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번째 결혼기념일에서의 모든 챕터: 챕터 101 - 챕터 110

775 챕터

제101화

예전 같았으면 홍순자는 바보 같은 소리를 한다고, 지연의 할머니면 네 할머니와 마찬가지라고 말했을 테지만 지금은 그저 씁쓸히 웃고만 계셨다.그 시절 홍순자는 손녀 부부 사이에 문제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사람 마음은 결국 정으로 움직인다고 믿었다.강지연이 온하준에게 잘하면 언젠가는 그도 강지연의 마음을 알아주고 사랑을 줄 거로 생각했다.하지만 지금 강지연의 얼굴에는 행복이라고는 깃들어 있지 않았다.겉으로 아무리 태연한 척해도 손바닥에 놓고 키운 손녀의 속내를 홍순자가 모를 리 없었고 그래서 더는 그런 말을 건넬 수 없었다.홍순자가 속으로 한숨을 삼키고 있을 때 설거지를 끝낸 온하준이 그릇을 포개며 말했다.“할머니, 나중에 식기세척기 하나 사서 설치해 드릴게요.”홍순자는 생각을 거두며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괜찮아. 번거롭게 뭐 하러 그런 걸 사.”“번거롭긴요. 나중에 새집에서 함께 산다고 해도 인테리어를 마치려면 아직 멀었잖아요.”그는 잠시 멈칫하다가 담담하지만 어딘가 쓸쓸한 눈으로 말을 이었다.“전 이제 할머니가 없지만 지연의 할머니면 제 할머니와 마찬가지잖아요.”가슴 위로 시큼한 감각이 밀려왔다. 누군가 레몬 한 조각을 꾹 짜서 심장을 비벼대는 듯한 아릿한 고통이었다.강지연에게 이 통증은 너무 익숙했다.해 질 녘 온하준이 집사람한테 돈다발로 뺨을 맞은 날도, 차라리 몸을 팔면서 살겠다며 입꼬리를 올린 채 등을 돌리던 그의 뒷모습을 봤을 때도, 사흘 동안 학교에 오지 않던 그를 장례식장에서 우연히 발견했던 날도 그리고 학교로 돌아온 그가 강지연한테 자신의 할머니가 돌아갔다며 씁쓸하게 미소를 지은 채 말하던 날도 그랬다.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런 통증을 맛본 건 이하나가 먼 곳으로 떠난 날이었다.온하준은 그날 자신이 버티던 마지막 기둥이 무너졌다고 했다.가슴이 시큰하게 아려오는 그 느낌.강지연은 이 느낌이 마음이 아파서 생기는 통증임을 잘 알고 있었다.언제나 빛났던 그가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던 상처와 비참함, 강지연은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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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2화

“할머니...”온하준은 홍순자 앞에서 일부러 가련한 표정을 지으며 투덜거렸다.“지연이가 저 쫓아내려 해요. 너무 무서워요.”강지연은 어이가 없어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왜 저래?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온하준의 말에 홍순자는 웃음을 터뜨렸다.“바보야. 지연이는 네가 바쁜데 괜히 늙은이하고 놀다가 일에 지장 생길까 봐 걱정해서 그런 거지.”“할머니, 저 안 바빠요. 휴가예요.”온하준은 어디서 꺼냈는지 화투를 들고 와서 홍순자 앞에 내려놓았다.강지연은 이 상황이 너무 황당했다.온하준은 정말로 홍순자와 함께 고스톱을 치기 시작했고 아예 그녀까지 끌어들였다.시간은 그렇게 한 시간이나 흘렀고 강지연과 홍순자는 슬슬 졸음이 몰려와 고스톱을 멈추고 낮잠을 청했다.강지연은 온하준이 낮잠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점심에 집에 들어오는 날도 거의 없었고 체력이 넘쳐서 늘 바쁘게 움직이던 사람이었다.한잠 푹 자고 일어나보니 오후 네 시가 되어있었다.정신이 아직 흐릿한 상태였는데 누군가 이야기하는 소리가 어렴풋하게 들려왔다.귀를 기울여 보니 온하준과 홍순자의 말소리였다.‘아직도 안 갔어?’강지연이 미간을 찌푸리며 방에서 나와 마당을 내다보자 온하준은 홍순자를 도와 장미 넝쿨 지지대를 세우고 있었다.날씨가 따뜻해지자 장미는 하루가 다르게 줄기를 뻗기 시작했고 해마다 지지대만 세워주면 담장을 타고 올라가 아름다운 꽃으로 담장을 장식하곤 했다.온하준은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 올리고 바짓단과 신발까지 흙투성이가 된 채 줄기를 하나하나 묶고 있었다.오후 네 시가 되어도 볕은 여전히 뜨거웠다. 그의 머리칼은 전부 땀에 젖어 이마에 엉클어진 채 축 늘어져 있었다.“할머니, 햇빛이 너무 강하니까 들어가 계세요. 저 혼자 할 수 있어요.”그의 팔에는 이미 긁힌 자국이 여러 군데 붉게 배어 있었다.강지연도 홍순자의 몸이 상할까 봐 걱정돼 계단에서 소리쳤다.“할머니, 얼른 위로 올라가요!”온하준은 강지연의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리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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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3화

홍순자의 집에는 남자 옷도 있었다. 모두 5년 전 디자인이었지만 태그 하나 떼지 않은 새 옷들이었다.그리고 그 옷들은 모두 강지연이 사놓은 거였다.시골의 밤은 항상 고요하고 아름다웠다.벌레 소리와 꽃향기가 어우러졌고 화창하게 갠 날 저녁에는 은하수까지 보였다.결혼 초, 강지연은 언젠가 온하준과 함께 할머니 집에 와서 아름다운 이 밤을 함께 누리게 될 것이라고 수없이 상상했다.그리고 할머니에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다고, 앞으로 그 사람과 평생을 함께할 거라고 당당하게 말하고 싶었다.그 마음을 담아 강지연은 그의 옷을 준비해 장롱 속에 넣어두었다. 언제든 함께 오기만 하면 그가 편히 입을 수 있도록.하지만 지난 5년 동안 온하준은 단 한 번도 이곳에서 밤을 보낸 적이 없었다.온하준은 옷의 소재부터 치수까지 까다롭게 따지는 사람이었다.그는 강지연이 내민 옷을 보고 이 옷은 자신의 취향에 맞게 준비된 것이고 모두 5년 전 디자인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봤다.온하준은 순간 표정이 굳어졌고 강지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를 지나쳐 걸어갔다.저녁 준비는 완벽히 갖춰져 있었다.오후에 강지연과 홍순자가 잠든 사이 온하준이 미리 손질해 둔 덕분이었다.준비된 재료를 부엌에서 간단히 조리하기만 하면 바로 먹을 수 있었다.강지연이 부엌에 들어서자 홍순자는 손사래를 치며 그녀를 내쫓았고 어쩔 수 없이 강지연은 웃음 섞인 한숨을 내쉬며 거실로 돌아와 식탁을 정리했다.이때 휴대전화가 진동과 함께 알림음을 내뱉었다.소파에 앉아 확인해 보니 조민서의 연락이었다. 가무단 비행기표 예약을 위해 정보를 확인하는 내용이었다.강지연은 내용을 꼼꼼하게 확인해 보냈고 이것저것 이야기가 이어지다 보니 어느새 삼십 분이 흘렀다.욕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강지연은 급하게 조민서에게 끝인사를 건네고는 기록을 꾹 눌러 대화창을 삭제했다.하지만 이미 가까이 다가온 온하준은 강지연의 움직임을 똑똑히 보았다.“뭘 지운 거야?”그는 미간을 찡그리며 더 가까이 다가왔다. 티셔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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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4화

온하준은 강지연에게 뺨을 맞고도 손을 놓지 않았다.오히려 더 강하게 눌러 강지연의 얼굴 앞에 휴대전화를 들이대고 안면 인식을 시켜 잠금을 풀었다.그는 카톡 목록을 스크롤 해 내린 후 아무것도 없는 걸 확인하고 잠시 강지연을 쳐다보더니 바로 연락처 검색창을 열어 ‘범’ 자를 입력했다.장시범. 그의 닉네임이 바로 그 글자였다.검색 결과가 뜨자마자 온하준은 휴대전화를 다시 강지연에게 던져주며 차갑게 웃었다.“다른 사람이 보면 안 되는 얘기라도 했어? 한마디도 안 남기고 싹 지웠네?”강지연은 장시범과 출국에 관련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어 기록을 지운 건 사실이었다.“말해.”온하준이 낮은 목소리로 압박하듯 말하자 강지연은 고개를 끄덕였다.“고개를 끄덕이는 건 무슨 뜻이야?”온하준은 강지연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며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녀를 노려봤다.“지운 거 맞아.”강지연은 단 한마디 변명도 없이 담담한 얼굴로 온하준을 바라보며 대답했다.그 태도가 오히려 온하준을 더 자극했다. 그는 이를 악물고 화를 참으며 차가운 미소를 띠고 말했다.“지웠다고? 지우고도 이렇게 당당해? 대체 뭘 지운 건데?”강지연은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너 바보야? 너한테 보이기 싫어서 지운 건데 그걸 말하라고 하면 내가 알려주겠어?”“너!”온하준의 가슴이 격하게 들썩였다.사업을 시작한 이래 모든 것이 뜻대로만 흘러갔고 별다른 노력 없이도 정상의 자리에 서게 된 그였다.따라서 누구도 그의 명령을 불복한 적이 없었기에 강지연의 이런 태도는 온하준에게 불쾌한 도전으로 여겨졌다.“대단하네.”분노에 핏대가 선 목소리였으나 할머니가 들을까 봐 속삭임에 가까운 음량으로 누르고 있었다.“나는 아마 밖에서 누구한테 죽임을 당하지 않으면 너 때문에 화병 나서 죽을 거야. 내가 널 완전히 잘못 봤어.”말이 끝나기 무섭게 온하준은 강지연을 번쩍 들어 올리고는 그대로 현관 쪽으로 빠르게 걸어 나갔다.“내려놔. 집에 안 간다고. 오늘은 할머니랑 있겠다고 했잖아.”강지연은 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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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5화

강지연은 온하준의 마지막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 굳이 알고 싶지 않았다.요즘 그는 이유 없이 화를 내고 가끔은 위협 섞인 말을 하기도 했지만 강지연에게는 더 이상 두려울 게 없었다.누군가를 상대로 두려움과 조심스러움이 생기는 이유는 결국 그 사람에 대한 사랑이 존재하기 때문이었다.지난 5년 동안 강지연은 온하준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까 봐 전전긍긍했지만 결국 그의 마음은 그녀를 향하지 않았다.하지만 지금 와서 보니 그 사랑이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었다.온하준이 사랑하지 않는 만큼 그녀도 그를 사랑하지 않으면 그뿐이었다.식사 시간은 별다른 일 없이 지나갔다.온하준의 입맛이 도는지 밥 두 공기를 깨끗하게 비워냈다.홍순자가 특별히 그의 입맛에 맞춰 만든 새우요리는 접시 바닥까지 긁어 먹다시피 하더니 남은 양념에 밥까지 비벼 먹고도 모자라 마지막엔 바지락에 감자를 넣어 끓인 국까지 한 그릇 들이킨 뒤, 의자 등받이에 기대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전 세계 어떤 고급 레스토랑도 할머니가 해 주신 새우보다 맛있을 수는 없을 거예요.”과장하는 말처럼 들렸지만 이건 진심이었다. 온하준은 정말 홍순자가 해 준 음식을 좋아했다.“그러니까 할머니, 이번에는 꼭 저희랑 같이 한집에서 살아야 해요. 할머니께서 꽃도 좋아하시고 채소도 좋아하시잖아요. 저희 새로 산 집이 마당이 아주 넓거든요. 할머니가 심고 싶은 거 전부 다 심을 수 있어요.”홍순자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너희가 비싸게 산 집을 내가 엉망으로 만들어버리면 어떡하니. 집에 오는 사람들 모두 귀한 분들이라며. 창피하지 않겠어?”“무슨 말씀이세요! 할머니야말로 보물이죠. 집에 어른이 계시면 천군만마를 얻는 거라고 그러잖아요. 그리고 나중에 저희가 아이를 낳으면 할머니의 손 좀 빌려야죠.”그 말을 듣는 순간, 강지연의 순간 멈칫하다 마시고 있던 국물이 목에 걸렸고 얼굴이 붉게 상기될 만큼 한참을 기침했다.온하준은 곧바로 등을 두드려 주며 붉어진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결혼한 지 5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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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6화

강지연은 머리 아프게 더 고민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곧바로 의사에게 위치를 전송했다.“누구한테 문자를 보내는 거야?”온하준은 마치 강지연에게 감지 센서라도 달아 놓은 것처럼 그녀가 손가락만 움직여도 즉시 반응했다.강지연은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 일어나 식탁을 정리하며 홍순자에게 물었다.“할머니, 혹시 남는 반찬 있으세요?”손이 컸던 홍순자는 매번 음식을 넉넉히 하는 습관이 있어 항상 남곤 했다.“있어. 닭볶음탕하고 감자 소고기찜이 남았어.”“잘됐네요. 조금 있다가 손님이 올 건데 아직 저녁 못 드셨을 거예요.”“그래? 그럼 남은 거 가지고는 안되지. 채를 두어 가지 더 볶아 놓을게.”홍순자는 서둘러 부엌으로 들어갔고 식탁엔 강지연과 온하준 두 사람만 남았다.온하준은 강지연을 노려보며 차갑게 말했다.“누가 오는데?”“넌 모르는 사람이야.”“강지연, 네가 아는 사람 중에 내가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는데? 우리 열다섯부터 알고 지냈어”그의 말끝에는 비웃음이 담겨 있었다.강지연은 어이가 없었다.‘대학교 시절에는 아무 연락도 없이 지냈는데 무용학원 친구들을 네가 어떻게 알아?’괜히 입 아프게 설명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 강지연은 묵묵히 그릇을 정리했다.“앉아.”온하준은 강지연을 붙잡아 의자에 앉힌 뒤 스스로 식탁 정리를 시작했고 강지연은 그런 그를 내버려둔 채 밖으로 나갔다.위치를 보내 주기는 했지만 의사가 정확히 찾아올지는 확신이 없었다.잠시 후, 온하준도 정리를 마치고 뒤따라 나왔다.강지연은 대문 앞, 푸른 벽돌에 등을 기댄 채 서 있었다.머리를 대충 하나로 묶고 흰 티셔츠 한 장만 걸친 그 뒷모습이 문득 고등학생 때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강지연, 도대체 누구 기다리는 건데?”온하준이 굳은 표정으로 다가갔지만 강지연은 그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발끝으로 살짝 서서 앞을 응시했다.그때 한 대의 차가 이쪽으로 다가왔고 강지연은 그제야 손을 크게 흔들며 미소를 지었다.그녀의 환한 미소에 온하준의 얼굴이 굳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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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7화

온하준은 치료가 끝난 뒤 배우진을 밖까지 배웅했다.다시 집으로 들어왔을 때는 이미 날도 아주 어두워졌기에 강지연과 온하준은 홍순자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기로 했다.온하준이 이곳에서 자는 건 5년 만에 처음이었다.두 사람은 강지연이 어릴 적 살던 방에 머물게 되었는데 싱글 침대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사실 방이 여기만 있는 건 아니었다. 홍순자의 집에는 예전 강지연의 부모와 남동생이 살던 방도 그대로 남아 있다.강지연은 좁은 침대를 보며 온하준을 향해 말했다.“여기 너무 좁은데 넌 다른 방에서...”“내가 왜?”강지연이 말을 채 마치지도 전에 온하준은 그녀의 말을 잘라냈다.무엇보다 온하준이 결벽증이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던 강지연은 어쩔 수 없이 신경 쓰지 않기로 마음먹었다.사실 온하준의 결벽증은 선택적인 거였고 무엇보다 그는 강지연의 가족을 좋아하지 않았다.그러니 무슨 말을 하든 그 방에는 절대 들어가지 않을 사람이었다.‘그래, 알아서 해. 비좁아서 몸을 구기고 자든지 말든지.’강지연이 먼저 침대에 눕자 온하준은 가장자리에 걸터앉으며 입을 열었다.“강지연, 너 도대체 나한테 뭘 얼마나 숨긴 거야?”그의 말투에는 비아냥과 공격이 섞여 있었다.강지연이 속으로 곰곰이 생각해 보니 숨긴 것이 꽤 많았다.“그 의사는 어떻게 알게 된 건데? 매일 침 맞으러 다녔으면서 나한텐 한마디도 안 한 거야?”강지연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의사가 그러는데 침을 맞으면서도 다리를 매일 마사지 해야 한대. 할머니한테도 나한테도 다 말을 안 하면 누가 마사지를 해줘?”질문이 이어질수록 오히려 강지연의 마음은 가벼워졌다.‘아, 출국 준비 얘기는 아니구나.’사실 언젠가는 곧 알게 될 일이었으니 그게 들켜도 문제가 되는 건 없었다.다만 강지연은 혹시나 그의 방해 때문에 유학을 못 갈까 봐 걱정되었을 뿐이었다.“이제는 뭘 물어도 대답조차 안 할 거야?”뒤에서 사부작거리는 소리와 함께 갑자기 강지연의 바짓단이 위로 말려 올라갔다.강지연은 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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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8화

온하준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그녀의 아픈 자리를 천천히 눌러주었다.아무리 싫고 혐오스러워도 그의 양심이 그를 움직였고 강지연이 다리를 다쳤던 초반에는 매일이다시피 오래도록 정성껏 마사지해 주곤 했다.오늘 오랜만에 다시 해보는 마사지이지만 온하준의 동작은 전혀 어색함이 없었고 손끝은 정확하게 혈을 찾아내 눌렀다.힘 있는 지압이 계속되자 강지연은 어느 순간 몽롱하게 잠에 빠져들었다.온하준이 조용히 담요를 덮어주는 순간 깜짝 놀라 잠에서 깬 강지연은 그제야 마사지가 이미 끝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손 좀 씻고 올게.”그의 손에는 아직도 오일이 조금 묻어 있었다.강지연은 벽을 향해 다시 몸을 돌려 누웠다.손을 씻고 금세 돌아온 온하준은 강지연의 등 뒤로 몸을 뉘었다.침대가 협소해 온하준의 몸이 강지연의 등에 완전히 밀착되자 그녀는 반사적으로 안쪽으로 몸을 움츠렸지만 그는 허리를 감아 끌어당겼다.“안 자고 있었어?”‘자고 있어도 너 때문에 깼겠다!’“잤어.”“자면서 말은 잘하네.”온하준은 그녀에게 더 가까이 달라붙었다.‘그래, 차라리 말하지 말자.’“너한테 하나 말할 게 있어.”그가 갑자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근데 웃으면 안 돼.”‘너한테 내가 웃을만한 일이 있을까?’“나 어릴 때 좀 둔했어. 한번은 잔다고 누운 뒤 몰래 게임을 했었거든. 그 손바닥만 한 게임기 있잖아. 너희 여자애들도 놀아봤지? 그때 할머니가 방에 들어왔는데 내가 안 자는 걸 알아차린 거야. 그러면서 나 들으라고 애들이 잠들면 자연스럽게 입을 벌리고 입을 안 벌리고 있으면 자는 척하는 거라고 하시더라고. 그 말 듣자마자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입을 벌렸지. 그걸 본 할머니가 얼마나 웃으셨는지. 열 살이 될 때까지 그 얘기로 나를 놀리셨어.”강지연은 웃지 않았다. 아니, 웃을 수가 없었다.결혼한 지 5년 동안 그가 이렇게 먼저 길게 말을 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언제나 강지연이 애써 다가가려 했다.그의 세계에 조금이라도 가까워지고 그와의 거리를 좁히기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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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9화

‘아니, 절대 안 돼! 싫어!’강지연은 온몸의 힘을 짜내며 버텼다. 그녀에게 남은 유일한 무기는 오직 이빨뿐이었다.있는 힘을 다해 온하준의 어깨를 세게 물어뜯자 그제야 그의 힘이 조금 풀리는 게 느껴졌다.그녀는 재빨리 몸을 틀어 뒤집었다. 좁디좁은 침대는 그 몸부림을 이기지 못했고 온하준은 그대로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꽤 큰 소리가 났다.거친 숨을 몰아쉬며 몸을 일으킨 강지연은 바닥에 앉아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온하준을 노려봤다.강지연은 침대에서 일어나 할머니 방으로 가서 자야겠다고 생각하며 문 쪽으로 향했다.그 순간, 온하준은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며 낮게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어디 가.”강지연은 미친 듯이 그의 손을 뿌리쳤다.‘어디를 가겠어? 여기서 너랑 그 짓거리를 하라고?’온하준의 호흡이 조금씩 가라앉았다.“알았어. 안 건드릴게.”강지연이 여전히 팽팽히 버티고 있자 그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진짜야. 약속할게.”바로 그때, 방 넘어 인기척이 들리더니 곧이어 홍순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지연아, 무슨 일이니?”온하준이 재빨리 대답을 대신했다.“할머니, 별일 아니에요! 제가 침대에서 떨어졌어요. 침대가 너무 좁아서요.”“그러면 지연아, 할머니 방에 와서 자는 게 어떻니?”걱정이 담긴 제안이었다.강지연은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온하준은 그녀의 손목을 꽉 잡은 채 차갑게 눈을 치켜뜨며 노골적인 경고를 보냈다.잠깐의 침묵 끝에 온하준이 낮게 내뱉었다.“안 건드린다니까.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건드릴 만큼 그렇게 추잡한 사람 아니야.”그는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고 그 점만큼은 그녀도 알고 있었다.“할 말이 있어서 그래.”하지만 강지연은 지금 그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단 한마디도 듣고 싶지 않았다.“잘 거면 그냥 자. 아무 짓도 하지 말고 아무 말도 하지 말고.”강지연은 차갑게 조건을 내걸었다.그는 한동안 침묵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온하준은 결국 조용히 고개를 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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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0화

강지연은 걸음을 멈추고 문틈을 아주 살짝 열어 바깥에서 들려오는 그의 통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하나야, 나도 의사한테 물어봤어. 그분이 진경시에서 유명한 교수님 제자래. 진짜 한 번만 더 시도해 보면 안 될까? 병원에 같이 가보자, 응?”“딩크족? 네 선택이 그렇다면 나도 동의하지. 하지만 그건 네 진심이 아니잖아. 너는 실패할까 봐 시도조차 두려운 거잖아.”“너무 낙담하지 마. 남의 아이는 결국 남의 아이야. 너도 네 아이를 가져보고 싶지 않아?”“하나야, 내가 금방 데리러 갈게. 제발 고집부리지 마.”온하준의 통화를 듣고 있던 강지연은 속이 얼음처럼 굳어가는 것 같았다.‘이거였구나. 갑자기 아이를 갖자고 했던 이유가 이하나가 아이를 가질 수 없어서였네. 그래서 나와 아이를 낳아서 이하나한테 주려 했던 건가? 역시 네 말은 듣지 않길 잘했어. 네가 나한테 진심일 리가 없지.’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던 강지연은 조용히 문을 닫았다.온하준이 집 안으로 들어왔을 때 강지연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천천히 면을 먹고 있었다.그는 면만 차려져 있는 소박한 그녀의 아침상을 바라보며 물었다.“계란 먹을래? 계란 후라이 하나 해 줄까? 우유는?”강지연은 젓가락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온하준, 나는 단 한 번도 우유를 마신 적이 없어. 그리고 계란 후라이는 할머니가 이미 해줬어. 고마워.”그는 말문이 막힌 듯 잠시 머뭇거렸다.“그럼...”“나 조용히 밥 먹고 싶은데 방해하지 말아 줄래?”할머니가 듣지 못하게 음성을 낮췄을 뿐 목소리는 차갑고 태도는 단호했다.언제나 그를 중심으로 맴돌았던 사람은 강지연이었기에 온하준은 지금 이런 상황이 불편하고 어색했다.“온하준, 계란 더 줄까?”“온하준, 우유 데워줄까?”“온하준, 새우야. 껍질 다 깠어.”“온하준, 목마르지 않아? 국이라도 만들어 줄까?”그때마다 온하준은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일 때문에 생각할 거 있으니까 그 입 좀 다물어. 조용히 먹게.”사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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