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파혼 후 시작된 그의 집착: Chapter 941 - Chapter 950

975 Chapters

제941화

아무도 하이석이 이렇게 순순히 물러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온유란처럼 회사 사정에 어두운 사람조차 알 수 있었다. 겉으로는 ‘임시 대행’이라지만, 자리를 내어준 이상 다시 돌아오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특히 그 사촌 숙부라는 사람은 뜻밖의 행운이라도 얻은 듯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그럼 이 사무실은…”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하이석이 어깨를 으쓱했다.“조금 있다가 왕 기사에게 제 짐을 정리해 달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자리 비워드려야죠.”“이석아, 넌 어릴 때부터 참 속이 깊었어. 우리가 널 회사에서 내쫓으려는 게 아니란다. 몸부터 잘 회복하고, 결혼도 해야지. 나중에 돌아오고 싶으면 언제든 돌아와도 된다.”사람들은 하나같이 그의 건강 상태를 물으며 푹 쉬라고 당부했다. 회사 일은 걱정하지 말라는 말도 덧붙였다.하이석은 처음부터 끝까지 흐트러짐 없이 온화한 태도를 유지했다.하지만 그 모습을 보는 온유란의 속은 점점 더 답답해졌다.아무리 생각해도 너무했다. 사람들이 그를 지나치게 몰아붙이는 것만 같았다.*집으로 돌아가는 길, 하이석의 휴대전화가 울렸다.전화한 사람은 육강민이었다.“들었어. 자리 넘겼다며?”“소식 빠르네.”하이석이 웃으며 답했다.“이런 일은 원래 금방 퍼지는 법이지. 네 집안 어른들이 드디어 기회를 잡은 거네. 잠시라도 널 밖으로 밀어낼 수 있는.”전화를 끊은 뒤에는 방주헌에게서도 연락이 왔다.온유란은 그만 할 말을 잃었다.왜냐하면 방주헌은 정말 신나게 웃고 있었기 때문이다.“야, 하이석! 너 왜 이렇게 무능해졌냐? 결국 집안 어른들한테 쫓겨난 거야? 아 진짜 웃겨 죽겠네. 예전엔 그렇게 잘나가더니 어쩌다가 이 꼴이 됐냐? 싸워야지. 가서 뒤집어엎어. 정신적으로는 내가 응원한다.”온유란은 머리가 지끈거렸다.저 사람이 정말 친구가 맞긴 한 걸까.남의 상처 위에 저렇게 신나게 소금을 뿌리는 친구도 있나 싶었다.그녀는 하이석을 위로하고 싶었으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결국 그의 손을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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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42화

하이석은 온유란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권한을 빼앗긴 뒤 마음고생이라도 할까 걱정했던 모양이었다.하지만 그는 누구에게나 휘둘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회사 문제 역시 나름의 계산과 계획이 있었다.아내가 자신을 걱정해 주는 건 분명 고마운 일이었지만 그보다 더 골치 아픈 일은 따로 있었다.*온유란은 서은주를 집으로 초대했다. 그러자 육씨 형제들이 아내와 아이들까지 데리고 찾아왔다.온유란은 그저 친구들이 자주 오가면 하이석의 기분도 조금은 풀릴 거라 생각했을 뿐이었다.그런데 육씨 집안 아이 셋이 마당을 온통 휘젓고 다니는 바람에, 하씨 저택은 순식간에 어린이 놀이터처럼 변해 버렸다.이후로는 연우진도 예전보다 더 자주 찾아왔고, 육민찬과 육수린 남매까지 틈만 나면 하씨 저택에 드나들기 시작했다.이유는 단순했다. 하씨 저택에 수영장이 있었기 때문이다.원래는 하정현이 어느 날 갑자기 마음이 동해 만들었다가 오랫동안 방치해 두었던 곳이었는데, 하이석의 결혼을 앞두고 저택 전체를 손보게 되면서 수영장 역시 말끔하게 정비를 마친 것이다.그 뒤로 육씨네 아이들은 틈만 나면 수영하러 찾아왔다.연우진은 운동 신경이 뛰어나 여러 가지 영법을 자유롭게 구사했다.반면 육민찬은...강씨 저택에서 너무 잘 먹고 자란 탓인지 아직 어린 나이인데도 제법 통통한 배가 나와 있었다.알록달록한 수영복 바지를 입고 볼록 나온 배를 내민 채 하루 종일 눈앞을 어슬렁거렸다.게다가 할 줄 아는 수영은 단 하나. 개헤엄뿐이었다.육수린은 튜브를 낀 채 물놀이하는 걸 가장 좋아했다.사실 아이들이 와서 수영만 하고 가면 문제 될 게 없었다. 하지만 먹이고, 마시게 하고, 씻기고, 챙겨야 할 게 한둘이 아니었다.그런데도 육강민 형제는 무척 만족스러워했다.방학만 되면 아이들 공부도 봐줘야 하고 놀아주기도 해야 해서 머리가 아팠는데, 하씨 저택에 보내 놓으니 육아 부담이 한결 줄어든 것이다.하이석이 몇 번 항의도 해봤지만 육강민은 태연하게 말했다.“어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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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43화

온유란이 시골로 내려간 뒤, 하이석은 문득 깨달았다. 사흘 뒤가 바로 칠석이라는 것을.단체 대화방에서는 방주헌이 칠석 계획을 신나게 떠들고 있었다.육강민은 이미 고급 레스토랑을 예약해 두었고, 바이올린 연주까지 준비했다느니 어쩌느니 하고 있었고, 육남혁은 아내와 함께 예전에 살던 아파트로 돌아가 추억을 되새길 예정이라고 했다.심지어 허경빈조차 약속이 있었다. 친구들과 함께 누구의 콘서트를 보러 간다고 했다.그런데 유독 하이석만은 혼자였다.삼십 년 넘게 혼자 살아오면서도 이런 기념일은 늘 남의 일처럼 여겼다.어차피 혼자였으니 별다른 감흥도 없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결혼도 했고, 좋아하는 사람도 생겼다.그런데도 칠석을 홀로 보내야 한다는 사실이 괜히 마음 한구석을 허전하게 만들었다.그는 진작 온유란을 위한 선물까지 준비해 두었다.다만 정작 선물을 건넬 사람이 곁에 없었다.*칠석 당일.점심 식사를 마친 뒤 하정현 부부도 외출했다. 아무래도 따로 약속이 있는 모양이었다.하이석은 무릎 위에 앉은 새끼고양이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설마 올해 칠석을 너랑 보내게 될 줄은 몰랐네.”하랑이는 그의 다리 위에 얌전히 엎드려 있었다.하이석이 고양이 머리를 긁어주며 말했다.“하랑아, 내가 선물 하나 해줄까?”“냐옹.”“중성화 패키지로 해줄게.”하랑이는 움찔하더니 소스라치게 몸을 떨었다.*오후가 되자 유주만이 하씨 저택을 찾아왔다.명절인데 혼자 있으면 적적할까 봐 낚시나 하며 바람을 쐬자는 것이었다.“유란이도 참. 어떻게 칠석에 너 혼자 집에 두고 가냐.”유주만이 혀를 차자 하이석은 웃으며 말했다.“도정숙 아주머니를 돌보는 게 더 중요하죠.”다리를 다쳐 집에 돌아온 뒤로 온유란은 줄곧 그의 곁을 지켜 왔다.그 고생을 누구보다 잘 아는 하이석은 그녀가 도정숙을 만나러 내려간 일을 탓할 생각이 없었다.남자라면 이 정도는 이해할 줄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하지만 마음은 생각만큼 따라주지 않았다.종일 낚싯대를 드리웠지만 한 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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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44화

촛불이 은은하게 흔들리며 방 안을 물들였다.하이석은 정갈하게 차려진 음식들을 바라보다가, 맞은편에 앉아 자신을 바라보는 온유란에게 시선을 옮겼다.그녀는 기대 어린 눈빛으로 그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었다.가슴 한구석이 묘하게 저려 왔다.좋아하는 마음이 온전히 되돌아온다는 건 이런 기분일까.마치 굳게 닫혀 있던 산골짜기가 어느 날 갑자기 열리며, 따뜻한 바람이 끝없이 밀려드는 것 같았다.그 바람은 따뜻했고 온몸 구석구석까지 포근하게 감싸 안았다.“밖에 오래 있었으니 배고프죠?”온유란이 웃으며 물었다.“네, 배고파요.”하이석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그 말을 들은 왕 기사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배가 안 고프다며 저녁도 필요 없다고 하던 사람이 누구였더라.식탁 위 음식은 모두 온유란이 직접 준비한 것들이었다.당연히 하이석의 입맛에 꼭 맞았다.다만 식사를 시작하기 전, 그는 평소와 다르게 휴대전화를 꺼냈다.그리고 음식 사진을 한 장 찍어 SNS에 올렸다.원래도 좀처럼 게시물을 올리지 않는 사람이었기에 반응은 폭발적이었다.육강민을 비롯한 사람들은 조용히 '좋아요'를 눌렀지만, 방주헌만은 달랐다.[어디서 사진 훔쳐 왔냐?]하이석은 곧바로 답글을 달았다.[아내가 준비해 준 거야.]곧이어 방주헌의 답글이 올라왔다.[형수님 최고! 형수님 만세! 형수님은 진짜 신이야!]강희진은 차마 못 봐주겠다는 듯 그의 휴대전화를 빼앗아 댓글을 삭제해 버렸다.한편, 그 게시물은 하정현 부부의 눈에도 들어갔다.아들이 어느새 이런 걸 올릴 만큼 변했다는 사실에 새삼 감회가 깊어졌지만, 현정민은 문득 미간을 찌푸렸다.“저 둘 지금 집에서 한창 오붓한 시간 보내고 있을 텐데, 우리가 지금 들어가는 건 좀 그렇지 않아요?”“확실히 그렇군.”하정현도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사실 나도 집에 가고 싶긴 한데, 괜히 들어갔다가 분위기만 깨는 거 아닌가 싶어서.”현정민은 이미 졸음이 몰려오기 시작한 상태였다. 평소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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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45화

“유란 씨, 오늘 정말 예뻐요.”온유란은 저녁에 와인을 조금 마신 탓에 뺨이 발그레 물들어 있었다. 거기에 또 한 번 붉은 기가 번지자 더욱 곱고 사랑스러워 보였다.온유란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하이석은 그녀의 몸을 가볍게 돌려 세웠다.등 뒤에는 화장대 거울이 있었다.거울 속에는 눈빛이 흐트러진 자신의 모습이 선명하게 비쳤다. 귓불까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하이석은 뒤에서 그녀를 품에 안듯 가까이 다가섰다.그리고 손끝으로 그녀의 드레스 지퍼를 천천히 내렸다.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온유란도 알고 있었다.그녀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몸도 아직 다 안 나았잖아요. 무리하면 안 돼요.”“오늘 유주만 선생님 만났어요.”하이석이 낮게 웃었다.“괜찮다고 하시던데요.”“정말요?”온유란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못 믿겠으면 직접 전화해서 물어봐도 돼요.”이런 걸 어떻게 전화해서 물어본단 말인가.결국 온유란은 진짜인지 아닌지도 분간하지 못한 채 그에게 이끌릴 수밖에 없었다.하이석은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하며 낮게 속삭였다.“제가 좀 불편하니까 유란 씨가 조금만 맞춰줘요.”그 말에 온유란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그녀는 이미 옷을 벗은 상태인데, 하이석은 아직도 그 정장을 입고 있었다.단정하기 짝이 없는 차림새였다. 그런데 입에서 나오는 말은 사람을 견딜 수 없을 만큼 민망하게 만들었다.오랫동안 서로에게 마음껏 기대지 못했던 탓일까.하이석은 평소보다 조급해 보였다.온유란은 그의 정장을 꽉 움켜쥐었다. 옷깃은 흐트러졌고, 단정했던 정장도 어느새 구김이 잔뜩 가 있었다.와인의 여운이 서서히 올라오기 시작하자 온몸이 뜨겁고 나른했다.온유란은 자신도 모르게 그의 옷깃을 붙잡았다.그러자 하이석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웃었다.“급할 것 없어요. 다 유란 씨 거니까.”“오늘 밤은 저도 당신 거예요.”온유란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그녀는 여전히 다친 그의 다리를 의식하고 있었다. 혹시라도 무리가 갈까 늘 조심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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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46화

하지만 두 사람이 돌아온 뒤, 유주만에게도 선물을 챙겨 왔다. 겨울에 쓰기 좋은 모자 하나였다.유주만은 받자마자 자랑하고 싶어 안달이 났지만, 방주헌이 곧장 찬물을 끼얹었다.“선생님, 지금 한여름인데 그런 모자를 쓰고 다닌다면 땀이 비오듯 나겠어요.”그 말에 유주만은 당장이라도 손자를 쫓아가 한 대 쥐어박고 싶은 심정이 됐다.오랜 친구들 역시 하나같이 선물을 받았다.육강민을 비롯한 남자들은 선글라스나 벨트 같은 실용적인 물건을 받았고, 서은주를 비롯한 여성들은 예쁜 옷과 세련된 장신구를 선물받았다.온유란은 연주와 손리정을 위해 편안한 임부복도 직접 골랐다.손리정은 원래부터 화끈한 성격이었다. 배가 제법 불러온 상태인데도 행동에 거리낌이 없었다. 옆에서 보는 사람들은 간이 철렁할 정도였지만 정작 본인은 태연했다.아이는 건강하니 걱정할 필요 없다고, 자신은 즐겁고 행복한 임신 기간을 보내고 싶다고 늘 말하곤 했다.덕분에 육지성만 하루 종일 노심초사하며 마음을 졸였다.연주는 선물을 받아 들고 미소를 지으며 고맙다고 인사했다.그런데 온유란은 문득 그녀의 표정에 옅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제가 선물을 잘못 고른 걸까요?”온유란은 사람들 눈을 피해 서은주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아니에요. 형수님께서 며칠 뒤에 부모님 산소에 다녀올 예정이거든요. 그래서 요즘 마음이 좀 무거워요.”서은주 역시 중원절 무렵 강성에 내려가 부모님 묘를 찾아뵐 예정이었다.온유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연주의 결혼식 때 그녀도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했었다. 그날 연씨 가문 친척들은 적지 않게 찾아왔지만, 정작 가까운 직계 가족은 보이지 않았다.경사스러운 자리였기에 굳이 묻지 않았던 일이었지만, 마침 이야기가 나온 김에 조심스럽게 물었다.“연주 씨는... 직계 가족이 더 없는 거예요?”“오빠가 한 분이 계셨는데 실종됐어요.”짧은 대답에 온유란은 순간 말을 잃었다.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저 침묵만 삼켰다.그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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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47화

두 사람이 경성으로 돌아올 무렵, 육남혁도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길을 나섰다.임신 후라 그런지 원래도 섬세한 성격이었던 연주는 요즘 들어 유난히 마음이 여렸다. 한주미는 그런 며느리가 걱정되어 출발 전 아들에게 몇 번이고 당부했다.“연주 잘 챙겨.”그러자 연우진이 얼른 가슴을 두드리며 나섰다.“할머니, 걱정 마세요. 저도 엄마랑 동생 잘 돌볼게요.”연주는 임신한 뒤에도 유독 매운 음식을 잘 먹었다.흔히 신 음식이 땡기면 아들, 매운 음식이 땡기면 딸이라고 하지 않던가.연우진은 이미 엄마 뱃속 아이가 여동생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연주의 고향까지는 한 번에 갈 수 없었다. 교통편을 갈아타며 이동해야 하는 만큼 몸에 무리가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비행기에서 내리자 뜻밖에도 육지성에게 연락이 왔다. 그는 이미 공항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여긴 웬일이야?”육남혁이 놀란 듯 묻자 육지성이 웃으며 대답했다.“대표님께서 혹시 이동이 불편할까 봐 절 보내셨습니다.”육지성은 현지에서 미리 차량까지 빌려둔 후, 세 사람을 직접 태워 목적지까지 데려다줄 생각이었다.이번 성묘 일정도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할 예정이었다.“리정 씨도 임신 중인데, 이렇게 나와 있어도 괜찮아?”연주는 마음이 따뜻해지는 걸 느끼며 물었다.평소 육강민은 무뚝뚝하고 차가운 인상이라 가까이하기 어려워 보였지만, 실은 누구보다 세심한 사람이었다.생각해 보면 육씨 가문 사람들은 다 비슷했다. 말보다 행동이 먼저였다.“괜찮아요. 임신하고 나서 성격이 더 예민해져서 요즘은 절 보기만 해도 짜증 난다고 하더라고요.”육지성이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게다가 장인어른이랑 장모님도 경성에 올라와 계세요. 집은 미리 사람을 시켜 정리해 뒀으니까 바로 들어가시면 됩니다.”연우진은 처음으로 연씨 저택에 왔다.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모르는 만큼, 집 안의 모든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그러다 벽에 걸린 가족사진을 가리키며 물었다.“엄마, 이 사람이 외삼촌이에요?”연주는 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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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48화

전화를 쥔 연주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고 얼굴에서는 순식간에 핏기가 사라졌다.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목이 꽉 막힌 듯 숨만 가쁘게 새어 나올 뿐이었다.한마디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굳어 버린 그녀를 보며 육남혁은 곧장 이상함을 눈치챘다.연우진도 어머니의 표정을 살피며 입을 열려 했다.하지만 육남혁이 먼저 수건을 집어 들었다.아이의 발을 닦아 준 뒤 그대로 품에 안아 올렸다.“가자. 아빠가 재워 줄게.”연우진은 얌전히 아버지의 목을 감쌌다.무슨 일인지는 몰랐지만, 더 묻지 않고 그대로 안겨 갔다.육남혁이 데려간 방은 원래 연주의 오빠, 연위성의 방이었다.“아빠, 엄마 왜 그래요?”침대 위에 올라가 다리를 꼬고 앉은 연우진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육남혁은 아이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엄마한테 조금 일이 생겼어.”“그럼 물어보면 안 돼요?”육남혁이 고개를 끄덕이자 연우진은 금세 알아들었다.“그럼 아빠는 엄마 옆에 있어요.”아이는 작은 손을 휘휘 흔들며 덧붙였다.“저는 안 챙겨줘도 돼요.”육남혁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아이의 볼에 입을 맞춘 뒤에야 방을 나섰다.다시 돌아왔을 때 연주는 이미 전화를 끊은 뒤였다.그녀는 가만히 앉아 있었다. 눈빛은 허공에 머물러 있었고,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마치 정신이 절반쯤 다른 곳에 가 있는 사람 같았다.“연주야.”육남혁이 몇 번이고 이름을 불러서야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물 다 식었네.”그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무릎을 굽혀 앉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그녀의 발에 맺힌 물기를 닦아 냈다.연주는 말이 없었다. 하지만 어느새 눈가에 물기가 차오르고 있었다.애써 참고 있던 감정이 조금씩 무너져 내렸다.결국 눈물은 더는 버티지 못하고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왜 울어?”육남혁은 손을 뻗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울지 마.”목소리는 한없이 부드러웠다.“네가 울면 나도 힘들어. 우진이가 보면 또 놀릴 텐데.”연주는 끝내 참지 못하고 그의 품으로 파고들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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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49화

모두가 반가운 소식에 들떠 있었지만, 서은주만은 육강민의 표정이 어딘가 평소와 다르다는 걸 알아챘다.“왜 그래요? 형수님께서 실종됐던 오빠를 찾았다는데, 당신은 별로 기뻐 보이지 않네요.”“그런 게 아니야.”육강민은 고개를 저었다.“그냥 좀 의외라서.”“그건 나도 그래요. 그래도 이제야 알겠더라고요. 형수님께서 왜 우진이 이름을 그렇게 지었는지. 알고 보니 오빠 이름이랑 관련 있었던 거잖아요. 남매 사이가 정말 좋았나 봐요.”연위성과 연우진. 조카와 외삼촌의 이름은 같은 시구에서 따온 것이었다.[위성의 봄비가 푸른 숲을 적시고, 우진의 밝은 달은 돌아올 이를 비춘다]서은주는 자세한 사정을 알지 못했으나, 그럼에도 진심으로 연주를 위해 기뻐했다.연우진 역시 마찬가지였다.경성으로 돌아온 뒤 외삼촌을 찾았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좋아서 어쩔 줄을 몰랐다.육민찬에게는 강정한이라는 외삼촌이 있었고, 강정한은 평소 조카를 무척 아꼈다.연우진은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았지만, 은근히 부러워하곤 했다.그래서 더 기뻤다.아이는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말했다.“저도 이제 외삼촌이 생겨요!”덕분에 방주헌과 하이석을 비롯한 사람들도 금세 이 소식을 알게 됐다.모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방주헌은 연위성이 돌아오면 환영회부터 열자고 나섰다.물론 진짜 목적은 환영회가 아니었다.원래 사람 모이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라, 그저 다 같이 모여 떠들고 즐길 명분이 하나 생긴 셈이었다.하지만 육강민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이 일이 지나치게 수상하게 느껴졌다.군 복무 시절, 그는 그런 부류의 인간들이 얼마나 잔인한지 직접 본 적이 있었다.목숨을 담보로 살아가는 범죄자들.살해 장면을 촬영한 영상을 경찰서로 보낼 만큼 악독한 자들이었다.그런 놈들이 과연 연위성을 살려 두었을까? 그가 스스로 탈출한 걸까? 아니면 그들과 같은 편이 된 걸까?생각할수록 의문만 커졌다.연주와 육남혁이 전성시에 도착하자마자 육강민은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사람은 만났어?”육남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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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50화

연주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육남혁이 곁에서 붙잡아 주지 않았다면, 그대로 주저앉았을지도 몰랐다.그녀는 곧장 병실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채, 한동안 병실 밖 의자에 앉아 거친 숨만 크게 내쉬었다.그러다 눈물이 불시에 툭 떨어졌다.겨우 마음을 추스르고 병실 앞에 섰을 때도, 연주는 선뜻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문가에 멈춰 선 채, 떨리는 숨결로 겨우 한 글자를 내뱉었다.“오빠.”연주는 줄곧 연위성이 죽었다고 믿어 왔다.그래서 지난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그를 찾아 나서지 않았다.그런데 그가 돌아왔다. 정말로, 살아 돌아왔다.그동안 얼마나 많은 밤을 꿈에서 놀라 깨곤 했던가. 꿈속에서 부모님과 오빠는 점점 멀어져 갔고, 연주는 뒤에서 그들을 쫓으며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외쳤다. 하지만 아무도 돌아보지 않았다.사람들은 모두 그녀에게 말했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더 길다고. 그러니 이제는 앞을 보고 살아야 한다고.하지만 연주는 정말 몰랐다. 대체 어떻게 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연우진이 없었다면, 그녀는 어쩌면 진작 부모님 곁으로 가 버렸을지도 몰랐다.연주의 두 눈이 젖어 들었다. 그녀의 시선은 연위성에게 붙박인 듯 떨어질 줄 몰랐고, 몸은 굳어 버린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세상 모든 소리가 멀어지고, 주변의 시간마저 멈춰 버린 것 같았다.오히려 인기척을 들은 건 연위성 쪽이었다.그가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천천히 연주 앞으로 걸어왔다.연주의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격한 감정 탓에 얼굴에는 비정상적인 붉은 기가 떠올랐다. 마음의 준비를 했다고 생각했는데도, 눈물은 순식간에 다시 차올랐다.연위성은 허리를 조금 숙이고, 고개를 기울인 채 그녀를 향해 웃었다.“왜 울어? 우리 연주는 이제 엄마가 된 사람인데, 아직도 어린애처럼 우네.”그는 그렇게 말하며 손을 뻗어 연주를 조심스레 품에 안았다. 그리고 가만히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무서워하지 마. 이 오빠가 돌아왔잖아. 이제 다시는 널 두고 가지 않을게.”남자의 목소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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