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파혼 후 시작된 그의 집착: Chapter 961 - Chapter 970

975 Chapters

제961화

허경빈이 머리를 긁적이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난 모태솔로라 도움이 안 돼. 이런 건 하이석한테 물어봐.”방주헌은 곧장 기대 어린 눈빛으로 하이석을 바라봤다.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하이석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인사 드리러 갈 땐 딱 두 글자면 충분해.”“뭔데?”“진심.”방주헌은 할 말을 잃었다.'그걸 몰라서 묻냐고.'당연히 진심을 담아야 한다는 건 안다. 그저 긴장되고 마음이 복잡해서 친구들과 얘기라도 나누고 싶었던 것뿐인데, 돌아온 대답이라곤 저 한마디였다. 도움은커녕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조언이었다.*하이석이 집에 도착했을 때는 밤 열한 시가 훌쩍 넘은 시각이었다.곧장 뒤뜰 쪽으로 들어가려던 그는 거실에 아직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보고, 또 아버지가 TV를 켜 둔 채 잠드셨나 싶었다.하지만 거실로 들어선 순간, 소파에 누워 있는 사람이 아버지가 아니라 온유란이라는 걸 발견했다.무더운 날씨 탓에 집 안에는 에어컨이 시원하게 돌아가고 있었고, 그녀는 얇은 담요를 덮은 채 잠들어 있었다. 하랑이도 담요 위에 동그랗게 몸을 말고 웅크리고 있다가 하이석을 보자 연신 야옹거리기 시작했다.그 소리에 온유란도 천천히 눈을 떴다.“왔어요?”잠이 덜 깬 얼굴로 담요를 걷고 일어나려던 그녀는, 같은 자세로 오래 누워 있었던 탓인지 다리에 힘이 풀렸다.휘청하며 중심을 잃는 순간, 하이석이 재빨리 다가와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왜 여기서 잤어요?”“기다리다가 잠든 거예요. 금방 온다고 했잖아요.”온유란은 자연스럽게 그의 허리를 끌어안고 품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 작은 고양이처럼 살짝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그 조그마한 몸짓 하나에, 하이석의 마음은 순식간에 녹아내렸다.“배고프죠? 주방에 생선탕 남겨 놨어요. 금방 데워 드릴게요.”그녀가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자 하이석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온유란은 곧장 주방으로 향하며 익숙한 손놀림으로 머리를 질끈 묶었다.하랑이도 기지개를 길게 켜더니 생선탕 냄새를 맡고는 그녀의 발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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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62화

그 목소리는 무척 나직했다. 귓가를 스쳐 지나갈 만큼 가벼운 한마디였지만, 이상하리만치 또렷하게 온유란의 귀를 파고들어 그대로 마음 깊숙한 곳까지 번져 갔다.'자기.'그 한마디에 온유란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점점 가까워지는 하이석의 얼굴이 시야를 가득 채웠고, 둘 사이를 가르고 있던 마지막 거리마저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조금 전 차갑게 식힌 여지를 먹은 탓인지 그의 입안은 은은하게 서늘했지만, 맞닿은 입술은 놀랄 만큼 따뜻했다.그는 서두르지 않은 채 그녀의 턱을 부드럽게 감쌌다.가볍게 머금었다가 살며시 깨물고, 다시 천천히 입술을 빨아들이며 차근차근 그녀를 녹여 갔다.도대체 어디서 그런 키스를 배운 걸까.달콤하고도 촉촉한 감각이 쉼 없이 밀려와 사람을 속절없이 빠져들게 했다.허리를 감싸던 손에 힘이 들어가더니 어느새 온유란은 그의 무릎 위에 앉아 있었다.계속 이어지는 입맞춤에 몸은 붕 떠오른 듯 힘을 잃었고, 그녀는 그의 품에 기댄 채 겨우 숨을 골랐다.“여기 거실이에요.”“걱정 마요. 선은 지킬 테니까.”하이석은 낮게 웃으며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부드러운 살결 위에 입술을 가볍게 눌렀다가, 이내 살짝 이를 세웠다. 따끔한 감각이 스쳤지만, 그보다 더 먼저 묘한 전율이 온몸을 타고 번져 나갔다.“당신 왜 이래요?”온유란은 어딘가 평소와 다른 그의 모습이 낯설었다. 조금 전의 '자기'라는 호칭도, 그다운 말투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이유를 묻기도 전에 입술이 다시 포개졌다.이번 키스는 아까와는 달랐다. 더 깊고, 더 거침없었다. 숨을 돌릴 틈조차 없을 정도였다.에어컨 바람은 차갑게 불어오는데도 그의 입맞춤은 뜨겁게 달아올랐고, 허리를 감싼 손끝에도 조금씩 힘이 실렸다. 얽혀 드는 숨결은 어느새 서로를 가득 물들이고 있었다.입술 끝을 가볍게 쓸어 내리던 하이석이 쉰 목소리로 속삭였다.“유란 씨.”그녀는 그의 눈을 바라봤다.“저 좋아해요?”온유란은 잠시 숨을 멈췄다.“좋아하냐고요?”그가 다시 한번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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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63화

또 하나는 온유란을 믿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헤어진 연인에 대해 캐묻는 건 너무도 속 좁은 행동이었다. 적어도 그런 방식은 하이석답지 않았다.하지만 연위성은 이미 그들의 일상 속으로 들어와 있었다. 그의 존재를 모른 척하는 것 역시 불가능했다.그래서 더 답답했다.온유란은 원래 하이석 옆에 앉아 있다가 전화를 받으러 잠시 자리를 비웠다.그 틈을 타 연우진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하이석 삼촌, 기분 안 좋아요?”어린아이였지만 눈치는 놀라울 만큼 빨랐다.“아니.”“삼촌,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과일이 뭔지 알아요?”“뭔데?”“천도복숭아요.”하이석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연우진은 신이 나서 또 말을 이었다.“그럼 이것도 알아요? 세상에서 가장 억울한 도형은?”“글쎄?”하이석은 영문도 모른 채 맞장구를 쳐 주었다.“원통이요.”순간 하이석은 머리가 띵해졌다.육남혁 집 아들이 이런 썰렁한 아재개그를 하는 아이였단 말인가. 정말 기가 막혔다.“삼촌, 이제 기분 좀 좋아졌어요?”연우진이 고개를 갸웃하며 묻자, 하이석은 미간을 꾹 눌렀다.“원래는 괜찮았는데, 지금은 하나도 안 좋아.”“제 개그 재미없어요?”“연우진.”그가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이런 건 누구한테 배웠어?”“방주헌 삼촌이요.”하이석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역시 방주헌이었다.아이한테 뭘 가르쳐도 저런 것부터 가르치나.연우진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입술을 삐죽였다.분명 재미있는 이야기였는데. 왜 하이석 삼촌은 금방이라도 속이 뒤집힐 사람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걸까? 어른들은 정말 어렵다.“무슨 얘기 하고 있었어요?”전화를 마치고 돌아온 온유란은 하이석의 표정이 심상치 않은 걸 발견했다.“아무것도 아니에요! 저 할아버지한테 갈래요!”하이석의 눈빛이 꼭 자신을 잡아먹을 것만 같자 연우진은 잽싸게 낚싯대와 작은 의자를 챙겨 들고 육진국이 있는 쪽으로 달아났다.“대체 우리 우진이한테 무슨 말을 했기에 저렇게 도망가요?”온유란이 그의 곁에 다시 앉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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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64화

한여름 오후. 뜨거운 바람이 불고 매미 소리가 요란하게 쏟아지는 가운데, 짙은 나무 그늘 아래에만 겨우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하이석이 낮게 입을 열었다.“갑자기 왜 그 사람 얘기를 하는 겁니까?”온유란은 담담하게 웃었다.“별건 아니에요. 그냥 당신한테 말해 두고 싶었어요.”어떤 일은 끝내 숨길 수 없는 법이었다. 지금은 더 이상 연위성을 좋아하지 않는다 해도, 그를 직접 마주하거나 그의 소식을 들으면 마음 한구석이 흔들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완전히 초연해지는 건 불가능했다.게다가 하이석은 누구보다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언젠가는 그녀의 미묘한 변화를 눈치챌 테고, 앞으로도 그와 마주칠 일 역시 피할 수 없을 터였다.그렇다면 숨기느니 차라리 솔직하게 털어놓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그 사람도 많이 변했더라고요. 예전엔 덧니가 있어서 웃으면 참 보기 좋았는데… 그땐 어려서 그런지 정말 풋풋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왠지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더라고요. 훨씬 음울해졌달까.”하이석은 말없이 턱에 힘을 주었다.덧니? 풋풋해? 뭐 그 사람만 젊은 시절이 있었나.순간 괜히 심사가 뒤틀렸다.그때였다. 멀지 않은 곳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연우진이 작은 물고기 한 마리를 낚아 올린 것이었다.육진국과 하정현은 나란히 서서 연우진에게 낚시에 재능이 있다며 아낌없이 칭찬을 퍼부었다.연우진은 쑥스러운 듯 귀까지 빨개졌지만, 입꼬리는 숨길 수 없이 올라가 있었다.온유란도 미소를 머금은 채 몇 번이나 그쪽을 바라봤다.그 시선을 눈치챈 연우진은 머리를 긁적이며 더욱 수줍게 귀를 붉혔다.온유란은 다시 조용히 말을 이었다.“세상은 정말 넓어서, 어떤 사람들은 한 번 헤어지면 평생 다시 만나지 못한다고 하잖아요.”그녀는 잔잔한 호수를 바라보며 옅게 웃었다.“그런데 전 세상이 이렇게 좁을 줄은 몰랐네요. 몇 년이나 지난 뒤에 다시 만나게 될 줄도 몰랐고, 그 사람이 우진이 외삼촌일 줄은 더더욱 몰랐어요.”잠시 침묵하던 하이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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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65화

하정현은 아들의 얼굴을 가만히 살폈다. 기분이 좋아 보였다.며칠 전 함께 낚시를 왔을 때만 해도 하루 종일 썩은 표정만 짓고 있더니, 오늘은 분위기부터 달랐다.그때는 물고기가 안 잡힌 게 아니라, 저 표정에 겁먹고 다 도망간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정말 아무 일도 없어요.”하이석은 느긋하게 웃으며 대답했다.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여유와 기분 좋은 기색까지 묻어났다.하정현은 혀를 차며 킥 웃었다.“아무 일도 없다고? 그럼 아까 왜 그렇게 실실 웃었는데? 아주 봄바람 난 사람처럼 헤벌쭉해서는.”아버지 입에서 나오는 말은 이상하게 사람을 긁는 재주가 있었다.어머니와 툭하면 다투는 이유도 다 그 입 때문이라는 걸 새삼 실감했다.“그보다 네 엄마가 그러더라. 유란이 웨딩드레스 완성되면 슬슬 웨딩 촬영도 해야 하고, 가족사진도 몇 벌 찍어야 한다고.”하정현이 낚싯대를 고쳐 쥐며 말을 이었다.“그때쯤이면 추석도 다가오잖아. 유주만 선생님께도 미리 연락드리고, 도정숙 아주머니도 서울로 모셔 와. 오랜만에 다 같이 명절 보내면 좋지.”하이석은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근데 사진은 어떤 콘셉트가 좋을까? 양복도 입고, 한복도 입고?”“다 찍으면 되죠.”“그래, 그것도 좋네.”연신 고개를 끄덕이던 하정현이 슬그머니 아들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괜히 남들 들을까 봐 목소리까지 낮춘 채 속삭였다.“이석아.”“네.”“다리는 이제 완전히 괜찮은 거지?”“거의 다 나았어요.”전력 질주만 아니라면 일상생활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하정현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조심스레 본론을 꺼냈다.“근데 너희 둘은 왜 아직 소식이 없는 거냐? 저기 육진국 좀 봐라. 오늘도 손자 데리고 낚시 왔잖아. 우리 나이도 비슷한데, 저 집 손자는 벌써 낚싯대까지 잡고 다니는데 난 손주 머리카락 한 올도 못 봤다.”하이석이 무표정하게 아버지를 바라봤다.“그래서요?”“혹시 지난번 다리 다친 게…”하정현은 괜히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말을 돌렸다.“그… 다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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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66화

연우진과 하이석 사이에는 묘한 공기가 흘렀다. 겉으로 보기엔 영 죽이 맞지 않는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둘은 제법 잘 어울렸다.그날 이후 하이석은 굳이 방주헌에게 전화를 걸었다.“앞으로 애한테 이상한 거 좀 가르치지 마.”첫마디부터 핀잔이었다.“우진이한테 대체 뭘 가르친 거야? 삼촌이라는 사람이 그래도 돼?”방주헌은 코웃음을 쳤다.“난 걔 삼촌 아닌데? 촌수 따지면 민찬이랑 똑같이 나한테 이모부할아버지라고 불러야 하는 사이야.”“양심은 있고?”“애 부모도 가만히 있는데 왜 네가 나한테 따져?”그러더니 일부러 약을 올리듯 말을 이었다.“아, 알겠다. 미래 사위를 대신해서 장인어른이 나선 거구나. 우진이 입장에선 이런 장인어른을 두게 돼서 참 든든하겠네.”하이석은 이를 악물었다.“네가 곧 강씨 집안에 인사 드리러 가는 게 아니었다면, 체면이고 뭐고 얼굴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두들겨 팼을 거야.”그 말에 방주헌은 바로 꼬리를 내렸다. 순순히 잘못했다며 사과했고, 다시는 아이한테 이상한 것들을 가르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요즘 그의 머릿속은 일 말고는 온통 강씨 집안에 인사드리러 갈 준비뿐이었다. 그래서 육씨 집안에 들러 아이들과 놀아 줄 여유도 없었다.인사드리러 갈 날짜는 추석 이틀 전으로 정해졌다.그때 서은주와 육강민도 아이들을 데리고 회성으로 내려올 예정이었고, 추석 당일 다시 경성으로 돌아가기로 되어 있었다.강씨 집안 사람들은 하나같이 성격이 까다롭고 쉽게 마음을 열지 않는 사람들이었다.그래서 방주헌은 육강민부터 공략하기로 했다.인사드리러 가는 날 옆에서 한마디만 거들어 달라는 계산이었다.하지만 육강민은 아예 상대조차 해 주지 않았다.약혼이 끝나면 결혼도 머지않았다. 곧 방주헌을 작은이모부라고 불러야 할 처지라 육강민으로서는 썩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결국 방주헌은 타깃을 바꿨다. 육민찬과 육수린 남매를 불러 장난감과 간식을 잔뜩 안겨 주며 은밀히 말했다.“나 인사드리러 갈 때 삼촌 좋은 사람이라고 한마디씩만 해 줘. 그러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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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67화

온유란은 시어머니가 의상이나 액세서리에 이것저것 까다로운 요구를 할 줄 알았다. 그런데 의외로 현정민은 뭐든 온유란의 의견을 존중해 주며 편하게 맞춰 주었다.오히려 문제는 하정현과 유주만이었다.둘을 합치면 나이가 백 살도 훌쩍 넘는데, 메이크업 담당과 파운데이션 호수 이야기를 두고 진지하게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급기야 유주만은 메이크업 담당에게 조심스레 부탁했다.“주름 좀 어떻게 가려 줄 수 있을까요? 조금이라도 젊어 보였으면 해서요.”그러자 하정현이 곧장 끼어들었다.“유주만 선생님, 그건 메이크업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죠. 그 정도 주름이면 리프팅부터 하셔야 합니다.”리프팅? 그 말이 나오자 온유란조차 흠칫했다. 새삼 느끼지만 시아버지는 정말 모르는 게 없었다.유주만도 기가 막힌다는 듯 하정현을 흘겨봤다.“자네, 지금 날 놀리는 건가? 웃을 때 눈가 주름은 자네가 더 심하잖아. 모기 한 마리쯤은 거뜬히 끼어 죽겠더군.”순식간에 두 사람 사이에 팽팽한 신경전이 흘렀다.온유란은 속으로 걱정했다. 저 분위기로 과연 사진이 제대로 나올 수 있을까.그런데 막상 카메라 앞에 서자 둘 다 언제 그랬냐는 듯 활짝 웃었다. 누가 더 환하게 웃나 경쟁이라도 하는 사람들 같았다.오히려 도정숙이 문제였다. 평소 사진을 거의 찍지 않던 탓에 표정이 어색해 여러 번 다시 촬영해야 했다.촬영이 끝나자 하정현은 사진작가를 붙잡고 신신당부했다.“보정 잘 부탁합니다.”그러더니 자기 눈썹뼈 근처를 가리켰다.“특히 여기 흉터는 최대한 옅게 좀 해 주세요.”그 말을 들은 현정민은 어이가 없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자신도 별다른 요구는 안 했는데 저 사람은 웬만한 신부보다 자기 얼굴에 더 진심이었다.촬영을 마친 뒤 모두 함께 식사를 했다.식사 자리에서는 하정현의 젊은 시절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내가 젊었을 때 얼마나 잘생겼는지 알면 놀랄 거다. 안 그랬으면 지금 네 어머니 같은 사람을 어떻게 만났겠어?”온유란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솔직히 지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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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68화

온유란이 사진첩을 넘겨 보고 있을 때였다.하정현이 헛기침을 한번 했다.오늘은 가족사진도 찍고, 다 함께 식사까지 하며 술도 몇 잔 곁들인 덕분인지 기분이 한껏 올라 있었다.그리고 기분이 좋아지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일이 하나 있었다. 바로 아들의 흑역사를 폭로하는 것. 그건 하정현이 가장 자신 있는 분야였다.평소엔 어린놈이 어른보다 더 어른 같은 얼굴을 하고, 세상 다 산 사람처럼 굴었으니 이럴 때라도 한 방 먹여야 속이 시원했다.“유란아, 너는 모르지?”하정현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얘 유치원 다닐 때 말이야. 한 번은 작은 별 스티커를 못 받아 왔다고 집에 와서는 이불 뒤집어쓰고 혼자 삐쳐 있더라. 밥도 안 먹고. 아마 울기까지 했을걸?”하이석이 곧장 반박했다.“안 울었습니다.”기분이 상한 건 맞지만 운 적은 없었다.하정현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그리고 방주헌이 초등학생 때 얘 대신 부모님 사인을 위조해 준 적도 있었잖아?”하이석은 태연하게 대꾸했다.“돈을 너무 많이 준다고 해서요.”온유란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물었다.“도대체 얼마를 준다고 했는데요?”하정현이 코웃음을 쳤다.“결국 한 푼도 못 받았지. 들통 나는 바람에 방주헌은 부모님한테 죽도록 혼나고 용돈까지 전부 압수당했거든. 돈이 있어야 주지. 정말 창피한 녀석이었어.”온유란은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하고 피식 웃었다.하지만 하이석은 담담하게 말했다.“돈 버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온유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도 틀린 건 아니었다.그러자 하정현은 곧장 되물었다.“우리 집에 돈이 없었냐?”“돈은 있었죠. 하지만 학생이던 제게 넉넉한 용돈을 주신 적은 없잖아요.”하정현은 콧방귀를 뀌었다.“아들은 원래 좀 궁하게 키워야 하는 거야. 네가 딸이었으면 금덩이처럼 떠받들었을걸.”그는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우리 집도 그렇고, 육진국네도, 방주헌네도, 허경빈네도 죄다 아들만 낳았잖아. 딸 하나만 있었어도 어려서부터 사돈 맺자고 했을 텐데.”그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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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69화

“딸을 낳으면 걱정돼요.”하이석이 피식 웃었다.“언젠가 어떤 녀석한테 홀랑 데려가질 생각을 하면 벌써부터 속이 쓰려요.”육수린은 조카였지만, 그 아이를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들곤 했다.저렇게 예쁜 아이를 데려갈 사람이라니... 누가 와도 아까울 것 같았다.하물며 자기 딸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차라리 아들이 낫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그 말에 온유란은 웃음을 터뜨렸다. 이유가 너무 하이석다워서였다.하지만 몇 분 뒤, 그녀는 더 이상 웃을 수 없었다. 눈가에는 옅은 붉은 기운이 번졌고 숨결은 흐트러져 있었다. 그런데도 하이석은 끝까지 집요하게 물었다.“제가 그렇게 늙어 보여요?”온유란은 이를 살짝 깨물었다.“…안 늙었어요.”늙은 사람이 이렇게까지 체력이 좋을 리가.'정말 대단하네.'목끝까지 차오른 그 말은 결국 삼켰다.괜히 입 밖으로 꺼냈다가 또 무슨 말을 들을지 몰랐다.욕실 벽이며 거울에는 어느새 손자국이 여기저기 남아 있었다.두 사람은 욕실에서 시작해 침실까지 이어졌고, 모든 것이 끝난 뒤에야 하이석은 젖은 수건으로 그녀를 조심스레 닦아 주었다.그러면서도 여전히 아까 일을 잊지 못한 듯 중얼거렸다.“아까 제 얼굴이 늙지 않는 상이라고 했잖아요. 그 말은 결국 제가 열여덟 살 때도 늙어 보였다는 뜻 아니에요?”온유란은 말문이 막혔다. 아직도 그 얘기냐는 표정이었다.한숨을 삼킨 그녀가 힘없이 말했다.“안 늙었어요. 당신은 정말 어려 보여요.”“영혼이 하나도 안 담겼네요.”온유란은 머리가 지끈거렸다.몸을 돌려 등을 보인 채 더는 대꾸하지 않았다.연우진이 그랬다. 삼촌들 가운데 하이석이 제일 다루기 어렵고, 제일 달래기 힘들다고. 이제야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하이석은 작게 웃으며 얇은 여름 이불을 그녀에게 덮어 주었다.드러난 어깨에는 조금 전 남겨진 흔적이 희미하게 번져 있었다.이미 웨딩 촬영을 끝낸 게 얼마나 다행인지. 아니었다면 내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온유란에게 단단히 혼났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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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70화

강학용은 술잔을 쥔 채 강정한을 노려봤다. 민찬이와 육수린만 아니었어도, 조카 체면이고 뭐고 술을 얼굴에 끼얹었을 것이다.저 녀석은 사람 놀리는 데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모두의 시선이 강정한에게 쏠린 사이, 아무도 육민찬을 눈여겨보지 못했다.그 틈을 타 육민찬은 아버지 앞에 놓인 작은 술잔을 몰래 집어 들더니 체리주를 한 모금 홀짝였다.달콤하면서도 살짝 알싸한 것이, 의외로 꽤 맛있었다.육강민이 눈치챘을 때는 이미 늦었다. 육민찬은 볼이 발그레 달아오른 채 세상 신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영락없는 꼬마 술주정뱅이였다.술을 마신 지 삼십 분쯤 지나서야 아이는 몸이 이상하다며 칭얼거리기 시작했다.육강민은 차분히 아이를 달랬다.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육민찬이 갑자기 그의 품에 와락 토해 버린 것이다. 순식간에 육강민의 옷은 엉망이 되어버렸다.그는 머리가 지끈거렸다.평생 살면서 누군가에게 이렇게 토를 맞은 건 처음이었다.그는 그저 미간만 살짝 찌푸렸을 뿐인데, 육민찬은 금세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아빠, 미안해요.”“괜찮아.”“화났어요?”“안 났어.”육민찬은 눈을 깜빡이다가 불쑥 말했다.“그럼 노래 불러 줘요.”그러더니 아버지에게 바짝 다가와 킁킁 냄새를 맡았다.“아빠, 냄새 나요.”육강민은 당장이라도 엉덩이를 한 대 때려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서은주는 해장탕을 조금 준비해 두고, 육강민에게는 씻고 옷 갈아입고 오라고 했다. 그리고 자신은 육민찬을 안고 달랬다.아이는 머리가 아프다며 칭얼거렸고 서은주는 다정하게 관자놀이를 문질러 주었다.육민찬은 그녀의 품속으로 더 파고들며 웅얼거렸다.“엄마는 진짜 최고예요.”서은주가 웃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내가 네 엄마인데, 너한테 잘해 주지 누구한테 잘해 주겠어?”깨끗하게 씻고 옷까지 갈아입은 육강민이 아이를 보러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그대로 멈춰 섰다.육민찬은 만화 캐릭터가 그려진 사각 팬티만 입은 채, 불룩 나온 배를 내밀고 침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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