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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1화

“아버지가 우리 둘더러 이혼하라고 하셨어.”주행 중에 스며드는 바람 소리 때문에 유시진의 차분한 목소리는 또렷하지 않았다.지나윤은 고개를 돌렸는데 방금 말을 제대로 들은 건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유시진은 그저 전방만 바라보고 있었고 흠잡을 데 없는 얼굴은 바람이 없는 호수처럼 고요했다.지나윤은 입을 열었다가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저 신선한 공기만 들이마셨다.유시진은 차를 운정힐즈로 몰았는데 지금 이 상태로는 선택지가 없었다.다시는 오고 싶지 않은 곳이었지만 이미 도착한 이상 씻는 것부터 해야 했다.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채연서와 유시진은 현재 동거 중이었다.이곳은 원래 지나윤과 유시진의 신혼집이었고 그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문을 여는 순간, 이 공간과 어울리지 않는 핑크빛이 눈에 들어왔다.미간이 찌푸려질 만큼 너무나 강렬한 핑크빛이었다.지나윤의 눈에 스치는 거부감을 유시진은 분명히 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대신 핑크색 잠옷 하나를 건넸다.그 잠옷은 지나윤의 것이 아니었다.그저 채연서가 이 집에서 지나윤의 흔적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입고 싶지 않아.”지나윤의 거절은 단호했다.“새 거야. 금방 산 거야.”“그래도 입고 싶지 않아.”“그러면 아무것도 입고 마.”유시진은 핑크색 잠옷을 다시 거둬들였다.지나윤은 욕실로 들어갔데 안에는 남자용과 여자용, 두 벌의 가운만 걸려 있었다.하나는 유시진의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채연서의 것일 수밖에 없었다.그것을 보자 속이 울렁거렸는데 썩은 달걀 냄새보다 더 견디기 힘든 기분이었다.여기서 1초라도 더 머무르면 토할 것 같았다.지나윤은 가능한 한 빠르게 씻고 나왔다는데 문을 열고 나갈 수가 없었다.“유시진, 밖에 있어?”그러나 욕실 밖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유시진?”지나윤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는데 밖에는 유시진이 없었고 커튼도 모두 내려져 있었다.그제야 숨을 내쉴 수 있게 된 지나윤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밖으로 나왔다.하지만 원래 입고 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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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2화

지나윤은 이혼 합의서에 쓰인 유시진의 싸인을 확인했다.거리낌 없고 자유로운 필체였고 보기 좋게 싸인 되어 있었다.‘드디어...’지나윤은 유시진과 이혼하게 된다.이혼이 끝나면, 지나윤과 유시진 사이에는 더 이상 아무런 인연도 남지 않게 된다.또한 유시진은 채연서와 떳떳하게 만남을 이어갈 수 있었다.아니, 정확히 말하면 이혼하지 않았어도 유시진은 이미 채연서와 당당하게 다니고 있긴 했다.“이제 와서 후회되는 건가?”지나윤이 고개를 들자 유시진의 눈에는 노골적인 조소가 서려 있었다.“아니.”지나윤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후회하지 않지만 유시진의 싸인이 찍힌 이혼 합의서를 손에 쥐었는데도, 생각만큼 들뜨거나 벅차지 않을 뿐이었다.아마도 이번 이혼은 유시진이 먼저 꺼낸 일이기 때문일 것이었고 지나윤이라는 짐을 지고 싫어서일 것이었다.“펜 있어?”“없어.”유시진의 대답에 지나윤은 잠시 멈칫했다.기억이 맞다면 유시진은 항상 만년필을 지니고 다녔다.“내가 일부러 그러는 거라고 생각해? 이혼 안 할 핑계 주려고?”유시진은 끝까지 지나윤이 진심으로 자신을 떠나려 한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 눈치였다.유시진은 늘 자신만만한 사람이었고 그럴 만한 근거도 충분히 가진 사람이었다.“집에 가서 펜 찾으면 그때 싸인할게.”지나윤이 이혼 합의서를 가방에 넣자 유시진은 부엌으로 끌어들였다.“잠깐만.”“이혼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약 한 번만 더 끓여줘. 위 아프거든.”“채연서가 퇴근하고 안 끓여줘?”“퇴근하면 피곤할 거잖아.”그 이유가 어처구니없게 느껴졌지만 지나윤은 웃을 수가 없었다.결국 지나윤은 유시진의 약을 끓이지 않은 채 혼자 운정힐즈를 떠났다.유시진은 한동안 부엌문 앞에 서 있었다.얼굴은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고 찌릿하게 아픈 위를 손으로 눌렀다.지나윤은 택시를 잡았고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마스크를 썼다.택시 안에서 가방 속 이혼 합의서를 꺼냈는데 그제야 늦게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서류를 고정한 클립, 그리고 그 클립에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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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3화

지나윤은 침대에 몸을 눕히고 잠을 보충하려 했다.막 눈을 붙이려는 순간, 유시진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괜히 신경 쓰지 마. 내일부터 너랑 나는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니까.]문장 사이사이에 서린 날 선 냉기가 가득하던 졸음을 단숨에 깨웠다.지나윤은 이마에 붙인 밴드를 무심코 만졌다.분명 밴드를 붙였는데도 상처는 이유 없이 더 욱신거렸다.HF그룹 대표실.장우영의 보고를 들은 뒤에야, 유시진은 채연서가 자신의 휴대폰을 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무슨 일이야?”“아니야. 스팸 문자 하나 와서 내가 지웠어.”채연서는 태연하게 휴대폰을 건네자 유시진은 화면을 확인하지도 않은 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지나윤은 이번에는 깊이 잘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밤새 악몽이 끊이지 않았고, 몇 번이나 깨어났다.그렇게 잠을 설치다 아침이 되자 머리가 터질 듯 아팠다.이마의 밴드를 떼자 상처는 이미 딱지가 앉아 있었는데도 여전히 아팠다.연한 화장을 하고 비교적 단정한 정장을 입었다.오늘은 가정법원에 가서 이혼 절차를 밟는 날이었다.혼인신고를 하러 갔던 날보다 오히려 더 엄숙한 기분이었다.확실하게 이혼 절차를 다 밟게 되면 지나윤의 10년짜리 사랑도 마침표를 찍게 되었다지나윤은 휴대폰 속 비밀번호가 걸린 앨범을 열었고 그 안에는 여전히 그 사진이 있었다.지워야 했다.이제는 정말 지워야 했다.삭제 버튼을 눌렀다가 다시 취소 버튼을 눌렀다.이혼을 확실하게 하고 나서 하자고 마음먹었다.지나윤은 쉽게 내려놓는 성격이 아니라는 사실을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약속 시간보다 10분 먼저 가정법원에 도착했는데 유시진도 이미 와 있었다.운전석에는 장우영이 앉아 있었고 차는 바뀌어 있었다.검은 마이바흐가 아니라 딥블루 페라리였다.유시진이 차에서 내리자마자, 지나윤은 기다렸다는 듯 싸인한 이혼 합의서를 내밀었다.마치 이미 싸인했다는 사실로 자신의 결심이 진심임을 증명하려는 것처럼 말이다.유시진의 입꼬리는 얕고 차가운 곡선을 그렸다.유시진은 고개를 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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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4화

두 사람의 이름에는 어떤 신분 설명도 붙어 있지 않았다.지나윤은 자신이 이런 식으로 유명해질 날이 올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더구나 온라인에서 자신의 결혼사진을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유시진과의 결혼사진이었다.사진은 스튜디오에서 찍은 웨딩 화보가 아니라, 결혼식 현장을 따라 촬영한 스냅 사진이었다.지나윤은 진줏빛 오프화이트의 오프숄더 새틴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맞춤 제작한 검은 정장을 입은 유시진과 반지를 교환하고 있었다.이 사진이 진짜라는 건, 지나윤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게다가 이 사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유씨 집안 전체를 통틀어도 손에 꼽을 정도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다만 온라인에 올라온 사진은 화질이 안 좋아 신랑 신부의 얼굴을 흐릿하게만 구분할 수 있을 뿐이었다.[지나윤이 HF그룹의 안주인이라고?][합성 아니야? 딱 봐도 가짜인데.][이 시점에 터진 게 너무 수상하잖아.][화질부터가 일부러 티 안 나게 만든 느낌.][합성이네, 다들 그만 봐.][지나윤이 유시진 아내면 나 바로 라이브 방송 켜서 손에 장을 지질게.]온라인에서는 온갖 말이 쏟아졌지만, 전태지의 가정을 파괴한 불륜녀라는 말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지나윤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지금의 인터넷은 늘 이랬다.사진 한 장으로 시작해 내용은 전부 상상으로 채워졌고, 반전은 순식간에 일어나지만 구경꾼들은 진실에는 관심이 없었다.이 기사를 따라 내려가 보니, 10분 전쯤 익명 계정에서 유시진의 차가 시청 근처에 주차돼 있었다는 글도 올라와 있었다.“그래서 기자들이 온 거였구나.”지나윤은 커피를 마시며 혼잣말했다.HF그룹은 주요 플랫폼마다 공식 계정을 운영하고 있었다.지나윤과 유시진의 결혼사진이 퍼진 뒤, 공식 계정 아래 댓글 수는 급증했지만, 정작 공식 입장은 아무것도 없었다.그 때문에 점점 더 많은 네티즌들이 이 결혼사진은 가짜라고 판단했다.그렇게 해당 실시간 검색어는 반나절도 채 되지 않아 내려갔다.지나윤과 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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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5화

결국 그 사람들은 모두 유시진이 지나윤을 안아 데리고 가는 장면을 직접 본 사람들이었다.다만 유시진과 채연서의 관계 때문에 모두가 지나윤을 ‘세컨드’라고 여겨왔을 뿐이었다.하지만 이번에 온라인에 올라온 결혼 사진이 사실이라면 어떨까?“말도 안 돼요.”강수향은 자기 부서 사무실에서 채연서를 두둔했다.“딱 봐도 합성이잖아요. 나윤 씨 정말 뻔뻔하네요. 연서 씨는 이미 대표님이랑 동거 중인데요?”강수향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다만, 만약 처음부터 지나윤이 정실이었다고 해도, 유시진과 지나윤 그리고 채연서 세 사람 사이의 복잡한 관계는 여전히 성립했다.달라지는 건 단 하나, 누가 진짜 ‘세컨드’인가 하는 점뿐이었다.복도에서 채연서는 다른 부서 직원 두 명과 마주쳤는데 그 시선은 이전과 확연히 달랐다.오늘 하루 동안 이런 눈빛을 수없이 받아온 채연서는, 그 원인이 실시간 검색어에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대표실 앞에 도착하자 채연서는 옷매무새를 다듬었다.그리고 문을 여는 순간, 얼굴에는 평소처럼 달콤한 미소가 돌아왔다.“시진아, 과일 좀 깎아왔어. 네가 좋아하는 멜론이야.”채연서는 과일 접시를 들고 다가가 무심코 파쇄기 안을 힐끗 보았다.문서는 이미 잘게 찢겨 있었지만 상단의 제목만큼은 분명히 알아볼 수 있었다.바로 이혼 합의서였다.“무슨 일이야? 안색이 왜 이렇게 안 좋아요?”유시진은 포크로 멜론 한 조각을 집어 채연서의 입가로 가져갔으나 여자는 고개를 돌리며 피했다.이에 유시진은 잠시 멈칫했다.“시진아, 나는 더 이상 못 하겠어.”채연서의 눈가는 순식간에 붉어졌는데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듯한 모습이었다.유시진은 드물게 먼저 채연서의 손을 잡아 자기 옆으로 끌어당겼다.“무슨 일이야? 누가 괴롭혔어?”이에 채연서는 고개를 저었다.“아무도 괴롭히진 않았어. 그냥 회사 사람들이 뒤에서 나를 세컨드라고 말해요. 나...”채연서는 그 틈을 타 유시진의 품에 안겼고 눈물이 떨어져 남자의 셔츠를 적셨다.유시진은 휴지로 조심스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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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6화

지나윤은 유시진의 말을 이해하는 데 잠시 시간이 걸렸고 휴대폰을 쥔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무슨 말이야? 이혼을 안 한다니 그게 무슨 뜻이야?”[말 그대로야.]유시진의 담담한 대답은 지나윤의 속을 단번에 뒤집어놓았다.지나윤은 오늘 하루 종일 여기서 기다렸고, 이는 기자들이 모두 빠져나간 뒤, 유시진과 함께 이혼 절차를 밟기 위해서였다.“유시진, 지금 나를 가지고 노는 거야?”[할아버지께서 입원하셨어.]그 말에 지나윤의 눈이 크게 뜨였다.“나 때문에?”유시진은 그저 짧은 냉소를 흘렸을 뿐이었다.그 웃음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는 듯했다.하나는 이렇게 큰 소동을 벌여 유희봉을 자극했다는 비난과 다른 하나는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한다는 조롱이었다.또한 지나윤은 어느 쪽인지 전혀 가늠할 수 없었다.[어차피 며칠째 출근도 안 했잖아. 오늘은 나오지 말고 장비서 보내서 데리러 가게 할 테니까 같이 할아버지 뵈러 가.]“알았어.”결국, 지나윤은 고개를 끄덕였다.이는 거절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유시진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지만, 유희봉만큼은 외면할 수 없었다.잠시 후, 장우영이 블루 페라리를 몰고 와 지나윤을 태웠다.지나윤은 차에 오르며 무심코 물었다.“유시진은 데리러 안 가요?”“대표님은 따로 오시는 분이 있어요.”장우영의 대답은 애매했지만 지나윤의 머릿속에는 누구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채연서였다.차를 몰던 장우영은 곁눈질로 지나윤의 얼굴을 봤는데 안색이 좋지 않은 걸 보더니 괜히 말을 꺼냈나 싶어 자신을 책망했다.한편, 눈길을 끄는 핑크색 스포츠카 안에는 유시진이 타고 있었고 운전자는 채연서였다.채연서는 유시진을 마운틴온천 요양팰리스로 데려다주었다.유희봉이 이곳에서 입원 치료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미안해.”차에서 내린 유시진이 채연서를 보며 사과했다.“할아버지 몸이 안 좋으신 건 알잖아. 그래서 너를 안으로 데리고 들어갈 수는 없어.”“어, 알고 있어. 할아버지께서 나를 안 좋아하시는 것도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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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7화

“조심해서가. 집에 도착하면 연락해.”“응, 그럴게.”유시진은 채연서가 차에 오르는 모습을 지켜보았고, 핑크색 스포츠카가 도로 끝으로 사라질 때까지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들어가.”유시진이 마침내 지나윤에게 말을 걸었다.하지만 지나치게 큰 꽃다발이 유시진의 얼굴을 가리고 있어 지나윤은 그 표정을 볼 수 없었다.지나윤은 유시진의 옆에 서서 팰리스 안으로 들어갔다.가는 길 내내 꽃가루 때문인지 연달아 재채기를 몇 번이나 했다.그러나 유시진은 눈치채지 못했고 묻지도 않았다.이곳은 경치가 수려하고 공기가 맑아 휴양지로 제격이었다.해가 지고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팰리스에 불이 하나둘 켜지자 오히려 더 고요해졌다.유시진은 내내 말이 없었는데 지나윤과 나눌 말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유시진, 이혼은...”지나윤이 참다못해 입을 열었을 때, 유시진이 얼굴을 가리던 꽃다발을 옆으로 옮겼다.그제야 지나윤은 유시진의 표정을 볼 수 있었다.유시진은 입꼬리가 올라간 입술을 타고난 사람이었다.웃지 않아도 입꼬리가 미묘하게 올라가 있어 늘 웃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그러나 지금 이 순간, 유시진의 입꼬리는 분명히 아래로 내려가 있었고 이는 분노에 가까운 표정이었다.“할아버지를 화병으로 돌아가시게 하고 싶지 않다면 그 얘기 꺼내지 마.”유시진의 말투는 여전히 담담했고 감정의 기복도 없었다.지나윤은 유시진이 말한 ‘그 얘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바로 이혼이었다.가정법원은 이미 문을 닫아 이혼이 불가능했기에 지나윤은 속으로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입원이라고는 하지만 이곳은 병원이 아니라 온천 요양 시설이었다.유희봉이 머무는 방도 병실이라기보다는 화려한 궁전 같은 공간에 가까웠다.방 안에는 유태산과 양화영이 이미 와 있었다.평소 같았으면 두 사람 모두 지나윤에게 좋은 얼굴을 보이지 않았을 것이었고, 특히 양화영은 늘 트집을 잡기 일쑤였다.늦게 왔다거나, 빈손으로 왔다거나 하는 트집 말이다.그러나 이번에는 예상 밖이었다.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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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8화

유시진 역시 지나윤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눈에는 노골적인 경고가 가득 담겨 있었다.이에 지나윤은 생각했다.만약 지금 이 자리에서 공개적으로 이혼을 요구한다면, 유희봉은 분명 거절하지 않을 것이라고.설령 마음속으로는 내키지 않더라도 지나윤의 선택을 존중해 줄 사람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하지만 지나윤은 끝내 입을 열지 못했다.그 이유는 유시진의 경고 때문이 아니라 유희봉이 지금 치료받아야 해 입원 중이었기 때문이다.또한 유희봉은 큰 자극을 견딜 만큼 건강한 상태가 아니었다.유희봉은 심장이 좋지 않았고, 이번 입원 역시 지나윤의 인터넷 이슈 때문은 아닐 가능성이 컸다.평소 온라인을 들여다보는 사람도 아니었으니까.아마도 유태산이 유시진과 지나윤의 이혼 합의서를 준비했다는 사실을 알고 크게 분노한 끝에 쓰러졌을 것이다.지나윤은 더 이상 유희봉을 자극할 수 없었다.만약 유희봉이 정말로 자신 때문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평생을 후회하며 살아가게 될 것이 분명했다.곧 지나윤은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차분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회사를 그만두고 싶어요.”꽤 진지하게 말하는 요구에 옆에 있던 유시진의 동공은 미세하게 흔들렸다.듣던 중 반가운 소식인지 양화영은 즉각 손뼉을 치며 말했다.“잘 생각했어. 애초에 무슨 직장 생활이야. 우리 HF그룹이 못 먹여 살릴 집안도 아니잖아. 그만두고 나면 예전처럼 집에서 내조나 잘하면 돼.”“전에 유산한 것도 경험이 없어서 그런 거니까, 이번엔 좀 더 조심하면 되지. 몸도 이제 다 회복됐고 슬슬 아이 가질 준비를 해야지.”유태산도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이 사람 말 맞아. 마침 잘됐어. 퇴사하고 집에서 임신 준비나 해.”양화영과 유태산이 번갈아 가며 말을 이어가는 동안, 지나윤은 그저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힘겹게 아물어 가던 상처가 다시 억지로 벌어지는 듯한 통증에 가슴이 아려왔다.이에 지나윤은 깨달았다.이 집안 누구도 자신의 유산이 유시진의 의도적인 선택이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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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9화

지나윤의 집안 형편으로 HF그룹 집안에 시집온 것 자체가 사실상 과분한 일이었다.지나윤이 예전처럼 얌전히 전업주부로 살며 집안일만 잘 챙겼다면, 유태산 역시 굳이 나설 이유는 없었다.하지만 지금의 지나윤은 달라졌고 가만히 있지 못하고 이곳저곳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통제되지 않는 사람처럼 변해 있었다.유태산의 생각은 이제 양화영과 크게 다르지 않았고, 상대적으로 보면 채연서 쪽이 훨씬 마음에 들었다.물론 채연서는 전형적인 안주인 타입은 아니라는 점에서 고민이 없지는 않았다.그런데도 여러 차례 부정적인 이슈를 일으킨 지나윤보다는 낫다고 판단했다.회사 이미지와 주가를 위해서든, HF그룹 집안의 체면을 위해서든, 유태산은 유시진과 지나윤을 반드시 이혼시키겠다고 마음먹은 상태였다.그리고 유시진 역시 그 결정에 동의하고 있었다.문제는 그 이야기가 어떻게든 유희봉의 귀에 들어갔다는 점이었다.그날 유희봉은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발작으로 쓰러졌다.HF그룹은 유희봉이 평생 일궈 온 기반이었다.새로운 사업은 유시진이 맡고 있었지만, 기존 핵심 산업은 여전히 유희봉의 손에 있었고 거래처 역시 유희봉이 직접 쌓아 올린 인맥이었다.이 업계에서 진짜 무게감을 가진 존재는 HF그룹이라는 이름보다도 유희봉 개인이었다.이에 유희봉은 분명히 선을 그었다.이번 일로 지나윤과 유시진이 이혼하게 된다면, 자신이 관리하던 모든 사업을 회수하고 유시진의 대표 자리 역시 박탈하겠다고 했다.머리가 지끈해진 유태산이 지나윤을 향해 말했다.“나윤아, 잘 생각해 봐. 여자가 밖에서 커리어를 쌓는 건 정말 쉽지 않아.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그러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희봉이 단호하게 끼어들었다.“나는 나윤이 편이야.”그 말 한마디에 방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바뀌었다.유희봉은 유시진을 바라보며 말했다.“시진아, 나윤이 HF그룹에서 일하고 싶지 않다면 네가 직접 나서서 절차를 처리해.”유시진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할아버지. 내일 인사부에 이야기해서 퇴사 절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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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0화

지나윤은 말없이 유시진을 바라보았다.유시진의 눈에 자신이 과연 이익만 좇고, 내세울 것 하나 없는 여자처럼 보이는 건지 조금 궁금해졌다.유시진의 표정은 바람이 불지 않는 호수처럼 고요했다.지나윤이 퇴사를 요구한 일로 화가 난 건지 아닌지도 가늠할 수 없었다.“퇴사하면 네 스폰서 한테 돌아갈 생각이야?”지나윤은 잠시 멈칫했다가 되물었다.“내 스폰서가 누군데?”유시진은 말없이 웃기만 했다.마치 ‘본인이 제일 잘 알면서’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이었다.그렇게 나오자 지나윤은 설명하고 싶어도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객실 한쪽에는 넓은 유리 미닫이문이 있었다.문을 열면 바로 전용 노천 온천이었고, 대나무로 만든 차단막이 사방을 둘러싸 사생활을 완벽히 보호하고 있었다.유시진은 넥타이를 풀어 던지고 미닫이문을 열자 순간 바깥에서 귀뚜라미 우는 소리가 또렷이 들려왔다.“온천에 들어갈 건데 같이 갈래?”“싫어.”지나윤은 망설임 없이 단호하게 거절했다.유시진은 그저 입꼬리를 가볍게 올릴 뿐, 더 권하지도 강요하지도 않았다.그때 현관 수납장 위에 올려둔 유시진의 휴대폰이 울렸다.가까이에 있던 지나윤은 무심코 전화를 집어 들어 유시진에게 건네려 했는데 화면에 뜬 이름은 채연서였고 영상통화를 걸어온 것이었다.유시진은 서두르지 않고 수영복 바지를 먼저 갈아입은 뒤에야 휴대폰을 받아 들었다.유시진은 아무렇지 않게 온천에 몸을 담근 채, 채연서와 영상 통화를 시작했다.지나윤도 수영복으로 갈아입었지만 유시진이 들어간 그 온천은 아니었다.계속 방에 남아 있으면 유시진과 채연서의 통화 소리만 듣게 될 게 뻔했기에 차라리 혼자 조용히 있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어쩌면 새로운 디자인 아이디어가 떠오를지도 몰라 지나윤은 밖으로 나왔다.이미 깊은 밤이었고 대나무 숲을 지나자 그 안에 숨겨진 큰 온천탕이 물빛을 반짝이며 모습을 드러냈다.원래는 공용 온천이었지만, 지금은 동쪽 구역 전체를 유희봉이 통째로 사용하고 있어 이곳에는 다른 사람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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