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다섯 번째 결혼기념일에서: Chapter 431 - Chapter 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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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31화

눈앞의 얼굴을 본 진경숙의 손에서 장바구니가 미끄러져 떨어졌다.온하준의 내연녀, 이하나였다.이하나는 바닥에 흩어진 물건들을 내려다보며 입꼬리를 천천히 올렸다.“아이는 전학시켰어요?”진경숙의 얼굴에서 핏기가 순식간에 빠져나갔다.“전학시켰다고 내가 못 찾을 줄 알았어요?”이하나는 마녀처럼 음흉하게 웃었다.“뭐... 뭘 원하는 거예요.”진경숙이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이하나는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진한 향수 냄새가 확 밀려와 숨이 막혔다.“내가 시키는 일 하나만 하면 돼요. 아니면 아줌마가 아이를 어디로 숨기던 끝까지 찾아갈 거예요.”진경숙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왜 하필 나한테 이러는 거예요? 난 그냥 남의 집에서 일하던 사람일 뿐이에요.”이하나는 크게 웃었다.“나를 만난 아줌마가 운이 없는 거겠죠.”“악마 같은 인간! 당신 같은 인간은 꼭 지옥에 떨어질 거야!”진경숙이 저주를 퍼부었지만 이하나는 오히려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맞아요. 지옥 갈 악마.”그녀는 고개를 기울이며 덧붙였다.“그러니까 내 말 잘 들어야겠죠? 지금 당장 따라 나와요.”진경숙은 마치 끌려가듯 느릿느릿 걸음을 옮겼고 한참이 지나서야 카페에 도착했다.오는 내내 짜증이 쌓였던 이하나는 자리에 앉자마자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일부러 시간 끌 생각이면 애당초 포기해요. 그러다 아줌마 딸, 진짜 험한 꼴로 죽을 수도 있으니까.”그녀는 테이블을 두드리며 말했다.“폰은 어디 있어요? 녹음할 생각 하지 말고 전원부터 꺼요.”진경숙은 울먹이며 휴대전화를 내밀었다.그제야 이하나는 안심한 듯 차분하게 그러나 집요하게 이것저것 지시를 늘어놓았다.“내 말 잘 들어요.”이하나는 어디로 가서 누구를 만나고 무엇을 건네고 어떤 말 해야 하는지 빠짐없이 설명한 뒤 마지막으로 종이봉투 하나를 테이블 위에 밀어놓았다.봉투를 받아 든 진경숙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아, 그리고.”이하나가 덧붙였다.“지난달에 아줌마 고향 마을에 내 지인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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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32화

김도윤은 다시 회사 이사회 회의실, 늘 앉던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온하준이 병원에 실려 갔다는 사실은 이미 확인된 상태였다.그것도 김도진이 직접 병원까지 다녀온 뒤 전해 온 소식이었다.회의에 참석한 이사들 모두 표정이 무거웠다. 가장 먼저 나온 질문은 역시 온하준의 상태였다.“아직 병원에 누워 있습니다. 언제 깨어날지는 의사들도 장담을 못 한다더군요.”김도진의 얼굴에는 불안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문제는 지금 당장 하준이가 결정을 내려야 할 사안들이 몇 개 있다는 겁니다. 중요한 계약서들도 서명을 기다리고 있고요. 이걸 어떻게 해야 할지...”온하준이 어떻게 될지는 단 한 사람, 김도윤만이 알고 있었다.그 독에 중독됐다면 깨어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설령 죽지 않는다 해도 뇌사 수준을 피하기는 어려웠다.“조금 더 기다려 봅시다.”김도윤이 차분하게 말했다.“만약 온 대표가 계속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다면 그때 이사회에서 향후 문제를 다시 논의하는 게 맞겠죠.”김도진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달리 방법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받아들이기 힘든 말이었다.온하준에게는 자식도, 공식적인 후계자도 없었다. 그때 김도윤이 다시 입을 열었다.“다만 계약상 우리가 이행해야 할 부분들은 있지 않습니까. 몇몇 협력 업체들이 결제를 기다리고 있는데 그쪽도 다들 사정이 어려운 회사들이에요. 이런 상황에서 계속 미루는 건...”“그건 안 돼.”김도진이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결제 관련 사안은 반드시 하준의 최종 서명이 있어야 해. 그 원칙은 깨면 안 되는 거야.”김도윤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그러나 그는 이를 악물고 최대한 침착하게 말했다.“지금은 서명받을 수 없는 상황이잖아.”“그래서 며칠 기다리자고 했잖아. 하준이 아직 병원에 있어. 벌써 온하준이 없는 것처럼 굴면 안 되는 거 아니야?”두 사람은 결국 언성을 높였다. 참다못한 김도윤은 끝내 욕설을 쏟아냈다. 고지식하다, 답답하다, 멍청하다는 말이 연달아 튀어나왔다.그때 한 이사가 끼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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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33화

“김 대표님, 오셨군요.”노현우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았다. 기호범 역시 미소를 띠고 고개를 끄덕였다.주변을 둘러보니 이미 여러 회사의 핵심 인사들이 모여 있었다. 향후 협력 문제를 논의하고 곧이어 열릴 기자 간담회에 참석할 사람들이었다.김도윤은 노현우와 기호범을 비롯해 참석자들과 차례로 악수했다.노현우와 기호범의 태도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제야 김도윤은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연회 시작을 연 사람은 역시 기호범이었다.“오늘은 원래 강 대표님께서 직접 여러분을 모실 예정이었습니다만 가정에 다소 변고가 생기는 바람에 제가 대신 나오게 됐습니다.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기를 바랍니다.”이미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 대부분은 중독 소문을 어렴풋이 들은 상태였다.기호범의 말에 모두 속으로는 소문이 사실이라고 확신했지만 입 밖으로 내는 사람은 없었다.다만 모두가 가장 궁금해하는 건 하나였다.크로시 그룹의 향후 행보 그리고 해성 진출 계획이 과연 그대로 유지될 수 있느냐는 문제였다.누군가 조심스럽게 그 질문을 꺼내자 기호범은 신중하게 답했다.“그 문제에 대해서는 잠시 후 강 대표님께서 직접 명확한 입장을 전해 주실 겁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죠.”김도윤은 속으로 비웃었다.‘기다리라니. 평생을 기다려도 그 사람은 나타나지 않을 텐데.’로시 가문은 거대한 집안이었다. 그런 와중에 국내에서 사업을 확장하려 했던 이유는 오직 로시가 이 나라 사람이기 때문이었다.만약 그가 사라진다면 다시 가문을 이끌 누군가가 굳이 해성까지 올 이유는 없었다.기호범은 일단 식사를 권했다. 뷔페였다.솔직히 김도윤은 한동안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만큼은 오랜만에 편안히 식사를 즐길 수 있을 것 같았다.그는 노현우와 같은 테이블에 앉았다.“노현우 씨, 이 업계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셨죠?”“네.”노현우는 수줍게 웃었다.“처음엔 김 대표님 회사에서 경험 삼아 일했을 뿐이었는데 이렇게 회사를 차리게 됐고 또 운 좋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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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34화

그런 식의 치켜세움이 이어질수록 김도윤의 기분은 점점 더 좋아졌다.이 사람들이야 상황에 따라 말을 바꾸는 인간들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꿀 발린 말이 싫을 리 없었다.여러 회사 사람들과 정중한 태도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기호범의 모습을 보며 그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점심 만찬이 끝난 뒤 크로시 그룹의 일정은 곧바로 기자회견이었고 이미 회의장 밖 로비에는 기자들이 하나둘 모여들고 있었다.이번 기자회견은 생중계라는 소문도 돌았다. 김도윤은 마음속으로 장면을 그리며 입꼬리를 올렸다.‘오늘 제대로 된 구경거리가 되겠군.’식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스태프가 다가와 기자회견장으로 이동해 달라고 안내했다.김도윤은 자리에서 일어나 회견장 안을 훑어봤다.좌석마다 명패가 놓여 있었는데 1열에서 자신의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오히려 조금 전까지 그를 극찬하던 두 사람이 1열에 앉아 있었다.비록 가장자리에 가깝긴 했지만 분명히 그의 자리보다 앞이었다.“김 대표님 자리는 이쪽입니다.”앞줄에 앉아 있던 사람이 뒤돌아보며 말했다. 정말 눈치가 없는 건지, 은근히 비웃는 건지 알 수 없는 말투였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업계의 중심이라며 추켜세우던 입으로 할 말은 아니었다.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지만 김도윤은 억지로 표정을 관리하며 자리에 앉았다.1열에는 제법 묵직한 인물들이 모여 있었다.여러 명의 공직 인사들 그리고 아마도 크로시 그룹이 선택한 협력 대상들로 보이는 사람들이었다.그는 마음속으로 냉소를 삼켰다.‘좋아. 주요 인물이 많을수록 더 볼만하겠지. 조금 있다가 기호범이 이 판을 어떻게 수습하는지나 지켜보자.’회견장은 곧 만석이 되었고 행사는 예정대로 시작됐다.그 순간 김도윤은 고개를 돌리다 뜻밖의 얼굴을 발견했다. 이하나였다.그녀는 기자석 한쪽에 섞여 앉아 있었다.김도윤이 입 모양으로 왜 여기 있는 거냐고 묻자 이하나는 대놓고 눈을 흘겼다.그녀 역시 이런 구경거리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로시를 증오하던 이하나는 오늘 기필코 크로시 그룹이 망신당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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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35화

그 기자는 마이크를 움켜쥔 채 질문을 퍼부었다.“기 대표님, 강 대표님께서 과거에 애국심은 핑계일 뿐이고 돌아온 이유는 결국 돈을 벌기 위해서라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발언에 대해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기호범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 그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강 대표님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단 한 번도요.”이건 기호범이 목숨을 걸고 장담할 수 있는 일이었다. 강시우가 귀국을 결정한 이유는 단순했다.어머니가 살았던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누구에게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있는 법이었다.더구나 그곳에는 외할머니까지 계셨으니 그 선택은 너무도 자연스러웠다.그는 먼저 이곳에 기반을 다져 자리를 잡으면 어머니가 언제든 돌아와 쉴 수 있는 집을 마련해 드리고 싶었다.만약 뜻대로 되지 않는다면 그때는 또 다른 선택을 하면 될 일이었다.하지만 기호범의 해명은 기자를 멈추게 하지 못했다.“그렇습니까?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라고요?”기자는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그렇다면 왜 그런 발언이 나왔는지 설명해 주시죠.”“그런 말은 한 적이 없습니다.”기호범의 목소리는 더욱 단단해졌다. 김도윤은 이 광경을 보며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강시우가 그런 말을 했을 리 없다는 걸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왜냐하면 그 질문 자체가 김도윤이 기자에게 시킨 것이었기 때문이다.가끔은 진실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누군가 했다고 말하면 했던 말이 된다.오늘 기자회견이 끝난 뒤 자극적인 제목의 기사 몇 개만 더 얹히면 강시우의 애국심은 결국 허울뿐이라는 프레임은 완성될 터였다.말하지 않았어도 말한 셈이 되는 것이다. 이미 앞줄에 앉은 인사들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좋은 취지로 시작된 기자회견이 이 지경이 되었으니 누구의 체면도 서지 않았다.플래시가 난무했고 질문은 점점 선을 넘었다. 급기야 노골적인 비난과 조롱까지 쏟아지기 시작했다.상황을 통제하지 못한 사회자는 당황한 기색으로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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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36화

김도윤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그는 재빨리 옆에 있던 이하나를 돌아봤다.그녀 역시 핏기 하나 없이 종잇장처럼 새하얗게 질린 얼굴이었다.‘이 멍청한 계집애 같으니라고!’김도윤은 이를 악물며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하지만 녹음된 대화는 멈추지 않았고 계속 흘러나왔다.“잔꾀 부릴 생각이라면 꿈도 꾸지 마세요. 그러면 당신 딸은 아주 보기 좋게 죽여줄 테니까. 휴대전화 이리 내놔요! 녹음 같은 거 할 생각은 하지도 말고, 지금 당장 꺼요!”“잘 들어요. 이 약을 음식에 타든 물에 타든 상관없어요. 강지연이랑 강시우 두 사람에게 반드시 먹게 해야 해요. 일을 제대로 처리하면 보상으로 이억 원을 줄게요. 그리고 해외로 보내줄 테니까 딸을 데리고 여기서 떠나요. 시골에 있는 그 남자한테서 영원히 벗어나게 해 줄게요. 그럼 다시는 찾지 못할 거예요.”“이... 이게 무슨 약인데요? 먹으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먹으면 죽든가 아니면 영원히 잠들겠죠. 당신도 사는 게 싫으면 같이 죽어도 돼요. 딸은 제가 돌봐 줄 테니까.”“이하나 씨, 전 그냥 가사도우미일 뿐이에요. 이런 건... 이런 건 두려워서 못 하겠어요.”“두려워요? 그럼 내가 딸 학교까지 찾아가는 건 안 두려워요? 잔꾀 부리지 말라고 했죠? 전학을 가도 소용없어요! 어디로 전학 가든 내가 다 찾아낼 수 있으니까! 딸한테 무슨 일 생기는 꼴 보고 싶어요? 당연히 내가 직접 죽이진 않을 거예요. 대신 열네 살도 안 된 애들 몇 명 붙여서 매일매일 괴롭히게 할 뿐이죠.”그 뒤로 진경숙의 흐느끼는 울음소리가 섞여 들려왔다.“누구 초상 치러요? 아직 죽지도 않았는데 뭘 벌써 울어요. 죽고 나서 울어도 늦지 않아요. 그리고... 만약에 이 일이 들통나서 경찰에 알려지면 당신이 직접 나서서 죄를 인정해야 해요. 이유는 알아서 꾸며내고 내 이름은 절대 꺼내면 안 돼요. 걱정하지 마세요. 잡혀 들어가도 그 이억 원은 그대로 줄 테니까. 돈은 딸한테 줄 거고 유학도 보내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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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37화

보안요원이 그녀를 내려다보며 단호하게 말했다.“그럼 더더욱 보내드릴 수 없습니다. 가는 길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려고요? 119를 불러 드리겠습니다.”‘119는 무슨 119야!’이하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더니 보안요원이 잠시 시선을 돌린 순간을 노려 그대로 몸을 틀어 밖으로 돌진했다.우선 화장실로 들어가 숨어 있다가 경찰이 지나가면 그때 빠져나갈 생각이었다.하지만 이미 늦었다.경찰이 바로 그녀 앞을 가로막으며 물었다.“이하나 씨 맞습니까?”이하나는 얼굴이 순식간에 새하얗게 질려있었다.그녀는 두 손을 내저으며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아니, 아니에요. 전 아니에요. 사람 잘못 보셨어요...”“주민등록증 좀 보여주시겠습니까?”이하나는 가방을 가슴에 꼭 끌어안은 채 더듬거리며 말했다.“제가... 주민등록증을 안 가져와서요.”오늘 행사는 주민등록증 인증을 거쳐야만 입장이 가능했다.그러니 주민등록증이 없다는 말은 명백한 거짓이었다.보안요원이 얼굴 인식 대조를 하자는 말까지 꺼내자 그녀는 더 이상 도망칠 구멍이 남아 있지 않았다.그 순간, 이하나는 갑자기 몸을 돌려 김도윤을 향해 절규하듯 소리쳤다.“김도윤! 김도윤, 나 좀 살려줘! 김도윤!”김도윤은 미칠 지경이었다.‘저 미친년이 왜 날 부르는 거야?’“김도윤, 이제 나 모르는 척하는 거야? 이 개자식아! 이게 다 네가...”“하나야!”김도윤의 목소리가 군중을 가르며 울려 퍼졌다.그는 사람들을 헤치고 빠르게 달려와 금방이라도 통곡할 것 같은 얼굴로 그녀 앞에 서며 말했다.“하나야, 난 정말 네가 이렇게까지 잔인한 사람일 줄은 상상도 못 했어!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어?”그의 눈빛은 섬뜩할 정도로 사나웠다.이하나가 한마디라도 더 내뱉는 순간 그 자리에서라도 그녀를 죽여버릴 것만 같았다.“하나야, 넌 정말... 너한테 너무 실망이야!”김도윤은 일부러 눈시울을 붉히며 말을 이었다.“해외에서 돌아왔을 때 우린 널 친동생처럼 아끼고 챙겼어. 성격도 착하고 마음도 여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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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38화

이하나는 끝내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 입을 다물었다.그녀의 눈빛에는 반드시 구하러 와야 한다는 분명한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김도윤은 그제야 잠시나마 숨을 돌릴 수 있었다.하지만 경찰은 자리를 뜨지 않았고 상황은 이미 걷잡을 수 없이 커져 있었다.게다가 소란은 이미 너무 많은 언론인의 시선을 끌어모은 뒤였다.이 정도 수위의 녹음이라면 이슈성만으로도 크로시 그룹 기자회견 자체를 훌쩍 뛰어넘는다.게다가 생중계 중이었기에 온라인은 이미 폭발했고 기자들은 첫 기사를 따내기 위해 김도윤과 이하나 주변으로 벌떼처럼 몰려들었다.“김도윤 대표님! 김도윤 대표님!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 주시죠!”“김도윤 대표님, 이하나 씨가 정말 사랑 때문에 원한을 품고 온 대표님의 전 부인과 그 가족을 독살하려 한 겁니까?”“강 대표님의 가족은 현재 어떤 상황입니까?”“온 대표님은 오늘 왜 이 자리에 안 나오신 겁니까? 설마 온 대표님도 중독된 건가요?”질문은 쉴 새 없이 쏟아졌고 마이크들은 금방이라도 김도윤의 입을 찌를 기세였다.사람이 지나치게 몰린 탓에 현장은 순식간에 통제가 불가능해졌고 경찰마저 한쪽으로 밀려났다.누군가 마이크를 이하나의 얼굴 바로 앞까지 들이밀며 물었다.“이하나 씨, 왜 가사도우미에게 강 대표님의 가족을 죽이라고 지시하신 겁니까?”“현재 온 대표님과 교제 중이신가요?”“온 대표님이 오늘 이 자리에 오지 않은 이유를 알고 계신가요?”이하나는 머릿속이 아수라장이 되어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았고 그저 김도윤만 바라볼 뿐이었다.김도윤은 그녀가 입을 열어서는 안 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즉시 기자들의 질문을 가로챘다.“이 사건의 진실은 경찰 수사에 맡기겠습니다. 우리나라 경찰은 무고한 사람을 억울하게 만들지 않을 것이고 나쁜 사람을 절대 놓치지 않을 겁니다.”“그럼 김도윤 대표님의 말씀은 이하나 씨가 억울하게 몰렸다는 뜻인가요?”김도윤은 일부러 말을 흐렸다.“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요즘은 AI 기술이 워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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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39화

이내 연회장 대형 스크린에 온하준의 사무실 내부를 비춘 CCTV 화면이 공개되었다.그 순간, 김도윤은 그대로 제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사무실에 CCTV가 있었어? 언제부터? 그럼 처음부터 날 의심하고 대비해 둔 거잖아. 형제라더니! 입으로만 형제였네. 정말 형제였다면 이렇게까지 할 이유가 없었을 텐데...’그러나 진짜로 무너져 버린 사람은 이하나였다.사무실에 CCTV가 있었다는 건 곧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가 전부 고스란히 기록되었다는 뜻이었다.그리고 그녀의 불길한 예감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화면 속에는 몸을 잔뜩 움츠린 채 사방을 살피며 온하준의 사무실을 서성이는 이하나의 모습이 또렷이 담겨 있었다.곧이어 이하나의 손짓이 선명하게 포착됐다.정수기 물탱크에 무언가를 붓는 장면, 심지어 온하준의 컵 안쪽에까지 무언가를 묻히는 모습까지.연회장은 숨소리조차 멎은 듯 고요해졌다.온하준은 마이크를 들고 차분하게 설명을 이어갔다.“영상 하단에 시간이 표시돼 있습니다. 이 시점 이후로 저는 단 한 번도 이 사무실에 들어가지 않았고 다른 누구도 출입하지 않았습니다. CCTV는 지금 이 순간까지 단 한 프레임도 삭제되지 않은 상태로 보존돼 있습니다. 전부 경찰에 제출해 이하나 씨가 투입한 물질이 무엇인지 정확히 확인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음성 파일 하나를 더 들려드리겠습니다.”CCTV 영상이 끝나자 이내 녹음된 음성이 연회장 전체에 울려 퍼졌다.“안녕하세요, 이 휴대전화 이분 거 맞으시죠?”그 순간부터였다.이하나가 온하준을 불러 식사했던 그날 밤, 그 자리에서 오간 모든 대화가 하나도 빠짐없이 재생되기 시작했다.이하나와 김도윤이 어떻게 온하준의 휴대전화 비밀번호를 풀지 상의한 내용, 잠금 해제 후 또 어떤 내용을 확인했는지, 어떤 방식으로 이메일 비밀번호까지 알아냈고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었는지까지.모든 것이 지나칠 만큼 선명한 음질로 여과 없이 흘러나왔다.연회장은 다시 한번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끝내 참지 못한 이하나가 비명을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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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40화

온하준은 짧은 사과의 말을 끝으로 김도진과 함께 연회장을 떠났다.기호범은 다시 단상에 올라 흐트러진 분위기를 수습하며 간담회의 초점을 크로시 그룹의 향후 계획으로 자연스럽게 돌려놓았다.연회장 안을 메우던 질문들도 서서히 회사의 성장과 비전으로 되돌아갔다.한편, 연회장을 빠져나온 온하준은 안쪽에서 여전히 울려 퍼지는 기자들의 목소리를 등지고 걸음을 재촉했다.이제 그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은 더 이상 그의 몫이 아니었다.뒤에서는 김도진이 죽을힘을 다해 따라오고 있었다.겨우 따라잡아 조수석에 몸을 던지듯 앉은 그는 숨을 몰아쉬며 한참을 헐떡이더니 이내 참아왔던 울음을 터뜨렸다.차 안에서 김도진은 두 눈을 꼭 감은 채 아이처럼 서럽게 오열했다.온하준은 듣지 못한 척 굳은 표정으로 말없이 운전만 했다.김도진은 그렇게 가는 길 내내 울었다.차가 회사에 도착해서야 그는 훌쩍이며 겨우 울음을 그쳤고 곧 온하준의 뒤를 따라 회의실까지 들어갔다.온하준의 사무실은 현재 출입이 통제된 상태였다.현장을 보존한 채 경찰의 증거 수집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지금 이 순간 김도진은 혼자 있을 수가 없었다.그의 나약해진 마음은 누군가의 위로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회의실에 들어서자 온하준은 노트북을 열고 곧바로 업무를 시작했다.김도진은 그의 맞은편에 털썩 주저앉았다.온하준이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는 끝내 참지 못하고 울먹이며 입을 열었다.“하준아... 왜? 왜 이렇게 돼버린 거야?”온하준의 손은 키보드 위에서 잠시 멈췄다가 다시 움직였다.김도진은 눈을 감은 채 또다시 울음을 터뜨리며 말을 이었다.“도대체 왜? 우리 그때 평생 좋은 형제로 남자고 약속했잖아. 동고동락하면서 절대 헤어지지 말자고... 서로를 위해서라면 불구덩이에도 같이 뛰어들 수 있다고 했잖아! 근데 김도윤은 왜 이렇게 변한 거야?”온하준은 여전히 멈추지 않고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그 역시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수없이 던지고 있었기에 그 물음에 답해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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