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다섯 번째 결혼기념일에서: Chapter 471 - Chapter 4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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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71화

의식을 잃은 로버트가 흑인 할머니의 물음에 답할 수 있을 리 없었다.의료진이 들것을 들어 올려 구급차에 싣자 온하준은 아무 말 없이 그 뒤를 따랐다. 흑인 할머니는 연신 ‘세상에’를 중얼거리다 사이렌 소리가 멀어지자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응급 처치를 마치고 중환자실로 옮겨질 때까지 하루가 통째로 흘러갔다.해가 완전히 진 뒤에야 온하준은 병원을 나섰다. 담당 의사는 상황이 좋지 않다며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말을 남겼다.준비라니. 그에게 준비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아버지는 생전에 이미 모든 것을 정리해 두었다. 그를 이곳으로 부른 이유도 어쩌면 단 하나였을 것이다.온태웅, 또 다른 이름 로버트. 이 세상에 한 번 왔다가 떠났다는 사실을 아들인 자신만이라도 알아 달라는 것.온하준은 오래전에 이 사람을 아버지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말했었다.다만 그가 죽는 날에는 와서 마지막을 보겠다고 했다. 그것이 원망으로만 이어졌던 부자 인연을 끝내는 방식이라고 생각했다.그날 밤, 그는 아버지의 집에서 빵을 몇 입 베어 물었다. 목이 막혀 물로 억지로 넘기다 결국 더는 먹지 못했다.난방은 충분히 돌아가고 있었지만 집 안은 이상하리만치 음산하고 차가웠다.다음 날, 면회 시간이 되기도 전에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환자분이 돌아가셨습니다.”온하준은 슬프지 않았다. 여기 머문 이유가 바로 그날을 기다리기 위해서였으니까.다만 예상했던 것보다 너무 빨리 와 버렸다는 생각이 스쳤다.장례는 간소하게 치러졌다. 추모식도 없이 곧바로 화장했고 묘비에는 이름조차 새기지 않았다.그저 생전 그의 뜻대로 단 한 줄만 남겼다.[영혼이 없었던 한 사람.]이튿날, 아버지의 위임을 받은 변호사가 찾아와 유언장과 자필 편지 한 통을 건넸다.[하준아, 내 아들아. 네가 이 호칭을 가장 싫어한다는 걸 안다. 그래도 네 아버지 고집은 네가 더 잘 알 거 아니냐. 그러니 마지막으로 한 번만, 그렇게 부르게 해다오. 나는 실패한 인생을 살았다. 그런 내가 네가 며칠이라도 곁에 있어 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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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72화

온하준은 어느 날 갑자기 자취를 감췄다.성탄절이 지나고 새해가 오고 설이 다가오기까지 그는 강지연 앞에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강지연은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그를 떠올리는 일도 거의 없었다.처음으로 온전히 누리는 명절과 가족의 단란함 그리고 장시범으로 인해 하루하루가 빈틈없이 채워지고 있었기 때문이다.행복이라는 감정은 생각보다 부지런해서 과거를 돌아볼 틈을 쉽게 내주지 않았다.굳이 이 평온한 날들 속에서 작은 아쉬움을 꼽자면 한의원에서 들은 소식 하나뿐이었다.흑인 할머니의 말에 따르면 로버트가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내가 직접 봤어. 그 아들이 구급차에 태워 병원으로 데려갔는데 그 뒤로는 다시 안 돌아왔지.”항상 흥겨운 목소리로 ‘춤추는 아가씨’라고 불러주던 그 음성을 이제는 두 번 다시 들을 수 없게 되었다.한의원이라는 공간은 환자들 사이에 묘한 동질감을 만들어낸다.누군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은 사람들을 잠시 멈춰 세우지만 그 감정은 오래 머물지 못한다.누군가는 흘려보내고 누군가는 잠깐 안타까워하다가 이내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간다.그리고 사람들은 곧 다른 것을 궁금해하기 시작했다.로버트에게 아들이 있었는지, 아들은 어떤 사람인지, 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지.흑인 할머니도 자세히는 몰랐지만 그날 보았던 인물을 떠올리며 말했다.“현국인이었는데 꽤 잘생겼더라. 집이 저 앞쪽 골목이라던데 아마 그 아들이 거기 사는 모양이야. 어쩌면 나중에 마주칠지도 모르지.”인생이란 아무리 격렬하고 화려하든 혹은 평범하고 담담하든 결국 바람에 실려 사라지는 것일 뿐이다.로버트 역시 처음 며칠은 환자들 사이에서 오르내리다가 시간이 지나며 서서히 잊혀 갔다.그가 남긴 이야기들도, 아들이 있었다는 사실도, 어쩌면 이 근처 어딘가에 살지도 모른다는 가능성도 마찬가지였다.설을 앞두고 강지연의 메일함에 세 통의 메일이 도착했다.해성의 모교인 고등학교, 진경에 있는 무용대학 그리고 국내의 한 어린이 장애인 재단에서 온 감사 편지였다.모두 그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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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73화

강지연은 이제 온하준의 돈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다만 영문도 모른 채 자신의 이름으로 들어간 세 건의 거액 기부만큼은 모른 척 넘길 수 없는 일이었다.그녀는 온하준을 차단 목록에서 풀어 연락을 시도했지만 신호음조차 울리지 않았다.온하준이 먼저 그녀를 삭제한 것이다.자신의 이름으로 거액을 기부해 놓고 정작 그녀는 삶에서 지워 버린 셈이었다.온하준의 인스타그램 프로필을 눌러 보니 사진 대신 AI로 만든 만화 이미지가 떠 있었다.두 손이 나비 한 마리를 조심스럽게 받쳐 들고 있는 그림이었다.그 아래에는 짧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모든 복이 그녀에게 닿기를.]강지연은 한동안 그 문장을 바라보다가 화면을 껐다.문득 안지유가 떠올랐다. 안지유는 이미 아이를 낳았고 요즘은 인스타그램에 아이 사진이 가득했다.얼마 전 강지연은 안지유에게 축의금을 보내기도 했다.시차를 계산해 보니 지금쯤이면 깨어 있을 시간이었다.강지연은 가볍게 안부 메시지를 보냈고 안지유는 금세 답장했다.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근황을 나누다 회사 이야기로 넘어갔다.[회사는 이미 매각됐어요. 한동안 김도진이 인수인계랑 정산 때문에 바빴는데 지금은 다 끝났어요. 그런데 온하준은 한 푼도 안 가져갔어요. 자기 몫은 전부 포기했어요. 지분 비율대로 나누다 보니 김도진이 제일 많이 받게 됐죠.]그렇다면 기부금은 어디서 난 돈일까.강지연은 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온하준은 이미 그녀를 지웠고 두 사람은 이제 완전히 남남이었다. 강지연이 늘 원했던 결말이었다.다만 자신의 이름으로 들어간 세 건의 기부는 마음 한구석을 묵직하게 눌렀다.그래도 그것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나름 괜찮은 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뭐 보고 있어요?”장시범의 목소리가 들렸다.“이제 집 가서 밥 먹어야죠.”그는 이제 자연스럽게 고모 집을 ‘집’이라고 불렀다.강지연이 채팅창을 닫는 순간, 장시범은 무심코 화면을 힐끗 보다가 안지유와의 대화창에 적힌 ‘온하준’이라는 이름을 보았다.장시범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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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74화

강희라가 웃으며 말했다.“어린 여자애가 이렇게 멀리 와 있으면 집이 그리운 게 당연하지.”저녁을 먹고 난 뒤, 강지연은 거실에서 할머니가 캐시미어 스웨터를 뜨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이곳에 온 뒤 할머니는 보석 디자인과 재단에 푹 빠졌고 고모의 부추김까지 더해지자 손이 쉴 틈이 없었다.날씨가 쌀쌀해지기 시작하자 손뜨개 캐시미어에도 마음을 빼앗겼다.이미 강지연과 강희라, 강시우에게 한 벌씩 떠 주었고 지금 손에 들린 건 색감부터 남성용처럼 보였다.장시범은 그 곁에 바짝 붙어 앉아 기대에 찬 눈으로 물었다.“할머니, 이거 혹시 보비 거 아니죠?”조심스럽고도 불쌍한 표정이었다. 보비는 고모가 기르는 작은 강아지였다.장시범의 말에 할머니가 웃음을 터뜨렸다.“글쎄, 네 생각은 어때?”장시범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시 고민하더니 슬쩍 말을 돌렸다.“그럼 보비 거 하나 뜨고 나면 저는 장갑 하나만 떠주시면 안 돼요?”스웨터는 감히 입에 올리지도 못하고 희망 사항을 장갑으로 낮춘 셈이었다.홍순자는 더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이건 네 거야.”“정말요? 감사합니다, 할머니!”그의 기쁨이 고스란히 얼굴에 번졌다.명품으로 치장해도 부족함 없는 집안의 아들이 이곳에서는 손뜨개 스웨터 한 벌을 두고 강아지와 경쟁하고 있었다.강지연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마음 한쪽이 천천히, 차분하게 내려앉았다.장시범은 자신의 스웨터가 완성되는 과정을 놓칠 수 없다는 듯 할머니 곁을 떠나지 않았다.그 덕분에 돌아갈 시간이 훌쩍 늦어졌고 결국 그날은 고모 집에서 묵게 되었다.이 집에는 이미 장시범의 방이 있었다.성탄절 이후로 종종 함께 묵다 보니 그의 옷과 세면도구, 심지어 책까지 하나둘 자리를 잡았다.어느새 그는 이 집 안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었다.강지연의 방은 2층, 장시범의 방은 3층이었다.잠자리에 들 시간이 되자 그는 2층 복도에서 괜히 서성거렸다.학교 근처 집에 있을 때도 그랬다. 가끔 강지연의 집에서 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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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75화

“사라졌다는 건 또 무슨 말이야? 스스로 잠적한 거야, 아니면 무슨 일이라도 난 거야?”안지유의 질문에 김도진은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스스로 사라졌어. 오늘 연락해 보니까 번호도 바뀌어 있었고 인스타도 다 차단돼서 연락이 안 돼.”안지유는 괜히 마음이 불편해졌다. 설명하기 힘든 위화감 같은 것이 가슴 언저리에 걸렸다.“이민 간 건 아니야?”김도진은 고개를 저었다.“모르겠어. 그런데 어디로 가든 하준이한테는 이제 아무것도 없잖아. 도대체 어떻게 살려고 그러는 건지...”안지유는 잠시 생각하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아버지 있는 곳으로 갔다고 하지 않았어? 아버지 돌아가셨으면 뭔가 남겼을 수도 있잖아. 그게 아니면 회삿돈을 왜 하나도 안 가진 건데?”그 말에 김도진의 눈이 더 붉어졌다.“그 돈도 전부 기부했어. 아버지가 남긴 돈도, 회사 정리하면서 나온 돈도 한 푼도 안 남겼대. 예전에 번 돈은 이혼할 때 전부 강지연한테 줬잖아. 지금 진짜 빈털터리야.”그는 숨을 고르듯 잠시 말을 멈췄다가 낮게 덧붙였다.“내가 무서운 건 걔가 마지막으로 나한테 한 말이 꼭 작별 인사 같았거든.”“뭐라고 했는데?”김도진은 눈가를 손등으로 훔쳤다.“김도진, 앞으로는 잘 살아라. 무슨 일 있으면 안지유랑 먼저 상의해라. 걔가 너보다 이성적이다. 차 파는 것도 괜찮다. 무리하지 말고 투자하지 말고 가진 돈 잘 지켜라. 애 잘 키우면 이번 생은 그걸로 충분하다. 그렇게 말했어.”안지유는 그 말을 듣고 잠시 말을 잃었다. 그러다 문득 강지연의 얼굴이 스쳤다.“그러면 진짜...”말끝을 흐리며 안지유는 조심스럽게 덧붙였다.“아, 아까 강지연이 회사 얘기하면서 걔 얘기도 했어. 혹시 온하준이 다시...”말하다 멈췄다. 아니, 차라리 그러지 않기를 바랐다.‘온하준, 제발 강지연은 인제 그만 놔줘.’하지만 김도진은 이미 자기 생각에 깊이 빠져 있었다.“아무리 그래도 나를 차단할 필요는 없잖아. 나한테 화난 것도 아니면서. 나 걱정해 주던 놈이야.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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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76화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흘러갔다.설이 지나고 얼마 되지 않아 장시범은 입학 통지서를 받았다. 강지연의 뒤를 이어 대학원에 진학하게 된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석사는 1년 과정이었고 이번 학기가 끝나면 강지연은 졸업이었다.그는 내내 불안해했다.그날 밤, 장시범은 일부러 근사한 저녁상을 차려 놓고도 몇 번이나 말을 꺼내려다 삼켰다.강지연은 이미 그걸 눈치채고 있었다. 합격 통지를 받은 건 분명 축하할 일이었는데 그는 괜히 격식을 차리고 긴장한 얼굴이었다.심지어 여동생까지 밖으로 내보냈다. 용돈을 쥐여 주며 친구들이랑 나가 먹으라 한 것이다.강지연은 턱을 괴고 그를 바라보다가 웃으며 말했다.“장시범, 이렇게 좋은 날에 왜 그렇게 시무룩해 하고 있어? 축하한다고 돈봉투라도 준비할 걸 그랬나?”장시범의 귀가 금세 붉어졌다.“아니에요.”식탁 위에는 정성스럽게 차린 음식들이 놓여 있었다. 그녀가 한 건 버터 쿠키 한 접시뿐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오븐 문을 한 번 열어 준 게 전부였고 나머지는 전부 장시범의 손길이었다.“석사 합격 기념으로 쿠키 한 개 보너스.”강지연이 쿠키를 집어 그의 입에 가져다 대자 그는 순순히 받아먹었다. 그런데도 시선은 여전히 불안한 강아지처럼 그녀를 붙잡고 있었다.그 모습에 강지연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자, 내가 보너스 줬으니까 너는 나한테 뭐 줄 거야?”장시범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듯 눈을 깜박였다. 강지연이 장난스럽게 말을 이었다.“나 박사 계속할 거야. 그럼 넌 나한테 무슨 보상할 건데?”순간 그의 눈이 환하게 빛났다.“진짜요? 선배!”그는 숨을 고르지도 못한 채 말했다.“저 사실 그게 제일 걱정이었어요.”장시범은 식탁을 돌아 그녀에게 다가와 그대로 강지연을 안고 빙글빙글 돌았다. 한참 뒤에야 그녀를 내려놓고 다시 꼭 끌어안았다.“선배, 진짜 기뻐요. 선배 미래에 저도 있는 거죠?”강지연은 그의 허리를 감싸안으며 조용히 말했다.“장시범, 앞으로는 말하고 싶은 거 있으면 그냥 말해. 혼자 끙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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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77화

그녀는 몇 번이나 고개를 돌려 사방을 둘러봤지만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결국 강지연은 그저 기분 탓일지도 모른다고 자신을 스스로 설득했다.어느 주말이었다. 그녀는 평소처럼 먼저 한의원에 들러 재활 치료를 받았다.어느새 재활도 거의 일 년 가까이 이어지고 있었다. 뼈를 다친 것이 아니었기에 회복은 분명했다.이제는 예전처럼 최고 난도의 동작을 소화할 수는 없어도 평소 걸음걸이에서는 거의 티가 나지 않았다. 고난도 동작만 피한다면 춤도 충분히 가능했다.그날도 장시범이 함께였다. 한의원 안은 이미 익숙한 얼굴들로 가득 차 있었다.강시우가 높은 연봉으로 모셔 온 첫 의료진들은 적응이 어렵다면 언제던 계약을 해지해도 된다는 조건이었지만 모두 잘 지내고 있었다. 오히려 재계약 이야기가 오가는 중이었다.문을 열고 들어서자 대기실 큰 테이블 위에 디저트가 놓여 있었다.요즘 한의원에는 늘 간식이 준비돼 있었다. 작은 쿠키와 미니 케이크, 크루아상과 호박빵까지.강지연은 그동안 간호사들이 취미 삼아 빵을 만들어 나눠 주는 줄로만 알았다. 맛도 꽤 괜찮았다.오늘 접시 위에는 파인애플 쿠키가 놓여 있었다.그걸 유독 좋아하던 강지연은 무심코 연속으로 몇 개를 집어 먹었다.재활을 마치고 오후에는 학교 연습실로 향했다. 온 오후를 춤 연습에 쏟아부은 뒤, 학생들은 옷을 갈아입고 나오며 각자 봉지를 꺼내 들었다.그 안에도 파인애플 쿠키가 들어 있었다.“이 파인애플 쿠키...”강지연은 포장지를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한의원에서 먹었던 것과 너무도 비슷했다.학생들은 그녀가 단 걸 지적하는 줄 알고 황급히 쿠키를 숨겼다.“선생님, 한 개만 먹을게요. 진짜 많이 안 먹어요.”강지연은 학부 조교로 들어가 있었기에 학생들은 그녀를 선생님이라고 불렀다.“그런 뜻 아니야.”그녀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이거 어디서 산 거야?”학생 하나가 재빨리 쿠키를 하나 내밀며 말했다.“샀어요. 선생님도 하나 드셔 보세요. 진짜 맛있어요.”“어디서 샀는데?”강지연이 포장을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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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78화

“남자 친구분 정말 멋지네요.”강지연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여자 친구가 동화 같은 분위기를 좋아한다고 가게 하나를 통째로 동화처럼 꾸며 주다니 그 정성이 귀엽게 느껴졌다.“가게에 있는 건 다 직접 만드신 거예요?”금발 소녀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거의 다 남자 친구가 만들어요. 저는 그냥 판매 담당이고요.”“정말 대단하네요.”강지연은 진심으로 감탄했다.“여기 현국식 과자도 많던데요. 어떻게 할 줄 아는 거예요?”금발 여자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네. 남자 친구가 현국 사람이거든요.”“정말요? 그럼 더 반갑네요.”그 말에는 특별한 의미가 담겨 있지 않았다.타국에서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을 만났을 때 생기는 그저 자연스러운 친근함이었다.강지연은 빵을 한가득 사고 가게를 나섰다. 장시범이 봉지를 들었고 두 사람은 소녀와 손을 흔들며 인사를 나눴다.문이 닫히자 뒤쪽 작업실에서 한 사람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아직도 살짝 흔들리는 문을 바라보며 그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차에 오른 뒤 장시범의 시선은 자꾸 옆으로 흘렀다.특히 신호 때문에 차가 멈출 때마다 괜히 질투로 숨이 막히는 얼굴이었다.강지연은 매번 이런 사소한 일에도 질투를 쏟아내는 장시범 때문에 웃음이 터졌다.“또 왜 그래?”장시범은 괜히 우울한 표정으로 웅얼거렸다.“남의 남자 친구는 좋고 나는 안 좋아요?”‘이것도 질투할 일이야?’“장시범, 우리의 미덕은 겸손이야. 조금만 겸손해 볼래?”“싫어요.”그는 단호했다.“제 최대 장점은 자부심이거든요. 잘 봐요.”‘뭐야. 얘 또 뭘 하려는 거야.’그때 장시범은 갑자기 차창을 내리더니 옆 차선에 멈춘 차 운전자에게 손을 흔들었다.“헤이!”상대도 반갑게 인사했다. 장시범은 활짝 웃으며 강지연을 가리켰다.“이 사람 제 여자 친구예요. 세상에서 제일 예쁜 여자예요.”강지연은 말문이 막혔다. 옆 차의 운전자는 장단을 맞추듯 강지연을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처럼 치켜세웠고 장시범까지 덩달아 칭찬했다. 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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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79화

온하준이었다. 동화 같은 빵집의 사장, 금발 여자의 남자 친구, 간호사들이 입을 모아 잘생겼다고 떠들던 그 성숙한 남자.하필이면 온하준이라니.온하준 역시 강지연을 발견하자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표정은 담담했고 시선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아는 사이는 맞지만 더 이상 가까운 것도 없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타인처럼.그 순간 장시범이 한발 다가와 자연스럽게 강지연의 허리를 감싸안았다. 노골적으로 경계가 담긴 눈빛이 온하준을 향했다. 누가 봐도 영역을 표시하는 태도였다.온하준도 모를 리 없었다. 그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원래는 안나가 혼자 디저트를 배달하는데 오늘은 삼단 케이크라 혼자 들기 힘들어서 같이 왔어.”왜 자신이 여기 있는지 굳이 설명하듯 덧붙이는 말이었다.아까부터 온하준을 잘생겼다고 떠들던 간호사가 눈을 크게 뜬 채 강지연과 온하준을 번갈아 보았다.“두 분 아는 사이예요?”강지연이 입을 열려는 순간 온하준이 먼저 부드럽게 웃었다.“같은 해성 출신입니다. 예전에 제가 해성에서 회사 운영할 때 몇 번 뵌 적이 있어요.”담백한 한 문장이었다. 그 안에는 결혼도, 이혼도, 지난 시간도 없었다.“해성에서도 빵집 하셨어요?”간호사는 호기심을 멈추지 못했다. 새로 들어온 간호사들이라면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예전에 해성 한의원을 드나들던 수많은 환자 중 하나였을 뿐이니까.온하준은 잠시 말을 고른 뒤 정중히 답했다.“아니요.”“그런데 왜 여기 와서 갑자기 빵집을 차린 거예요?”질문은 그치지 않았다. 온하준은 옆에 서 있던 안나를 바라봤다. 시선이 자연스럽게 부드러워졌다.“좋아하는 사람이 케이크를 좋아해서요.”말을 마치며 그는 안나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겨 어깨를 감싸안았다. 장시범이 강지연을 안고 있는 모습과 닮은 자세였다.“정식으로 소개할게요. 제 여자 친구, 안나입니다.”“어머? 여자 친구예요? 저는 직원인 줄 알았는데... 시작도 못 하고 끝났네.”간호사는 대놓고 아쉬운 표정을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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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0화

케이크에는 딸기와 블루베리, 라즈베리가 겹겹이 올라가 있었다. 보기만 해도 달콤한 향이 느껴질 만큼 화려했다.하지만 강지연은 끝내 한 입도 대지 않았다. 괜히 먹었다가 옆에 앉은 이 질투 많은 남자가 앞으로 한 달은 케이크 이야기로 괴롭힐 게 뻔했기 때문이다.곽현성과 함께 생일 노래를 부르고 촛불을 끈 뒤 그녀는 장시범의 손을 잡아 슬그머니 한의원을 빠져나왔다.그런데 문을 나서자마자 예상치 못한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온하준과 안나가 아직 근처에 있는 피자 가게 앞에 서 있었다.줄이 길게 늘어선 유명한 가게였다. 두 사람은 이미 피자를 받아 들고 있었다.강지연이 나오는 순간, 마침 온하준이 피자 한 조각을 들어 안나에게 건넸다. 안나는 한입 베어 물고 눈을 가늘게 접으며 웃었다.저녁노을이 도시를 금빛으로 물들이고 있었고 그 빛이 두 사람의 어깨 위에 내려앉아 있었다.그에게 어떤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면 두 사람은 그저 평범하고 다정한 연인처럼 보였을 것이다.오늘은 장시범의 차가 조금 떨어진 곳에 세워져 있었다. 그곳으로 가려면 피자 가게 앞을 지나야 했다.“가자.”강지연은 일부러 줄의 뒤쪽으로 돌아가려 했다. 굳이 마주칠 필요는 없었다.그런데 장시범은 그녀의 손을 더 단단히 잡더니 굳은 표정으로 곧장 온하준이 서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강지연은 속으로 짧게 숨을 삼켰다.‘그래. 내가 피할 게 뭐가 있어. 온하준도 이제는 나를 모르는 척하는데.’피자를 든 채 나란히 서 있던 온하준과 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 인사뿐이었고 다른 말은 없었다.장시범은 강지연의 손을 잡은 채 그대로 지나쳐 길게 늘어선 줄 사이를 뚫고 차가 있는 곳까지 걸어갔다.뒤편에서 온하준과 안나는 도로를 건널 준비를 하고 있었다.장시범은 차를 몰아 앞으로 나가다가 두 사람을 보고 멈춰 섰다. 보행자를 양보하는 그의 운전 습관은 여전했다.그런데 온하준과 안나가 고개를 숙여 인사하며 건너려는 순간 장시범이 몸을 기울여 강지연의 뺨에 입을 맞췄다.정면을 보고 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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