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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1화

백스테이지에서 지나윤은 상금 1억을 받았다. 이것도 오늘 한 경기에서 받은 상금에 불과했다.최근 PY컵은 매주 열리고 있었고, 주최 측은 시간이 될 때마다 참가해 달라고 부탁했다.지나윤은 가능하면 참석하겠다고 답했다.레이싱 경기에 참여한 횟수는 사실 많지 않았고 한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하지만 출전할 때마다 우승을 차지했고, 게다가 여성 드라이버라는 점 덕분에 현장 분위기를 단숨에 끌어올릴 수 있었다.그래서 주최 측은 늘 지나윤의 참가를 반겼다.국제 서킷을 나설 때는 이미 시간이 꽤 늦어 있었다.배가 고파진 지나윤은 근처에 있던 이자카야에 들어가 늦은 저녁을 먹기로 했다.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입구 바로 옆에 일렬로 앉아 있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바로 유시진, 채연서, 우원재였다.셋도 지나윤을 보았는데, 이때 바로 나가 버리면 괜히 더 의식하는 것처럼 보일 것 같았고 셋을 보고 피하는 것처럼 느껴질 것 같았다지나윤은 잠깐 망설이다가 의자를 끌어 유시진의 옆자리에 앉자 남자는 아무 말없이 입꼬리만 살짝 끌어올렸다.그 모습에 채연서는 잠시 미간을 찌푸렸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속으로는 ‘또 나타났네’ 하고 욕만 했을 뿐이었다.우원재는 이 셋 중에서 가장 공개적으로 지나윤을 공격하던 사람이었지만, 오늘만큼은 관심이 전혀 다른 곳에 가 있었다.“못 보셨죠? 제 여신이 얼마나 멋있었는지.”우원재는 유시진과 채연서에게 자랑하는 것도 모자라, 이자카야 사장에게까지 방금 끝난 레이싱 경기를 열변을 토하며 설명하고 있었다.그때까지 지나윤은 유시진 일행이 경기장에 있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우원재의 칭찬을 들으면서도, 처음에는 그 대상이 자기 자신일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그러나 우원재의 입에서 ‘이채영’이라는 이름이 나왔을 때야 깨달았다.레이싱에 복귀한 뒤 새로 생긴 팬이, 하필이면 그렇게 자신을 싫어하던 우원재라는 사실을.그날 밥 먹는 동안, 지나윤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옆에서는 유시진과 채연서가 계속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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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2화

“이거 내 여신 차랑 똑같은데?”우원재가 놀란 얼굴로 말했다.“근데 뭐 내 여신 차는 개조한 레이싱카니까 지나윤꺼랑은 급이 다르지.”하얀 BMW3 시리즈가 순식간에 앞으로 치고 나갔고 유리창에 붙은 임시 번호판은 밤빛에 묻혀 잘 보이지 않았다.채연서는 곁에 선 유시진이 계속해서 지나윤의 차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가로등 불빛 아래서 유시진의 눈에 비친 놀라움이 은근히 빛나는 듯했다.“지나윤 운전 꽤 잘하네?”채연서가 유시진의 속마음을 대신 말해 주듯 먼저 입을 열었다.“그냥 보통이야.”유시진은 담담하게 평가했다.“맞아, 맞아. 그냥 보통이지. 역시 내 여신이 훨씬 대단해.”우원재가 옆에서 맞장구를 치자 세 사람은 간단히 인사를 나눴다.우원재는 자기 차로 향했고 유시진과 채연서는 함께 움직였다.블루 벤틀리가 바람처럼 질주하며, 하얀 BMW와는 정반대 방향으로 멀어졌다.차를 산 뒤로 지나윤은 더 바빠졌다.며칠 내내 개인 사무실로 쓸 만한 곳을 찾느라 시간을 보냈다.너무 외진 곳은 곤란했고 도심 한복판은 임대료가 감당되지 않아, 결국 투자자인 이명우가 좋은 곳 하나를 소개해 주었다.중청 빌딩은 첨단기술 산업단지 인근에 위치해 있었다.여의도만큼 중심지는 아니었지만 산업단지와 가까워 출퇴근이 편했고 주변 환경도 쾌적했다.무엇보다 이명우가 아는 사람이 있어 조건도 꽤 좋았다.그런 상황에 지나윤은 마음이 흔들렸지만 한 가지 걸리는 점이 있었다.산업단지 안에 바로 유시진이 있는 HF그룹이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었다.지나윤은 자신의 사무실이 그곳과 너무 가까운 위치에 있는 걸 원하지 않았다.이명우의 안내로 오전 내내 사무실을 둘러봤지만, 결국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점심은 산업단지 밖에 있는 분위기 좋은 양식 레스토랑으로 정했다.가격은 조금 나갔지만 이렇게까지 도와준 이명우에게 좋은 식사를 대접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지나윤과 이명우가 식당에 들어선 바로 그 순간, 지나윤은 유시진을 보았는데 뜻밖으로 혼자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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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3화

이명우는 눈을 크게 떴지만 표정 관리는 비교적 잘해 곧바로 유시진과 악수를 했다.“유 대표님, 안녕하세요.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유시진이라는 인물 자체는 이명우도 알고 있었다.다만 이명우는 유시진이 지나윤의 남편이라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이 일은 대표님이 알고 있는 걸까?’이명우는 속으로 계속 계산이 섰다.만약 이준혁이 모르고 있다면, 자신이 이렇게까지 공을 들여 지나윤을 돕는 일이 결국 헛수고가 되는 셈이었다.반대로 이준혁이 알고 있다면 그건 곧 유부녀를 상대로 마음을 두고 있다는 뜻이 된다.게다가 상대는 유시진의 아내였다.이 상황은 제법 충격적인지 이명우는 이마에 맺힌 땀을 손으로 훔쳤다.옆에 있던 지나윤 또한 적잖이 놀란 표정이었다.결혼한 지 삼 년이 지났지만, 불필요한 자리에서 유시진이 두 사람의 관계를 스스로 부부라고 밝힌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그랬기에 지나윤은 유시진이 무언가 계산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레스토랑 밖.장우영은 유시진이 의자를 당겨 지나윤 옆에 앉는 모습을 보자마자, 유시진이 손 대표와의 점심 약속을 지키기 어렵겠다는 걸 직감했다.손 대표의 지위가 유시진에 비하면 한참 낮은 것은 사실이었지만, 오늘 점심은 분명히 약속된 자리였다.또한 회사에서 함께 나올 때까지만 해도 유시진은 마음을 바꾸지 않았었다.그러나 이 레스토랑 입구에서 흰색 BMW3 시리즈를 발견한 순간 상황은 달라졌다.장우영은 유시진이 그 차량 앞에서 잠시 멈춰 섰다가 이내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그대로 지켜봤다.그리고 유시진이 자리를 뜰 생각이 없다는 걸 확인한 뒤, 장우영은 곧바로 손 대표에게 연락해 점심 약속을 취소했다.레스토랑 안에서 이명우는 적당한 이유를 대며 먼저 자리를 떴고, 이 일은 이준혁에게 보고할지 말지 신중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었다.무엇보다 이명우는 이렇게 압박감이 짙은 분위기 속에서 식사하고 싶지 않았다.지나윤은 이명우를 레스토랑 입구까지 배웅하며 다음에 다시 식사하자고 약속했다.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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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4화

지나윤은 오늘 유시진이 이 자리에 나타난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래서 일부러 내 투자자 자리를 깨버린 거야.”눈을 크게 뜨고 따져 묻는 지나윤을 보며, 유시진은 전혀 동요하지 않은 채 스테이크를 자르며 말했다.“내가 그렇게 무섭게 생겼어? 게다가 그 사람은 같이 밥을 안 먹었을 뿐이지, 투자 철회한다고 한 것도 아니잖아.”지나윤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회사 꼭 차릴 거야.”“할아버지는 네가 본인 일 하는 걸 지지해. 그래서 나도 막지는 않아.”그 말에 지나윤은 한숨을 돌렸다.“하지만 채연서도 자기 주얼리 디자인 회사를 열 예정이야. 그렇게 되면 너희는 경쟁자가 되겠지.”유시진은 이미 자기 식사를 끝낸 상태였다.자리에서 일어나 지나윤을 내려다보는 시선에는 거리낌 없는 우월감이 담겨 있었다.“너를 위해 하는 말이야. 채연서를 상대로는 승산이 없어. 그래도 충고를 안 듣겠다면 그건 네 선택이고.”그 말을 끝으로 유시진은 레스토랑을 떠났고 자리에 남은 건 지나윤 혼자였다.유시진이 통보하듯 떠난 자리의 공기는 조금 허전하게 느껴졌다.지나윤은 포크를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배는 아직 차지 않았지만 더 이상 먹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채연서가 주얼리 회사를 열고 경쟁자가 되는 것 자체는 두렵지 않았다.두 사람은 함께 일한 시간도 꽤 길었기에 채연서는 분명 재능과 실력이 있었지만, 디자인 철학이나 스타일은 지나윤이 선호하는 방향과는 달랐다.게다가 지나윤은 스스로가 밀릴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다만 마음이 불편했던 건, 독립해 자기 회사를 차리면 채연서와는 더 이상 얽히지 않을 수 있을 거라 믿었던 점이었다.가볍게 한숨을 내쉰 뒤, 지나윤은 음식을 남기고 싶지 않아 포장해 달라고 했다.곧 직원은 이미 계산이 끝났다며 함께 식사했던 남성이 결제했다는 말도 덧붙였다.그 말에 지나윤은 자연스럽게 유시진을 떠올렸다.‘이걸 배려라고 해야 할까?’지나윤은 이내 고개를 저으며 쓸데없는 생각을 접었다.이럴 시간에 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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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5화

보통 주얼리 디자이너가 개인 회사를 차리면 자금 흐름이나 규모 문제 때문에 이미 시장에 자리 잡은 대형 브랜드들과 정면으로 경쟁하기는 쉽지 않다.그래서 대부분은 디자인 철학을 전면에 내세우고, 컬렉터 시장을 겨냥한 하이엔드 맞춤 제작 노선을 택한다.지나윤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우선 컬렉터 하이엔드 분야에서 이름을 알린 뒤, 그다음 단계를 고민하는 것이 목표였다.피터도 지나윤의 이런 구상에 공감했고, 이번에 노승철을 만나러 온 것 역시 그 길을 닦아주기 위한 자리였다.두 사람이 걸음을 옮기다 보니 노승철의 위엄 있는 별장이 어느새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그런데 지나윤이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피터도 함께 멈춰 서서, 두 사람은 말없이 별장 정문을 바라보았고 그곳에는 두 사람이 서 있었다.피터는 손목시계를 힐끗 확인했다.“우리가 약속 시간보다 30분이나 일찍 왔는데 우리보다 먼저 다른 약속이 있었나 봐요.”별장 문이 열리며 개량한복 차림의 노승철이 안에서 걸어 나왔다.“유 대표, 이분이 추천하는 신인 디자이너인가요?”노승철의 시선이 유시진 옆에 서 있는 채연서에게 향했다.채연서는 오늘 보수적이면서도 우아한 분위기의 핑크빛이 감도는 회색 정장 차림이었다.다소 성숙해 보이는 스타일에 옅은 화장까지 더해, 연장자들에게 호감을 사기 쉬운 차림새였다.“노승철 선생님, 안녕하세요. 채연서라고 해요.”채연서는 먼저 손을 내밀어 노승철과 악수를 했다.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지나윤은 단번에 알아차렸다.유시진도, 피터와 마찬가지로 이 컬렉터를 발판 삼아 누군가를 밀어주려는 것이다.다만 피터가 돕는 쪽은 자신이고, 유시진이 돕는 쪽은 채연서라는 점 그 점만 달랐을 뿐이었다.노승철이 유시진과 채연서를 안으로 안내하려던 순간, 시야 한편에 피터와 지나윤이 들어왔다.“피터 상무, 일찍 오셨네요.”발견된 이상, 피터는 지나윤을 데리고 그대로 다가갔다.별장 앞에는 순식간에 네 사람이 모여서게 되었고 공간이 다소 비좁아졌다.“유시진 대표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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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6화

유시진은 채연서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지나윤의 예상대로였다.유시진은 한 번도 채연서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적은 없었지만, 항상 붙잡아도 한 번도 손을 떼어낸 적이 없었다.그 사실만으로도 이미 많은 것이 설명되고 있었다.노승철은 유시진과 채연서를 바라보는 시선이 점점 묘해지는 것을 느꼈다.곧 네 사람 모두 안으로 들여보내고 비서에게 차를 준비하라고 했다.노승철은 주얼리 컬렉터 협회 회장은 아니었지만, 업계에서 암묵적으로 알려진 하나의 관례가 있었다.매년 신인 디자이너 한 명을 골라 협회에 추천하는 일이었다.이 때문에 유시진과 피터가 동시에 노승철을 찾아온 것이었다.피터와 지나윤이 먼저 도착해 있었기 때문에, 노승철은 지나윤의 디자인 작품과 채연서의 작품을 함께 받아 두도록 했다.노승철을 찾아오는 모든 디자이너는 자신이 직접 디자인한 주얼리 한 점을 반드시 가져와야 했다.형식은 중요하지 않았고 그저 자신의 디자인 철학을 보여 줄 수 있으면 충분했다.“결과는 돌아가서 기다려요. 결정이 나면 비서를 통해 연락드리죠.”노승철은 네 사람과 한참을 이야기한 뒤, 비서에게 넷을 배웅하라고 지시했다.그러나 비서 안지민은 돌아오는 길에 실수로 장식장 모서리에 부딪치는 바람에 주얼리 상자에 붙어 있던 이름 스티커가 떨어졌다.이에 당황한 안지민은 당황해 스티커를 주워 다시 붙였지만, 지나윤의 이름을 채연서의 상자에 붙이고, 채연서의 이름을 지나윤의 상자에 붙여 버렸다.“안 비서, 디자인 상자 두개 다 가져와봐.”이에 안지민은 곧바로 상자 두 개를 집어 노승철에게 건넸다.지나윤은 사무실로 돌아온 뒤, 좀처럼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유시진에게서 채연서도 회사를 차린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언젠가는 정면으로 맞붙게 되리라 생각하긴 했다.하지만 이렇게 빠르게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다.그렇다고 지나윤에게 자신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피터가 지나윤을 집으로 데려다주는 길에 백화점을 지났을 때, 쇼윈도에 걸린 메인 주얼리들이 전부 자신이 디자인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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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7화

채연서는 칭찬받으며 얼굴에 꽃처럼 웃음을 띠고 있었다.그러나 ‘크리스탈 버튼’이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채연서의 미소가 눈에 띄게 굳었다.유시진은 곁에 서 있던 채연서의 미묘한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무슨 일이야?”“아, 아니야.”채연서는 고개를 저었다.“그냥 선생님 말씀이 조금 과장된 것 같아서.”“과장이 아니죠.”노승철은 여전히 열정적으로 설명하고 있었다.“작은 버튼 하나에 입체적인 구조를 구현했고 크리스탈 커팅은 눈부실 정도로 완벽하죠. 이는 주얼리의 핵심 요소를 모두 갖췄어요.”“게다가 내부의 유동 금속 표현은 포용력 있는 스케일을 느끼게 하죠.”그러나 채연서는 노승철의 말을 더는 이해할 수 없었다.그 디자인은 버튼이 아니었다.유시진이 노승철이 중식 미감을 선호한다고 말해 주었기에, 채연서는 최고급 양지 백옥을 사용해 반지를 제작했다.조금 전까지 유시진에게서 노승철이 자신의 디자인을 선택했다는 말을 듣고, 자신의 실력에 확신까지 품고 있었다.‘그런데 지금 이 상황은 뭐지?’노승철이 지나윤과 채연서의 작품을 혼동한 것이 분명했다.곧 채연서는 분노와 두려움이 동시에 치밀어 올랐다.노승철의 안목이 원망스러웠고, 이 사실이 지나윤의 귀에 들어갈까 봐 마음이 조여 왔다.“시진아, 저쪽에서 춤출까? 여기 좀 답답해.”“그래.”유시진은 채연서와 함께 무도장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다 멈췄다.왜냐하면 유시진의 시선이 파티장 입구에 새로 들어선 두 사람에게 꽂혔기 때문이다.채연서도 따라 멈춰 서서 그쪽을 바라봤고 지나윤은 사방에서 자신에게 쏠리는 시선을 느끼고 의아해했다.“제 얼굴에 뭐 묻었나요? 아니면 옷이 이상한가요?”지나윤이 곁의 피터에게 물었다.피터는 오늘 검은 수제 연미복 차림이라 단정하면서도 영국 신사 같은 분위기였다.“아니에요. 너무 눈에 띄어서 그래요. 다들 놀란 거죠.”훅 들어오는 피터의 칭찬에 지나윤의 볼이 살짝 달아올랐다.피터는 말을 참 부드럽게 했다.“피터랑 사귀는 사람은 참 행복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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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8화

지나윤은 이준혁과의 재회가 이런 자리에서 이루어질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이준혁 역시 지나윤을 보는 순간, 눈에 놀라움이 스쳤다.오랜만에 보는 이준혁의 얼굴은 더 이상 앳된 기운이 남아 있지 않았다.특히 정장을 입은 모습은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한 청년이 아니라 재계에서 이름을 알리는 인물다운 분위기와 존재감을 풍기고 있었다.“준혁아, 이분을 알아?”박시현이 이준혁에게 물었으나 남자의 시선은 여전히 지나윤에게 머물러 있었다.얇은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가 다시 다물어졌다. 적절한 단어를 고르지 못해 망설이는 이준혁은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대신 피터가 박시현에게 지나윤을 소개했다.“박시현 씨, 이쪽은 지나윤이라고 제 여자친구예요.”이에 지나윤은 눈을 크게 뜨고 피터를 바라봤는데 왜 만나는 사람마다 자신을 여자친구라고 소개하는지 묻고 싶은 표정이었다.이준혁은 애써 감정을 눌러 보려 했지만, 안색이 몇 번이나 저도 모르게 바뀌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며칠 전, 이명우가 돌려 말하듯 이야기를 전해줬다.지나윤은 이미 결혼했고 남편은 유시진이라는 말이었다.‘그렇다면 아직 이혼은 하지 않았다는 뜻인데 지금 피터와는 또 무슨 관계야?’이준혁은 말없이 주먹을 쥐었고 묻고 싶은 충동이 생겼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물을 수가 없었다.순간, 공기가 묘하게 가라앉았다.그때 피터가 아무렇지 않게 말을 덧붙였다.“농담이에요. 친구예요.”박시현은 그 말을 듣고 이준혁을 힐끗 바라봤다.조금 전까지 굳어 있던 이준혁의 표정이, 어딘가 안도한 듯 느슨해진 것 같았기 때문이다.“준혁아, 내 소개는 안 해줘?”박시현이 웃으며 말하자 그제야 이준혁이 입을 열었다.“이쪽은 박시현이라고 제 약혼자예요.”‘약혼자’라는 말에 지나윤은 순간적으로 놀랐으나 곧 스스로 예민한 반응이었다는 걸 깨달았다.이준혁의 집안 배경을 생각하면, 집안이 맞는 상대와 약혼하는 건 충분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그 말을 뱉으면서 이준혁은 지나윤의 표정을 살폈다.놀람은 잠시뿐이었고 그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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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9화

“서로 집안도 잘 알고, 하늘이 맺어준 인연에 재능과 외모까지 잘 어울리네요.”지나윤은 곁에서 오가는 이런 말들을 묵묵히 듣고 있었다.얼굴에 공들여 한 화장도 창백한 기색을 가리지는 못했다.결국 사랑에서도 채연서를 이기지 못했고 이는 일에서도 마찬가지였다.지나윤은 스스로에 대한 강한 혐오감을 느꼈다.이제는 이준혁도 약혼자를 데리고 무도장으로 나가 있었다.겉으로는 예의상 인사를 나누고 있었지만, 지나윤은 이준혁이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애초에 모든 연락을 먼저 끊은 쪽은 자신이었다.이준혁의 눈에 자신은 100억을 선택하고 우정을 버린 속물로 보일 것이다.“춤 한 곡 출래요?”피터가 묻고 나서야, 지나윤의 상처 입은 표정을 보고 자신이 실수했다는 걸 깨달았다.“미안해요. 내가 괜한 말을 했어요.”이에 지나윤은 고개를 저었다.피터가 자신을 데리고 온 이유가 인맥을 소개하고 이 세계에 스며들게 하려는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나 혼자 좀 조용히 있고 싶으니까 피터는 일 봐요.”“그래요.”피터는 걱정스러웠지만, 지나윤을 더 괴롭히고 싶지는 않았다.곧 지나윤은 혼자 파티장 발코니로 나가 바람을 쐬었다.지금은 정신을 차리고 마음을 가라앉힐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노승철 선생님은 결국 채연서의 디자인을 선택했어. 이미 연락받았지?”은은한 남성 향수 냄새와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유시진이 얼음을 넣은 데킬라 한 잔을 들고 지나윤의 곁으로 다가왔다.그러나 지나윤은 유시진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유시진은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고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채연서였다.10년 동안의 짝사랑은 우스운 농담 같았고, 유시진과의 결혼도 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지나윤은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로 했다.감정은 억지로 되는 게 아니었지만 디자인에서의 참패는 또 한 번 지나윤을 무너뜨렸다.지나윤은 자신이 큰 타격을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일부러 나 비웃으러 온 거에?” 지나윤이 차갑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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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0화

심장이 거세게 짓밟힌 것 같은 느낌이 든 지나윤은 갑자기 유시진을 밀쳐냈다.곧 유시진의 손에 들려 있던 술잔이 기울어지며 술이 쏟아졌고, 그대로 몸 위로 흘러내렸다.흰 셔츠에는 얼룩이 번졌고 정장도 흠뻑 젖었다.그러나 입가에 걸린 담담하고 자신감 있는 미소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지나윤은 유시진을 노려보며 두 손을 꽉 움켜쥐었다.늘 그랬다.유시진은 아주 쉽게 지나윤의 감정을 뒤흔들어 놓으면서도, 정작 자신은 언제나 태연했다.이러한 사실이 분한 지나윤은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이쪽의 소란은 피터와 채연서의 시선을 끌었고, 박시현은 함께 있던 이준혁이 몇 차례나 무의식적으로 발코니 쪽을 바라보는 것을 알아차렸다.마치 그곳에 몹시 신경 쓰는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아니면 누군가일지도 모르지.’그렇게 생각한 박시현 또한 시선을 옮겼다.피터가 지나윤 곁에 서 있고 채연서가 유시진 곁에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채연서는 곧바로 손수건을 꺼내 유시진의 옷을 닦아주고는, 장우영에게 연락해 새 옷을 준비하라고 했다.피터는 지나윤을 위아래로 살폈는데 유시진이 혹시라도 지나윤에게 상처를 주는 행동을 했을까 걱정이 됐다.다행히 지나윤은 옷차림도 단정했고 머리도 흐트러지지 않았다.다만 얼굴빛이 좋지 않았고 두 눈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괜찮아요?”피터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괜찮아요.”그러나 괜찮다는 말이 무색하게 지나윤의 가슴은 여전히 거칠게 오르내리고 있었다.이 분노가 유시진을 향한 것인지, 아니면 자기 자신을 향한 것인지조차 분간이 되지 않았다.피터는 잠시 지나윤을 살펴본 뒤 유시진에게 말했다.“유 대표님 옷은 제가 보상하죠.”유시진은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으로 먼저 지나윤을 한 번 바라본 뒤, 피터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괜찮아요. 나윤이 제 옷을 깨끗하게 빨아 줄 거예요.”피터의 얼굴이 굳어졌고 지나윤이 곧바로 받아쳤다.“요즘 사업이 잘 안돼? 이렇게까지 아껴야 할 정도야?”“이 정장은 우리 연서가 사 준 거라서 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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