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다섯 번째 결혼기념일에서: Chapter 151 - Chapter 160

201 Chapters

제151화

누군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이럴 줄 알았으면 고등학교 때 수업 빼먹지 말고 열심히 공부했을 텐데.”옆에서 또 다른 누군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맞아. 나도 그 사람이 나를 좋아했던 걸 알았더라면 졸업식 날 겁먹지 않고 꼭 고백했을 거야. 서로 이렇게 오랜 시간을 놓치고 살 줄 누가 알았겠어.”최아현도 잇따라 입을 열었다.“만약 모든 걸 처음으로 돌려놓을 수 있다면 난 절대 남의 집에 얹혀살지 않았을 거야.”술은 사람의 가장 예민한 감성을 건드렸고 그 여파는 금세 방 안을 적셨다.풋내기 청춘에서 어느덧 서른을 코앞에 둔 지금, 누구에게나 크고 작은 아쉬움 하나쯤은 있었고 그런 후회와 한탄에 어느새 눈가가 촉촉해지기 시작했다.그때 누군가 강지연을 콕 집어 물었다.“강지연, 너는? 네가 제일 많이 후회하는 건 뭐야? 만약 과거를 되돌릴 수 있다면 넌 뭘 돌려놓고 싶어?”술잔을 들고 있던 강지연의 눈동자에는 술기운이 은은하게 스며들었다.순간, 그녀의 눈앞에는 그해 추석의 계수나무와 별처럼 반짝이던 풍경이 떠올랐다.강지연은 옅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만약 과거를 되돌릴 수 있다면...”바로 그때 룸 문이 열리며 온하준이 모습을 드러냈다.“만약 과거를 되돌릴 수 있다면 고2 때 추석에 먹었던 송편은 혼자 다 먹을 거야. 아무한테도 안 줄 거야.”술 때문이었을까.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시큰한 감정이 끝없이 부풀어 올라 폐를 짓눌러 숨 쉬는 것조차 버거웠다.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고개를 들던 강지연은 어둑한 조명 아래 문어 구에 서 있는 온하준을 발견했다.동창들은 그 소원이 우스웠는지 웃으며 물었다.“강지연, 도대체 무슨 송편인데 그래? 그렇게 맛있었어? 어느 집에서 팔던 건데?”“그러게. 어디 유명한 집 거야? 지금은 문 닫았어?”다들 유명한 가계에서 만든 음식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강지연은 문어 구에 서 있는 온하준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술기운이 눈가까지 번진 건지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시야를 흐렸다.“유명한 집에서 파는 거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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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2화

“들었지? 강지연은 집에 안 간다잖아!”라호성이 온하준의 어깨를 밀어내며 소리를 질렀다.원래 강지연을 반쯤 들어 올리고 있던 온하준은 예상치 못한 힘에 휘청이며 다시 자리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라호성은 오늘 술을 과하게 마신 탓인지 말투와 눈빛이 이미 삐딱하게 풀려 버린 상태였다.분위기가 이상하다고 느낀 최아현은 혹시라도 일이 커질까 봐 서둘러 입을 열었다.“우리도 그만 일어나자. 시간도 늦었고 충분히 잘 놀았잖아. 이만 집에 들어가야지.”하지만 라호성은 고개를 홱 젓더니 온하준의 어깨를 꽉 누르며 버텼다.“안 돼! 오늘 여기 있는 술 다 비우기 전까진 누구도 집에 못 가!”눈치 빠르고 예민한 온하준이 최아현도 느낀 분위기를 알아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그는 굳어진 표정으로 라호성을 바라보며 차분하게 말했다.“라호성, 오늘 술 많이 마신 건 아니까 그냥 넘어가 줄게. 하지만 여기까지야. 적당히 하고 선 넘지 마.”라호성의 눈빛에 숨길 수 없는 살기가 스쳤다.“선? 적당히 하라고? 온하준, 그 말은 내가 너한테 해야 할 말이야. 너야말로 조심해.”라호성이 온하준의 옷깃을 움켜쥐자 온하준은 즉시 라호성의 손목을 강하게 잡아냈다.“라호성, 오늘 일부러 시비 걸러 온 거야?”라호성은 벌겋게 달아오른 눈으로 목소리를 높였다.“그래! 나 오늘 시비 걸러 왔어! 온하준, 너 강지연한테 대체 뭘 한 거야? 응? 뭘 한 거냐고!”온하준의 시선도 날카롭게 바뀌었다. 그는 손등에 핏줄이 살아날 정도로 라호성의 팔목을 꽉 움켜쥐고 말했다.“라호성, 내 아내는 잘 먹고 잘 입고 호화로운 집에서 잘 살고 있어. 공주처럼 떠받들어 주는 남편도 있고. 네가 뭔데 부부 일에 끼어들어?”“그래?”라호성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온하준을 소파에서 그대로 잡아끌어 일으키며 말했다.“그러면 강지연이 왜 이렇게 됐는지 말해 봐. 다리는 왜 저렇게 된 건데? 강지연은 춤추는 사람이야! 무대에서 춤출 때면 백조처럼 가볍고 눈부셨던 사람이라고. 그런데 왜 저렇게 된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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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3화

‘연애편지?’강지연은 라호성이 자신에게 연애편지를 쓴 적이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그녀가 뒤돌아보려는 순간, 온하준은 강지연을 가로로 안아 들어 올리더니 룸을 재빨리 빠져나갔다.룸 안에 남은 동창들은 라호성이 강지연을 좋아했다는 소리에 멍하니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하지만 라호성은 몇몇 남자 동창들에게 붙잡힌 채 몸부림쳤다.“놔! 온하준 저 새끼를 오늘 안 죽여 버리면 내가 사람 아니야! 저 위선자 새끼!”“라호성, 너 취했어. 그만 좀 해.”정말 당장이라도 뛰쳐나가 온하준과 싸움을 벌일 것 같아 누구도 쉽게 그를 놓아줄 수 없었다.그때 누군가 물었다.“근데 온하준은 어떻게 온 거야? 누가 불렀어?”“내가.”한 남자가 손을 들며 기운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강지연 데리러 온다길래 알려줬는데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어디 있는지 말 안 했지.”라호성이 그 말을 듣고 더 큰 소리로 외쳤다.“왜 안 알려줘? 알려주지 않는 게 아니라 일부러 불러야지! 그래야 내가 제대로 혼내줄 수 있잖아!”“라호성!”“나 말리지 마! 너희 강지연이 춤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알아? 아침부터 저녁까지 춤에만 미쳐 있던 애야. 무대 위에서뿐만 아니라 가끔은 길 걷다가도 갑자기 공중제비를 돌던 애라고. 그렇게 춤을 사랑하던 애가 멀쩡한 다리를 다쳤으니 얼마나 괴로웠겠어. 근데 온하준 그 개자식은 계속 강지연이 밖에 나오는 걸 싫어한다고 우리를 속였잖아. 너희들은 안 이상해?”라호성이 목이 터지라 외쳤다.“온하준 어디 있어! 온하준 어디 있냐고! 그 새끼 나오라 해. 내가 정면으로 따져 물을 거야!”온하준은 이미 강지연을 안고 가게 앞에 세워둔 차량까지 걸어 나오고 있었다.그는 강지연을 그대로 안은 채 차 문을 열어 조수석에 조심스럽게 앉혔다.온하준이 운전석에 올라타는 순간, 강지연이 손잡이를 더듬으며 차에서 내리려 하자 그는 즉시 문을 잠갔다.“문 열어. 나 내릴래.”강지연은 머리가 점점 더 무거워지고 술기운도 서서히 밀려오는 것 같았다.온하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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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4화

강지연은 미간을 찌푸린 채 풀린 눈으로 온하준의 얼굴을 보며 웅얼거렸다.“너 왜 내 연애편지를 버렸어? 그건 내 것이었잖아.”“난 반장이었어.”온하준이 얼굴을 굳히며 딱딱하게 말했다.“그리고 우리 학교는 연애 금지였잖아.”그 이유가 이해되지 않았던 강지연은 눈썹을 찡그리고 온하준의 어깨를 주먹으로 힘껏 내리쳤다.“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넌 반장이지 담임이 아니잖아! 나한테 온 연애편지는 내 사생활이야. 네가 뭔데 그걸 버려?”술에 취해 힘이 들어가진 않았지만 있는 힘껏 휘두르는 주먹은 온하준의 어깨와 가슴팍에 묵직하게 박혔다.“왜? 화나?”온하준은 강지연의 손목을 붙잡으며 말했다.“연애편지를 버린 게 그렇게 화날 일이야?”“당연히 화나지! 누가 나한테 연애편지 같은 걸 써줬다면...”강지연은 흐릿한 눈으로 고등학교 시절을 더듬었다. 학교에서 연애는 금지되었지만 그 시절의 아이 중 누군들 한 번쯤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을까.강지연도 그랬다. 그녀는 남몰래 온하준을 좋아했다.그런데 이상하게도 고등학교 내내 강지연을 좋아한다고 티를 내는 사람은 없었다.최아현이나 그녀가 알고 지내던 여자애들은 남자애들한테 선물도 받고 쪽지 같은 것도 종종 받았는데 강지연에게는 그런 게 없었다.그때의 강지연은 스스로가 자꾸 작아지는 기분이었다.집에서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다.어릴 때부터 늘 동생보다 못하다는 말을 들었고 심지어 여자인 것조차 잘못이라며 깎아내렸다.뭘 해도 미움만 사는 사람처럼 살았기에 그 시절 강지연의 마음속에서 그녀를 진정으로 아껴주는 존재는 오직 할머니뿐이었다.그래서 어느 남학생이 자신을 마음에 둘 가능성은 더더욱 없다고 믿으며 살아왔다.연애편지를 받지 못했다고 슬프거나 괴롭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최소한 누군가 자길 좋아해 준다는 걸 알았다면 그 시절 모두에게 미움받는 사람은 아니었다고 생각하면서 살았을 터였다.“써줬으면 어쩔 건데? 그러면 그 사람이랑 연애라도 하려고?”온하준은 놓치지 않고 몰아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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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5화

밖에서 들리던 소리가 어느 순간 뚝 끊겨버렸다.차창은 아직 열려 있었고 초여름 밤바람이 어디선가 흘러온 꽃향기와 함께 차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강지연은 잠깐 멍해졌지만 곧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차리고 몸부림치기 시작했다.등받이에 눌린 채 비좁은 조수석 공간에서 온하준을 떼어내는 건 너무 어려웠다.왼쪽으로 몸을 피하고 오른쪽으로 비틀어도 뜨겁게 들이닥치는 그의 입술을 끝내 벗어나지 못했다.결국 머리까지 붙잡히자 더는 피할 틈도 없었다. 그의 숨결이 거칠고도 강하게 그녀를 휘감았다.결혼한 지 5년이 다 되어가지만 온하준과의 이 같은 신체적 접촉은 처음이었다.그리고 이 키스는 그녀의 인생 첫 키스이기도 했다.하지만 지금 펼쳐진 이 상황은 그녀가 예전에 그리던 동경이나 상상과는 천양지차였다.참을 수 없는 거부감에 강지연은 더는 참지 못하고 그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뒤로 세게 잡아당겼다.온하준은 낮게 신음하며 고통을 삼키고서야 비로소 그녀의 입술에서 떨어졌다.두 사람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답답한 공간에서 서로를 똑바로 마주 봤다.강지연은 어지러움이 더 심해져 온하준의 얼굴이 끊임없이 위아래로 흔들리는 듯했고 차 밖에는 동창들의 모습이 모두 사라진 뒤였다.“키스하면 안 돼?”온하준은 숨을 몰아쉬며 묻더니 다시 그녀를 누르며 고개를 숙여왔다.속이 뒤집히듯 울렁거렸던 강지연은 그를 힘껏 밀치고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문을 열어 달라고 허둥대듯 손짓했다.온하준이 잠금을 풀자 그녀는 차 문을 박차고 내려가 길가 쓰레기통을 향해 비틀거리며 달려갔다.너무 급해서 자세나 체면 따위는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간신히 쓰레기통 앞에 다다른 그녀는 그 자리에서 몸을 굽히더니, 곧장 토하기 시작했다.속이 텅 빌 때까지 토한 뒤에야 강지연은 간신히 쓰레기통 옆 나무에 등을 기대었다.술기운이 역류하듯 머리끝까지 밀려왔다. 나무가 없었더라면 강지연은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을 것이다.곧장 뒤따라온 온하준은 먹구름 낀 얼굴로 그녀의 어깨를 거칠게 움켜쥐며 말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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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6화

강지연은 온하준의 품에 안긴 채로 미간을 찌푸리며 툭 내뱉었다.“안 돼. 너 이 리프트 힘 하나도 없잖아. 밥 안 먹었어?”온하준은 말문이 막혔다. ‘나를 남자 무용수 파트너라고 생각하고 춤 연습을 하는 거야?’그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강지연, 집 도착했어. 들어가자.”“연습을 이렇게 마무리하고 집에 간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한 번 더 해야지. 음악은? 음악 왜 멈췄어?”“강지연, 수업 끝났어!”온하준은 어쩔 수 없이 그녀의 장단에 맞춰주며 엘리베이터로 들어갔다.“수업 끝나도 계속 연습해야지! 돌아가! 연습실로 돌아가!”강지연이 계속 몸을 버둥거리자 온하준은 그녀를 더 꽉 끌어안으며 말했다.“그래, 그래. 돌아가자. 지금 가. 거의 다 왔어.”엘리베이터는 곧장 그들이 사는 층에 도착했다.온하준은 강지연을 안은 채 집으로 들어선 뒤 곧바로 욕실을 향해 그녀의 얼굴을 닦고 칫솔질을 시켜주었다.다행히도 그녀의 옷은 토사물로 더럽혀지지 않았지만 온하준은 그래도 옷을 갈아입히고 제대로 목욕을 시켜 편히 쉴 수 있도록 해주고 싶었다.그런데 온하준이 옷을 벗기려 하자 강지연은 또 버둥대며 고개를 저었다.“아냐, 아직 연습복으로 갈아입을 필요 없어. 더 연습해야 돼...”그녀는 잠시 골똘히 생각하더니 함께 호흡을 맞추던 남자 무용수의 이름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장시범, 너 리프트에 힘이 너무 부족해. 아직 쉬면 안 돼. 가자, 우리 더 연습하자!”그 이름이 떨어진 순간, 온하준의 얼굴이 완전히 굳었다.“너 지금 누구를 부르는 거야?”강지연은 멍한 눈으로 고개를 흔들었다.“장시범이지. 장시범, 지금 네가 B캐스트로 밀려났잖아. 그러니까 네 힘으로 다시 A캐스트로 올라가야지. 그러려면 더 노력하는 수밖에 없어. 가자, 다시 연습하자!”온하준이 그녀의 뒷머리를 받쳐 들고 단호하게 말했다.“잘 봐. 나 누구야?”강지연은 눈을 깜빡이며 빙글빙글 도는 천장과 흐릿한 그림자를 멍하니 쳐다보았다.“너 장시범 아니야? 그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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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7화

“응?”강지연은 여전히 음악 속에 빠져 있었다. 온하준은 그녀의 웃는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며 말했다.“너, 춤출 때 진짜 행복해 보인다.”“당연하지!”강지연은 미소를 지은 채 그의 부축을 받고 비틀거리며 원을 그렸다.“장시범, 넌 내가 인생에서 제일 행복했던 때가 언제인지 알아?”온하준의 눈빛이 순간 팽팽해졌다.“언제인데?”“무용을 전공했던 4년이 제일 행복했어. 그 시간은 내가 마음껏 날아다닐 수 있었던 시간이었어.”강지연은 빙글빙글 돌다 더 어지러워져 온하준 품으로 푹 기대며 중얼거렸다.“그때의 나는 춤도 있었고 너...”원래는 너희 같은 좋은 친구들도 있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술에 너무 취한 그녀는 ‘너’까지만 말하고는 그대로 온하준의 가슴팍에 기대 잠들었다.온하준은 굳은 채 서서 꼼짝도 하지 않고 그녀를 안고 있었다.그때 진경숙이 온하준이 시킨 대로 잠옷을 가지고 욕실 앞에 다가섰다.욕실 안이 조용해지자 그녀는 문을 열지 못한 채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대표님?”그제야 온하준은 꿈에서 깬 듯 정신을 차리고 품 안의 강지연을 흔들었다.“강지연, 강지연!”“그만...”강지연이 웅얼거렸다.“장시범, 나 좀 힘들어. 조금만 쉬다가...”다시 얼어붙은 듯 멍하니 서 있던 온하준은 한참 지나서야 진경숙이 떠올라 고대를 돌리며 말했다.“아주머니, 밖에 있어요?”“네.”“들어오세요.”“네.”잠옷을 들고 들어오던 진경숙은 온하준이 강지연을 안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급히 시선을 돌렸다.“뜨거운 물 좀 받아서 목욕시키세요.”그때 김도윤 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고 온하준은 한 팔로 강지연을 받친 채 통화버튼을 눌렀다.“여보세요.”“하준아, 나와. 우리 다 여기 있어.”온하준은 품 안의 강지연을 내려다봤다.그녀는 이미 술기운에 취해 깊이 잠든 듯했고 볼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알았어. 금방 갈게.”온하준은 강지연을 진경숙에게 넘기며 말했다.“강지연이 오늘 많이 취했으니까 아주머니가 좀 챙겨주세요.”진경숙은 지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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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8화

온하준은 화면에 뜨는 가사를 따라 다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모든 것이 처음부터 다시 시작된다 해도 나는 이 선택을 바꾸지 않을 거야. 내가 너를 선택했고 너는 나를 선택했어. 영원히 사랑할게.”온하준의 휴대전화는 테이블 위에 놓인 채로 계속 불빛을 깜빡였지만 음악 소리가 너무 커서 벨 소리는 묻혀버렸다.김도윤은 화면에 떠오른 ‘진경숙’이라는 이름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온하준의 가사 도우미 성이 진 씨라는 사실이 떠올랐다.김도윤은 노래에 열중한 온하준을 힐끗 돌아보고는 그대로 전화를 받았다.스피커를 켜지 않은 채 귀에 대고 들었지만 워낙 시끄러워 진경숙이 뭐라고 하는지 또렷이 들리진 않았고 그저 사모님이 어쩐다는 말만 어렴풋이 스쳤다.김도윤은 순간 짜증이 치밀었다.‘그 악독한 여자가 또 온하준을 감시하려고 전화한 거야? 지겨워 정말.’그는 아무 말 없이 휴대전화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동시에 온하준과 이하나의 노랫소리는 전화기 너머로 고스란히 전달되었다.“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을 사랑으로 너의 곁을 영원히 지킬게...”진경숙의 휴대전화는 욕실 바닥에 떨어져 있었고 스피커 너머로는 남녀의 목소리가 어우러진 사랑 노래가 선명하게 흘러나왔다. 그중 하나는 너무나도 익숙한 온하준의 목소리였다.진경숙은 급하게 기어가 손을 뻗어 전화를 끊었다.그리고 고개를 돌리자 강지연이 욕조 안에서 목욕 수건으로 몸을 감싼 채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사모님이 통화 내용을 전부 들으셨네...’“사모님, 제가 너무 무능해서 정말 죄송해요.”진경숙은 자신의 아내를 버려둔 채 구미호 같은 여자와 붙어 사랑 노래를 부르는 온하준 때문에 강지연이 상처받을까 봐 걱정스러웠다.조금 전 욕조에서 강지연을 안아 꺼내던 진경숙은 발이 미끄러졌고 그만 바닥으로 넘어졌다.진경숙은 자기 발목이 삐끗한 건 상관없었지만 강지연을 밤새 욕조에 눕혀둘 수 없어 온하준에게 전화를 건 거였다.그런데 막 번호를 누르는 순간, 휴대전화가 손에서 미끄러져 떨어지면서 스피커 모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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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9화

진경숙은 발과 팔을 모두 다쳤다.발은 접질려 발목이 퉁퉁 부어 걷지도 못했고 넘어질 때 팔로 바닥을 짚는 바람에 골절까지 됐다. 그러니 휴대전화조차 제대로 쥐지 못했던 것도 당연했다.강지연은 머리에 외상을 입어 봉합을 했고 그 외에는 큰 문제가 없었지만 머리가 계속 어지러웠다.의사는 술 때문만이 아니라 출혈 탓일 수도 있다고 했다.강지연이 장거리 비행 가능 여부를 묻자 의사는 확답을 피하며 비행 날짜를 확인한 뒤 아직 열흘 넘게 남았고 상처가 크지 않으니 회복 상황을 지켜보자고 말했다.강지연과 진경숙은 서로 다른 병실에 배정됐고 둘을 돌봐줄 사람도 없었다.간호사가 보호자 여부를 물었을 때 강지연은 망설임 없이 간호사에게 간병인 두 명을 부탁했다.강지연은 머리가 심하게 어지러웠지만 그 와중에도 하나하나 빼놓지 않고 필요한 일을 차분히 처리했다.모든 일을 마치고서야 그녀는 더 버티지 못하고 깊은 잠에 빠졌다.잠은 깊고 길었다. 병실에서는 간호사나 의사의 출입 소리가 들리곤 했지만 평소 같으면 잠을 방해했을 그 소리조차 이번에는 닿지 않았다.강지연은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한 채 깊이 잠들었다.옆 병실에 있던 진경숙은 강지연이 걱정돼 간병인에게 몇 번이고 다녀와 달라고 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늘 자고 있다는 말뿐이었다.속이 타들어 가 의사를 불렀지만 의사는 아무 문제 없다며 태연하게 대답했다.사람이 몇 시간째 미동도 없이 자고 있는데 아무 문제 없다고만 하자 진경숙은 열이 나는 것 같았다.무엇보다 불만이었던 건 두 사람 모두 입원해 있는데도 온하준에게서 전화 한 통 없다는 것이었다.‘사모님이 너무 깊게 자서 전화를 못 받았다고 해도 그렇지. 사람이 궁금하고 걱정되면 나한테라고 전화를 걸어봐야 하는 거 아니야? 어젯밤에 내가 전화했다는 건 무조건 일이 있다는 뜻이란 걸 알면서도 어떻게 전화 한 통을 안 해?’온하준의 전화는 다음 날 오후에야 걸려 왔다.그때 강지연은 막 눈을 뜬 참이었다. 아침도 점심도 못 먹은 채 멍한 상태로 있던 그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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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0화

옆에서 기다리고 있던 간병인은 강지연이 통화를 끝내자 씻는 것부터 화장실까지 꼼꼼하게 거들어 주고는 뭘 먹고 싶은지 물었다.강지연은 속을 따뜻하게 할 국물이 몹시 당겼지만 우선 옆 병실의 진경숙 상태를 확인했다.큰 문제가 없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야 그녀는 비로소 자기의 배고픔을 돌보기로 했다.“먹을 것은 제가 배달로 시킬게요. 조금 있다 도착하면 받아와 주세요.”그녀는 국물이 유독 진한 것으로 유명한 갈비탕 전문점을 골라 밥과 갈비탕에 더해 반찬 다섯 가지까지 넉넉히 주문했다.배달이 올 때까지 기다리며 습관적으로 인스타그램을 열어보자 최아현이 올린 글이 눈에 들어왔다.고등학교 시절 단체 사진과 어제 저녁 식사 장면이 함께 게시되어 있었다.[9년 전의 우리와 지금의 우리.]강지연은 사진을 보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고등학교 시절의 그녀는 정말 콩나물처럼 말라 있었고 풋풋한 얼굴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게시물이 방금 올라와 댓글은 아직 없었다. 강지연은 하트를 누르고 스크롤을 내리다 김도윤의 글을 발견했다.[세월이 흘러도 변함없이 두 사람 행복하길 바라.]글과 함께 올라간 영상을 탭 하자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을 사랑으로 너의 곁을 영원히 지킬게...”강지연은 재빨리 화면을 끄며 속으로 중얼거렸다.‘김도윤, 온하준과 이하나를 위해 인스타에 대신 고백이라도 해주는 거야? 정말 어이없어.’어젯밤은 너무 취해 정신이 없었고 오늘은 하루를 통째로 곯아떨어져 어제의 일을 흘려보냈는데 지금은 또렷하게 떠올랐다.어젯밤, 온하준은 이하나와 함께 노래방에서 ‘선택’을 듀엣으로 불렀다.그것도 하필 그녀와 진경숙이 욕실에서 넘어지던 바로 그 시간에.하지만 놀랍지 않았다. 그 두 사람의 사이를 생각하면 사랑 노래를 함께 부르는 게 새삼스러운 것도 없었다.강지연은 아무 말 없이 인스타와 카톡에서 김도윤을 차단했다. 보이지 않으면 끝나는 일이었다.잠시 생각한 끝에 강지연은 김도진을 비롯한 그 주변 사람들도 모두 차단해 버렸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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