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다섯 번째 결혼기념일에서: Chapter 271 - Chapter 280

775 Chapters

제271화

구경꾼들은 이 난리를 놓치지 않았다. 사람들은 다시 몰려들었고 누군가는 아예 휴대전화를 들고 라이브를 켰다.강지연이 달려왔을 때 두 사람은 이미 땅바닥에서 뒤엉킨 채 굴러다니고 있었고 주변에서는 누군가 상황을 중계하듯 떠들고 있었다.“둘 다 그만해! 이게 뭐 하는 짓이야?”강지연은 아무리 해도 두 사람을 떼어낼 수 없었다.“영상이 인터넷에 올라가면 어떻게 얼굴 들고 다닐 거야? 쪽팔리지도 않아?”그 순간 장시범이 우위를 잡고 온하준을 누르며 말했다.“난 상관없어요!”말이 끝나기도 전에 상황은 다시 뒤집혔다. 온하준이 무릎으로 장시범의 목을 강하게 누르자 장시범의 얼굴이 금세 붉게 질렸다.“너도 상관없어?”강지연은 뒤에서 팔을 뻗어 온하준의 목을 감싸 쥐고 힘껏 끌어당겼다.떼어내려는 동작이었지만 힘이 너무 들어가 온하준은 그대로 숨이 막혀 버렸다.결국 그는 손과 다리에 힘을 풀었고 장시범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다시 한번 온하준을 걷어찼다.장시범이 또 발을 들려는 순간, 온하준이 급하게 입을 열었다.“강지연! 너 불공평...”숨이 가쁜 탓에 말이 뚝뚝 끊어졌다.강지연은 이를 악문 채 온하준의 목을 더 단단히 붙잡으며 말했다.“그만 싸워!”“그러면 장시범을 잡아야지! 켁... 왜, 왜 나를...”온하준은 숨을 몰아쉬며 거칠게 기침했다.그때 이하나가 달려와 눈이 벌겋게 충혈된 채 울면서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았다.“그만 때려! 말은 내가 한 거잖아! 내가 사과할게! 화가 안 풀리면 나를 때려! 하준이는 때리지 말아 줘, 제발!”아까 장시범에게 맞은 뺨에는 아직도 선명한 손자국이 남아 있었다.온하준은 이하나를 바라보다가 자신을 조르고 있는 강지연을 올려다보며 쓸쓸하게 말했다.“너는 늘 내가 하나 편만 든다고 했지? 잘 봐. 내가 이하나 편을 들어주는 이유가 뭔지.”강지연은 잠시 말을 잃었다.“아니, 온하준. 너 설마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해? 판단력이 겨우 그 정도야? 너 이런 지능으로 회사를 어떻게 운영하는 거야? 우리 이
Read more

제272화

이하나는 그제야 마음이 조여왔다. 순간적인 쾌감에 예전에 블로그에 사진을 올린 적이 있었다.반쯤 비치는 잠옷 차림의 자신과 술에 취해 상반신이 드러난 온하준이 함께 찍힌 사진이었다. 그의 얼굴도 분명히 찍혀 있었다.하지만 올리자마자 바로 삭제했다.‘정말 바로 지웠는데 도대체 누가 그걸 캡처해 둔 거지?’“왜? 이제 와서 겁나?”장시범이 몰아붙였다.“그만해.”온하준이 이하나를 감싸며 앞으로 나섰다.“하나가 올린 건 전부 내 허락받은 거야. 잘못이 있다면 내가 사과할게.”그는 강지연 앞에 서서 말을 이었다.“하나가 방금 너를...”말이 입에 잘 붙지 않는 듯 잠시 멈췄다가 그는 표현을 바꿨다.“부적절하게 말한 것에 대해 내가 대신해서 진심으로 사과할게.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줬으면 한다.”강지연의 가슴 한가운데가 싸늘하게 식어갔다. 다른 사람의 조롱에 대해 온하준이 대신 사과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지난 5년 동안 김도윤이나 김도진이 그녀의 다리를 두고 얼마나 은근하게 비웃었는지 셀 수도 없었지만 그는 단 한 번도 막지 않았다.오늘에서야 사과라는 걸 받아봤지만 그것은 이하나가 아닌 온하준의 입을 통해서였다.웃기지도 않았다. 자기 아내를 모욕한 사람을 대신해 남편이 아내에게 사과한다니.강지연은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그딴 사과는 필요 없다고 말하려던 찰나, 온하준이 휴대전화를 꺼내며 덧붙였다.“정신적인 피해에 대해서는 내가 책임지고 보상할게.”강지연은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다시 삼켰다.‘그래. 그렇다면 굳이 거절할 이유는 없지.’곧이어 주머니 속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화면을 확인하자 일억이 입금돼 있었다.온하준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바로 돈부터 확인하네? 강지연, 너 정말 낯설어졌다.”강지연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바라던 바야. 지금 내 인생에서 제일 큰 소원은 너와 남남이 되는 거거든. 두 사람, 여행 잘해. 가자.”강지연이 장시범 일행과 함께 자리를 뜨자 광장에는 온하준과 이하나만 남았다.주변 사람들의 시
Read more

제273화

온하준의 말을 들은 이하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 미소는 그대로 굳어버렸다.그의 시선은 여전히 먼 곳에 머물러 있었고 그녀의 말은 아예 귀에 들어오지 않는 듯했다.“하준아, 우리 내일 여기서 떠날까?”그의 대답은 바로 돌아오지 않았다.“하준아, 듣고 있어?”그제야 온하준은 천천히 시선을 거두며 짧게 말했다.“응, 들었어.”강지연의 모습은 이미 세 명의 동료와 함께 시야에서 사라진 뒤였다.돌아오는 길 내내 장시범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수성의 거리는 사람들로 가득했지만 공기는 묘하게 답답하게 눌러와 숨이 막히는 듯했다.네 사람은 그대로 호텔로 돌아왔다. 장시범은 세 여자를 엘리베이터 앞까지 바래다준 뒤 웃으며 말했다.“먼저 올라가요. 살게 하나 있었는데 깜빡해서 잠깐 나갔다가 올게요.”“뭘 사러 가는데?”윤해정이 물었다.“남자들이 쓰는 거.”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며 장시범의 모습은 시야에서 사라졌다. 윤해정의 룸메이트가 괜히 한마디를 덧붙였다.“남자한테 꼭 필요한 게 따로 있어? 남자는 매달 그런 날도 없잖아.”윤해정이 피식 웃었다. 팽팽하게 조여 있던 분위기가 그제야 조금 풀렸다. 그러다 윤해정은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나도 살 게 있네. 나도 잠깐 내려갔다가 올게요. 선배, 두 사람 먼저 방으로 올라가요.”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강지연과 윤해정의 룸메이트가 먼저 내렸고 윤해정은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강지연이 방으로 돌아가려면 호텔 복도를 지나야 했다. 복도 끝에서는 호텔 안쪽 정원이 내려다보였다.강지연은 물건을 사러 간다던 장시범이 정원 가장자리 의자에 앉아 컵을 쥔 채 멍하니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나 때문에 기분이 상했구나. 내일 무대에 올라야 할 텐데.’강지연은 자기 일로 무용단의 컨디션이 흐트러지는 걸 원치 않았다.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차라리 내려가서 말을 해주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내일을 위해서라도 오늘은 푹 쉬어야 하고 술은 절대 마시면 안 된다고.
Read more

제274화

강지연의 마음속에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신물이 차올랐다.사람들은 모두 온하준이라면 그녀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 거라 믿었다.하지만 온하준 자신과 그와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은 그 믿음에서 비껴나 있었다.사랑은 강요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 사실을 강지연은 5년이라는 시간을 들여 배웠다.이제는 온하준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애초에 그를 구했을 때 머릿속에 계산 같은 건 없었다. 그저 몸이 먼저 반응했을 뿐이었다.목숨이 오가는 찰나에 조건을 따질 여유 따위는 없었다.온하준의 의심처럼 결혼을 전제로 사람을 구할 만큼 냉정하고 여유로운 정신 상태였을 리도 없었다.그러면서도 그가 그렇게까지 자신을 의심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지금도 가슴을 찔렀다.사랑하지 않았다면 차라리 솔직하게 말해줬으면 좋았을 텐데.5년 전 병원에서 회복만 하면, 각자의 길을 가자고 했더라면 그녀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조용히 퇴원해 자기 인생을 살았을 것이다.이 5년 중 단 한 번이라도 진실을 털어놓았다면 그녀는 그를 원망하지 않았을 것이다.서로 애썼다는 사실만으로도 담담히 돌아설 수 있었을 텐데 결국 여기까지 와버린 현실이 씁쓸했다.장시범은 한동안 말을 잃었고 윤해정은 조용히 그의 곁에서 감정을 달래고 있었다.강지연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르는 걸 느꼈다. 그녀는 급히 손등으로 닦아낸 뒤 두 사람을 방해하지 않으려 조용히 몸을 돌렸다.잠시 후 장시범은 어느 정도 마음을 추스른 듯했지만 여전히 가라앉지 않는 감정을 눌러 담으며 말했다.“너는 모르겠지만 나 5년 전 선배 결혼식에 갔었어. 멀리서 지켜봤는데 선배가 웃고 있더라. 그런데 온하준이 반지를 끼워주는 순간 진짜 미친 생각이 들었어. 그대로 식장에 뛰어 들어가서 선배를 데리고 나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윤해정은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장시범이 강지연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오래전부터였다는 것과 그런 갈등까지 겪고 있었다는 건 상상
Read more

제275화

다음 날 아침, 강지연은 여느 때처럼 이른 시간부터 재활하러 나섰다.전날 밤의 소동은 생각보다 마음에 깊은 그늘을 드리우지 않았다. 장시범과 윤해정이 함께 와 그녀의 연습을 도왔다.모든 걸 다시 시작한다는 말은 언제나 그럴듯하다. 그러나 막상 몸을 던져 실행해 보니 그 말이 얼마나 가혹한지 절실히 느껴졌다.강지연의 이번 유럽 일정은 어느덧 열흘째에 접어들어 있었다.그녀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재활을 이어왔고 끊임없이 몸을 움직였다. 유연성은 분명 예전보다 조금씩 풀리고 있었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변화는 나타나지 않았다.발은 여전히 반응이 없었고 연습할 때마다 극심한 통증이 따라왔다.유럽에 온 뒤로는 매 끼니를 꽤 많이 먹었고 음식도 가리지 않았지만 체중은 출발했을 때보다 거의 열 근이나 빠져 있었다.원래도 마른 체형이었는데 검은 연습복을 입고 있으면 사람이 종잇장처럼 얇아 보일 정도였다.이건 운동량 때문이 아니라 통증 때문이었다. 연습 중에도 아팠고 연습이 끝난 뒤에도 통증은 가시지 않았다. 밤이면 혼자 이불 속에서 발을 주무르며 시간을 보냈다.한번 시작하면 한 시간이 훌쩍 지났고 몹시 피곤했지만 통증 때문에 쉽게 잠들 수 없었다.하지만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강지연은 지난 5년을 황폐하게 흘려보낸 자신을 떠올리며 스스로에게 물었다.‘사람이 이 세상에 오는 이유는 결국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 살고 싶은 삶을 살기 위해서가 아닐까. 그렇다면 강지연, 너는 무엇을 하고 싶어?’답은 분명했다. 춤이었다. 설령 절뚝거리는 작은 제비가 되더라도, 설령 다시는 날아오르지 못하더라도, 무대 위에서 어설프게라도 계속 춤을 추고 싶었다. 그 춤이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한 것일지라도.그 생각에 이르자 하루하루가 몹시 즐거워졌다. 몸은 아팠지만 마음만은 분명히 행복했다. 그걸로 충분했다.십 분의 몸풀기가 지나고 십오 분쯤 흘렀을 때, 통증으로 땀이 연습복을 흠뻑 적시기 시작했다.이 장면은 이제 장시범과 윤해정에게도 익숙했다.강지연이 얼마나 아픈지
Read more

제276화

강지연의 말에 이하나는 순간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숙이고 억울한 사람처럼 그 자리에 서 있었다.반면 온하준은 얼굴을 굳힌 채 이하나의 옆으로 한 걸음 다가서며 말했다.“그 말 무슨 뜻이야? 하나가 틀린 말이라도 했어? 좋은 마음으로 하는 말인데 그렇게까지 비꼴 필요 있어?”그러자 이하나는 서둘러 온하준의 소매를 붙잡았다. 당황한 기색이 스쳤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럽고 가녀렸다.“하준아, 강지연한테 그렇게 말하지 마. 지금 기분이 안 좋은 거잖아. 이해해 줘야지.”온하준은 말없이 강지연을 노려보았다. 매서운 시선에는 노골적인 분노가 담겨 있었다. 이하나는 다시 말을 이었다.“하준아, 그러지 마. 강지연은 요즘 매일 이런 무용수들이랑 같이 있으니까 더 힘들 거야. 사실 이제 춤을 못 추는데도 계속 추고 싶어서 얼마나 괴롭겠어. 강지연, 너 자신을 그렇게까지 몰아붙이지 마. 네가 춤을 못 춘다고 해서 하준이가 널 싫어하는 것도 아니잖아. 다치면 하준이 더 마음 아파해.”말만 들으면 한없이 따뜻한 위로였다. 그러나 강지연은 그 말하는 동안 이하나의 시선이 의도적으로 자기 발에 꽂히는 걸 분명히 보았다.그 눈빛에는 숨길 생각조차 없는 우월감과 묘한 만족이 깃들어 있었다.‘그래도 온하준은 또 감동하겠지. 자기를 이해해 주는 사람은 착한 이하나뿐이라고.’예상대로 온하준은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네가 하나의 절반만큼이라도 철이 들었으면 내가 회사를 내팽개치고 여기까지 올 일도 없었어.”“아, 그게 그렇게 힘든 일이었어?”강지연은 담담히 되물었다.“예전에 수제 인형 하나 때문에 여기까지 날아왔을 땐 안 힘들었고?”그녀는 지난 기억을 모두 잊고 싶었다. 하지만, 이 둘은 굳이 그녀 앞에 나타나 잊고 있던 장면들을 하나하나 끄집어내고 있었다.“그 인형 결국 너한테 줬잖아.”온하준이 얼굴을 굳힌 채 말했다.“그래?”강지연은 차분히 되물었다.“그걸 대체 누굴 위해 산 건지는 이제 더 묻고 싶지도 않
Read more

제277화

온하준의 얼굴을 바라보던 강지연은 문득 깊은 피로를 느꼈다.너무 지쳐버려서 이제는 열여섯 살이던 온하준의 얼굴이 어떤 모습이었는지도 또렷이 떠오르지 않았다.“온하준, 그만 돌아가.”그녀는 힘없이 말했다.“강지연, 나랑 같이 가자.”온하준은 한 걸음 더 다가왔다.“아무리 화가 나도 자기 몸을 이렇게까지 망가뜨리면 안 돼. 네가 춤추고 싶은 건 알아. 하지만 넌 이제 안 돼.”강지연은 차갑게 그를 바라봤다.“내 말이 틀렸어?”온하준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의사도 이미 말했잖아. 괜히 장시범 저 자식 말에 기대서 헛된 희망 품지 마. 저 인간은 순수한 마음으로 널 돕는 게 아니야. 네가 지금 얼마나 말랐는지 봐. 또 다치면 어쩌려고 그래? 안 되는 건 억지로 붙잡지 마. 강지연, 내가 예전부터 말했잖아. 넌 아무것도 안 해도 영원히 내 아내야.”“닥쳐.”옆에서 장시범이 이를 악물고 내뱉었다.온하준은 그를 흘끗 보기만 했을 뿐, 여전히 강지연의 손목을 붙잡은 채 말을 이었다.“강지연, 이제 그만해. 내가 옆에 없어서 화난 거잖아. 그래서 열몇 시간 비행기 타고 여기까지 왔잖아. 이쯤이면 충분하지 않아?”강지연은 그의 손등 위로 도드라진 핏줄을 멍하니 바라봤다. 말 하나하나가 숨을 막히게 했지만 이제는 분노조차 낼 힘이 없었다. 그녀는 마치 낯선 사람에게 말하듯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온하준, 솔직히 말할게. 너랑 떨어져 지낸 이 열흘 남짓이 너와 함께했던 지난 5년 중에서 제일 행복한 시간이었어.”온하준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고 안에서 무언가가 산산이 부서지는 듯했다.강지연은 그가 이 말을 믿지 못하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온하준, 예전 같았으면 매달렸겠지. 너 없이는 못 산다고 울며 붙잡았을 거야. 하지만 이제는 아니야.’온하준의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온하준.”강지연은 낮게 말했다.“정말로, 정말로 네게 양심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내가 네 목숨을 한 번 살려준 적 있다는 것만이라도 떠올려 줘. 네가 나한테 은혜를 갚고
Read more

제278화

온하준은 멍하니 이하나를 바라봤다.“하준아! 너 정말 충분히 했어. 다 갚았어.”이하나가 목소리를 높였다.“아니면 네가 직접 계산해 봐. 설령 네가 차로 친 거라 해도 이 정도 돈이면 이미 다 갚은 거야. 진짜 가해자라도 이렇게까지는 안 해!”“다 갚았다고?”온하준은 넋이 나간 얼굴로 되뇌었다.“그래, 다 갚았어!”이하나는 다급하게 몰아붙였다.“하준아, 이러지 마. 강지연이 네 목숨을 구한 건 맞아. 하지만 그 은혜 때문에 평생을 묶여 사는 사람이 어딨어? 은혜는 갚는 거지 인생을 바치는 게 아니야.”그녀는 그의 옷깃을 붙잡고 세차게 흔들었다.“정신 차려. 너는 대단한 사람이잖아. 그때 강지연이 널 안 구했으면 애초에 급도 안 맞아서 결혼 같은 건 생각도 못 했을 거야. 넌 충분히 했어. 넘치도록 했다고. 이제는 은혜라는 족쇄에서 벗어나야 해. 너 자신을 위해서 살아. 네 인생은 네 거야, 하준아.”“나 자신을 위해서?”온하준은 그 말을 곱씹듯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오히려 더 흐려졌다.“그래. 인제 그만 괴로워해. 강지연을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억지로 함께 살았잖아.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아?”온하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한참 동안 강지연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봤다.하지만 그녀의 모습은 이미 오래전에 시야에서 사라진 뒤였다.그날 강지연의 하루는 숨 돌릴 틈 없이 빽빽했다. 온하준과 이하나가 무엇을 하든 헤아릴 여유조차 없었다.호텔로 돌아와 급히 샤워를 마치고 아침을 먹자마자 극단으로 향했다.무대 설치를 돕고 소품을 정리했다. 오후가 되면 배우들이 들어오기 때문에 의상과 분장을 점검해야 했다.수성에서의 공연은 단 하루였다. 완전한 무용극이 아니라 각 팀이 하이라이트 한 장면씩을 올리는 구성이라 배우가 많았고 그만큼 무대와 소품, 분장은 더 복잡해졌다.강지연과 스태프들은 밥 먹을 시간조차 없이 움직였다.오후가 되어서야 조민서가 억지로 시간을 쪼개 사람들을 번갈아 식사하게 했다. 그 틈에 강지연은 한참 참았던 볼일을
Read more

제279화

강지연이 웃었다.“그런데 어떡하지?”“뭘 어떡해?”이하나가 발끈했다.“그 절뚝이한테 또 빌어야 하잖아.”강지연은 끝까지 웃는 얼굴이었다.“내가 너한테 빌어야 한다고? 웃기지 마. 나는 하준의 첫사랑이야. 내가 해외에 나가 있던 그 5년 동안에도 하준이는 늘 나를 마음에 품고 있었고 집 비밀번호도 아직 내 생일이잖아. 너 잊었어? 내가 왜 너 같은 사람한테 빌어.”강지연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미소를 유지한 채 말했다.“그래? 그런데 왜 나한테 와서 이혼하라고 하는 건데?”“나는...”이하나는 잠시 말문이 막혀 멈칫하다가 다시 기세를 세웠다.“하준이는 널 사랑하지 않아! 사랑 없는 결혼은 비도덕적이잖아!”강지연이 피식 웃었다.“그래? 그래도 남의 남자 옆에서 알짱거리는 내연녀보다는 도덕적이지 않아?”“뭐?”이하나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지금 나를 내연녀라고 부른 거야? 나랑 하준은 첫사랑이었고 내가 해외에 있는 사이에 빈틈을 파고든 건 너야. 끼어든 건 네 쪽이라고!”“나는 혼인신고서가 있고 법적으로 인정받은 아내야.”강지연의 무덤덤한 말투에 이하나는 가슴이 들썩일 만큼 씩씩거렸다.“이혼하겠다고 했잖아!”“그래.”강지연은 턱을 가볍게 긁으며 말했다.“그런데 방금 생각이 바뀌었어. 갑자기 이혼하기 싫어졌네.”이하나는 날카롭게 소리쳤다.“봐! 역시 내 말이 맞잖아! 너 애초에 이혼할 생각 없었지? 이혼을 미끼로 하준이랑 나를 못 만나게 협박하는 거잖아!”강지연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맞아. 그래서 뭐 어쩔 건데?”이하나는 발을 구르며 소리쳤다.“너 진짜 비열하고 파렴치해!”“그래서 뭐 어쩔 건데?”같은 말이 반복되자 이하나는 분을 참지 못하고 거의 미쳐버릴 듯 외쳤다.“그 말 말고 다른 말 좀 해!”강지연은 한 발짝 다가서며 부드럽게 웃었다.“그래, 그러면 다른 말 해줄게. 이하나, 이번 여행에서 쓴 돈들 전부 되돌려 받을 수도 있어. 그러니까 조심해.”이하나의 동공이 순식간에 커졌다.“너 정말 염
Read more

제280화

두 사람의 무대가 마지막이었다.‘화접’의 음악은 공연이 끝난 뒤에도 강지연의 귀에서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오래 맴돌았다.관객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이 춤을 향한 애정이 고스란히 전해질 만큼 박수는 여러 차례 터져 나왔고 장시범과 윤해정이 다시 무대에 올라 ‘화접’ 속 몇몇 대표적인 솔로와 듀엣 동작을 재현하자 극장은 또 한 번 박수 소리에 잠겼다.이쯤이면 커튼콜은 끝나야 했다. 이미 관객들은 꽃을 들고 무대로 올라오기 시작했다.그런데 음악이 멈추지 않았다. 동시에 무대 양옆의 대형 스크린에 새로운 화면이 떠올랐다.강지연은 그 자리에서 그대로 얼어붙었다. 스크린에 비친 건 다름 아닌, 과거 ‘화접’을 추던 자신의 모습이었다.어느새 마이크는 장시범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그는 공연이 끝났음을 알리며 오늘 무대를 찾아준 관객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이어 이제 퇴장해도 되지만 이 자리에서 잠시 작은 시간을 갖고 싶다며 남고 싶은 분들만 함께해 달라고 덧붙였다.강지연은 어리둥절했다.‘지금 뭘 하려는 거지?’그 사이 장시범이 다시 입을 열었다.“오늘 우리가 선보인 작품의 이름은 ‘화접’입니다.”그는 이 춤과 함께 흐르는 전통 음악에 대해 간단히 설명한 뒤 말을 이었다.“이 작품을 좋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 춤의 안무가이자 처음 이 무대를 선보였던 사람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 무대로 모시고 싶습니다.”‘화접’의 선율 속에서 장시범은 무대 중앙, 스포트라이트 아래 서서 강지연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강지연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다만 장시범의 격려가 담긴 미소와 스크린 속에서 춤추던 과거의 자신이 동시에 시야에 들어왔다.“쟤가 정말...”조민서가 다급히 강지연의 팔을 붙잡았다.“지연아, 불편하면 안 올라가도 돼.”강지연은 고개를 저었다. 불편하지도, 무례하게 느껴지지도 않았다.이 며칠 동안 자신의 곁에서 재활을 함께해 준 사람들이었다.“선생님, 저 올라갈게요.”단호한 목소리에 조민서는 강지연의
Read more
PREV
1
...
2627282930
...
78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