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다섯 번째 결혼기념일에서: Chapter 651 - Chapter 6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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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51화

영문도 모른 채 무용실 문 앞에서 이승우에게 붙잡힌 강지연은 삼십 분 내내 목이 터지라 소리를 지르는 그의 문제 풀이 설명을 들어야 했다.설명이 끝났을 때쯤 이승우는 목이 다 타버린 사람처럼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반면 강지연은 여전히 어리둥절한 얼굴이었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는 이승우 때문에 머릿속까지 윙윙 울렸다.“그래서 이해를 한 거야, 못 한 거야?”목이 쉬어 걸걸해진 목소리로 묻자 강지연은 눈살을 찌푸렸다.“이렇게 쉬운 문제를 두고 왜 그렇게 소리를 지르는 거야?”순간 말문이 막혔던 이승우는 더 갈라진 목소리로 외쳤다.“그렇게 쉬우면 풀어야지 왜 안 풀어? 전부 백지잖아!”“내가 왜 풀어야 하는데? 네가 하라면 해야 해?”강지연은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이건 내가 시킨 게 아니라 하준이가 너한테 시킨 거라고! 온하준이 너더러 풀라고 했단 말이야!”말투에는 온하준의 말을 감히 안 들을 거냐는 기색이 묻어 있었다.강지연은 더 황당하다는 얼굴로 받아쳤다.“그게 뭐? 내가 온하준 말을 왜 들어야 하는데?”그녀는 시험지를 이승우의 손에 밀어 넣었다.“보충수업 안 받을 거야. 고마워.”“야! 야!”이승우가 다급하게 불렀지만 강지연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걸어갔다.하지만 그녀의 말을 다른 방향으로 받아들인 이승우는 멍하니 서서 머리를 굴렸다.‘내가 아니라 하준이더러 직접 설명해 달라는 건가? 하준이는 지금 눈코 뜰 새 없이 바쁜데...’온하준의 친구로서 이런 사소한 도움도 주지 못하면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 이승우는 밤새 강지연이 자신을 거부한 이유를 곱씹었고 뒤척이며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맞아, 내가 너무 험하게 굴었어.’다음 날 이승우는 영어 문제집을 안고 밀크티 한 잔까지 사 들고 무용실 앞에서 강지연을 기다렸다.그녀가 그를 보자마자 한마디하려는 순간, 이승우는 밀크티를 그녀 얼굴 앞으로 들이밀었다.그 시절의 밀크티는 식물성 크림을 쓰던 때였지만 묘하게 맛이 있었다.이승우는 문제집을 내밀며 어제보다 훨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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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52화

소년 시절의 설렘이란 그런 것이었다.교과서 구석에 몰래 상대의 이름을 적어 두었다가 들킬까 봐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지워 버리는 일.창가를 스쳐 지나가는 모습을 보고 순간 심장이 뛰었으면서도 괜히 매미 소리가 시끄럽다며 짜증을 내는 일.아직 소년이었던 두 사람은 서로의 눈 속에서 참고 견디는 마음과 부딪히는 감정 그리고 뜨겁게 일렁이는 무언가를 분명히 보았다.그러나 그 눈빛에는 흔들림이 없었다.먼저 시선을 거둔 쪽은 온하준이었다. 그는 눈을 내리깐 채, 짙은 눈동자에 일던 파문을 감추며 말했다.“유준아, 미안해. 다른 건 다 할 수 있지만 이것만은 안 돼.”차유준은 억지를 부리지 않고 담담히 물었다.“그럼 말해 봐. 네 인생에서 버릴 수 있는 게 뭐고 절대 못 버리는 게 뭔지. 도와줬으니 대가는 받아야지. 하지만 난 쓸모없는 건 안 받아.”온하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옅게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생각해 보니 자신이 가진 것이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이 다시 실감 났다.“다 버릴 수 있어.”그는 낮은 목소리로 담담하게 말했다.“두 사람만 빼고.”“누군데?”차유준이 곧장 물었다.“우리 할머니.”온하준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두 번째 이름은 끝내 입 밖에 내지 않았다.“나머지 한 사람이 누군지는 너도 잘 알잖아.”차유준은 더 묻지 않았다. 그 이름을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잠시 뒤 온하준이 다시 말했다.“유준아, 네 마음은 알아. 하지만 어떤 일은 한 사람 마음만으로는 안돼. 두 사람이 다 원해야 하잖아.”“걔가 원하지 않는다고 확신하는 이유는 뭔데?”차유준의 말에는 물러섬이 없었다. 온하준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유준아, 대학에 붙을 자신보다 이 일에 대한 확신이 더 커.”차유준은 미소를 지었다.“그래? 그럼 두고 보자.”“그래.”온하준도 고개를 끄덕였다.나란히 병원을 나서는 두 사람은 조금 전의 말들이 스쳐 지나간 적조차 없었던 듯, 여느 때와 다름없는 친구의 모습이었다.다음 날, 온하준이 이승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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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53화

강지연은 책상 위 달력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오지 않은 날짜에 예전의 강지연이 동그라미를 그려 두었다.그 의미를 그녀는 알고 있었다. 온하준의 생일이었다.그때의 강지연은 온 마음이 온하준으로 가득 차 있던 어리석은 소녀였다.말로 드러내지 못한 짝사랑을 이런 사소한 표시들에 조용히 새겨 두었고 두 달 전부터는 생일 선물까지 준비하고 있었다.책상 위에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선물이 놓여 있었다. 강지연이 직접 만들고 있는 수정구였다. 안에는 우주와 별자리를 담았고 깊고 푸른 밤하늘과 쏟아지는 별빛을 표현해 두었다.온하준은 늘 혼자 있는 사람이었기에 강지연은 그 선물을 통해 전하고 싶었다.사람은 홀로 서 있는 것 같아도 곁에는 수많은 별이 함께 빛나고 있다고. 그리고 그중 하나쯤은 자신일지도 모른다고.그 나이에는 화려하고 실속 없는 일에 시간과 정성을 쏟는 것이 자연스러웠다.예전에 달과 꽃을 새겨 넣었던 돌 역시 지금 돌아보면 어린 감정에 취해 있던 흔적일 뿐이었다.그해 그 수정구는 분명 건네졌다.하지만 오 년의 결혼 생활 동안 강지연은 온하준의 일상 어디에서도 그것을 본 적이 없었다.대학과 창업으로 이어지는 시간 속에서 어린 시절의 선물은 어딘가로 사라졌을 것이다.애초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던 물건이었다.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된 지금 굳이 다시 건넬 이유도 없었다.강지연은 자리에 앉아 천천히 작업을 이어 갔다. 이번에는 그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했고 온하준의 생일은 모르는 척 넘어가기로 했다.그러나 그녀가 모르는 척해도 기억하는 사람은 있었다.다음 날, 수업이 끝나자마자 이승우가 이과 반에서 뛰어 내려왔다.강지연은 그를 보자마자 문제 풀이 후유증이 떠올라 반사적으로 도망치고 싶어졌다. 그러나 이승우는 정확히 그녀 앞을 가로막았다.오늘은 또 무슨 문제를 들고 왔나 경계하고 있는데 이승우는 손을 흔들어 차유준까지 불러 세웠다. 그리고 둘을 향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며칠 뒤에 하준이 생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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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54화

온하준은 선물이 무엇인지는 몰랐지만 강지연이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알고 있었다.최숙희가 퇴원하기 전 마지막 입원 날 저녁, 하교 시간이었다. 이승우가 그의 어깨에 팔을 툭 걸치며 말했다.“하준아, 모레야. 나 준비 다 끝냈어. 수업 끝나면 바로 너희 집으로 가는 거다.”“그래.”온하준은 담담하게 대답했다.이승우의 얼굴에는 무언가를 숨기지 못하고 터뜨리고 싶어 하는 기색이 가득했다.“하준아.”그가 웃음을 참지 못한 채 속삭이자 온하준은 왜 그러냐는 표정으로 쳐다봤다.이승우는 그를 끌어당기듯 가까이 붙이며 눈을 반짝였다.“말해 줘도 티 내면 안 돼.”“뭔데.”온하준은 장뇌나무 아래 서 있는 차유준을 힐끗 보며 무심하게 물었다.“강지연이 네 선물 준비하더라.”이승우는 입 모양으로 조용히 말하더니 손까지 휘저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내가 봤다니까? 직접 만들고 있어.”온하준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뭘?”“우주 별자리 수정구.”이승우가 그의 팔을 툭 쳤다.“진짜야. 두 달 전, 아직 반 나누기 전부터 준비했어. 도안이랑 재료 잔뜩 사 오는 거 내가 봤다니까. 궁금해서 검색도 해 봤어. 천장에 별빛 비추는 건데 엄청 손 많이 간대. 강지연이 그렇게까지 귀찮은 걸 할 줄은 몰랐지.”온하준은 코웃음을 쳤다.“너 이름 바꿔라. 정보통으로. 모르는 게 없어. 그걸 나한테 주려고 만드는 건지 네가 어떻게 알아?”“수정구 받침대에 글씨가 새겨져 있는 걸 봤지. Happy Birthday, OHJ라고 씌어 있었는데 네가 아니면 누구야?”이승우는 눈을 반짝이며 덧붙였다.“강지연 너무 성의 있는 거 아니야?”온하준은 다시 짧게 웃었다.“여자애들은 원래 겉만 화려하고 쓸모없는 거 좋아하잖아.”“에이.”이승우가 고개를 저었다.“너 솔직히 말해. 너랑 강지연 혹시 뭐 있어? 응?”떠보는 기색이 분명했다. 온하준은 미간을 찌푸렸다.“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나랑 강지연은 그냥 평범한 친구야. 그 이상도 이하도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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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55화

장뇌나무 아래에 선 차유준이 주머니에서 티켓 두 장을 꺼냈다.“이게 뭔지 한번 봐봐.”강지연의 눈이 단번에 빛났다.“와, 조민서 선생님 공연 티켓이야?”차유준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네가 이걸 어떻게...”강지연의 심장이 순간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조민서. 과거 무용학원에서 강지연의 재능을 가장 먼저 알아봐 준 사람이었다.다리 부상으로 무대에 설 수 없게 된 뒤에도 곁을 지켜 주었고 훗날 악성 루머에 휘말렸을 때도 조건 없이 편이 되어 주었다.그러나 또 다른 시간 속에서의 조민서는 더 이상 무대에 오르지 않고 교육에 전념하고 있었다.그녀가 조명받으며 춤추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였는지, 강지연은 가물가물했다.차유준이 내민 두 장의 티켓은 정확히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차유준!”여름 햇빛 아래, 그녀의 웃음이 환하게 번졌다.“내가 조민서 선생님 좋아하는 걸 어떻게 알았어?”차유준은 고개를 기울이며 웃었다.“몰랐어. 그냥 진경시 무용학원 무용단 소속이라길래. 그 학교가 네 꿈의 학교 아니야? 그래서 미리 예매해 둔 거야.”좌석도 서두르지 않았으면 구할 수 없었을 좋은 자리였다.“그래서 아까 그렇게 급하게 나간 거야? 티켓 받으러?”“응. 택배 도착했다는 연락이 와서.”차유준의 웃음은 여름 햇살처럼 밝았다. 강지연은 티켓을 쥔 채 한동안 웃음을 거두지 못했다.“오늘 저녁이네.”“지금 가자. 근처에서 저녁 먹고 바로 줄 서면 시간 맞아.”차유준은 이미 계획을 다 세워 둔 모양이었다.“좋아, 가자.”걸음을 옮기며 강지연은 휴대전화를 꺼냈다.“티켓 값은 내가 보낼게.”차유준은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그는 사양하지 않았다. 강지연은 고개를 숙인 채 송금했고 차유준은 그런 그녀를 조용히 바라보았다.두 사람의 그림자가 노을 속에서 길게 늘어졌다.계단 위에 서서 말없이 그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온하준은 뒤에서 누군가 재촉하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온하준, 안 가?”“아, 미안.”“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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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56화

조민서는 그녀의 말을 듣고 부드럽게 웃었다.“고마워요.”무대 위에서는 길게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다. 강지연은 아쉬움을 삼킨 채 내려왔고 언젠가 다시 조민서를 만날 수 있기를 조용히 기대했다.극장을 나서자 밤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가슴 깊숙이 일렁이던 감정도 조금씩 가라앉았다.옆에 선 차유준을 보자 강지연은 문득 쑥스러움이 밀려왔다. 갑자기 울어 버린 모습이 이상해 보이지는 않았을까.눈가가 아직 붉어진 채로 강지연은 웃으며 말했다.“나, 좀 웃겼지?”“그럴 리가.”가로등 아래 선 차유준의 눈빛은 옅은 안개를 머금은 듯 부드러웠다.“자기가 좋아하는 걸 보고 감동해서 우는 건 존중받아야 할 일이야.”강지연은 잠시 말을 잃었다. 우는 모습을 이렇게 말해 준 사람은 처음이었다.그녀는 피식 웃었다.“차유준, 말 참 예쁘게 한다.”“그냥 하는 말 아니야.”차유준은 고개를 저었다.“자기만의 열정을 갖는 것부터가 어려워. 그걸 위해 울 수 있다는 건 더 대단하고. 난 그게 부러워.”“이러다 나 진짜 우쭐해지겠는데?”강지연이 장난스럽게 웃었다.“우쭐해도 돼.”그의 눈빛에는 과장이 없었다. 강지연은 문득 차유준이라는 사람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차유준 역시 집요하게 사랑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세상을 관찰하고 직접 발로 걸으며 눈으로 기록하는 일.‘그것 말고 또 뭐가 있을까? 차유준에게는 지키고 싶은 무언가가 있을까?’“차유준.”강지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넌 꿈이 뭐야?”세상의 구석구석을 다 가 보는 것 말고 또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싶었다.“나?”차유준은 잠시 생각하다가 웃었다.“나는 조금 추운 곳에서 살고 싶어. 겨울이면 눈이 내리고 창밖으로 눈 쌓이는 풍경이 보이는 집. 커다란 통유리창이 있고 안에서는 벽난로를 피워 놓고 가족이랑 둘러앉아 고기 구워 먹으면서 술도 한잔하고 밖에 흩날리는 눈을 보는 거야.”그 말을 듣는 순간, 강지연의 머릿속에 세레니아의 기억이 번쩍 떠올랐다.그녀는 차유준의 눈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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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57화

공연을 본 그날 밤, 강지연을 집까지 데려다준 사람은 차유준이었다.요즘은 늘 강시우와 함께 등하교했지만 오늘은 공연이 있어 휴대전화와 가방을 극장 밖 보관함에 맡겨 두었다.공연이 끝나고 나오니 그녀의 휴대전화도, 차유준의 휴대전화도 모두 배터리가 완전히 방전되어 있었다.차유준은 이 시간에 강지연을 혼자 버스에 태울 수는 없다며 자연스럽게 옆에 섰다.이 길 역시 그에게 익숙했다. 다행히 교통카드가 있어 두 사람은 단말기에 카드를 찍고 버스를 타고 돌아왔다.집 앞에 도착하자 홍순자와 강희라가 마당 대문 앞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두 사람은 강지연을 보자마자 동시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드디어 왔네. 시우가 너 데리러 갔었는데 휴대전화가 꺼져 있다고 하더라.”“오빠는요?”강지연은 주변을 둘러봤지만 강시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너 찾으러 여기저기 다니고 있지.”강희라의 말에 강지연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할머니, 고모, 죄송해요. 휴대전화 배터리가 없어서...”“가족끼리 미안하다는 말 하는 거 아니야. 어서 들어가자.”강희라는 말을 끊으며 시선을 차유준에게 옮겼다.“할머니, 고모, 안녕하세요.”차유준은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같은 반 친구예요. 공연 보고 저를 데려다줬어요.”강지연의 소개에 강희라는 환하게 웃었다.“고마워, 학생. 더운데 안에 들어와서 보리차라도 한잔해.”“아, 아니에요. 시간이 늦어서 저는...”차유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희라가 그의 손을 가볍게 잡아끌었다.“괜찮아. 지연이 오빠 오면 데려다줄 거야. 이렇게 더운 날 집 앞까지 와 놓고 그냥 가는 게 어디 있어.”결국 차유준은 집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거실 탁자 위에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우주 별자리 수정구가 놓여 있었다.“와, 예쁘다.”차유준은 미완성 상태임에도 과장된 감탄을 터뜨렸다.“그냥 심심해서 만드는 거야.”처음엔 온하준의 생일 선물이었고 그다음엔 심심풀이 장난감이 되었으며 강시우가 발견한 뒤로는 그가 무료할 때마다 만지작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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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58화

최숙희의 수술이 예정보다 앞당겨진 건 강지연의 영향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이번에는 온하준이 이하나를 만날 일은 없을 터였다.그렇다면 이제 남은 건 온하준과 거리를 두는 것뿐이었다.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이승우와 최아현 그리고 예전 같은 반이던 몇몇이 아예 문과 반 교실까지 들이닥쳐 그녀와 차유준을 둘러싸더니 빠져나갈 틈을 주지 않았다.“가자, 응?”차유준이 먼저 말했다. 농구부에서 함께 운동하며 친해진 그는 온하준의 친구로서 이런 자리를 빠질 이유가 없었다.결국 강지연은 몇몇 손에 이끌리다시피 교실 밖으로 나왔다.“강지연, 이제 반도 다르잖아. 한 번 모이기도 힘들어.”“맞아. 넌 수업 끝나면 바로 연습하러 가니까 급식실에서 얼굴 보기도 힘들고.”“생일도 생일이지만 그냥 다 같이 한번 보자는 거야.”그 말에 강지연은 잠시 생각했다.이곳은 온하준만 있는 세상이 아니었다. 최아현도 있고 함께 웃고 떠들던 친구들도 있었다.다만 생일 자리에 가려면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 했다. 빈손으로 갈 수는 없었다.“너희는 뭐 준비했어?”강지연이 최아현에게 물었다.“우리 몇 명이 돈 모아서 케이크 주문했어. 그리고 하준이 할머니 수술하셨잖아. 병문안 겸해서 뭐 좀 사 가려고.”괜찮은 생각이었다.“나도 같이할게.”“당연하지.”최아현은 그녀가 함께 간다는 사실만으로도 기쁜 표정이었다.그렇게 모두 함께 온하준의 집으로 향했다. 다 같이 모은 돈으로 산 케이크는 차유준이 들고 있었다.초인종을 누르자 문을 연 건 이승우였다.“드디어 왔네!”그는 차유준에게서 케이크를 받아 들고 감탄했다.“와, 진짜 예쁘다.”“우리 다 같이 산 거야.”최아현이 사람들을 한 바퀴 가리켰다.“알았어. 하준이한테 전해 줄게.”이승우는 말하며 슬쩍 강지연 쪽을 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손은 비어 있었다.그는 잠시 미간을 좁혔지만 아무 말 없이 케이크를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최숙희는 아직 방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고 온하준의 안내로 모두 조심스레 방으로 들어가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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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59화

최숙희가 막 퇴원한 터라 이번 파티의 총책임을 자처한 이승우는 집 안에서 요란하게 놀기보다는 마당에서 고기를 굽자고 했다.마당 한쪽에는 이미 그릴이 놓여 있었고 숯에서는 은은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공기 속에 번지는 숯 냄새와 불 향이 본격적인 파티의 시작을 기다리고 있었다.그 전에 이승우가 먼저 집 안에서 촛불을 끄자고 했다.다 함께 돈을 모아 산 과일 케이크가 상 위에 올려졌다. 케이크 전문점에서 산 흔한 제품이었지만 모양은 제법 근사했고 크림 위에 얹힌 과일도 싱싱해 보였다.생일 노래가 끝나자 모두가 온하준을 향해 외쳤다.“소원 빌어!”그 순간, 온하준은 아주 잠깐 강지연을 바라보았다.최아현과 차유준 사이에 서 있던 강지연은 환하게 웃고 있을 뿐 다른 기색은 없었다.“온하준, 소원 빌라니까.”최아현의 재촉에 온하준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마음속으로 조용히 무언가를 되뇌고 다시 눈을 뜨며 촛불을 불어 껐다. 곧 박수 소리가 터졌다.“하준아, 무슨 소원 빌었어?”이승우의 물음에 온하준은 대답하지 않은 채 케이크를 자르기 시작했다.“당연히 할머니 건강해지시라고 빌었겠지.”최아현이 이승우를 흘겨보며 말했다.“그리고 그런 걸 왜 물어? 소원은 말하면 안 되는 거 몰라?”“왜?”이승우가 눈을 크게 떴다.“말 안 하면 누가 알아서 이뤄 줘? 알려줘야 도와주는 사람이 생기지.”잠시 주변이 조용해졌다.이승우는 진지한 얼굴로 덧붙였다.“예를 들어 내가 새 컴퓨터 달라고 빌었는데 말 안 하면 우리 부모님이 어떻게 알아?”결국 그는 여기저기서 동시에 머리를 한 대씩 얻어맞았다.웃음이 터졌고 분위기는 한층 밝아졌다. 모두가 떠들고 장난을 쳤지만 그 속에서 강지연과 온하준만은 비교적 조용히 웃고 있었다.강지연은 한 번의 생을 더 살아본 사람이라 담담한 것이라 쳐도 온하준이 왜 저렇게 차분한 표정인지 문득 의문이 들었다.“자자, 할머니 쉬셔야 하니까 인제 그만 떠들고 나가서 고기 굽자!”이승우가 머리를 감싸 쥔 채 먼저 마당으로 뛰쳐나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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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60화

이승우는 번데기 꼬치를 들고 연신 맛있다며 설득에 나섰지만 누구 하나 호응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최아현은 이미 한 발짝 떨어져 앉아 노골적으로 고개를 저었다.강지연은 옆에 앉은 차유준을 힐끗 보며 웃었다.“너도 번데기 안 먹어?”차유준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절대 안 돼. 저건 진짜 못 먹어.”번데기나 매미 유충이나 메뚜기나 별다를 것 없지 않나 싶어 강지연은 피식 웃었다.온하준이 마당으로 나왔을 때, 강지연 옆자리는 이미 차유준과 최아현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그릴 위에는 고기와 채소가 하나둘 올라가 있었다. 강지연은 부추 꼬치를 몇 개 집어 조심스럽게 굽고 있었다.온하준도 자리에 앉자마자 소고기 꼬치를 한 움큼 집어 들었다.“하준아, 고기 구울 줄 알아?”이승우가 괜히 웃으며 물었다. 불길과 연기 속에 있는 모습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듯한 말투였다.온하준은 대답 대신 고기 위에 쿠민을 한 움큼 뿌렸다. 향이 순식간에 퍼졌다. 집게로 고기를 뒤집는 손길은 망설임이 없었다.이승우는 그 모습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오호, 제법인데.”“먹을 땐 조용히 먹어.”온하준이 무심하게 말했다.아르바이트한 적이 있었기에 직접 굽지 않았더라도 다른 사람이 하는 모습을 수없이 봐왔다. 이승우도 그 사실을 떠올렸는지 더는 말하지 않았다.온하준은 자신의 아르바이트 경력을 드러내는 걸 달가워하지 않았다.이승우 역시 늘 고고하고 자존심 강한 그가 어린 나이에 생계를 위해 여기저기 뛰어다녔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연기 속에서 다시 웃음소리가 터지며 분위기는 금세 풀렸다.온하준은 묵묵히 고기를 굽다가 가장 먼저 익은 꼬치를 이승우에게 내밀었다.“이거 먼저 먹어. 오늘 준비하느라 고생했어.”“하준아!”이승우는 감격한 얼굴로 그대로 고기를 베어 물었다.그 뒤로 온하준은 한 꼬치씩 사람들에게 나눠 주었다.“와, 웬일이야? 온하준이 우리한테 고기를 다 구워 주고?”농담 섞인 탄성이 이어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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