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다섯 번째 결혼기념일에서: Chapter 461 - Chapter 4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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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61화

강지연은 그를 힐끗 보더니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안 탈 거야? 밖에서 얼어 죽을래?”“네?”장시범은 순간 말을 잃은 얼굴로 멀뚱히 서 있었다.“설마 진짜 혼자 여기서 성탄절을 보낼 생각은 아니었지?”강지연이 웃으며 눈을 흘겼다.“아니, 그게... 저는...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잠깐만요!”그는 제자리에서 몇 번이나 빙글빙글 돌더니 갑자기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소리쳤다.“선물! 잠깐만요, 선물 가져올게요!”사실 장시범은 성탄절이 되면 강지연이 가족들과 함께 명절을 보낼 거라고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그래서 속으로 수없이 상상했다. 혹시라도 함께 가자고 해준다면 무엇을 들고 가야 할지, 어떤 선물이 어울릴지.그런 마음으로 혹시나 해 미리 준비해 둔 것이었다.들뜬 얼굴로 집 안에 들어가 선물 상자를 들고나왔을 때 차 옆에는 이미 한 사람이 더 서 있었다.온하준.십여 일 동안 보이지 않더니 또다시 나타난 것이었다.‘설마 같이 가겠다는 건 아니겠지? 강시우가 허락할 리는 없을 텐데.’온하준은 강지연에게 줄 선물을 들고 있었다.그는 강지연이 혼자 성탄절을 보낼 리 없다는 것도, 강시우의 집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그래서 적어도 오늘, 성탄절 선물만큼은 전하고 싶었다.다만, 하필 이 자리에서 강시우를 마주하게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강지연.”강시우의 차가운 시선을 정면으로 받으며 그는 억지로 미소를 지은 채 손에 들고 있던 선물을 내밀었다.“메리 크리스마스.”강지연은 받지 않았다.“온하준, 이런 말 해도 될지 모르겠는데 좋은 전남편은 죽은 사람처럼 조용히 지내는 거야. 이렇게 불쑥 나타나는 게 아니라.”온하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나는 그냥 축복해 주고 싶어서...”“난 선물도 안 부족하고 축복도 안 부족해. 네가 안 나타나는 게 나한테는 제일 좋은 축복이야. 알겠어?”강지연이 미간을 찡그리며 말하자 온하준의 표정은 곧바로 가라앉았다.선물을 들고 있던 손도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온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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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62화

강시우는 담담하게 말했다.“망한 거나 다름없어. 반년 동안 온하준 회사는 거의 운영을 멈춘 상태였거든. 내년엔 더 버티기 힘들 거야.”김도진은 이미 돌아가 차를 팔고 있었고 온하준은 내년을 어떻게 버틸지 계산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김도윤과 이하나는 모두 형을 선고받았다. 김도윤이 더 무겁게 받았고 이하나는 임신 중이라는 이유로 그나마 적게 내려졌다.강지연의 부모 역시 학대 혐의로 갇혔다. 간접적으로만 얽혀 있던 강태하는 직접적인 학대 가담은 아니었지만 온하준의 지원이 끊기자 회사는 곧 버티지 못했고 여자 친구도 떠났다. 임신했다던 말 역시 전부 거짓이었다.“강태하가 전에 나를 찾아온 적 있어. 좀 이끌어 달라는 눈치였는데 안 만났어.”강시우가 조용히 덧붙였다.“지연아, 내가 너무 냉정해 보여?”강지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오빠는 오빠다운 선택을 한 거예요. 난 오빠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아요.”강시우는 작게 웃었다. 강지연의 눈에 그는 늘 좋은 오빠였지만 그녀가 모르는 면도 분명히 있었다.강시우는 굳이 장시범 몰래 이런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 유럽에서 그의 평판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사람을 잡아먹고 뼈도 뱉지 않는다느니, 핏줄도 가리지 않는다느니, 보이는 건 권력과 돈뿐이라는 말까지 돌았지만 오히려 귀국 후의 그는 눈에 띄게 순해진 상태였다.그가 정말 그런 사람인지 아닌지 강시우는 설명하지 않았다.장시범이 자신의 명성이 얼마나 나쁜지 알게 되는 것 또한 개의치 않았다.다만 평가 중 하나만큼은 사실이었다.그는 필요하다면 핏줄도 가리지 않는 사람이었다.그리고 동시에 자신이 품은 사람에게는 끝까지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기도 했다.강시우가 지금까지 강지연에게 말하지 않은 사실이 하나 있었다.그녀의 부모가 할머니를 어떻게 대했는지에 따라 자신 역시 그들을 가혹하게 대했다는 점이었다.혹여 강지연이 알게 되면 마음 아파할까 봐 숨겨 왔지만 모든 대가는 결국 치러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리고 그 뜻은 뒷좌석에 앉은 장시범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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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63화

하지만 마지막쯤에는 강희라가 주방에서 슬그머니 밀려 나왔고 잠시 뒤에는 강시우까지 방해된다며 쫓겨났다.“내가 거추장스럽대요.”강시우가 웃으며 말했다. 그는 장시범이 어디까지 해낼 수 있는지 은근히 보고 싶기도 했다.오후 시간이 거의 지나자 장시범은 정말로 한 상 가득 차려냈다. 디저트까지 포함해 양식과 한식을 모두 올려놓았고 심지어 육즙이 터지는 만두까지 직접 빚어냈다.강희라는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시범아, 혹시 요식업이라도 해?”장시범이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아니에요, 고모. 그냥 요리하는 게 좋아서요.”“이건 정말... 시우야, 내가 평생 이렇게 풍성한 저녁을 먹어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다.”강희라의 감탄에는 분명 과장이 섞여 있었지만 그만큼 그의 솜씨가 대단하다는 뜻이었다.“과찬이세요.”장시범은 귀까지 붉어진 채 연신 웃었다. ‘고모’라는 호칭도 너무나 자연스러웠다.그가 고모라고 부를 때마다 강지연은 슬쩍 그를 바라봤다. 장시범은 그 시선을 못 본 척했지만 귓불은 점점 더 붉어졌다.이 밤은 강지연이 오래도록 마음속에 그려 왔던 풍경이었다.어릴 적 텔레비전 광고 속 명절은 언제나 밝은 색이었다.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환하게 웃고, 따뜻한 조명이 번져 나오는 장면들.그 화면을 보며 그녀는 막연히 생각하곤 했다. 저 안의 온기가 내 것이었으면 좋겠다고.그러나 스무 해가 넘도록 그녀에게 그런 밤은 없었다.결혼 전, 할머니 집에서 지내던 시절에도 부모가 내려올 때마다 집안은 전쟁터가 되었다.특히 할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면 더했다. 고함과 욕설, 할머니를 향한 모진 말들, 그리고 자신을 향한 차가운 시선들.소리는 겹겹이 쌓여 귀가 먹먹해질 만큼 요란했고 그녀는 늘 어둠 속에서 화기애애한 남의 집안을 훔쳐보듯 바라보곤 했다.결혼하고 나서는 비로소 ‘우리 집’이 생겼다고 믿었다. 이제는 자신도 환한 조명 아래 웃으며 새해를 맞이할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하지만 지난 5년 동안 양력설도, 설도 다를 바 없었다.온하준은 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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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64화

다음 날 눈을 뜨자 강지연은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분명 어젯밤엔 할머니 품에 기대 잠들었는데 누가 옮겨 준 거지?’벽난로의 불빛과 창밖에 소리 없이 쌓이던 눈, 환하게 켜져 있던 조명과 식탁 가득 놓였던 음식들. 어제의 모든 장면이 아직도 피부 위에 남아 있는 듯했다.어릴 적 명절이면 텔레비전에서 늘 잊을 수 없는 밤이라는 노래가 흘러나왔다.그 노래를 들을 때마다 강지연은 잊을 수 없는 밤이란 대체 어떤 기분일지 궁금해하곤 했다.그런데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아름다운 밤이란 왠지 영원히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밤이었다. 조금만 더, 아주 조금만 더 이어지기를 바라게 되는 그런 밤.완전히 정신이 돌아와 몸을 일으켰을 때 침대 머리맡에 네 개의 선물 상자가 놓여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굳이 열어 보지 않아도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있었다. 할머니, 고모, 오빠, 그리고 장시범.고모와 오빠의 선물은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두 개의 상자 안에는 눈이 부실 만큼 화려한 보석 세트가 들어 있었다.누가 더 호화로운 걸 고르느냐를 두고 은근히 경쟁이라도 한 듯했다. 상자를 여는 순간 반짝임에 눈을 찡그릴 수밖에 없었다.의외였던 건 할머니의 선물이었다. 그것 역시 장신구였지만 홍순자가 직접 설계한 것이었다. 외국에 온 뒤 몇 달 동안 할머니는 이곳 생활에 적응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고모에게서 보석 디자인을 배우기 시작했다.모든 사람이 그렇듯 홍순자에게도 꿈은 있었다. 어릴 적에는 구슬을 꿰어 목에 거는 걸 즐겼고 아름다운 물건을 좋아했다.옆에서 강희라가 보석을 만지작거리며 디자인을 연구하는 모습을 보다 보니 자연스레 관심이 생겼다.나이가 많아 이제 시작하기엔 늦은 게 아닐지 걱정도 했지만 강지연은 자신도 다시 춤을 시작하려 애쓰고 있다며 나이가 무슨 상관이냐고 응원했다. 좋아하는 일을 하는 데 늦음은 없다고.그렇게 만들어진 첫 작품이 지금 그녀의 손 위에 놓인 브로치였다. 그 의미는 단 하나였다. 내가 할 수 있다면 너도 할 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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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65화

다행히 강지연도 선물을 준비해 왔다. 한의원 식구들에게 하나씩 건네자 모두 환하게 웃었다.진료실로 들어가 침을 맞으려는 순간 로버트는 산타 복장을 한 채 큰 목소리로 작별 인사를 건넸다. 텅 빈 빨간 자루를 들고 나가면서도 장시범을 향해 손을 흔들며 메리 크리스마스를 외쳤다.그 모습을 보며 강지연은 문득 어딘가 허전하다는 느낌이 들었다.늘 로버트 곁을 지키던 그 남자가 오늘은 보이지 않았다. 성탄절이라 쉬는 거라 여긴 채, 그녀는 그대로 진료실로 들어갔다.한의원 밖에는 평소처럼 차가 빼곡하지 않았다. 성탄이라 환자가 줄었지만 길가에는 여전히 몇 대의 차량이 듬성듬성 서 있었다.로버트는 그중 한 차량의 조수석에 올랐다. 운전석에는 한 남자가 앉아 있었고 그는 차갑게 굳은 얼굴로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로버트가 문을 닫아도 남자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로버트가 빙긋 웃었다.“그 애, 남자 친구랑 같이 왔더라. 잘생겼고 사람도 괜찮아 보이던데. 세심하게 챙길 줄도 알고. 넌 이제 희망 없겠다.”운전석의 남자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 반응을 보며 로버트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왜 화를 내고 그래. 화내 봐야 소용없다.”남자가 인상을 굳히며 말했다.“자랑스러우세요?”“자랑스러울 게 뭐가 있어?”로버트는 코웃음을 쳤다.“내 아들이라는 놈이 날 자랑스럽게 만든 적이 있나?”“아버지로서 뭘 하신 건 있으시고요?”남자의 목소리가 분노를 눌러 담은 채 낮게 떨렸다.“당연히 했지.”로버트는 태연하게 웃었다.“내 유전자를 물려줬잖니. 그때 네가 나를 어떻게 욕했는지 기억은 나냐? 이제 그 욕, 너 자신한테 돌려라.”남자가 잠시 멈칫했다.“아들아.”로버트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넌 결국 내 길을 따라가고 있다. 또 다른 내가 되어 가고 있어.”운전대를 쥔 남자의 손등에 핏줄이 도드라졌다.“그렇게까지 원망할 필요는 없다.”로버트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내 피를 닮았다고 내가 기쁜 건 아니다. 적어도 네가 나와 같은 끝을 맺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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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66화

강지연은 재활 치료를 마친 후 차가운 공기를 맞으며 한의원 문을 나섰다.눈이 쌓인 길은 본래도 불편한 그녀에게 더 가혹했다. 오늘은 재활 강도가 평소보다 높았고 다리에 힘이 빠져 있어 몇 걸음 남겨둔 차까지 가는 것이 힘겹게 느껴졌다.그때, 주차된 차 뒤편에서 지켜보던 남자가 핸들을 세게 내리쳤다.“사람 하나 제대로 못 붙잡아?”그의 말이 끝나자 장시범은 재빨리 그녀를 끌어안았다. 강지연은 본능적으로 그의 옷깃을 움켜쥐었다.두 사람은 눈발이 흩날리는 겨울 공기 속에서 마주 서서 서로의 숨결이 하얗게 피어오르는 것을 바라봤다.재활 후 홍조를 띤 강지연의 얼굴, 코끝에 내려앉은 눈송이를 닦으려는 찰나 장시범의 얼굴이 가까워졌다.따뜻한 감촉이 코끝을 스쳤다. 차가운 눈송이는 그 입술의 온기에 녹아 물방울이 되어 떨어졌다.“선배, 죄송해요.”장시범은 그녀를 더 꼭 끌어안으며 속삭였다.“실례였지만... 저, 정말 선배를 좋아해요.”강지연의 뺨은 그의 캐시미어 스웨터에 닿아 있었고 그 부드러움은 기분 좋게 따뜻했다.눈이 내리는 한겨울인데도 이상하게 추위가 느껴지지 않았다.“화나셨으면 화를 내셔도 되고 때리셔도 됩니다.”그의 목소리는 애처로웠다. 강지연은 그의 스웨터 자락을 잡아당기며 말했다.“젊은 사람이 외투 지퍼도 안 잠그고 다니면 어떡해. 찬바람 다 들어가잖아. 나중에 나이 들면 관절 아파.”홍순자가 장시범과 강시우를 볼 때마다 했던 말이었다.장시범은 잠시 멍하니 그녀를 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화난 게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그의 가슴은 벅차올랐다.“추워. 빨리 차 타.”강지연이 눈을 흘기며 재촉했다.“알겠어요!”장시범은 말만 할 뿐 여전히 강지연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하지만 너무 추웠기에 어쩔 수 없었다. 비록 지금 그의 몸은 불덩이 같아 추위를 전혀 느끼지 못했지만 강지연이 추위에 떨까 봐서 걱정이었다.이렇게 계속 그녀를 꼭 안고 영원히 놓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놓아주며 재빨리 다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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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67화

“그 입 좀 다물죠. 안 그러면 밖에 내다 버릴 테니까.”그는 분노에 찬 얼굴로 돌아보며 쏘아붙였다. 로버트는 눈썹을 슬쩍 치켜올렸다.“마음대로 해라. 죽고 나면 어디에 버리든 그게 무슨 상관이겠냐. 살아 있는 날도 내 마음대로 못 사는데 죽은 뒤야 더 말할 것도 없지.”장시범은 들뜬 마음을 숨기지 못한 채 핸들을 잡고 있었다. 공원 쪽 길로 접어들면 집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차를 세웠다.“선배, 저 시우 형한테 전화 좀 해도 될까요?”“오빠한테 전화를 왜 해?”강지연은 고개를 돌려 장시범을 바라봤다.‘얘 은근히 계산이 빠르네. 게다가 매번 강아지처럼 불쌍한 눈을 하니까 나도 모르게 자꾸 봐주게 되잖아.’“한 달 전에 예약해 둔 식당이 있어요. 성탄절에 선배랑 함께 갈 기회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요.”그 특유의 애처로운 눈빛이 또다시 등장했다. 강지연이 노려보자 그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녀의 손끝을 잡았다.“선배...”“전화해. 오빠가 안 혼내면 뭐...”강지연은 정말로 장시범의 눈빛에 안 된다고 말하기 어려웠다.그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장시범은 진지한 얼굴로 통화를 걸었다. 반대편에서 강시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밖에 가게들 다 문 닫았는데 뭘 하겠다는 거지?”“형, 몇 군데는 여는 곳도 있어요.”장시범이 낮게 답했다.“지연이 바꿔.”전화를 건네받기 전, 그는 간절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강지연은 웃음을 참고 전화를 받았다.“네, 오빠.”“너도 그 녀석이랑 나가고 싶어?”직설적인 질문이었다.“저는 사실 그렇게...”강지연은 천천히 말을 끌며 옆에 있는 장시범을 힐끗 봤다.장시범의 눈이 동그랗게 커지더니 곧바로 세상이 무너진 표정을 지어 보였다.“선배...”강지연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그렇게 거절하고 싶진 않아요.”순간 장시범은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이 들었다. 하늘 끝까지 올라갔다가 바닥까지 떨어졌다가, 다시 솟구쳤다. 심장병이 없는 게 다행일 정도였다.수화기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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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68화

음악의 박자가 느려지자 사람들의 발걸음도 차츰 가라앉았다.조금 전까지 어깨가 부딪힐 만큼 빽빽하게 모여 춤추던 무리는 자연스레 흩어졌고 어느새 강지연과 장시범의 주변에는 공간이 생겨났다.밴드가 연주하는 곡은 애절한 사랑 노래였다. 마음속에 각자의 비밀을 품은 두 사람은 그런 분위기 속에서 주변을 살필 겨를조차 없었다.둘 다 춤에 미친 사람들이었고 선율이 흐르자 무의식처럼 민속무용의 2인 동작이 이어졌다. 한 번 몸을 움직이기 시작하자 멈출 수 없었다.주변이 텅 비어도 상관없었고 모든 사람이 자리에 돌아가 그들을 바라보고 있어도 상관없었다. 지금은 그저 춤추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반년 가까이 이어진 재활 덕에 강지연의 몸은 예전과는 또 다른 탄력을 되찾았다. 예전에는 적당히 넘기던 동작들이 이제는 팔십 퍼센트 이상 완성되었고 특히 리프트 동작은 놀라울 만큼 안정적이었다.장시범은 그녀의 아름다움을 한 치도 놓치고 싶지 않은 듯 유난히 많은 리프트를 배치했다.오늘 강지연은 패딩 안에 붉은 모직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회전할 때마다 넓은 치맛자락이 꽃처럼 부풀어 올랐고 그 장면에 식사하던 손님들마저 하나둘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곡이 끝나자 박수가 쏟아졌다. 그제야 강지연은 무대에는 자신과 장시범 둘뿐이었고 나머지 모두가 관객이 되어 두 사람의 춤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호텔 소속 무용수들조차 박수를 보냈고 손님들은 저마다 엄지를 치켜세웠다.몇몇 소녀가 달려와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 이런 춤은 뭐라고 부르는지 물었다.강지연과 장시범은 거의 동시에 대답했다.“저희는 현국에서 왔고, 이건 민속무용이에요.”“정말 멋져요.”한 꼬마 소녀가 반짝이는 눈으로 강지연을 바라봤다.“언니는 요정이에요?”강지연은 빙긋 웃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요정은 아니고 그냥 평범한 무용 전공생이야.”“정말요? 얼마나 배웠어요? 얼마나 배우면 이렇게 날 수 있어요?”강지연은 잠시 생각하다 답했다.“이십 년 넘게 배웠어.”꼬마 소녀는 눈을 휘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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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69화

온하준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두 사람이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함께 춤출 때 얼마나 자연스러운지, 화면 속에서 서로를 얼마나 완벽하게 받쳐 주고 있는지.그가 가장 견디기 힘든 건 강지연은 다시 춤출 수 있게 되었지만 그 꿈을 현실로 만든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그 사실이 그의 가슴을 가장 깊게 찔렀다.그는 분명 누구보다 그녀가 무대로 돌아가길 바랐고 분명 온 힘을 다해 그녀를 가장 높은 곳에 올려놓고 싶었다.오 년, 천팔백 일이 넘는 시간 동안 그는 수없이 말했다.“강지연, 나는 누구보다 네가 잘되길 바라.”그 말은 그녀에게도, 스스로에게도 되뇌는 주문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결국 그는 가장 잘못된 방식을 택했다.좋은 집과 좋은 옷, 부족함 없는 생활을 주면 그것이 곧 ‘잘 사는 것’이라고 믿었다.그녀를 지켜 주고 있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강지연이 애완동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녀 역시 자신만의 하늘이 있고 그 하늘로 날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이제 마침내 그녀를 떠받쳐 줄 사람이 나타났다.화면 속의 강지연은 눈부셨다.열여섯 살, 전교생 앞에서 공중제비를 돌며 단체 사진 속으로 뛰어들던 그날처럼.그때 그 순간, 모두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았다는 걸 정작 그녀 자신은 몰랐을지도 모른다.그녀는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 있었다. 온하준은 그 영상을 밤새도록 반복해 보았다.한 번으로는 모자라 다시 보고, 또다시 보았다.댓글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읽었다. 사람들은 그녀를 칭찬하고 있었다.그 문장들을 읽을수록 그의 가슴 한쪽에서 설명하기 어려운 자부심이 차올랐다.‘그래. 이게 내가 아는 강지연이지. 이게 내가 알던 사람이야. 원래 이렇게 빛나던 사람이고 누구에게나 사랑받을 자격이 있었어.’그때 손에 쥔 휴대전화가 갑자기 낚아채듯 사라졌다.“돌려줘요!”“몇 시인지나 봐라. 다섯 시간째 휴대전화만 붙들고 있네. 오늘이 무슨 날인지는 알아? 최소한 아버지한테 메리 크리스마스 한마디는 해야지. 그래야 내가 돈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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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70화

온하준은 냉소를 띤 채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오래 쌓인 날이 서 있었다.“당신은 후회한 게 아니라 그냥 초라해진 거잖아요. 옆에 아무도 없이 혼자 남고 나니까 그제야 엄마 생각이 난 거겠지.”로버트는 조금도 기분 상한 기색 없이 느긋하게 웃었다.“그러는 넌?”그가 천천히 되물었다.“넌 왜 이제 와서 그 아가씨 생각하는 건데?”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온하준은 정수리를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머릿속이 울렸고 심장이 조여와 숨이 꽉 막혀왔다.“아무것도 모르면서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그는 이를 악물었다.“난 당신이랑 다르다고요.”“뭐가 다른데?”로버트의 목소리는 여전히 여유로웠다.“이렇게 뻔한 실패 사례가 바로 눈앞에 있었는데도 아무 교훈도 못 얻은 네가 도대체 어디가 다르다는 거지?”“달라요. 다르다고요!”온하준은 더 이상 그의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나를 평가합니까?”분노를 쏟아내듯 말을 던진 그는 그대로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몸을 던졌다. 그리고 습관처럼 휴대전화를 들어 올려 다시 영상을 틀었다.춤추는 그녀의 모습이 화면 가득 펼쳐졌다. 한동안은 또렷하게 보이던 화면이 어느 순간부터 흐릿해졌다. 눈물이 언제부터인지 얼굴을 가득 적시고 있었다.그날 밤, 온하준은 수없이 많은 꿈을 꾸었고 그 꿈속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청춘이 한창이던 시절의 얼굴들이었다. 삐딱함과 뜨거운 열정이 함께 공존하던 날들.모든 감정이 직접적이었고 모든 선택이 격렬하던 시간.꿈에서 그는 라호성을 만났다.라호성은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다. 수업 시간만 되면 강지연을 스케치했고 그걸 발견한 온하준은 그의 그림을 찢어버렸다. 그날 둘은 치고받고 싸웠고 그 이후로 원수가 되었다. 그 앙금은 지금까지도 풀리지 않았다.그리고 차유준도 나타났다.꿈속에서 그들은 운동장에서 농구 경기를 하고 있었고 강지연은 응원석의 가장 눈에 띄지 않는 자리에 서서 조용히 경기를 보고 있었다. 경기가 끝나면 언제나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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