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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1화

‘형님께서는 나보다 더 통찰력이 있으시다.’“이번에 우리 승호를 구해 주었으니, 이만한 호의를 금은보화 같은 것으로 채울 수는 없지요.”육명천이 말했다.육명장은 바닥의 녹색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일렁이는 빛 속에서 흔들리는 것을 쳐다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난간으로 걸어갔다. 누각 앞에 무성하게 자란 나무들을 바라보며, 나무들 사이로 요란한 매미 소리를 들었다. 육명천도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옆으로 다가가 아래를 내려다보며 가볍게 웃었다.“그날 승호를 데리고 나가 매미를 잡는데, 그 모습이 참 우스웠습니다.”평소에는 침착하던 하진이 장난기 어린 모습으로, 얼굴은 더위에 익어 발갛게 상기되었고,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 올려 대나무 장대를 들고 나무 사이를 찌르는 모습이 눈앞에 떠올랐다. 언뜻 보면 스승에게 혼날까 봐 눈치를 보는 어리숙한 꼬마 같았다. 육명천뿐 아니라, 육명장도 그때 웃음을 터뜨렸다. 바람이 불었고, 매미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려 퍼졌다. 이른 아침, 잔뜩 흐린 날씨에 이따금 불어오는 바람 속에는 습기가 섞여 있었다. 하진은 희미한 방 안의 빛에 의지하여 창가에 기대앉아 손에 든 책을 읽었다. 이 책은 지난번에 청산사에서 돌아가신 어머니를 위해 받아온 경전이었다. 이번 기일에는 산소에 가서 종이를 태우며 제를 올리지 못할 것 같았다. 그때, 규안이 다가왔다. “아가씨, 밖에 하인이 전갈을 들고 왔습니다. 육명천 나리께서 밖에서 기다리고 계신답니다.”하진은 경문을 내려놓고 방에서 나와, 옷매무새를 간단히 다듬은 후 난월거를 나섰다. 하인이 앞장서서 그녀를 안내해, 호수 정자에 이르렀다. 안에 앉아 있던 그녀를 발견한 육명천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할 말이 있어 부른 것이니 앉거라.”그녀는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한 뒤 맞은편에 앉았고, 육명천이 입을 열었다.“지난번에 내가 했던 말을 기억하느냐?”‘지난번? 언제를 말하는 거지?’ “승호를 데리고 매미를 잡던 때 말이다.”육명천이 말했다. “기억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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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2화

하진은 눈을 크게 뜨고, 두 손을 무의식적으로 꽉 쥐었다. 그녀는 몸을 살짝 앞으로 숙였다.“네, 네, 청성이라면 압니다. 마차를 타면 평곡까지는 하루가 걸리지 않을 겁니다.”육명천은 하진의 흥분한 모습을 바라보았다. ‘내 마지막 말을 듣지 못한 듯하구나.’경성 밖으로 같이 나가는 이는, 눈앞의 붙임성 있는 육명천이 아니라, 근엄하고 잘 웃지도 않는 육명장이었다. 그녀는 한 번도 그의 앞에서 이득을 본 적이 없었다. 육명천은 하진의 염려를 눈치챈 듯 말했다. “아니면, 네가 먼저 형님을 찾아 청해 보거라. 만약 형님께서 거절한다면, 그때 내가 형님을 찾아뵙고 간청해 보마, 어떠냐?”하진이 거절할 리 없었다. 그녀가 경성에 온 이후로, 육 노부인을 제외하고는 눈앞의 육명천만이 그녀에게 관심을 두었다. 하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숙였다. “감사합니다.”육명천도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흔들었다. “예를 차리지 않아도 된다. 지금 형님께서 댁에 안 계신다. 오시가 지난 후에 찾아가 보거라.”두 사람은 몇 마디 더 나눈 후 헤어졌다.아침부터 흐렸던 하늘은, 하진이 점심 식사를 마칠 때까지 잠잠했다. 머리 위의 구름이 흩어지면서, 회청색을 띠었다. 날씨가 점점 더워졌고, 오후 시간에는 보통 낮잠을 잤지만, 오늘은 그러지 않았다. 그녀는 곧장 서재로 갔다. 문 앞을 지키고 있던 두 명의 하인이 그녀를 발견하고 허리 숙여 인사했다. “나리께서 안에 계시느냐?”하인이 웃으며 답했다.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언제쯤 댁으로 돌아오느냐?”“모르겠습니다. 낮에는 댁에 잘 계시지 않습니다.”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육명장은 낮에 집에 있는 일이 적을 뿐만 아니라, 종종 늦게 돌아온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 전에 육 노부인을 만나러 위해 아주 늦게 왔었다. 하지만 지금 그를 밤늦게까지 기다릴 수는 없었다. 그녀는 좁은 길을 따라 천천히 돌아갔고, 뒤따르던 규안은 소매를 흔들며 부채질을 했다. “아가씨, 날이 너무 답답합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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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3화

규안이 끼어들었다. “어찌 그리 생각이 짧으십니까? 우리 아가씨 말씀만 전해 주시면, 일자리를 잃더라도 우리가 주는 보수로 평생을 먹고살 수 있을 겁니다. 아가씨께서는 절대 손해 보게 하지 않을 겁니다.”규안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하진은 돈을 쓰는 것이 후하고, 그녀의 손에는 평생을 써도 다 쓰지 못할 정도로 돈이 넘쳐흘렀다. 점원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탁자에서 나무 쟁반을 가져와 찻주전자 하나를 올려놓고, 빠르게 위로 올라갔다. 점원이 쟁반을 들고 막 이 층 입구에 다다랐을 때, 훤칠한 키를 가진 사내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무슨 일이냐?” 높지도, 낮지도 않은 목소리였다.점원은 어깨너머로 시선을 돌리며 발끝으로 서서 안을 들여다보았다.“나리, 아래에 찾는 분이 계십니다.”점원은 말을 끝내자마자, 온몸에 한기를 느꼈고, 털이 곤두섰다. 미처 생각할 겨를도 없이, 주점의 주인장이 뛰어 올라와 점원의 머리를 후려쳤다. “실례를 범했습니다, 이 녀석은 세상 물정 모르는 얼간이입니다. 제가 당장 쫓아내겠습니다.”주인장은 말하며 점원의 옷깃을 잡고 목소리를 낮춰 꾸짖었다. “이 자식, 눈은 장식이냐? 안에 계신 나리의 기분을 상하게 하면, 우리 둘의 목숨으로는 감당 못 한다. 당장 내려가서 가게나 지키거라!”하진에게 은자를 받았던 점원은 말을 전하지 못하면 은자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목을 비틀어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로 외쳤다. “성이 대씨인 아가씨로, 나리에게 할 말이 있어 찾아왔다고 합니다.”주인장은 점원의 머리를 다시 한번 후려쳤다. “이 녀석이!”장안은 난간으로 걸어가 계단 밑에 서 있는 하진을 바라보았다. 하진은 고개를 들어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 그녀가 몸을 숙여 인사하자, 장안은 고개를 끄덕인 후 몸을 돌려 안으로 걸어갔다. 잠시 후, 방에서 나온 장안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아가씨, 가십시오.”하진은 한 손으로 난간을 잡고, 다른 손으로 치마를 잡은 채 계단을 올랐다. 이층의 중앙은 비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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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4화

“나리, 어찌 이리 무정하십니까? 노부인께서는 저에게 삼촌이라 부르라고 하셨지요. 어찌 이 어린 조카에게 마음을 쓰지 않는 겁니까?”육명장의 눈썹이 움찔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녀도 궁지에 몰렸다. 평곡으로 돌아가야 할 중요한 일이 두 가지가 있었고, 기회가 없다면 모를까, 눈앞에 기회가 있는데 놓칠 순 없었다. 바로 그때, 창문이 단단히 닫히지 않았는지, 깨지는 소리와 함께 아래층의 천막이 떨렸다. 먹구름이 파도처럼 밀려왔고, 천둥소리가 갈라지듯 울렸다. 하늘은 다시 어두워졌고, 이어서 빗줄기가 후드득 쏟아져 내리며 땅에 부딪혀 흰 연기를 만들었다.바람이 불면서 빗물이 탁자 안까지 들이쳤고, 발밑의 치맛자락이 젖었다. 그녀는 비명을 살짝 지르며 몸을 안쪽으로 돌렸다. 더러워진 치맛자락을 보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일정은 초닷새로 정해졌다.”육명장의 이 말 한마디에 하진은 치맛자락에 묻은 진흙 얼룩이 눈에 거슬리지 않았다. ‘과연, 천 냥 빚도 말로 갚는다니. 어떻게 부탁해도 들어주지 않던 사람이 삼촌이라는 말 한마디에 들어주는구나. 앞으로 자주 불러야겠다.’’그녀는 육명장과 가까워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 “삼촌,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육명장의 손가락 끝이 움찔 떨렸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가지 않고 뭐 하는 것이냐?”하진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뒤를 따랐다.일 층에 있던 주인장은 겁에 질려 점원을 꾸짖었다. “개자식, 너는 돈이 목숨보다 더 중요하냐!”이 층에서 인기척이 들리자, 주인장은 고개를 들었다. 육명장의 뒤로 하진이 내려오는 것을 확인한 주인장은 정신을 차리고 허리를 숙여 배웅하며, 마차를 준비하고 우산을 준비하며 극진히 시중을 들었다. 육명장은 발판을 밟고 마차에 올랐고, 하진은 뒤에서 머뭇거렸다. 장안이 우산을 들고 다가왔다. “아가씨, 마차에 오르십시오.”하진은 그제야 치맛자락을 들고 발끝으로 서서 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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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5화

두 사람은 마차 안에 앉아 있었고, 마차 지붕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아마도 안청(晏清:맑은 안, 깨끗할 청)을 가리키는 것이겠지. 하지만 나리께는 청렴결백하게 죽음을 맞이한다는 뜻이겠지.’하지만 육명장의 명성은 청렴과 거리가 멀었다. 조정과 민간에서는 그에 관한 여러 말들이 오갔다. 그는 꼿꼿하고 밤낮없이 공무에 힘쓰는 신하이자, 독단적인 사람이었다. 충신인지 간신인지는 후세 사람들의 평가에 맡겨야 할 일이었다. 하진은 감히 그의 별호를 부를 수 없었다. ‘나리, 너그러이 용서해 주십시오. 지난번 일은 제가 무례했습니다.”하진은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 “나리, 제게 화가 나신 것은 아니겠지요? 나리께서는 아량이 넓으신 분이니, 저 같은 계집아이과 다투지 않겠지요.”육명장은 하진을 힐끗 쳐다보더니, 다시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런 말을 들을 자격이 없다. 나는 재상이 아니고, 심성도 아주 좁아 상대할 가치가 못 된다.”그날, 하진이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한 말을 육명장이 직접 말했다. 말문이 막힌 하진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차라리 아까처럼 조용히 있는 것이 지금보다 나을 것 같았다.마차 안은 전보다 더 고요해졌다. 육명장이 적막함을 먼저 깼다. “다투지 않았다.”하진이 고개를 드는 순간, 육명장도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진은 황급히 창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창문 틈 사이로 불어온 바람은 그의 소맷자락을 휘날렸고, 소매 끝을 살짝 적셨다. 그녀의 시선은 바람을 따라 그의 몸으로 향했고, 그제야 그의 옷이 크게 젖었음을 발견했다. 축축하고 구겨진 소매 아래로, 두 손은 다리 위에 살짝 오므려져 있었고, 손등에는 희미한 푸른색 핏줄이 고요히 드러나 있었다.마차가 멈췄고, 두 사람은 차례로 마차에서 내려, 각자의 처소로 돌아갔다.하진은 이날 편히 잠들 수 없었다. 며칠 후면 평곡으로 떠날 수 있었다. 본가로 서신을 보낸 지도 꽤 되었고, 대만창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매일 부친의 답장을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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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6화

“댁으로 손님이 오셨답니다.”“그렇구나.”하진의 답에 육승호는 계속 물어 달라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누가 왔느냐?”승호는 입을 가리고 눈이 휘게 웃더니, 아주 흥미로운 답을 했다. “큰 누님의 정혼자요.”하진은 멍했다. ‘사준영? 오라버니가 육부에 왔다고? 그러고 보니, 육완아와 정혼하기로 했으나 아직 날짜를 잡지 않았다.’올해 열다섯인 육완아를 육 노부인께서는 당장 떠나보내고 싶지 않아 했다. ‘나리께서 미래의 사위를 위해 무언가를 도모하려는 눈치구나.’“왜 말씀이 없으세요?”승호가 하진 앞에서 손을 흔들었고, 하진은 정신을 차리고 미소를 지었다. “몰래 따라가서 슬쩍 엿보았는데, 정말 잘생기셨어요. 우리 아버지보다도요.”“네 아버지보다 더 잘생겼다고?”사준영의 용모는 확실히 눈에 띄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육완아가 자기 가문보다 낮은 집안으로 시집가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하진에게는 사준영은 모호한 존재였다. 그녀는 사람의 겉모습만 보지 않았다. 세월을 따라 생긴 주름, 영원히 펴지지 않을 굴곡을 보았다. 육승호는 잠시 고민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아버지께서는 그분보다 키가 크시고, 큰아버지께서도 그분보다 크십니다. 그러니 아버지와 큰아버지가 더 훌륭합니다.”하진은 아이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 ‘결국 팔은 안으로 굽는 셈이구나.’한편, 삼 층 누각에 주렴이 반쯤 걷혀 있었고, 방 안의 빛이 흔들렸다. 누각 밖의 나무들은 무성했고, 그늘이 깨끗한 바닥 위로 넓게 드리워져 스며들었다.넓고 정돈된 홀에는 긴 탁자가 놓여 있었고, 탁자 위 향로에서는 가느다란 연기가 피어올랐다. 탁자 옆에는 천청색 직령포를 입은 사람이 둥근 방석 위에 허리를 세우고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하인이 와서 차를 새로 따랐다.“도련님, 주인어른께 사람을 보내 알렸습니다.”사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다.”한쪽으로 물러난 하인은 말없이 사준영을 관찰했다. 사준영의 옷차람은 귀해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이 집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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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7화

“오늘 여기로 부른 것은 따로 할 말이 있기 때문이오. 육 재상께서 집현원(集賢院:학문 연구를 위해 궁중에 설치한 기관)의 편수(編修:일정한 방침 아래 여러 가지 재료를 모아 신문, 잡지, 책 따위를 만드는 일)직을 그대를 위해 마련해 두었다네.”사준영은 겉으로는 티 내지 않았지만,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편수직은 겉으로 보기에는 고루하고 권력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그저 문서를 정리하는 일이었으나, 실상은 문신들이 극도로 선망하는 자리였다. 이 관각(館閣:홍문관·예문관·규장각을 통틀어 이르던 말) 경력은 아주 중요한 것으로, 미래에 승진할 수 있는 중요한 자격이었다.또한, 그의 강점을 살릴 수 있는 자리였다.하지만 아무리 침착하려고 해도, 솟구치는 감정을 억누르기 어려웠다. 사준영은 주먹을 꽉 쥐었고, 손바닥에 땀이 흥건했다. 자신의 힘으로는 평생 얻지 못할 기회를, 미래의 장인어른께는 말 한마디에 불과한 일이었다. 육명천은 은근히 사준영을 쳐다보더니 말을 이었다. “직책을 맡게 되면, 성실하게 임하게나. 이후에 형님께서 그대를 위해 따로 계획을 세워 두셨으니.”사준영은 서둘러 일어나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재상께 감사하다고 전해주십시오. 나리, 감사합니다.”육명천은 사준영에게 식사를 하고 가라고 권했지만, 사준영은 한사코 사양한 후 떠났다. 육명천은 곧장 육명장이 있는 일방거로 향했다. 문 앞에 있던 장안이 육명천을 맞이했다. “형님께서 안에 계시느냐?”“네, 계십니다. 안에 알리겠습니다.”육명천은 손을 휘저으며 곧장 계단을 올라 문지방을 두 번 두드렸다. 안에서 응답이 있기도 전에 먼저 문을 열고 들어갔다.“형님.” 하지만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칸막이 휘장 너머에서 숨소리가 들려왔다. “내게 일을 나가보라고 하시더니, 형님께서는 아직 일어나지도 않으셨나 봅니다.”육명천은 몸을 돌려 문 쪽으로 가서 마당 안의 몸종들에게 손짓했다. “들어가서 형님을 모셔라.”몸종이 고개를 숙이며 들어갔다. 옷깃이 스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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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화

일방거를 나선 육명천은 한 무리의 사람들이 다가오는 것을 발견했다. 바로 그의 조카 육완아가 사람들을 데리고 이쪽으로 급히 다가왔다. 급했던 육완아는 육명천을 미처 보지 못하고 종종걸음으로 달려왔다. 바로 앞에 다가와서야, 육명천을 발견하고 황급히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작은 삼촌.”육명천은 고개를 끄덕였다.“어딜 그리 급히 가느냐?”육완아는 살짝 붉어진 얼굴로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방금 댁에 손님이 오셨습니까?”육명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사…” 육완아가 말을 채 꺼내기도 전에, 육명천이 말을 잘랐다. “왜 그런 것을 묻느냐? 분수를 잘 지키도록 해라.”그는 육명장의 말투를 그대로 흉내 냈다.육완아는 살짝 놀라 굳어버렸다. 평소 성격이 원만하던 육명천은 한 번도 육완아를 꾸짖은 적이 없었다. 늘 웃는 얼굴로 그녀를 대했다. 그랬던 사람이 정색을 하니, 기분이 좋지 않은 것 같아 더는 말을 붙이지 못했다.“네 아버지께서 다 생각이 있으시니, 너무 캐묻지 마라.”육명천은 이 말을 남기고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급하게 달려왔다가 육명천에게 꾸지람을 들은 육완아는 화가 났지만, 감히 화풀이할 수 없어 도리어 사미정을 나무라 했다. “이게 다 무슨 고생이랍니까! 다 사씨 가문 때문입니다!”사미정은 육완아의 원망을 듣지 못한 듯, 육명천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원망을 쏟아낸 육완아는 사미정이 아무 반응도 안 보이자,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사미정이 멍하니 서서 알 수 없는 곳을 바라보는 것을 보고, 육완아의 시선도 그쪽으로 향했다. 육완아는 이내 알았다는 듯 사미정을 비웃으며 쏘아보았다. “조용히 있는 줄 알았더니, 속으로 다른 꿍꿍이를 품고 있었나 봅니다!”사미정은 급히 정신을 차리고 얼굴을 붉혔다. “무슨 꿍꿍이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육완아가 무어라 말을 하려다가, 사미정의 뒤를 보고 깜짝 놀라 외쳤다. “삼촌.”사미정은 급히 몸을 돌려 고개를 숙였고, 얼굴의 홍조가 귓불까지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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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9화

떠나기 전날 밤, 공씨와 규안은 짐을 정리했다.“아가씨, 저도 같이 가게 해주십시오. 태어나서 한 번도 아가씨께 눈을 뗀 적이 없는데, 어찌 혼자 보내겠습니까?”유모가 화장품 상자를 포장하며 말했다. 하진은 공씨 앞으로 걸어가 포장된 것을 풀고, 화장품 상자를 꺼내 다시 서랍 속에 넣었다. “유모가 따라가면 누가 이 댁을 살피겠나? 방 안에는 귀한 물건들이 많아, 다른 사람에게 맡기기가 불안해. 내가 믿을 수 있는 것은 유모뿐이야.”공씨는 그녀의 말에 기쁘면서도 걱정스러웠다. 규안이 다가와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제가 아가씨를 잘 모시겠습니다.”공씨는 규안의 얼굴을 힐끗 쳐다보더니 말했다. “그러니 마음이 더 놓이지 않는다.”하진은 웃음을 터뜨리며 마당으로 나가 고개를 들었다. 하늘에는 별이 가득했고, 맑고 반짝이는 것을 보니, 좋은 날씨임을 알려 주었다다음 날, 날이 채 밝기도 전에 하진은 눈을 떴고, 신을 신고 방문을 열었다. 동이 트려다 만 하늘에는 몇 개의 별이 걸려 있었고, 마당에는 아주 작은 인기척이 있었다. 부엌 쪽에서는 흰 연기가 피어올랐다.해가 빨리 떴고, 희미한 푸른색 그림자들이 선명해지며 본래의 색을 드러냈다.여인은 긴 생머리를 늘어뜨린 채 창가에 무릎 꿇고 앉아 있었다. 길고 검은 머리카락은 종아리 옆에 헝클어져 있었고, 두 팔꿈치는 창틀에 기댄 채 얇은 비단 소매가 새벽바람에 살짝 휘날렸다.규안은 겉옷을 걸치고 나오자마자, 하진을 발견했다. “아침에는 한기가 돕니다. 아가씨, 이리 바람을 쐬시면 안 됩니다.”규안은 말하면서 창문을 닫았다.멀리 떠나는 길이라, 하진은 간소하게 옷을 입었다.연한 노란색 깃을 접은 좁은 소매의 긴 저고리 차림이었는데, 얇은 비단으로 만들어졌고, 깃에는 구름무늬가 정교하게 수놓아져 있었다. 안에는 달빛처럼 흰색의 가슴 가리개를 받쳐 입었고, 허리에는 연한 노란색의 얇은 명주 치마를 둘렀다. 치맛자락은 자연스럽게 늘어졌고, 별다른 무늬는 없었다.까마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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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0화

그 기침 소리는 벽 너머의 사람이 고통에 겨워 내는 소리였다. 목소리가 평소와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하진은 벽 너머의 사람이 육명장임을 단번에 알아차렸다.‘어디가 아픈 것인가?’눈을 감자마자 기침 소리가 다시 시작되었다. 끊어질 듯 이어지고, 가벼웠다가 무거워졌다.잠시 후, 옆방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서 방문이 열리고, 낮게 깔린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느낌상 약을 가져온 것 같았다.벽 너머는 다시 조용해졌다. 하진은 다시 눈을 감고 잠이 들었지만, 잠결에도 가늘고 희미한 기침 소리가 계속 들렸다. 몽롱한 가운데 잠을 자는 것인지, 깨어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마침내 완전히 조용해졌다. 하지만 그 고요함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복도에 오가는 발소리가 들렸고, 아래층의 움직임도 위로 전해져 왔다.그녀가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날이 밝아진 뒤였다.그녀는 아침 식사를 마친 후 방을 나섰다. 옆방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역참 앞에는 사람과 말이 오가고 있었다. 하진은 육명장의 마차를 쳐다보았다. 문이 단단히 닫혀 있었다.어젯밤 불안하게 기침을 하던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녀는 앞으로 나아가 자신의 마차에 올라탔다. 채비를 마치고, 다시 길을 떠났다.잠시 멈췄다가 길에 오르는 여정은 사흘간 이어졌고, 이 일행은 어느 성을 지나게 되었다. 현지 관료들이 성문에서 그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하진은 마차 휘장 한쪽을 걷고 밖을 내다보았다. 넓은 마차는 여전히 움직임이 없었고, 지방 관료들과 인사를 나누는 이는 육명장을 곁에서 모시는 수행원이었다. 이후 갓을 쓰고 관복을 입은 크고 관리들은 육명장의 마차 옆으로 걸어와 허리 숙여 인사하고, 길가에 서서 먼저 지나가게 했다.행렬은 마침내 한 저택 앞에서 멈췄고, 일행은 그 저택으로 들어가 묵게 되었다.이곳은 현지 부자의 사택으로, 추밀사가 잠시 머문다는 소식에 자기 사택을 내놓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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