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다섯 번째 결혼기념일에서: Chapter 451 - Chapter 4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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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51화

온하준은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마디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서 있었고 변호사 역시 말문이 막혀 있었다. 아니, 분명 김도진 쪽이 더 말이 잘 통할 거라 했는데 이게 어떻게 된 영문인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김도진은 거기서 한마디를 더 얹었다.“그런데 말입니다, 변호사님. 변호사로서 해야 할 일은 제대로 하신 겁니까? 이 여자 변호를 맡기 전에 사건 기록도 안 보셨어요? 이 여자가 우리 온 대표를 거의 독살할 뻔했다는 건 알고 계십니까? 그런데 무슨 이유로 보증 설 거로 생각하신 거죠? 우리 온 대표가 그렇게 멍청해 보이세요?”김도진의 말 한마디에 온하준은 순식간에 멍청이가 되어 버렸다.변호사는 안경을 밀어 올리며 말했다.“물론 검토했습니다. 다만 이하나 씨의 말로는 온 대표님께서 자신을 원망하지 않을 것이고 애초에 본인 역시 온 대표님까지 해칠 의도는 없었다고 했습니다. 또 본인은 온 대표님께서 가장 사랑했던 사람이며 과거의 정을 생각해서라도 한 번쯤은 구해 줄 거라고 했고요.”그는 기침을 두어 번 하더니 김도진을 바라보며 덧붙였다.“무엇보다도 김 대표님께서 가장 말이 잘 통하고 자신을 가장 감싸 주는 분이라고도 했습니다.”“뭔 개소리야.”김도진은 즉각 발끈했다.“저 인간이 멍청한 거지, 전 아니거든요.”다시 한번 멍청이라고 호명된 온하준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두 사람을 지켜봤다.김도진은 단호하게 말했다.“변호사님, 이 사건에 우리가 안 끼어드는 걸 다행으로 생각하세요. 우리는 차라리 그 인간이 감옥에 평생 눌러앉아 못 나오길 바라는 중이니까요.”김도진은 그렇게 말하며 변호사를 몰아내듯 내보내더니 문을 쾅 닫고 돌아서서 온하준을 보았다.“됐어. 내가 알아서 쫓아냈으니까 다음에 또 찾아와도 너 절대 다시 마음 약해지지 마.”무엇보다 김도진은 아까 변호사가 과거의 정을 생각해서라도 한 번쯤은 구해 줄 거라던 말이 마음에 걸렸다.온하준이 마음 약해질 사람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정말 마지막으로 도와주자는 심정으로 손을 내밀어 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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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52화

한마디로 결국 돈을 내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변호사는 난처한 목소리로 말했다.“이미 찾아뵈었습니다. 그런데...”“네?”주아현은 그 ‘그런데’의 의미를 곧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김도윤이 부모를 얼마나 신뢰했는지, 그래서 재산 대부분을 부모 명의로 돌려놓았다는 사실을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부모님께서는 변호사를 선임할 생각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게다가 제가 두 번째로 찾아갔을 땐 작은아들과 며느리를 데리고 여행을 떠나셨더군요.”변호사의 말이 끝나자 주아현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정말요? 너무 잘됐네요. 김도윤한테 이런 날도 오는군요. 자업자득이죠.”“주아현 씨?”이번에는 변호사가 그녀의 반응을 이해하지 못했다. 주아현은 웃음이 가시지 않은 채 말했다.“부모도 외면한 사람을 이미 이혼한 제가 왜 돌봐야 하죠? 변호사님, 사람 잘못 찾으셨어요. 저는 그 사람과 아무 관계도 없습니다.”“잠깐만요, 잠깐만요.”변호사는 그녀가 전화를 끊을까 봐 다급해졌다.“김도윤 씨가 그러더군요. 수년간 부부였던 정을 생각해 달라고요. 아니면 적어도 아들을 생각해 달라고 했습니다. 아이에게 수감 중인 아버지가 있다는 건 좋지 않지 않습니까. 나중의 취업에도 영향을 줄 수 있고 설령 공직을 준비하지 않더라도 주변 사람들이 알게 되면 놀림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체면이 서겠습니까? 장래 배우자를 만날 때도 불리해질 수 있고요.”“아.”주아현은 여전히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괜찮아요. 아들에겐 아버지가 죽었다고 말하면 되죠.”변호사는 말문이 막혔다.“변호사님.”주아현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차가웠다.“저 지금 바쁩니다. 이게 마지막 연락이었으면 좋겠네요. 저는 이제 그 사람과 아무런 관련이 없어요. 솔직히 말해 감옥에 가는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고 오히려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했어요. 그런 제가 그를 위해 변호사를 선임한다는 건 너무 말이 안 되지 않을까요?”결혼 생활 내내 이어졌던 김도윤의 냉담함과 어머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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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53화

“누군데요? 내가 아는 사람이에요?”주아현은 김도윤이 밖에서 어떤 여자를 만나고 다니는지를 알고 싶어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안지유가 고개를 끄덕였다.“이하나예요. 아현 씨가 마음 상할까 봐 지금까지 말 안 했어요.”주아현은 잠깐 멍해졌다가 이내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러고 보니 두 사람 잘 어울리네요.”“네?”안지유는 이런 상황에 잘 어울린다고 평가하고 있는 주아현을 멍하니 쳐다봤다.“잘 어울리잖아요.”주아현이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더러운 사람끼리 만났으니 끼리끼리 만난 거죠. 천생연분이네요.”“듣고 보니 그렇네요.”안지유도 웃음을 터뜨렸다.“그런데 이하나가 애를 낳을 것 같지는 않아요. 내가 이하나를 잘 아는데 그 여자는 항상 본인 이익이 먼저인 사람이에요. 처음에는 그 아이를 온하준의 아이라고 거짓말했거든요. 온하준은 멍청하게 그걸 믿고 있었고. 그런데 이제 다 들통나고 김도윤은 감옥까지 가게 생겼으니 애를 낳을 리 없죠.”“그러게요.”주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그 두 사람은 이제 우리랑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에요. 냄새 나는 인간들은 멀리하는 게 상책이에요.”해성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외국에 있는 강지연도 대략은 알고 있었다.기호범이 강시우에게 보고했고 그녀가 주말에 강희라 댁에 갈 때면 몇 마디를 우연히 듣게 되었다.하지만 그녀의 마음도 주아현과 마찬가지로 담담했다. 그저 연예인 가십을 스쳐보듯 잠시 놀랄 뿐, 더 이상의 파장은 없었다.강시우의 일 처리 속도는 생각보다 훨씬 빨랐다.강지연이 개학하고 석 달이 지나자 한의원이 완공되었고 심지어 그녀의 편의를 위해 학교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의사와 간호사는 모두 국내에서 요청해 온 사람들이었다.강시우는 후한 연봉을 제시했고 1년 계약 후 적응이 어렵다면 다음 해에는 교체하겠다는 조건까지 달았다.좋은 조건에 배우진팀 의료진들은 앞다투어 지원했고 사적으로는 강시우가 연봉을 너무 많이 주는 거 아니냐는 농담까지 오갔다.강지연의 침 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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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54화

강지연의 일상은 단순하고 규칙적이며 충실했다.수업을 듣고 재활하고 주말이면 재활을 마친 뒤 강희라 댁에 들러 할머니를 뵙는 것이 전부였다. 시간은 생각보다 빠르게 흘러 어느새 겨울이 다가왔다.십이월 중순, 학교는 성탄절 방학에 들어갔고 보름 남짓한 긴 휴식이 주어졌다. 대부분의 학생은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강지연은 매일 재활을 해야 했기에 학교 근처에 남았다.방학 첫날 아침, 강지연은 스스로 간단하고 건강한 아침을 차려 먹은 뒤 두툼한 패딩을 걸치고 곧장 한의원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한 남자가 낮고 굵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춤추는 아가씨!”한의원에서 알게 된 사람이었다. 쉰이 넘은 현국인 아저씨였고 이름은 로버트라고 했다.의사의 말에 따르면 그는 완치할 수 없는 희귀병을 앓고 있었다. 냉정하게 말하면 지금의 로버트는 그저 삶의 마지막을 기다리는 상태였고 언제던 숨이 멎을 수 있다고 했다.한의원에 오는 이유도 치료라기보다는 통증을 조금이나마 덜기 위해서였다.곽현성은 이렇게 덧붙였다. 진통제를 먹어도 되지만 타지에서 같은 민족이 연 한의원을 보며 얻는 위안이 더 클지도 모른다고.로버트는 늘 강지연을 ‘춤추는 아가씨’라고 불렀다. 그의 말투는 언제나 다정하고 친근했다.가끔은 의료진에게 꽃 한 송이나 작은 과자 같은 선물을 들고 오기도 했는데 항상 강지연의 몫도 있었다.몇 달 동안 매일 같이 한의원에 출근하듯 나오는 사람은 사실상 그와 그녀 둘뿐이었기 때문이다.“우린 이 한의원의 정신적 지주야.”로버트는 농담을 잘했다.그날 강지연도 선물을 가져왔다. 전날 밤 구운 사과파이였는데 장시범에게 배운 레시피였다. 단것을 유난히 좋아하는 로버트는 혼자 두 조각을 해치웠다.그와 함께 온 이는 친구인지 집사인지 알 수 없었는데 로버트는 그를 제이스라 불렀다.로버트가 두 번째 조각을 집어 들었을 때 제이스는 미간을 찌푸렸지만 말리지는 않았다. 눈빛 어딘가에 체념과 쓸쓸함이 스쳤다.더 먹지 말라고 하기엔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는 듯한 눈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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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55화

바닥 러그 위에 놓아둔 휴대전화가 반짝이며 문자가 떴다. 집어 들어 확인하니 옆집에 살고 있는 장시범이었다.[나와서 눈사람 좀 봐요.]‘눈사람?’외투를 걸치고 문을 열자 차가운 바람이 훅 밀려들었다. 고작 반나절 사이에 눈은 벌써 발목 가까이 쌓여 있었다.옆집 정원 한가운데 어딘가 엉성한 눈사람 하나가 서 있었고 장시범은 그 옆에서 두 팔을 흔들며 입꼬리가 귀에 걸릴 듯 환하게 웃고 있었다.가까이 다가가 보니 눈사람 입에는 빨간 장미 한 송이가 꽂혀 있었다.“얘 이름은 솜이에요.”장시범의 말에 강지연이 미소를 지었다.“이름 참 성의 없이 지었다.”“그래도 마음 담아서 만든 거라니까요.”그는 눈사람 뒤에서 장미 한 다발을 꺼내 들고 말을 이었다.“솜이가 방학 축하하고 좋은 시간 보내길 바란대요.”강지연은 입꼬리를 올린 채 장시범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이 서서히 붉어지더니 꽃을 든 손이 미묘하게 흔들렸다.어느덧 이곳에 온 지도 반년 가까이 됐고 강지연도 장시범의 마음이 무엇인지 모를 나이는 아니었다.그동안 이런 작은 이벤트는 종종 있었다. 재밌었고 예상치 못한 순간에 웃게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 온전히 마음을 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고마워.”그녀는 꽃을 받았다.“너랑 동생은 언제 출발해?”방학이 시작되면 장시범과 장시연은 귀국할 예정이라고 했고 떠나기 전 강지연은 밥 한 끼 대접하고 싶었다. 그런데 장시범의 대답은 의외였다.“동생은 오늘 아침 비행기로 떠났어요. 몇 시간 뒤면 집에 도착할 거예요.”“뭐?”강지연은 눈을 크게 떴다.“그러면 너는?”장시범은 순식간에 세상에서 자기가 제일 불쌍한 사람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엄마가 동생만 보고 싶고 저는 안 보고 싶대요. 그래서 지금 저는 버려진 강아지나 다름없어요.”그 표정에 강지연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그러면 버려진 강아지 저녁은 해결됐어?”그녀의 물음에 장시범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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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56화

장시범은 재빨리 그녀를 붙잡았다.“앉아요. 앉아. 제가 할게요.”그녀를 소파에 앉혀 놓았지만 강지연은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괜찮아. 진짜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아...”“네, 네. 알아요. 그래도 제가 정리할게요.”그는 맞장구치듯 말하며 부엌으로 들어갔다. 식기들을 식기세척기에 넣고 돌아와 보니 강지연은 이미 소파에 깊이 잠들어 있었다.소파에서 자면 불편할까 봐 장시범은 조심스럽게 다가가 그녀를 불렀다.“선배, 선배. 침실에 들어가서 편히 자요.”하지만 강지연은 눈을 감은 채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장시범은 한숨을 내쉬고 그녀를 안아 들었다. 조심스레 침실로 옮긴 뒤 침대에 눕히려 몸을 숙였을 때 따뜻한 숨결이 그의 귓가를 스쳤다.강지연은 완전히 취해 있었다. 볼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입술은 장밋빛으로 물든 듯했다.순간 온몸이 굳은 듯 장시범은 움직이지 못한 채 붉은 뺨과 장미즙을 머금은 듯한 강지연의 입술을 바라봤다.조금만 더 가까이, 조금만 더 내려가면 닿을 수 있었다. 가볍게라도 한 번만이라도.‘안 돼. 이건 선배를 모욕하는 일이야.’겨우 정신을 다잡은 그는 재빨리 몸을 일으켜 현관까지 나갔다가 문손잡이를 잡은 채 잠시 멈췄다.‘술을 많이 마셨는데 혹시라도 속이 불편해지면 어떡하지. 누군가 필요하면...’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는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어쩔 수 없는 마음과 술기운이 뒤섞여 가슴이 뜨거웠다. 답답해진 장시범은 차라리 청소라도 하기로 마음먹었다.겨울밤, 강지연은 침실에서 깊이 잠들어 있었고 장시범은 집 안 구석구석을 닦고 또 닦았다.그렇게 한참을 숨이 차도록 움직이다가 결국 기력이 바닥나 소파에 몸을 눕힌 채 전원이 꺼지듯 그대로 잠에 빠졌다.다음 날 아침, 거실로 나온 강지연은 소파에 누운 장시범과 눈이 마주쳤다.그는 거의 튀어 오르듯 일어나 변명부터 쏟아냈다.“어제 선배가 취하셔서 혹시 불편할까 봐 그냥 두고 갈 수가 없었어요. 집이 좀 어지러워 보여서 청소도 조금 했고요. 그러다 보니 너무 피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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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57화

강지연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장시범을 바라보자 그는 급하게 덧붙였다.“진짜예요. 아버지가 한가할 때는 꼭 엄마한테 밥을 해주세요. 저도 다 그거 보고 배운 거예요.”강지연은 예상 밖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가 반드시 부엌을 맡아야 한다고 여긴 적은 없었지만 장시범 집안처럼 넉넉한 가정이라면 도우미나 전문 셰프가 있을 법했다.그렇게 바쁜 사람이 시간을 내 직접 요리를 한다는 사실이 의외였다.한 가정에서 부모의 일상은 결국 아이에게 스며들었다. 말보다 태도가 더 오래 남는다는 걸 강지연은 알고 있었다.강지연의 부모를 보며 자란 강태하가 그랬듯 장시범 부모의 분위기 속에서 이런 아이가 자라난 것도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두 사람 모두 무용을 하는 사람들이라 식사는 대체로 단출했다. 어젯밤이 오히려 사치에 가까웠다.아침을 간단히 먹고 장시범은 그녀와 함께 한의원에 가자고 했다. 밤사이 눈은 멎었지만 기온은 뚝 떨어져 있었다.강지연은 꽁꽁 싸매고 현관을 나섰다가 통째로 얼어붙은 앞마당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선배, 잠깐만요. 미끄러워요. 제가 갈게요.”막 샤워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고 나온 장시범은 강지연이 밖으로 나오자 깜짝 놀라며 담장을 넘어 뛰어왔다.그가 팔을 잡아 주었지만 바닥은 생각보다 더 미끄러웠다. 강지연이 두 걸음도 채 떼지 못하고 휘청이자 장시범까지 함께 넘어질 뻔했다.장시범은 재빨리 강지연을 끌어안았고 두 사람은 간신히 균형을 잡았다.“선배, 안 되겠어요. 제가 업을게요. 괜찮죠?”마당이 있는 집이긴 했지만 차가 들어올 만큼 넓지는 않았기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강지연은 장시범의 눈을 빤히 바라봤다. 그 눈에는 오로지 강지연의 안전을 바라는 진심만이 담겨 있었다.“그래.”강지연이 손을 내밀었다.사실 두 사람은 이미 여러 번 몸을 맞댄 적이 있었다. 파트너로 춤을 추며 수없이 들어 올리고 안고 기대어 봤다. 그때는 아무 의미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등은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그의 마음이 어떻든 두 사람 사이가 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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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58화

강지연은 온하준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장시범은 곧장 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고 타이어가 눈을 밟으며 물을 튀겼다. 차는 서서히 온하준의 시야에서 멀어졌다.눈밭에 홀로 남은 온하준은 옷자락에 번진 젖은 자국을 내려다봤다. 닦을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점처럼 작아지는 차를 끝까지 바라보고만 있었다.머릿속을 채운 생각은 오로지 강지연과 장시범뿐이었다.‘결국 두 사람 사귀는 건가? 강지연이 정말 장시범과 사귀는 거야? 이른 아침에 한 집에서 나왔다는 건 벌써 동거라도 하는 건가. 그렇다면 이미...’가슴 안쪽이 갑자기 저릿해지며 목구멍으로 시큰한 신물이 치밀어 오르는 것 같았다.온하준은 남편으로서 강지연과 오 년을 함께 살았지만 그녀를 제대로 품어 본 적조차 없었다는 사실이 그제야 또렷하게 다가왔다.장시범은 빠른 속도로 차를 몰아 한의원에 도착했다. 차를 세우고도 한동안 입을 굳게 다물고 있던 그는 마치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른 사람처럼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선배, 미안해요.”강지연은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뭐가?”장시범은 투덜거리듯 말했다.“온하준이 선배한테 오는 게 싫었고 선배가 그놈한테 대꾸하는 것도 싫었어요. 그래서 그냥 차를 몰고 떠난 거예요.”그제야 강지연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괜찮아. 나도 말하고 싶지 않았어.”“진짜요?”장시범이 눈을 반짝이며 묻자 강지연은 제법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당연히 진짜지. 내가 미련이 남아 있었다면 애초에 이혼을 안 했겠지.”“선배, 가요. 재활하러.”장시범은 갑자기 활기를 되찾은 듯 차에서 내려 그녀의 문을 열어 주었다. 한의원 앞길은 눈이 말끔히 치워져 있었고 염화칼슘까지 뿌려져 있어 미끄럽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팔을 붙잡고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눈 때문인지 환자는 평소보다 적었고 로버트도 보이지 않았다.그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빠지지 않았고 치료받지 않는 날에도 한 시간쯤 들러 수다를 떨다 가곤 했다.순간 강지연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곳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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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59화

온하준은 장시범의 앞마당에 세워진 눈사람을 바라보며 강지연에게도 하나쯤은 만들어 주고 싶었다. 이제 강지연이 자신을 아무 사이도 아닌 사람으로 여긴다 해도 상관없었다.그는 멀찍이 떨어진 채 그녀의 반응을 기다렸다. 눈사람을 보고 잠깐이라도 기뻐하지 않을까, 카드를 읽고 잠시 멈추지 않을까, 아주 사소한 놀람이라도 보이지 않을까.그러나 강지연은 아무렇지 않게 카드를 빼내 쓰레기통에 던졌고 장시범은 주저 없이 눈사람에 뜨거운 물을 끼얹기 시작했다. 한 통으로도 모자라 두 통, 세 통.‘뭐야? 왜 저러는 거야.’눈사람의 머리가 서서히 녹아내리는 모습을 보던 온하준은 끝내 참지 못하고 차에서 내려 달려갔다.“장시범! 너 지금 뭐 하는 거야?”아침에 튄 진흙이 아직 마르지 않은 코트 자락, 눈을 굴리다 젖은 어깨. 이미 그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장시범은 비웃듯 대꾸했다.“보면 몰라? 눈 때문에 미끄러우니까 쓰레기 치우는 거잖아. 지연이 다칠까 봐.”장시범은 단 한 번도 강지연의 이름을 부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전남편 앞에서만큼은 기세를 낮추고 싶지 않았다.그의 예상대로 그 한마디는 온하준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뭐가 쓰레기라는 거야? 눈사람이 어떻게 쓰레기야. 이건 내가 강지연에게 주는 겨울 선물이라고.”“이게?”장시범은 다시 한번 뜨거운 물을 부었고 눈사람 위로 김이 피어올랐다.“그만둬!”온하준이 양동이를 빼앗으려 달려들었고 둘은 그대로 눈밭에서 엉겨 붙었다. 바닥이 얼어 있던 터라 균형 감각에서는 무용을 전공한 장시범이 우위였다.몇 차례 몸싸움 끝에 온하준은 중심을 잃고 넘어졌고 장시범은 그를 눌러 주먹을 휘둘렀다. 오래전부터 쌓여 있던 감정이었다.온하준도 가만히 맞고만 있지는 않았다. 뒤집으려 애썼지만 바닥이 너무 미끄러워 일어날 틈도 없이 계속 눌린 채 얻어맞았다.그 소리에 강지연이 문을 열고 나왔다. 장시범은 즉시 몸을 떼고 그녀 곁으로 물러섰다. 마치 보호자를 등에 업은 사람처럼 서서 온하준을 내려다봤다.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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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60화

강지연은 더 말하지 않고 단호한 얼굴로 등을 돌렸다.장시범이 온하준을 경멸하는 눈빛으로 노려보자 강지연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안 들어오고 뭐 해?”온하준은 눈 위에 그대로 주저앉은 채 닫히는 문을 멍하니 바라봤다.들어오라는 말은 언제나 자신을 향해 있던 말 아니었던가.“온하준, 집에 언제 들어와?”“온하준, 나 먼저 들어가 있을게.”“온하준, 집에 올 때 뭐 좀 사다 줄래?”“온하준, 들어오기 전에 연락해.”늘 자신을 부르던 그 말들을 이제 그녀는 다른 남자를 향해 하고 있었다.가슴을 움켜쥐는 통증이 밀려왔다. 보이지 않는 발톱이 심장을 할퀴고 지나가는 듯했다.‘아, 이런 게 심장이 아프다는 거구나. 강지연도 이랬을까? 이하나 때문에 매번 외면했을 때마다, 아무 말 없이 돌아섰던 밤마다. 미안해, 강지연. 정말 미안해.’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앉아 있던 온하준은 강지연의 집 안에서 빵 굽는 냄새가 흘러나오자 그제야 온몸이 젖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그가 만든 눈사람은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강지연은 늘 눈사람을 만들어 보고 싶어 했다.고등학생 시절, 눈이 오면 아이들은 운동장에서 눈을 던지며 웃고 장난쳤고 장난꾸러기들은 여자아이들 목덜미에 눈을 밀어 넣기도 했다.하지만 강지연은 언제나 창가에 앉아 조용히 눈을 바라봤다.친구들이 밖에 나가 놀자고 하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눈이 너무 적어. 해성에도 눈이 쌓이면 좋겠다. 눈사람 만들 수 있을 만큼.”그러나 해성의 눈은 늘 얇게 내려 금세 녹아버렸다.‘강지연, 우리는 결국 이렇게 큰 눈을 함께 맞이하게 됐네. 그런데 이제 내가 만든 눈사람은 필요 없겠구나.’집 안에서 퍼져 나오는 빵 냄새는 장시범이 만든 것이었다.강지연은 단단한 유럽식 빵보다 구름처럼 부드러운 식빵을 좋아했다.그렇게 자연스럽게 장시범은 강지연의 집에서 점심을 함께했고 오후에는 나란히 드라마를 봤다.강지연이 중간에 잠들자 그는 말없이 담요를 덮어주고 저녁을 준비했다.저녁에는 술을 마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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