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버린 건 나였지만, 무너진 건 너였다: Chapter 111 - Chapter 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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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1화

허아연이 말했다."빨리 가봐요. 중요한 자리인데 늦으면 안 되죠. 지원이는 제가 돌볼게요."허아연이 남아서 돌봐주겠다고 하자 지일우는 먼저 병원을 떠났다.지일우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허아연은 돌아서서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침대 옆 의자를 당겨 앉아 얼굴을 받치고 침대에서 자고 있는 아이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유건희를 만난 아이가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얇은 이불을 들어 아이에게 덮어주고 있을 때 유건희가 돌아왔다.허아연이 일어서며 말했다."일우 선배는 여자친구랑 결혼 얘기 나눠야 해서 먼저 갔어요.""네, 알고 있어요."유건희가 침대로 다가와 유지원을 살펴보고 이불을 여며주더니 허아연에게 말했다."가요, 데려다줄게요."유건희의 말을 들은 허아연이 말했다."대표님, 저 혼자 택시 타고 갈 수 있어요. 여기서 지원이 곁에 계세요.""지원이 잠이 깊은 편이에요.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도 있으니 잠깐 자리 비워도 괜찮아요."유건희가 말하지 않은 게 있었다. 유지원은 이 병실의 단골 손님이었다.유건희의 말에 허아연도 더 이상 사양하지 않았다.두 사람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왔을 때 밖은 이미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반대로 병원 안은 환히 밝았다.두 사람은 응급실 쪽으로 나가고 있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출구 쪽으로 가고 있는데 허아연의 눈에 주현우가 오지은을 안고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두 사람 뒤로 다른 사람들이 걱정 가득한 얼굴로 따라오고 있었다. 그런데 하나같이 주현우가 아닌 오지은의 얼굴을 살피고 있었다.오늘 주현우는 흰 셔츠에 검은 슬랙스 차림에 늘 그렇듯 소매를 걷어 올린 채였다.오지은을 안은 주현우는 긴장한 표정이었다. 눈에 오지은 외에 다른 어떤 것도 보이지 않는 듯했다. 바로 앞에서 걸어오는 허아연도. 주현우의 목을 감싸고 있는 오지은은 립스틱도 바르지 않아 입술 색이 평소보다 창백했다. 오지은이 행복한 눈빛으로 주현우를 보며 웃으면서 말했다."현우야, 나 괜찮아. 그렇게 긴장 안 해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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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2화

유지원의 발 얘기를 하는 내내 유건희는 입양 사실을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유건희의 말을 듣고 허아연이 물었다."수술 잘 되면 완전히 문제 없는 거죠?""완전히 회복돼요. 의사 선생님이 후유증은 없다고 했어요.""다행이네요."두 사람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유지원 얘기거나 일 얘기였다.아홉 시, 차가 아레아 베이 별장 앞에 멈추자 허아연은 유건희에게 인사하고 내렸다. 유건희는 끝까지 주현우 얘기는 꺼내지 않았고 허아연을 위로하지도 않았다.위로에 서툰 사람이었고 할 줄도 몰랐다. 일과 개인 생활을 철저히 구분하는 사람이었다.유건희와 인사하고 차가 멀어지는 걸 바라보던 허아연은 뒤돌아 집으로 들어갔다.……같은 시각, 병원 병실.여러 검사를 마치고 의사가 오지은의 심장이 건강하고 거부 반응도 없다고 하자 주현우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침대에 누운 오지은은 주현우의 표정이 풀리는 걸 보고 덩달아 안도하며 웃으면서 말했다."내가 괜찮다고 했잖아. 내 몸은 내가 알아."침대 옆에 선 주현우는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고 담담하게 말했다."그래도 앞으로는 휴식 잘해.""알았어."환하게 대답하던 오지은의 얼굴에서 웃음이 서서히 사라졌다. 그대로 고개를 들어 주현우를 올려다봤다.뚫어지게 바라보는데도 주현우는 무슨 일이냐고 묻지 않고 그냥 시계만 봤다. 오지은이 그제야 부드럽게 말을 꺼냈다."현우야, 나 아까 병원에서 아연이 봤어."주현우가 입을 열기도 전에 오지은이 덧붙였다."엘리베이터 문 닫힐 때 봤어. 유건희 씨랑 같이 있었는데 두 사람……"오지은은 애매하게 말끝을 흐리며 말을 끊었다.주현우는 여전히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시선을 내리깔았다. 오지은의 말에도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무덤덤하게 말했다."나 갈게, 일찍 쉬어."오지은이 갑자기 몸을 일으키며 두 손으로 침대를 짚었다."현우야, 같이 있어 주면 안 돼?""의사 선생님도 있고 간호사도 있잖아. 아무 일 없을 거야."담담하게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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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3화

왜 병원에 있었냐고 묻지도 않았고 유건희 얘기를 꺼내지도 않았다.오지은이 허아연과 유건희가 함께 있었다고 말한 의도를 주현우도 알고 있었다.다만 돌아오는 길에 이미 오원빈을 시켜 허아연의 동선을 확인했고 병원에 간 이유도 파악했다.주현우의 물음에 허아연이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바빠 보여서 방해하지 않았어요." 허아연이 말을 마치자 주현우는 빤히 쳐다보기만 할 뿐 말이 없었다. 그 모습을 본 허아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책상 위 원고지를 조용히 정리했다.아무 말이 없는 허아연의 모습에 주현우는 그녀의 아랫배 흉터가 떠올랐다.작년에 허아연이 맹장 수술을 받았을 때, 전화를 끊어버려서 고통을 참으며 혼자 운전해서 병원에 갔던 일이 떠올랐다. 그 생각이 스치자 주현우가 수건을 던지고 물었다."저녁 먹었어? 라면 먹을래, 아니면 만두?"허아연이 원고지를 가지런히 쌓으며 가볍게 웃었다."난 먹었어요. 혼자 챙겨 먹어요."주현우가 입을 열기도 전에 허아연이 먼저 말했다."참, 요즘 어머니가 우리 쪽 소식 별로 안 물어보시는 것 같아요. 그럼 나 옆 게스트룸으로 다시 갈게요. 침실은 주현우 씨가 써요."퇴사할 때부터 본가로 들어가서 할아버지 곁에 있고 싶었다. 그런데 이혼 절차가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다. 혹시나 주건영이 허민수한테 뭐라고 해서 할아버지가 곤란해질까 봐 아직 이사하지 않은 것이다. 허아연은 조금 더 노력해서 빨리 작은 아파트라도 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말을 마친 허아연은 짐을 챙기고 노트까지 들고 옆 방으로 돌아갔다.허아연이 왔다 갔다 분주하게 옮기는 동안 주현우는 통창 앞으로 걸어가 담배에 불을 붙였다.담배 연기가 은은하게 퍼졌다. 주현우의 표정은 크게 변화가 없었지만 기분이 조금 영향을 받고 있었다. 며칠 동안 집에 안 들어온 건 마주칠 때마다 허아연이 이혼 얘기를 꺼내서였다.허아연이 화장대에서 스킨케어 제품을 들자 주현우가 티테이블 쪽으로 걸어가 담배를 눌러 끄고 얼굴을 보며 말했다."오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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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4화

책상 앞에서 주현우가 서류를 보고 있었고 오지은은 편안한 얼굴로 주현우 의자 팔걸이에 걸터앉아 있었다.다정한 스킨십은 아니었지만 애틋한 거리였다.손에 든 자료를 다 본 주현우가 별 감정 없이 말했다."유건희 쪽 협력은 별문제 없을 것 같은데 오성 그룹과 얘기하진 않을 거야. 너 나중에 오원빈이랑 제삼자 협약서 하나 쓰고 경주 그룹 명의로 협력하면 돼."팔걸이에 걸터앉은 오지은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응, 현우 네 말대로 할게."어차피 주현우가 나서지 않았으면 유건희가 만나주지도 않았을 거고 협력 얘기는 꺼낼 수도 없었다.업무 얘기가 끝나고 오지은이 다른 말을 꺼내려는 찰나, 옆에 있던 주현우 휴대폰이 울렸다.휴대폰 화면을 보니 전서진의 전화였다.전화를 받자 전서진 특유의 건들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현우야, 나 지금 친구랑 같이 집 팔러 왔다가 누구 봤는지 알아?"주현우가 심드렁하게 물었다."누구?"전화기 너머에서 전서진이 접수처 쪽을 슬쩍 보았다. 허아연이 전단지를 손에 들고 벽에 붙은 매물 정보를 올려다 보고 있었다. 전서진이 느긋하게 말했다."허아연. 집 보는 것 같던데, 집 사려나 봐."전서진의 말에 주현우의 눈빛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이어 무표정하게 알았다고 한마디하고 전화를 끊었다.그런데 전서진 전화를 끊자마자 유서희한테서 또 전화가 왔다. 할머니가 요즘 자꾸 주현우와 허아연이 이미 이혼 절차를 밟은 건 아닌지 불안해하면서 의심한다고 밥 먹으러 같이 집에 오라고 했다는 것이었다.전화를 받은 주현우는 도통 답이 떠오르지 않아 피곤한 얼굴로 알겠다고 한마디하고 전화를 끊었다.요즘 일이 유독 많은 것 같았다.주현우가 두 통의 전화를 끝내고 나서야 오지은이 말을 걸 기회가 생겼다.오지은은 주현우의 어깨에 두 손을 얹고 살살 주무르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현우야, 스타라이트 협력도 거의 다 정해졌으니 오늘은 쉬어.""우리 이따 영화 보고 저녁에 일식 요리 먹으러 갈까?"주현우가 손을 들어 오지은의 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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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5화

"근처에 있어, 그쪽으로 갈게."말을 마치고 전화를 끊은 주현우는 몇 분도 안 돼서 차를 몰고 왔다.집안으로 들어온 주현우는 허민수와 잠깐 인사를 나누고 장기도 두어 판 두고 나서야 허아연의 손을 잡고 떠났다.마당을 나서자 허아연은 자연스럽게 손을 빼고 차 뒷좌석으로 걸어갔다.그런데 문이 열리지 않았다.허아연이 이미 차에 탄 주현우를 보며 말했다."문 잠겼어요."운전석의 주현우가 고개를 돌려 허아연을 보며 태연하게 말했다."앞문은 안 잠겼어."허아연은 그 자리에 서서 담담하게 말했다."그냥 뒤에 탈게요."허아연을 돌아보던 주현우는 웃음이 터졌다. "타, 새 차야 조수석에 아무도 안 앉았어."주현우가 똑같은 새 차로 바꿔버렸을 줄 몰랐다. 뜨거운 햇볕 아래, 허아연은 한옥 마당을 둘러보았다. 자기 집 마당에서 실랑이를 벌이기 싫었던 허아연은 결국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 올랐다.얼마 지나지 않아 차가 출발했다. 허아연은 고개를 돌려 창밖으로 지나치는 사람들과 차들을 바라봤다. 예전에는 주현우와 함께 있으면 늘 먼저 말을 걸었다. 분위기가 너무 조용하고 어색한 침묵이 싫어서였다. 지금은 오히려 조용한 게 좋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좋았다. 핸들을 잡은 주현우는 가끔 허아연을 힐끗 쳐다보곤 했지만 집을 사는 일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차가 별장 앞에 멈추고 두 사람이 내려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거실에서 박민정이 조용히 티비를 보고 있었다. 요즘에는 예전처럼 핸드폰을 만지작거리지 않았다.핸드폰이 압수됐기 때문이었다.허아연이 들어오는 걸 보자 박민정이 반가워하며 맞이했다."아연이 왔구나, 얼마 만에 할머니 보러 온 거야."허아연이 박민정 손을 잡으며 웃었다."할머니, 요즘 일이 좀 바빠서요. 나중에 시간 나면 더 자주 뵈러 올게요."허아연이 약속하자 박민정이 손을 꼭 잡고 몰래 물었다."아연아, 현우가 나 몰래 너랑 이혼 서류 접수한 거 아니지? 요즘 꿈을 자꾸 너희 꿈을 꿔. 현우가 정신 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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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6화

이어 주현우에게도 분부했다."현우야, 뒷마당 가서 할아버지 모셔 와."유서희의 말에 주현우가 들고 있던 책을 내려놓고 느긋하게 뒷마당으로 주건영을 모시러 갔다.잠시 후 식탁에 둘러앉아 식사를 할 때, 유서희가 주현우에게 말했다."현우야, 앞으로 주말마다 아연이 데리고 와서 같이 밥 먹어. 안 바쁘면 아연이랑 같이 아연이 외할아버지도 자주 뵈러 가고.""어르신들 연세가 있으시니 너희가 자주 찾아뵙는 걸 좋아하셔."주현우가 허아연에게 국 한 그릇 떠주며 대답했다."알았어요."박민정도 주현우를 보며 당부했다."올해 안에 아이 가져서 내년에 나랑 너희 할아버지한테 증손자 안겨주기로 한 거 잊지 마. 밖에 여우 같은 것들 쫓아다니지 말고 쓸데없는 생각도 하지 마."주현우한테 주말에 허아연을 데리고 밥 먹으러 오라고 한 건 오지은과 붙어 있지 못하게 하려는 박민정의 아이디어였다. 박민정이 또 아이 얘기를 꺼내자 허아연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 밥만 먹었다.주현우가 대신 대답했다."걱정 마세요, 할머니."유서희는 박민정이 또 같은 말을 꺼내자 반찬을 집어주며 말했다."어머니, 현우랑 아연이 다 생각이 있을 거예요. 매번 말씀하시면 오히려 부담이 돼요."사실 주현우가 부담스러워하는 건 상관없었다. 문제는 허아연이었다. 허아연이 얘기 꺼내는 걸 불편해한다는 게 눈에 보여서 적당히 말려야만 했다. 게다가 너무 압박을 주면 오히려 아이도 안 생기는 법이었다.박민정은 그 말을 듣더니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 알았어. 마음에만 두고 있으면 돼, 나도 앞으로는 적게 말할게."저녁을 다 먹고 나서도 두 사람은 바로 떠나지 않았다. 주현우는 주건영과 장기를 뒀고 허아연은 박민정 옆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며 티비를 봤다.다만 오늘 주민경이 집에 없어서 허아연은 왠지 마음이 허전하고 든든함이 줄어든 것 같았다. 아홉 시가 넘어 주현우가 시계를 확인하며 일어서자 허아연도 따라 일어났다.박민정과 주건영이 두 사람을 배웅했다. 차가 마당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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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7화

주현우의 말이 끝나자 허아연은 조용히 바라봤다.한참을 바라보던 허아연이 부드럽게 물었다."할아버지가 오늘 저녁에 또 뭐라고 하셨어요? 또 압박 주셨어요?"허아연이 할아버지 얘기를 꺼내자 주현우는 핸들을 두 손으로 잡은 채 눈빛이 어두워지며 차갑게 말했다."우리 사이 일에 왜 매번 다른 사람이 엮여야 해?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해야 되는 거야?"주현우의 퉁명스러운 말투에 허아연의 표정도 살짝 굳으며 안색이 어두워졌다. 허아연한테는 차가운 게 아니라 그냥 못마땅해하는 거였다. 허아연이 아무 말 없이 바라보자 주현우도 말이 좀 심했다는 걸 깨달았다. 다만 뭐만 하면 허아연이 할아버지나 부모님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게 싫었다.허아연은 잠깐 주현우를 쳐다보다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도로 위에는 차들이 많지 않았다. 노란 가로등이 밤길을 더 고요하게 만들었다.틀어진 대화 뒤, 차 안의 분위기도 더 조용해졌다.고개를 돌려 허아연을 보던 주현우가 평소의 담담함을 되찾고 물었다."당시에 할아버지 뜻이 없이 내가 직접 청혼했다면 안 받아줬을 거지?"갑작스러운 질문에 허아연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순간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그냥 뚫어지게 주현우를 바라보는 동안 많은 옛일이 떠올랐다.— 현우 오빠, 이렇게 도망쳐도 돼요? 선생님이 화내지 않을까요?— 현우 오빠, 왜 거짓말해요. 이거 너무 매워요, 너무 맛없어요.— 현우 오빠, 그만 때려요. 그만 때려요, 걔는 나 안 괴롭혔어요.— 난 걔 같은 타입 안 좋아해.— 허아연이 가치가 있는 것 같아?— 주현우 씨, 우리 이혼해요.기억들이 영화처럼 머릿속에서 흘러갔지만 여전히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그래서 주현우를 바라보던 시선을 조용히 거두고 다시 창밖 야경을 바라봤다. 답은 하지 않았다.길가의 화단과 건물들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주현우가 오지은에게 해왔던 여러 배려들, 신경 써주던 모습들, 그날 밤 병원에서의 긴장한 표정이 떠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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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8화

심한 생리통이었다.머리카락을 닦던 수건을 내려놓고 두 손으로 아랫배를 감싸 살살 문질렀다. 미간에 주름이 깊게 생겼다.며칠 전에 아이스 밀크티와 아이스 커피를 너무 많이 마셔서인지 배가 너무 아팠다.샤워할 때는 아직 생리가 오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아팠다.얼굴이 살짝 창백해지고 이마와 관자놀이에 식은땀이 맺혔다. 한참 배를 문질렀지만 통증이 줄어들기는커녕 점점 더 심해졌다. 허아연이 컵을 들고 한 손으로는 배를 문지르며 문 쪽으로 걸어갔다.그런데 방문을 열자마자 옆 침실에서 주현우도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딱 마주친 허아연은 반사적으로 허리를 펴고 가볍게 웃으며 인사를 대신했다. 허아연의 안색이 좋지 않은 걸 본 주현우가 물었다."어디 아파?"허아연이 컵을 들고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그냥 배가 좀 아파서요."배가 아프다는 말에 주현우는 바로 알아채고 더 묻지 않고 컵을 받아들었다.허아연이 손을 뻗어 컵을 도로 가져가려 하며 말했다."괜찮아요."내려다보는 주현우의 눈빛에 위압감이 가득했다. 허아연은 조용히 손을 거두며 예의 바르게 말했다. "고마워요."주현우가 컵을 들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따뜻한 물을 받아오는 동안 허아연은 방으로 돌아가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았다.여전히 두 손으로 아랫배를 살살 문질렀다.잠시 후.주현우가 따뜻한 차와 따뜻한 물주머니까지 들고 올라왔다. 꽤 오래된 스타일의 물주머니였다.주현우가 건넨 차는 생강차였다. 두 손으로 컵을 감싸자 순간 온기가 느껴졌다.허아연이 고개를 들어 주현우를 보며 예의 바르게 말했다."고마워요."주현우는 말없이 허리를 숙여 침대에서 허아연의 잠옷을 들어 물주머니를 감싼 다음 건네줬다.이렇게 하면 배에 대고 있어도 화상을 입을 일이 없었다. 주현우가 감싸서 건네는 물주머니를 보며 허아연은 급히 생강차를 침대 머리맡에 내려놓았다. 물주머니를 받아서 조심스럽게 배 위에 올려놓자 곧 온기가 느껴지며 배가 한결 덜 아팠다.그때 주현우가 허아연의 방에서 나가지 않고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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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9화

결혼으로 이렇게 원수가 될 줄 알았다면 허아연은 좋아한다는 걸 절대 인정하지 않고 절대 주현우와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다.옛일을 떠올리던 허아연이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주현우가 웃는 허아연을 보고 담담하게 물었다."왜 웃어?"허아연이 고개를 들고 가볍게 살래살래 저었다."아무것도 아니에요."그때는 항상 '현우 오빠'라고 불렀었다.허아연의 맑은 눈빛을 본 주현우가 오른손을 들어 손등으로 뺨을 살며시 어루만졌다. 엄마가 일찍 돌아가신 허아연은 어릴 때부터 말수가 적었다. 주민경 말고는 친구도 거의 없었기에 주씨 가문에 자주 놀러 왔었고 주현우와 주진우를 포함한 삼 남매 모두 다정하게 잘 챙겨줬다.허아연도 고분고분 말을 잘 듣는 아이였다. 어릴 때부터 하라는 대로만 하고 절대 주현우의 말에 반박하는 법이 없었다.주현우는 허아연을 주민경과 똑같이 대했다. 어떨 때는 주민경보다 더 잘 챙겨주기도 했다.오예은은 허아연과 달랐다. 오예은은 같은 반 짝꿍이었는데 성격이 다정하고 항상 배려가 넘쳐서 함께 있으면 편하고 좋았다.두 사람은 너무 잘 통했다.오예은이 없었더라면 주현우는 그때 그 사고에서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었다.오예은이 떠나고 몇 년 동안 슬픔에서 벗어나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허아연과의 혼인을 받아들인 건 잘 맞을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나중에 허씨 집안에 갔다가 일기장을 보게 됐고 숨겨진 비밀을 알게 되었다. 조용한 방 안, 주현우도 오늘 밤 많은 옛일들이 떠올랐다.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허아연은 주현우가 계속 방에 있는 걸 보며 생강차를 몇 모금 마시고 고개를 들며 말했다."시간이 늦었어요, 그만……"허아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주현우가 말을 끊었다.오른손을 들어 허아연의 입가에 묻은 차를 닦아주며 담담하게 물었다."예전에는 그렇게 고분고분하더니 왜 이번엔 이혼 안 하겠다는 내 말을 안 들어?"허아연은 성격이 물러터지고, 결혼에 다른 목적이 있어서 쥐고 흔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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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0화

그제야 주현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의자에 앉았다.입맞춤에 허아연의 입술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살짝 건조하기도 했다.허아연을 바라보던 주현우가 웃으며 물었다."누구한테 배웠어? 키스할 때 눈 안 감는 거?"허아연을 잘 모르거나, 어릴 때부터 지켜보지 않았다면 연애 고수라고 오해할 뻔했다.허아연은 방금 주현우가 입을 맞췄던 목을 만지며 주현우를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눈을 감고 싶지 않았다. 그냥 바라보고 싶었다.주현우가 흠뻑 빠져든 표정을 허아연은 어쩌면 평생 기억할 것이다허아연이 말이 없자 주현우는 손에 든 생강차에 시선을 옮겼다. 한 방울도 흘리지 않은 걸 보고 웃으며 한마디 했다."자제력이 강하네."허아연이 고개를 들고 민망한 듯 웃었다.그 웃음에 주현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허아연도 배 위의 물주머니를 내려놓고 따라 일어났다.허아연이 문 앞까지 배웅하자 주현우가 말했다."일찍 쉬어."허아연이 문손잡이를 잡고 고개를 끄덕였다."네, 현우 씨도 일찍 쉬어요."주현우가 잠옷 바지 주머니에서 오른손을 꺼내 허아연의 머리카락을 한 번 쓸어주고는 돌아서서 옆 방으로 들어갔다.방문을 닫은 허아연은 바로 침대로 가지 않았다. 등을 문에 기댄 채 살짝 고개를 젖히고 통창 쪽 천장을 올려다봤다.한참을 바라보다 오른손을 들어 입술을 살며시 만졌다. 주현우와는 친구로 지내는 게 더 좋았을지도 몰랐다.허아연은 문에 기대어 오랫동안 많은 생각을 하다가 그제야 그제야 침대로 돌아가 누웠다.그 뒤로 며칠 동안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지냈기에 주현우와 사이에 별다른 트러블은 없었다.얼굴 볼 일이 많지 않고 그럭저럭 평온한 일상이었다. ……주현우가 계약 건으로 스타라이트에 찾아온 날 오전, 유지원도 회사에 왔다.오전에 막 실밥을 뽑고 유건희가 회사에 데려온 것이었다.사무실에서 주현우가 온 걸 본 유건희는 안고 있던 유지원을 내려놓으며 말했다."지원아, 아래층에서 잠깐 놀고 있어. 아빠 일 해야 해.""네,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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