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다섯 번째 결혼기념일에서: Chapter 501 - Chapter 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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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1화

그 돈에는 신발값과 택시비까지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강지연은 직접 송금하고 싶지 않았다.“네, 알겠어요.”진경숙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서둘러 휴대전화를 꺼내 송금을 마쳤다.“그럼 수고해 주세요.”그녀가 2층 방으로 올라가려 계단을 막 오르려는 순간 진경숙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대표님이... 돈이 너무 많다고 하시네요.”“그냥 이 돈은 제가 내는 거라고 전해 주세요. 남은 돈으로는 그 몇 개나 되는 휴대전화 요금이나 충전하라고 하세요.”강지연의 몸에서는 바다 냄새와 술 냄새, 샤부샤부 냄새까지 뒤섞여 진하게 배어 있었다.게다가 토한 흔적도 남아 있어 그녀는 당장이라도 씻고 새 옷으로 갈아입고 싶었다.진경숙은 그녀의 말뜻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대로 옮겨 전하기로 했다.“아주머니.”장시범은 강지연의 뒷모습이 2층 계단 모퉁이에서 서서히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더니 말했다.“온하준이 뭐라고 답했는지 제가 좀 볼게요.”진경숙은 선뜻 휴대전화를 내주고 싶지는 않았지만 지금 강지연의 남자 친구는 장시범이었기에 그냥 보여주기로 했다.그녀는 한숨을 내쉬더니 바로 휴대전화를 그에게 건네주었다.장시범은 휴대전화를 넘겨받자마자 진경숙과 온하준의 대화창부터 열어보았다.그 안에는 지난 몇 년간 두 사람이 주고받은 메시지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그는 스크롤을 맨 위로 올려 가장 첫 대화부터 읽어보았다.매일같이 이어진 온하준의 당부였다.[아주머니, 의사 선생님 말씀대로 강지연을 자주 움직이게 해주세요. 안 그러면 욕창이 생긴대요.][아주머니, 오늘 강지연 기분은 어때요? 울지는 않았어요?][아주머니, 오늘 회의가 길어져서 제가 병원에 좀 늦어야 갈 것 같아요. 아홉 시에는 꼭 갈게요.][아주머니, 강지연은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저한테는 하지 않으려고 할 거예요. 그러니까 아주머니가 곁에서 이야기 많이 나눠보고 저한테 알려 주세요.][아주머니, 할머니도 이제 연세가 있으셔서 강지연을 돌보다 보면 몸에 무리가 오실 수도 있어요. 아주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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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2화

진경숙은 장시범이 메시지를 작성하는 모습을 보자 안절부절못하고 있다가 다급히 휴대전화를 빼앗아 들더니 서둘러 메시지를 취소했다.그 모습을 본 장시범은 순간 표정을 굳히더니 바로 입을 열었다.“아주머니, 지금 누가 아주머니를 여기까지 모시고 온 거죠? 월급은 누가 드리고 있죠? 강지연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건 마음이 착해서예요. 하지만 아주머니가 정말로 이쪽 사람이라면 온하준 쪽은 깨끗하게 정리하셔야죠. 강지연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줬는지 잘 아시잖아요.”진경숙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저... 저도 알아요. 제가 지우지 않은 건 아이 전학 문제 때문이었어요.”“아무리 전학 문제로 카톡을 안 지웠다 해도 굳이 예전 대화 기록까지 남겨 둘 필요는 없잖아요. 5년 전 기록이 그대로 있던데요.”진경숙은 고개를 숙이더니 나지막이 말했다.“일부러 남겨 둔 건 아니에요. 휴대전화를 바꿀 때 자동으로 옮겨진 거예요.”“그럼 이제 다 지우세요. 대화 기록도 그 사람도 전부 다요.”장시범은 말을 마치고 위층으로 올라가 버렸다.진경숙은 휴대전화를 손에 쥔 채 한숨을 내쉬더니 온하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죄송해요, 대표님. 방금 그 메시지는 제가 보낸 게 아니에요. 못 보신 거로 해 주세요.]사실 그녀가 메시지를 취소했을 때 그는 이미 그 내용을 읽고 있었다.그리고 누가 보냈는지도 알고 있었지만 답장할 생각은 없었다.사랑하는 사람에게 강한 소유욕을 느끼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강지연과 아직 이혼하기 전 그 역시 장시범이라는 존재를 몹시 싫어했다.장시범이 자신의 모든 것을 넘보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사랑이 이기적이지 않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이제 와 돌이켜 보니 온하준은 그녀가 장시범과 자주 만나는 것에는 미칠 듯이 분노했으면서 이하나가 다른 남자들과 가까이 지내는 것에는 단 한 번도 마음을 쓴 적이 없었다.서른에 가까운 남자가 감정에 대한 문제나 세상 물정을 모를 리 없었다.다만 그 안에 있을 때는 보이지 않았을 뿐이고 빠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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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3화

진경숙은 예전에 강지연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있었다.강지연과 온하준은 열여섯 살에 처음 만나 요즘 유행하는 말로 교복에서 웨딩드레스까지 함께 한 사이였다.게다가 그녀는 그를 위해 다리까지 다쳤다.그런데 어쩌다 이렇게 되어 버린 걸까.강지연은 그 정도로 온하준을 사랑했었고 그 역시 마찬가지였을 텐데.5년이라는 시간 동안 진경숙은 두 사람에 대해 모르는 것이 거의 없었다.결국 모든 것은 유혹을 이기지 못한 남자 때문이었다.진경숙은 한때 온하준만큼은 다를 거라고 믿었지만 결국 세상 남자들은 다 똑같다는 판단을 할 수밖에 없었다.강지연은 씻으러 들어갔고 장시범은 방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잠시 후, 그녀는 수건으로 머리를 감싼 채 욕실에서 나왔고 뜨거운 물에 달아오른 얼굴은 붉게 물들어 있었으며 눈빛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이리 와요. 내가 머리 말려 줄게요.”그가 강지연의 머리를 말려 주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엘리에 함께 있을 때도 그녀가 머리를 감고 나오면 당연히 그가 말려 주곤 했었다.장시범은 문득 진경숙과 온하준의 채팅 기록에서 본 문장이 떠올랐다.‘아주머니, 강지연은 가끔 귀찮다고 머리도 말리지 않은 채 수건만 두르고 자요. 제가 없을 땐 꼭 머리 말려 주고 자게 해주세요.’그 생각이 스치자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빗어 넘기는 손에 힘을 주고 말았다.“아... 아파!”“아, 미안. 내가 잠깐 정신이 딴 데로 가 있었네요.”장시범이 급히 사과했다.“무슨 생각 하고 있었어?”강지연은 사실 오늘 아침 그를 보자마자 가슴이 뭉클해졌다.장시범은 그때 진경시에 있었지만 기호범의 전화를 받자마자 곧장 비행기를 타고 날아온 것이다.하지만 그 사이 강지연은 바다 위에 있었고 휴대전화까지 잃어버려 하룻밤 내내 연락이 끊겨 있었다.그가 얼마나 걱정했을지, 그녀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다.아마 한숨도 못 자고 온갖 최악의 상황을 떠올렸을 것이다.“걱정시켜서 미안해.”강지연은 고개를 들어 장시범의 턱을 향해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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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4화

“나야 당연히 좋지!”강지연은 장시범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방금 말린 머리카락에서는 아직도 따뜻한 열기가 전해졌고 샴푸 향이 은은하게 퍼지고 있었다.어젯밤의 차갑고 어두운 바다와 비교하면 지금 이 순간은 믿기지 않을 만큼 포근하고 따뜻했다.“강지연.”그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넘기며 자연스럽게 이름을 불렀다.“왜?”이름을 부르는 것이 처음은 아닌 듯 강지연도 당연하게 받아들였고 그의 품이 너무도 따뜻했기에 그대로 잠들고 싶었다.“졸려?”“응.”“얘기 좀 하다가 자면 안 될까?”장시범은 그녀를 더 꼭 끌어안더니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알았어. 말해.”졸음이 몰려온 강지연은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어젯밤... 온하준은 어떻게 너랑 같이 있게 된 거야?”그는 마치 무심코 떠올린 질문인 것처럼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한 어조로 조심스럽게 물었다.“그게...”강지연은 사실대로 말했다.“어제 고등학교 동창들이랑 모여서 밥 먹었잖아. 끝나고 나서 내가 납치되었던 거고. 호범 삼촌이 그 자리에 있었던 동창들한테 전부 연락을 한 거야.”“그럼 네 위치는 어떻게 알고 간 거야?”“그건 좀 복잡해... 한마디로 말하기는 어려워.”이하나도 연관되어 있었고 위치 추적까지 얽혀 있었기 때문이다.장시범은 한마디로 말하기는 어렵다는 말에 잠시 눈빛이 가라앉는 듯했다.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말을 덧붙였다.“이하나랑 연관돼 있었어.”그 말에 그의 눈빛은 다시 생기를 찾았다.장시범은 그녀를 꼭 끌어안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자기야, 앞으로 온하준이 있는 모임이면 안 가는 게 어때?”애교 섞인 그의 눈빛은 촉촉하게 젖어 있었고 마치 작은 강아지와도 같았다.강지연은 그 표정을 볼 때마다 마음이 사르르 녹아버려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장시범의 턱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 그날 온하준이 있을 줄은 몰랐어. 알았으면 절대 안 갔을 거야.”“사랑해.”그는 강지연의 머리에 가볍게 입을 맞추더니 더 내려가 입술에 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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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5화

장시범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네가 이렇게 달콤한 말을 할 때마다 난 왜 이렇게 기분이 좋아질까?”그는 국물을 단숨에 들이켰다.정말 달콤했다.강지연은 그제야 만족한 듯 미소를 지었다.달콤한 말이 기분 좋게 들리는 건 사랑하기 때문이다.만약 사랑이 없다면 아무리 달콤한 말을 늘어놓아도 오히려 도망치고 싶어질 것이다.그녀는 의자에 앉아 천천히 남은 국물을 마셨고 장시범은 방 정리를 시작했다.귀국한 뒤 강지연이 인터넷으로 주문했던 물건들은 이미 포장은 풀려 있었지만 아직 정리는 되지 않은 채 방 안에 가득 쌓여 있었다.그는 하나하나 정성을 담아 정리해 주었다.옷장에 걸어야 할 것은 옷장에, 서랍에 넣어야 할 물건은 모두 서랍에 가지런히 넣어두었다.그러다 서랍 안에서 작은 나무 상자 하나를 발견했다.귀엽고도 정교한 상자였다.“이 안에 뭐가 들어 있어? 봐도 돼?”강지연은 보자마자 자신이 돌을 넣어 두었던 상자라는 것을 바로 알아차렸다.“응, 봐도 돼.”장시범이 상자를 열어보니 매끈한 돌 하나가 들어 있었다.투박했지만 색이 예뻤고 둥근 원이 새겨져 있었으며 그 원 안에는 꽃잎 모양의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네가 새긴 거야?”그는 돌을 이리저리 만지작거렸다.보아하니 누군가의 손에 수도 없이 만져진 것처럼 윤기가 돌고 매끄러웠다.강지연은 국물을 마시다 말고 그를 힐끗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고등학생 때 그냥 심심해서 새긴 거야. 너무 못생겨서 가질 사람이 없었거든. 아니면 내 손에 다시 돌아올 리가 없지.”원래는 온하준에게 주려고 했던 것이었지만 그때의 그는 이미 그것을 필요로 하지 않았었다.그 뒤로 어쩌다 보니 차유준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어디가 못생겼는데?”장시범이 곧바로 그녀의 말을 반박했다.“정성을 들여 만든 물건이잖아. 널 아끼는 사람에게는 보물이 되는 거야.”그는 처음엔 온하준의 것일 거라 짐작했지만 그녀의 말투를 보니 아닌 듯했다.“그래?”틀린 말은 아니었다.그때의 온하준은 늘 그녀에게 냉정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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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6화

장시범은 예전부터 강지연을 늘 선배라고 불러왔다.하지만 오늘은 유난히 자기야라는 호칭을 자주 입에 올리고 있었다.비록 인터넷에서 흔히 쓰는 호칭이기도 하고 조금 느끼하게 들릴 수도 있었지만 누군가에게 그렇게 불리니 그녀는 마치 캐러멜을 입에 넣은 것처럼 달콤했고 심장 전체가 그 달콤함에 잠긴 듯한 기분이 들었다.“장시범, 오늘 왜 이렇게 귀여워?”강지연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난 진심이야!”그는 진지한 태도로 강조하여 말했다.“지금 너무 후회돼. 대학 때 내가 자신감만 넘쳤어도, 그때 조금만 더 용기를 냈으면 기회가 있었을 건데.”강지연은 다시 국물 한 숟가락을 떠서 그의 입에 넣어 주며 말했다.“지금 기회가 딱 좋은 거 아니야?”“난 그냥 지나온 시간이 너무 아까워서 그래. 괜히 남들보다 몇 년이나 늦어 버린 것 같아서.”달콤한 국물을 마시고 있으면서도 그의 입안에는 어딘가 시큼한 맛이 남은 듯했다.강지연은 그를 한 번 흘겨보며 말했다.“그럼 앞으로의 몇십 년이 전부 네 거라는 건 왜 말 안 해?”장시범은 눈을 번쩍이며 물었다.“자기야, 그 말은... 나랑 결혼하겠다는 거야? 그럼 우리 평생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거야?”“넌 그럴 생각이 없었던 거야?”강지연은 다시 한번 그를 흘겨보며 말을 이었다.“그럼 나랑 장난으로 만나는 거야?”“아니, 그건 절대 아니지! 난 그냥...”장시범은 그 돌을 다시 상자에 넣어 그녀에게 돌려주며 말했다.“난 그냥 이런 특별한 선물을 갖고 싶었어.”강지연은 돌을 다시 꺼내 찬찬히 바라보더니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세상에 좋은 게 얼마나 많은데, 정말 이렇게 값도 없는 물건을 원하는 거야?”그저 색이 예쁜 조약돌일 뿐이었다.어릴 때는 철이 없었기에 이런 것도 선물이라 생각했지만 그때 다섯 살만 더 먹었어도 이런 유치한 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십 년이 지나 이 돌은 세월에 닳아 둥글고 매끈해졌고 그녀 기억 속의 차유준도 이제는 그저 희미한 윤곽만 남아 있었다.마치 김이 서린 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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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7화

“그럼... 차유준 부모님께 다시 돌려드리는 건 어때?”장시범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부모님께도 하나의 위안이 될 수도 있잖아.”강지연은 고개를 저으며 그의 말에 선뜻 동의할 수 없었다.차유준이 남긴 물건은 많지 않았고 그의 부모는 그 하나하나를 보물처럼 아끼고 있었다.비록 본인이 직접 가져온 건 아니지만 그 보물을 다시 돌려주는 일은 상처 위에 또 다른 상처를 얹는 것과 다름없었다.“넌 신경 쓰지 마. 내가 방법을 생각해서 잘 정리할게. 내가 갖고 있지만 않으면 되잖아.”강지연은 국물 그릇을 비우고 진경숙을 불러 가져가게 했다.그러자 갑자기 극심한 피로가 몰려왔다.“참, 네 비자는 예약했어? 해성에서 할 거야 아니면 진경시로 돌아가서 할 거야? 서류는 다 준비됐어?”“해성에서 할게, 너랑 같이. 서류는 아직 못 챙겼어. 네가 사라졌다는 소식 듣고 급히 날아온 거라서.”장시범은 그녀의 손을 잡으며 애교를 부렸다.“고생했어.”강지연은 그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어젯밤에 제대로 못 잤을 텐데, 좀 잘래?”“아니.”그는 웃으며 말했다.“난 오늘 오후에 돌아가서 서류부터 정리하고 빠른 시일 내에 다시 해성으로 올 거야. 그럼 진경시에는 안 가도 되고 여기서 계속 너랑 있을 수 있잖아.”강지연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나 먼저 좀 잘게. 너도 쉬고 있어. 오후에 내가 공항까지 데려다줄게.”“응.”장시범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얼른 자. 말 안 시킬게.”강지연은 그렇게 깊이 잠들어 버리고 말았다.원래는 점심쯤 일어나 장시범을 공항에 데려다줄 생각이었지만 눈을 떠보니 이미 오후 세 시였다.진경숙은 한창 국물을 끓이고 있었다.“장시범 씨가 푹 자게 놔두라고 하셨어요. 깨우지 말라고 하시면서 벌써 공항으로 가셨어요.”“알겠어요.”휴대전화가 없는 생활은 몹시 불편했다.강지연은 새 휴대전화를 사서 번호도 새로 만들 생각이었다.하지만 반드시 경호원을 데리고 나가야 했다.그날의 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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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8화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강지연은 하필 이곳에서 온하준을 마주치게 될 줄은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다.이른 아침, 그녀는 짐을 정리하고 돌을 챙겨 나가려던 참이었다.그때 마침 민박 로비에서 온하준과 안나가 함께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강지연의 곁에는 키가 180이 훌쩍 넘는 경호원 셋이 따라붙어 있었다.그 모습을 본 온하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적어도 자신의 조언 하나쯤은 들어준 모양이라고 생각했다.강지연은 그를 보지 못한 척 경호원들과 함께 그대로 밖으로 나가버렸다.하지만 절 입구에서 또다시 온하준과 안나를 마주치고 말았다.“너도 절에 온 거야?”온하준은 안나와 나란히 선 채 웃으며 물었다.이곳이 절이라는 점도 있었고 오늘따라 마음이 유난히 복잡했던 탓에 강지연은 그와 다투고 싶지 않았다.이상하게도 오늘 그녀의 마음은 이유 없이 평온하면서도 어딘가 쓸쓸하고 눈가에는 희미한 쓴웃음이 맴도는 듯했다.그러면서도 설명할 수 없는 따뜻함이 감싸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참으로 복잡한 감정이었다.아마도 절 안에 가득 심어진 장뇌 나무 때문일 것이다.그 나무들을 보자 고등학교 시절, 햇빛으로 가득 찼던 오후 시간이 떠올랐다.나뭇잎 사이로 부서진 금빛 햇살이 창밖으로 흘러 들어왔고 매미 소리는 끊이지 않았으며 교실 안 학생들은 졸음에 잠겨 있었다.기억이란 늘 따뜻하면서도 어딘가 씁쓸한 법이다.게다가 그 기억 속의 사람은 이제 이 세상에 없으니 더욱 그랬다.하여 오늘은 차유준을 위해 온 날이었기에 그녀는 온하준과 시비를 걸 생각이 없었다.“응.”강지연은 냉정한 목소리로 짧게 답했다.그들은 앞뒤로 떨어져 걸었다.강지연은 객당으로 향했고 온하준은 대웅전으로 향했다.그들은 서로 고개만 스쳐 인사하는 낯선 행인과도 같았다.온하준은 법당에서 절을 한 뒤 법물을 청했다.그는 아무런 고민도 하지 않고 평안과 건강을 골랐다.부나 명예 따위는 지금의 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그는 평안과 건강 부적을 주머니에 넣고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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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9화

차유준 덕분인지 그날만큼은 강지연과 온하준 사이에 드물게도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지 않았다.늘 고슴도치처럼 온몸의 가시를 세운 채 마주하던 그녀가 이번만큼은 그와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어쩌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거야?”객당에서 나오는 길에 온하준이 물었다.강지연은 장시범 때문이라는 말을 할 수 없었기에 대충 얼버무렸다.“짐 정리하다가 발견했어. 내가 근 몇 년은 계속 해외에 있었고 앞으로 어디에서 살게 될지도 모르잖아. 비록 하나의 작은 돌일 뿐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아주 중요한 물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차유준 부모님처럼 말이야. 그래서 제대로 둘 곳을 찾아주고 싶었어.”온하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좋은 생각이야. 다음 생이 있다면 차유준이...”강지연은 그 말의 절반만 듣다 말고 무심코 끼어들었다.“다음 생이 있다면 어떻게 되는데?”온하준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더니 천천히 말을 이었다.“다음 생이 있다면... 차유준이 모든 소원을 이룰 수 있게 내가 돕고 싶어.”강지연은 호기심이 생겼다.“차유준의 소원이 뭐였는데? 지구를 한 바퀴 다 도는 것 말고 또 있어?”그는 그녀를 한참 바라보더니 웃으며 말했다.“남자들의 소원이야. 넌 알 필요 없어.”“소원도 남녀 차별이 있어? 재미없게!”강지연은 그저 코웃음을 쳤다.두 사람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어느새 절 입구에까지 도착했다.도중에 의자에 앉아 온하준을 기다리던 안나와도 합류했다.“나는 이제 돌아가려고. 너희는?”강지연 쪽은 경호원이 셋이나 있었기에 더 태울 자리가 없었다.“내가 운전해 왔어. 우린 조금 더 돌아다니다 갈 생각이야.”“그래.”강지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안나 씨가 모처럼 현국에 왔는데 여기저기 데리고 구경시켜.”현국어를 잘 모르는 안나는 자기 이름이 언급되자 강지연을 바라보며 다정하게 웃었다.강지연은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온하준이 안나 씨한테 자기 결혼 이력은 제대로 말한 걸까?’온하준은 그녀가 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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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10화

이번 귀국 일정은 유난히도 짧았다.예정대로라면 8월 초에는 다시 떠나야 했다.막 귀국했을 때의 설렘이 채 가시기도 전에 벌써 떠날 날짜를 세고 있다는 사실이 어쩐지 마음 한구석을 비워 놓은 듯했다.강지연은 떠나기 전 그래도 최아현을 불러 차씨 가문에 한 번 들러 보기로 했다.놀랍게도 이번에 방문한 차씨 가문의 정원은 지난번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두 노인이 마음을 완전히 내려놓았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집 안에 활기가 차오르고 있는 듯했다.정원에는 푸르싱싱한 꽃과 채소가 가득 심겨 있었고 그 모든 것이 생기 넘치는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문을 열자마자 작은 강아지 한 마리가 뛰어나와 강지연과 최아현의 발치에서 빙글빙글 돌았다.“또또, 그러지 마.”서정희가 강아지를 안아 올리며 인자한 얼굴로 말했다.“놀랐지? 이 아이가 너무 활발해서 말이야.”“아니에요. 괜찮아요.”강지연이 웃으며 말했다.“너무 귀여워요. 강아지 이름이 또또 예요? 또또, 이리 와. 손!”작은 체구의 강아지였고 노부부가 키우기에 딱 알맞은 크기였다.안기도 쉽고 산책을 시켜도 걱정이 없을 만큼.“이 아이가 사람의 마음을 참 잘 알아봐.”서정희가 말을 이었다.“온하준이 사다 준 거야. 우리 부부한테 친구가 되라고.”또 온하준이었다.어디를 가든 그의 흔적은 사라지지 않았다.하지만 이 일만큼은 잘한 선택인 것 같았다.이 작은 강아지는 분명 노부부의 말년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어 줄 존재일 것이다.차유준의 부모는 두 사람을 소파에 앉으라며 차를 따라주고 과일을 깎느라 분주했다.“아저씨, 아주머니. 그러지 않으셔도 돼요. 앉아서 좀 쉬세요.”강지연과 최아현이 이구동성으로 말했다.서정희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하루 종일 쉬기만 해. 이렇게라도 바쁘니까 좋아.”차정욱이 곧장 받아쳤다.“당신이 안 바쁘다고? 요즘은 얼굴 보기도 힘들던데.”“바쁜 건 아니죠.”서정희가 강지연을 바라보며 설명을 덧붙였다.“온하준이 엘리에 가기 전에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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