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다섯 번째 결혼기념일에서: Chapter 481 - Chapter 4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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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1화

사람과 사람의 인연이라는 건 참 묘했다.온하준의 가게가 이 근처에 문을 연 지 얼마나 됐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전까지 강지연은 단 한 번도 그를 마주친 적이 없었는데 그날 이후로는 이상하리만치 자주 스쳤다.어떤 날은 마트에서 안나와 장을 보고 있는 모습을 보았고 어떤 날은 자전거 뒤에 케이크 상자를 싣고 배달을 가는 모습을 보았다.그때마다 그는 가볍게 고개만 끄덕이거나 아예 못 본 척 지나쳤다.정말로 강지연이 원했던 대로 다시 마주쳐도 그저 스쳐 가는 타인처럼 그녀를 대하고 있었다.그의 옷차림도 많이 달라져 있었다.예전의 그는 늘 정장을 즐겨 입었다. 단추 하나, 머리카락 한 올까지 흐트러짐이 없었고 빳빳한 정장과 각 잡힌 헤어스타일은 마치 갑옷처럼 느껴졌다.사람들 사이에 서 있기만 해도 저절로 차가운 기운을 풍겼고 날카로운 눈빛은 쉽게 다가갈 수 없는 거리감을 만들었다.하지만 지금의 그는 그 갑옷을 벗어 던진 모습이었다. 흰 티셔츠를 느슨하게 입고 비가 오거나 기온이 떨어지면 얇은 캐시미어 카디건을 걸쳤다.단추를 끝까지 잠근 날에도 분위기는 더 이상 딱딱하지 않았고 이마 위로 자연스럽게 내려온 짧은 머리카락이 인상을 한결 부드럽게 만들었다. 눈빛 역시 예전보다 훨씬 온화해 보였다.한때 해성 CBD 빌딩을 누비던 온 대표는 더 이상 떠올리기 어려웠다.지금의 그는 옅은 햇살과 은은한 은방울꽃 향이 섞인 듯한 그런 온기 있는 사람으로 보였다.그날, 강지연의 무용단은 학교 공연장에서 처음으로 ‘삼국유사’ 중 한 편, ‘단군신화’를 정식 무대에 올렸다.안무는 강지연이 맡았고 남자 주인공은 장시범이었다. 그녀는 변두리 역할로 직접 무대에 섰다.공연은 성공적이었다. 커튼콜이 이어졌고 무대 위로 꽃다발이 쏟아졌다.관객석을 바라보던 순간 강지연은 낯익은 얼굴들을 여럿 발견했다. 한의원 의료진들, 그곳에서 알게 된 환자들, 동네 이웃들, 그리고 온하준과 안나.공연이 끝나자 의료진과 환자들은 앞으로 나와 손뼉을 치고 환호했다.반면 온하준과 안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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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2화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온 강지연의 머릿속에는 공연 장면이 계속 맴돌았다.단원들이 촬영해 둔 전 과정을 몇 번이고 돌려 보며 동선과 호흡, 음악 사이의 여백까지 하나하나 짚어 나갔다.조금만 더 매끄럽게 다듬을 수 있는 부분, 감정을 더 끌어올릴 수 있는 장면이 보일 때마다 노트에 빠짐없이 적어 내려갔다.정리를 끝내고 고개를 들어보자 장시범이 언제 나갔는지 보이지 않았다.말 한마디 없이 사라진 게 마음에 걸렸다. 문득 공연이 끝난 뒤 그가 조용히 카드를 찢어 버리던 장면이 떠올랐다.강지연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휴대전화를 꺼냈다. 장시연에게서 문자가 와 있었다.[언니, 오빠랑 싸웠어요?]강지연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답장을 보냈다.[아니. 왜?]곧바로 답이 왔다.[오빠가 집에 와서 한마디도 안 하고 방에 틀어박혀 있길래요.][안 싸웠는데. 내가 물어볼게.]그러자 거의 동시에 메시지가 도착했다.[물어보지 마세요!!!]느낌표 세 개에 강지연은 잠시 멈칫했다.[왜?][또 특유의 그 도련님 성질이에요. 괜히 받아주지 마요. 받아줄수록 점점 더할걸요.]강지연은 장시연의 투정 섞인 메시지에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장시범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무슨 일 있어? 왜 말도 없이 간 거야?]한참이 지나서야 답장이 왔다.[쳇, 내가 없어진 것도 몰랐네요?]강지연은 어쩔 수 없이 설명했다.[오늘 공연 복기하느라 정신이 없었어.]조금 뒤, 다시 메시지가 왔다.[정말 공연 복기만 한 거예요?][당연하지. 넌 무슨 생각 했는데?]이번에는 더 긴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도착한 메시지.[커튼콜 때 그 사람을 한참이나 바라봤잖아요. 난 다 봤어요.]강지연은 ‘나는 그냥’이라고 입력했다가 그대로 멈췄다.관객석을 둘러보다가 우연히 본 것뿐이었다고 특별한 의미는 없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설명이 과연 무슨 도움이 될지 알 수 없었다.이미 한 번 했던 말을 또다시 반복해야 하고 확인서 쓰듯 매번 해명해야 한다면 앞으로의 관계가 어떻게 흘러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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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3화

“온하준.”강지연이 돌아서서 그를 불렀다.걸음을 멈춘 온하준이 고개를 돌렸다. 눈빛에 옅은 놀라움이 스쳤다. 그녀가 무슨 말을 더 할지 기다리는 표정이었다.“왜 하필 여기에 가게를 연 거야?”온하준은 잠시 숨을 고른 뒤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아버지라는 사람이 남겨 준 곳이야. 원래는 술집이었어. 지금 내 형편으로는 다른 데서 새로 가게를 구할 여유가 없어. 네가 불편하다면 다른 곳으로 옮길 수도 있고...”“괜찮아.”강지연이 말을 끊었다. 그녀는 그것까지 간섭할 권리는 없다고 생각했다.말을 마친 뒤, 강지연은 더 머뭇거리지 않고 등을 돌려 한의원 안으로 들어갔다. 등 뒤에서 안나의 목소리가 들렸다.“무슨 일이야?”“아무것도 아니야. 가자. 오늘 저녁 뭐 먹을래?”“파스타 끓여 먹을까?”“미트소스 아니면 해산물?”“아무거나 다 좋아.”강지연은 잠시 걸음을 늦췄다. 저렇게 자연스럽게 저녁 메뉴를 상의하는 모습이 순간 낯설게 느껴졌다.‘저 사람이 정말 온하준 맞아? 저렇게까지 변할 수 있는 사람이었나.’온하준은 짐을 정리하고 가게로 돌아가기 전 다시 한번 뒤를 돌아보았다.곧게 선 자세로 한의원 안으로 들어가는 강지연의 걸음에는 이제 어디에도 어색한 기울어짐이 보이지 않았다.강지연이 재활을 마치고 나왔을 때도 장시범은 보이지 않았다.오늘 오후에는 연습 일정이 없었지만 어젯밤 정리한 공연 피드백을 단원들과 공유하기로 공지해 둔 상태였다.연습실에 도착해 인원이 다 모일 때까지 기다렸지만 남자 주인공만 보이지 않았다.강지연은 잠시 망설이다 전화를 걸었다. 벨이 울리자마자 곧 연결되었다.“어디야? 다들 널 기다리고 있어.”“다 왔어요.”말이 끝나자마자 문이 열리고 장시범이 들어왔다. 입가에는 묘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지금은 사적인 이야기를 꺼낼 타이밍이 아니었다.강지연은 두말없이 손뼉을 치며 단원들을 향해 말했다.“다 모였으니까 시작할게요. 어제 공연에서 보완할 부분 정리했어요.”두 시간 동안 강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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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4화

장시범은 잠시 망설이다가 강지연을 끌어안았다.“미안해요. 내가 잘못했어요. 앞으로는 그러지 않을게요.”강지연은 그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웃었다.“그래. 나 배고파.”장시범이 다급하게 말했다.“그럼 얼른 집에 가요.”그는 강지연 앞에 쪼그리고 앉아 그녀의 손을 잡아 자기 어깨에 얹더니 그대로 업고 학교를 빠져나갔다. 아직 캠퍼스에 남아 있던 학생들이 그 모습을 보고 한바탕 야유를 보냈다.그 뒤로 한동안 온하준을 다시 보지 못했다.가끔 마트에서 안나를 마주치기는 했지만 늘 혼자였고 온하준은 함께 있지 않았다.어느 날 한의원에서 윤슬을 비롯한 간호사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요즘은 왜 쿠키 하우스에서 무료 디저트를 안 보내주는 거죠? 안 온 지 며칠 됐잖아요.”다른 간호사가 말했다.“공짜로 주는 걸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계속 무료로 주는 게 어디 있어요. 다 돈 벌려고 장사하는 건데.”윤슬이 한숨을 쉬었다.“그것도 그렇네요.”다른 간호사가 말을 이었다.“그것도 아니에요. 지난번에 케이크 하나 주문하려고 전화했더니 사장님이 이제는 보내줄 수 없다고 하던데요.”“진짜요? 왜 그런대요? 장사하기 싫은가?”“그러게요. 우리도 단골인데. 평소에도 빵은 다 거기서 샀잖아요. 같은 나라 사람이라고 매출 좀 올려주려 했더니 장사 좀 되니까 태도가 달라진 것 같아요.”“그럼 배달 서비스를 이용하지 그랬어요.”“어휴, 됐어요. 팔기 싫다는 태도인데 뭐 그렇게까지 해요. 케이크 살 데가 그곳밖에 없는 것도 아니고.”마침 한의원으로 들어서던 강지연과 장시범은 그 이야기를 모두 들었다.강지연은 쿠키 하우스가 왜 더는 한의원에 배달하지 않는지 알고 있었고 장시범도 금세 눈치를 챘다.한의원을 나와 차에 타자 장시범이 물었다.“선배, 쿠키 하우스에 말한 거예요?”“응.”강지연은 숨기지 않았다.“사실 월권이었지. 온하준이랑은 이미 각자 갈 길이 다른 사람인데. 그런데 그런 사소한 일 때문에 우리 사이가 흔들리는 게 싫었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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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5화

강지연과 장시범은 두 번째 공연이 끝난 뒤 안무를 다시 조정하고 세부를 보완해 에딘버러 공연 버전을 완성했다. 그 무렵 여름방학이 다가오고 있었다.강지연의 논문 역시 순조롭게 마무리되었고 이후 두 사람은 새로운 비자 발급을 위해 잠시 귀국해야 했다.그녀는 계속될 연습을 방예란에게 맡기고 모든 문제는 그룹 채팅을 통해 소통하기로 했다.장시범은 본가가 진경에 있어 먼저 진경으로 돌아가 필요한 서류를 준비했고 강지연은 해성으로 향했다.강시우 대신 기호범이 직접 그녀를 맞이하러 나왔다.“삼촌!”해성의 익숙한 공기를 다시 마시자 강지연은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지난 일들은 연기처럼 사라졌고 고통도 구름처럼 흩어져 있었다.이 년 전, 어떻게든 이곳을 떠나고 싶었던 자신이 이제는 고향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 조금 낯설었다.해성의 골목과 풍경 하나하나가 뼈저리게 그리워질 때도 있었다.기호범은 그녀가 달려오는 모습을 바라보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비록 핏줄이 섞인 삼촌은 아니었지만 강시우와 함께 강지연이 모든 난관을 뚫고 여기까지 오는 과정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이었다.지금 이렇게 건강하게 걷는 모습을 보는 것은 마치 운명이 그녀에게 돌려준 보답 같았다.기호범은 그녀를 집으로 데려갔다. 집에는 진경숙과 그녀의 딸, 그리고 경호원들이 있었다.오랜만에 강지연을 본 진경숙은 기쁨에 눈시울을 붉혔고 진수연은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이며 아가씨라고 불렀다.강지연은 아이의 얼굴을 살짝 꼬집으며 웃었다.“드라마 너무 많이 본 거 아니야? 아가씨, 사모님 그런 호칭 다 버리고 편하게 언니라고 불러.”진수연은 얼굴이 빨개진 채 수줍은 목소리로 언니라고 불렀다.“그렇지.”강지연은 소파에 드러누우며 말했다.“아주머니, 집에 오니까 너무 편해요. 오랜만에 왔으니까 아주머니가 제일 잘 하는 요리 다 먹어보고 싶네요.”진경숙은 웃으며 대답했다.“당연히 해드려야죠.”하지만 강지연은 집에서 식사할 시간이 많지 않았다. 돌아오자마자 자료를 정리하고 비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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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6화

“얘들아, 우리 좀 늦었지.”문이 열리며 한 남학생이 먼저 들어왔고 그 뒤로 온하준이 모습을 드러냈다.순간, 강지연과 온하준의 시선이 공중에서 맞닿았다.강지연 옆에 앉아 있던 최아현은 굳은 얼굴로 그녀의 옷자락을 살짝 잡아당기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온하준이 올 줄은 나도 몰랐어.”온하준과 함께 들어온 남학생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온하준이 돌아왔다길래 그냥 같이 불러왔어.”온하준은 문가에 선 채 어색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난... 네가 엘리에 있는 줄 알았어.”누구의 이름도 부르지 않았고 누구를 향한 말인지도 밝히지 않았지만 그 말이 강지연을 향한 것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그의 한마디에 강지연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만약 온하준이 올 줄 알았다면 그녀는 어떻게든 이 자리에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강지연 역시 그가 엘리에 있을 거로 생각했고 국내에서 열리는 이런 모임에서 마주치게 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온하준의 머릿속에는 잠시 나가버릴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그러나 지금 이 타이밍에 자리를 뜨면 오히려 더 어색한 분위기만 만들 뿐이었다.조용히 존재감을 줄이고 앉아 있기만 하면 될 일을 괜히 이상하게 행동하면 강지연만 더 난처해질 것이다.그를 부른 사람은 학창 시절 농구부 친구 이승우였다.“하준아, 여기 앉아.”이승우는 그의 팔을 잡아 자기 옆자리로 끌어당겼다.“마침 두 자리가 남았네.”온하준은 그대로 자리에 앉았다.이승우 일행은 양주 한 병을 열었다.온하준은 끝까지 술을 사양했고 강지연은 약을 먹고 있다며 마시지 않았다.결국 나머지 몇 명이 그 한 병을 거의 비워버리고 그것도 모자라 추가로 한 병을 더 열었다.처음에는 모두 들뜬 분위기 속에서 고등학생 시절의 추억을 이야기하며 웃고 떠들었다.그러다가 점점 술기운이 오르자 대화는 통제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갔다.처음부터 온하준에게 적의를 품고 있던 라호성은 취기에 힘입어 노골적으로 손가락질하며 욕설을 퍼부었다.“온하준, 네가 아니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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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7화

그날의 동창회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온하준이 이승우를 끌고 나간 뒤, 라호성은 어색한 표정으로 강지연을 힐끗 바라보더니 핑계를 대며 먼저 자리를 떴다.강지연은 문득 웃음이 나왔다.이승우가 했던 정말 좋아한다면 지금도 기회가 있다는 말은 지극히 현실적이었다.하지만 라호성은 아니었다.그는 그저 강지연을 핑계 삼아 온하준을 향한 개인적인 원한을 쏟아냈을 뿐이었다.강지연의 머릿속에는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남자들은 하나같이 쓸모없는 존재야.’남아 있던 몇몇 동창들도 술에 취한 채 하나둘 흩어졌다.대리운전을 부르는 사람도 있었고 택시를 기다리는 사람도 있었지만 강지연은 술에 잔뜩 취한 최아현을 부축한 채 결국 밖으로 나와 택시를 기다리기로 했다.밖으로 나오자 온하준과 이승우도 아직 차를 기다리고 있었다.만취한 이승우는 거의 온하준의 몸에 기대 쓰러진 상태였다.퇴근 시간대라 택시는 쉽게 잡히지 않았다.강지연은 세 번이나 호출을 취소한 끝에 몇 분을 더 기다려야 했다.여름날의 해성은 따뜻한 바람이 은은하게 불어왔다.강지연은 최아현을 부축인 채 온하준과 약 두 미터쯤 떨어진 도로 옆에 서 있었다.그녀는 마치 그가 투명 인간이라도 된 것처럼 오가는 차량만 바라보고 있었다.“내가 도와줄까?”갑자기 옆에서 온하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강지연이 고개를 돌리자 그는 이승우를 똑바로 세워 두고 알아서 서고 있으라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그러고는 그녀가 혼자서는 감당하기 힘들 거라 여긴 듯 최아현을 가리켰다.“아니, 괜찮아.”지금의 강지연은 더 이상 다리가 불편했던 예전의 그녀가 아니었기에 최아현 정도는 충분히 부축할 수 있었다.그때 얌전히 강지연의 어깨에 기대어 있던 최아현은 기척을 느끼고 흐리멍덩한 눈으로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중얼거렸다.“지연아, 미안해. 온하준이 올 줄은 진짜 몰랐어. 알았으면 널 여기 부르지도 않았을 텐데...”강지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침묵을 지켰다.사실 그를 무서워하듯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피할 필요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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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8화

“온하준, 넌 아는 게 정말 많네?”같은 엘리에서 생활했으면서도 강지연은 그런 쓰레기 같은 남자들이 나오는 드라마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온하준은 여전히 무덤덤한 얼굴로 말했다.“요즘 인스타에 자주 뜨던데. 안나가 자주 보길래 나도 따라 몇 번 봤는데 꽤 재밋더라고.”강지연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장시범은 너한테 잘해?”온하준이 갑자기 물어왔다.그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응. 잘해줘.”“그럼 다행이네.”그는 담담하게 말했다.두 사람 사이에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눈앞에는 차들이 끊임없이 오가고 경적도 요란했지만 이상하게도 그들 주변만큼은 소음과 분리된 듯 고요했다.강지연이 휴대전화를 확인해 보니 차가 도착하기까지 아직 4분이나 남아 있었다.길이 너무 막힌 모양이었다.그녀는 잠시 고민하더니 차라리 다시 식당 안으로 들어가 기다리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강지연이 막 발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온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장시범은 너랑 같은 무용 전공이니까 뜻도 잘 맞고 전문 분야에서도 서로 도움이 될 테니... 좋네.”그녀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뒤 돌아보았다.그 시선을 느낀 온하준은 가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별거 아니야. 그냥 축복해 주고 싶었어. 앞으로도 계속 행복하길 바랄게.”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당연하지. 난 꼭 행복할 거야.”온하준은 다시 한번 옅은 미소를 지었다.그는 이제 웃음마저도 구름처럼 옅고 담담했다.“쯧쯧.”온하준에게 기대 있던 이승우가 갑자기 혀를 차더니 그의 가슴을 툭툭 치며 말했다.“야, 넌 마음이 안 아프냐? 진짜로 안 아파? 내가 너 대신 마음이 아프네. 뭐? 행복을 빌어줘?”“이승우, 술 취했으면 그 입 좀 다물어!”온하준은 무심한 표정으로 자신의 가슴에 얹힌 그의 손을 내던지듯 뿌리치며 말했다.“내가 취했다고? 취했는지 아닌지는 나 스스로 잘 알아. 나 지금 안 취했어.”이승우가 코웃음을 치며 말을 이었다.“너 이대로 평생 그 좁디좁은 쿠키 가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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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9화

두 사람은 모두 모자와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강지연은 거의 저항할 틈도 없었고 입은 순식간에 틀어막힌 채 손발 역시 묶여 있었기에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그들은 그녀를 끌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 차에 태웠다.“당신들 누구야!”강지연은 재빨리 머리를 굴려 자신이 납치된 이유를 추측하더니 곧바로 말을 이었다.“돈이 목적이라면 바로 줄 수 있어요.”그녀는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강성호가 저질렀던 일이었다.‘이미 감옥에 들어갔는데... 설마 아직도 끝나지 않은 건가? 아니면 강태하 때문인가?’두 사람 중 한 명은 운전석에 다른 한 명은 그녀를 붙잡고 있었다.강지연이 돈이라는 말을 꺼내자 두 사람은 백미러를 통해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진짜 돈 때문인 건가?’강지연은 다시 입을 열었다.“당신들이 누군지는 묻지 않을게요. 얼마가 필요한지만 말해요. 어떻게 주면 되죠? 바로 드릴게요. 경찰에도 알리지 않을게요. 서로 무사하면 되잖아요.”지금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살아남는 것이었다.하지만 두 사람은 눈빛만 주고받더니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녀를 더 세게 붙잡으며 거칠게 말했다.“얌전히 있는 게 좋을 거야.”강지연은 그들에게 흉기가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눈에 보이지는 않았다.“저... 얌전히 있잖아요. 보세요, 저항도 안 하고 있잖아요. 두 분을 이길 힘도 없고 도망칠 수도 없는데 괜히 까불다가 더 다칠 이유가 없잖아요. 그냥 당신들이 왜 이런 위험한 짓을 하는지만 알고 싶을 뿐이에요. 돈 때문이라면 진짜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어요. 제가 준다고 했잖아요.”그녀는 최대한 침착하려 애썼다.밤은 이미 깊어 가고 있었고 차는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강지연은 차가 어디로 가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만약 이대로 계속 차만 타고 이동한다면 그녀에게는 아무 기회도 없는 것이었다..‘장시범.’지금으로서 유일한 희망은 장시범이었다.그는 매일 밤 그녀와 통화를 해왔었다.만약 오늘 밤에도 전화가 온다면 받을 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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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90화

‘배가 이미 출항한 건가? 이 사람들은 대체 누구지? 뭘 하려는 거지? 인신매매? 난 이제 어떡하지?’심지어 쥐 소리까지 들리자 강지연은 자신이 화물칸에 갇혀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들려오는 것은 쥐 소리와 파도 소리뿐 사람의 기척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배가 육지를 떠났고 사방에는 끝없이 펼쳐진 어두컴컴한 바다뿐이라는 사실을 떠올리자 공포가 한꺼번에 밀려왔다.그녀는 바다가 무서웠다.살면서 이렇게까지 두려웠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강지연은 몸을 웅크린 채 묶인 두 발로 필사적으로 상자를 차기 시작했다.조그마한 틈이라도 생기면 밖으로 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하지만 그렇게 쉬울 리 없었다.그녀가 이를 악물고 버티고 있던 순간, 누군가 상자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강지연은 잠시 숨을 죽인 채 귀를 기울였다.정말로 누군가 상자를 두드리고 있었다.하지만 상대가 나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녀는 순간 몸을 굳힌 채 꼼짝도 하지 못했다.그때 밖에서 다시 소리가 들려왔다.“안에 혹시 사람 있어요?”너무도 익숙한 목소리였다.하지만 강지연은 믿을 수 없었다.‘온하준이 어떻게 여기에... 그럴 리 없어.’“저기요. 이 안에 사람 있는 거 맞죠?”다시 들려온 목소리는 분명 온하준이었다.진짜든 아니든 여기서 가만히 죽기를 기다리는 것보다는 낫다고 판단한 강지연은 발로 상자를 툭툭 찼다.“정말 안에 있어? 강지연, 정말 너라면 발로 세 번 차 봐!”그녀는 온하준임을 확신했다.‘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지?’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일단 이곳에서 빠져나가는 게 먼저였다.강지연은 있는 힘을 다해 발로 상자를 세 번 찼다.사실 그는 이미 밖에서 상자를 뜯고 있었고 세 번의 신호를 듣자 더욱 서둘렀다.몇 번의 덜컥거리는 소리와 함께 상자 뚜껑이 열렸다.“강지연?”온하준은 그녀의 머리를 덮고 있던 검은 자루를 벗겨내며 안에서 끌어냈다.강지연은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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