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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1화

“그래도 하이석 씨는 원래 이성적이고 절제할 줄 아는 사람이잖아요. 그날 밤 연위성 씨가 아무리 도발적인 말을 했다고 해도, 일이 이렇게까지 커질 정도는 아니었을 텐데요...”서은주가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리자 육강민은 담담하게 말했다.“원래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야. 평생 하씨 가문의 보호를 받으면서 큰 시련도 없이 살아왔잖아. 그래서 충격을 견디는 힘이 약한 거지. 이번 기회에 한번 제대로 부딪혀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서은주는 어이가 없었다.이게 친구라는 사람이 할 말이 맞나?“정말 새로운 협력사를 찾고 있는 거예요? 하이석 씨는 버릴 생각이에요?”그녀는 회사의 일에 지금껏 한 번도 간섭한 적 없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육강민은 짧게 대답했다.“난 사업가야. 이익을 따라 움직일 뿐이지.”서은주는 머리가 지끈거렸다.도대체 이 사람들은 왜 이러는 걸까.설마 정말 이런 상황에서 하이석의 등을 떠밀 생각인 걸까.방주헌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세상에 자신이 풀지 못할 갈등은 없다며 큰소리를 쳤다.그런데 지금은 하루가 멀다 하고 SNS에 의미심장한 글만 올리고 있었다.'괴상한 건 상관없는데, 정도는 좀 지켜.''자기 잘난 줄만 아는 사람들 있지. 사실 별것도 아닌데.'누가 봐도 하이석을 겨냥한 글이었다.가장 심했던 건 이것이었다.'너는 네 얼굴만큼이나 늙었어.’나이와 외모까지 들먹이는 건 너무한 거 아닌가.덕분에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들의 갈등을 구경거리 삼아 떠들어댔다.육강민은 잔뜩 근심에 잠긴 서은주를 끌어당겨 허리를 감싸 안더니 그대로 무릎 위에 앉힌 뒤 한참 입을 맞췄다.볼과 귀까지 새빨개질 무렵이 되어서야 그는 낮게 웃으며 말했다.“하이석 일은 신경 쓰지 마. 넌 수업이랑 공부나 열심히 해. 이제 민찬이 공부 봐줄 시간이잖아.”원래 아이들 공부는 늘 육남혁이 맡았다. 하지만 최근에는 연위성과 하이석 문제로 정신이 없어서 그럴 여유가 없었다.연우진은 집에 오면 스스로 책상에 앉아 숙제를 끝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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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2화

온유란은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차에서 내리는 사람을 바라봤다. 하지만 상대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눈빛에서 서서히 빛이 사라졌다.기다리던 사람은 아니었다.그녀의 입가에 실망이 선명하게 스쳤다.“당신이었어요?”연위성은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 시선을 맨발로 뛰어나온 발끝에 머물렀다.“신발도 안 신고 나온 거야?”“당신이랑은 상관없는 일이에요.”차갑게 말을 잘라낸 온유란은 그대로 집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러나 연위성이 뒤에서 그녀를 붙잡았다.“잠깐만. 얘기 좀 하자.”“그럴 필요 없어요. 돌아가세요. 다시는 오지 말고요.”온유란은 끝내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집 안으로 사라졌다.*운전석에 앉아 있던 육지성은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갔다.한밤중에 갑자기 바람이나 쐬러 가자더니, 만나고 싶은 옛사람이 있다며 그를 시켜 서울을 벗어나 시골까지 달려오게 했을 때부터 예감이 좋지 않았다.아니나 다를까. 연위성이 찾아온 사람은 온유란이었다.'이미 결혼한 사람인데 왜 이러는 거야?'속으로 몇 번이나 혀를 찼다.'깔끔하게 놓아주고 행복을 빌어주면 어디 덧나나? 셋이 이렇게 얽혀봤자 좋을 게 없지 않나? 결국 모두를 불행하게 만들 뿐이잖아.'정말 답이 없었다.연위성은 외모도 빠질 것 없었고, 함께 지내 보면 성격도 괜찮은 편이었다.그런 사람이 왜 굳이 남의 결혼생활에 끼어들려 하는 걸까.그때, 손리정이 예전에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멀쩡하게 생긴 사람이 왜 남의 가정에 끼어드는 거예요?'문득 육지성은 엉뚱한 생각까지 들었다.연위성이 그동안 겪었던 일들을 떠올리면…혹시 그 일 때문에 마음이 완전히 비뚤어진 건 아닐까.*문전박대를 당한 연위성은 말없이 차로 돌아왔다.육지성은 이제야 집으로 돌아가겠거니 싶었다.그런데 연위성은 시트를 뒤로 끝까지 젖히더니 그대로 눈을 감았다.육지성의 눈이 휘둥그레졌다.'설마… 여기서 잘 생각이야?'*집 안으로 들어온 온유란은 한참을 기다렸지만 차가 출발하는 소리는 끝내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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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3화

온유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연위성은 책장을 넘기며 아무렇지 않은 듯 말을 이었다.“매일 술만 마시면서 지낸다던데? 완전히 폐인처럼 살고 있대. 지금은 경성에 있는데 평판도 바닥이고, 가족들과도 크게 틀어졌다는 소문도 있어.”그는 잠시 시선을 내리깔았다가 담담하게 덧붙였다.“네가 돌아갈 즈음이면 회사에서도 쫓겨나고, 곁에 남는 사람 하나 없는 신세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지.”차 안에서 그 말을 듣고 있던 육지성은 미간을 찌푸렸다.‘역시 남의 가정을 깨려는 놈답게 대놓고 이간질을 하는군.’하지만 온유란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저 희미하게 웃으며 연위성을 바라봤다.“연위성, 당신 변했어요.”“뭐가?”“남 뒤에서 험담이나 하는 걸 보니 꼭 수다 좋아하는 아줌마 같아요.”옆에서 물을 마시던 육지성은 하마터면 그대로 사레가 들릴 뻔했다.그는 온유란과 접점이 많지 않았다. 늘 성격 좋고 화 한 번 낼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렇게 받아칠 줄도 아는 사람이었나.하지만 역시 뻔뻔한 사람은 달랐다.연위성은 그 정도 빈정거림에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조용히 책을 덮고 물을 마신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온유란은 드디어 성가신 손님을 돌려보냈다고 생각했지만, 문을 나서던 그는 태연하게 한마디를 남겼다.“내일 또 보자.”온유란은 어이가 없어 그를 바라봤다.“또 온다고요?”“오늘 간다고 했지, 다시는 안 온다고는 안 했잖아.”머리가 지끈거릴 정도였다.연위성이 차에 올라타자, 그는 곧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육지성과 눈이 마주쳤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연위성은 피식 웃으며 물었다.“저 한 대 치고 싶죠?”“솔직히 말하면 그렇죠. 근데 잡혀가기 싫어서 참고 있을 뿐입니다.”지금 벌어진 모든 일은 하이석이 연위성을 주먹으로 한 대 친 것에서 시작됐다.육지성도 속으로는 한 대 시원하게 갈기고 싶었지만, 결국은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이렇게 뻔뻔한 상간남이 그런 말을 입에 담다니.하이석이 왜 손부터 나갔는지 이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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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4화

하정현은 입은 거칠어도 속은 누구보다 여린 사람이었다.겉으로는 아들을 몰아세웠지만, 뒤로는 온유란에게 몇 번이나 전화를 걸어 하이석을 너무 미워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고, 육강민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에게도 조심스레 도움을 청했다.그날도 육강민은 육민찬과 연우진의 숙제를 봐주고 있던 중이었다.전화기 너머에서 하정현은 진심을 다해 설득했지만, 육강민의 대답은 시종 담담했다.“네, 알겠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죠.”그 정도가 전부였다.전화를 끊자 연우진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작은아버지.”“응? 모르는 문제 있어?”연우진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그럼… 저 이제 하이석 삼촌이랑 유란 이모 보러 못 가는 거예요?”며칠 전 하이석과 연위성이 몸싸움을 벌였을 때 아이들도 그 자리에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두 직접 본 터였다.육강민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소 지었다.“어른들도 가끔은 다툴 때가 있어. 서로 잘 풀고 나면, 그때는 또 예전처럼 놀러 갈 수 있을 거야.”그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휴대전화가 다시 울렸다.처음 보는 번호였다.육강민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육 대표님이신가요?”“실례지만 누구십니까?”“하이석의 숙부 하백규라고 합니다.”육강민은 아이들이 있는 방을 나와 문을 닫고 통화를 이어 갔다.“아, 그렇군요. 무슨 일이십니까?”“시간 괜찮으실 때 한번 뵙고 싶습니다. 날짜와 장소는 편하신 대로 정하셔도 됩니다.”육강민은 바로 승낙하지 않았다.“전화로는 말씀하시기 어려운 일인가요?”“네. 직접 뵙고 말씀드리는 편이 좋겠습니다.”육강민은 잠시 생각한 뒤 대답했다.“일정을 한번 확인해 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하백규는 연신 고맙다는 말을 남긴 뒤 통화를 마쳤다.육강민은 휴대전화를 내려다보며 옅게 웃었다.'하씨 집안 어른들이 결국 움직이기 시작했군.'*아이들 숙제를 봐주고 나니 회사에서 하루 종일 일한 것보다 더 진이 빠졌다.방으로 돌아오자 서은주는 경극 가면 하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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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5화

하이준은 휠체어를 타고 다녔다.늘 온화한 미소를 잃지 않는 그의 모습은, 그간의 사연과 맞물려 사람들의 연민을 사기에 충분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언론은 그의 과거를 하나둘 파헤치기 시작했다.수년째 장애 아동을 후원해 왔고, 복지시설에도 꾸준히 기부를 이어왔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졌다.더 눈길을 끈 건, 이 모든 일이 그 스스로 홍보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다.기자들이 직접 취재하며 밝혀낸 이야기였다.반면 하이석은 연일 술에 취해 지낸다는 기사만 쏟아지고 있었다.두 사람은 자연스레 비교 대상이 됐다.하씨 가문 다른 사람들은 저마다 권력을 차지하려고 치열하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하이준만큼은 묵묵히 선행을 이어 온 사람처럼 비쳤다.그제야 사람들은 깨달았다.냉혹하고 인정 없기로 유명한 하씨 가문에도 이런 사람이 있다는 것을.그날을 기점으로 하이준이라는 이름은 대중 앞에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사람들은 하이석을 깎아내릴 때마다 하이준을 치켜세웠다.이름만 나와도 칭찬이 따라붙었고, 경성 사교계의 크고 작은 행사마다 그에게 초청장이 쏟아졌다.순식간에 하이준은 경성에서 가장 주목받는 인물이 됐다.두 사람은 애초부터 결이 달랐다.하이준은 언제나 온화한 미소를 띤 채 사람을 대했고, 상대의 체면을 세워 줄 줄 아는 사람이었다.반면 하이석은 겉으로는 신사처럼 보였지만, 일에서는 누구보다 냉정하고 결단도 빨랐다.그러자 더 과격한 말까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원래 하씨 가문 장남은 하이준의 아버지였어.''장손인 하이준이야말로 하씨 가문과 하씨 그룹의 진짜 후계자 아니야?''하이석이야말로 남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거지.'*그 기사를 읽은 서은주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화면을 바라봤다.“경성 분위기가 이렇게까지 빨리 바뀐다고요?”육강민은 피식 웃었다.“하이석이 그동안 사업하면서 적을 너무 많이 만들었잖아. 이제 다들 그가 무너질 거라고 생각하니까, 기다렸다는 듯 달려드는 거지.”서은주는 그를 가만히 바라봤다.“당신… 은근히 즐기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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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6화

지난밤 육강민에게 한껏 시달린 탓이었다.다음 날 강의를 하러 간 서은주는 허리도 뻐근하고 다리에도 힘이 풀려 하루 종일 기운을 차리지 못했다.점심 무렵 집에 돌아오자 거실에서는 육강민이 육수린과 역할놀이에 푹 빠져 있었다.육강민은 의사, 육수린은 간호사였다.육수린은 서은주를 보자마자 손을 붙잡아끌었다.“엄마는 환자!”그러더니 아빠를 향해 재촉했다.“엄마 엉덩이에 주사 놔 줘요!”피곤이 몰려오던 서은주는 아이와 놀 기운조차 없었다. 그러자 육수린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엄마, 주사 싫어요?”서은주가 대답하기도 전에 육강민이 능청스럽게 끼어들었다.“아니야. 엄마는 주사 엄청 좋아해. 어젯밤에도 아빠랑 실컷 맞았는걸. 오늘은 그냥 좀 피곤한 거야.”장난감 주사기를 손끝으로 빙글빙글 돌리며 웃는 얼굴에는 의미심장한 기색이 가득했다.순간 그의 말뜻을 알아챈 서은주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개졌다.'애 앞에서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당장 테이프로 입을 막아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잠깐만 방심하면 엉뚱한 방향으로 폭주하는 사람답게, 이번에도 순식간에 이야기를 이상한 쪽으로 끌고 가 버렸다.반면 아직 어린 육수린은 두 사람의 숨은 뜻을 알아들을 리 없었다.고개를 숙인 채 다시 장난감만 만지작거릴 뿐이었다.민망함을 애써 눌러 삼킨 서은주는 화제를 돌렸다.“오늘 오후엔 강의 없으니까 복지시설 봉사 다녀오려고 해요. 당신도 같이 갈래요?”양홍철이 그녀 이름으로 꾸준히 기부를 이어 온 뒤부터, 복지시설에서는 감사 인사와 행사 초청 연락이 자주 들어왔고, 서은주 역시 틈날 때마다 봉사를 나가곤 했다.육강민은 여전히 딸과 놀아 주며 고개를 저었다.“오후에 회사 회의가 있어. 끝나면 데리러 갈게.”서은주는 문득 떠오른 듯 말을 이었다.“오늘 리정이랑 통화했는데, 육지성 씨는 한참 집에도 못 들어갔다고 해요.”육강민은 담담하게 대꾸했다.“연위성이 계속 시골에 있으니까 육지성도 따라다니느라 바쁜 거지.”서은주는 한숨을 내쉬었다.“하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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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7화

그 말의 속뜻은 분명했다.잘못한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온유란이며, 괜한 일을 크게 만들고 끝까지 물고 늘어진 것도 모두 온유란이라는 뜻이었다.하채린은 죄책감에 짓눌린 사람처럼 연신 미안한 기색을 내비쳤다. 마치 하이석과 온유란 사이가 틀어진 일을 누구보다 마음 아파하는 사람처럼 보였다.하지만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 한마디 한마디는 결국 모든 잘못을 온유란에게 돌리고 있을 뿐이었다."형수님이랑 친하시잖아요. 괜찮으시다면 제 사과를 꼭 좀 전해 주세요."하채린은 진심 어린 얼굴로 말했다."그러죠."서은주는 옅게 웃으며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정말요?"하채린의 얼굴이 금세 환하게 밝아졌다."그럼 오늘 저녁 제가 식사 대접할게요.""오늘 저녁엔 다른 일정이 있어서요.""그럼 연락처라도 교환할까요? 시간 괜찮으실 때 제가 꼭 한 번 식사 대접하고 싶어요.""그 정도 일로 굳이 그러실 필요는 없어요."서은주는 손목시계를 한번 내려다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오늘 아이들 건강검진을 봐주기로 해서요. 먼저 가볼게요."짧게 인사를 남긴 그녀는 그대로 발걸음을 옮겼다.그 자리에 홀로 남은 하채린은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요즘 오빠가 경성에서 가장 주목받는 인물이 되면서, 그녀 역시 명문가 영애들 사이에서 귀한 대접을 받고 있었다. 함께 식사하자, 쇼핑하자며 먼저 다가오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서은주는 자신을 거절했다.‘뭐 저런 사람이 다 있어? 온유란과 그렇게 잘 어울리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네. 둘 다 사람 성의를 몰라도 너무 몰라.’하채린은 아이들과 금세 어울려 환하게 웃고 있는 서은주를 바라보다가, 끝내 나눠주지 못한 장난감이 들린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이를 악문 입술 끝이 가늘게 떨렸다.*서은주는 몹시 지쳐 있었다.아이들의 건강검진을 모두 마치고 나니 피로가 한꺼번에 밀려왔고, 참지 못한 하품이 몇 번이나 새어 나왔다.하이준이 그녀를 발견했을 때, 서은주는 책상에 엎드린 채 그대로 잠이 든 듯 고요히 숨을 고르고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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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8화

서은주는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하채린이 했던 말을 곱씹고 있었다.겉으로는 몇 마디 안 되는 대화였지만, 그 속에는 교묘한 의도가 숨어 있었다. 온유란과 자신 사이를 이간질하려 들면서도, 그 틈을 타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오려는 속셈이었다.하씨 가문은 정말 한 사람 한 사람이 만만치 않았다.온유란 성격으로 과연 하채린을 상대할 수 있을까.설령 온유란이 그 속내를 간파하지 못했다 해도, 하이준이라면 다를 줄 알았다.그런데도 아무 일도 없는 듯 흘러가는 걸 보니, 어딘가 석연치 않았다.생각에 잠겨 있던 그때, 육강민의 휴대전화가 울렸다.잠시 통화를 마친 그는 외출 준비를 시작했다."이 시간에 또 나가요?"서은주가 시계를 힐끗 바라봤다.벌써 밤 아홉 시가 훌쩍 넘은 시각이었다."사람을 좀 만나기로 했어."하이석과 틀어진 뒤로는 방주헌조차 집에 거의 찾아오지 않았다. 육강민 역시 평소 업무상 약속 외에는 밤늦게 나가는 일이 드물었는데, 이런 시간에 누굴 만나러 가는 걸까.*경성의 한 최고급 스파.육강민이 도착했을 때, 하백규는 이미 욕탕 안에서 몸을 담그고 있었다.그는 육강민을 보자마자 얼굴 가득 비위를 맞추는 웃음을 띠며 손을 흔들었다."육 대표, 몇 번이나 모시려고 했는데 이제야 와 주시는군요."육강민은 아무 말 없이 겉옷을 벗어 한쪽에 걸어두고 천천히 탕 안으로 들어갔다.하백규는 하이석의 외숙부뻘 친척으로, 쉰을 훌쩍 넘긴 나이였다. 불룩 나온 배에 온몸은 살집으로 가득했고, 욕탕 안에서도 존재감이 상당했다.그는 육강민의 탄탄한 몸을 훑어보며 속으로 감탄을 삼켰다.특히 시선을 슬쩍 아래로 내렸다가, 이내 제 몸을 내려다보는 순간 표정이 어색하게 굳었다.비교하지 않으면 상처될 일도 없으련만. 도대체 평소에 뭘 먹고 사는 거지? 같은 남자인데도 차이가 이렇게 크다니.속으로 한숨을 내쉰 그는 괜히 민망해져 몸을 물속으로 더 깊이 담갔다."계속 절 보자고 하셨는데 무슨 일 때문입니까?"넓은 욕탕에는 두 사람뿐이었다.하백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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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9화

"지금은 관계가 틀어진 상태라지만, 이대로 뒤통수를 치는 모양새가 되면 뒷말이 나올 수밖에 없겠죠."육강민은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당신은 아직 하이석의 자리를 잠시 대신 맡고 있을 뿐입니다. 아직 하씨 그룹의 진짜 결정권자라고 할 수는 없죠. 혹시라도 계약식 당일 하이석이 무슨 일을 벌인다면 수습하기 쉽지 않을 겁니다. 모두가 난처해질 수도 있고요."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스쳤다."그 문제만 당신이 해결할 수 있다면..."그 말만으로도 충분했다.하백규는 단번에 그의 뜻을 알아들었다.남은 일은 자신에게 맡겨 달라며 거듭 얘기하는 사이, 육강민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욕탕에서 나온 그는 가운을 걸친 채 그대로 밖으로 향했다.하백규가 허둥지둥 뒤를 따라붙었다."육 대표, 그냥 가시게요? 괜찮은 관리사 한 명 불러드릴까요? 제가 아는 사람이 있는데, 정말 시원하게 모셔 드릴 겁니다."의미심장한 웃음이 입가에 번졌다.육강민도 바보는 아니었다. 그가 말하는 '관리사'가 어떤 사람들을 뜻하는지 모를 리 없었다.육강민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계약부터 성사시키죠. 즐기는 건 그다음이어도 늦지 않습니다.""맞는 말씀입니다."하백규는 더욱 비위를 맞추며 웃었다.이 스파에도 자신이 투자하고 있다며, 이곳 관리사들은 실력이 최고라고 연신 자랑을 늘어놓았다.육강민은 꽤 흥미가 생긴 듯 적당히 맞장구를 쳤다."기회가 되면 한번 와보죠."그 말을 끝으로 그는 발걸음을 옮겼다.육강민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던 하백규는 코웃음을 쳤다."육씨 부부의 금슬이 대단하다더니, 별거 아니었군."비웃음이 섞인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세상에 바람 안 피우는 고양이가 어디 있겠어? 이제 하이석만 처리하면 끝이야."*한편, 시골.온유란은 휴대전화를 손에 쥔 채 한참을 망설이고 있었다.하이석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싶었지만 막상 보내려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여자가 독해지면 무섭다고들 하지만 정말 마음을 독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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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00화

추석이 지나자 달은 점점 이지러지고 별빛도 옅어졌다.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고, 푸르던 초목은 하나둘 누렇게 물들며 가을 끝자락으로 접어들었다.하이석과 온유란의 결혼식 날짜는 하루가 다르게 가까워지고 있었지만,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그 탓에 경성에는 온갖 소문이 퍼져 나갔다.결혼식이 취소됐다느니, 이미 남몰래 이혼 절차까지 끝냈다느니 하는 말들이 거리마다 떠돌았다."요즘 유란이랑은 연락했냐?"낚싯대를 드리운 하정현이 옆에서 묵묵히 찌를 바라보는 아들을 흘끗 바라봤다.하이석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 침묵만으로도 답은 충분했다."도무지 모르겠다. 너희 젊은 것들은 체면이 그렇게 중요하냐? 가서 사과 한마디 하고, 좋은 말 몇 마디 하는 게 그렇게 어려워?"하이석은 잔잔한 수면만 바라본 채 입을 열었다."저희 일은 아버지가 이해 못 하십니다.""말 같지도 않은 소리!"하정현이 코웃음을 쳤다."나도 연애해 본 사람인데 뭘 모른다는 거냐. 시간 내서 당장 시골에 가서 유란이 데려와."아들의 반응이 시큰둥하자 그는 버럭 목소리를 높였다."안 가면 내가 널 꽁꽁 묶어서 강에 던져 물고기 밥으로 만들어 버릴 거다."하이석은 담담히 그를 바라봤다."그건 살인입니다. 감옥 가셔야 해요."잠시 말을 멈춘 그가 덧붙였다."전 어머니가 이 나이에 과부 되시는 건 원치 않습니다."하정현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속이 뒤집힐 만큼 열이 치밀었다.도대체 자신이 낳은 건 대체 뭘까."연위성이 요즘도 매일 유란이 근처를 지킨다던데. 그것도 첫사랑이라며? 하나도 안 불안하냐?"하정현이 슬쩍 떠보듯 물었다. 하지만 하이석의 관심은 전혀 다른 곳에 가 있었다."아버지, 목소리 좀 낮추세요."그는 물 위를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물고기 놀라 도망가겠습니다."하정현은 이를 악물었다.육강민을 비롯한 친구들과도 오랫동안 연락을 끊었고, 지금 경성 사람들은 모두 하이석을 비웃고 있었다.심지어 아내도 떠나게 생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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