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다섯 번째 결혼기념일에서: Chapter 261 - Chapter 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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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1화

아이의 질문에 대한 대답치고는 더없이 무색하고 무력했다.한편, 이하나는 온하준이 휴대전화를 내려놓는 걸 보자마자 다가와 물었다.“무슨 일이야?”“별일 아니야. 진경숙이 일을 그만두겠대.”온하준의 말에 이하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설령 그 하인이 무슨 말을 했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지. 하준이한테 나는 강지연보다 훨씬 소중한 존재야. 강지연을 죽음 직전까지 몰아넣어도 온하준은 결국 내 편인데 뭐.’그 사실을 떠올리자 이하나의 입가에 저절로 웃음이 번졌다.그때 그녀의 손에 강지연의 드레스가 잡혔다.“와, 이거 정말 예쁘다. 이거 나 주는 거야?”이하나는 드레스를 이리저리 살펴보며 감탄을 숨기지 않았다.“그건 강지연 거야.”“강지연?”이하나는 눈동자를 굴리며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하준아, 마침 잘됐어. 나 요즘 자선 행사가 하나 있거든. 김도윤이랑 김도진이 같이 가자고 했는데 입을 드레스가 없어서 고민이었어. 이거 잠깐만 빌려주면 안 돼?”온하준은 난처한 기색으로 고개를 저었다.“왜 하필 이거야. 이건 강지연 몸에 맞게 만든 거라 너한테 안 맞을 수도 있어. 내가 하나 사줄게. 이런 국내 디자이너 말고 명품으로.”“싫어!”이하나는 드레스를 몸에 대보며 말했다.“네가 몰라서 그래. 이 신디움이 얼마나 핫한데. 대표가 엘리에서 유학하고 명품 판매장에서 일하다가 귀국해서 개인 스튜디오를 차린 거야. 그 디자이너 옷은 지금 해외에서도 난리야. 레드카펫 서는 연예인들도 다 그 사람한테 맡기고 예약도 아무나 못 해.”“그래?”온하준은 강지연이 옷을 전담한 뒤로 패션계엔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다.“그렇다니까. 하준아, 내가 한 번만 입어보면 안 돼? 입어보고 몸에 맞으면 그냥 내가 입게 해줘. 응?”이하나는 애원하듯 말하더니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드레스를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잠시 뒤 옷을 입어보고 나온 이하나의 표정은 시무룩했다. 드레스가 작아 옆 지퍼가 두 치쯤 올라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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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2화

“뭐라고요?”이하나는 화가 치밀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강지연이요? 걔가 무슨 돈이 있어서 여기 옷을 사요? 강지연 뒤에 누가 있는지는 알고 말하는 거예요? 온하준이 없으면 강지연은 아무것도 아니라고요!”어시스턴트는 미소를 거둔 채 차분하게 답했다.“물론 알고 있습니다. 강지연 씨는 온하준 씨의 사모님이시니까요.”그 말에 이하나는 오히려 더 의기양양해졌다.“안다고 하니 다행이네요. 그런데도 주문은 안 받겠다는 거예요? 온하준이 어떤 사람인지는 아시죠? 해성에서 떠오르는 거물이고 상장기업 최연소 대표예요. 마음만 먹으면 이런 가게 하나쯤은 통째로 사버릴 수도 있다고요.”어시스턴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여전히 웃었다.“네. 알고 있습니다.”“안다면서 그게 무슨 태도예요? 장사하기 싫으세요?”이하나의 목소리는 점점 더 날이 서 갔다. 어시스턴트는 온하준과 이하나를 번갈아 보더니 부드럽게 물었다.“저희도 온하준 씨가 어떤 분인지 알고 있고 강지연 씨와 부부라는 사실도 압니다. 그렇다면 실례지만 손님은 누구신가요?”“나요?”아까까지 의기양양하던 이하나는 그 질문 앞에서 잠시 말문이 막혀 멈칫하다가 작게 말했다.“나는 온하준의 친구예요.”어시스턴트는 예의 바른 미소만 남긴 채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 그 침묵의 의미는 분명했다. 이하나는 기존 고객이 아니라는 뜻이었다.“아니 기존 고객만 받는다면서요? 내가 온하준의 친구면 기존 고객이랑 다를 게 뭐가 있어요!”이하나는 이성을 잃은 채 고함을 질렀다.“죄송합니다, 손님.”어시스턴트는 미소를 유지한 채 말했다.“기존 고객의 기준은 저희 쪽에서 정합니다.”“고작 옷이나 만드는 주제에 잘난 척은!”이하나는 욕설을 섞어 윽박질렀다.“내가 말해두는데 너희 가게 옷을 다 합쳐도 온하준의...”말이 끝나기도 전에 온하준이 뒤에서 그녀를 끌어당기며 입을 열었다.“하나야, 내가 얘기할게.”그는 씩씩거리는 이하나를 막아서며 어시스턴트에게 말했다.“단골도 처음에는 단골이 아니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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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3화

“나이도 어리고 철이 없다고요?”신동하는 코웃음을 쳤다.“왜요? 나이로 사람을 차별하겠다는 건가요?”이하나는 어렵게 건수를 하나 잡았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신동하는 비웃음을 지으며 느긋하게 말했다.“제대로 된 디자이너라면 나이는 감점이 아니라 가산점입니다. 세월이 쌓인 아름다움은 젊음에 뒤지지 않아요. 저는 아흔다섯을 넘은 분이라도 아주 우아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그는 다시 한번 웃으며 덧붙였다.“온하준 씨, 이만 어린 친구분을 데리고 돌아가시죠. 제가 말을 곱게 하는 편이 아니라서요. 계속 있다가는 어떤 말을 하게 될지 저도 장담 못 하겠습니다.”의도적으로 힘을 준 ‘어린 친구’라는 말은 충분히 거슬렸다.온하준은 원래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신동하의 태도는 분명한 모욕이었지만 등 뒤에서 이하나가 그의 옷자락을 붙잡아 당기고 있었다.어쩔 수 없이 그는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신 대표님, 제가 말이 조금 지나쳤습니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는 법 아닙니까. 강지연도 처음엔 새 고객이었겠죠.”신동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도리가 없는 말은 아니네요. 맞습니다. 저희도 새 고객을 받습니다. 다만 기준이 있죠.”“기준이 뭔데요?”이하나가 온하준의 뒤에서 몸을 내밀며 거만하게 말했다.‘기준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돈 말고 기준이 될 게 뭐가 있어. 온하준이 돈이 부족할 사람도 아닌데.’신동하는 더 호탕하게 웃었다.“저희 기준은 보기 편한지 아닌지에 달려 있습니다.”그 말만 남기고 그는 커피를 들고 웃음을 터뜨리며 위층으로 올라가 버렸다.“지금 그게 무슨 뜻이에요!”이하나가 신동하의 뒤를 쫓아 소리치자 어시스턴트가 회전 계단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죄송합니다, 온하준 씨. 그리고 손님. 신 대표님 말씀은 두 분이 보기 불편하다는 뜻입니다.”이하나는 당장이라도 가게를 뒤엎을 기세였다.“뭐가 어쩌고 어째?”그녀는 그대로 온하준에게 끌려 밖으로 나왔다.“하준아!”밖으로 나오자마자 이하나는 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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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4화

강지연은 매일 아침을 일찍 시작했다. 온하준의 문자가 도착했을 때 그녀는 이미 일어나 재활 치료를 받으러 가는 길이었다.내용을 보니 쓸모없는 헛소리는 아니었다. 자신과 온하준 사이가 어떻든 스튜디오 쪽에 차질을 주면 안 되는 일이었다.강지연은 신동하의 스튜디오에서 옷을 집으로 보내 맞춰봐야 하는 단계라고 판단하고 온하준에게 짧게 답했다.[그건 네가 답장 안 해도 돼. 내가 직접 할게.]대화창을 내리다 보니 신디움 어시스턴트가 이미 자신에게 문자를 보내 두었다는 걸 그제야 발견했다.일정이 늘 빠듯했던 탓에 확인하지 못하고 지나친 것이었다. 강지연은 급히 답장을 보냈다.[죄송해요. 최근 외국에 나와 있어서 문자를 확인 못 했네요. 옷에는 문제없으니 수령 처리해 주세요. 비용은 그대로 결제하시면 됩니다.]신디움 스튜디오는 회원제로 운영되고 있었고 그녀는 이미 충분한 금액을 충전해 두었다. 문자를 보내고 나니 채팅창에 입력 중이라는 표시가 한동안 떠 있었다.잔액이 부족한가, 아니면 새로운 디자인에 관해 상의할 일이 생긴 건가 싶었다. 그러나 한참 뒤 돌아온 건 단 한 글자였다.[네.]잠시 후 어시스턴트가 다시 문자를 보냈다.[강지연 씨, 실례를 무릅쓰고 한 가지 여쭤봐도 될까요? 혹시 지금 해외에 계시는가요?]강지연은 잠깐 망설이다가 사실대로 답했다.[예전에 저를 가르쳐 주셨던 선생님을 따라 순회공연을 나와 있어요.]어시스턴트는 유난히 반가워했다.[정말요? 너무 잘됐네요!]그 문자를 보자 문득 온하준을 위해 주문해 두었던 겨울옷이 떠올랐다. 이제는 더 이상 그런 걸 챙길 필요가 없었다.강지연은 겨울옷이 이미 디자인 단계에 들어갔는지 물었고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면 주문을 취소하고 싶다고 전했다.어시스턴트는 망설임 없이 아직 진행 전이라 취소해도 전혀 문제없다고 답했다.그러나 다시 채팅창에는 길게 입력 중이라는 표시가 이어졌다. 혹시 규정상 곤란한 부분이 있는 건가 싶어 강지연은 덧붙였다.[규정에 어긋난다면 취소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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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5화

온하준은 이번엔 재킷 사진을 한 장 보내왔다.[이건 어깨가 좀 작아. 고쳐야겠어.]강지연은 순간 짜증이 치밀었다.[시간 나면 스튜디오 쪽에 얘기해서 날짜 잡아볼게.]곧바로 또 사진 한 장이 날아왔다.[이것도 고쳐야 해. 소매가 짧아.]강지연은 어이가 없었다.[그럴 수가 없잖아. 그쪽에서 네 옷을 백 벌은 넘게 만들었고 내가 가져온 옷 중 맞지 않는 옷은 단 한 벌도 없었어. 그런데 지금 전부 고쳐야 한다는 거야?][응. 다 고쳐야 해. 이것도 봐.]이번엔 그가 직접 입은 사진까지 보내왔다. 하지만 강지연이 보기엔 분명히 잘 맞았다.[이건 딱 맞잖아.][아니야. 이 디자인이 마음에 안 들어. 너무 심플해. 이것도 고쳐.]강지연의 머리 위에 물음표가 줄줄이 떠올랐다.‘회사 대표로서 밖에서는 무게감 있어 보여야 한다고 옷 튀지 말게 해달라던 사람이 누군데.’짜증이 확 치밀어 올랐다.[온하준, 너 지금 일부러 이러는 거 아니야?][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어. 나는 다 고칠 거야.]강지연은 미간을 확 찌푸린 채 답장을 보냈다.[그러면 네가 직접 들고 가. 신동하가 알아서 고쳐줄 거야.][아니. 네가 얘기해. 나 바빠. 그쪽에서 뭐라 하면 네가 나한테 전달해 줘.]강지연은 기가 막혔다.[미안한데 나도 바빠. 옷이 다 마음에 안 들면 그냥 다른 사람 주든지 그것도 싫으면 기부해.][싫어. 이건 다 내가 입을 거야. 고치면 되는데 왜 남을 줘.]강지연은 더는 참지 않았다.[네 마음대로 해. 고칠 거면 네가 직접 가져가고 고치지 않을 거면 나한테 더더욱 말할 필요 없어. 지금 우리 사이에서 더 얘기할 건 이혼 조건 말고는 없으니까 연락 좀 자제해줘.]온하준이 답장을 쓰고 있는 사이, 강지연이 문자를 하나 더 보냈다.[차단할게. 일주일 뒤에 풀 거야. 그땐 이혼 조건에 동의해 주길 바라.]이혼을 들먹이면서 이하나와의 관계를 끊으라고 협박하지 말라는 문장을 타자하던 온하준의 손이 결국 멎었다. 그는 보내지 못한 글자를 남긴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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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6화

다음 날 아침, 차량 문제가 해결되었다.강지연은 순회 공연단과 함께 차에 올라 다음 목적지인 수성으로 향했다. 이 도시는 세계적인 명성을 지닌 곳이자 운명을 이어준다는 전설 속 인연의 천사 인형의 고향이기도 했다.거리의 골목마다 가게마다 거의 빠짐없이 같은 인형을 팔고 있는 모습을 보자 강지연은 문득 집 안에 줄지어 놓여 있던 인형들이 떠올랐다.외롭지 말라고 혼자 두지 않겠다고 그런 명목으로 하나둘 늘어났던 것들.그때의 그녀는 어리석게도 그 인형들이 정말 자신을 지켜주는 줄 알고 있었다. 그 시절에 어리석음이 문득 떠올라 강지연은 혼자 웃음을 흘렸다.장시범은 그녀가 인형을 사고 싶어 하는 줄 알고 물었다.“선배, 하나 고를래요?”강지연은 고개를 저었다. 인형이 싫어진 건 아니었지만 이제 인형이라는 물건은 그녀에게 좋지 않은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해외에서 걸려 온 낯선 번호였다. 전화받자 상대는 정중하게 자신을 호텔 프런트 직원이라고 소개했다. 아침에 체크아웃했던 에덴 호텔이었다.“고객님, 객실에 열쇠 하나가 남아 있어서요. 고객님이 두고 가신 것 같은데 현재 계신 주소를 알려주시면 우편으로 보내드릴 수 있습니다.”‘열쇠?’강지연은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혹시 열쇠고리가 같이 달려 있나요? 젊은 남녀가 함께 찍힌 사진이 있는?”“네, 맞아요. 고객님 얼굴을 저희가 기억하고 있어서 전화를 드린 거예요.”강지연은 잠시 웃고는 담담하게 말했다.“고마워요. 그런데 보내줄 필요 없어요. 버려 주세요.”“버리라고요? 확실하신가요?”프런트 직원은 잘못 들은 것 같다는 듯 되물었다.“네. 필요 없습니다. 버려 주세요. 감사합니다.”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이었다. 통화는 그렇게 끝났다.그 열쇠가 무엇인지 강지연은 잘 알고 있었다. 집은 비밀번호 도어락이었지만 열쇠도 있었다.결혼 초기에 온하준은 만에 하나 도어락 배터리가 다 되거나 지문이 인식되지 않거나 비밀번호가 기억나지 않을 수도 있다며 열쇠는 꼭 가지고 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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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7화

소란은 결국 매니저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매니저는 내려와 무슨 일인지 묻고 양쪽의 말을 차례로 들었다.온하준은 여권과 휴대전화 속 결혼사진까지 꺼내 매니저 앞에 내려놓았다. 자신과 강지연이 부부라는 사실, 그리고 그 열쇠가 분명 자신의 것이라는 증거였다.그의 태도는 완강했다.“손님의 물건을 임의로 처리하는 건 명백한 잘못입니다. 이렇게 무책임할 수가 있습니까? 이 열쇠가 만약 악의적인 사람 손에 들어갔다면 도둑이 집에 들어가는 건 너무 쉬워지지 않겠어요?”프런트 직원이 맞섰다.“저희는 분명 투숙객께 전화드렸고 그분이 필요 없다고 하셔서 폐기한 겁니다.”“말도 안 돼.”온하준은 벌떡 일어섰다.“이건 집 열쇠라고요. 그런데 이걸 필요 없다고 버리라고 했다고요? 우리 둘 사진까지 달려 있는데!”어떤 이유로도 온하준은 강지연이 집 열쇠를 버리라고 했을 거라 믿지 않았다.그렇게 중요한 물건을, 두 사람의 사진이 달린 열쇠를 이국의 낯선 사람 손에 맡겨 처분하게 둘 리 없었다. 문제는 호텔의 무책임함이었다.프런트 직원의 얼굴이 굳어졌다.“믿지 않으신다면 지금 다시 전화를 걸어 확인해 드리겠습니다.”그 말에 온하준은 프런트 직원이 강지연의 새 번호를 알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 급히 말했다.“번호를 알려주세요. 제가 직접 통화할게요.”프런트 직원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불가능합니다. 고객의 개인정보는 제공할 수 없습니다.”“나는 남편이라고요!”온하준이 소리치자 프런트 직원은 오히려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남편인데 아내 전화번호도 모르십니까?”그는 온하준을 가리키며 말했다.“이제 보니 사기꾼이군요. 경찰을 부르겠습니다.”“아니, 그게 아니라…”온하준이 무슨 말을 하든 프런트 직원은 더 들으려 하지 않았다. 결국 경찰까지 출동했고 조사 끝에 온하준이 강지연의 남편이라는 사실은 확인되었지만 열쇠는 돌려주지 않았다. 이유는 단순했다.“두 분이 이미 이혼하셨을 수도 있잖습니까.”온하준은 할 말을 잃었다. 그는 결국 열쇠를 포기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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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8화

강지연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장시범은 무대에 서야 하는 사람이었고 다치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됐다.얼굴을 맞는 건 더더욱 안 될 일이었다. 그런데 온하준은 완전히 이성을 잃은 사람처럼 그녀가 뭐라고 외쳐도 전혀 들리지 않는 얼굴이었다.두 사람은 이미 엉겨 붙기 직전이었다.강지연은 더는 물러설 수 없어 두 사람 사이로 몸을 밀어 넣었다. 그리고 아직 최소한의 이성이 남아 있는 장시범을 향해 말했다.“먼저 돌아가.”장시범은 그녀가 다칠까 봐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장시범.”강지연은 목소리를 낮췄지만 단호했다.“이성적으로 생각해. 오늘 네가 팔을 다치든, 다리를 다치든, 아니면 살짝 긁히기만 해도 나는 절대 용납 못 해.”그에게는 아직 수많은 공연 일정이 남아 있었기에 다치는 일만큼은 허락할 수 없었다.강지연의 말투는 예전, 무대 위에서 누구보다 엄격했던 선배였을 때와 똑같았다.장시범은 결국 숨을 고르며 멈췄지만 여전히 분노가 가시지 않은 눈으로 온하준을 노려보다가 다시 강지연을 바라봤다.“먼저 가.”강지연이 다시 한번 당부했다. 그제야 장시범은 고개를 끄덕였다.“저쪽에 있을게요. 무슨 일 있으면 바로 부르세요.”강지연은 윤해정에게 눈짓해 그를 데리고 가게 했다. 싸움을 말리느라 온하준의 팔을 붙잡고 있던 그녀는 장시범이 충분히 멀어지자 곧바로 손을 놓았다.온하준이 차갑게 웃었다.“왜? 내가 꼭 두 사람 사이를 오해해야 속이 좀 시원해지나 봐?”“다들 너처럼 더러운 생각만 하는 줄 알아?”강지연의 얼굴이 단숨에 굳어졌다.“내가 더럽다고?”온하준이 헛웃음을 터뜨렸다.“너 때문에 여기까지 찾아온 사람한테 고작 한다는 말이 더럽다는 거야? 장시범은 살짝 긁히는 것조차 아까워서 난리면서 나는...”온하준은 내가 죽을 만큼 아팠을 때 넌 한 번이라도 물어봤냐는 말을 끝내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 다시 삼켰다.대신 멀찍이 서 있는 장시범을 가리키며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온하준.”강지연의 목소리는 담담했다.“너를 차단했다고 싸우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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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9화

격렬하던 말다툼은 그 순간 잠시 숨을 고르는 듯 멎었다. 온하준은 몇 초간 굳어 있다가 낮게 입을 열었다.“강지연, 강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내가 너한테 해준 것만큼은 못 했어.”강지연은 코끝이 시큰해져 가볍게 웃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강지연의 집사람들은 그녀에게 단 한 번도 버팀목이 되어 준 적이 없었고 심지어 온하준과 다투는 순간에는 가족이라는 이유로 오히려 그녀가 더 불리해지곤 했다.강지연은 다시 두 사람의 이야기로 돌아와 담담하게 말했다.“온하준, 난 이미 여러 번 말했어. 화풀이도 아니고 협박도 아니야. 난 정말로 다른 삶을 살고 싶어. 남은 인생은 즐겁게 살고 싶어. 너도 그래야 하고.”그 시각 수성은 저녁 바람에도 여전히 지중해 특유의 열기를 품고 있었고 내륙의 물 냄새가 섞인 공기가 축축하게 눌러와 숨이 막혀왔다.온하준은 미간을 깊게 찌푸린 채, 마치 처음 강지연을 보는 것처럼 그녀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의 눈동자 안에는 억눌러 누른 감정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돌아가서 이혼 조건 다시 잘 읽어 봐. 우리 진지하게 이혼에 관해 얘기하자. 더 이상 날 따라오지 마.”그 말을 끝으로 강지연은 등을 돌려 장시범과 윤해정 쪽으로 걸어갔다.두 사람은 강지연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서둘러 다가와 양옆에서 그녀를 보위하듯 붙들고 온하준이 서 있는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다음 날 있을 공연을 위해 장시범 일행은 그날 밤을 기분 좋게 풀기로 했다.수성의 골목골목을 천천히 거닐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윤해정이 가면 하나를 사고 싶다고 하자 네 사람은 주변 상점들을 하나씩 들러 보며 비교했다.강지연은 하트 문양의 붉은 여왕 가면을 골랐고 장시범은 밤의 기사 가면을 집었다.네 사람이 모두 가면을 쓰고 가게 앞에서 셀카를 찍는 순간, 강지연은 윤해정이 들고 있는 휴대전화 화면에 비친 두 사람의 그림자를 보았다.바로 옆, 인형을 파는 가게 안으로 들어가는 두 사람이었다.강지연의 웃음은 그대로 멈춰 버렸다. 옆 가게 입구에서는 익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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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0화

“지금 누구를 더럽다는 거야? 네가 더 더러워!”이하나는 온하준의 등 뒤에 숨은 채 날카롭게 소리쳤다. 장시범은 차갑게 이하나를 내려다보며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그 쓰레기 뒤에 숨으면 내가 손 못 댈 줄 알아? 더러운 인간은 남자든 여자든 가리지 않아.”온하준의 눈이 번뜩였다.“오늘 꼭 싸우겠다는 거지?”“내가 너 못 칠 줄 알아?”장시범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여자 세 명을 모두 자기 뒤로 감쌌다. 그리고 낮고 단단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넌 네가 무슨 대단한 인간이라도 되는 줄 알아? 입이 더러운 년은 입을 치면 되고 너처럼 똥통에 빠져 온몸에서 악취가 나는 인간은 일어나지도 못하게 두들겨 패는 수밖에 없어.”그제야 이하나는 자신이 뺨을 맞은 이유가 강지연을 절뚝거린다고 말했기 때문이라는 걸 알아차렸다.온하준은 장시범 뒤에 서 있는 강지연을 바라보며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강지연, 정말로 네 남편을 모욕하는 사람 편에 설 거야?”강지연은 끝까지 이하나를 감싸고 서 있는 온하준을 보며 피식 웃었다.“모욕? 뭐가 모욕이야.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온하준의 얼굴이 더 어두워졌다.“강지연, 네가 지금 무슨 말 하는지 알아?”“알아.”강지연은 조소를 띠며 말했다.“너 더러운 거 사실이잖아. 그러니까 장시범, 더러운 사람 때문에 손 더럽힐 필요 없어. 가자.”온하준의 얼굴이 한순간에 처참해졌다.“강지연!”강지연이 자리를 뜨려 한 건 이 두 사람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아서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장시범과 온하준이 정말로 싸울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었다.지금의 장시범은 다치면 안 되는 사람이었다. 조금이라도 부상이 생기면 무대는 끝이었다.하지만 장시범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꼭 이하나의 사과를 들어야겠다며 고집을 부렸다.강지연은 그럴 필요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이제 와서 누가 자신을 절뚝거린다고 말하든 상관없었지만 장시범이 다치는 일만큼은 절대 있어서는 안 됐다.그러나 장시범은 단호했다.“선배, 무슨 생각인지 알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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