정혁이 차갑게 호통쳤다.“네 엄마 잘못이 있다고 하더라도 네 엄마야. 이번에는 네가 너무 버릇없고, 너무 무례했어!”“그 남자는 아빠처럼 잘생기지도 않았고, 보기에도 아빠만큼 부자 같지도 않아. 엄마가 그런 사람이랑 있다니, 정말 눈이 없어.”서도훈은 용기를 모아 속에 있던 말을 꺼냈다.“아빠, 내 생각에 엄마는 구제 불능이야. 차라리 새엄마를 찾아 줘! 나는 이모가 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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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화

키득거리는 웃음이 여기저기서 잇따라 터졌다.하지만 강시원은 얼굴빛 하나 바꾸지 않았다. 곧고 단단한 자세로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소문 따위는 그녀를 무너뜨리지 못한다. 그저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날 뿐이다.바로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윤슬이 전시 차량을 있는 힘껏 닦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눈이 둥글게 커졌다.“윤슬 씨!”허리랑 등이 쑤셔 비틀거리던 윤슬은 고개를 들었다. 급히 다가오는 강시원을 보자 얼굴이 금세 환해졌다.“시원 씨...”강시원이 찬물에 얼어 벌게진 그녀의 손을 꼭 잡고 놀라 물었다.“윤슬 씨, 왜 여기서 차를 닦고 있어요?”“그게... 양아치가 시켜서요.”윤슬의 눈가가 시큰해지며 금방이라도 눈물이 고이는 듯했다.“시원 씨, 저는 괜찮아요... 물건 찾으러 오신 거죠? 빨리 다녀오세요.”강시원의 눈동자가 어둡게 가라앉았다.“내가 떠난 뒤에 양서연의 표적이 된 거죠?”윤슬은 훌쩍이며 억지로 웃었다.“괜찮아요. 저는 젊으니까 버틸 수 있어요! 그 사람도 그 정도가 한계죠. 덤벼 보라죠!”강시원은 이를 악물었다. 가늘지만 힘 있는 손을 그녀의 여린 어깨 위에 묵직하게 얹었다.“시원 씨, 꼭 말씀드릴 게 있어요. 안 드리면 잠도 못 자겠어요!”윤슬의 눈이 분노로 붉어졌다.“시원 씨에 대한 그 음란한 소문들, 전부 양아치가 퍼뜨린 거예요. 저 증거 있어요!”...양서연의 사무실 앞에 이르렀을 때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강시원은 한마디 인사도 없이 곧장 들어갔다.커피를 홀짝이며 남자 모델 댄스 라이브를 보던 양서연이 화들짝 놀랐다.“시원 씨는 기본 예의도 몰라요? 상사 사무실 들어올 때 노크 정도는 해야죠.”양서연은 서둘러 휴대폰을 엎어 놓고 노려보았다.“저는 이미 퇴사했습니다.”강시원은 책상 앞 의자에 스스럼없이 앉았다. 잘 뻗은 긴 다리를 포개며 비스듬히 웃었다.“여기서 일할 때는 부장님이 제 상사셨죠. 제가 더 이상 여기 직원이 아니면, 부장님은 제게 무엇인가요?”목소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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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화

사무실 안, 두 사람은 마주 서서 살기를 주고받았다.사무실 밖에는 구경꾼처럼 직원들이 빙 둘러서 있었고 하나같이 가십의 혼이 활활 탔다.양서연은 분에 겨워 창피까지 덮치자 문 쪽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다들 꺼져서 일이나 해!”직원들은 새처럼 우수수 흩어졌다.“쳇, 고작 이걸로 나를 치겠다고요?”양서연은 눈알을 굴리더니, 오히려 태연하게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무슨 증거로 그 음란한 소문을 내가 퍼뜨렸다고 할 수 있는데요? 나도 남들이 하던 말을 들었을 뿐이에요. 그저 사람들 말에 덩달아 말했을 뿐. 게다가 내가 확성기 들고 떠들고 다닌 것도 아니잖아요. 사적으로 동료들과 잡담 좀 한 것뿐인데, 그래서 나를 어쩌겠다는 거죠?”간사하고 교활한 그 낯짝은 병든 닭처럼 보기 흉했다.“말은 맞아요. 사적으로 제 뒷담화를 씹은 것뿐이라면 권력도 백도 없는 저는 부장님을 어찌하지 못하겠죠.”강시원은 반쯤 눈을 내리깔고 앵두 같은 입술에 서서히 미소를 걸었다.“하지만 부장님은 제가 서 대표의 첩이라고 못을 박았고, 서 대표를 바지만 끌어 올리면 사람을 모르는 척하는 데다가 아래로만 피가 도는 색골에다 추잡하고 무책임한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죠. 제가 이 영상을 서 대표에게 넘기면, 그분의 좁디좁은 속과 앙갚음은 꼭 하고야 마는 성격에 어떻게 될 것 같아요?”쏟아내는 말이 콩 튀듯 매끈하고 왠지 실감까지 철철 넘쳤다.그 시각, 다른 쪽에 있던 서정혁은 큼직하게 한 번 재채기를 했다.“강시원 씨!”양서연은 그 자리에서 덜컥 겁이 올라 털까지 곤두섰다.강시원은 맨발이고 자신은 구두 신은 사람이라는 듯 겁날 것이 없었다. 맞부딪칠 배짱이 있었다.하지만 자신만만한 건 아니었다. 남편은 서정 그룹 고위층. 겨우 몇 년 누리던 체면이 서정혁의 심기를 거슬렀다가는 하룻밤 사이 예전으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대가가 너무 컸다. 감히 건드릴 상대가 아니었다.결국 양서연은 이를 악물고 분을 누른 채 물었다.“시원 씨가 이러는 건 결국 퇴사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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