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다섯 번째 결혼기념일에서: Chapter 161 - Chapter 170

201 Chapters

제161화

찾아온 사람은 장시범이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강지연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너 어떻게 내가 여기 있는 걸 알았어?”장시범이 말없이 웃기만 하자 강지연은 금세 조민서가 말해줬겠다고 짐작했다.“순회공연단 대표 자격으로 왔어요.”장시범이 장난스럽게 빙긋 웃으며 덧붙였다.“엄청난 임무를 맡고 온 셈이죠.”강지연도 웃음을 터뜨렸다. 공연단 사람을 다 알진 못해도 그녀가 만난 이들은 모두 친절하고 순수한 마음을 가진 이들이었다.장시범은 그녀의 머리에 감긴 붕대를 보고 조심스럽게 물었다.“어쩌다 머리를 다친 거예요?”강지연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욕실에서 미끄러졌어. 내 실수야.”강지연은 집안 이야기를 꺼내고 싶지 않았다.장시범이 가져온 탐스러운 체리는 강지연이 좋아하는 과일이었다.둘은 체리를 나누어 먹으며 유럽 순회공연 이야기를 풀어나갔다.얘기가 공연 작품부터 일정까지 흘러가자 강지연의 눈빛이 저절로 살아났다.그건 그녀가 마음속으로 오래도록 꿈꿔 온 일이었다.더는 춤출 수 없게 됐어도 그 팀으로 다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녀는 여전히 가슴이 뛰고 행복할 것 같았다. 그곳이 진정한 자신의 자리였으니까.온하준이 병실에 도착했을 때 문은 반쯤 열려 있었다.문틈 사이로 비친 것은 온하준이 지금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강지연의 반짝이는 눈빛이었다.그리고 그 시선이 향한 곳에 장시범이 있음을 확인한 순간, 온하준의 얼굴은 싸늘하게 굳었다.문 앞에 한참을 서 있었지만 강지연은 그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했다.그녀는 여전히 행복한 표정으로 장시범과 이야기를 나무며 환한 미소까지 지어 보였다.온하준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차가운 표정으로 병실로 들어가 침대 곁에 섰다.예상치 못한 그의 등장에 강지연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어떻게 알고 온 거지? 아, 전화를 안 받으니 아주머니한테 연락했나 보네.’온하준의 손에는 고급 레스토랑 로고가 찍힌 종이봉투가 들려 있었다.그는 봉투를 침대 옆 탁자에 내려놓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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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2화

온하준은 강지연을 한 번 흘겨보더니 더 싸늘해진 눈빛으로 말했다.“장시범 씨, 면회 시간이 너무 길면 실례예요. 환자도 이제 쉬어야 하니 그만...”말끝을 살짝 흐렸지만 의미는 분명했다. 나가라는 소리였다.장시범의 얼굴에 순간 난처한 기색이 스쳤다. 솔직히 그는 강지연의 남편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병원이 아닌 다른 곳이었다면 쉽게 물러서지 않았겠지만 여긴 병원이고 강지연은 아픈 몸이었다.게다가 아무리 싫어도 그가 강지연의 남편인 이상, 그녀의 체면을 생각해 화를 삼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선배, 그럼 저 이만 가볼게요. 푹 쉬세요. 다음에 또 올게요.”“미안해, 장시범.”강지연은 온하준의 무례함에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괜찮아요. 빨리 나으시고 우리 곧 만나요.”장시범이 눈을 한 번 찡긋했다. 곧 만나자는 말은 순회공연에서 재회하자는 둘만의 암호였다.장시범이 문을 닫고 나가자, 온하준이 강지연을 노려보며 말했다.“방금 무슨 암호 같은 말을 주고받은 거야? 곧 만나자는 건 무슨 말인데? 어디서 만나자는 건데? 강지연, 네 신분을 잊지 마.”강지연은 이불을 가슴 위까지 끌어올리며 담담하게 말했다.“온하준, 면회 시간이 너무 길면 실례야. 환자도 이제 쉬어야 하니까 너도 이만 가.”“지금 나를 내쫓는 거야?”온하준은 병실 문을 손끝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아까 그놈과는 시종일관 맞장구쳐주면서 희희 닥닥 거리더니 이제 와서 나보고 가라고? 너 무슨 뜻이야?”“말 그대로.”강지연은 침대 머리맡에 기대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하게 말했다.“나가라고.”분노가 치밀어 올랐던 온하준은 옆에서 잔뜩 긴장한 채 눈치를 보는 간병인을 돌아봤다.“그쪽은 뭡니까?”“가... 간병인 이예요.”간병인은 목소리까지 떨었다.“간병인까지 불렀어?”온하준은 비웃는 듯한 웃음을 흘리며 간병인을 향해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잠깐 나가 있어요.”간병인은 강지연을 힐끗 쳐다봤다. 강지연이 막지 않자 대강 사정을 짐작한 듯 조용히 병실 밖으로 나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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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3화

온하준은 몸이 굳은 채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강지연을 노려보았고 강지연은 아무런 동요 없이 담담히 그의 시선을 받아줄 뿐이었다.“너...”온하준은 한참을 말없이 서 있다가 간신히 목소리를 내뱉었다.“네가 어떻게 그걸...”“온하준.”강지연은 정면을 바라보며 냉정하게 말을 끊었다.“세상에서 네가 제일 똑똑한 줄 알지? 말을 안 한다고 다 모르는 건 아니야.”“강지연, 그건...”온하준은 결국 말끝을 흐렸다.강지연은 그가 무슨 변명을 이어갈지 기다렸지만 뒷말은 끝내 이어지지 않았다.온하준은 적어도 그녀 앞에서 거짓말을 늘어놓는 사람은 아니었다.그것이 장점인지 단점인지는 몰라도 지금의 그는 그 때문에 변명 한마디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었다.“온하준.”강지연이 더 기다리지 않고 입을 열었다.“지금 당장 나가. 안 나가고 여기 계속 있겠다면 앞으로 평생 이하나를 보지 않겠다고 약속해.”고개를 들어 강지연을 바라보는 온하준의 눈빛에 망설임이 스쳤다.“나 진심이야, 온하준.”강지연의 단호한 어조에 온하준은 잠시 그녀를 응시하다 몸을 돌려 병실을 나갔다.사실 강지연은 이미 결과를 알고 있었다. 그저 순간 마음이 끓어올라 던져본 말이었다.그가 사라지자 오히려 마음은 더 고요해졌다. 기대하지 않으면 실망도 생기지 않는 법이었다.병실로 다시 들어온 간병인의 얼굴이 어딘가 어색해 보였다.문밖에 서 있었으니 두 사람이 목소리를 낮추지 않은 이상 못 들었을 리 없었고 은밀한 이야기를 엿들은 뒤라 어쩐지 난처해 보였다.하지만 강지연은 오히려 태연하게 말을 건넸다.“샤워하고 싶은데 좀 도와주세요.”할 일이 생기자 간병인도 마음이 편해졌다. 그녀는 서둘러 대답하고 샤워를 준비했다.샤워를 마치고 병상으로 돌아온 강지연은 온하준이 보낸 메시지를 확인했다.[강지연, 미안해. 하나는 내가 포기할 수 없는 사람이야. 하지만 널 실망하게 하지 않겠다고 했던 약속은 꼭 지킬게.]강지연은 휴대전화를 침대 위로 툭 던져버렸다.‘뭐라는 거야, 정말.’간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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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4화

“괜찮아. 간병인 있어.”온하준의 말에 이하나는 다급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하준아, 내가 뭐라고 하려는 건 아닌데 간병인이랑 남편이 어떻게 같아? 강지연한테 지금 제일 필요한 건 너의 보살핌이야. 네가 옆에 있어 줘야지. 술은 언제든 마실 수 있잖아.”김도윤이 온하준의 어깨를 두드리며 웃었다.“하나야, 그만해. 내가 강지연을 잘 아는데 분명 강지연이 하준이를 쫓아낸 거야. 강지연이 네 반만큼이라도 말이 통했으면 우리 하준이가 이렇게 힘들게 살지는 않았을 텐데.”김도진도 이하나를 거들었다.“하나야, 너 너무 착해. 가끔은 따질 건 따져야지. 강지연 봐. 재산도 따지고 하준이 마음도 얻으려고 그러잖아. 근데 넌 뭐야? 왜 하준이를 더 밀어내고 그래.”재산 이야기가 나오자 이하나의 속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어렵게 챙겨뒀던 온하준의 재산을 강지연이 모조리 되찾아가 버렸다.최근 며칠은 짐을 빼서 호텔에서 지냈고 정성 들여 꾸민 집, 가방, 보석, 시계 모든 것을 돌려주어야 했다. 강지연은 정말 사람 목숨을 조르는 것 같았다.하지만 온하준 앞에서는 착한 여자로 남아야 했기에 그 화를 밖으로 뿜어낼 수는 없었다. 이하나는 눈가를 천천히 붉히며 말했다.“그런 말 하지 마. 하준이가 우리 모두를 위해서 그리고 강지연을 위해서 밖에서 얼마나 고생하는지 잘 알고 있잖아. 어깨에 짊어진 책임이 얼마나 무겁고 힘들겠어. 그런데 우리마저 하준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으면 하준이 뒤에는 아무도 없는 거잖아.”이하나의 말에 온하준의 표정이 순간 흔들렸다.그의 뒤에는 고등학교 때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로 정말 아무도 없었다.김도윤과 김도진이 한숨을 내쉬었다.“그런데 하나야, 네가 그렇게까지 착하게 굴 필요는 없어. 뭘 내놓으라 하면 넌 진짜 군소리 한마디 없이 다 내어주잖아. 옆에서 보고 있는 내가 다 억울하다. 강지연이 응당 해야 할 일은 전부 네가 다 하고 있잖아. 하준이를 생각하는 마음도 그렇고.”김도윤의 말에 이하나는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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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5화

“그래, 우리 우정을 위하여! 너희들은 나한테 누구보다 소중한 사람들이야.”온하준도 환하게 웃으며 기분 좋게 잔을 부딪쳤다.강지연은 나흘 동안 병원에서 지냈다.넷째 날이 되자 상처가 예상보다 잘 아물어 의사가 실밥을 제거하며 퇴원을 허락했다.마침, 그날 홍순자가 반가운 소식을 전해 왔다. 강지연 앞으로 택배가 도착했는데 겉 포장을 보니 여권인 것 같다고 했다.강지연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누르며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알겠어요, 할머니. 조금만 기다리세요. 저 오늘 할머니 집에 갈 거예요.”강지연은 머리 상처가 빨리 아문 덕에 퇴원할 수 있었지만 진경숙은 며칠 더 입원해야 했다.어차피 홍순자 댁으로 갈 생각이었던 강지연은 진경숙에게 아무 걱정하지 말고 치료에만 집중하라고 당부했다.강지연은 혼자 퇴원 절차를 밟고 곧장 한의원에 들렀다.며칠 동안 침도 맞지 못하고 재활도 중단된 상태였는데 앞으로도 한동안은 치료를 이어가기 어려울 테니 미리 배우진에게 얘기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강지연은 자신의 상황을 설명했고 일주일 뒤에는 멀리 나갈 수도 있어 앞으로 치료는 꾸준히 받기 힘들 것 같다고 전했다.배우진은 아쉬운 기색을 지으며 말했다.“지금까지 침 치료와 재활 반응은 나쁘지 않았어요. 원래 재활은 긴 싸움이죠. 어떤 분은 1년, 어떤 분은 3년, 길게는 5년까지도 걸려요. 며칠 만에 좋아지는 경우는 거의 없죠. 다시 제대로 설 수 있을지 100% 장담은 못 드리지만 중간에 그만두면 1%의 가능성조차 사라지는 겁니다.”“알아요, 선생님. 하지만...”강지연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 1%의 회복 가능성과 100% 새출발. 그녀는 오래 망설이지 않았다.“선생님, 치료는 당분간 중단해야겠어요.”배우진은 한숨을 쉬고 한참을 고민하더니 말했다.“강지연 씨, 난 계속 아쉬워요. 저희 쪽에는 완전히 회복된 사례도 있고 무엇보다 강지연 씨가 처음 며칠 동안 했던 재활 정도를 보면 성공 사례보다 더 좋았어요. 포기하겠다고 하니 의사로선 솔직히 마음이 안 좋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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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6화

온하준의 눈빛이 살짝 일렁였다. 강지연은 웃으며 담담하게 인사를 건넸다.“안녕, 온하준.”“너 왜 여기 있어? 퇴원했어?”온하준은 노골적으로 불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응. 이런 곳에서 보니 반갑네.”강지연이 더 밝게 웃자, 온하준의 얼굴은 더욱 어두워졌다.“퇴원했는데도 나한테 말 한마디 안 한 거야?”강지연은 여전히 웃음을 떨치지 않았다.“두 사람한테 방해라도 될까 봐 그랬지. 그러면 진료 잘 봐. 난 이만 갈게.”“잠깐만.”온하준이 그녀를 불러 세우자 강지연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왜? 데려다주려고? 시간 없어 보이는데.”“기다렸다가 같이 가.”“됐어. 우리 같은 길 아니야.”‘그리고 너와 헤어질 날도 이제 엿새 남았어.’강지연의 말에 온하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집에 안 가고 어디 가는데?”“하준아, 왜 화를 내고 그래.”이하나가 급히 끼어들며 당황한 듯한 표정으로 강지연을 바라보았다.“강지연, 미안해. 하준이한테 화내지 말아 줘. 그리고 둘이 싸우지도 말고. 하준이는 그냥 나 재검하는데 같이 와준 거야. 지난번 치료가 효과 좋아서 이번에 처방만 한 번 더 받으려고.”온하준도 설명을 덧붙였다.“하나 부모님은 해성에 안 계셔. 혼자 병원 오는 게 외롭잖아. 내가 제일 친한 친구인데 내가 안 오면 누가 와.”강지연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두 사람 진료 잘 받아. 그리고 이른 시일 안에 기쁜 소식 있길 바랄게.”온하준의 미간이 확 접혔다.“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강지연은 여전히 미소를 띤 채 말했다.“왜? 이하나가 빨리 아이를 가지길 바란다는데 뭐가 잘못되었어? 아니면 불임이길 바란다고 해야 해?”“너...”온하준은 분명 화가 났지만 이를 악물고 감정을 억눌렀다.이하나는 서둘러 온하준의 가슴을 토닥이며 그를 달래주었다.“하준아, 화내지 마. 강지연이 고의로 그런 건 아니잖아. 그런데 너희도 지금까지 아이가 없었으니 강지연도 한 번 검사를 시켜보는 게 어때?”이하나는 곧장 강지연을 향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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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7화

강지연은 말을 마치고 당당하게 한의원을 나섰다.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이제는 어디를 가든 예전처럼 어깨를 움츠리지 않고 손가락질당할까 봐 숨죽이지 않는다는 것을.다리가 불편한 건 사실이지만 그건 그녀의 잘못도 아니고 부끄러워해야 할 흠도 아니었다. 그러니 굳이 수치스럽게 여길 필요가 없었다.사랑은 사람을 비굴하게 만들었다. 특히 자신을 사랑해 주지 않는 사람을 사랑할 때는 더욱 그랬다.하지만 그 사랑을 내려놓기로 마음먹은 순간 이상하게도 고개가 저절로 들렸다.모든 걸 포기하고 이해하고 나니 온하준과 이하나가 보기 싫은 건 여전했지만 마음이 무너지지는 않았다.이제 날개를 펴고 떠나는 것만큼 가슴 뛰는 일도 없었다.뒤에서 온하준은 계속 그녀의 이름을 불렀고 그의 곁에서는 이하나가 온하준의 이름을 애타게 불렀다.결국 오늘도 온하준은 늘 그러했듯이 강지연과 이하나 사이에서 변함없이 이하나를 선택할 것이었다.하지만 강지연은 이제 상관없었다. 애초에 온하준은 단 한 번도 그녀의 것이 아니었으니까.내 것이 아닌 것을 놓아주는 건 잠시 아플 수 있지만 모든 아픔은 결국 지나가는 것이었다.강지연은 택시를 잡아 홍순자 댁으로 향했다.대문 앞에 도착하자마자 그녀는 참지 못하고 할머니를 크게 불렀다.홍순자는 급히 나와 밝은 얼굴로 그녀를 맞이하며 두 팔로 꼭 안아주었다.머리를 꿰매기 위해 깎아낸 부분이 제법 티가 났기에 강지연은 오늘 일부러 삐딱하게 올린 번 스타일로 깎인 부분을 가려두었다.다행히 홍순자는 눈치채지 못했다. 할머니는 강지연의 손을 잡고 집안으로 이끌었다.어릴 적 학교에서 돌아오면 항상 그랬듯 집 안에는 익숙한 음식 냄새가 퍼져 있었다.강지연이 집에 돌아올 때마다 맡을 수 있던 따뜻하고 정겨운 냄새였다.홍순자는 여권이 든 택배 봉투를 내밀었다.강지연은 서둘러 봉투를 뜯어 비자 페이지 두 장을 몇 번이고 들여다봤다.어느 페이지가 유학 비자인지, 어느 페이지가 순회공연 비자인지 하나하나 설명해 주자 홍순자는 웃으며 연신 맞장구를 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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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8화

“할머니? 강지연?”온하준은 놀란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홍순자는 그를 보자 강지연이 불러낸 줄로 알고 반갑게 웃으며 말했다.“하준이 왔구나? 얼른 앉아. 나랑 지연이가 먼저 메뉴를 좀 골랐어. 네가 뭘 좋아하는지 몰라서 못 했으니 먹고 싶은 거 더 시켜.”온하준은 원래 다른 약속이 잡혀 있는 상태였다.강지연은 아무런 말 없이 미묘한 표정으로 식전 빵을 찢어 가게 특제 소스에 살짝 찍어 입에 넣었다. 생각보다 맛이 꽤 괜찮았다.온하준은 잠깐 망설이다가 강지연 옆자리에 앉으며 홍순자에게 말했다.“괜찮아요, 할머니. 제가 늘 바쁘다 보니 이렇게 같이 밥 먹을 시간이 거의 없었잖아요. 할머니가 고르신 거면 돼요. 저는 뭐든 잘 먹어요.”강지연은 어처구니가 없었다.‘가식적인 사람이랑 오래 있더니 은근히 닮아가네.’온하준은 직원을 불러 스테이크를 하나 더 주문했다. 음식이 나오기 전 그의 휴대전화가 먼저 울렸다.홍순자는 맞은편에 앉아 화면을 볼 순 없었지만 강지연의 눈에는 발신자 이름이 또렷하게 들어왔다.[울하나]온하준은 정말 이례적으로 전화받지 않고 그냥 끊어 버렸다.해가 서쪽에서 뜨겠다 싶었던 바로 그때, 이하나의 문자가 도착했다.[하준아, 어디야? 우리 다 도착했어.]온하준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할머니,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화장실 같은 소리 하네.’강지연이 피식 웃음을 터뜨리자 온하준은 그 웃음에 잠깐 멈칫하며 강지연을 바라봤다.굳이 따지고 싶지도, 그럴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 강지연은 눈썹만 살짝 치켜올렸다.오늘은 할머니와 함께하는 소중한 날이었기에 그런 사람들 때문에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홍순자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말했다.“그래, 다녀와.”온하준은 식당 안쪽으로 걸어갔다. 안쪽은 화장실이 있는 방향이기도 했지만 룸이 있는 방향이기도 했다.“할머니, 저도 잠깐 다녀올게요. 음식 나오면 할머니 먼저 드세요.”강지연도 곧바로 일어서며 말했다.“그래, 알았어.”강지연은 온하준이 어느 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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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9화

“어머!”홍순자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숨을 삼켰다.그녀는 다른 건 몰라도 온하준 앞에서 우스운 꼴을 보이는 게 제일 싫었다. 괜히 강지연까지 난처해질까 봐 더욱 조마조마했다.온하준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괜찮아요, 할머니. 닦으면 돼요.”레스토랑에 준비돼 있던 물수건을 집어 든 그는 홍순자의 손을 먼저 닦고 입가도 조심스럽게 훔쳐냈다.손놀림은 생각보다 능숙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홍순자의 손과 입가가 깨끗이 정리되었다.옷에 묻은 건 홍순자가 냅킨을 받아 스스로 정리했다. 잠시 어수선했을 뿐 금세 모든 게 정돈되었다.홍순자는 미안한 표정으로 온하준을 보며 말했다.“하준아, 내가 괜히 너까지 번거롭게 했구나.”“할머니, 그런 말씀 마세요.”온하준의 눈에 잠깐 그리움이 떠올랐다.“저도 할머니 손에서 컸어요. 그래서 제 할머니를 조금만 더 오래 챙겨드릴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자주 해요.”그 순간만큼 온하준의 마음은 진심이었다.잠시 뒤 레스토랑 복도가 꺾이는 곳, 룸으로 통하는 통로에서 이하나와 김도윤의 그림자가 스치듯 스쳐 지나갔다.“하준이는 원래 마음이 약해.”김도윤이 낮게 말했다.“강지연이 썩 훌륭한 아내는 아니지만 하준이는 그녀의 할머니께 지극한 효심을 보이더라. 난 항상 그게 하준이가 자기 할머니를 일찍 여읜 아쉬움을 메우는 것 같았어.”“맞아. 하준이가 원래 효자야.”이하나가 부드럽게 맞장구쳤다.“내가 예전에 봉사하면서 하준의 할머니를 도와드리던 때도 하준이는 할머니한테 한결같이 잘했어. 지금은 강지연 할머니를 자기 할머니처럼 모시는 거지.”말은 좋게 하고 있지만 이하나의 눈빛 어딘가에 증오가 번뜩였다.“너도 마음이 여리니까 그런 걸 알아주는 거야. 병원에서 어르신들 돌보는 봉사활동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 너희 둘 다 좋은 사람이야.”이하나는 그 말을 들었는지 말았는지 멍하니 서 있었다. 시선이 먼 데로 흐트러졌고 눈빛에는 복잡한 감정들이 번갈아 지나갔다.온하준은 인내심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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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0화

온하준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대문을 잡고 있던 강지연의 손목을 붙잡아 힘껏 비틀었다.강지연이 버티지 못하고 손을 놓는 순간 온하준은 재빨리 마당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들어가자.”온하준은 강지연의 허리를 꽉 붙들며 집안을 향해 소리쳤다.“할머니, 저랑 강지연이 과일 좀 사 올까요?”강지연은 무엇보다도 아까 탁자 위에 올려둔 여권이 생각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홍순자가 집 안에서 다시 나오며 환하게 대답했다.“아니야, 집에 과일 많아. 이것저것 다 있단다.”“그럼 안 사도 되겠네요.”온하준은 강지연을 끌어안은 채 승리한 듯 득의양양한 눈빛으로 고개를 숙여 그녀를 내려다보았다.강지연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그래, 마음대로 해. 어차피 며칠 안 남았어.’집 안으로 들어서자 강지연은 먼저 탁자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다행히도 탁자 위에 올려둔 여권은 이미 치워져 있었다.홍순자는 두 사람을 소파에 앉히며 말했다.“쉬고 있어. 할머니가 수박 좀 썰어올게.”온하준이 곧바로 나섰다.“할머니, 제가 할게요.”그는 강지연 허리에서 손을 떼고는 부엌 쪽으로 걸어가며 두리번거렸다.“수박 어디 있어요? 아, 봤어요.”여름밤에 시원한 수박을 먹으며 더위를 식히는 일은 정말이지 너무나 힐링 되는 일이었다.해가 지자 선선한 저녁 바람이 마당을 스쳐 지나갔고 시간에 맞춰 걸어둔 정원 조명이 은은하게 켜졌다.반짝이는 조명이 꽃밭 사이를 떠도는 반딧불처럼 보였다.홍순자가 마당에 작은 상을 내놓자 온하준이 수박을 썰어 접시에 담고 차를 우려내고는 과자와 견과류를 두 접시 올려두었다.그는 강지연까지 끌어내 마당에 앉혔다. 온하준은 대나무 의자에 몸을 기대며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여름밤은 정말 좋네요. 예전엔 방학만 되면 저도 할머니랑 마당에 앉아서 수박 먹으며 바람도 쐬고 그랬어요.”홍순자는 둥근 부채를 들어 천천히 부치기 시작했다.온하준이 그 모습을 보며 말을 덧붙였다.“할머니, 아직 더우세요? 우리 할머니도 항상 이렇게 마당에 앉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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