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다섯 번째 결혼기념일에서: Chapter 111 - Chapter 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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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1화

“네. 저도 그런 물건이 있다는 건 알지만 직접 써보진 않았거든요. 하나 사서 설치해 보고 얼마나 편한지 시험해 봐요.”강지연은 들뜬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그리고 앞으로 제가 할머니 모시고 여행 다닐 거거든요. 어디서 얼마나 놀든 집에 있는 꽃들 마를까 봐 걱정 안 해도 되고 이웃분들 귀찮게 할 필요도 없어요.”“하지만...”홍순자는 망설이며 강지연을 바라보았다.“너도 곧 출국한다면서? 그러면 그 별장은...”강지연은 환히 웃었다.“할머니, 앞으로 제가 어디를 가든 할머니는 저랑 함께 가실 거잖아요.”어디에 있던 강지연은 자리만 잡는다면 할머니를 반드시 곁에 모실 거라 다짐했다.홍순자는 살며시 웃으며 부드럽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강지연은 어린 시절부터 몸이 약했고 여자라는 이유로 부모에게 큰 기대를 받지 못했으며 부모의 관심은 언제나 남동생에게로 쏠려 있었다.그래서 아플 때마다 곁을 지켜준 사람은 할머니였고 강지연은 홍순자가 손바닥에 놓고 키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하지만 강지연은 홍순자의 삶도 절대 행복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할아버지는 할머니에게도 무뚝뚝했고 아들, 그러니까 강지연의 아버지만 편애했다.강지연에게는 아버지보다 먼저 태어난 고모가 한 명 있는데 할머니가 죽을힘을 다해 고모를 공부시키고 멀리 떠날 수 있도록 밀어주지 않았더라면 고모는 이미 이 집안에서 피만 빨리는 희생양처럼 살고 있었을 것이다.강지연은 고모가 밖에서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는 잘 모르고 있었다.하지만 고모는 늘 돈을 보내왔고 전화할 때마다 할머니를 데려가겠다고 말했다.그럼에도 할머니는 단 한 번도 떠나본 적이 없었다.그 이유가 할아버지 때문은 아니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도 할머니는 끝내 고모 곁으로 가지 않았다.강지연은 그 이유가 자기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홍순자는 강지연을 혼자 두고 갈 수가 없었다.강지연이 혹여 누구한테 손해 볼까 봐, 불행하게 살까 봐, 어떻게든 이곳에 남아 있어야 했다.손녀가 언제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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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2화

강지연은 멀찍이서 두 사람을 바라보며 생각했다.‘역시 이하나를 데리고 병원에 온 게 맞네. 이제는 더 이상 나한테 아이를 낳자고 강요하지 않겠지.’간호사가 두 사람을 약 타는 곳으로 안내했다. 처방이 한약이라 여기서 대신 달여 줄지, 집에 가져가서 직접 달일지 선택하라고 물었고 온하준은 대신 달이는 쪽을 골랐다.그렇게 달인 약은 직접 찾아가거나 택배로 받을 수 있었는데 그는 택배 수령을 선택했고 주소란에는 회사 주소를 써넣었다.원래 강지연은 그가 주소를 어디에 적는지 알 길이 없었다. 이 거리에서야 무슨 수로 볼 수 있겠는가.하지만 이하나의 애교 섞인 목소리는 너무 선명히 들려왔다.“왜 회사로 적어?”온하준은 펜을 내려놓으며 낮고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회사로 적어야 내 번호를 적지. 내가 직접 받아서 네가 제대로 마시는지 매일 확인할 거야. 내가 너를 몰라? 대충 먹는 척하다가 버릴 거잖아.”이하나는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몸을 배배 꼬았다.강지연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대단한 대표님 나셨네. 게다가 택배까지 직접 받는 대표라니.’문득 그녀의 머릿속에 오래된 기억이 떠올랐다.날씨가 갑자기 쌀쌀해졌던 날, 강지연은 얇게 입고 나간 온하준이 걱정됐다.그녀는 외투라도 보내 주고 싶었지만 직접 회사로 찾아갈 수 없었고 마침 진경숙도 시간이 없었다.결국 고민 끝에 퀵 서비스라도 불러야 하나 망설이던 강지연은 그조차도 결정을 못 내려 온하준에게 전화를 걸었다.“퀵 서비스를 보낼 건데 번호를 네 것 남길까 아니면...”강지연이 프런트나 비서실 번호를 남길까 묻기도 전에 온하준은 냉랭한 목소리로 그녀의 말을 잘랐다.“내 개인 번호를 퀵 서비스한테 준다고? 넌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그때 그녀는 똑똑히 깨달았다. 그는 성공한 사람이고 높은 자리에 있는 대표라서 사생활을 철저히 지켜야 하는 사람이라고.그러니 그의 번호는 함부로 다른 사람한테 알려줘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그랬던 온하준이 지금 자신의 손으로 직접 번호를 적고 택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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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3화

전화받기가 무섭게 수화기 너머에서 끓어오른 분노가 쏟아졌다.“강지연, 네가 감히 경찰에 신고해? 왜 신고한 거야?”드디어 경찰이 그쪽을 찾아간 모양이었다. 상대는 불같이 소리를 질러대는데 강지연의 표정은 차분했다.“강지연 님, 이제 들어오세요.”간호사의 부름에 그녀는 미소를 띠며 전화를 끊고 고개를 끄덕였다.“네, 감사합니다.”손에 쥔 휴대전화는 곧장 다시 울리기 시작했지만 강지연은 받지 않은 채 진료실로 들어갔다.치료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전화는 끊임없이 진동했다.“전화 온 거 같은데? 받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배우진이 조심스레 물었다.“괜찮아요. 아마 스팸 전화일 거예요.”강지연은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정확히 말하자면 스팸보다도 못한 전화였다. 한참이나 울리던 진동은 결국 멎었다.치료를 마치고 배우진은 침을 뽑아주며 물었다.“산부인과는 가 봤어요?”강지연은 즉시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차렸다. 아마 온하준은 배우진한테 산부인과에 관한 걸 물었을 것이고 배우진은 그게 강지연을 위한 상담인 줄 알고 있는 듯했다.그리고 배우진은 하루 종일 진료실 밖을 나가보지도 못했으니 누가 진료받으러 다녀갔는지 알 리가 없었다.강지연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볼 필요 없어요.”굳이 자신의 상처를 또렷하게 드러내 모두 앞에 펼쳐 보일 필요는 없었다.배우진은 고개를 끄덕였다.“사실 두 분 다 문제없으면 너무 조급해하실 필요 없어요. 아직 젊잖아요.”“그러게요. 신경 써줘서 고마워요. 선생님, 그러면 저 내일은 몇 시에 오면 될까요? 오후에 와도 괜찮을까요?”내일은 비자 예약을 다시 한 날이었다.“그럼요. 내일은 하루 종일 여기 있을 거예요.”‘잘 됐다. 내일 먼저 비자 절차를 밟고 내가 좋아하는 식당에 가서 점심을 먹고 여기 와서 침 치료하면 완벽하겠네.’배우진이 이어 말했다.“여기 재활 훈련 동작이 한 세트 있어요. 며칠 동안 침 맞으신 걸로 봤을 때 한번 해보셔도 되겠네요. 제 스승님이 직접 만든 동작이라 지금은 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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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4화

강지연은 휴대전화가 들어있는 가방을 사물함 안에 넣어뒀다.온하준이 얼마나 전화를 했는지 알지도 못했고 설령 알았다고 해도 받지 않았을 거였다.그는 평소와 달리 어딘가 흐트러져 있었다.열다섯 살 때부터 온하준을 알아 왔던 강지연은 그가 이렇게 무너지는 경우는 단 하나뿐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가족이 돈다발을 얼굴에 던져도, 집안과 인연을 끊겠다고 선언할 때도 그는 늘 냉정하고 침착했다.심지어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조차 그는 뼛속까지 사무치는 슬픔에도 그저 담담하게 할머니가 돌아갔다고만 말할 뿐 감정을 내보이지 않았다.오직 이하나, 그 여자만이 온하준의 이성을 무너뜨릴 수 있었다.5년 전 이하나가 떠났을 때 그는 영혼 없는 사람처럼 날마다 술에 몸을 맡겼다.5년이 지난 지금 이하나가 경찰 조사를 받게 되자 그는 또다시 세상을 부숴버릴 듯한 광기로 뒤덮였다.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강지연은 온하준이 성큼성큼 다가오는 모습을 조용히 올려다보았다.그는 강지연을 거칠게 일으켜 의자에 내던졌다.등이 등받이에 세게 부딪히는 순간, 통증이 전신으로 파도처럼 번져 나가며 몸이 저릿하게 떨렸다.강지연은 입술을 꽉 깨물고 치밀어 오르는 신음을 억지로 삼켰다.“전화했는데 왜 안 받아? 화재 사건 조사 나온 거 알고는 있어?”온하준이 분노에 차 소리쳤다.강지연은 말없이 앞을 응시했다.시야에 들어온 건 그의 허리 그리고 그가 매고 있는 한정판 가죽 벨트였다.예전에 그녀가 직접 골라주었던 어떤 정장과도 잘 어울리는 그 벨트.강지연은 벨트에 새겨진 로고를 한동안 바라보다가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알지. 내가 신고했는데 내가 어떻게 모르겠어.”“너!”그는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로 강지연을 가리켰고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도대체 왜 신고를 한 거야? 이하나가 잘못했다고 인정했잖아. 우린 너한테 보상하겠다고 했고 네가 무엇을 요구하든 다 들어주겠다고도 했잖아. 그런데도 왜 신고를 해?”“우리?”강지연이 비릿하게 웃었다.“너랑 누구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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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5화

“강지연!”온하준이 그녀의 말을 잘라 막았다. 그의 눈에는 짙은 고통이 뒤엉켜 있었다.“그런 말을 왜 해? 하나는 그냥 널 한 번 겁만 주려고 했을 뿐이야. 길을 건널 때도 개미부터 지나가게 한 애가 이하나야. 그런 애가 어떻게 널 죽이려 했겠어?”강지연은 더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남의 생각을 바꾸는 일이라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온하준, 나도 알아.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네 생각은 안 바뀌어. 마찬가지로 네가 무슨 말 해도 내 생각 역시 안 바뀌고. 그러니까 나한테 와서 시간 낭비하지 말고 경찰한테 가서 말해.”“강지연!”온하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네가 신고를 취소하겠다는 건데? 방법을 말해 봐.”“분명히 말하는데 그럴 가능성은 절대 없어.”“좋아.”온하준은 강지연을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빛은 온통 실망으로 젖어 있었다.“좋아, 강지연. 이제야 네가 어떤 사람인지 알겠다. 아무리 그래도 질투가 사람을 이 정도로 무섭게 만들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어.”“무섭다고?”강지연은 순식간에 어이가 없었다. 사람 마음이 한 번 비뚤어지면 이렇게 선악도 가리지 못하게 되는 걸까 싶었다.“온하준, 누구를 무섭다는 거야? 무서운 사람은 당연히 이하나여야 하는 거 아니야?”강지연은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이해할 수 없었다.‘회의실에 불을 놓은 건 이하나인데 왜 무서운 사람이 나여야 하는 거야?’“좋아, 강지연. 너는 평생 온하준의 아내라는 타이틀이나 붙들고 살아. 이하나는 내가 무슨 수를 쓰더라도 지켜낼 거야.”강지연은 순간 얼이 빠져 머릿속에 물음표만 가득 떠올랐다.“너, 도대체...”강지연은 자신이 지금 원하는 건 온하준의 아내 자리가 아니라 자유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온하준은 그녀의 말을 채 듣지도 않고 다시 분노에 휩싸인 걸음으로 뒤돌아서 나가버렸다.강지연은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한바탕 싸웠더니 체력이 오히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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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6화

“너 아까부터 왜 그렇게 비꼬면서 말하는 건데? 대체 하고 싶은 말이 뭐야?”온하준은 강지연의 앞으로 다가오더니 말을 이었다.“이하나는 임신 문제 때문에 전남편한테 가정폭력까지 당하면서 별별 고생을 다 했어. 아이를 못 갖는다는 게 그 애한테는 평생의 상처야. 난 친구로서 좋은 의사한테 한번 데려와 본 거고. 그게 뭐가 잘못이야? 이런 것도 질투해?”강지연은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저었다.“아니, 질투 안 해. 네가 오해한 거야. 온하준, 네가 이하나 옆에서 약을 챙겨주던 배를 마사지해 주든 그건 다 네 자유야. 난 상관 안 해. 다만 나도 내 권리와 자유가 있을 뿐이지. 딱 하나만 부탁할게. 이하나의 배를 마사지해 준 그 손으로 다시는 나를 만지지 마. 난 그게 더럽고 역겨워.”“뭐라고?”온하준의 얼굴이 붉게 상기됐다.“다시 말해 봐.”다시 말하라니, 그렇다면 더 돌려 말해 줄 이유도 없었다.강지연은 고개를 들어 온하준을 똑바로 바라보며 또렷하게 말했다.“더럽고 역겹다고.”“너! 정말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이구나!”온하준은 분노에 치를 떨었다.“강지연, 똑똑히 들어. 네가 이번 일을 이용해서 이하나를 감방에 보내겠다느니, 회사에서 쫓아내겠다느니 그런 건 절대 불가능해! 내가 그런 꼴을 두고 볼 것 같아?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야. 네가 감히 나한테 맞서? 너한테 그럴 만한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마침, 그때 온하준의 휴대전화가 울렸다.휴대전화를 꺼내는 순간, 화면에 뜬 이름을 그도, 강지연도 동시에 보았다.[울하나]“여보세요.”방금까지 울분에 차 있던 목소리는 단숨에 부드러운 목소리로 바뀌었다.“하나야.”“하준아...”수화기 너머 이하나의 목소리는 애교로 가득했다.“지금 어디야? 나 무서워...”“무서워할 거 없어. 내가 있잖아.”온하준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시선은 강지연에게 고정하고 있었다.“내가 말했지? 최고의 변호사팀을 붙이겠다고. 널 절대 다치게 두지 않을 거야. 지금 바로 갈게.”그는 강지연을 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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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7화

강지연의 고모 강희라였다. 어릴 때부터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몇 번 본적 없는 고모.강지연의 기억 속 강희라는 강씨 집안에서 그저 이름만 걸어놓은 사람이었다.어릴 적 할아버지는 늘 고모를 출가시킨 건 괜히 딸을 괜히 키운 거라는 식으로 할머니를 탓하며 나무랐다.남의 집 딸들은 얼마나 잘사는 집안에 시집가서 친정 집안에 얼마나 든든하게 보태고 사는지, 아들 결혼할 때 얼마나 많은 돈을 보탰는지, 그런 이야기를 입에 달고 살았다.그 영향 탓에 강지연의 부모 역시 강희라를 못마땅해하며 밖에서 혼자 잘 살면서 친정을 돕지 않는다고 늘 불평했다.그들이 말하는 집안을 돕는다는 건 결국 이 집의 아들이자 고모의 동생인 강지연의 아버지를 뒷바라지하라는 뜻이었다.하지만 강지연이 알기로는 아버지가 결혼할 때도, 심지어 할아버지가 재혼할 때도 고모는 빠짐없이 집에 돈을 보탰다.특히 아버지 결혼 때 어머니 쪽에서 터무니없이 높은 예단과 예물을 요구했지만 그 돈을 마련해준 것도 고모였다.이 사실은 훗날, 강지연이 철이 든 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싸우며 고모 이야기를 꺼낼 때 우연히 듣게 된 것이었다.그날도 할아버지는 고모를 향해 욕설에 가까운 말을 퍼부으며 천하에 둘도 없는 몰지각한 자식이라고 깎아내렸다.할머니는 참다못해 고모를 두둔하며 고모가 매달 집에 돈을 부쳐왔고 강지연 아버지 결혼 때는 큰 액수까지 보탰다고 맞섰다.그러자 할아버지는 그건 딸이라면 마땅히 해야 할 도리라며 세상에 어느 집 딸이 친정에 돈 한 푼 안 붙이느냐고 예전엔 딸을 팔기까지 했다며 목청을 높였다.그 뒤로 고모는 두 번 다시 돈을 보내지 않았다.그러나 강지연은 나중에 할머니와 고모가 통화하는 걸 우연히 듣고 말았다.할머니가 고모에게 더는 돈을 보내지 말고 인제 그만 자기 삶을 살면서 이 집 걱정은 그만두라고 다독이고 있었다.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을 때, 고모는 다시 돌아왔다.강지연은 오래도록 보지 못한 혈육끼리 오랜만에 재회했으니 서로를 부둥켜안고 우는 장면이 펼쳐질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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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8화

“그래?”강희라의 목소리에 기쁨이 배어 있었다.“언제 올 거야? 고모가 너 오기 전에 자리를 잡아줄게.”“아직 멀었어요, 고모. 아마 8월쯤이 될 것 같아요.”강희라는 진심으로 기분이 좋은 듯 눈이 다 감길 정도로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고모가 있으니까 아무 걱정 없이 몸만 와. 돈도 걱정할 거 없어. 고모가 다 해 줄게. 고모가 너무 오랜 시간을 밖에서 혼자 지내다 보니 외로웠는데. 너무 좋다, 지연아. 드디어 가족을 가까이서 볼 수 있다니.”세 사람은 한참을 이야기 나누다 아쉬움을 잔뜩 품은 채 영상 통화를 끊었다. 홍순자의 눈가에는 금세 눈물이 고였다.“지연아, 네 고모도 참 쉽지 않아...”강지연도 그 사실을 당연히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늘 할머니가 고모 유학을 뒷바라지하느라 자신은 대학 한번 못 가봤다고 불평했다.하지만 강지연이 아는 사실은 정반대였다.고모는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히 스스로 능력만으로 유학길에 올랐다.본인의 실력으로 대학에 붙고 전액 장학금을 따냈다.그 후에는 해외에서 아르바이트하며 학비와 생활비를 스스로 감당했다.초등학교 교사에 불과했던 홍순자의 월급은 얼마 되지도 않았고 게다가 집에는 돈을 물 쓰듯 하는 아들까지 있었으니 고모의 뒷바라지 했다기에는 너무 황당한 말이었다.반면 홍순자는 아들 하나만은 잘 키우고 싶었다. 하지만 강지연의 아버지는 공부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고 수능 점수도 엉망이었다.“지연아, 잠깐만.”홍순자는 갑자기 일어나 방 안으로 들어가더니 카드 하나를 가지고 나왔다.그녀는 그 카드를 강지연한테 내밀며 눈물을 머금고 말했다.“지연아, 얼마 안 되는 돈이지만 유학길에 보태. 밖에 나가서는 절대 자신을 스스로 힘들게 하면 안 된다. 네 고모가 유학 하러 갔을 때는 할머니가 능력이 안 돼서 괜히 네 고모를 고생만 시켰어.”“할머니, 저 돈 있어요.”강지연은 미소를 지은 채 카드를 다시 홍순자에게 밀어주며 말했다.“저 돈 많아요.”지난 5년 동안, 다른 건 몰라도 돈 만큼은 온하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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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9화

김도윤도 그 아래 댓글을 달았다.[온하준, 진짜 사나이네!]강지연은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진짜 사나이라는 게 이런 건가? 자기 아내한테는 상처 주고 다른 여자를 두둔하는 사람?’강지연은 원래 나서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하지만 김도윤의 그 한 줄이 눈을 찌를 만큼 거슬렸던 그녀는 결국 근질거리는 손가락을 참지 못하고 댓글을 하나 남겼다.[온하준, 지금 잡은 건 누구의 손이야?]댓글을 달자마자 고등학교 동창 최아현이 스크린숏과 함께 문자를 보내왔다.[강지연, 너 아직 나 안 차단했구나?]강지연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스크린숏을 보자마자 알아차렸다.방금 온하준이 인스타에 올린 그 게시물이었는데 최아현이 보낸 캡처에는 고등학교 동창들 댓글만 선택적으로 담겨 있었다.아마도 최아현은 김도윤을 몰라서 그의 댓글을 캡처에서 일부러 가렸거나 애초에 눈치를 채지 못한 모양이었다.그리고 강지연의 댓글은 캡처할 당시 아직 달리지 않았던 모양이었다.강지연은 이내 문자를 보냈다.[내가 왜 널 차단해?][너 결혼하고 나서 5년 동안 자취를 감췄잖아. 결혼한 뒤로는 동창 모임에도 한 번도 안 나오고 단톡방에서도 말 한마디 안 하고 누구하고도 연락 안 하고.]강지연은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았다.자신이 은둔하듯 살아왔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누군가가 이렇게 문장으로 정리해 주니 그 말은 마치 따귀 한 대를 얻어맞은 듯 그녀의 정신을 더 선명하게, 더 깊게 깨우는 듯했다.알고 보니 강지연은 이렇게나 좁고 답답한 테두리 안에 갇혀 살고 있었다. 그것이 결혼이라는 굴레 때문이든 아니면 스스로 만들어낸 감옥이든 간에.최아현이 계속 문자를 보내왔다.[게다가 온하준도 널 얼마나 깊이 숨겨놨는지 알아? 우리 동창들 모일 때마다 넌 사람 많은 데 나오는 걸 원래 안 좋아한다면서 안 데리고 나왔잖아. 우리가 고등학교 때부터 온하준을 봐 와서 그러려니 하는 거지 그냥 다른 사람들 같았으면 널 어디 가둬놓은 줄 알았을 거야.]강지연의 마음 한구석이 싸늘하게 식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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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0화

온하준은 그저 시간이 되기 전에는 집에 가기 싫었을 뿐이었다.무엇보다도 그는 아이 이야기를 꺼내는 것 자체를 가장 피하고 싶어 했다.[아현아, 너는 잘 지내? 요즘 뭐 하고 살아?]더 이상 온하준과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 가고 싶지 않았던 강지연은 화제를 바꿔 물었다.최아현이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나? 맨날 바쁘지. 소처럼 일만 해. 지금은 건축회사 다니고 매일 도면 그리고 현장 뛰어다니는 중. 나 지금도 출장 나와 있어. 나중에 돌아가면 만나서 놀자.][좋아.][그래, 더 이상 안 귀찮게 할게. 괜히 온하준한테 내가 둘만의 시간을 방해했다는 소리 듣기 싫으니까. 하하.][잘 자, 최아현.]잠시 뒤, 잘 자라는 이모티콘 하나가 도착했다.최아현과 나눈 대화는 오래 잊고 지냈던 인스타라는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서서히 깨워놓았다.지난 5년 동안 강지연은 바닥까지 내려앉은 자존감 속에서 현실 세계와 연결된 거의 모든 끈을 하나씩 잘라냈다.사람들과의 연락은 물론, 온라인마저도 완전히 끊어버렸다. 마치 세상에서 혼자만 사라진 듯이.강지연은 오랜만에 자신의 인스타 친구 분류를 살펴보고 동창들의 인스타 기록도 하나씩 넘겨 보기 시작했다.모두 각자의 색깔로 눈이 부실 만큼 다채로운 삶을 살고 있었다.물론, 누구에게나 저마다의 쓴맛과 단맛이 있고 인생이란 언제나 고요하고 평온하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걸 그녀도 알고 있었다.그런데도 인스타 속 사람들은 각자 자기 자리에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을 던지고 있었다.오직 뒤처져 있는 건 이 자리에 멈춰 선 자신뿐이었다.‘그래도 괜찮아. 다들 조금만 기다려줘. 나도 이제 곧 따라잡을 테니까.’강지연은 이어서 명품 매입 업체에서 일을 하는 이안의 인스타도 들어가 보였다.남자 친구와 함께 밤샘 야근을 하며 일하는 사진이 한 장 올라와 있었는데 글과 사진으로 짐작해 보니 남자 친구는 정보통신업계에 종사하는 듯했다.젊은 여자와 젊은 남자가 각자의 미래를 위해 함께 달리는 모습을 보니 화면 너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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