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버린 건 나였지만, 무너진 건 너였다: Chapter 351 - Chapter 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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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1화

당당하게 안서준 옆에 있는 낯익은 실루엣에서 주현우는 눈을 뗄 수 없었다.옆 사람을 제쳐두고 저도 모르게 걸음을 옮겼다.그러나 가까이 다가갔을 때 안시연은 이미 자리를 떠나 회의장에 없었다. "주 대표님.""주 대표님."옆 사람이 인사를 건네서야 주현우는 정신을 차리고 담담하게 답했다.잘못 본 걸까?아니, 잘못 본 게 아니었다.어떻게 이토록 닮을 수 있을까?허아연을 십여 년이나 알고 지냈으니 잘못 볼 리 없었다. 방금 그 뒷모습은 분명 허아연과 닮아 있었다.아니, 허아연 그 자체였다.그 생각이 든 주현우가 고개를 돌려 회의장 출구를 바라봤지만 그녀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그 시각 안시연과 안서준 남매는 이미 차를 타고 컨벤션 센터를 떠나 호텔로 향하고 있었다.저녁에는 교류 만찬이 있었기에 남매는 먼저 호텔로 돌아가는 길이었다.돌아가는 길, 기사가 앞에서 운전하고 남매는 뒷좌석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안시연을 돌아보던 안서준이 부드럽게 웃으며 물었다."교진시 오니까 느낌이 어때?"안서준의 물음에 허아연이 웃었다."나쁘지 않네요."감정 동요가 전혀 없는 차분한 눈빛의 동생을 부드럽게 바라보던 안서준이 담담하게 말했다."이번 일 다 마무리하면 일찍 돌아가."허아연이 차분하게 답했다."네."잠시 뒤, 차가 호텔 앞에 멈춰섰고 두 사람이 내리자 기사는 주차하러 갔다.남매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비즈니스 회의실에 도착하자 유건희와 한민규, 지일우가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안씨 남매의 등장에 한민규와 지일우는 순간 눈이 휘둥그레졌다.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눈길 한 번 떼지 않고 안시연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놀라서 안시연을 한참 바라보던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다가 동시에 유건희를 쳐다보았다.너무 허아연 같았다.너무 닮았다.분위기가 좀 달라지고 풍기는 아우라도 좀 달라져 있었다. 키가 조금 더 크고 오른쪽 눈밑의 점만 빼면 이목구비는 허아연과 거의 똑같았다.그러나 유건희는 태연하게 안서준과 악수를 나누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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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2화

유건희의 한마디에 허아연은 마치 집에 돌아온 것처럼 만감이 교차했다. 2년, 교진시를 떠난 지 꼬박 2년이었다.당시 교진시를 떠나기로 마음먹은 건 몸 상태가 점점 안 좋아졌기 때문이었다.힘이 부치는 일이 점점 많아지는 게 스스로도 확연히 느껴졌고 자꾸 깜빡깜빡했으며 급기야 말까지 더듬을 때도 있었다.교진시가 준 고통이 너무 컸고 더는 주현우와 얽히고 싶지도 않았다.그래서 모든 걸 잊고 주현우의 아내라는 신분에서 벗어나고 싶었다.허아연은 벼랑 끝에 선 심정으로 유건희를 찾아가 어떻게 해야 할지 물었다.학창 시절 그토록 밝고 눈부시고 자신감 넘쳤던 허아연이 결혼 후엔 지쳐만 가는 걸 본 유건희는 이렇게 훌륭한 인재가 묻히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과거를 내려놓고 교진시를 떠나라고 얘기했었다. 화재 속 가짜 시신은 유건희가 사람을 찾아 허아연의 NDA 데이터를 바탕으로 섬유로 위조한 것이었다. 병원에도 유건희가 미리 손을 써두었다.그날 밤 아레아 베이가 불타고 있을 때, 허아연을 빼내 준 건 유건희였다. 함께 수풀에 숨어 있다가 조용히 주민경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해준 것도 유건희였다.그날 화재에서 허아연을 제일 괴롭게 만든 건 주민경을 속인 일이었다.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자기 자신을 먼저 구해야 했다.그러지 않았으면 허아연은 지금쯤 정신병원 신세일지도 몰랐다. 그 뒤로 유건희가 직접 운전해서 공항까지 데려다주고 새 신분증과 비행기티켓도 준비해 주었다. 강성시에서 허아연을 마중하고 돌봐줄 안서준까지 연결해 준 것 역시 유건희였다.허아연이 떠나던 날 유건희가 말했다."지금부터 새롭게 시작하는 거예요. 이미 지난 일은 다 잊어요."그리고 한마디 더 보탰다."감정 같은 건 모르겠으면 굳이 알려고 하지 마요. 앞으로는 아연 씨 연구에만 전념해요."그날 밤 유건희와 작별 인사는 나누는 허아연의 눈시울은 계속 빨개져 있었다. 이렇게 떠나면 예전 삶과는 완전히 안녕이었다. 앞으로는 허아연이 아닌 안씨 가문 둘째 딸, 안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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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3화

전에 경주 그룹을 떠나 새로 시작하려 할 때 파격적으로 채용해준 사람도, 집 살 돈이 없을 때 특허를 사준 사람 역시 유건희였다.스타라이트 테크에서 일할 때도 한 번 또 한 번 지도해주고 업계 원로들을 소개해주었으며 제일 좋은 기회를 늘 남겨주었다.유건희는 스타라이트의 모든 직원들을 온 힘을 다해 지지해 주었다.허아연이 벼랑 끝까지 몰렸을 때도 손을 내밀어 위기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도록 도와주었다.유건희는 허아연에게 삶의 은인이었다.허아연은 안씨 가문에서 일상 생활을 케어 받았을 뿐만 아니라 전문 분야에서도 최대한의 역량을 펼칠 수 있었다.점심 식사는 두 시가 되어서야 마무리 되었다. 유건희 일행은 스타라이트 테크로 돌아갔고 허아연과 안서준은 위층 스위트룸으로 돌아갔다.처리할 업무가 남아 있었기에 허아연은 안서준의 비즈니스 스위트룸 서재로 따라가서 업무 얘기를 나누었다.안서준이 건넨 계약서를 꼼꼼히 살펴보던 허아연이 말했다."계약서는 문제없어요. 오빠가 유 대표님 알고 지낸 시간이 더 오라니까 유 대표님 인품이 어떤지 더 잘 알 거예요." "동승 그룹이 이번에 움직임이 커요. 스타라이트 말고 다른 프로젝트 협력 건들도 있는데 넌 어떤 회사 추천해?"안서준의 물음에 허아연은 교진시에서 잘나가는 회사 몇 곳을 추천했다. 전씨 가문, 심씨 가문, 하씨 가문의 회사였다.다만 경주 그룹은 언급하지 않았고 오성 그룹은 더더욱 꺼내지 않았다.편견이 아니라 어떤 식으로든 얽히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안서준의 성격으로 애초에 경주 그룹은 생각조차 하지 않을 걸 알고 있었다. 안서준이 도착하자마자 교진시 정부가 추천한 경주 그룹부터 지워버렸다는 걸 어제 이미 알아버렸다. 정부 측에서 이유를 묻자 개인적인 사유라며 회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다. 때문에 방금 안서준은 떠본 것이었다. 허아연이 경주 그룹을 언급하지 않았기에 안서준도 더더욱 꺼내지 않았다.그 뒤 업무 얘기를 잠시 더 나눈 뒤, 안서준도 허아연에게 돌아가서 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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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4화

"전 대표님, 심 대표님." 정부 인사가 두 사람을 소개하자 남매는 깍듯하게 악수를 나눴다.전서진 일행은 인사를 마치고도 허아연에게 시선이 꽂힌 채 눈을 떼지 못했다.전서진과 심유환이 인사를 마치자 주현우는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났다.그 모습에 정부 인사가 정중하게 두 사람을 소개했다."서준 씨, 시연 씨, 이쪽은 경주 그룹의 주현우 대표님입니다. 이번 우리의 교진시 방문에서 중요한 협력 파트너시니 인사 나눠요."주현우를 빤히 바라보는 안서준의 눈빛이 어느새 티나지 않게 서늘해졌지만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여유롭게 인사했다."주 대표님.""안 대표님, 교진시 방문과 협력을 환영합니다."안서준과 인사를 마친 주현우의 시선이 다시 허아연에게 향하더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이분은 누구시죠?"안시연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던 주현우는 예전과 달라진 부분들을 알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눈앞의 사람이 허아연이라는 강렬한 느낌을 떨쳐낼 수 없었다. 주현우의 노골적인 시선에 안서준이 웃으며 나직이 소개했다."제 여동생입니다."빤히 바라보는 주현우의 시선과 익숙한 목소리에 허아연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그제야 주현우를 발견한 것이다.그러나…… 몇 년 전과 다름없이 여전히 잘생긴 주현우의 얼굴과 달리 백발이 무성해져 검은 머리가 거의 남아 있지 않은 걸 본 순간, 허아연은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다만 순전히 머리카락 때문에 놀란 것이었다.허아연은 놀란 기색을 드러내지 않고 차분하게 손을 내밀며 깍듯하게 인사했다."주 대표님."그 모습에 주현우는 번뜩 정신을 차리고 가볍게 손을 맞잡았다."안녕하세요, 경주 그룹 주현우입니다."주현우의 자기소개에 허아연이 차분하게 답했다."강성시 안씨 가문, 안시연입니다."두 사람이 담담하게 악수를 마친 뒤, 허아연은 자연스레 다시 안서준의 팔짱을 끼고 곁에 섰다.안서준이 인사를 다 마치고 나서야 남매는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전서진과 심유환은 계속 두 사람을 쳐다보며 뭐라도 알아내려 애썼지만 이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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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5화

걸음을 멈췄던 허아연은 이내 평소처럼 다시 걸음을 옮기고 아무일도 없는 듯 앞으로 걸어갔다.복도는 그리 좁지 않았다.하얀 조명이 두 사람을 비췄고 바깥의 소란스러움 덕분에 허아연의 하이힐 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울렸다. 허아연은 뚫어지게 바라보는 주현우를 스쳐 지나가며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인사했다."주 대표님."인사를 마친 허아연은 계속 연회장으로 걸어갔다.그때 주현우가 돌아서며 물었다."안시연 씨는 교진시에 처음 오신 건가요?"얼마 가지 않아 걸음을 멈춘 허아연이 몸을 돌렸다."학생 때 교진시에 두 번 온 적 있어요. 주 대표님, 볼 일 있으신가요?"허아연의 물음에 주현우가 웃었다."아니요."여전히 빤히 쳐다보기만 하고 아무 말도 없는 주현우를 보며 허아연은 먼저 연회장으로 돌아간다는 말만 남기고 자리를 떴다.멀어지는 뒷모습을 지켜보던 주현우는 문득 예전 일이 떠올랐다.허아연과 함께 아레아 베이로 돌아갔던 날, 깨어있을 때 일기장 속 좋아한다던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 허아연은 철없는 어린 시절 좋아한 거라며 이미 지난 일일 뿐이라고 이제는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었다.그때는 허아연이 과거를 내려놓은 줄로만 알았다.나중에 일기장을 보고 나서야 허아연이 내려놓은 건 다름 아닌 주현우였다는 걸 깨달았다. 연회장 안은 여전히 떠들썩했다. 다들 열띠게 기술과 협력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주현우가 다시 연회장으로 돌아왔을 때 허아연은 이미 자리를 떠난 뒤였다. 오늘 감정 기복이 심했던 주현우도 오래 머물지 않고 전서진과 몇몇 원로 지도부에게 인사하고 먼저 자리를 떴다.호텔 정문, 주현우가 내려오자 오원빈이 이미 차를 대기하고 있었다. 잠시 후.차가 출발하자 주현우가 분부했다."안씨 가문 둘째 딸 신원 좀 알아봐줘."주현우의 말에 오원빈이 빠르게 몸을 돌리며 자료 한 뭉치를 건넸다."대표님, 방금 이미 알아보았습니다."조금전 연회장에서 안시연의 얼굴을 본 순간 오원빈은 바로 알아보기 시작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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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6화

허아연이 떠나고 2년 동안, 홀로 앉아 밤을 지새우고 날이 밝을 때까지 멍하니 있는 게 주현우의 일상이 되어버렸다.오예은이 떠났던 시절에도 이렇게까지 마음이 무거웠던 적은 없었다.아마 죄책감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 시각, 유건희의 집.유지원과 아침을 먹고 가정부에게 등교를 부탁한 유건희는 휴대폰과 서류, 차 키를 챙겨 먼저 내려갔다.내려오자마자 주현우의 검은색 마이바흐가 클랙슨을 울렸다.유건희가 차로 시선을 돌리자 주현우가 창문을 내리며 여유롭게 말했다."유 대표님, 얘기 좀 하죠."주현우의 등장에도 유건희는 크게 놀라지 않았다.다만 이렇게 빨리 움직일 줄은 몰랐다.태연하게 조수석에 올라탄 유건희가 말했다."할 말 있으면 일단 해요. 회사까지 데려다줄 필요는 없어요, 이따 직접 운전해서 갈 거니까요."유건희가 단도직입적인 태도에 주현우도 에둘러 말하지 않았다. 두 팔을 핸들에 걸친 채 유건희를 보며 느긋하게 물었다."안시연, 허아연 맞죠?"어젯밤 곰곰이 생각해본 결과, 안시연이 정말 허아연이라면 그 정도로 도와줄 능력과 관계를 가진 사람은 유건희뿐이었다.주현우의 물음에 유건희가 말했다."주 대표님, 병원 가서 진료 한번 받아봐야겠네요. 그리고 그 질문은 안시연 씨한테 직접 물어야 하지 않겠어요?"주현우는 그 일에 대해 입을 꾹 닫는 유건희를 조용히 바라보았다.유건희는 태연하게 한참을 쳐다보기만 하고 말이 없는 주현우를 보더니 차 문을 열고 말했다."주 대표님, 그럼 저는 먼저 회사로 가보겠습니다. 나중에 뵙죠."말을 마친 유건희는 자기 차로 걸어가 올라타고는 곧바로 출발했다.멀어지는 유건희의 차를 보며 주현우는 미간을 잔뜩 찡그렸다.유건희는 능글맞은 여우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만나보면 표정이나 반응에서 실마리를 잡을 수 있을 줄 알았다.그러나 아무것도 없었다. 유건희는 빈틈 하나 보이지 않았다.……그 뒤 며칠 동안 전서진과 심유환도 가만히 있지 않고 강성시 지도부와 안씨 남매에게 몇 차례나 식사 초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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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7화

고등학교 2학년 때 로봇 대회에 나가 특허를 땄을 때 찍은 사진이었다.묘비를 다 닦은 주현우는 평소처럼 편하게 얘기를 나눴다. "아연아, 교진시에 요즘 새로운 움직임이 있어. 강성시에서 여자애가 하나 왔는데 키가 너보다 조금 큰 것 말고는 너랑 정말 닮았어.""처음 본 순간, 네가 돌아온 줄 알았어.""너도 알겠지만 지난 2년 동안 네가 떠났다는 걸 완전히 받아들일 수 없었어. 네가 그냥 어딘가 숨어 있는 것 같았어. 그러나 그렇게 오랫동안 떠오르는 곳은 다 찾아보고 허아연이 알 만한 곳도 다 뒤졌는데도 흔적 하나 찾지 못했다.결국 의심을 내려놓고 허아연이 정말 떠났다는 걸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흰머리는 희망을 품었다가 다시 절망하기를 반복하며 허아연을 저버렸던 순간을 되새길 때마다 조금씩 하얗게 세어간 것이었다.주현우가 환하게 웃는 허아연의 사진을 바라보며 시선을 떨군 채 담담히 말했다."할아버지한테 이 혼사 승낙했을 때는 널 지켜주려던 거였어. 그런데 나중에 보니 네 삶의 모든 풍파가 다 나 때문이었어." "아연아, 돌아오면 안 돼? 다시 시작하자는 것도 아니야. 그냥 돌아오기만 하면 뭐든 네 말대로 할게."안씨 남매의 등장과 허아연과 닮은 안시연 때문인지 주현우는 평소보다 말이 많아졌다.서늘한 바람이 스치며 나뭇잎이 흩날리자 흰머리의 주현우는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보였다. 멀지 않은 곳에서 자신의 묘비 앞에 선 주현우를 바라보던 허아연은 더 다가가지 않았다.허아연은 자신을 보러 온 게 아니라 조금 더 뒤쪽에 있는 부모님을 보러 온 것뿐이었다. 일찍 눈치채지 못했다면 지금쯤 주현우에게 들켰을 것이다.애틋하게 묘비 앞에서 자신에게 말을 늘어놓는 주현우를 말없이 보면서도 허아연의 눈빛은 흔들림 없었다. 2년이 지났다. 이제는 모든 걸 내려놓고 다 잊은 뒤였다. 주현우가 예전에 자신을 구해준 것도 이걸로 갚은 셈이었다.갚지 못했다 해도 이제는 없는 셈 치기로 했다.꼼짝 않고 두 사람을 지켜보던 허아연은 길목을 지난 오원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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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8화

허아연이 가볍게 웃으며 답했다."몇 년 전에 교류하러 왔다가 좋은 친구를 사귀었는데 작년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들어서 보러 왔어요."옆에 있던 오원빈은 허아연의 말들을 머릿속에 낱낱이 새겨 넣었다.허아연의 설명에 주현우는 더 캐묻지 않고 지금 시내로 돌아가는 길인지만 물었다. 허아연은 차 키를 잃어버려서 먼저 찾아야 한다고 사실대로 얘기했다.그 말에 주현우와 오원빈은 허아연이 방금 지나온 길로 다시 돌아가 한참을 찾아보았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찾을 수 있을 리 없었다. 허아연의 차 키는 애초에 그 길에 떨어진 게 아니었으니까.결국 주현우가 말을 꺼냈다. "안시연 씨, 데리러 오기를 기다리려면 한 시간 넘게 여기 있어야 해요. 어차피 시내 들어가는 건 같은 방향이니까 같이 가시죠."지나치게 사양하는 게 오히려 더 수상해 보이고 주현우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허아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 모습에 오원빈이 얼른 말했다."저는 제 차 몰고 왔으니 두 분 먼저 가세요. 저는 따로 운전해서 가겠습니다." 오원빈의 눈치 빠른 대처에 주현우는 신사답게 허아연을 위해 조수석 문을 열어주었다.주현우의 배려에 허아연은 감사 인사를 하고는 몸을 숙여 차에 올랐다.주현우의 차가 멀어지는 걸 지켜보던 오원빈은 곧바로 허씨 가문 묘비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사실 차를 몰고 온 것도 아니었다. 따로 남아서 안시연이 방금 보러 간 친구가 누구인지, 허씨 가문 묘비를 다녀간 건 아닌지 확인하려는 것이었다.그리고 차 키가 방금 찾아본 길목이 아니라 다른 곳에 떨어진 건 아닌지도 확인하고 싶었다. 오랜 세월 주현우 곁을 지킨 오원빈은 눈빛 하나만으로도 주현우의 속내를 읽어낼 수 있었다. 그러니 따로 지시할 필요도 없었다.……한편 차가 묘지를 벗어날 무렵 주현우는 화제를 찾아 허아연과 대화를 이어갔다.사생활 얘기나 자기 얘기, 죽은 아내를 닮았다는 말은 꺼내지 않고 그저 업무 얘기만 나눴다.조수석에서 주현우의 설명을 듣던 허아연이 웃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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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9화

주현우를 잡고 똑바로 선 허아연은 차분하게 손을 떼고 깍듯하게 말했다."감사합니다."여전히 허아연의 팔을 잡고 있던 주현우가 부드럽게 물었다."괜찮으세요?"허아연이 고개를 들었다."네, 괜찮아요."주현우는 그제야 손을 놓았다.두 사람이 인사를 나눈 뒤, 허아연은 돌아서서 호텔로 들어갔다.멀어지는 허아연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주현우는 좀처럼 시선을 뗄 줄 몰랐다. 허아연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천천히 눈길을 거뒀다.차를 몰고 돌아가는 내내 주현우의 머릿속에는 온통 안시연 생각뿐이었다.정확히는 예전 허아연 생각이었다.허아연이 자기 방에서 숙제를 하던 모습, 눈이 마주칠 때마다 귀가 발갛게 달아올라 시선을 피하던 모습 같은 옛 추억이 떠올랐다. 사실 주현우는 줄곧 허아연을 좋아했었다. 하지만 워낙 주민경과 가깝게 지내서 자기도 모르게 여동생처럼 여겼고 그 이상은 감히 생각도 하지 못했다.설령 마음이 있었다 해도 혼자 속으로만 생각했을 뿐이었다.그래서 허민수가 두 사람의 혼사를 꺼냈을 때 주현우는 사실 무척 기뻤다.그래서 허아연의 일기장을 오해하고 그렇게 화가 나고 질투가 났던 것이다. 짝이 된 오예은에게 다른 여학생들보다 더 다정하게 대했던 것도 허아연과 닮은 구석이 있어서였다. 두 손으로 핸들을 잡은 채 무심히 앞을 바라보는 주현우의 약지에는 이제 그 반지가 없었다.허아연의 일기장 속 좋아하는 사람이 자신이었고, 자기 때문에 우울증이 생겼다는 걸 알게 된 뒤로 주현우는 누구에게도 속마음을 털어놓지 않았다. 감히 그런 생각조차 할 수 없었고 자신이 허아연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용기도 없었다.죄책감 때문이었다.주민경의 말이 맞았다. 주현우는 허아연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었다.차는 계속 앞으로 나아갔지만 앞을 바라보는 주현우의 눈빛은 예전 같지 않았다.빛도, 희망도 없었다.허아연이 살아 있기만 하다면, 이 세상 어딘가에 있어주기만 한다면, 잘 지내고만 있다면 아무것도 바랄 것이 없었다. 잘 지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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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0화

호들갑을 떠는 주민경을 보며 주현우는 무표정으로 담담하게 말했다."거의 똑같아.""그럼 나 좀 만나게 해줘. 아연이와 얼마나 닮았는지 내 눈으로 봐야겠어."주민경의 요구에 주현우는 대꾸하지 않았다.현실적이지 않은 부탁이었다.허아연을 닮았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을 방해하는 건 예의도, 상식도 아니었다.주현우가 대꾸하지 않자 주민경은 눈을 흘기며 새침하게 말했다."안 해줄 거면 말든가. 내가 알아서 방법 찾을 거야."말을 마친 주민경은 점심도 거른 채 차를 몰고 다시 안시연을 만나러 호텔로 향했다. 막무가내인 주민경을 보면서도 주현우는 말리지 않았다.어쩌면 자신보다 주민경이 나서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부엌에서 나온 유서희는 밥 먹으라고 하려다 생각에 잠긴 주현우를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얗게 센 머리를 보고는 더더욱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허아연이 떠나고 2년 동안, 주씨 가문 그 누구도 감히 주현우에게 마음 편히 먹으라거나 이제는 그만 내려놓으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재혼 얘기는 꺼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유서희는 진작부터 주현우가 평생 재혼하지 않을 거란 각오를 하고 있었다. 주씨 가문의 대를 잇는 중임은 주현우가 아닌 주진우와 주민경에게 걸고 있었다.게다가 허아연이 떠난 뒤로 주진우도 집에 돌아오는 일이 훨씬 뜸해졌다.심지어 지난 2년 동안은 설에도 돌아오지 않았다.식사를 마친 주현우는 방으로 돌아가 책상 앞에 앉아 업무를 보았다.지난 2년 동안 온 세상을 헤집으며 허아연을 찾아다니는 것 외에는 일에만 파묻혀 지냈다.임원들이 보낸 업무 보고서를 다 훑어본 주현우의 시선이 컴퓨터 옆에 놓인 사진들로 향했다.한 장은 함께 찍은 단체 사진이었다. 허아연과 주민경이 가운데 서 있고 옆에 선 주현우는 자연스레 왼팔을 허아연 어깨에 걸치고 있었다.사진 속 허아연은 활짝 웃고 있었다.옆에는 허아연과 단둘이 찍은 사진도 한 장 있었는데 몇 안 되는 둘만의 사진이었다. 사진 속 허아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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