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이혼 후 전설이 된 여자: Chapter 281 - Chapter 290

308 Chapters

제281화

배기훈은 강시원을 흘끗 보며 눈빛이 더욱 깊어졌다.“어르신, 너무 고마워하실 필요 없습니다. 강시원 씨만 무사하다면 다른 건 중요하지 않아요.”강시원은 살짝 어리둥절했지만 왠지 모르게 마음이 따뜻해졌다.박해순은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눈앞의 이 젊은이는 인품도, 용모도 어느 하나 흠잡을 데 없어 보였다. 처음 만나는 사이인데도 무척 친근한 느낌이 들었다.자기 못난 손주 녀석보다 백 배는 나았기 때문이다.심지어 강시원이 배기훈과 함께 서 있는 모습은 서정혁과 함께 있을 때보다 훨씬 잘 어울렸다.날씨가 무척 추웠기 때문에 박해순은 강시원이 또 몸을 상할까 봐 그녀를 데리고 차 안으로 가 이야기를 나눴다.배기훈은 여전히 평소처럼 그 어떤 감정도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다. 서정혁 옆을 지나치려는 순간, 남자가 큰 손으로 갑자기 배기훈을 붙잡더니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배기훈 씨, 얘기 좀 하죠.”서정혁은 곧바로 절 안으로 배기훈을 데리고 들어간 뒤 경호원에게 문밖을 지키라고 했다. 배기훈과 이야기를 다 끝낼 때까지 승려나 고객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푸른 등불과 은은한 종소리...마음을 맑게 하는 이 분위기 속에서도 서정혁의 온몸에 밴 독기는 가라앉지 않았다.“서 대표님, 할 말 있으면 그냥 하세요. 시원 씨를 데리고 병원으로 돌아가야 하니까. 치료할 시간이 됐어요.”배기훈은 복숭아꽃 같은 눈을 내리깔고는 나른하게 손목을 돌려 시계를 보았다.서정혁의 잘생긴 눈썹이 차갑게 찌푸려졌다. 절 안의 촛불이 그의 검은 눈동자 속에서 희미하게 반짝이고 있었다.“시원이가 나와 연락하지 않는 거, 혹시 그쪽이 중간에서 방해한 건가요? 시원이를 구해냈다고 해서 우리 부부 사이를 이간질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허황된 망상은 빨리 그만하는 게 좋을 거예요.”“강시원 씨는 성인이에요. 제가 강시원 씨 보호자도 아닌데 어떻게 남의 자유를 함부로 통제하고 선택을 간섭할 자격이 있겠어요?”배기훈은 장난스럽게 입꼬리를 올린 뒤 어깨를 으쓱했다.“그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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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2화

서정혁이 공허한 시선으로 불안한 마음을 안고 부태사 대문에서 걸어 나왔을 때 강시원은 이미 배기훈과 함께 자리를 떠난 상태였다.관자놀이가 두근두근 뛰며 머릿속에 배기훈의 말이 끊임없이 맴돌았다.“오늘은 강시원 씨 어머니 기일입니다.”미간을 깊이 찌푸린 서정혁은 마침내 생각이 났다.아침, 잠시 오늘 무슨 날인가 싶었지만 임지민이 갑자기 찾아와 생각이 흐트러졌다.무거운 발걸음을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예전에 무시했던 장면들이 눈앞에 선명하게 떠올랐다....“정혁 씨, 이번 달 우리 엄마 기일인데 같이 가 줄 수 있어?”...“약속이 있구나... 알았어, 그럼 일 봐. 괜찮아.”...“올해도 안 돼? 괜찮아... 회사 일이 중요하니까. 나 혼자 가도 돼.”그 후로 강시원은 더 이상 이 일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애초에 마음에 두지도 않았던 서정혁인지라 나중에는 완전히 까맣게 잊어버렸다.붉게 충혈된 봉황 같은 눈을 감았다가 뜬 서정혁은 셔츠 넥타이를 난잡하게 풀었으나 여전히 숨이 막히는 듯했다.서씨 가문 일가가 어느새 아이들을 데리고 먼저 모두 자리를 뜬 상태라 문밖에는 고급 세단 두 대만 남아 있었다. 한 대는 서정혁이 타는 방탄유리로 된 롤스로이스였고 다른 한 대는 박해순의 승용차였다.한수현이 다급히 달려와 온몸에 땀을 흘리며 말했다.“서 대표님, 사모님이 배기훈 씨와 함께 가셨습니다. 확인해 본 결과, 사모님께서 그동안 경시 제원 종합병원에 계셨습니다.”“경시... 제원병원?”분노가 치민 서정혁은 순간 목이 쉬었다.“강시원이 그동안 눈앞에 있었다는 뜻이네? 서정 그룹 빌딩과 겨우 십수 킬로미터밖에 안 되는데 너희들은 사람을 찾지도 못했다? 나를 가지고 장난치는 거야?”온몸이 얼어붙은 한수현은 다급히 해명했다.“서 대표님, 시내 모든 크고 작은 병원은 전부 수색했습니다. 사모님을 찾지 못한 건 의료 시스템에 허위 정보를 등록하고 가명과 허위 신분을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병실마다 일일이 뒤질 수는 없잖습니까!”“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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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3화

한수현의 얼굴에 놀람과 흥분이 뒤섞여 있었다.“신원 확인 결과 그 남자가 야외에 버려진 승용차 주인이자 경찰이 계속 찾고 있던 사모님 납치 범인이었습니다. 정말 이상하지 않습니까?”“이상할 게 뭐 있어!”서정혁은 눈빛이 섬뜩할 정도로 차가웠다.“누가 한 건지 짐작 안 가?”‘배기훈이겠지...’아무 말 없이 고개를 떨군 한수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배기훈이 강시원을 위험에서 구해 줬을 뿐만 아니라 배후 범인까지 찾아내 법의 심판을 받게 하고 강시원의 원한도 풀어 줬다. 강시원보다도 한수현이 오히려 배기훈과 친해지고 싶은 심정이었다.한수현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왠지 서정혁이 강시원을 잃을지도 모른다고 느꼈다...“정혁아.”이때 차 창문이 내려가더니 박해순이 어두운 표정으로 차갑게 말했다.“본가로 따라와.”서정혁은 얇은 입술에 핏기가 사라질 정도로 꽉 깨물었다....병원으로 돌아가는 길, 강시원은 참지 못하고 물었다.“기훈 씨, 서정혁이 무슨 말 했어요?”강시원 앞에서 중요한 서류를 검토하는 배기훈은 물음에 피하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궁금해요?”강시원은 살짝 고개를 저었다.“그런 건 아니에요. 기훈 씨한테 실례했을까 봐 걱정돼서요.”시선을 아래로 내리깐 배기훈은 웃을 듯 말 듯 하며 말했다.“서정혁은 나한테 절대 그렇게 못 해요.”“만약 욕설을 하거나 모욕하면...”“말싸움도 나한테 질 걸요? 내 혀가 얼마나 예리한 칼인데.”강시원은 말문이 막혔다.‘대단하시네요.’속으로 이렇게 말한 강시원은 배기훈 앞이라면 서정혁도 말발로는 이기지 못할 것이라 생각해 마음이 놓였다.“이번에 바로 이혼할 거예요?”펜을 돌리며 서류에 서명하던 배기훈이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강시원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그건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는 물음인 것 같네요.”강시원의 입장은 언제나 확고했다. 반드시 이혼할 것이다.“부태사에서 서정혁 씨와 대화할 때 희미하게 느꼈어요.”배기훈은 끝내 시선을 내린 채 말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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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4화

서씨 가문 본가에 돌아온 후, 박해순은 곧바로 서정혁을 데리고 위층 할아버지 서재로 갔다.서재 안은 아직 할아버지 생전에 사용할 때 상태 그대로 유지되어 있었다. 차 테이블 위의 찻잔, 책상 필꽂이에 꽂힌 먹이 마른 붓, 할아버지가 벗어놓고 의자 등에 아무렇게 걸어둔 겉옷까지... 그 어떤 것도 손대지 않은 채 그대로였다.서정혁은 저도 모르게 서재를 두루 둘러보았다. 책장에 가지런히 놓인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사진들, 벽에 걸린 거대한 가족사진에는 할아버지 품에 안긴 어린 시절의 자신과 할아버지 옆에 위풍당당하게 선 아버지가 있었다. 그 사진을 보자 저도 모르게 눈빛이 살짝 촉촉해지며 마음이 아팠다.사진 속 할머니는 약간 통통한 모습에 자태가 단아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로 갈수록 야위었고 건강 상태도 예전만 못해졌다. 상사병이 점점 깊어져서 그런 것이다.서씨 가문에는 열정적인 사람들이 참 많이 나왔다.서정혁은 자신이 감정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비록 할머니가 준 압력 때문에 강시원과 결혼했고 그녀에게 감정이 전혀 없었지만 아이까지 낳았고 먹고 입는 것에서 그녀를 홀대한 적도 없었다. 따라서 이혼할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다. 사랑하지 않더라도 이미 결혼했으면 끝까지 아내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서씨 가문 남자들의 전통이었다.여기까지 생각한 서정혁은 마음속의 죄책감이 덜해진 듯한 느낌에 허리도 곧게 폈다. 일말의 거리낌 없는 모습이었다.“할머니 저...”찰싹!방안에 귀청을 때리는 듯한 청명한 소리가 울렸다.박해순이 눈에 핏발이 선 채 두 눈을 부릅뜨고 서정혁에게 따귀 한 대를 후려갈겼다. 고개가 옆으로 돌아간 서정혁은 볼에 선명한 붉은 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이 따귀는 네가 나를 속이고 사실을 숨긴 죄다! 할머니를 치매 노인 취급하며 속인 죄!”찰싹!박해순이 또 한 대 때렸다. 이를 악물고 버티는 서정혁은 표정이 처음에는 당황한 듯했지만 이내 칠흑처럼 어두워졌다.“이 따귀는 네가 마음도 정도 없는 죄!”박해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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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5화

어금니를 꽉 깨문 서정혁은 오장육부가 점점 더 조여오는 듯했다.순간 그날 생각이 떠올랐다. 강시원이 나타나지 않았을 때 아무런 고민 없이 그저 중간에 마음을 바꿔 도망쳤다고 여겼을 뿐 위험에 처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심지어 경매장에서 임지민을 위해 거액을 쓴 데는 강시원에게 보복하려는 마음도 어느 정도 섞여 있었다.처음부터 이런 일이 벌어질 줄 알았더라면 절대...“시원이는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순수하고 착한 아이야. 우리 서씨 가문의 복덩이이야. 네가 시원이와 결혼한 건 할아버지와 네 아버지가 쌓은 복덕 덕분이야.”박해순은 한 글자 한 글자 무겁게 말했다.“만약 시원이를 잃는다면 평생 너를 용서하지 않을 거야!”서정혁은 낮은 목소리로 무겁게 말했다.“할머니, 저는 강시원과 이혼할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이혼 여부가 네가 원하지 않는다고 해서 안 되는 일이야? 눈이 멀었구나, 정말. 시원이가 너 아니면 다른 누구도 시원이를 안 데려갈 줄 알아? 너 모르나 본데 너 대신 시원이 좋아해 줄 사람은 널리고 널렸어. 밖에 시원이에게 잘해주려고 줄 서 있는 훌륭한 남자들이 한가득이란 말이야! 배기훈 씨도 그 중 한 사람이고!”배기훈을 언급하자 서정혁은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분했다.강시원이 매력적인 여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가장 큰 장점이라면 아마 외모가 확실히 뛰어나고 피부가 곱고 희며 몸매가 완벽하다는 점일 뿐이었다.강시원과의 사랑 없는 결혼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이유도 그녀의 몸매에 만족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한 침대에서 자고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드는 얼굴이었다.임지민은 영혼이 자신과 잘 맞지만 그녀와 결혼해 뜨거운 스킨십을 하며 생활을 하는 건 아직 받아들일 수 없었다.박해순이 ‘최후통첩’을 내렸다.“네가 시원이에게 조금이라도 죄책감이 있고 보상하고 싶다면 당장 임씨 가문 그년과 인연 끊고 도훈이도 임지민과 만나게 하지 마! 여전히 고집부리면 언젠가 서씨 가문 전체가 임지민 때문에 망할 거야!”“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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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6화

“우민에게 방금 물어봤는데 몸이 많이 호전됐다고 하더라고요. 며칠만 더 입원하면 집에 가서 쉬어도 될 것 같아요.”강시원의 부드러운 눈매를 바라보던 배기훈은 잠시 멈칫한 뒤 한마디 덧붙였다.“하지만 꼭 잘 쉬어야 해요. 시골 닭처럼 여기저기 돌아다니지 말고.”강시원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잘생긴 남자인데 왜 내뱉는 단어마다 이렇게 구수한지...’“배기훈 씨도 회사 일 바쁠 텐데 한가로이 고원 산책할 여유가 있으세요?”강시원이 살짝 웃으며 배기훈 말에 맞받아쳤다. 이제 말대꾸할 겨를도 있는 걸 보니 많이 회복한 듯했다.배기훈이 검은 눈썹을 치켜들고 말하려는 찰나 아들 배다울이 먼저 말했다.“아빠가 자주 시내로 가서 직접 암탉 사 왔어요! 닭장에 직접 뛰어들어 닭도 잡아요!”놀란 듯 약간 당황해하는 배기훈의 잘생긴 얼굴을 바라보던 강시원은 참지 못하고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닭을 잡는다고?’왠지 모르게 그 장면이 떠올라 좀 황당했다.남자가 살짝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배다울.”“이모가 그저께 드신 닭탕도 아빠가 직접 끓인 거예요!”배다울은 계속 재잘거렸다. 간만에 강시원을 만난 거라 어떻게든 아빠를 위해 점수를 따야 했다.어리둥절해하는 강시원의 모습에 복숭아 눈을 가늘게 뜬 배기훈은 굳은 기색이 다분했다.“다울아, 더 헛소리하면 집에 가서 엉덩이가 갈라지도록 때릴 거야.”“아빠, 때리지 않아도 내 엉덩이 원래 갈라져 두 쪽이에요.”배다울은 까만 눈동자를 깜빡이며 말했다.“게다가 거짓말 아니에요. 닭탕 정말 아빠가 끓여주신 거고 저도 먹었어요. 정말 맛있었어요! 아빠, 거짓말하는 애는 엉덩이를 맞아야 한다고 하셨잖아요. 나 사실대로 말한 건데 왜 제가 맞아요?”이 세상에 어린애들이 제일 순수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배다울이 한 말은 거짓 하나 없는 다 사실이었다.평소 그 누구보다도 마인드 컨트롤을 잘하는 배기훈이었지만 아들 때문에 표정이 좀 굳었다.약간 경직된 남자의 잘생긴 얼굴을 빤히 쳐다본 강시원은 마음이 복잡해 살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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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7화

아이의 손은 말랑말랑하고 따뜻했다. 힘이 세지 않았지만 강시원은 어느새 마음이 흔들었다.“너무 갑작스러운데...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했어요.”배기훈이 담담한 표정으로 한마디 했다.“아침에 근우 아저씨한테...”배기훈이 힘껏 기침을 하고 입꼬리를 올리며 억지로 웃는 모습에 배다울은 마침내 말을 멈췄다. 행동으로 보여주듯, 웃음은 예의일 뿐만 아니라 경고이기도 했다.“갑자기 가는 건 너무 신세를 지잖아.”강시원은 매우 미안해했다.“전혀 아니에요! 이모, 가요! 제가 휠체어 밀어드릴게요!”배다울은 더욱 힘주어 마사지했다.“그래요, 가요.”배기훈은 담담하게 강시원을 흘겨봤지만 눈동자는 물속 깊은 검은 보석처럼 빛났다.“다울이에게는 친구가 없어 우리 집도 손님을 초대한 적이 없어요. 시원 씨가 첫 번째예요. 우리 아들 말이라면 난 대부분 들어줘요. 다울이가 부탁한 거니까 시원 씨도 사양하지 마세요.”배다울은 전혀 철없이 자란 아이 같지 않았다. 배기훈이 아주 잘 키운 배다울의 모습을 보자 강시원은 자연스럽게 서도훈이 생각났다.본인 역시 아이를 잘 가르치겠다고 굳게 마음먹고 온갖 정성을 다했다. 하지만 늘 곁에 없는 아빠, 할머니의 지나친 애정, 임지민의 방종이 강시원의 노력을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렸다.그렇게 결국 강시원 얻은 건 친아들의 증오와 버림뿐이었다. 엄마로서는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것 같았다.“네, 그럼... 폐 좀 끼치겠습니다.”강시원은 낮은 소리로 초대를 받아들였다....서정혁 앞에서 심장병이 발작한 박해순은 병원에 실려 가 밤새 응급치료를 받고서야 위기에서 벗어났다.서정혁은 중환자실 문 앞에서 밤새 앉아 있었다. 한수현은 곁에서 지키다가 갑자기 잠들었지만 이내 황급히 깨었다. 한편 서정혁은 그때까지도 산처럼 자리에 가만히 앉아 움직이지 않았다.핏줄이 가득한 눈과 검은 수염이 잔뜩 자란 얼굴로 심신이 잔뜩 지쳤음을 알 수 있었다.“대표님.”부스스 일어난 한수현은 침을 닦으며 급히 말했다.“어르신께서 위기를 넘기셨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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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8화

서정혁은 병원에서 오후까지 머물다가 지친 몸을 이끌고 연안 빌리지로 돌아왔다.밤새 잠도 자지 못해 몸과 마음 모두 지친 데다 의사의 말에 온몸이 영혼이라도 빠진 것처럼 기운이 하나도 나지 않았다.소중한 무언가를 천천히 잃어버린 것처럼 가슴 한쪽이 텅 비고 차가웠다.집 안에 들어간 서정혁이 물 한 모금 마시기도 전에 이 집사가 바삐 달려왔다.“도련님, 어서 올라가서 작은 도련님 좀 보세요! 정말 큰일 났습니다!”서정혁은 표정이 굳었다.“무슨 일이야? 도훈이가 아파?”“아닙니다, 다쳤어요!”“어떻게 된 일이야?”“오늘 작은 도련님이 한성 도련님과 함께 사모님 보러 갔다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다툼이 생겨서 두 아이가 심하게 싸웠습니다. 제가 간신히 말렸어요. 작은 도련님이 눈도 퉁퉁 부었고 얼굴도 할퀴어서 말이 아니에요!”이 집사는 애가 타는 듯했다.“한성 도련님이 손이 너무 맵네요. 친척인데 원수 대하듯 하다니!”“애들끼리 무슨 원한이 있겠어. 쓸데없는 생각하지 마.”서정혁은 미간을 잔뜩 움츠렸다.“왜 싸운 거지?”“한성 도련님이 작은 도련님을 놀렸거든요. 도련님과 사모님이 분명 이혼할 거라고 작은 도련님은 곧 엄마 없는 애가 될 거라고 했어요.”한숨을 내쉰 이 집사는 원망스러운 말투로 말을 이었다.“한성 도련님이 IQ나 집안이나 아니면 외모를 봐도 작은 도련님한테 한참 미치지 못하긴 하지만 이참에 기회를 잡았으니 작은 도련님을 마음껏 놀리려고 한 것 같아요. 어린애가 어른들의 복잡한 세상을 어떻게 알겠어요. 다 부모한테 배운 거겠죠.”“그만해!”서정혁은 짜증 나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서정 그룹 가문 멤버에 대해 뒤에서 이야기하지 않는 게 서씨 가문 규칙이야. 다 잊었어?”“흑흑... 아빠!”이때 서도훈이 울며 달려와 서정혁을 꽉 끌어안았다.“아빠, 엄마랑 이혼하지 마... 나 이혼하는 거 싫어!”그 말에 가슴이 살짝 떨린 서정혁은 차가운 얼굴도 조금 누그러졌다.서도훈이 또 한마디 차갑게 내뱉었다.“만약 이혼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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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9화

“다시 한번 그런 불효자 같은 말을 입에 담으면 짐 싸서 할머니 집에 가! 그리고 영영 돌아오지 마!”깜짝 놀란 서도훈은 고개를 떨구었지만 눈빛에는 내키지 않는 기색이 가득했다....임씨 가문 별장.“젠장! 그년이 아직 살아있어? 게다가 아주 멀쩡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침실 바닥은 엉망이었다. 평소 부드러워 보이던 임지민은 젖 먹던 힘까지 꺼내 방 안의 깨뜨릴 수 있는 것들을 모조리 깨뜨리고 탁자 위 물건도 쓸어버렸다.“지민아! 일단... 화내지 마, 제발!”급히 달려온 박영주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 온몸을 떨고 있는 임지민을 껴안았다. 눈빛에는 음흉한 독기가 스쳤다.“그런 운은 한두 번일 뿐이야. 이번에 안 됐다고 해도 다음에 또 기회가 있으니 네 삼촌이 분명 방법을 찾아줄 거야!”임지민은 거칠게 숨을 쉬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엄마, 엄마가 부탁한 그 사람 대체 누구예요? 왜 그렇게 믿는 거예요? 정말 믿을 만한 사람이긴 해요?”박영주는 얼굴이 잔뜩 어두워졌다.“그 사람은 엄마가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낸 아주 친한 친구야. 그 사람 말고는 엄마 아무도 믿지 않아.”그 남자에 관한 건 딱 여기까지만 말할 수 있었다. 더 말하면 박영주마저 위험해질지 모르기 때문이다.박영주는 이 사람에 대해 평생 임지민에게 비밀로 할 생각이었다. 그래야만 영원히 임씨 가문의 딸로 강부안 그 늙은 여자의 딸을 누를 수 있을 테니까!“그래요, 엄마가 알아서 잘 얘기해 줘요. 하지만 한 가지 명심해요.”임지민의 눈빛에는 독기가 배어 있었다.“그 사람을 이용해서 일을 처리할 때 반드시 철저히 해야 해요. 괜히 우리까지 끌어들이게 하지 말고. 지금 경찰이 오대호와 고용한 납치범들을 체포했어요. 만약 경찰들이 엄마 친구까지 잡고 자백을 하게 만들면 수사가 이어져 엄마까지 연루될 수도 있어요. 엄마가 발각되면 나까지 말려들 거고. 지난번 진 경관이 이미 나를 의심하기 시작했단 말이에요. 조금이라도 단서를 잡으면 우리 완전히 끝장이에요. 그럼 정혁 오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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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0화

“영주야, 미안해.”전화기 너머로 죄책감 가득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박영주에 대한 한없는 부드러움이 그대로 전해졌다.“원래 계획은 완벽했어. 강시원 그년 분명 죽을 줄 알았는데... 예상 밖에 그년 뒤에 배기훈이 서 있는 거 있지? 그 남자 꽤 힘이 있는 사람이야. 어느 면에서도 서정혁에 뒤지지 않아.”박영주는 원한 가득한 얼굴로 이를 갈다.“서정혁이 강시원을 사랑하지도 않고 질릴 정도로 싫어하니 마음대로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계획에 빈틈이 하나 있었구나!”남자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위로했다.“영주야, 아직 기회는 있어. 지금은 일단 두 사람이 이혼한 다음 지민이를 서씨 가문에 시집보내는 게 그 무엇보다 중요해.”“그래, 일단은 그럴 수밖에!”“영주야...”남자가 망설이다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꽤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임성호가 너와 지민이에게 잘해줘?”“나한테 어떻게 하든 상관없어. 중요한 건 지민한테는 정말 잘해줘. 의식주는 재벌가 딸에 뒤지지 않아. 강시원은 꿈에서도 상상 못 할 정도야.”박영주는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감으며 몹시 자랑스러운 말투로 말했다.“그러면 다행이네.”남자가 잠시 멈칫하더니 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영주야, 요즘 기회 되면 지민이 한번 보게 해줄 수 없을까?”“안 돼, 지금은 절대 안 돼!”그러자 남자가 간청했다.“그냥 멀리서만 볼게, 한 번, 딱 한 번 보기만 하면 돼... 방해하지 않을게.”박영주는 여전히 거절하며 짜증 섞인 듯 대답했다.“나중에 시간 날 때 다시 얘기해!”...추운 밤, 검은 세단 승용차가 임씨 가문 저택 정원에 세워져 있었다. 큰 기럭지를 자랑하는 서정혁이 문에 기대어 서 있었다. 매서운 바람이 야윈 얼굴을 스쳤지만 찬 바람 속에서 손으로 불꽃을 가리고 담배에 불을 붙여 깊게 들이마셨다.평소 담배를 잘 피우지 않지만 마음이 복잡할 때는 계속 피웠다.“오빠!”임지민은 새하얀 원피스에 고급 베이지 캐시미 숄을 어깨에 두르고 나왔다. 서정혁을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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