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다섯 번째 결혼기념일에서: Chapter 641 - Chapter 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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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41화

“들어가. 난 괜찮아.”강지연은 그저 병상에 누워 분명 생기 하나 없으면서도 자신과 홍순자를 향해 애써 웃어 보이던 온하준의 모습이 문득 떠올랐던 것이다.“너 말이야...”저녁노을 아래 아직 소년인 그가 불쑥 손을 내밀어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스쳤다.“별로 큰일도 아니야. 선택한 길은 달라도 결국은 같은 곳에 도착할 거니까.”그 손길에 강지연은 반사적으로 한발 물러섰다.온하준은 손을 펼쳐 작은 종잇조각을 보여주며 말했다.“머리에 묻었길래.”“그래, 고마워.”괜한 오해를 했다는 걸 깨달은 순간 그녀는 얼굴이 뜨거워졌다.“난 다시 일하러 들어가야 해. 먼저 집에 가. 내일 보자.”그가 손을 흔들며 말했다.강지연은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선택한 길은 달라도 결국 같은 곳에 도착할 거라는 말의 의미를 묻고 싶었다.하지만 온하준은 연신 손짓하며 재촉했다.“빨리 가. 날이 금방 어두워져. 할 말 있으면 내일 학교에서 해.”그는 더 말할 틈도 주지 않고 가게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강지연은 사라지는 온하준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다가 천천히 몸을 돌려 지하철역으로 향했다.‘그래, 할 말은 나중에 다시 하자.’아르바이트가 끝났을 때는 밤 열한 시였고 그가 지하철을 타고 집에 도착하니 이미 자정이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주방에는 최숙희가 해 둔 밥이 아직 따뜻하게 남아 있었다.현관문 여는 소리에 그녀는 방에서 나오더니 걱정이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오늘은 왜 이렇게 늦었어?”“도서관에서 책 좀 보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어요.”그는 아르바이트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가게에서 토스트를 조금 먹긴 했지만 여전히 배가 고팠던 온하준은 밥을 들고나와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최숙희는 맞은편에 앉아 환하게 웃으며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두 사람이 이렇게 마주 앉아 있을 수 있는 시간은 많지 않았다.평소에는 학교에 가느라 바빴고 주말에는 ‘도서관’에 가느라 바빴다.그래서인지 이 짧은 저녁 시간은 더 소중하게 느껴졌다.“요즘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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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42화

온하준은 어릴 적부터 유난히 철이 빨리 든 아이였다.무슨 일이든 대충 넘기는 법이 없었고 맡은 일에는 언제나 최선을 다했다.하지만 하필이면 믿음직스럽지 못한 부모를 둔 탓에 그는 일찍이 어른이 되어야 했다.부모는 해외로 떠나버렸고 온하준은 결국 할머니 손에서 자라게 되었다.최숙희는 곁에서 몇 년은 더 지켜 줄 수 있을 거로 생각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그녀는 자신이 과연 언제까지 그의 곁에 있어 줄 수 있을지 몰랐다.하여 온하준이 자신의 앞날을 위해서든 사랑을 위해서든 앞으로 나아가려 한다면 그 길을 막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최숙희는 그저 앞으로 그가 평안하고 무탈하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서로를 의지하면서 평생을 함께 걸어가기를 바랄 뿐이었다.그녀는 끝까지 웃음을 거두지 않았지만 시야는 점점 흐려지고 있었다.“할머니, 건강 잘 챙기셔야 해요. 나중에 제가 모시고 진경시 곳곳을 제대로 구경시켜 드릴게요.”온하준은 진지한 태도로 말했다.“그래? 아이고, 그거참 좋겠다. 할머니가 기대하고 있을게.”최숙희는 그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최근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았고 결과가 좋지 않았다는 사실은 끝내 입 밖에 내지 않았다.그는 아무것도 모른 채 제법 들뜬 표정으로 진경시의 문화에 대해 한참이나 이야기를 나눈 뒤에야 방으로 들어갔다.집으로 돌아온 강지연은 문득 한 가지 생각에 사로잡혔다.최숙희가 세상을 떠난 건 온하준이 고등학교 3학년 때였다.‘만약 몸이 편찮으시다는 걸 일찍 발견하고 더 일찍 치료했다면 온하준은 할머니를 잃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면 그 병원에 입원하지도 않을 것이고 이하나를 만날 일도 없었겠지? 그렇게 되면 이후의 이야기 역시 지금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았을까?’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자 그녀는 곧바로 휴대전화를 꺼내 최숙희의 병이 진행되는 과정을 검색하기 시작했다.강지연은 밤이 깊어 가는 줄도 모르고 검색에 매달렸고 결국 새벽이 되어서야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하지만 이상하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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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43화

잠들 수 없는 밤이었다.강지연도 홍순자도 좀처럼 잘 수가 없었다.강희라와 강시우 역시 들뜬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네 사람은 거실에 둘러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고 홍순자는 집에 있는 간식과 과일을 모조리 꺼내 상 위에 한가득 올려놓았다.분위기는 설날보다도 더 북적이고 따뜻했다.강지연은 지난 몇 년을 해외에서 강희라 모자와 함께 지내며 깊은 정을 쌓아왔다.이렇게 다시 한자리에 모여 얼굴을 마주하니 그 기쁨을 말로는 표현할 수가 없었다.다만 다음 날 학교에 가야 했기에 결국 홍순자에게 떠밀리듯 방으로 들어가야 했고 밤새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다음 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주방에서 들려오는 두 사람의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홍순자는 강희라에게 몇 번이나 나가서 쉬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고집스럽게 자리를 지키며 다정하게 말했다.“여기 이렇게 서 있으니까 어릴 때 생각이 나네요. 잔치국수도 몇 년 만에 먹는지 모르겠어요.”그 말을 듣는 순간 강지연의 머릿속에는 문득 베르덴에 있던 장면이 스쳤다.집에는 분명 도우미들도 있었지만 그들은 나란히 서서 고향 음식을 직접 만들겠다며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고 그 생각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강희라는 그녀를 보자마자 손짓했다.“지연아, 얼른 와. 아침 먹고 오빠보고 학교에 데려다 달라고 해.”“괜찮아요. 저 혼자 가도 돼요.”아직 이른 시간이라 어젯밤 늦게까지 자지 못했을 강시우를 생각하면 혼자 가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어차피 할 것도 없는 애야. 지금 밖에서 화분에 물 주고 있어.”강희라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오빠가? 화분에 물 주고 있다고? 진짜?’강지연은 호기심에 밖으로 뛰어나갔다.그리고 마당에서 호스를 움켜쥔 채 흠뻑 젖어 서 있는 강시우를 발견했다.“오빠, 화분에 물 주는 거 맞아요? 오빠한테 주는 거 아니고요?”그녀는 이렇게까지 엉망이 된 그의 모습은 처음이었기에 배를 잡고 웃었다.강시우는 목장에 있을 때조차도 늘 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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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44화

강시우다운 방식이었다.그날, 그는 강지연을 학교 문 앞까지 직접 데려다주었다.사실 기말고사는 이미 끝났고 원래라면 여름방학이 시작됐어야 했지만 보충 수업이 이어지는 탓에 학교에는 여전히 학생들로 북적이고 있었다.그녀는 주변을 이리저리 살피며 학생들 사이에서 온하준을 찾고 있었다.최숙희를 모시고 건강검진을 받아보라고 미리 말해주고 싶었던 것이다.하지만 대놓고 말하기에는 어딘가 어색했다.그때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는 한 남학생과 나란히 걸어가고 있었다.강지연은 빠른 걸음으로 거의 뛰다시피 다가가 두 사람을 스쳐 지나가는 척했다.“강지연!”온하준은 보자마자 그녀를 불러 세웠다.강지연이 고개를 돌리자 그가 바로 물었다.“왜 그렇게 빨리 가?”“아, 널 못 봤어.”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지만 머릿속에는 온통 어떻게 말을 꺼내야 자연스러울지 하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그때 옆에 있던 남학생이 웃으며 말했다.“강지연, 너 다크서클 장난 아니야. 어젯밤에 잠 안 자고 뭘 훔치러 다녔어?”강지연은 원래 잠을 못 자면 눈 밑이 쉽게 어두워지는 편이었다.하지만 그의 농담이 그녀에게는 오히려 하나의 실마리가 되었다.“어젯밤에 좀 못 잤어. 마을에 어떤 할머니가 아프시다고 들었거든.”강지연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물론, 마을에 그런 할머니는 존재하지 않았다.“그래서 말인데, 어르신들 몸에 이상이 느껴지면 바로 병원 가서 검사받아야 해. 그 할머니도 평소에 증상이 있었거든. 갑자기 살이 엄청나게 빠졌어. 나이 들면 통통한 것보다는 날씬한 게 건강에 좋다고는 하지만 천천히 빠지는 거랑 갑자기 확 빠지는 건 전혀 다르거든. 갑작스러운 체중 감소는 몸이 보내는 경고일 수도 있어. 그리고 또...”그녀는 최대한 담담한 척하며 최숙희에게 이미 나타났을 수 있는 초기 증상들을 하나하나 짚어 내려갔다.강지연의 말을 듣는 순간 온하준의 표정은 점점 굳어갔고 증상이 하나씩 추가될 때마다 얼굴은 눈에 띄게 창백해졌다.결국 그는 참지 못하고 옆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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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45화

차현식은 은퇴 후에도 여러 차례 다시 초빙되어 돌아온 경험 많은 의사였다.이번에는 모든 검사 결과가 다 나온 듯했다.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수술 계획을 설명했다.“이 병은 일반적으로 별다른 증상이 없습니다. 스스로 몸이 이상하다고 느낄 정도가 되면 이미 말기인 경우가 많거든요. 그런데 어르신은 비교적 이른 시기에 발견하신 겁니다. 지금 수술을 받으시면 좋은 결과를 기대해 볼 수 있습니다.”최숙희는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정말인가요? 암도 치료가 가능한 건가요?”차현식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요즘은 암이라고 해도 무조건 겁낼 필요는 없습니다. 완치 여부는 여러 수치를 종합해 판단해야 합니다. 다만 현재 상태로 보았을 때는 가능한 빠른 시일 내에 수술을 진행하면 결과가 좋을 것으로 보입니다.”최숙희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조심스럽게 되물었다.“그럼... 의사 선생님도 나을 수 있다고 장담은 못 하신다는 거죠?”차현식은 검사 결과와 수술 방안을 다시 한번 차근차근 설명했다.물론 수술의 위험성과 수술 후 발생할 수 있는 여러 가능성까지도 하나하나 빠짐없이 전달해 주었다.그녀 역시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은 아니었다.아무리 의사가 사람을 살리는 직업이라 해도 어떤 병이든 완치를 장담할 수 없다는 사실쯤은 알고 있었다.최숙희는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결국 수술을 하기로 마음먹었다.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상관없었다.차라리 조금이라도 일찍 세상을 떠난다면 온하준에게 짐이 되는 일은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반대로 운이 따른다면 몇 년이고 그의 곁에 더 머물러 온하준이 어엿한 어른이 되어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그를 이 세상에 홀로 남겨 두는 일만큼은 생각만 해도 가혹했다.“의사 선생님, 수술받겠습니다. 바로 일정 잡아주세요.”최숙희의 목소리는 뜻밖에도 너무나 단호했다.진료를 마친 후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 다음 날 입원 준비를 하기로 생각했다.이미 정오를 훌쩍 넘긴 시각이었다.온하준이 집에 와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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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46화

그날 저녁 최숙희가 준비한 밥상에는 전부 온하준이 좋아하는 음식들로 가득했고 음료수까지 곁들여진 상 앞에서 두 사람은 오랜만에 여유로운 식사 시간을 보냈다.식사 도중 최숙희는 친구들과 여행을 다녀오려고 한다며 혼자서도 밥을 잘 챙겨 먹으라고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그 말에 온하준은 금세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좋은 생각이네요. 할머니, 저 이제 서너 살짜리 어린애가 아니에요.”그는 할머니가 자신 때문에 발이 묶이는 일은 없기를 바랐고 남은 시간만큼은 마음껏 즐겁게 보내기를 바랐다.최숙희는 그런 손자를 바라보다가 아무 말 없이 그저 환하게 웃었다.같은 시각, 차현식의 집에는 손님이 찾아왔다.차유준이었다.그는 차현식이 가장 좋아하는 호두과자를 사 들고 환하게 웃으며 들어섰다.손에 든 과자 봉투를 보자마자 차현식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또 무슨 꿍꿍이냐?”차유준은 헤벌쭉 웃으며 능청스럽게 답했다.“작은할아버지, 그렇게 말씀하시면 섭섭하죠. 그냥 할아버지 뵈러 온 건데요.”차현식은 차정욱의 삼촌이었다.“너는 말이야...”그는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네가 부탁한 일은 잘 처리했어. 그 어르신 내일 입원하시기로 했거든. 그러니까 앞으로 더는 날 귀찮게 하지 마라. 파리 떼처럼 너무 윙윙거려서 머리까지 아프네.”“무슨 그런 마음에도 없는 말씀을 하세요!”차현식의 아내가 나오더니 그를 꾸짖었다.“애가 속이 넓어서 다행이지. 다른 사람이었으면 벌써 화병 나서 돌아갔어요.”“할머니, 저는 괜찮아요. 장난이신 거 다 알아요.”차유준은 여전히 밝게 웃으며 말했다.“누가 장난이래?”차현식은 또다시 코웃음을 치며 말을 이었다.“부탁하러 와서는 호두과자로 때우려고?”차유준은 눈치를 살피더니 재빨리 입을 열었다.“그럼 저랑 바둑 몇 판 두시죠?”그 말에 차현식은 눈빛이 번쩍였다.“그건 좀 괜찮네.”“할아버지, 그리고 제 친구 할머니 말인데요. 간병인도 좀 알아봐 주셨으면 좋겠어요. 친구가 학교에 가야 해서 직접 간병하긴 어려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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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47화

최숙희의 수술은 오전 첫 순서로 잡혀 있었다.그날 아침 그녀는 모든 일을 차분하게 안배해 두었다.간병인도 미리 구해 두었고 입원비와 수술비까지 이미 납부를 마친 상태였다.간병인은 온화한 인상의 사람이었고 병실을 정리하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자녀분들은... 안 오시나요?”최숙희는 그저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다.“다들 바쁜 사람들이에요. 작은 수술이니까 괜히 번거롭게 하고 싶지 않아서요.”간병인은 이번 수술이 절대 작은 수술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그녀는 그저 속으로 짧은 한숨을 삼키며 더는 묻지 않았고 간호사와 함께 최숙희를 수술실로 모셨다.그런데 뜻밖에도 수술실 문 앞에는 학생처럼 보이는 한 청년이 서 있었다.온하준의 친구 차유준이었다.“유준아, 네가 여기까지 웬일이니?”부드럽게 웃던 최숙희는 문득 자신의 주치의인 차현식 역시 차 씨라는 생각이 떠올랐다.“설마 차 선생님이 너의...”“네, 할머니. 저희 작은할아버지세요.”차유준은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저도 할아버지한테서 들었어요. 오늘 수술하신다는 말씀을요. 저랑 하준이는 제일 친한 친구잖아요. 하준이한테 비밀로 하신 데는 이유가 있으실 거로 생각했어요. 대신 제가 곁에 있어 드리면 되죠.”최숙희는 눈시울을 붉히더니 말했다.“고맙구나, 유준아. 괜히 수업 빼먹지 말고 얼른 학교에 가.”“괜찮아요, 할머니. 하준이 할머니면 제 할머니이기도 하잖아요. 어서 들어가세요.”차유준은 그녀의 손을 꼭 감싸 쥐며 말했다.“할머니, 힘내세요. 제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최숙희는 자신의 손이 그의 손바닥에서 빠져나오는 마지막 순간을 또렷하게 느꼈다.차유준은 손을 놓는 것을 아쉬워하며 손끝에 힘을 더 주고 있었던 것이다.그녀는 차유준과 시선을 마주한 채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고 그의 눈빛 역시 유난히 따뜻했고 어딘가 익숙했다.조금만 더 자세히 보고 싶었지만 침대는 이미 멀어지고 있었다.수술실 문이 닫히며 그 따뜻한 눈빛도 문밖에 그대로 남겨졌다.차유준은 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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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48화

온하준이 수술실 앞을 몇 바퀴째 맴돌고 있을 때였다.그가 갑자기 몸을 돌리는 바람에 마찬가지로 좀처럼 자리에 앉지 못하고 서성이던 차유준과 하마터면 정면으로 부딪칠 뻔했다.두 사람은 동시에 멈춰 섰다.그 순간 온하준은 차유준 역시 누가 봐도 초조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차유준은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미안, 부딪칠 뻔했네. 나도 좀 걱정돼서... 집도의가 우리 작은할아버지잖아. 만약에... 아니야, 그런 일 없을 거야. 할머니는 분명 무사히 나오실 거야.”온하준은 그제야 이해가 되는 듯했다.차유준은 자신의 할아버지가 집도하는 수술이기에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온하준을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두려웠던 것이다.그는 차유준이 괜한 걱정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어찌 됐든 차유준은 자신보다 먼저 할머니를 수술실까지 모셨고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고마웠다.“유준아, 무슨 일이 있더라도...”온하준의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넌 내 은인이야.”차유준은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일단 할머니가 나오시면 다시 말하자.”온하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이 은혜는 평생 가슴에 새길게.”두 사람은 더 깊은 침묵 속에 빠져들었고 기다리는 매 순간이 지옥처럼 느껴졌다.무려 여덟 시간이 지나서야 마침내 수술실 문이 열렸고 이내 차현식이 모습을 드러냈다.피로가 역력한 얼굴이었지만 분명한 안도와 미묘한 흐뭇함이 묻어 있었다.급히 달려오는 두 소년을 본 차현식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수술은 순조롭게 잘 끝났어.”그 한마디에 두 사람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기쁨에 겨워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으니 이제 남은 건 회복뿐이었다.최숙희는 의식을 되찾자마자 두 소년을 학교로 돌려보내려 했다.“간병인 아주머니가 계시잖아. 책임감 있고 성실한 분이셔. 그러니까 너희는 걱정하지 말고 얼른 학교로 돌아가서 공부나 열심히 해. 너희가 여기 있으면 내 마음이 더 불안해서 회복에 방해가 되거든. 먹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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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49화

온하준은 결국 학교에서 강지연과 마주치고 말았다.그날은 최숙희가 수술을 받은 지 일주일째 되는 날이었다.온하준의 얼굴은 눈에 띄게 야위어 있었고 피로가 겹겹이 내려앉아 초췌해 보였다.하지만 최숙희는 그에게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이었기에 간병인이 곁을 지키고 있음에도 그는 매일같이 병원을 찾았다.가능한 오래 곁에 머물렀고 드실 수 있을 만한 음식을 이것저것 챙겨 들고 가곤 했다.학교, 아르바이트, 그리고 병간호.예전과 다를 바 없이 온하준은 여전히 힘겨운 하루를 버텨내고 있었고 원래도 말이 적은 성격이었지만 요즘은 더욱 과묵해졌다.다만 이번은 분명 달랐다.강지연은 그해 고등학교 3학년이던 시절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그때의 온하준은 늘 짙은 그늘을 드리운 채 음울함 속에 잠겨 있었다.단순한 음울함이 아니라 완전히 절망에 빠진 사람의 얼굴이었다.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곧 세상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사실 앞에서 온하준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그 무력감이 어떤 것인지 강지연은 잘 알고 있었다.그녀의 삶 역시 오직 할머니뿐이었기 때문이다.하여 강지연은 몰래 그를 도왔었다.지금의 온하준은 누가 봐도 피곤함에 짓눌린 얼굴이었지만 그의 눈빛에는 더 이상 그때와 같은 절망은 담겨 있지 않았다.그날 비가 내리고 있었고 두 사람은 학교 건물 계단에서 마주쳤다.온하준은 우산도 없이 급히 뛰어 올라오고 있었고 젖은 머리카락이 이마에 달라붙어 두 눈은 유난히 또렷하고 맑게 빛나 보였다.“강지연?”그녀를 마주친 순간 온하준의 눈빛은 한층 더 밝아졌다.“연습하러 가는 거야?”“응.”강지연은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다시 입을 열었다.“할머니께서 입원하셨다면서? 지금은 좀 어떠셔?”“많이 좋아지셨어.”피곤이 내려앉은 얼굴이었지만 그 안에는 분명 안도와 기쁨이 스며 있었다.“회복도 잘하고 계셔. 의사 선생님이 며칠만 더 지켜보면 퇴원해도 된대.”“다행이다. 할머니, 빨리 쾌차하시길 바랄게.”강지연은 진심으로 최숙희가 완쾌하길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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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50화

그런데 인제 와서 갑자기 진경시에 관심을 두고 있으니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온하준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노트를 가방에 넣으며 말했다.“할머니가 그러시더라. 우리나라에 구경거리가 이렇게 많은데 한 번 제대로 둘러본 적이 없고 해성을 벗어나 본 적도 없으시대. 내가 진경시 대학에 가게 되면 할머니를 모시고 여기저기 구경시켜 드리려고.”이승우는 그의 사고방식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그럼 방학 때라도 돌아다니면서 구경하면 되잖아.”“넌 몰라. 꺼져.”온하준은 그를 자기 자리에서 슬쩍 밀어냈다.“그래, 난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돼.”이승우는 투덜거리며 자리에서 물러났다.“같은 대학에 가자더니, 약속 안 지키네.”온하준은 갑자기 무언가 떠올린 듯 고개를 돌려 이승우를 바라보며 물었다.“야, 너 이 시간대에 시간 좀 돼?”그는 시간표를 꺼내 몇 군데 동그라미를 치며 물었다.“농구?”이승우는 그가 요즘 할머니 병간호 때문에 바빠 농구를 못 하겠다는 줄로 알고 말을 이었다.“괜찮아. 네가 시간 없으면 우리끼리 하면 되지.”“그게 아니라...”온하준은 잠시 말을 고르더니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다음 주 이 시간에 시간 되면 강지연 수학이랑 영어 숙제 좀 봐줘. 모의고사도 같이. 모르는 거 있으면 설명도 좀 해주고...”“뭐? 야, 온하준! 나보고 지금 농구 그만두고 문제 풀이 봐주라는 거야?”그는 언성을 높이며 말을 이었다.“너 대체 강지연한테...”“나 걔한테 돈 받았어.”온하준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차분했다.“뭐... 뭐라고?”이승우는 또 한 번 오해하고 말았다.사실 그는 온하준이 밖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다만 자존심이 유난히 강한 녀석이라 자신의 힘든 처지를 들키기라도 하면 겉으로는 멀쩡한 척하면서 속으로는 곪아갈 타입이었다.게다가 할머니까지 입원해 계시니 돈도 많이 들 터였고 강지연의 과외를 맡아 하면서 돈을 버는 줄로 생각했다.그때 온하준이 말을 덧붙였다.“수업료는 내가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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