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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1화

오지은과 함께 주현우를 아래층까지 배웅하던 이은빈이 조금 착잡한 듯 말했다."현우야, 할머니가 재촉한다고 서운하게 생각하지 마. 할머니가 정말 몸이 편찮으셔서 마음의 준비도 하고 계신 거야. 그래서 너랑 지은이가 결혼하는 거 빨리 보고 싶으신 거지."이은빈의 말에 주현우가 답했다."이해해요."허아연 병동 아래에 다다르자 주현우가 걸음을 멈추고 두 사람에게 말했다."이제 그만 들어가세요. 저 아연이한테 가봐야 해서요.""그래, 현우도 너무 무리하지 말고 쉬엄쉬엄 해.""네."그때 오지은이 말했다."그럼 내일 봐, 현우야."주현우는 무덤덤하게 모녀를 잠깐 바라보다 바로 돌아서서 허아연 병동으로 들어갔다. 정형외과 층에서 엘리베이터를 내려 복도로 돌아서는데 마침 정아 이모가 도시락을 들고 허아연 병실에서 나오고 있었다. 정아 이모를 본 주현우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정아 이모님." 정아 이모는 주현우를 보자마자 언짢은 기색을 확 드러내더니 비꼬듯 말했다."도련님 오셨네요. 두 병동을 뛰어다니시느라 얼마나 힘드실까요? 너무 바쁘면 우리 아가씨 보러는 안 오셔도 괜찮아요." "아가씨는 얘기할 사람도 옆에 있어 줄 사람도 차고 넘치거든요. 방금도 권 비서실장이 전화해서 아가씨한테 식사 보내주신대요. 그러니 도련님은 미래의 장모님 댁이나 잘 챙기세요.""아, 그리고 빨리 아가씨와 이혼 절차나 마무리하세요. 도련님은 다음 사람 진작 찾아두셨겠지만 우리 아가씨 앞길 막으면 안 되죠." 몇 년 동안 허아연이 얼마나 속이 상했을지 옆에서 지켜보는 정아 이모도 속이 터질 노릇이었다.오늘 모처럼 기회가 생겼으니 주현우한테 한소리 꼭 하고 싶었다.아무리 경주 그룹 대표면 어때서? 주씨 가문 둘째 도련님이면 왜?사람을 이렇게까지 무시하는 건 도리가 아니었다. 정아 이모의 거침없는 말에 주현우가 말했다."오지은 할머니가 편찮으셔서 예의상 병문안 간 거예요."정아 이모가 어이없다는 듯 웃더니 주현우를 똑바로 쳐다보며 호칭을 바꿔 불렀다."주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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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2화

정아 이모가 거침없이 몰아붙이는 말에 주현우가 차갑게 말했다."이모님, 난 허아연 무시한 적 없어요.""그러시다면 대표님이 한 번 더 아량을 베푸셔서 우리 아가씨랑 절차 마무리하세요. 아가씨한테 자유를 돌려드리고 정상적으로 연애하고 결혼할 수 있게 해드리세요."입만 열면 이혼 소리인 정아 이모를 주현우는 싸늘한 얼굴로 더 이상 상대하지 않았다.그대로 허아연 병실로 들어가 버렸다.복도에 남은 정아 이모는 도시락을 든 채 주현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래도 마주쳐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한바탕 쏟아내고 나니 속이 좀 풀렸다.안 그랬으면 오늘 밤 속 터져서 잠도 못 잤을 것이다. 병실 안, 허아연은 침대에 꼼짝 않고 앉아 고개를 숙인 채 감정 하나 일렁이지 않는 눈길로 아무렇지 않은 듯 책을 넘기고 있었다. 정아 이모는 말할 때 병실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병실 문이 완전히 닫혀 있지 않아서 허아연도 다 들을 수 있었다. 정아 이모를 말리러 나가지도 않았고 주현우를 나무라는 걸 막지도 않았다. 정아 이모를 입을 빌려 주현우한테 한 소리 하려는 게 아니라 그냥 지금까지도 그를 두둔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것뿐이었다.그때 병실 문이 열리고 주현우가 들어왔다.허아연이 담담한 눈길로 보더니 다시 조용히 시선을 거두고 고개를 숙여 책을 읽었다.주현우가 아무 감정 없이 물었다."권승준이 전화 왔었어?""네." 허아연이 짧게 대답했다.허아연의 태연한 모습을 본 주현우가 말했다."방금 신나서 듣고 있었겠네?" 허아연이 책장을 한 장 넘기며 담담하게 말했다."당신이 그렇게 하고 다녔으면서 다른 사람이 말도 못 하게 막을 셈이에요?"허아연의 개의치 않는 태도에 주현우가 시선을 내리깔고 허아연을 보며 말했다."허아연, 경주 그룹 퇴사하고 집도 샀다고 이제 날개가 돋친 것 같아?"그 말에 허아연이 손에 든 책을 살며시 내려놓고 고개를 들어 주현우를 바라봤다.잠시 바라보던 허아연이 차분하고 침착하게 말했다."주현우 씨, 당신은 내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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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3화

주현우는 고개를 숙인 채 기죽지도 않고 조목조목 따지는 허아연을 차가운 눈빛으로 바라봤다.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허아연의 말에 반박할 힘이 없었다. 한참을 내려다보던 주현우가 차갑게 말했다."일찍 쉬어."말을 마친 주현우는 문 쪽으로 걸어가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병상 위, 허아연은 주현우가 나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다 문이 닫히자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내려놓고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밖은 이미 날이 어두워져 있었지만 별도 달도 보이지 않았다.주현우와 다툴 생각은 아니었지만 날개가 돋쳤다느니 어쩌니 하는 건 너무 무시하는 말이었다. 더 이상 침묵하며 남들의 평가와 억측에 휘둘리도록 스스로를 방치하고 싶지 않았다. 사실 허아연은 주현우에게 기댈 필요가 없었다.창밖을 잠시 바라보던 허아연은 다시 고개를 돌려 책을 들고 말없이 읽기 시작했다.바로 그 시각, 병실 밖 복도.주현우는 병원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병실 문을 닫고 나와 복도의 긴 의자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아 있었다. 두 다리를 아무렇게나 꼰 채, 머리를 벽에 기대고 천장을 올려다보다가 숨을 길게 내쉬었다.생각에 잠긴 채 한동안 앉아 있다가 몸을 일으키더니 주머니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였다.전에는 허아연이 남한테 따지는 걸 거의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허아연이 주현우에게 이렇게 대하는 날이 올 줄이야. 허아연의 다정하고 착한 모습을 너무 많이 봐 왔고 주현우에 대한 너그러움을 너무 당연하게 여겨왔다.허아연도 평범한 사람이고 화도 낼 줄 알고 감정이 있다는 걸 주현우는 잊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유서희가 허아연에게 아침을 챙겨다 줄 때 주현우는 이미 회사로 출근해서 복도에 없었다. 유서희가 병원을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오지은이 찾아왔다.죽 두 박스와 과일, 꽃 한 다발을 들고 왔다.문을 두드리고 들어선 오지은이 환하게 웃으며 인사했다."아연아, 좀 괜찮아졌어?"짐을 정리하던 허아연은 오지은의 목소리에 돌아보며 깍듯하게 말했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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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4화

주현우와 오지은에 대해서는 허아연도 이미 오래전부터 신경 끄고 있었다.이혼할 마음은 확고했기에 오지은이 주현우를 설득해 준다면 오히려 고마울 것이다. 엉망진창인 결혼 생활에서 해방시켜 준다는 의미니까.허아연의 말에 오지은이 웃으며 말했다."알겠어, 돌아가서 현우한테 말해볼게. 아까운 네 청춘 낭비하지 않아도 되잖아. 나도 너한테 어울릴 만한 괜찮은 사람 있나 알아봐줄게.""그런 건 신경 안 써줘도 돼요. 지금은 일에 집중하고 싶어서요."허아연이 일 얘기를 꺼내자 오지은이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말했다."맞다, 아연아. 스타라이트 테크에서 연봉 얼마나 받아?"허아연이 고개를 들어 바라보자 오지은이 웃으며 설명했다."오성 그룹도 요즘 기술 협력 프로젝트가 많고 자체 기술 브랜드도 만들려고 하고 있거든. 스타라이트 테크 연봉의 두 배 조건으로 너를 오성 그룹에 스카웃하고 싶어. 그리고……"오지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허아연이 말을 끊었다."괜찮아요. 난 스타라이트가 좋아요. 이미 계약도 맺고 있고요. 그 조건이면 더 잘 맞는 사람 찾을 수 있을 거예요."경주 그룹도 나온 마당에 오성 그룹에 갈 리가 없었다.허아연은 고민도 하지 않고 바로 거절했다.오지은이 웃으며 말했다."급하게 답하지 않아도 돼, 좀 생각해 봐도 되잖아. 우리 알고 지낸 지도 오래 됐으니 너한테 더 좋은 대우를 줘서 네가 더 많이 벌었으면 해."허아연이 단호하게 대답했다."아니요, 지금도 이미 충분히 좋아요."허아연이 뜻을 굽히지 않자 슬쩍 쳐다보던 오지은은 더 이상 얘기를 이어가지 않았다.그 뒤엔 다른 얘기를 잠깐 나누다 권미희가 입원한 병동에 돌아갔다.오지은을 보내고 나니 허아연은 순간 세상이 조용해진 것 같았다.병실 문을 닫고 조심조심 침대에 걸터앉아 옆에 있던 전공 서적을 들고 계속 읽었다.다음 날, 허아연은 병원에서 마지막 항생제 주사를 맞고 퇴원했다.퇴원할 때는 목발을 짚고 있었다.주민경이 데리러 와서 같이 집으로 돌아갔다.주현우는 출장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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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5화

허아연이 아래층에 내려오자 기사가 얼른 다가와 부축하고 차 문을 열어줬다.30분 뒤, 차가 시청 청사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린 허아연은 기사의 안내를 받아 권승준의 집무실로 향했다.집무실 문을 두드리자 책상 앞에 앉아 있던 권승준이 빠르게 일어나 웃으며 맞이했다. "허 선생님, 정말 미안해요. 다리도 불편할 텐데 이렇게 오라고 해서요."권승준이 말하면서 다가와 허아연을 부축했다.목발을 짚고 들어서던 허아연이 말했다."괜찮아요. 목발 있으니까 꽤 편해요."허아연이 집무실로 들어서자 기사는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갔다.권승준은 소파에 앉은 허아연에게 차를 따라주고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소파에 마주 앉은 뒤 허아연은 가방에서 보고서와 펜을 꺼내 차분하게 말했다."비서실장님, 이 보고서 작성하고 사인해 주시면 돼요. 다른 의견 사항은 제가 따로 기록하겠습니다."보고서를 받은 권승준은 꼼꼼히 살펴보고는 몸을 숙이고 티 테이블 위에서 보고서를 작성했다.평소에도 권승준은 예의 바르고 깍듯했지만 누군가 부탁하러 왔을 때 이렇게 티 테이블에서 허리를 숙이고 직접 작성해 준 경우는 없었다.보고서를 다 작성한 권승준은 제품에 대한 의견과 사용자 수요까지 꽤 꼼꼼하게 얘기했다. 권승준이 진지하게 말하면 허아연도 노트에 열심히 받아 적었다.두 사람이 한창 로봇 제품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갑자기 누군가 집무실 문을 두드리며 들어왔다.허아연이 고개를 들어 보니 흰 셔츠에 검은 슬랙스를 단정하게 차려입은 젊은 남자 직원이 문앞에서 권승준을 보며 물었다."비서실장님, 오늘도 식사 가져다드릴까요?"권승준이 남자를 보며 말했다."괜찮아, 이따가 식당 갈 거야."젊은 남자 직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알겠습니다, 비서실장님."이내 문이 살며시 닫혔다. 권승준이 허아연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웃으며 말했다. "허 선생님, 어느새 식사 시간이 됐네요."허아연이 멋쩍어하며 말했다."또 비서실장님 시간을 너무 지체했네요." "지체한 건 아니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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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6화

회의 말고는 같은 공간에 있어 본 적도 거의 없었다.허아연이 다리가 불편해서 천천히 움직이는 데다 소속 직원도 아니었지만 권승준은 전혀 개의치 않고 편하게 근황과 최근 업무 이야기를 들려줬다.허아연은 권승준과 함께하는 게 꽤 편하고 자유로웠다. 권승준이 전혀 격식을 차리지 않아서 같이 있으면 편했다.사실 평소 업무 중에 권승준은 꽤 엄격한 편이었다. 이런 대우는 허아연만 누릴 수 있는 것이었다.두 사람이 밥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다 권승준 집무실로 돌아오니 한 시간이 더 지나 있었다. 허아연은 권승준의 의견을 정리하고 이야기를 마무리했다.목발을 짚고 인사하며 나가려는데 권승준이 웃으며 말했다."나도 마침 나가는 길이에요. 같은 방향이니 데려다줄게요."같은 방향이라는 말에 허아연도 사양하지 않았다.권승준이 참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회사로 돌아오는 길에 두 사람은 계속 기술 분야 이야기나 허아연 업무 얘기를 나눴다.권승준은 허아연의 기분을 잘 배려해 줬다.허아연의 사생활이나 결혼 문제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선을 지킬 줄 아는 사람이었다.어떤 이야기를 나눠도 되는지, 어떤 이야기는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알고 있었다.20여 분 후, 차가 스타라이트 테크 건물 앞에 멈췄다.허아연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걸 지켜본 뒤에야 권승준은 차를 출발시켜 시청 건물로 돌아갔다.평소 이 시간이면 오후 업무를 위해 집무실에서 잠깐 눈을 붙일 시간이었다. 하지만 오늘 점심은 쉬지 못했다.돌아가는 길에 시간을 계산해 허아연에게 전화를 걸어 사무실에 무사히 도착한 걸 확인하고 나서야 권승준은 마음을 놓았다.이후 며칠간 허아연은 권승준을 비롯한 나머지 두 명의 체험 사용자와 몇 차례 연락을 주고받으며 보고서를 완성해 유건희에게 제출하고 회의를 준비했다.동시에 유건희에게 논문 검토도 부탁했다. 유건희는 허아연의 논문을 꼼꼼히 읽고 나서 말했다."논점이 참신하고 생각이 앞서있네요. 학술지에 연락해서 좋은 지면 잡아줄게요. 반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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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7화

전서진의 기세를 보니 알 수 있었다.오늘은 기어코 허아연을 불러서 만나야겠다는 거였다.허아연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알겠어요."피한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었다. 마주치면 마주치는 거고, 주현우와는 어차피 결론을 내려야 했다.허아연 퇴근 시간이 가까워지자 전서진이 차를 몰고 스타라이트 테크로 왔다.잠시 후, 퇴근한 허아연이 목발을 짚고 내려오자 전서진이 급히 차에서 내려 가방을 받아들었다.전서진이 또 부축하려 하자 허아연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서진 씨, 안 잡아줘도 돼요. 혼자 걷는 게 더 안정적이고 편해요."전서진은 그 말에 가볍게 허아연을 부축하며 아주 천천히 함께 걸어갔다. 차 앞에 다다르자 전서진은 조수석 문을 열어주었고 허아연이 차에 타자 목발을 뒷좌석에 실었다.15분 뒤, 두 사람이 낙원 호텔 프라이빗 룸에 도착하니 역시나 주현우가 있었다.허아연이 병실에서 따지며 다툰 그날 이후로 두 사람은 한 번도 만나지 않았었다."아연아, 여기 와서 앉아. 자리 남겨뒀어." 허아연이 들어오는 걸 보자마자 주민경이 손짓하며 불렀다.주민경을 본 허아연은 바로 목발 짚으며 걸음을 옮겼다. 심유환과 하준서에게 인사를 건넸지만 주현우에게는 인사하지 않았다. 주현우가 모른 척하는 것도 신경 쓰지 않았다.예전 같았으면 반갑게 먼저 말을 걸고 대답해 주길 기다렸을 것이다. 지금은 그런 여유 따위 없었다. 주현우 눈에 가 허아연이 있든 말든 진작에 신경도 쓰지 않았다. 허아연과 전서진이 자리에 앉고 얼마 지나지 않아 종업원들이 요리를 내오기 시작했고 다들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눴다.전서진과 심유환은 진짜 스타라이트 테크 투자 유치에 관해 허아연에게 물었다. 허아연은 전문적이고 객관적으로 분석해 주었다.허아연은 경주 그룹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컨디션이 좋고 자신감도 높아져 있었다. 전서진과 이야기를 마무리했을 때 허아연의 휴대폰이 울렸다.정아 이모에게서 온 전화였다.사람 많은 곳에서 전화받는 게 익숙하지 않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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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8화

며칠동안 주현우는 계속 출장 중이었다.오늘 오후에야 돌아왔다.주현우가 먼저 말을 걸자 조심스레 걸음을 옮기던 허아연이 천천히 멈춰섰다.주현우 쪽으로 고개를 돌린 허아연이 깍듯하게 말했다."많이 나아졌어요."조금 전 허아연를 발견한 뒤로 주현우는 줄곧 쳐다보고 있었다.허아연이 무덤덤하게 대답하자 주현우는 그렇게 한참을 바라봤다.그 모습을 본 허아연이 말했다."그럼 먼저 들어갈게요."말을 마친 허아연은 다시 조심조심 발을 절뚝이며 룸 안으로 들어갔다.룸 밖 복도, 노란 조명이 분위기를 한층 적막하게 만들었다. 주현우가 뒤를 돌아보니 허아연의 뒷모습이 무척 쓸쓸해 보였다.아무리 시끌벅적하고 소란스러운 룸에 함께 있어도 허아연은 언제나 혼자였다.어릴 때부터 항상 그랬고 말수도 적었다. 허아연이 룸으로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주현우도 따라 들어갔다.두 사람은 각자 옆에 있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눴지만 서로 말을 걸거나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식사 자리가 끝나고 다들 함께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귀가하는 사람들을 챙기던 전서진이 주현우에게 말했다."현우야, 오늘 술 안 마셨지? 그럼 네가 아연이 집에 데려다줘.""아연이 발이 불편하니까 꼭 집에 데려다줘야 해."오늘 식사 자리는 스타라이트 테크 투자에 대한 허아연 의견을 듣고 싶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전서진은 주현우와 허아연이 얼굴이라도 볼 수 있게 하고 두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기회를 만들어주고 싶었다.겉으로는 주현우를 실컷 욕하며 절대 편 들지 않는다고 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친구인데 정말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양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넣고 서 있던 주현우는 전서진의 말을 듣고 담담하게 말했다."응."말을 마친 주현우는 주민경 옆에 서 있는 허아연을 보고 조용히 말했다."먼저 가서 차 가지고 올게."전서진이 일부러 붙여줬다는 걸 알지만 이런 사소한 일 때문에 어색한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았던 허아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사실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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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9화

전서진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주민경, 그래도 네 친오빠잖아. 좀 잘 되길 바라야지. 이번엔 아연이 괴롭히려는 게 아니라 잘 해주려는 거일지 어떻게 알아?"주민경이 당당하게 말했다."친오빠니까 어떤 인간인지 더 잘 알지. 그래서 아연이 더 구해줘야 하는 거야."주민경이 끝까지 훼방 놓으려 하자 전서진도 더 이상 싸우지 않고 달래듯 말했다."알겠어, 알겠어. 구하자, 구해. 우리 같이 아연이 구하자. 하지만 지금은 일단 내가 너 데려다줄게."전서진의 능글맞은 태도에도 주민경은 어깨에 올린 손을 탁 쳐내며 말했다. "서진 오빠는 우리 오빠 편이잖아. 우리 오빠 도와서 아연이 괴롭히려는 거면서! 나한테 손대지 마."주민경이 손을 뿌리치고 성큼성큼 앞서 걸어가 버렸다.전서진이 바로 뒤를 쫓아가며 말했다."내가 어디 아연이를 괴롭혔어. 나 억울하게 그러지 마."허아연을 안타깝고 불쌍해하는 것도 부족한데 어떻게 괴롭히겠어.주민경이 버럭 답했다."괴롭혔어. 오늘 자리도 일부러 준비한 거잖아."전서진이 주민경 어깨에 메고 있는 가방을 받아 들며 말했다."너희 오빠가 아연이 못 놓는 거 안 보여? 붙잡으려는 거잖아, 아연이한테 잘해주고 싶은 거잖아."주민경은 콧방귀를 뀌고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그 모습을 본 전서진은 주민경 어깨에 팔을 턱 올리며 달래듯 말했다. "됐어, 화 풀어. 데려다줄게."전서진이 계속 달래듯 말하자 주민경도 더 이상 따지기가 귀찮아졌다.사실 전서진도 성격이 좋고 심유환은 더 좋고 하준서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여자한테 다정하고 인내심도 있었다.친구들과 그렇게 친한 주현우는 왜 이런 걸 하나도 배우지 못한 걸까? 왜 허아연을 달랠 줄도 모르고 잘 해줄 줄도 몰랐을까? ……바로 그 시각, 검은색 마이바흐 안.주현우가 두 손으로 핸들을 잡은 채 가끔 곁눈질로 허아연을 바라봤다. 허아연은 고개를 돌린 채 아무 말 없이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표정은 담담하고 눈빛은 꽤 부드러웠다.차 안은 편안한 장식에 무드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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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0화

주진우는 군에서 돌아올 때마다 허민수를 찾아와 안부를 물었고 같이 바둑도 두곤 했다.결혼 전에 주현우는 허아연 집을 자기 집 드나들 듯이 자주 오가며 두 어르신을 대하는 태도도 다를 게 없었다.여름에는 허아연네 마당에서 더위를 식히다 잠들기도 했었다.그때는 긴 의자 두 개를 나란히 붙여놓고 각자 한 개씩 누워있었다. 주현우가 허아연 집에 오면 아무 거리낌 없이 편히 지내는 편이었다. 결혼하고 나서부터 오히려 발길을 뚝 끊었다. 주현우의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은 허아연은 다시 고개를 돌려 창밖 야경을 바라봤다.주현우도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조용히 차를 몰았다.평소보다 속도가 훨씬 느렸지만 허아연도 재촉하지 않았다.열 시가 넘어 차가 집 앞에 멈춰서야 허아연은 주현우에게 새 집 주소를 알려준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하지만 주현우는 이미 알고 있었다.허아연이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리기도 전에 주현우가 먼저 차에서 내려 조수석 문을 열어주고 뒷좌석 문을 열어 목발도 내려주었다. 차에서 내리는 허아연을 부축하며 목발을 건네자 허아연이 깍듯하게 말했다."고마워요."언제부터였는지, 허아연은 주현우를 대할 때면 예의를 차리게 되었다.허아연이 목발을 짚고 안정적으로 서자 그제야 주현우가 입을 열었다. "집에 들어가면 전화하든지 문자 보내줘."허아연이 예의 차리는 걸로 보아 굳이 묻지 않아도 같이 올라가길 바라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주현우도 허아연을 난처하게 하지 않았다. 주현우의 당부에 허아연은 짧게 대답했다. "네."대답을 마치고는 목발을 짚고 건물 안으로 걸어갔다.주현우는 바로 차에 타지 않고 양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멀어지는 허아연을 한참 동안 지켜봤다.주현우의 기억 속 허아연은 항상 자기한테 달려오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정신을 차리고 다 내려놓고 잘살아 보려고 하니 자꾸만 멀어져가는 뒷모습뿐이었다.허아연은 항상 떠나가고 있었다.허아연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서도 주현우는 바로 자리를 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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