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다섯 번째 결혼기념일에서: Chapter 391 - Chapter 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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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1화

“제가 다시 가져다 놓을게요.”강지연은 쟁반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을 나서자 홍순자의 방 앞 복도에 서 있는 진경숙이 눈에 들어왔다. 어딘가 넋이 나간 듯한 얼굴이었다.“아주머니, 여기서 뭐 하세요?”국수 그릇을 든 채 묻자 진경숙은 화들짝 놀라며 시선을 피했다.“아, 아니에요. 그릇 치우려고요.”면이 거의 그대로인 걸 보고 진경숙이 다시 물었다.“입에 안 맞으셨어요?”“아니에요. 아주머니가 소금이랑 설탕을 헷갈린 것 같아요. 요즘 많이 피곤하세요?”강지연이 그릇을 건네며 말하자 진경숙은 당황한 기색으로 연신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아니에요. 잠깐 헛갈렸나 봐요. 제가 다시 끓여서 가져올게요.”강지연이 말할 틈도 없이 진경숙은 그릇을 들고 급히 계단을 내려갔다.강지연은 간단히 속을 채운 뒤 바로 한의원으로 향했다. 그 사이, 낯선 번호로 문자가 하나 들어왔다.[강지연, 미안해. 내 인생에서 유일하게 빚진 사람은 너야. 사실 정식으로 이혼하기 전엔 결혼할 생각도 없었어. 다만 예복은 맞추는 데 시간이 걸려서... 지금 와서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겠지. 그래도 나 없는 날들 속에서 네가 진짜 행복해졌으면 좋겠다.]강지연은 메시지를 읽고 곧바로 번호를 차단했다. 누가 보낸 문자인지는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온하준은 그 문장을 몇 번이나 고쳐 쓰고 지운 끝에야 전송했다. 보내고 나서는 답장을 기다렸지만 끝내 아무 회답도 오지 않았다. 대신 이하나의 문자가 도착했다.[하준아, 손 아직도 아파?]‘이 정도 상처가 뭐라고.’그 순간, 온하준의 머릿속에 강지연이 스쳤다.‘차에 치였을 때 강지연은 얼마나 아팠을까.’그는 휴대전화를 집어던지듯 책상 위에 올려놓고 의자에 깊숙이 몸을 기대었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요즘 그는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다. 밤새 뒤척이다가 잠들어도 금세 깼고 꿈을 자주 꿨다. 그날도 그렇게 눈을 감고 있다가 얕은 잠에 빠져들었다.꿈속에서 그는 십 대 시절로 돌아가 있었다.아버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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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2화

“그러면 새로 온 저 비서가 멍청한 거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들어올 수 있잖아.”이하나는 두 손으로 턱을 괴고 그의 책상 위에 몸을 기댔다.“왜 온 거야?”온하준은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돌렸다.“보러 왔지. 문자도 안 읽고 전화도 안 받으니까 걱정돼서.”온하준은 가볍게 헛기침하고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아까 잠깐 잠들었어.”“하준아, 많이 힘들어?”이하나는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그러면 우리 집으로 와서 살래? 내가 옆에서 돌봐줄 수도 있잖아.”온하준은 휴대전화 화면을 의미 없이 넘기며 대답했다.“그건 좀 그래. 집에 회사 자료도 많고 야근할 때 써야 할 컴퓨터도 있고.”“하지만...”이하나는 입술을 내밀었다.“솔직히 말하면 난 너희 집에 가고 싶진 않아. 그 집엔 온통 강지연의 흔적뿐이잖아.”그 말에 온하준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의 귀에 예전에 들었던 강지연의 말이 겹쳐 울렸다.“그 집이 정말 내 집이 맞아? 비밀번호도 이하나 생일이고 인테리어도 전부 그 사람 취향이었는데. 그게 내 집이라고 생각해? 난 그 집이 싫었어.”“하준아.”이하나가 다시 이름을 부르자 온하준은 간신히 정신을 가다듬었다.“그럼 그냥 이대로 살자.”“그래도 결혼하면 같이 살 집은 있어야 하잖아.”이하나는 한 걸음 더 다가왔다.“하준아, 나랑 약속했던 거 기억하지? 넌 내 취향도 다 기억하고 있잖아. 우리 새로 집 하나 꾸미면 안 돼? 도어락 비밀번호는 내 생일로 하고 인테리어도 전부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로.”“새로 하나 더?”온하준은 여전히 딴생각에 잠겨 있었다.이하나는 고개를 힘주어 끄덕이며 그가 집을 사 주겠다는 말해주길 기다렸다.하지만 온하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미 그의 생각은 전혀 다른 곳으로 흘러가 있었다.“하준아!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이하나는 발을 구르며 소리쳤다.“설마 나랑 아이한테 집 사 주기 싫은 거야?”온하준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싫은 게 아니라 내가 강지연에게 약속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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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3화

의자에 앉아 꼼짝도 하지 않고 있던 온하준에게 김도윤의 전화가 걸려 왔다.“여보세요?”이 시간에 전화한 이유라면 또 밖으로 나오라는 전화일 거로 생각하며 온하준은 이미 거절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한때는 집에 들어가기 싫어 늘 밖에서 맴돌며 친구들과 어울리고 온갖 핑계를 만들며 귀가를 미루던 자신이 이렇게 변했다는 사실이 우스웠다.그런데 김도윤의 전화는 전혀 다른 이유였다.“너 도대체 뭐 했길래 하나가 저렇게 울어?”전화기 너머로 이해할 수 없다는 투의 목소리와 함께 희미하게 이하나의 울음소리가 섞여 들려왔다.아무래도 새집을 사 주겠다고 말하지 않은 탓일 터였다. 온하준은 헛웃음을 흘리며 전화를 끊었다.자기를 전부로 여긴다느니, 마음만 있으면 충분하다느니.온하준은 이하나가 했던 그런 말을 단 한 번도 진심으로 믿은 적이 없었다. 다만 그때의 그는 기꺼이 그런 믿음을 연기해 줄 여유가 있었을 뿐이었다.오 년 전, 이하나가 떠났을 무렵은 그와 김도윤, 김도진이 사업에서 연달아 좌절을 맛보던 시기였다. 수년간 쌓아 올린 것이 한순간에 무너질 것처럼 보이던 때 이하나는 이별을 말했다.온하준도 이유를 몰랐던 건 아니었다. 다만 자기 형편에 사람을 붙잡을 자격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을 뿐이다.누군가를 곁에 두고 함께 바닥을 기게 할 만큼 그는 뻔뻔하지 않았다.이후 이하나는 유학을 떠났고 그녀의 옆에 재력 있는 남자가 있다는 소문도 들려왔다.그는 다 알고 있었다. 그 시절의 우울함은 실연과 실패가 반씩 섞인 결과였다는 걸.술에 취한 날이 많았지만 전부가 사랑 때문은 아니었다. 대부분은 거래처와 투자자를 붙잡기 위한 술자리였다. 고개를 숙이고 사정을 하고 체면을 내려놓는 밤의 연속이었다.하지만 강지연이 그를 구해냈던 그날 밤만큼은 달랐다.그때의 그는 정말로 바닥까지 내려가 있었다. 거절을 거듭 당하고 자신감이 산산조각 나서 이제는 포기해도 되지 않는지 생각하던 순간이었다.그리고 강지연이 그를 살렸다. 그녀는 자신의 멀쩡한 다리를 대가로 그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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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4화

사랑하느냐, 사랑하지 않느냐에 관한 문제는 사실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온하준이 집요하게 붙들고 있던 건 사랑이 아니라 증명이었다.이하나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강한지, 얼마나 많은 것을 쥐고 있는지, 마음만 먹으면 한 여자를 어디까지 끌어올릴 수 있는지 보여주고 싶었을 뿐이었다.그 과정에서 강지연이 상처 입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그때의 온하준에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그렇게 이하나와 함께 있는 동안 온하준은 조금씩 방향을 잃어갔다.그리고 강지연에게는 이하나가 그저 자기 할머니를 돌봐준 은인일 뿐이며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고 설명했다.그럴듯한 이유 하나쯤은 필요했고 자기 안의 비겁함과 비열함을 가려줄 명분이 필요했다. 그리고 온하준은 정말로 그렇게 믿고 싶었다.이하나를 위해 무엇이든 할 수는 있지만 강지연을 배신하지는 않을 거라고.그가 말하는 배신이란, 선을 넘는 육체적인 행위뿐이었다.그 선만 지키면 자신은 떳떳하다고 믿었다.하지만 안지유는 정신적인 바람도 바람이라고 말했다.그 말이 맞는지 아닌지, 자신이 정말 정신적으로도 바람을 피운 건지도 분간하지 못했다.이하나를 향한 감정이 미련인지, 오기인지, 아니면 사랑인지도 모호했다.다만 한 가지만은 분명했다. 강지연은 자신을 사랑했고 그 사랑은 쉽게 식지 않을 거라는 확신.그래서 그의 마음 저울이 어디로 기울든 강지연은 결국 그의 아내로 남아 있을 거라 믿었다.그러나 섬에서의 그날 밤, 이하나가 그의 뒤에서 안겼던 그 순간 그는 분명히 깨달았다. 자신은 이하나와 어떤 실질적인 선도 넘을 수 없다는 것을.그의 자리는 강지연 곁이었다. 그래서 그는 곧장 돌아왔다. 그 어느 때보다도 강지연을 보고 싶다는 생각 하나로.하지만 돌아와 보니 그녀는 이미 떠난 뒤였다.그제야 온하준은 알았다. 강지연도 떠날 수 있다는 걸.그녀는 그가 줄 수 있는 부와 안락함을 손에 쥐고도 마음만 먹으면 돌아설 수 있는 사람이었다.돈 때문에 붙잡힐 여자가 아니었다. 생각해 보면 당연했다.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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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5화

‘죽었다고? 정말로 이 세상에 없다고?’온하준의 머릿속에 오래된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야, 온하준. 너희 반 그 강지연 말이야...”“꺼져.”최아현이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아, 맞다. 너도 이제는 강지연한테 말할 수가 없겠네. 그래서 나한테 밥 먹자고 했던 거지? 옛날얘기나 하려고.”온하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요즘 들어 자꾸만 열여섯, 열일곱 살 무렵의 꿈을 꿨고 그래서 가끔 최아현과 연락을 주고받았다. 문장 사이로 오래전 교정에 흩날리던 계수나무 향이 스며 나오는 것 같아서였다.최아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잘 사는 사람은 과거를 돌아보지 않아. 앞만 보고 가거든. 과거를 붙잡는 건 지금이 불행하다는 뜻이야. 온하준, 이제 강지연 좀 놔줘. 그 애는 더 나은 미래를 살 자격이 있어.”그 말에 가슴 한가운데가 움켜쥐어진 것처럼 아파져 왔고 시야가 서서히 흐려졌다.지금의 그는 놓아주고 싶지 않아도 그럴 수 없는 처지였다. 이미 붙잡을 자격조차 없었으니까.“최아현.”그는 눌러 담은 목소리로 말했다.“나... 너무 후회돼.”지난 두 달 동안 의기양양하고 오만했던 만큼 지금의 그는 초라하고 비참했다.“후회?”최아현이 비웃듯 말했다.“야, 넌 진짜 자업자득이야. 이 타이밍에 무슨 순정남인 척이야?”그녀의 말은 거침이 없었다.“네가 올린 그 쓰레기 같은 글, 다시 봐. 평생의 노력이 오직 한 사람을 위한 거라 했던 거. 나는 처음에 강지연 얘긴 줄 알았거든. 그런데 알고 보니까 그 소름 끼치는 여자더라? 지웠다고 다 없던 일이 되는 줄 알아? 본 사람은 다 기억해.”온하준은 잠시 멍해졌다.‘무슨 소리지? 나는 그런 글을 올린 적이 없는데? 아, 도진이가 말했던 그 얘기인가?’“최아현, 나는 그런 글을 올린 적 없어. 내가...”말이 끝나기도 전에 통화는 끊겼다. 그리고 곧바로 사진 한 장이 전송됐고 다시 전화가 걸려 왔다.“온하준, 직접 봐. 내 채팅 기록에 다 남아 있어. 네가 쓴 거 맞잖아. 쓰레기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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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6화

“동창?”이하나가 날카롭게 되물었다.“무슨 동창인데? 난 네가 그런 여자 동창이 있는 줄도 몰랐는데?”“고등학교 동창이야. 너랑은 접점 없어.”“고등학교 동창이 감히 그렇게 너를 욕해?”이하나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그것도 여자 동창이? 네가 누구인데 감히 그런 욕을 해! 넌 해성에서 손꼽히는 그룹 대표야!”그녀는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정작 자신조차 그를 그렇게 욕한 적은 없었으니까.이하나는 그의 휴대전화를 낚아채려 했고 실제로 빼앗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너무도 익숙한 손놀림으로 비밀번호를 눌렀다.온하준은 그 모습을 보며 문득 한 단어가 떠올랐다.자업자득. 정말 자업자득이었다.그제야 그는 왜 자신의 인스타에 자신도 모르는 글이 올라갔는지 알 것 같았다.이하나는 통화 기록 맨 위에 적힌 이름을 확인하고는 다시 휴대전화를 돌려주었다.“최아현?”그리고 고개를 갸웃했다.“진짜 동창이네?”잠시 후, 그녀는 못마땅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그래도 너무 무례하다. 어떻게 사람을 그렇게 욕해?”온하준은 휴대전화를 받아 들며 물었다.“누구라고 생각했는데?”“나는...”이하나는 말을 잇지 않았다. 그녀는 당연히 강지연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그리고 속은 이미 분노로 끓고 있었다.‘강지연은 대체 무슨 자격으로 하준이를 그렇게 욕하는 거야? 그런 욕까지 먹었으면서 재산을 전부 넘기겠다는 온하준도 정말 이해가 안 돼! 나는 늘 떠받들어 줬는데. 화도 안 내고 고작 투정만 부렸는데. 그런데 이제는 그 투정조차 통하지 않잖아!’온하준은 다시 휴대전화 잠금을 풀더니 최아현과의 대화 화면을 열어 캡처 사진을 이하나에게 보냈다.“이건 어떻게 된 건지 설명 좀 해줄래?”그 순간, 이하나의 휴대전화가 울렸고 사진을 확인한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하지만 이하나는 곧 표정을 가다듬으며 눈가를 붉히고 울 듯 말 듯한 얼굴로 말했다.“하준아, 그날 내가 술을 조금 마셨어. 그리고 네가 나를 인정해 주길 바랐어.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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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7화

병원.온하준이 수납하러 간 사이 김도윤과 이하나는 대기석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이하나의 표정은 처음부터 끝까지 굳어 있었다.“하준이는 왜 이렇게 고집이 세?”이하나가 낮게 말했다.“정말로 재산 전부를 강지연한테 주겠다는 거야? 강지연이 보낸 이혼 합의서에도 그런 조항은 없었잖아. 본인이 먼저 요구한 것도 아닌데 하준이 혼자서 저렇게 다 주겠대.”김도윤이 목소리를 더 낮췄다.“주는 건 개인 재산이야. 회사만 살아 있으면 돈은 다시 벌 수 있어.”그는 이하나를 흘끗 보며 덧붙였다.“눈앞에 보이는 것만 보고 너무 조급해하지 마. 일단 하준이 이혼부터 무사히 끝내야지. 더 끌면 애 태어났을 때 명분도 없어.”이하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불안이 그대로 얼굴에 드러났다.“김도윤,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해? 하준이 혹시...”그때 온하준이 돌아왔다.“검사하러 가자.”두 사람은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검사는 무사히 끝났고 결과도 정상이었다.세 사람은 병원을 나섰다. 차에 오르자 이하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우리 어디 가서 밥 먹어? 배고파.”운전대를 잡은 온하준은 시선을 앞에 둔 채 말했다.“어디 가고 싶은데? 내가 데려다줄게.”“넌 안 가?”이하나의 목소리에 서운함이 묻어났다.“볼 일이 좀 있어.”그 말에 이하나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하지만 온하준은 그녀가 화가 난 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그대로 차를 몰았다.이하나는 더 화가 났다. 이대로 가다가는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 같았다.결국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하준아, 나 이렇게 끼니도 제때 못 챙겨 먹는 건 아닌 것 같아. 나 임산부야. 임산부는 영양 관리 잘해야 돼. 맨날 배달 음식 먹거나 밖에서 대충 먹는 건 안 된다고.”온하준이 잠시 멈칫했다.“그러면 아주머니 한 명 구해줄까?”그 말에 이하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그녀의 눈가에 곧 눈물이 고였다.“네가 퇴근하고 우리 집에 와주면 안 돼?”온하준은 다시 한번 멈칫했다.“나 시간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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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8화

“헛소리하지 마.”이하나가 눈을 흘기며 말했다.“전부 내 거야. 너랑 하준이는 급이 달라.”김도윤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하준이가 얼굴 말고 나보다 나은 게 뭔데?”“전부.”이하나는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어디 하나 빠지는 데 없이 다 너보다 낫거든.”“그래?”김도윤이 냉소를 띠며 되물었다.“같은 학교, 같은 전공 나왔고 같이 회사 차렸고 일도 똑같이 했어. 내가 뭐가 그렇게 뒤처지는데?”“직함.”이하나는 콧방귀를 뀌었다.“하준이는 대표고 넌 부대표잖아.”김도윤의 입가에 비틀린 웃음이 걸렸다.“그러면 왜 나랑 잔 거야? 하준이랑 자지.”“너!”이하나는 이를 악물고 그를 노려봤다. 김도윤은 전혀 개의치 않고 이어 말했다.“쓸데없는 생각 말고 태교나 잘해. 그래야 내 아들을 무사히 낳지.”그는 음습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덧붙였다.“그리고 네 자리를 온전히 차지하는 거야. 온전히 온하준의 아내로.”이하나는 눈썹을 찌푸렸다.“말이 쉽지. 하준이가 친자 확인 요구하면 어쩌려고?”“안 해.”김도윤은 망설임 없이 말했다.“온하준 약점이 뭔지 알아? 옛정에 약하고 옆 사람을 너무 믿는다는 거야.”이하나는 김도윤을 뚫어지게 바라봤다.“김도윤, 난 네가 이런 사람인 줄 몰랐어. 하준이가 너한테 그렇게 잘해줬는데 어떻게 이렇게 배신할 수 있어?”김도윤은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았다.“너 때문이잖아, 하나야.”이하나는 차갑게 웃었다.“웃기지 마.”“왜?”김도윤이 이를 악물고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이제 와서 하준이 불쌍해? 마음 약해졌어? 후회돼? 아직도 사랑하는 건 하준이야?”이하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김도윤은 그 침묵을 확인하듯 말했다.“이미 늦었어. 지금 와서 하준이가 네가 한 짓 다 알면 넌 끝이야.”이하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그러니까 선택지는 하나야.”김도윤이 속삭였다.“얌전히 나랑 한 배 타. 그러면 앞으로 온하준 아내로서 모든 걸 누리게 될 테니까.”이하나는 등골이 서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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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9화

차정욱은 온하준을 한참 바라보다가 그제야 소년 시절의 흔적을 찾아낸 듯 눈을 가늘게 떴다.잠시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다. 누구도 차유준이라는 이름을 먼저 꺼낼 수 없었다.“들어와... 잠깐이라도 앉아 있다가 가.”차정욱이 먼저 몸을 비켜 길을 내주었다.집 안으로 들어가는 동안 온하준은 두 분이 어제야 해외에서 돌아왔고 이제는 국내에서 여생을 보내려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거실에 들어서자 짐을 정리하고 있던 차유준의 어머니, 서정희가 고개를 들었다.잠시 멍하니 온하준을 바라보던 그녀는 한참이 지나서야 그를 알아보고 자리에 앉으라고 손짓했다.안부를 묻고 이런저런 집안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굳어 있던 공기는 조금씩 풀어졌다.그러다 서정희가 결국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몇 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어제 일 같아. 생각만 하면 마음이 너무 아파.”그 말을 듣는 온하준도 목이 메었다. 무슨 말로 위로해야 할지조차 떠오르지 않았다.오히려 서정희가 눈물을 훔치며 억지로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그래도 이렇게 우리 유준이를 기억해 주고 일부러 찾아와줘서 고마워.”온하준은 얼굴이 화끈거렸다.집에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그는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한 채 빈손으로 찾아온 것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앞으로 자주 찾아뵙겠습니다. 괜찮으시다면요.”차유준과의 마지막 기억은 다툼으로 끝났다. 젊고 거칠던 시절, 돌이킬 수 없는 말까지 쏟아내며 등을 돌렸고 그게 정말 마지막이 될 줄은 몰랐다.“우리야 당연히 괜찮지.”차정욱이 말했다.“다만, 바쁜 사람 시간 뺏는 건 아닐지 걱정이야.”온하준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제 와서 그에게는 바쁜 일도, 돌아갈 집조차도 없었다.그는 한참을 그 집에 머물렀다. 그러다 서정희가 조심스럽게 차유준의 유품을 꺼내 왔다.화려하지 않은 로즈우드 상자였다. 안에는 그리 많은 물건이 들어 있지 않았다.“늘 몸에 지니고 다니던 것들이야.”서정희가 울음을 삼키며 말했다.“옷은 다 태웠고 이것들만 남겼어.”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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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0화

노트 위의 글자가 순식간에 먹물처럼 번졌다.온하준은 흠칫 놀라 급히 노트를 덮어 서정희에게 돌려주었다. 더 많은 글자가 망가질까 봐 두려웠다.“죄송합니다.”서정희는 노트를 다시 상자에 넣으며 쓴웃음을 지었다.“괜찮아. 몇 년 동안 나는 이 노트를 닳도록 펼쳐보고 또 펼쳐봤어. 그래서 나도 여기에 눈물을 얼마나 떨어뜨렸는지 몰라.”온하준은 여전히 그 작은 돌을 손에 쥔 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기억 속의 그것은 거칠고 투박했는데 지금은 매끈하고 둥글었다.얼마나 오랫동안, 얼마나 자주 손끝으로 쓰다듬었는지 짐작이 갔다.“그 돌이 뭔지 알아?”서정희의 물음에 온하준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고등학교 때 친구들이랑 가을 소풍 갔다가 강가에서 주운 돌이에요. 누가 꽃을 새기고 구멍을 뚫어서 목걸이로 만들었죠. 그 뒤로 어디로 갔는지 몰랐는데 유준이가 가지고 있었군요.”서정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아주 소중히 여겼었어.”잠시 후, 그녀는 덧붙였다.“그런데 친구 물건이었다면 네가 가져가.”온하준은 깜짝 놀라 되물었다.“정말요? 제가 가져도 괜찮을까요?”“그래.”서정희는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이 세상에 우리 노인 둘 말고도 유준이를 기억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좋으니까.”“고마워요, 아주머니.”온하준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때, 현관 쪽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아주머니.”온하준에게 너무도 익숙한, 강지연의 목소리였다. 그는 반사적으로 손에 쥔 달 모양의 돌을 꼭 움켜쥐었다.차정욱과 서정희는 이 또래 친구 중에 이런 여자아이가 있었던 것 같다는 정도만 기억하고 있었으니 또렷하게 떠올리지는 못했다.남학생들은 늘 어울려 다녔기에 기억이 남아 있었지만 여학생은 몇 번 본 적이 없었으니 인상이 희미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아이고, 다들 어쩐 일이야.”부부는 서둘러 강지연을 안으로 맞아들였다. 강지연은 준비해 온 영양제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서정희 옆에 앉았다.그녀가 합류하면서 대화는 다시 길어졌다.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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