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촬영 장소는 나 같은 조연 배우가 정할 수 있는 게 아니야.”단아는 조금 전과 다르지 않은 온순한 말투로 도현에게 설명했다. “제작진이 H시에서 찍겠다고 정했는데 고작 조연인 내가 나서서 여기서는 못 찍는다고 할 수는 없잖아.”“그런 문제는 내가 해결해.” 도현은 단아의 손을 움켜쥐었다.단아는 겉으로만 수긍했다.H시에서 촬영하게 되면 가장 좋겠지만, 여건이 안 된다면 억지로 고집할 생각은 없었다.촬영에 들어가기만 하면 도현이 매번 단아의 핸드폰을 들여다볼 수는 없었다. 카톡 계정은 도현의 태블릿에 연동되어 늘 감시받았지만, 일반 문자까지 실시간으로 확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기분 상했어?” 안경 너머 도현의 눈은 속을 읽기 어려웠다.“내가 그렇게 막무가내로 구는 사람이야?” 단아는 부드럽게 답했다. “당신이 직접 나서서 해결하다가 혹시 누군가가 우리 관계를 눈치채지 않을까 걱정하는 것뿐이야.”“그럴 일 없어.” 도현은 이런 일을 늘 철저히 숨겼다. “사람들이 나와 남녀 주연 사이를 의심하면 했지, 이름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너를 의심하진 않을 테니까.”단아는 불쾌한 감정을 누르고 이미 습관이 된 웃음을 지었다. “그럼 다행이고.”두 사람은 각자 다른 속셈을 품었다. 어느 쪽도 진심을 내보이지 않았다.차이가 있다면 한 사람은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고 수단을 가리지 않았고, 다른 한 사람은 상대에게서 달아나기 위해 온 힘을 쏟고 있다는 점이었다.두 시간이 지난 뒤.두 사람은 이른바 ‘해야 할 일’을 마쳤다.도현은 옆에 누워 눈을 감고 있는 단아를 바라봤다. 가슴에 뚫린 빈자리는 조금도 채워지지 않았다. 오히려 전보다 더 텅 비고 쓸쓸해졌다.여자 하나 때문에 모든 걸 내던지는 중현이 어리석고 무지하다고 여겼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중현이 부러웠다.강솔과 헤어진 뒤에도 서로를 신경 쓰는 관계가 부러웠다.두 사람이 함께 아끼는 아이가 있다는 사실도 부러웠다.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걸 수 있는 중현의 용기도 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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