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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31화

유시진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한참 침묵하던 백이천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지금 퇴원은 가능해요?][설마 아직도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상태는 아니겠죠?]이번에는 유시진이 침묵했다.[몸부터 제대로 회복하고 다시 전화하세요.]그렇게 전화는 백이천 쪽에서 먼저 끊어버렸다.유시진은 힘없이 팔을 떨어뜨렸다.모두가 쉬라고만 하고 아무도 지나윤이 지금 어떻게 됐는지는 말해주지 않았다.유시진은 다시 휴대폰을 들고는 직접 지나윤에게 전화를 걸었다.예상했던 대로 지나윤 휴대폰은 연결되지 않았다.그 후 유시진은 병원에 일주일 넘게 더 입원한 뒤에야 겨우 몸을 회복할 수 있었다.그동안 지나윤 소식은 단 하나도 알아낼 수 없었다.퇴원하는 날, 유시진은 다시 백이천에게 연락했다.“몸 회복되면 다시 연락하라고 했잖아요. 이제 다 나았어요.”전화기 너머 백이천은 유시진 목소리를 듣고도 상태가 여전히 좋지 않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그럼 기사 시켜서 회사 앞으로 와요.]“그래요.”유시진은 백이천이 보낸 주소를 그대로 장우영에게 전달했고, 남자는 그곳이 백이천 회사라는 걸 알고 있었다.“대표님...”“쓸데없는 말 하지 마.”유시진 말투는 단호했고 반박할 틈조차 주지 않았다.장우영은 한숨을 내쉰 뒤 결국 유시진을 백이천 회사 앞으로 데려다주었다.마침 백이천도 건물 안에서 나오다가 유시진과 마주쳤다.“돌아가.”유시진은 그렇게 장우영에게 명령했다.장우영은 뭔가 말하려다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회색 코닉세그를 몰고 자리를 떠났다.계산해 보면 백이천은 거의 두 달 만에 유시진을 다시 보는 셈이었다.두 달은 사람 얼굴조차 못 알아볼 만큼 긴 시간은 아니었으나, 눈앞 유시진의 모습은 백이천조차 순간 낯설게 느껴질 정도였다.유시진은 눈에 띄게 야위어 있었고 심하게 아팠었다는 게 한눈에 보였다.퇴원했다고는 해도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고 핏기 하나 없이 지쳐 보였다.몸 상태 자체는 어느 정도 회복된 것 같았지만 정신적으로는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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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32화

차는 거의 두 시간을 달린 끝에 천천히 속도를 줄이며 멈춰 섰다.백이천이 먼저 차에서 내렸고 유시진도 곧바로 뒤따라 내렸다.그리고 차에서 내린 순간 유시진은 눈앞 높게 솟은 입구 현판에 새겨진 글자를 똑똑히 보게 됐다.청주묘지.유시진 눈이 순식간에 커지더니 곧바로 백이천을 돌아봤다.“왜 날 여기 데려온 거죠?”입을 여는 순간, 목소리가 자신도 모르게 떨렸고,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하지만 백이천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조용히 발걸음을 옮겨 안으로 들어갔다.유시진은 바로 따라가지 못했는데 마음속 깊은 곳에서 어떤 목소리가 계속 속삭이고 있었다.가지 말라고. 따라가면 절대 감당 못 할 걸 보게 될 거라고.그런데도 유시진은 결국 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하늘은 이미 밤처럼 어두워져 있었고, 먹구름 사이에서는 희미한 천둥소리까지 들려오는 듯했다.최근 청주묘지는 차량 출입이 금지된 상태였다.그래서 백이천은 유시진과 함께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긴 돌계단은 마치 천국으로 이어지는 길 같았다.한참 뒤, 백이천이 한 묘비 앞에 걸음을 멈췄다.그리고 그 뒤에 있던 유시진도 그 앞까지 올라왔다.아직 새것처럼 보이는 묘비 위에는 지나윤 이름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그뿐만 아니라 지나윤 사진까지 붙어 있었다.그 순간, 갑자기 벼락을 맞은 듯한 유시진을 덮쳤다.‘나윤이 죽었어.’‘나윤이 죽었다고?’지금 눈앞에 벌여진 상황들 때문에 눈앞이 새까매졌고, 백이천이 급히 붙잡아주지 않았다면 그대로 쓰러졌을 정도였다.“이게... 대체 무슨 일이죠?”“나윤이 왜...”유시진은 백이천 손을 거칠게 뿌리쳤고, 충격으로 얼어붙은 얼굴에는 믿을 수 없다는 감정만 가득했다.사실 백이천이 자신을 묘지로 데려왔을 때부터 마음속 어딘가에서는 이미 불길한 예감이 있었다.하지만 눈을 뜨고 병에서 회복된 사이, 지나윤이 이미 죽어버렸다는 현실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말도 안 돼요. 이럴 리가 없잖아요. 설마...”유시진이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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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33화

지나윤 묘비 앞에 선 유시진은 가슴이 찢겨 나가는 듯한 고통에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아직 다 아물지 않은 상처가 다시 벌어지는 느낌이었다.“원하던 대로 데려와 줬어요.”백이천은 최대한 담담하게 말했지만 목소리는 끝내 떨리고 있었다.“난 이제 갈게요.”몸을 돌리려는 순간 유시진이 갑자기 백이천 멱살을 거칠게 움켜잡았다.“백이천 씨, 도대체 지나윤을 어떻게 지킨 거죠?”유시진 손등 위로 핏줄이 잔뜩 돋아났다.눈은 붉게 충혈돼 있었고 거의 폭발 직전이었다.마치 지나윤을 죽게 만든 사람이 백이천인 것처럼.“내가 의식 잃고 있는 동안 지나윤 곁에 남은 사람은 당신밖에 없었잖아요.”“근데 왜 퇴원하자마자 출장을 가게 둔 거예요? 왜 비행기 타는 걸 막지 않았는데요!”유시진 분노 섞인 추궁에도 백이천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 역시 지금 유시진 분노는 단순한 화풀이에 불과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당장 눈앞에 있는 사람이 자기뿐이니, 유시진 안에 쌓인 절망과 슬픔도 결국 자신에게 쏟아질 수밖에 없었다.머리 위 하늘은 검은 먹구름으로 뒤덮여 있었고 천둥이 크게 울렸다.그리고 백이천이 묘지를 떠나자 끝내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유시진이 다시 눈을 떴을 때, 체이호 별장 침대 위에 누워 있었고 침대 옆에는 낯선 남자 한 명이 서 있었다.“누구세요?”입을 열고서야 유시진은 자기 목소리가 거의 갈라져 있다는 걸 깨달았다.허스키한 목소리는 원래 자기 목소리처럼 들리지도 않았다.“안녕하세요, 대표님. 전 새로 배정된 비서 채원빈이에요.”“새 비서요?”유시진 얼굴에 혼란이 스쳤다.“장우영은?”“내가 해고했어.”유태산이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고 유시진은 그 얼굴만 봐도 알 수 있었다.유태산이 지금 자기 행동에 얼마나 화가 나 있고 또 얼마나 실망했는지.“장 비서 잘못 아니에요. 내가 혼자 가겠다고 한 거예요.”“시진아.”유태산 목소리가 날카롭게 내려앉았다.“넌 이제 막 퇴원한 몸으로 묘지 가서 비까지 맞고 쓰러졌어. 우리가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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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34화

청주묘지.오늘은 날씨가 꽤 좋은 데다가 높고 맑은 가을 하늘 아래 공기까지 선선했다.장우영은 차를 산 아래에 세워두었다.적어도 오늘만큼은 유시진이 지난번처럼 묘비 앞에서 비를 맞다가 쓰러지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래도 혹시 몰라 함께 올라가려 했지만 유시진은 그걸 막았다.물론 장우영 역시 어느 정도 예상했다.유시진은 혼자 계단을 따라 천천히 산을 올랐다.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긴 계단이었고, 발에는 천근짜리 쇳덩이라도 매달린 것처럼 걸음이 무거웠다.그리고 마침내 유시진은 목적지 앞에 도착했다.지나윤 묘비였지만 예전과는 달라져 있었다.묘비에 새겨진 글자가 몇 자 더 늘어나 있었다.[유시진의 아내]유시진은 천천히 몸을 숙이고는 손끝으로 그 글자를 아주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여보, 나 왔어.”목소리는 아주 낮고 부드러웠고, 그 안에는 허스키한 느낌까지 섞여 있었다.지나윤 묘비는 새롭게 변해 있었다.글자가 추가됐을 뿐 아니라 받침대 아래에는 서랍식 추모함까지 만들어져 있었다.유시진은 서랍을 열어 안에 있던 향을 꺼냈고 향 세 개에 불을 붙였다.이후. 양복 안주머니에서 빨간 벨벳 상자를 하나 꺼냈다.“이건 너한테 주려고 했던 거야.”상자를 열자 안에는 붉은 다이아몬드 반지가 들어 있었다.지나윤이 직접 디자인했던 비매품 반지였다.언젠가 지나윤이 다시 자신을 받아주게 되면 그때 건네주려고 했던 반지였다.“근데 너무 늦어버렸네.”씁쓸한 목소리가 끝에 가늘게 떨렸다.유시진은 반지 위 강렬하게 빛나는 붉은 다이아몬드를 바라봤다.희귀한 선명한 붉은빛이 햇살 아래 눈부시게 반짝였다.하지만 유시진 눈에는 그 붉은 다이아몬드가 마치 자기 심장에서 흘러내린 피처럼 보였다.유시진은 천천히 상자를 닫고는 그대로 묘비 아래 서랍 안에 넣어두었다.이후, 지나윤 묘비 앞에 무릎을 꿇었다.바닥은 차갑고 축축했지만 유시진은 아무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원래는 자신이 이곳을 아주 싫어하게 될 줄 알았다.자기 인생에서 유일하게 사랑했던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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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35화

소년원이라는 곳은 겉으로는 미성년자 범죄자를 수용하고 교화하는 장소였다.하지만 사실상 작은 사회와 다를 바 없었다.돈과 권력 있는 배경은 그 안에서도 절대적인 힘이 됐다.유시진 같은 경우가 그랬다.그래서 유시진은 그곳에서도 사탕을 구할 수 있었다.다만 그때는 몰랐다.자기가 몰래 넣어주던 사탕 하나가, 독방 안에 갇혀 있던 여자아이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고 있었는지.그러던 어느 날, 그 여자아이가 독방에서 나왔다.사람 형체조차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 처참하게 망가져 있었지만, 꺼지지 않는 불빛처럼 그 눈빛만큼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유시진은 처음으로 먼저 그 여자아이 이름을 물었다.그건 유시진이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흥미를 가진 순간이었다.“이쁜이라고? 그럼 정확한 이름은 뭐야?”“말하기 싫어. 그 이름 쓰기 싫거든.”“그럼 안 물어볼게.”“무슨 이름이든 넌 그냥 너잖아. 이쁜이... 진짜 예쁘네.”“난 유시진이야. 앞으로는 내가 널 지켜줄게.”그건 유시진이 살아오면서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한 약속이었다.그리고 유시진은 자기가 평생 그 약속을 어길 일은 없을 거라고 믿었다.“왜...”“왜 이렇게 돼버린 거지?”투명한 눈물이 조용히 흘러내리며 소리 없이 유시진 창백한 얼굴을 적셨다.‘결국 난 지나윤에게 뭘 해준 걸까?’채연서에게 복수하기 위해서이기도 했고. 동시에 할아버지 뜻을 따르기 위해서이기도 했다.그래서 지나윤과 결혼했다.그리고 지나윤은 그 때문에 학업까지 포기했고 유산이라는 아픔까지 겪었다.두 사람의 첫 아이이자 유일한 아이를 잃었다.그 이후에도 유시진은 채연서 때문에 수도 없이 지나윤을 상처 입혔다.유시진은 지나윤 묘비 앞에 무릎 꿇은 채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손가락 틈 사이로 피가 흘러내렸고 유시진은 문득 생각했다.이번 비행기 사고가 어쩌면 하늘이 자신에게 내린 가장 큰 벌일지도 모른다고.이제 유시진은 영원히 그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됐고 영원히 지나윤을 지켜줄 수도 없게 됐다.“미안해. 여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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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36화

유시진은 지나윤 묘비 앞에 꼬박 다섯 시간을 무릎 꿇고 있었고, 장우영 역시 산 아래 차 안에서 다섯 시간을 기다렸다.그리고 유시진이 돌아왔을 때, 장우영은 유시진 정장 바지가 엉망이 되어 있는 걸 발견했다.장우영은 입을 열려다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유시진 생활은 다시 정상으로 돌아간 듯 보였지만 어디까지나 겉으로만 그랬다.HF그룹이 다시 유시진 손에 돌아온 건 유태산에게 매우 만족스러운 일이었다.유태산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지나윤만 완전히 유시진 인생에서 사라지면 유시진은 다시 자신이 직접 키워낸 완벽한 후계자로 돌아올 거라고.“시진아, 이쪽은 GT케미컬 지순호 회장 딸이야.”“인사해라.”화려한 샴페인 잔이 오가는 파티장 안, 유태산은 유시진에게 한 사람을 소개했다.젊고 단정한 분위기의 여자였고, 누가 봐도 잘 자란 재벌가 아가씨 같은 인상에 외모도 매우 사랑스러웠다.나이 역시 유시진보다 몇 살은 어려 보였다.“안녕하세요, 유 대표님. 전 지유경이라고 해요.”상대가 먼저 손을 내밀자 유시진도 예의 있게 손을 맞잡았다.“안녕하세요. 근데 성이 제 아내랑 같으시네요.”그 말 한마디에 지유경 얼굴 위 달콤한 미소가 순간 굳어졌고, 옆에 있던 지순호 표정도 즉시 싸늘해지더니 유태산 쪽을 바라봤다.유태산 눈에도 분노가 선명하게 드러났지만 얼굴에는 억지 미소를 유지해야 했다.“시진아, 무슨 말을 그렇게 하니? 이런 자리에서 농담하면 안 되지.”유태산은 유시진을 타이르듯 말한 뒤 곧장 지순호를 향해 웃었다.“괜히 분위기를 민망하게 만들었네요. 시진이는 아직 미혼이에요. 원래 장난치는 걸 좋아하는 아이라서요.”“농담 아니에요.”유시진은 천천히 왼손을 들더니 손등이 지유경 쪽으로 향하게 했다.“약지에 반지 끼고 있는 거 안 보이시나요?”“유시진!”유태산은 결국 낮게 으르렁거렸다.유시진 왼손 약지에는 분명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심플하면서도 고급스러운 백금 반지, 누가 봐도 단순 액세서리로는 보이지 않았다.지유경은 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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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37화

하지만 유시진은 하루도 빠짐없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 퇴근만 하면 묘지로 향했고 몇 시간씩 그곳에 머물렀다.그렇게 벌써 반년째 이어져 왔으니 누가 봐도 정상적인 모습은 아니었다.유태산은 정신과 의사까지 불러 유시진 상태를 진단받게 했다.의사들 말로는 유시진이 분명 마음의 병을 앓고 있다고 했다.문제는 치료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점이었다.유태산은 그동안 열 명이 넘는 정신과 의사를 바꿔가며 붙여봤지만. 그 누구도 유시진을 바꾸지 못했다.정작 유시진 본인은 자기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그저 매일 자기 아내를 만나러 가고 싶을 뿐이었다.잠깐 이야기하고 곁에 있어 주는 것, 그게 전부였다.한겨울, 밤은 점점 더 빨리 찾아왔다.장우영은 차를 몰고 가다가 문득 밖에 눈이 내리는 걸 발견했는데 A시 올해 첫눈이었다.백미러 너머로 장우영은 뒷좌석 유시진을 조용히 바라봤다.유시진은 턱을 괸 채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고, 눈빛은 너무 고요해서 오히려 공허해 보였다.“대표님.”장우영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밖에 눈 와요.”그제야 유시진 눈꺼풀이 천천히 들렸고, 이제 막 눈이 오는 걸 알아차린 사람 같았다.“그러네...”“눈이 오네.”눈은 아주 많이 내리고 있었다.유시진은 계속 창밖을 보고 있으면서 눈 오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이에 장우영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삼켰다.오늘같이 눈이 많이 오는 날에도 묘지에 갈 거냐는 그런 말은 굳이 묻지 않았다.또한 쉬는 게 어떻겠냐는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조용히 운전했다.그렇게 장우영은 유시진을 청주묘지까지 데려다주었다.“대표님, 길 조심하세요.”“그래.”유시진은 우산도 쓰지 않은 채 차에서 내렸고 손에는 보온 도시락 하나를 들고 있었다.밤바람과 눈보라를 맞으며 유시진은 계단을 천천히 올라갔다.그리고 지나윤 묘비 가까이 다가갔을 때, 이미 그 앞에 두 사람이 서 있는 걸 발견했다.백이천과 고아라였다.두 사람 역시 유시진을 발견했지만 누구 하나 놀라지 않았다.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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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38화

당일 바로 돌아오기 위해 유시진은 새벽부터 전용기에 올랐다.W섬에 오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그날 저녁.W섬에서는 국제풍 휴양 리조트 완공 기념행사가 열릴 예정이었다.유시진은 이번 행사에 HF그룹 대표 자격으로 참석한 게 아니었다.W섬은 유씨 집안과 직접적인 사업 관계는 없었지만. H섬 기업들과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그리고 유시진에게는 또 다른 신분이 있었다.H섬에 등록된 세그닉스바이오 컴퍼니의 실질적 지배자, 존.이번 W섬 초대형 최고급 리조트 건설에는 세그닉스바이오 컴퍼니가 새롭게 개발한 환경 바이오 시스템이 도입됐다.그래서 유시진은 존이라는 이름으로 초청받은 상태였고, 장우영만 데리고 왔다.행사는 메이호 오페라 홀에서 열릴 예정이었다.시간을 계산해 본 유시진은 슬슬 움직여야 할 때라고 판단했고, 필요한 자리라면 그는 피하지 않았다.하지만 어떤 일도 지나윤 묘지에 가는 걸 포기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장 비서. 공항 쪽 준비해 둬.”“네, 대표님.”장우영은 곧바로 휴대폰을 꺼내 공항 직원들과 연락을 취했다.그사이 유시진은 샴페인 잔 하나를 들고 행사 주최 측 쪽으로 걸어갔다.“오, 존!”셀로다는 반갑게 유시진을 끌어안았다.“이번에 귀사의 도움을 받을 수 있어서 정말 영광이에요.”“아, 그리고 존. 오늘은 꼭 끝까지 보고 가셔야 할 게 있어요. 제가 오늘 아주 특별한 무대를 준비했거든요.”“셀로다 회장님, 저는...”“그거 알아요?”셀로다는 흥분한 얼굴로 말을 끊었다.“요즘 우리 W섬에 정말 엄청난 미인이 와 있어요. 마음씨도 얼마나 착한지, 여기 고아원 세 곳이나 후원해 주고 있어요.”“거기에 피아노까지 기가 막히게 쳐요. 정말 홀딱 반할 뻔했다니까요. 내가 아내랑 애들만 없었어도 진작 따라다녔을 거예요.”계속해서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하던 셀로다에 유시진은 할 말을 잃었다.“오늘 특별히 그분을 초청해서 피아노 연주를 부탁했어요.”“자, 자, 이쪽으로 오시죠.”셀로다는 유시진 손을 붙잡은 채 놓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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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39화

오페라홀 안 조명이 순식간에 어두워지더니 무대 위로 한 여자가 걸어 나왔다.스포트라이트가 여자 몸 위로 쏟아졌는데 마치 빛나는 요정 같았다.검은 웨이브 머리가 어깨 아래로 흘러내렸고, 머리 위에는 화려한 꽃 화관이 얹혀 있었다.여자는 W섬 전통 스타일의 흰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하늘하늘한 치맛자락은 몽환적으로 흔들려 마치 하늘에서 인간 세상으로 내려온 선녀 같았다.우아하면서도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유시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옆에 있던 셀로다는 깜짝 놀란 얼굴로 유시진을 바라봤다.유시진의 반응이 이 정도일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눈치였다.“제가 말씀드렸죠? 존? 켈리 씨 정말 매력적이라니까요.”하지만 셀로다 말은 유시진 귀에 단 한 글자도 들어오지 않았다.지금 유시진 귀에는 쿵쿵 뛰는 심장 소리만 들리고 있었다.북소리처럼 거세게 울렸고 유시진은 몇 번이고 눈을 비볐다.‘잘못 본 건 아닐까? 아니면 환각이라도 보고 있는 건 아닐까?’그런데 무대 위 여자는 분명 지나윤과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지금 검은 삼각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여자, 그 얼굴은 지나윤과 완전히 똑같았다.하지만 지나윤은 이미 죽었고, 그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유시진 마음속은 거대한 파도처럼 흔들렸다.그러면서도 감히 기대할 수가 없었다.기대가 클수록 절망도 커지니까.유시진은 더 이상 그런 충격을 견딜 자신이 없었기에 억지로 자신을 진정시키고 천천히 다시 자리에 앉고는 두 손을 끝까지 꽉 쥐었다.‘아마 그냥 닮은 사람일 뿐일 거야.’유시진은 속으로 계속 그렇게 되뇌었다.‘하지만 정말 세상에 이렇게까지 똑같이 생긴 사람이 있을 수 있나?’유시진은 세게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무대 위 여자 얼굴은 단순히 닮은 수준이 아니었고 거의 복사 붙여넣기 한 정도였다.의심, 긴장, 흥분, 수많은 감정이 유시진 안에서 뒤엉켜 끓어올랐다.그리고 마침내 무대 위 여자가 연주를 시작했다.희고 긴 손가락이 흑백 건반 위를 부드럽게 휩쓸고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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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40화

셀로다는 깜짝 놀랐다.유시진이 이렇게까지 직접적으로 나올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살아 있는 사람의 체온이 유시진 차가운 손바닥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마음속 깊이 엉켜 있던 의문도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유시진은 눈앞 가까이에 있는 여자를 바라보더니 순간 두 눈이 붉게 물들었다.“여보, 나랑 집에 가자.”떨리는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했고 메마르고 씁쓸했다.옆에 있던 셀로다는 눈을 크게 뜬 채 지금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조차 몰랐다.지나윤 역시 놀란 상태였다.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W섬까지 숨어 들어왔는데 여기서 유시진과 마주칠 줄은 상상도 못 했다.방금 셀로다가 소개했을 때, 유시진은 H섬 최고 부자이자 세그닉스바이오 컴퍼니 대표인 존이라고 했다.그 말을 듣는 순간 지나윤은 예전 일이 떠올랐다.자신이 경매에 내놓았던 운정힐즈를 거액에 사들였던 사람이 바로 존이었다.그리고 HF그룹이 최대 위기를 맞았을 때, 백이천이 소개해 줬던 백기사 역시 존의 세그닉스바이오 컴퍼니였다.결국 뒤에서 계속 자신을 도와주고 있었던 사람은 줄곧 유시진이었다.지나윤은 무의식적으로 자기 가슴께를 손으로 눌렀고 심장은 쿵쿵 뛰고 있었다.하지만 그 감정은 유시진과 재회해서 받은 충격과는 달랐다.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그랬다.감정이 무너질 듯 흔들리는 유시진과 달리 지나윤은 지나치게 차분했다.“여보...”유시진이 한 걸음 더 가까워지려 하자 지나윤은 반사적으로 뒤로 한 걸음 물러나서는 차분하면서도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유시진. 함부로 그렇게 부르지 마. 우리 이미 이혼했잖아. 지금 나는 싱글이야.”지나윤은 말을 마치고 그대로 몸을 돌렸으나 유시진은 곧바로 뒤를 따라갔다.그 아름다운 뒷모습을 유시진은 이미 수도 없이 놓쳐왔다.그렇기에 이번만큼은 절대 다시 놓칠 수 없었다.“여보...”“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지.”“지나윤!”유시진은 결국 지나윤 본래 이름을 불렀다.화려하면서도 텅 빈 홀 안, 유시진은 지나윤 뒤에 멈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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