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다섯 번째 결혼기념일에서: Chapter 371 - Chapter 380

775 Chapters

제371화

김도윤은 안지유를 보자마자 머리가 지끈거렸다. 괜히 눈이 마주칠까 싶어 모른 척 시선을 돌렸다.연회장에서 이미 제대로 찍혔던 이하나는 안지유가 보이자 입술을 꾹 다물고 눈가를 붉힌 채 본능처럼 김도윤의 등 뒤로 숨었다.애초에 이하나에게는 관심도 없었던 안지유의 시선은 오로지 김도윤에게만 꽂혀 있었다.‘에잇, 오늘 진짜 재수 없는 날이네. 왜 하필 이런 인간들을 다 마주치는 거야. 내가 성질이 센 건 맞지만 그렇다고 이유 없이 그러는 것도 아니잖아. 이런 인간들은 애초에 예의를 지킬 필요도 없는 것들이지.’김도윤은 직감적으로 오늘 안지유의 화살이 자기에게로 향할 가능성이 크다는 걸 느꼈다.하지만 자기는 안지유 남편도 아니기에 욕을 먹을 이유는 없다고 자신을 스스로 다독였다.김도진만 아니었으면 이렇게 거친 여자는 진작에 손부터 나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김도진, 퇴근 시간도 다 됐는데 얼른 집에 가.”김도윤은 일부러 김도진에게 말을 걸었다. 이 골칫덩이를 데리고 빨리 사라져 주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회사에서까지 괜한 소동을 벌여 자기 체면까지 깎일까 봐 두려웠다.“지유야, 집에 가자.”김도진도 속이 편할 리 없었다. 아니, 솔직히 말해 몹시 불안했다.오늘만큼은 제발 자기 아내가 회사 사람 전부를 상대로 싸움을 벌이지 않기만을 바랐다.김도진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맺혔다.직원이 이렇게 많은데 세 대표가 한꺼번에 욕을 얻어먹는 장면이 연출된다면 정말 체면이 말이 아닐 터였다.다행히도 안지유는 김도윤을 한 번 쓸어보듯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김도진은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거의 절이라도 할 기세로 안지유의 허리를 감싸 쥔 채 발걸음을 옮겼다.그대로 아무 일 없이 끝났다면 좋았을 텐데 하필 그 순간 이하나가 김도윤의 뒤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그녀는 눈가에 눈물을 가득 머금은 채 아주 연약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도진아, 지유 씨가 나 때문에 너희들한테 화 난 거야?”말을 마친 이하나는 마치 깜짝 놀란 사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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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2화

김도윤은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김도진도 마찬가지였다.“무슨 말이야, 여보?”안지유가 차갑게 웃었다.“무슨 말이냐고? 김도윤 씨, 그런 얼굴 할 필요 없어요. 나는 남의 남편 훈육할 마음은 없거든요.”그녀의 시선이 김도윤을 정면으로 꿰뚫었다.“다만, 김도윤 씨가 아직도 누군가의 남편이긴 한지 그게 좀 궁금하네요.”김도윤의 미간이 서서히 좁혀졌다.“무슨 뜻이에요?”안지유는 입꼬리를 비틀어 올린 채 차갑게 말했다.“아현 씨가 사라진 지 얼마나 됐는지도 전혀 모르는 눈치네요. 하긴, 김도윤 씨도 집에 오래 안 들어갔으니 그럴 수도 있겠죠.”김도윤의 얼굴이 굳었다.“빙빙 돌리지 말고 똑바로 말해요!”안지유는 잠시 말을 멈췄다. 눈시울이 붉어지는 걸 억지로 눌러 참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아현 씨 어머니, 돌아가셨어요.”김도윤은 순간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 멍해졌다.그제야 며칠 전, 주아현이 어머니 상태가 안 좋다며 병원에 와달라고 했던 문자가 떠올랐다.김도진도 놀란 얼굴로 말했다.“지유야, 이렇게 큰일을 왜 나한테도 말 안 했어?”“말해서 뭐 하게?”안지유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튀었다.“전부 다 똑같아. 쓰레기만도 못한 놈들인데.”그녀는 말을 끝내자마자 돌아서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김도진이 급히 뒤따르며 변명했다.“난 아니야. 난 진짜 그런 적 없어.”“입 다물어!”안지유가 소리를 질렀다.“끼리끼리 논다는 말이 괜히 나온 줄 알아? 다 한 부류야!”그녀는 그대로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문이 닫히고 나서야 김도진은 안지유의 눈가가 붉어져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지유야, 아현 씨 괜찮대?”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이렇게 큰 일을 혼자 어떻게 감당해. 우리한테 말했어야지.”김도진은 안지유가 강지연과 달리 주아현과는 가까웠다는 걸 알고 있었다.강지연은 늘 집에만 있었고 사람을 거의 만나지 않았지만 안지유와 주아현은 자주 만나 쇼핑도 하고 식사도 함께하던 사이였다.“너희한테 말하라고?”안지유가 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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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3화

김도진과 안지유가 떠난 뒤에도 안지유가 던진 말들은 김도윤의 귓가에서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 휴대전화를 꺼내 주아현에게 전화를 걸었다.신호음은 길지 않았고 주아현은 곧바로 전화받았다.“어디야?”김도윤은 차갑게 물었다.“집이야.”전화기 너머로 주아현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그 옆에서는 아이가 중얼거리는 소리도 희미하게 섞여 들어왔다.그제야 김도윤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역시, 그의 예상대로였다. 주아현은 무슨 큰일을 벌일 사람은 아니었다.문득 장모의 사망 소식이 떠올라 그는 말을 꺼냈다.“네 어머니 일은...”“다 끝났어.”주아현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차분했다.“아현아, 왜 나한테 말 안 했어?”“바쁘잖아. 괜히 방해하고 싶지 않았어. 나 혼자서도 다 처리할 수 있었고.”김도윤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그래. 오늘은 일찍 들어갈 테니까 아주머니한테 저녁 준비하라 하고 기다려.”장모의 죽음은 아무래도 큰일이었기에 그래도 집에는 들러야겠다고 판단한 것이었다.하지만 주아현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고 잠시의 정적 끝에 전화를 그대로 끊어버렸다.통화가 끝나고 고개를 들자 온하준과 이하나가 사무실 밖에 서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이하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도윤아, 아현 씨는?”김도윤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별일 없어. 집에 돌아갔대. 그냥 고향 내려가서 어머니 장례 치른 것뿐이야.”온하준이 고개를 저었다.“그래도 오늘은 빨리 들어가. 어찌 됐든 작은 일은 아니잖아. 주아현이 겉으로는 괜찮다고 해도 속마음은 다를 수 있어.”김도윤의 얼굴에 은근한 자신감이 떠올랐다.“하준아, 그건 네가 몰라서 하는 말이야. 아현은 강지연이랑 달라. 얼마나 착하고 철들었는데. 오히려 내가 바빠서 얘기 안 한 거라고 이해한다고까지 말하더라. 괜히 나 힘들게 할 필요 없다고.”온하준은 씁쓸하게 웃었다.“그 말, 정말로 진심이라고 생각해?”“그럼. 당연히 진심이지.”김도윤은 코웃음을 쳤다.“내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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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4화

온하준은 짧게 알았다고만 답한 뒤 더 말 붙일 생각조차 없다는 듯 무심하게 등을 돌려 사무실로 들어갔다.이하나는 곧장 그의 뒤를 따라갔지만 이내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문전박대를 당한 기분에 이하나는 문 앞에 한참을 서서 멍하니 닫힌 문만 바라봤다.‘뭐야? 진짜 하준이 맞아? 내가 돌아왔을 때는 원하는 건 뭐든 다 들어주던 그 온하준이 맞다고?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는데 그것마저 알아차리지 못하다니.’이하나는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정말... 온하준이 맞아?’그의 시선은 더 이상 자신에게 머물지 않았다. 이하나는 사무실 문 앞에서 차갑게 입꼬리를 올렸다.‘결국 남자란 늘 손에 쥔 것이 아니라 얻지 못한 것을 좇는 존재일 뿐이네.’김도윤이 집에 돌아왔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현관에 나란히 놓인 두 개의 여행 가방이었다.그는 주아현이 막 돌아와 아직 정리하지 못한 것이라 여겼다.“윤후야?”아이를 부르자 김윤후는 작은 어린이용 캐리어를 끌고 조용히 걸어 나왔다.그 옆에는 주아현이 서 있었다.아이의 손을 잡은 채 어깨에는 커다란 캔버스 가방을 멘 모습이었다.“이제 막 들어온 거야, 아니면 어딜 나가려는 거야?”그제야 김도윤은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나가려고.”주아현은 담담하게 말했다.“어디 가는데?”김도윤은 여전히 여행쯤으로 여겼다.“기분 전환하러 나가는 것도 나쁘진 않지. 그런데 난 같이 갈 시간은 없어.”주아현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그럴 필요 없어.”“그래? 그러면 너희끼리 다녀와.”김도윤은 은근히 우쭐한 얼굴을 한 채 속으로 생각했다.‘이게 바로 내가 길들인 여자지. 온하준이랑 김도진 그 두 놈은 하나는 여자한테 이혼당하고 하나는 여자한테 뺨 맞고. 참, 창피한 것들.’주아현은 김도윤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 눈빛에는 어떤 온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내 말은, 앞으로도 그럴 필요 없다는 거야.”“뭐?”김도윤은 이해하지 못했다.“도대체 무슨 소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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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5화

요즘 강지연의 일상은 고요하고 단순했다.홍순자의 비자는 이미 나왔고 해외로 나갈 항공권도 모두 예매가 끝난 상태였다.출국하는 날에는 강시우가 홍순자와 그녀를 직접 데리고 함께 유럽으로 갈 예정이었다.든든한 오빠가 생긴 뒤로 예전 같으면 그녀가 하나하나 신경 써야 했을 일들, 이를테면 해외 체류 중 거처 문제나 이동 계획 같은 것들은 더 이상 그녀 몫이 아니었다.모든 것이 차분하고 정확하게 준비돼 있었고 그녀는 그저 짐만 챙겨 떠나면 됐다.강지연의 하루하루는 단출했다.매일 침 치료받고 재활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정이었고 시간이 남으면 이안이나 최아현과 약속을 잡아 커피를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그날도 평소처럼 강시우가 보내준 기사 차를 타고 한의원에 도착했다.차에서 내린 뒤 기사는 차 안에서 기다렸고 그녀 혼자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안에 앉아 있는 온하준이 눈에 들어왔다.온하준은 그녀를 보자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오더니 강지연 앞에 서서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강지연.”오늘의 온하준은 유난히 겉모습에 신경을 쓴 흔적이 보였다.머리는 새로 다듬어져 있었고 수염도 말끔히 정리돼 있었다. 살이 조금 빠진 듯했지만 전반적으로는 여전히 깔끔하고 멀쩡해 보였다.강지연은 낯선 사람을 대하듯 고개만 가볍게 끄덕였을 뿐 그를 지나쳐 안쪽으로 들어가려 발걸음을 옮겼다.“강지연.”온하준이 급히 한 발 옮겨 다시 앞을 가로막았다.강지연은 어쩔 수 없이 걸음을 멈추고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왜? 나한테 무슨 좋은 소식이라도 알리려고?”말끝에는 분명한 비꼼이 실려 있었다.그녀의 말을 곧바로 이해하지 못한 온하준은 잠시 멍한 표정으로 되물었다.“무슨 좋은 소식?”“이렇게까지 집요하게 나를 불러세운 이유가 좋은 소식을 알려주려는 거 아니었어?”강지연은 비웃듯 말을 이었다.“내가 말해볼까? 네 불임 친구가 임신해서 네가 아빠라도 될 예정인 거야?”“아니야.”온하준의 얼굴빛이 단번에 어두워졌다.“그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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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6화

강지연은 자세를 바로잡고 서더니 서늘할 정도로 차가운 눈빛으로 온하준을 바라봤다.“온하준, 우리 서로 알고 지낸 지가 십이 년이지. 물론 네 눈에는 지금도 내가 온통 흠투성이겠지만 한 가지 깜빡하고 말 안 한 게 있어. 나, 결벽증까지 있거든.”온하준의 얼굴이 더 어두워졌다.“네 말은 내가 더럽다는 뜻이야?”“응. 분명히 말해준 적 있는 것 같은데.”강지연은 이미 여러 번 그를 더럽다고 말했었다.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는 듯 묻는 그의 얼굴을 보며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온하준, 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아니면 알고도 모르는 척하는 거야?’온하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부정할 자신이 없었다.“강지연...”그는 무심결에 강지연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러나 그녀의 시선이 그의 손 위에 내려앉는 순간 온하준은 곧바로 손을 놓았다.강지연이 자신을 더럽다고 여긴다는 걸 그는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온하준은 여전히 그녀의 앞을 막아선 채 물었다.“강지연, 우리가 다시 시작할 가능성은 없어?”강지연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열여섯 살로 돌아갈 수 있다면 가능할지도 모르지.”그때의 강지연은 온통 온하준뿐인 아이였다.아무 일도 겪지 않았고 다른 사람을 만나본 적도 없었으며 서로에게 아무 상처도 남기지 않았던 시절.하지만 온하준이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해도 유독 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었다.시간을 되돌리는 일.그의 눈에 결국 절망이 어렸다. 강지연이 다시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온하준은 더 이상 그녀를 막지 못했다.한참을 밖에서 기다리던 기사가 강지연이 계속 나오지 않자 직접 한의원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운전기사라기엔 체격이 지나치게 좋았고 경호원에 더 가까워 보였다.“강지연.”온하준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난 이혼할 생각 없어. 정말 하고 싶으면 소송 걸어.”강지연은 잠시 걸음을 멈췄다.“알았어.”그 세 글자를 남기고 더 이상의 말은 없었다.“강지연!”온하준이 다시 한번 그녀의 이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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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7화

“한심하기는.”김도윤이 비웃듯 말했다.“그럼 넌 뭐를 위해 사는데?”김도진이 발끈했다.“우리가 처음에 뭐라고 했어?”김도윤이 말을 이었다.“고개 들고 살기 위해서, 출세하기 위해서, 남들 위에 서기 위해서였잖아.”“그랬는데 오늘 네 상태는 왜 이 모양인 건데?”김도진이 쏘아붙였다.“설마 어제 집에 가서 주아현이랑 싸운 거야? 역시 화난 거 맞지?”김도윤은 코웃음을 쳤다.“내가 그딴 걸 신경이나 쓰는 줄 알아? 걘 이미 집 나갔어. 이혼하자더라. 그걸로 나를 쥐고 흔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 꿈도 야무지게.”그는 어깨를 으쓱했다.“진짜로 이혼하면 스무 살짜리 여자들이 나랑 결혼하겠다고 줄을 설걸? 그런데 걔는 누가 데려가겠다는 사람이나 있을까.”회의 내내 김도윤이 정신이 팔렸었던 건 사실이었지만 그 이유는 주아현 때문이 아니었다.“김도윤, 말이 너무 심하다...”김도진이 말리려 입을 열었지만 김도윤이 즉시 잘랐다.“맞는 말이잖아. 김도진, 솔직히 너도 문제야. 사내대장부가 왜 그렇게 기가 죽어 있어? 여자한테 휘둘리면서 사는 게 자랑이야?”그는 김도진을 흘겨봤다.“우리 나가서 놀 때마다 시간 되면 네 아내가 전화해서 부르잖아. 그러면 너는 또 쪼르르 들어가고. 돈 버는 사람은 너야. 걔가 아니라고. 좀 주관을 가져.”김도진은 어깨를 으쓱했다.“난 원래 주관 없는 사람이야. 그런데 난 이게 편해.”그는 담담하게 말했다.“회사에서는 너희 말 듣고 집에서는 아내 말 듣고. 내가 뭘 깊이 고민할 필요가 없거든.”그리고 고개를 들었다.“그러니까 이제는 주관 있는 사람들이 결정해. 회사, 앞으로 어떻게 할 건데?”온하준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김도윤이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찼다.“아직도 정신이 팔렸네? 하준아, 설마 아직도 우리가 왜 이렇게까지 버텨왔는지 생각 중인 건 아니지?”온하준은 씁쓸하게 웃었다.“맞아. 그걸 생각하고 있어.”“그래서 결론이 뭔데?”김도진의 목소리에는 조급함이 묻어 있었다.요즘 그는 벼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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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8화

“그러니까 도대체 뭐가 그렇게 우울한 건데? 이혼하고 하나랑 결혼해서 살아.”김도윤이 말을 보탰다.“설마 단 한 번도 하나랑 결혼할 생각이 없었다고 말할 건 아니지? 우리 다 똑같은 남자야. 남자가 남자 마음을 모르겠어? 네가 진심으로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면 내가 손바닥에 장을 지진다.”“그게 내가 가장 잘못한 부분이야.”온하준은 두 사람 앞에서 솔직하게 말했다.“요 며칠, 나도 그걸 계속 생각했어. 안지유가 나를 욕한 말, 틀린 거 하나도 없더라. 강지연과 이혼할 생각은 단 한 번도 없었던 것도 사실이고 이하나와의 관계를 즐긴 것도 사실이야.”온하준은 고개를 숙인 채 관자놀이를 세게 눌렀다.“나는 계속 스스로에게 다짐했어. 얼마든지 충분히 잘 통제할 수 있다고. 마음속으로 하나를 생각해도 선만 지키면 되고 절대 이혼하지 않을 거라고. 나는 절대 강지연을 배신하는 사람이 되지 않을 거고 내 아버지 같은 쓰레기는 되지 않을 거로 생각했어. 강지연을 선택했으면 평생 함께 살아야 한다고.”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힘없이 웃었다.“진심으로 그렇게 믿었어. 내가 강지연을 육체적으로 배신하지 않으면 그건 배신이 아니라고.”“그래.”김도진이 말했다.“그 선은 지켰잖아. 실제로 너랑 이하나 아무 일 없었잖아.”안지유는 정신적인 것도 바람이라고 했지만 김도진의 기준에서는 적어도 선을 넘지 않았다면 아직 되돌릴 수 있는 여지는 있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온하준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씁쓸하게 웃기만 했다. 김도진의 얼굴이 굳었다.“설마... 너 아니지? 그런 일이 있었다면 내가 모를 리가 없잖아. 언제였어? 하준아, 이러면 진짜 끝이야. 이건 돌이킬 수 없어.”“그래.”온하준이 낮게 말했다.“돌이킬 수 없어. 그리고 돌이키려고 나설 낯도 없어.”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강지연은 나를 더럽다고 했어.”길을 잃은 사람처럼 온하준은 멍한 눈빛으로 김도진을 바라봤다.“그래서 말인데, 김도진. 나는 갑자기 내가 왜 이렇게까지 노력하면서 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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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9화

“그래? 내가 기억을 잘못한 건가?”김도진은 미간을 찌푸린 채 고개를 갸웃했다.“그럴 리가 없는데...”“내가 한 번 찾아볼게.”김도윤은 김도진과 안지유의 대화 기록을 훑다가 스크린숏 하나를 찾아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그 이미지를 재빨리 삭제한 뒤 휴대전화를 김도진에게 돌려주며 말했다.“봐. 없잖아.”김도진은 잠시 멍해졌다.‘뭐지? 분명히 올렸었는데... 도윤이가 아니라는 데는 이유가 있겠지. 하준이를 위해서 그러는 것 같은데 그냥 모른 척하자.’생각을 마친 김도진은 휴대전화를 쥔 채 중얼거렸다.“내가 헷갈렸나 보네.”온하준은 더 이상 두 사람의 대화를 듣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어디 가?”김도윤이 물었지만 온하준은 대답하지 못했다. 사실 자신도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지난 오 년 동안 그는 집에 돌아가는 일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결혼 초반에는 특히 그랬다. 강지연을 마주하는 것이 두려웠고 자신에게 쏟아지는 그녀의 사랑이 너무 크고 무거웠다. 무엇보다 그녀의 다친 다리를 보는 일이 가장 힘들었다.죄책감과 자책은 커다란 바위처럼 가슴을 눌러 부부로서 당연한 일조차 감히 떠올릴 수 없게 만들었다.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녀의 발을 보는 순간 온몸이 죄의식에 잠겨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그렇게 악순환이 시작됐다. 심리적 부담이 커질수록 더 멀어졌고 멀어질수록 부담은 더 커졌다. 심리 상담까지 받아봤지만 큰 효과는 없었다.그러다 보니 점점 집에 가는 일이 두려워졌고 늘 밤늦게까지 시간을 끌다가 귀가했다.핑계는 많았다. 친구들과의 술자리, 고객 접대 그리고 일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실제로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회사에서 보냈고 혼자 야근하는 날도 잦았다.그런데도 아무리 늦어도 그의 마음속에는 늘 돌아가야 할 방향이 있었다.집. 책임이던 관성이던 집으로 돌아가는 일은 일과 마찬가지로 당연한 하루의 일부였다.하지만 지금은 집이 그대로 있음에도 회사를 나서서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그는 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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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0화

온하준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너 말이야, 어서 주아현부터 찾아봐. 어디로 갔는지. 나처럼 되고 나서 후회하지 말고.”“그럴 리 없어!”김도윤은 손을 내저었다.“너 안 가면 나 혼자 간다. 재미없기는.”그날 밤, 김도윤은 몇몇 중년 남자들과 함께 화려한 불빛 속으로 파묻혔다.좌우로 여자를 끌어안고 술과 음악에 몸을 맡긴 채 흥청망청 시간을 흘려보냈다.정신없이 놀다가 밖으로 나와 휴대전화를 들여다보자 그제야 어머니한테서 열 통이 넘는 전화가 와있었다는 걸 발견했다.전화를 받자 어머니는 몸이 좋지 않다며 다음 날 해성으로 내려와 병원에 가야겠다고 말했다. 김도윤은 술에 취한 채 대충 대답했다.다음 날이 되어서야 그는 한 가지를 떠올렸다. 어머니가 오는데 주아현은 집에 없다는 사실이었다.주아현을 불러와야 했다. 그는 별다른 생각 없이 전화를 걸었다.전화는 곧 연결됐고 그녀는 여전히 차갑게 한마디만 했다.“여보세요.”“오늘 우리 엄마 온대. 몸이 안 좋다더라.”김도윤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했다.“너 어디야? 빨리 돌아와서 병원 좀 같이 가. 입원할지도 모르잖아.”그 말투는 주아현이 장을 보러 잠깐 나간 것쯤으로 여기는 듯 아무렇지 않았다.그 시각, 주아현은 차밭 위에 있었다.그의 말투를 듣는 순간 그녀의 마음은 얼음장처럼 식어 갔다.결혼한 지 사 년. 그녀는 하던 일을 그만두고 묵묵히 그의 뒤로 물러나 내조하며 살았다.아이를 낳고 시부모를 챙기고 집안일을 도맡았다. 친정어머니는 원래 몸이 약해 늘 보살핌이 필요했는데 시어머니는 일 년에 두 번은 꼭 입원했고 그때마다 병시중은 전부 그녀 몫이었다.간병인을 둘 수 있었음에도 시어머니는 굳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김윤후는 아직 어렸고 보모가 있다고 해도 엄마인 그녀가 완전히 손을 뗄 수는 없었다.사 년 동안 주아현은 밖에서 일 세 개를 뛰는 것보다 더 힘들게 살았다.그러나 김도윤은 단 한 번도 고맙다는 말하지 않았다. 그에게 그녀의 모든 수고는 당연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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