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시원의 발걸음이 잠시 멈췄다.순식간에 수많은 기억이 머릿속으로 밀려들었다. 쓰고, 시고, 떫고, 아픈 것들뿐, 달콤한 조각은 단 하나도 찾을 수가 없었다.참고 버티는 데는 누구보다 자신 있던 여자인데, 이제는 이 결혼에 짓눌려 무너져 내리기 직전이었다. 그래서 스스로를 건져 내고 싶었다.아무리 사랑해도, 아무리 강해도, 결국 사람은 살덩이뿐. 언젠가는 두 발바닥이 피투성이가 될 정도로 찢어지고, 더는 한 걸음도 못 내딛는 날이 오기 마련이다.“사람이 참을 수 있는 데는 한계가 있어. 사랑도 마찬가지야. 막 퍼다 쓰면 버티질 못해.”강시원은 그에게 등을 돌린 채, 금방이라도 바람에 흩어질 듯한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했다.“예전에는 내가 버텨야 할 이유가 있었어. 근데 지금은 없어.”그 말을 남기고, 그녀는 매끄럽고 단정한 뒷모습을 흔들림 없이 세운 채 그대로 걸어 나갔다.서정혁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은 채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는 통째로 살아 있는 얼음산처럼 굳어 있었고, 짙은 눈썹 사이가 깊게 찌푸려진 채 눈동자는 시꺼멓게 가라앉아 있었다.그는 방금 전 강시원이 한 말을 곱씹었다. 그러자 묘하게도 가슴 어딘가에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텅 빈 감각이 피어올랐다.심장 깊은 곳에서 뭔가가 아주 조금씩 흘러 나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손으로 잡으려 하면 미끄러져 나가는 붙잡을 수 없는 그런 느낌이었다.늘 침착하고 무거운 사람이었지만 지금만큼은 생각이 조금 어지러워졌다.그때 노크 소리가 그의 혼란을 끊어 냈다.문이 열리고 한수현이 들어왔다.“대표님.”서정혁은 몸을 앞으로 기울여 거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담배를 더듬어 집어 들었다.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여 깊게 빨았다.“너 Nora 쪽 담당자 만나서 응대하는 거 아니었어?”그는 원래 담배를 거의 피우지 않는 사람이었다. 손놀림은 우아했지만 어디까지나 어색한 초보자에 가까웠다.한수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그런 ‘담당자’란 사람, 애초에 없었습니다.”서정혁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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