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이혼 후 전설이 된 여자: Chapter 31 - Chapter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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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화

서유정은 질투에 눈까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그 팔찌는 예전에 할버지가 할머니에게 준 예물 중 하나였다. 옥의 품질이 얼마나 좋은지는 말할 필요도 없고, 무엇보다 이런 세공은 지금은 거의 자취를 감췄다. 박물관을 빼고 나라 전체를 통틀어 두 번째를 찾을 수 없는 물건이었다.그녀의 친엄마도 아직 한 번도 손을 못 대봤는데, 박해순이 그걸 강시원 같은 계집한테 줘 버리다니 말이다.‘정말 노망이 난 게 틀림없어!’“할머니, 이건 예전에 할아버지가 할머니께 드린 거잖아요. 할머니 추억이니까, 그래도 할머니가 가지고 계셔야 해요.”서정혁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갑고 담담했다.“시원이는 이런 보석이나 장신구에 원래부터 별 관심도 없어요.”사실 그가 나서서 말하지 않았어도, 강시원은 어차피 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굳이 나서서 자기 입으로 거절해 줬다. 그녀는 이렇게까지 그에게 휘둘리는 느낌이 싫었다.박해순이 손자를 향해 매서운 눈빛을 날렸다.“흥, 그게 무슨 뜻이야? 네 마누라가 이런 좋은 걸 받을 급이 안 된다는 거야?”서정혁은 얇은 입술을 살짝 올렸다.“그럴 리가요.”“내 물건은 내가 주고 싶은 사람한테 주는 거지, 다른 사람이 나 대신 정할 차례는 없어. 하물며 시원이는 착하고 영리하고 효심도 깊은 내 예쁜 손자며느리야. 충분히 이런 좋은 걸 받을 자격이 있어!”박해순은 강시원을 향한 칭찬을 조금도 아끼지 않았다.서정혁은 눈썹을 스치듯 치켜 올리며 대수롭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할머니가 좋으시면 된 거죠.”이 정도까지 말이 오갔는데 강시원이 감히 사양할 수 있겠는가. 결국 받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박해순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팔찌는 차가운 얼음 같았지만, 그녀의 가슴속은 포근하게 데워졌다.테이블 아래에서 임지민의 열 손가락이 말려 들어갔다. 박해순이 선물을 핑계로 강시원의 편을 들어 주고 있다는 것쯤은 그녀도 단번에 알아챘다.“할머니! 저랑 한성이 다 먹었어요. 우리 뒤뜰에 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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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화

“저 하늘 무너질 짓도 안 했고, 사람을 죽이거나 불을 지른 것도 아니에요. 그냥 제 얘기를 지어낸 사람한테 사과하라고 했을 뿐인데, 어머님 눈에는 그렇게 잘못된 일인가요?”강시원은 매섭게 몰아붙이는 김설연을 담담히 바라보았다.“저는 서씨 가문으로 시집왔어요. 그럼 제 존엄을 위해 최소한의 억울함도 풀면 안 된다는 말씀이세요?”사람들 눈이 일제히 휘둥그레졌다.결혼한 지 5년, 온갖 일을 다 참고 양보하던 그녀가 시어머니에게 정면으로 맞선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혜성이 지구에 들이받는 꼴보다 보기 힘든 장면이었다.서정혁의 눈빛이 강시원에게 단단히 고정되더니 더욱 어두워졌다.서유정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쏘아붙였다.“강시원! 너 예의라는 게 있어 없어? 우리 엄마한테 어떻게 그런 식으로 말해?!”“서유정, 앉아!”박해순은 얼굴을 싸늘하게 굳혔다.“남 욕하기 전에 네가 예의를 아는지부터 돌아봐라. 시집 한번 갔다 왔다고, 전에 있던 아가씨티는 하나도 안 남았네. 여기를 시장으로 만들어야겠냐?”서유정은 구름 한 점 없는 얼굴로 담담히 앉아 있는 강시원을 원망스럽게 노려보았다. 그래서 더더욱 자기 혼자 털을 다 곤두세우고 소리 지르는 닭처럼 보였다.원래도 팔찌 일로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던 김설연은, 강시원이 제 발로 총구 앞에 걸어 들어온 걸 보자 더더욱 좋은 구실을 잡은 셈이었다.“정혁이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야. 서씨 가문의 가장이자, 서정 그룹의 수장이야. 너는 그런 사람한테 시집올 때부터, 그런 사람 아내로 산다는 게 절대 만만한 일이 아니라는 정도는 알았어야지. 참을 줄도 알고, 삼킬 줄도 알아야 해!”“...”“지금 네 행동은 서씨 가문 며느리로서 완전히 실격이야! 네가 한 번 날개를 퍼덕인 덕에 그룹 명예가 이렇게 실추됐고, 네 친동생까지 끌려들었어. 지민이는 원래 몸도 좋은 편이 아닌데, 그런 모욕까지 한 몸에 다 맞으면, 그게 몸 망가지는 지름길 아니겠어?”임지민의 작은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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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화

강시원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아무 일도 아니에요, 할머니.”박해순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다른 사람 눈은 속여도, 내 눈은 못 속인다. 네 결혼반지는? 오늘은 왜 안 끼고 있니?”강시원은 순간 굳어 섰다. 옅은 흰 자국이 남은 약지가 움찔하며 오므라들었다.“오다가 좀 정신이 없어서요. 깜빡 잊고 안 끼고 나왔어요.”“꼬박 5년 동안 그 다이아몬드 반지를 보물처럼 끼고 살던 애가, 어떻게 그걸 잊어버릴 수가 있어?”박해순의 화가 치밀어 올라 혈압이 순식간에 뛰었다.“또 그 임 씨 계집애 때문이야? 또 정혁이한테 들러붙었지, 맞지? 두고 봐라, 할머니가 꼭 네 속 시원하게 해 줄게!”강시원은 떨리는 팔을 부여잡고 서둘러 달랬다.“할머니, 아니에요. 그런 일 없어요. 괜한 생각 하지 마세요.”“시원아, 나는 정말 이해가 안 된다. 5년 동안 한 침대에서 같이 자고, 네가 정혁이 자식까지 낳아 줬는데도...”박해순은 분하고도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답답하게 내뱉었다.“도대체 왜 그렇게 정혁이 마음을 데워 주지를 못하니?!”강시원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사실 돌덩이라도, 쇳덩이라도 품고 있으면 언젠가는 따뜻해진다.하지만 마음속에 사랑하는 사람이 따로 박혀 있는 그 사람의 심장만은, 아무리 품어도 영영 따뜻해지지 않았다.“시원아, 앞으로 서럽고 억울한 일 있으면 꼭 할머니한테 말해라. 할머니가 네 편 들어 줄게!”박해순이 강시원의 하얀 손을 꼭 움켜쥐었다.강시원은 살짝 웃었다.“알았어요, 할머니.”...강시원은 박해순 방에서 나와 자기 방을 향해 걸었다. 그러다 어렴풋이 여자의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와 발걸음을 낮추고 조심스레 다가갔다.“정혁 오빠... 미안해, 자꾸 폐만 끼쳐서...”계단참 어둠 속, 임지민이 키 크고 당당한 서정혁 앞에 서서 꽃잎이 젖은 듯 눈물범벅이 되어 울고 있었다. 살짝만 건드려도 금방 부서져 버릴 것처럼 말이다.강시원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그녀는 황급히 몸을 돌려 벽 뒤로 몸을 숨겼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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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화

강시원의 발걸음이 딱 멈췄다.“너 혹시 착각하고 있는 거 아니야? 5년이나 됐으니까, 우리 오빠가 그래도 너한테 조금은 정이 있을 거라고? 어쨌든 네가 큰아들까지 낳아 줬으니까.”서유정이 그녀의 귀 옆으로 입을 바짝 붙이며 가볍게 비웃는 숨을 섞어 말했다.“우리 오빠 같은 고고한 사람은 자기가 원하지 않는 건 손가락 하나 대지도 않아. 그 사람이 널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임신을 하게 둔 거야. 네가 보기에 우리 오빠가 그렇게까지 경솔한 사람 같아? 정말로 너를 받아들였다고 생각해?”강시원의 등이 굳어 붙었다. 목소리가 팽팽하게 조여 들었다.“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데?”“네가 임신을 하고 우리 서씨 가문의 피를 몸으로 낳게 된 건, 우리 오빠가 널 원해서가 아니야.”서유정은 턱을 치켜들고 짓궂은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그건 말이지, 우리 엄마가 묘천 대사에게 점을 보러 갔는데, 네 팔자랑 우리 오빠 팔자가 그럭저럭 맞는다고 하더라. 그때 우리 아빠는 이미 깊은 혼수 상태에 빠져 식물인간이 된 뒤였고, 네가 가능한 한 빨리 아이를 낳아서 우리 서씨 가문의 사나운 기운을 한 번 쓸어 주면, 우리 아빠가 혹시라도 그 덕에 깨어날지도 모른다고 했어.”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강시원의 귀에는 천둥처럼 울려 박혔다. 시야가 한순간 흐릿해지며 흔들리고, 쓰라린 감각이 되밀려 왔다.이미 온통 상처투성이가 된 가슴이 또 한 번 길고 흉측한 금을 그으며 갈라지는 기분이었다.“우리 오빠 효자로 소문난 사람이야. 우리 아빠를 깨울 수만 있다면 무슨 방법이든 다 해 볼 사람이지.”서유정은 얼어붙은 그녀의 표정을 바라보며 더욱 즐거운 듯 미소를 깊게 했다.“그러니까 너는 우리 서씨 가문에서 액운이나 막으라고 데려온, 그저 그런 제물일 뿐이야. 게다가 말이지, 우리 오빠는 지금 분명 후회하고 있을걸. 어쨌든 우리 아빠는 아직도 병원 침대에 누워서 깨어나지도 못했으니까.”그 말을 끝내고 서유정은 우쭐한 걸음을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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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화

그런데 오늘 밤, 어쩐 일인지 옅은 연분홍색 실크 잠옷을 걸친 강시원이 유난히 눈에 밟혔다.부드럽게 흘러내린 검은 머리카락은 가슴에 느슨히 흘러내려 있었고, 가슴은 풍만했고 허리는 가늘었다. 담담하고 단정한 얼굴은 노란 스탠드 조명에 잠겨 있었고, 물결이 번지는 듯한 눈동자가 살짝 흔들릴 때마다 순수함과 유혹이 기묘하게 뒤섞여 보였다.서정혁의 숨이 낮게 가라앉았다.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씻었어?”강시원은 미간을 찌푸렸다.“...뭐?”다음 순간, 서정혁의 단단한 팔이 그녀의 허리 뒤로 돌아가며 꽉 죄더니, 말 한마디 더 보태지도 않고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그러고는 곧장 침대로 향했다.“서정혁! 뭐 하는 거야? 내려놔!”강시원은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허겁지겁 몸을 비틀었다.“오늘 할머니가 나를 불러서 하신 말씀인데, 도훈이한테 빨리 남동생 하나 만들어 주래.”서정혁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가웠지만, 깨끗한 흰 셔츠 너머로 가슴과 아랫배를 가로지르는 근육은 점점 뜨거워졌다.“딸도 상관없지. 아들이랑 딸, 둘 다 있으면 딱 맞잖아.”강시원의 온몸이 떨렸다. 동공이 연달아 수축했다.한치의 아까워하는 마음도 없이, 서정혁은 마치 물건을 내던지듯 그녀를 침대 위로 휙 던졌다.그가 넥타이를 풀어 헤치고 몸을 숙이려 할 때...짝!강시원은 온몸을 떨면서 그의 뺨을 세게 후려쳤다.서정혁의 얼굴이 옆으로 돌아갔고, 넋이 나간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볼 한쪽에는 선명한 손바닥 자국이 붉게 번지고 있었다.순간, 그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예전에는 힘 한번 주어 말하는 것도 두려워하던 순한 여자가 감히 자기 뺨을 때리다니 말이다.‘도대체 누가, 언제부터 이런 배짱을 준 거지?’“서정혁... 너, 나한테 손대지 마. 나는 네 애 낳는 도구가 아니야!”제물이라는 말이 떠올라, 강시원의 눈동자가 새빨갛게 물들었다. 수치와 분노가 뒤엉켜 숨이 턱 막힐 지경이었다.그녀는 서정혁이 자신을 받아들일 가능성을 천 가지, 만 가지로 생각해 왔다.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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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화

“네 잣대로 남을 재지 마. 그건 네 생각일 뿐이지, 유재윤 생각이 아니야.”강시원은 그 말을 듣고 가볍게 웃었다. 눈매는 얼음처럼 차가웠다.“모든 사람이 너처럼 그렇게 천박하고 얄팍하다고 착각하지 마. 유재윤은 좋은 사람이야. 설령 아니라 해도, 네가 그 사람을 평가할 자격은 없어.”역시 뭔가 있긴 있구나 싶을 만큼 그녀는 그를 단단히 감싸고 있었다.서정혁은 불까지 치밀어 올랐고, 온몸에서 뿜어 나오는 기운이 순식간에 싸늘하게 굳어졌다.“강시원, 조용히 돌아와서 내 아내 노릇만 제대로 해. 네가 전에 무슨 말을 했든, 무슨 짓을 했든, 나는 다 눈감아 줄 수 있어. 하지만 계속 이렇게 제멋대로 굴고, 분별없이 유재윤이랑 엮여 다니면... 그때 내가 뭘 하든, 나중에 가서 후회하지 마.”강시원의 눈동자에는 파문 하나 일지 않았다.“후회? 너한테 시집온 것보다 더 후회되는 일이 세상에 또 있겠어?”서정혁은 가슴팍을 망치로 세게 얻어맞은 것 같았다. 목구멍 깊은 곳에서는 금방이라도 피 맛이 치밀어 오를 것만 같았다.숨 막히는 순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사모님, 방금 도련님이 숨이 좀 가쁘다고 해서요. 얼른 가서 한 번 봐 주세요!”“지금 갈게요!”강시원은 침대에서 튕기듯 일어나, 서정혁을 밀쳐 내고는 순식간에 방 밖으로 사라졌다.서정혁은 잘생긴 얼굴을 잔뜩 어둡게 굳힌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싸늘한 눈매에 서리가 내려앉은 듯했고, 손을 들어 손가락 끝으로 맞았던 뺨을 슬쩍 건드렸다.정리되지 않은 감정들이 뒤죽박죽 뒤엉켜 가슴속에서 제멋대로 날뛰었다.이게 정확히 어떤 감정인지 그는 스스로도 설명할 수가 없었다.다만 한 가지 분명히 알고 있는 사실이 있었다. 강시원은 이미 자기에게 시집온 여자, 이제 그녀는 자기 사람이고, 자기 소유라는 것이다.그는 그녀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그리고 제멋대로 체면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난리 치도록 더 이상 내버려둘 생각도 없었다....강시원이 허겁지겁 방에 도착했을 때, 서도훈은 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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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화

[서도훈: 혹시 엄마 때문이야? 이모는 걱정하지 마. 나랑 아빠가 지켜 줄게. 엄마는 더 이상 뭐라고 안 할 거야!][지민 이모: 도훈아, 고마워. 이모 생각해 줘서. 그런데 너 엄마 겨우 만났잖아. 오늘 밤은 엄마랑 더 많이 같이 있어.][서도훈: 그런데... 그래도 이모 보내기 싫어. 매일매일 이모를 볼 수 있으면 좋을 텐데.][지민 이모: 그럴 거야. 나중에 볼 기회야 얼마든지 있어. 급해하지 말자.][서도훈: 이모 잘 자~ 사랑해~ 뽀뽀~!][지민 이모: 이모도 도훈이 사랑해. 잘 자~]강시원이 대화를 끝까지 다 읽었을 때쯤 손발은 이미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그녀는 말없이 휴대폰을 조금 떨어진 곳에 내려놓고, 어두워진 눈빛으로 서도훈을 마지막으로 한 번 바라본 뒤 조용히 몸을 일으켜 방을 나섰다....그날 밤, 강시원과 서정혁은 한 침대를 쓰지 않았고 각자 따로 잠자리에 들었다.강시원은 박해순이 아침 일찍 일어나는 습관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다음 날 새벽 다섯 시에 먼저 눈을 떴다. 그리고 박해순을 위해 정성껏 푸짐한 아침상을 준비한 다음, 누구도 깨우지 않은 채 조용히 저택을 떠났다.다음 날은 주말이라, 서정혁과 서도훈 부자는 아침 여덟 시가 훌쩍 넘어서야 일어났다.세수하고 옷까지 갈아입은 뒤, 큰아이와 작은아이가 함께 식당으로 들어섰을 때, 박해순은 이미 식사를 마친 뒤였다. 큰 창밖으로 펼쳐진 가을 풍경을 바라보며 차를 마시고 있었다.서정혁은 키 크고 반듯한 몸을 조금 숙여 박해순 앞에 섰다. 짙은 회색 정장 차림에 움직임 하나까지 품위 있고 절제되어 있었다.“할머니, 안녕하세요.”서도훈의 목소리는 아직 어려서 여리지만 또렷하고 맑았다.“증조할머니, 안녕하세요!”“그래, 도훈아. 안녕.”박해순은 서도훈에게만 대답해 줄 뿐, 서정혁은 쳐다보지도 않았다.서정혁은 박해순이 자신에게 꽤 크게 화가 나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는 얇은 입술을 한 번 다물었다가 놓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자신이 잘못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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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화

강시원은 오래된 저택을 나와 곧장 자기 집인 문 빌리지로 돌아왔다.간단히 라면 한 그릇을 끓여 먹고 대충 설거지를 치운 뒤 바로 서재로 들어가, 최근 몇 년 동안 영원 테크에서 진행해 온 프로젝트 자료를 다시 훑어보기 시작했다.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어젯밤 서정혁과 벌였던 언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임지민은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귀하게 다루면서, 정작 자신은 아무렇지도 않게 밟아 버린 그의 말들. 회사에서 억울하게 괴롭힘을 당해도 모르는 척 고개 돌려 버리던 무심함, 끝내는 자신을 욕구 해소용 도구로 쓰려 했던 그 태도까지.거기까지 떠올리면 가슴이 한 번씩 쿡쿡 찔리듯 아려 왔다. 마치 총알이 뚫고 지나간 것처럼 속이 텅 비어 버린 느낌이었다.하지만 데이터를 들여다보고, 자동차를 설계하고, 연구에 완전히 잠기기만 하면 달랐다. 그 순간만큼은 이런 괴로운 생각들이 전부 뒤로 밀려나고 온몸에 다시 새로운 에너지가 채워지는 것 같았다.강시원은 문서에 완전히 빨려 들어가 있었다. 휴대폰 벨 소리가 몇 번이나 울리고 나서야 비로소 그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여보세요, 윤슬 씨.”허둥지둥 전화를 받자, 저쪽에서 윤슬의 밝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시원 씨, 드디어 전화를 받으셨어요!”강시원은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죄송해요, 방금 들었어요. 저한테 무슨 일 있으셨어요?”“시원 씨, 오늘 주말인데 시간 괜찮으세요? 같이 오후에 차 한잔하셨으면 해서요. 제가 기술 쪽으로 여쭤보고 싶은 게 정말 많거든요.”...한 시간 뒤.서정 그룹 계열 쇼핑몰 꼭대기 층 카페.강시원과 윤슬은 그곳에서 마주 앉았다.“저한테 뭘 물어보시겠다고요?”강시원은 포크로 무스케이크를 한 조각 떠 입에 문 채 소녀처럼 수줍게 웃었다.“제가 윤슬 씨한테 가르쳐 드릴 만한 건 별로 없어요. 저, 서정 그룹에서 그냥 평범한 계약직일 뿐인데요.”윤슬은 일부러 장난스럽게 손가락을 까딱 흔들었다.“노노노. 시원 씨는 계약직 아니에요. 서정 그룹의 숨은 고수에 가깝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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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화

강시원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새 아내를 들인 뒤로, 임성호는 그야말로 팔자가 폈다. 날이 갈수록 더 젊어지는 것처럼 보였다.“아빠!”임지민이 가볍게 발걸음을 옮겨 다가오더니, 강시원이 보는 앞에서 살갑게 임성호의 팔짱을 끼었다.“아빠, 이거 진짜 신기하지 않아요? 여기서 언니를 다 만나고.”박영주도 뒤따라 나오며 부드럽게 웃었다.“그러게 말이야. 참 오래 못 봤네. 시원아, 너 요즘은 어떻게 지내? 도훈이는 잘 크고? 키는 좀 컸어?”윤슬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상황을 살폈다.오늘이 임지민을 보는 건 두 번째였다. 그런데 회사에서 봤을 때랑은 또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하지만 어떻게 보이든 상관없이, 윤슬은 이 여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도무지 이유를 설명하기도 애매한 그런 불호였다.강시원의 표정은 싸늘하게 굳어 있었고, 입에서는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았다.임성호는 짙은 눈썹을 찌푸리며 불만스러운 기색을 드러냈다.“시원아, 영주 이모가 너한테 말 거는 중이야. 이 녀석아, 왜 아무 반응이 없어? 귀에 안 들려?”강시원의 가슴 깊은 곳이 묵직하게 내려앉았다.서도훈을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그녀는 산후 후유증으로 청력을 잃었다.약 반년 동안, 왼쪽 귀는 들리는 범위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고, 오른쪽 귀는 거의 들리지 않는 수준까지 떨어졌다.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서정혁조차 몰랐다.임성호는 그냥 무심히 내뱉은 말이었겠지만, 그 한마디는 정확하게 그녀의 가장 아픈 곳을 찔러 버렸다.사람들은 흔히 아버지와 딸은 전생의 연인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녀와 임성호는 전생에 서로 원수였던 사이가 분명했다.박영주는 너그러운 척 웃어 보였다.“괜찮아, 괜찮아. 내가 괜히 말 섞어서 귀찮게 한 거지 뭐. 오빠, 애한테 괜히 엄하게 굴지 마.”윤슬은 입을 다문 채 눈만 커다랗게 떴다.설마 했는데, 강시원과 임지민이 같은 아버지를 둔 이복자매라니 말이다. 게다가 강시원이 운도 테크 회장의 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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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화

임성호의 말이 이미 얼어붙어 있던 공기를 더 차갑게 짓눌러 버렸다. 완전히 염장을 지르는 한 수였다.윤슬은 입을 반쯤 벌린 채, 눈을 떼지 못하고 강시원의 차갑게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심장은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예전에 인터넷에 떠돌던 그 소문이 한창일 때, 윤슬은 직접 그녀에게 사실이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때 강시원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고, 윤슬도 더 깊이 캐묻지 않았다.어차피 대표이사 부인이 회사에서 제일 힘든 개발 부서에 들어가 머리 수만 채우는 일개 인력 취급을 당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정규직도 아니고 회사 시스템에서 가장 아래 등급의 계약직이라니, 말이 되지 않았다. 이게 대체 무슨 괴상한 부부 관계 패턴이란 말인가.임성호는 강시원이 대꾸 한마디 없이 그저 냉랭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만 보고 있자,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시원아, 내가 방금 한 말 이해는 한 거냐?”“임 회장님, 나이 드시더니 점점 낯가죽도 같이 두꺼워지시는 것 같네요.”강시원의 입꼬리가 서늘하게 말려 올라갔다. 눈동자에 떠오른 웃음기마저 얼음처럼 차가웠다.임씨 모녀는 동시에 얼어붙었다.말재주 하나는 끝내준다고 소문난 박영주조차, 그 한마디에 목이 턱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임성호는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았지만 여기서 당장 소리 지르기에는 체면이 걸려 있어 씩씩거리며 말을 쥐어 짜냈다.“강시원! 말버릇 똑바로 해. 나는 네 아버지다!”“소문은 해명을 해야겠죠. 그런데 사실을 왜 해명해야 하죠?”평소에는 조용히 입 다물고 사는 쪽이던 강시원이, 서정혁과 이혼을 결심한 뒤로는 화력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제가 먹은 건 똥인데, 세상 사람들 앞에서는 일부러 웃으면서 ‘와, 최고급 된장이네요’라고 말해 줘야 한다는 거죠? 제 머릿속에 거품이 얼마나 가득 차야, 제 결혼을 박살 내려고 작정한 여자 하나 가려 주겠다고, 그 더러운 들러리 역에 설까요? 초를 술이라고 우기면서 난동 부리는 짓을, 제가 왜 대신 해 줘야 하죠? 제가 그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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