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다섯 번째 결혼기념일에서: Chapter 531 - Chapter 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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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1화

곧 백스테이지에는 장시범과 화장을 지우고 있던 강지연만 남았다. 강지연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정리하려 했지만 먼저 입을 연 건 장시범이었다.그는 그녀의 뒤에 서서 낮고 그늘진 목소리로 말했다.“넌 아예 나에 대한 마음이 없어.”귀걸이를 빼던 강지연의 손이 잠시 멈칫하다 다시 움직였다.“내가 사라졌는데도 너 전혀 안 불안해하더라.”그의 목소리가 뒤에서 이어졌다. 강지연은 귀걸이를 내려놓고 돌아섰다.“내가 안 불안해했다고? 네 휴대전화에 부재중 전화가 몇 개인지 확인해 볼래?”장시범이 고개를 숙였다.“그건 그냥 내가 돌아와서 춤추길 바랐던 거잖아.”“장시범.”강지연은 똑바로 그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우리 이렇게 유치하게 굴지 말자. 난 정말 이해가 안 돼. 춤을 사랑한다는 사람이 어떻게 무대를 이렇게까지 가볍게 여길 수 있어? 이 무대를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땀 흘렸는지 잘 알잖아. 아무 이유도 설명도 없이 공연을 빠지는 게 얼마나 무책임한 행동인지 몰라?”장시범은 여전히 억울한 표정이었다.“난 빠진 적 없어. 계속 공연장에 있었고 오후 내내 밖에서 기다렸어. 네가 전화를 한 통만 더 했으면, 딱 한 통만 더 했으면 난 바로 달려왔을 거야. 그런데 안 했잖아. 우리 사이가 전화 한 통 더 할 가치도 없는 거였어.”무력감이 몰려와 강지연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어제 마지막 리허설 때 난 이미 너를 포기했어. 리허설도 안 했는데 어떻게 무대에 서? 준비도 안 된 상태로?”“누가 리허설 안 했대? 나랑 방예란은 어젯밤 너희가 다 돌아간 뒤에 무대에 올라 따로 리허설 했어. 난 계속 이 공연을 위해서 준비하고 있었다고. 문제는 너야. 넌 나를 달래주기도 싫어했고 내가 제일 중요한 순간엔 반드시 나타날 거라고 믿어주지도 않았잖아.”강지연은 더는 화를 낼 힘조차 없었다.이미 오래전부터 지쳐 있었던 그녀는 장시범이 공연에서 빠진 것도 모자라 방예란까지 끌어들인 이유조차 따져 묻고 싶지 않았다.“장시범, 이게 네가 날 사랑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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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2화

그 말 한마디에 강지연은 큰 방망이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온하준이랑 다시 시작했냐고? 도대체 어디를 보고 그런 결론이 나온 거지?’“아니야?”장시범은 상처받은 표정이었다.“내가 데리러 안 가니까 온하준이 갔잖아. 너희 둘, 마당 앞에서 만지고 있던데.”그제야 강지연은 그가 말하는 장면을 알아챘다.그날 밤, 술 취한 남자들에게 끌려갈 뻔했던 그날.온하준이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주고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주던 순간이 장시범의 입에서는 ‘만지고 있다’로 표현되고 있었다.이쯤 되자 억울하다는 감정조차 들지 않았다. 대신 더 섬뜩한 감정과 함께 두려움이 스며들었다. 장시범이 음습한 뱀처럼 어둠 속에서 자신을 감시하고 있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장시범, 지금의 너, 솔직히 무서워.”그 말을 남기고 그녀는 분장실을 나섰다.장시범이 뒤따라 나왔지만 문 앞에서 앨런과 다른 경호원에게 가로막혔다.“뭐 하는 거예요?”장시범은 멀어져 가는 강지연을 바라보며 소리쳤다.“내 여자 친구를 쫓아가는 건데 당신들이 무슨 자격으로 막는 거예요?”“죄송합니다, 장시범 씨. 저희는 지시에 따를 뿐입니다. 앞으로 아가씨에게 접근하시는 건 어렵습니다.”앨런은 반듯하게 서서 정중한 태도로 말했다.“누구 지시인데요? 강지연이에요?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시죠!”“로시 씨 지시입니다.”장시범의 얼굴이 굳었다.“시우 형이요? 그럴 리가요?”이유가 무엇인지는 앨런도 알고 있었지만 더 말하지 않았다. 그의 임무는 설명이 아니라 수행이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강지연을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라는 새로운 지시가 내려와 있었다.장시범은 단지 연인 사이에 다툼이 있었을 뿐인데 왜 강시우가 개입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호텔 로비로 돌아온 강지연은 그곳에서 방예란을 마주쳤다. 방예란은 다급히 다가와 뭔가를 말하려다 머뭇거렸다.강지연은 담담한 눈빛으로 방예란을 바라봤다. 솔직히 말해 실망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방예란은 그녀가 가장 기대했던 여자 주인공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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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3화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강지연의 등 뒤에서 들려온 장시범의 목소리에 공기가 단번에 얼어붙었다. 방예란은 그를 보자마자 고개를 치켜들었다.“헛소리 한 거 아니잖아요! 전 사실만 말했을 뿐이에요. 며칠 동안 제가 몇 번이나 말했잖아요. 그냥 복귀하자고요! 그런데 선배가 안 된다고 했잖아요! 마지막 순간까지 버티자고! 단장님은 우리 없으면 안 되니까 결국 우리를 직접 부르러 올 거라고 했잖아요!”“내가 언제 그렇게 말했어?”장시범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그래요. 실제로는 이것보다 더 심하게 말했죠! 공연 시작 직전에도 연기되거나 망할 거라고, 그러면 우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될 거라고 했잖아요! 네, 선배는 공연이 망하길 바랐어요. 그래야 선배가 얼마나 중요한지 드러난다고!”방예란은 그동안 참아온 말을 한꺼번에 쏟아냈다.“너!”장시범의 얼굴이 일그러졌다.방예란은 본능처럼 강지연의 뒤로 몸을 숨겼고 동시에 앨런을 비롯한 네 명의 경호원이 순식간에 강지연의 주변을 둘러섰다.장시범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난 여자는 안 때려. 내가 여자한테 손을 댈 사람으로 보여? 선배, 난 선배한테 주먹이나 휘두르는 그런 남자인 거야?”“그건 아니야.”강지연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하지만 장시범, 이 일은 여기까지 하자. 앞으로의 일은 무용단 계약서대로 처리하고. 앨런.”“네.”앨런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변호사에게 연락해서 후속 조치는 법적으로 진행해 달라고 하세요.”“알겠습니다.”장시범의 눈빛이 흔들렸다.“무슨 뜻이야? 우리 관계를 변호사까지 내세워서 정리하겠다는 거야?”“아니.”강지연의 목소리는 차분했다.“우리 관계에는 변호사까지 필요 없어. 변호사를 부르는 건 네가 무용단과 맺은 계약을 조항대로 처리하기 위해서야.”그녀는 무용단을 하나의 사업으로 여기고 있었고 설립 당시 강시우의 조언을 받아 모든 단원과 계약을 맺었다.애초에 장시범과의 계약은 장난처럼 시작된 것이었다.두 사람 사이의 애정 어린 농담처럼 흘러간 절차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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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4화

“말했잖아. 여기까지라고. 이제 우리 끝이야.”강지연은 경호원들에게 둘러싸인 채 빠르게 자리를 떠났다. 장시범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분노와 수긍하지 못한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다.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여동생에게서 온 전화였다.“오빠, 뉴스 봤어? 며칠 전 밤에 한 유학생이 캠퍼스에서 습격당한 사건 있었는데 범인은 이미 잡혔대. 이거 봐. 이 여자, 언니 아니야?”장시범은 휴대전화를 열어 뉴스를 살폈다. 사진 속 여자의 얼굴은 모자이크 처리가 돼 있었지만 입고 있는 옷은 검은색 티셔츠였다.그녀 곁에 선 남자 역시 같은 검은 티셔츠를 입고 있었고 두 사람의 체형은 너무도 익숙했다. 바로 강지연과 온하준이었다.특히 사진은 여자가 차에 오르는 순간을 포착한 것이었는데 번호판은 보이지 않았지만 차종은 앨런 일행이 평소 타던 바로 그 차량이었고 색깔까지 정확히 같았다.‘그러면 그날 밤, 온하준이 강지연을 데려다준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어? 그것도 모르고 난 뭐 하고 있었던 거야!’“선배! 선배!”장시범은 급히 엘리베이터 쪽으로 달려갔지만 이미 엘리베이터는 올라가 버린 뒤였다. 그는 곧장 강지연에게 전화를 걸었다.다행히 강지연은 전화를 받았고 연결되자마자 그는 숨도 돌리지 않고 말을 쏟아냈다.“자기야, 미안해. 그날 밤에 그런 일이 있었는지 몰랐어. 다 내 잘못이야. 괜히 고집부려서 데리러 가지도 않고 너랑 온하준을 비꼬기까지 하고. 난 그냥... 어쨌든 내가 잘못했어. 정말 그런 상황일 줄은 몰랐어...”한참을 말했지만 반대편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자기야, 듣고 있어?”“늦었어.”강지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뭐가 늦었다는 거야?”장시범이 다급히 물었다.“네가 제일 위험할 때 옆에 없어서 화난 거야? 그땐 정말 몰랐고 앨런이랑 같이 있으니까 괜찮을 거로 생각했어.”“아니.”강지연은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내 곁에 없었던 걸 탓하는 게 아니야. 나는 책임감 없는 사람이 싫을 뿐이야.”위험이 닥쳤을 때 장시범이 곁에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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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5화

그녀가 예술제 무대에서 제비처럼 도약하며 날아오를 때, 베르덴의 어느 병원에서 온하준 역시 그 공연 영상을 보고 있었다.정말로 아름답고 정말로 뛰어났다. 영상 속의 그녀는 고등학생 시절 작은 요정처럼 생기 넘치던 그 소녀와 겹쳤다.이게 바로 그가 알고 있던 강지연이었다. 이렇게 살아 숨 쉬는 무대야말로 그녀가 있어야 할 자리였다.강지연은 온하준이 날개를 꺾어 버린 새도 아니었고, 그가 가둬 둔 금빛 새장 속 카나리아도 아니었다.그녀는 애초부터 숲속의 요정처럼 가볍고 민첩하며 생기로 가득 찬 존재였다.우연히 자신처럼 평범한 사람 곁에 내려앉는다면 단숨에 그의 인간 세상을 환하게 밝혀 줄 수 있는 그런 존재였다.온하준은 영상을 바라보며 스스로에게 거듭 물었다.온하준, 너는 어떻게 이런 요정을 망가뜨릴 수 있었던 거냐고.이제 그의 작은 요정은 마침내 그녀가 있어야 할 숲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시는 그의 곁으로 날아오지 않을 것이다.그런데도 온하준은 이상하게도 그게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강지연, 이제는 네가 사랑하는 곳을 향해 날아가. 망설이지도 흔들리지도 말고 힘차게. 네 마음이 닿는 그 끝에 별과 들판이 끝없이 펼쳐지기를...’안나가 얼굴을 굳힌 채 병실로 들어왔다. 그날 밤 강지연을 구하다 다친 이후로, 안나의 표정은 한 번도 좋아 보인 적이 없었다.“온하준, 이제 더 이상 다치거나 피를 흘리면 안 돼. 알겠어?”엄숙한 안나의 표정에 온하준은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얌전히 말했다.“알았어.”“복막 내출혈이 있었다고!”안나는 여전히 화가 나 있었다.“지금은 멈췄잖아.”그는 웃으며 말했다.“의사 선생님이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있으면 안 된다고 했어. 정말로 안 돼. 목숨이 위험해.”안나가 강하게 경고했지만 온하준은 별거 아니라는 듯 빙그레 웃으며 휴대전화를 다시 들어 보였다.“이거 봐. 정말 아름답지 않아? 현장에서 못 봐서 아쉽긴 하지만.”“아름다우면 뭐 하게? 이제 네 사람도 아니잖아.”안나가 콧방귀를 뀌며 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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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6화

축하연이 끝난 뒤 강지연은 오빠를 따라 고모 집으로 돌아갔다. 할머니와 고모는 왜 직접 무대에 섰으면서 집에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느냐며 서운해했다.알았더라면 꼭 현장에 가서 응원했을 거라는 말도 덧붙였다.강지연은 무용단에 문제가 생겼다고 하면 할머니가 걱정할까 봐, 그저 깜짝 놀라게 해드리고 싶었다며 대충 넘겼다. 앞으로 무대에 설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원래는 단원들에게 며칠 휴식을 주려 했지만 예상과 달리 모두 의욕이 넘쳤고 다음 날 인스타를 보니 이미 연습실에 모여 있었다.그 모습에 강지연은 자신이야말로 쉴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 가족들과 짧은 시간을 보낸 뒤 곧바로 무용단으로 돌아갔다.다음 날 저녁을 먹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학교 근처에 있는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밤이었고 희미한 가로등 불빛만 있을 뿐 주변은 고요했다.앨런 일행이 그녀를 데려다주었다.차가 멈추고 강지연이 문을 열어 발을 디디는 순간, 마치 어떤 스위치가 눌린 것처럼 탁하는 소리와 함께 앞마당에 따뜻한 노란 불빛이 하나둘 켜졌다.이내 바닥에 놓여있던 작은 조명들이 모여 거대한 하트 모양을 이루었고 앞마당을 가득 채운 그 하트의 안쪽에는 온통 장미가 깔려 있었다.그리고 음악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녀의 무용단이 무대에서 췄던 바로 그 음악이었다.장시범은 하트 모양의 장미 한가운데 서 있었다. 늘 그렇듯 깊은 애정을 띤 미소를 얼굴에 걸고 눈가를 촉촉이 적신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손에는 그린 로즈로 된 커다란 꽃다발을 안고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자기야, 나의 여자 주인공. 공연 성공 축하해.”강지연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화려한 장면 속 장미 한가운데 선 남자를 바라봤다.차가운 덩굴 같은 피로가 발끝에서부터 몸을 감아오며 숨을 죄는 듯한 압박으로 번져 갔다.강지연은 한 걸음씩 다가가며 장시범이 내민 손도, 그의 발치와 품에 안긴 장미도 외면한 채 시선을 그의 얼굴에만 고정했다.“장시범, 말했잖아. 우리 이미 끝났다고.”장시범의 미소가 순간 굳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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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7화

그는 더 이상 강지연을 ‘선배’라고도, ‘자기’라고도 부르지 않았다.평소의 온화하고 수줍은 가면을 완전히 벗어던진 자리에는 집요함과 소유욕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강지연은 공포에 질린 채 그를 바라보다가 완전히 굳어버려 반박할 말조차 떠오르지 않았다.앨런이 그녀를 집 안으로 밀어 넣고 문밖을 지키며 장시범을 경계했다.장시범은 바닥에 흩어진 장미와 조명을 마구 짓밟았다. 꽃잎이 형체를 잃고 조명이 하나도 켜지지 않을 때까지 짓이긴 뒤에야 이를 갈며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집 안에 있던 장시연은 그 광경을 보고도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장시범을 바라보며 말했다.“오빠, 지금 너무 무서워.”장시범은 여동생을 힐끗 보고 말했다.“시연아, 나 좀 도와줘.”다음 날 강지연은 평소처럼 한의원으로 가 침 치료와 재활을 이어갔다. 그런데 곽현성을 보는 순간, 장시범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한의사도 그가 찾아준 거고 재활할 때도 옆에서 지켜줬고 재활 과정도 몇 번이나 고쳐 주면서 지금까지 온 거라던 말. 그녀를 다시 무대에 세우기 위해 많은 것을 바쳤다던 말들.그 생각이 스친 순간, 강지연은 재활 기구에서 발을 헛디뎌 넘어지고 말았다.머릿속에는 장시범이 곁에서 재활을 도와주던 장면과 ‘너를 위해 많은 걸 바쳤다’라는 그 말이 반복해서 맴돌고 있었다.다리를 삐끗한 탓에 오후 연습은 할 수 없었고 앨런이 그녀를 병원으로 데려갔다. 촬영과 진찰 결과 뼈에는 이상이 없었지만 최소 일주일은 격한 운동을 피하고 집에서 쉬라는 진단이 내려졌다.강지연은 무용단 단체 채팅방에 자신이 안정이 필요하다는 공지를 올렸다.침대에 눕자마자 휴대전화가 울렸고 메시지가 떴다. 보낸 사람은 장시범이었다.강지연은 이제 그 이름만 봐도 두려움이 먼저 올라왔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문자창을 열자 끔찍한 표정의 이모티콘 하나와 이어지는 음성 메시지들이 떠 있었다.재생 버튼을 누르자 악몽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내가 너를 위해 그렇게 많은 걸 바쳤는데,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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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8화

강지연은 필사적으로 몸부림쳤지만 장시범은 그녀를 더욱 세게 눌러 붙였다. 그의 두 눈은 그녀의 위에서 모든 것을 파괴할 듯 번뜩이고 있었다.그는 같은 말을 집요하게 되풀이했다.“내가 너를 위해 그렇게 많은 걸 바쳤는데 너는 뭐로 갚을 거야? 써먹을 대로 다 써먹고 버리는 거야?”“내가 없었으면 네가 오늘까지 올 수 있었어? 네가 직접 말해 봐.”“누가 널 어둠에서 끌어냈어? 누가 널 다시 무대에 올려놨어? 누가 집에 있는 수십억 재산 다 내팽개치고 이런 황량한 곳에 와서 남자 주인공을 맡아 줬는데?”“이제 더 젊은 남자 주연을 찾았다고 나는 필요 없어진 거야?”“자기야, 어떻게 이렇게 잔인할 수 있어?”강지연은 미친 듯이 고개를 저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의 눈에는 그녀가 이해할 수 없는 날카로움과 광기만이 가득했다.“자기야, 헤어지지 않는다고 말해.”“어서 말해. 나 사랑한다고.”“빨리. 말하면 내가 놓아줄게.”“자기야, 네 인생 전부를 걸고 모든 걸 갚아. 알겠어?”강지연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입은 단단히 막혀 있었고 눈에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질 듯 고여 있었다.“끝까지 이렇게 고집부릴 거야? 안 돼. 자기야, 넌 내 거야. 알지?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아? 널 갖기 위해서라면 난 뭐든 할 수 있어.”그는 갑자기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입을 맞추려 했다. 강지연은 그의 팔에 짓눌려 온몸이 아팠고 백합의 진한 향기와 그의 통제되지 않은 폭력적인 기운이 뒤섞여 속이 뒤집혔다.그의 입술이 닿기 직전 강지연은 온 힘을 다해 고개를 세게 돌리며 한쪽 손을 겨우 빼냈다.짝!맑고 날 선소리와 함께 그녀의 손바닥이 그의 얼굴을 세차게 후려쳤다. 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고 장시범의 몸이 굳어버렸다.몸을 굽힌 채 고개를 옆으로 기울인 그의 왼쪽 뺨에는 다섯 손가락 자국이 선명하게 떠올랐다.“살려 주세요! 앨런!”강지연은 침대에서 굴러떨어지듯 내려와 울부짖으며 외쳤다.“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앨런은 경호원들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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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9화

장시범이 끌려간 뒤에도 공기 속에는 여전히 지워지지 않는, 달콤하다 못해 속을 뒤집는 꽃향기만 남아 있었다. 강지연은 무릎을 끌어안고 바닥에 앉아 굵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앨런은 장시범을 장시연에게 넘긴 뒤에도 강지연을 이 집에 남겨둘 수 없다고 판단해 강시우에게 상황을 보고했고 곧바로 그녀를 강희라의 집으로 데려갔다.강지연은 할머니가 걱정할까 봐 애써 웃으며 재활 중 발을 헛디뎌 삐끗했을 뿐이고 당분간 집에서 쉬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할머니는 곧바로 그녀를 방으로 들여보내 안정을 시키고 몸보신할 음식을 챙기러 나갔다.방문이 닫히자 강지연은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쉬고 싶었지만 잠들 수가 없었다. 머릿속에는 장시범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자기야, 내가 너를 위해 그렇게 많은 걸 바쳤잖아. 네가 평생 나랑 함께해야만 갚을 수 있어. 평생 함께해야만 갚을 수 있어. 오직 평생을...”잠에 빠질 듯 말 듯 할 때마다 그 목소리는 번개처럼 터져 나와 광적으로 귓가를 울렸고 두통이 터질 것처럼 밀려왔다.강지연은 이제 휴대전화가 두려워졌다. 벨 소리만 울려도 반사적으로 몸이 튀어 오르며 심장이 목까지 치솟는 것 같았다.다시 한번 악몽 같은 목소리에 깨어났을 때, 동시에 휴대전화가 울리자 그녀는 화면도 보지 않은 채 휴대전화를 집어 들어 벽으로 힘껏 내던졌다.바닥에 떨어진 휴대전화는 마침내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강지연은 이불을 물고 울음을 삼켰다. 울고 싶었지만 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밤이 되어 집으로 돌아온 강시우는 곧장 그녀의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마주한 것은 눈물이 범벅이 된 채 산산이 부서진 여동생의 모습이었다.“지연아.”강시우가 그녀 곁에 앉았다.“오빠.”강지연은 황급히 몸을 일으켜 세우며 억지로 웃었다.“오늘은 시간 남아서 밥이라도 먹으러 온 거야?”이 지경까지 무너지고도 괜찮은 척하는 강지연이 안쓰럽고 답답해 강시우는 한숨을 내쉬었다.“바보야, 다들 눈이 없는 줄 알아?”그는 낮게 말했다.“할머니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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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40화

“지연아, 잘 들어.”강시우는 그녀의 등을 두드리며 단호하고 힘 있게 말했다.“첫째, 감정은 거래가 아니야. 애초에 갚을 수 있느냐 없느냐는 말 자체가 성립하지 않아. 둘째, 그 사람이 말하는 희생이 만약 너를 묶고 통제하기 위한 목적이었다면 그건 희생이 아니라 투자이고 거래야. 하지만 감정은 절대 거래가 될 수 없어.”강지연은 오빠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여전히 눈물을 흘리고 있었지만 그의 또렷한 말은 뒤엉켜 있던 마음속 실타래를 조금씩 풀어 주고 있었다.“셋째,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거.”강시우의 목소리는 한층 낮아졌고 깊은 애정이 묻어났다.“지연아, 오빠가 너한테 늘 뭐라고 했는지 기억해? 오빠는 네가 행복하기만 하면 돼. 그러니까 스스로에게 물어봐. 지금 너는 행복해?”그는 잠시 숨을 고른 뒤 말을 이었다.“그 사람이 없으면 네가 무대에 다시 설 수 없었다고? 아니야, 지연아. 무대로 돌아올 수 있었던 건 결국 네가 노력했기 때문이야.”그 말은 묵직한 망치처럼 그녀의 가슴을 내려쳤다. 강지연은 멍해진 채 굳어버렸다.“재활하면서 네가 견뎌 낸 고통, 연습실에서 흘린 땀, 다시 일어서겠다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그 용기. 그게 네가 무대로 돌아올 수 있었던 이유야. 그런 게 없었다면 누가 옆에서 뭘 해줬든 아무 소용도 없었어.”“하지만...”강지연은 여전히 장시범이 주입한 수많은 말들 때문에 흔들렸다.“지연아, 넌 누구의 호의를 네 인생으로 갚을 필요 없어.”강시우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단호했다.“네 행복과 네 감정이 가장 중요한 기준이야. 그 사람이 네게 준 게 고통과 억눌림 그리고 자신을 스스로 의심하게 만드는 것뿐이라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 상처야.”강시우의 낮고 잔잔한 목소리에 강지연의 감정은 조금씩 가라앉았다.“무서워하지 마.”그는 아이를 달래듯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오빠가 옆에 있어. 앞으로는 그 사람이 네 곁에 오지 못하게 할 거야.”많이 긴장했던 탓이었을까.강시우의 목소리는 부드러운 자장가처럼 들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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