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파혼 후 시작된 그의 집착: Chapter 1081 - Chapter 1090

1137 Chapters

제1081화

방주헌은 또다시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슬쩍 떠보기 시작했다.“경빈아, 형한테 솔직히 말해 봐. 너, 송씨 집안 그 공주님이랑 대체 무슨 사이야?”정작 궁금한 이야기는 하나도 듣지 못했으니, 속이 답답해 견딜 수가 없었다.허경빈은 지난밤 꾸었던 낯 뜨거운 꿈이 떠오르자 갑자기 사레라도 들린 듯 거세게 기침했다. 순식간에 얼굴까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됐다, 안 물어볼게.”방주헌은 황도 통조림을 한입 떠먹으며 아무렇지 않게 화제를 돌렸다.“그나저나 어젯밤에 하채린 모녀랑 동씨 가문 사람들이 지구대에서 또 한바탕 붙을 뻔했다더라.”그는 목소리를 낮추더니, 어디서 들었는지 모를 이야기를 줄줄 늘어놓았다.“듣자 하니… 동 대표가 평소에도 여자관계가 꽤 문란했대. 얼마 전 외국으로 보내진 뒤에도 얌전히 지내지 못했다더라고. 게다가 그런 짓을 할 때 자기 기분만 생각해서 피임 기구를 쓰는 걸 싫어했다나 봐. 어쩌면 성병까지 옮았을지도 모른다던데. 하채린은 지구대가 떠나가라 울고불고 난리였대.”허경빈은 처음 듣는 이야기였지만, 조금도 동정심이 들지 않았다. 그저 자업자득이라는 생각뿐이었다.*허경빈은 크게 앓은 뒤 며칠 동안 침대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그동안 방주헌은 단체 채팅방에서 강희진과 함께 외국으로 크리스마스와 연말을 보내러 간다며 한껏 들떠 떠들어 댔다. 연주는 출산을 앞두고 병원에 입원했고, 육씨 집안 사람들은 곧 태어날 아기를 기다리며 모두 긴장과 설렘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하씨 집안 역시 온유란의 임신 소식을 아직 외부에 알리지는 않았지만, 집안 분위기는 더없이 기쁘고 화목했다.심지어 허경빈의 부모님마저 남쪽의 어느 도시로 휴가를 떠나겠다며 아들에게 함께 가자고 권했다. 그러나 허경빈은 단번에 거절했다.허씨 부부는 금실 좋기로 유명했다. 그런 두 사람을 따라가 봐야 허경빈은 눈치 없는 불청객이 될 게 뻔했다.기껏해야 쇼핑백과 여행 가방을 들어 주고, 계산할 때마다 카드를 내미는 역할이나 맡게 될 터였다.결국 그는 강정한
Read more

제1082화

하지만 하채린은 이 모든 것이 온유란의 계략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일부러 절 가지고 논 거예요. 제가 망신당하는 꼴을 보려고! 그 천박한 계집애가 대체 뭐라고!”분노에 찬 목소리가 병실 안에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동 대표도 분명 그 여자가 일부러 보낸 거예요. 그 인간이 온유란을 그렇게 좋아했으니, 시키는 대로 뭐든 했을 거라고요!”하채린의 눈빛은 음산하게 가라앉았고, 잔뜩 일그러진 표정에서는 광기마저 엿보였다.박윤희는 그런 딸을 바라보다가 지친 듯 입을 열었다.“네 오빠가 그러더라. 지금은 몸부터 잘 추스르라고. 조금만 지나면 우리를 외국으로 보내 줄 거래.”박윤희가 보기에 그것이야말로 현재로서는 최선의 해결책이었다. 두 사람은 이미 서울 사교계에서 온갖 추문에 휩싸여 평판이 바닥까지 떨어진 상태였다. 이제 무슨 낯으로 이곳에 남아 있겠는가.“엄마, 전 억울해서 못 참아요!”하채린이 이를 악물며 내뱉자 박윤희도 더는 참지 못하고 목소리를 높였다.“못 참아도 참아야지! 너도 생각해 봐. 그날 밤에는 상대가 누군지도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다면서, 어떻게 덜컥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어?”“그게 왜 내 잘못이에요? 엄마가 나한테 객실 카드키를 쥐여 주면서 기어코 올라가라고 하지 않았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거 아니에요!”결국 두 모녀는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며 거센 말다툼을 벌였다.분을 이기지 못한 박윤희는 그대로 병원을 떠나 버렸다. 아이를 지운 지 얼마 되지 않아 온몸이 쑤시고 아팠던 하채린은 병실에 홀로 남겨졌다. 그녀는 분노로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이 잘못했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주변 사람들이 작정하고 자신을 함정에 빠뜨렸다고 믿었다.그리고 그 모든 일을 꾸민 사람은…바로 온유란이었다.그러나 하채린에게는 온유란을 만날 기회조차 없었다.병원에서 지내는 동안, 온유란과 하이석이 이곳에 드나드는 이유가 육남혁의 아내인 연주의 출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
Read more

제1083화

병원 분만실 앞.서은주가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어린 딸을 제외한 육씨 집안 식구들이 거의 모두 모여 있었다. 딸아이는 아직 너무 어려 집에서 아주머니가 돌봐 주고 있었다.분만실 앞 복도에는 다른 산모의 보호자들도 초조한 얼굴로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서은주는 육강민의 곁으로 다가가 목소리를 낮추었다.“어떻게 됐어요?”육강민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갑자기 시작된 일이라 아직 잘 모르겠어. 형은 형수 곁에 있으려고 분만실에 들어갔고. 우진이는 많이 놀란 것 같아. 아까부터 계속 긴장하고 있더라고.”연우진은 박명숙의 품에 기댄 채 앉아 있었다. 박명숙은 겁에 질린 아이를 품 안에 꼭 끌어안고 연신 등을 쓸어 주었다.이 병원은 방음이 워낙 철저해 분만실 밖에서는 안쪽의 어떤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새해를 하루 앞둔 밤, 창밖에는 형형색색의 네온사인이 화려하게 반짝였다. 유리창을 통과한 빛이 복도 바닥에 얼룩진 색채를 드리웠지만,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얼굴에는 긴장한 기색만이 짙게 어려 있었다.방주헌과 강희진은 여행을 떠나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그다음으로 소식을 들은 허경빈이 누구보다 빠르게 병원으로 달려왔다.부모님은 여행을 떠났고, 혼자 집에 남은 허경빈은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초등학교 시절부터 알고 지낸 동창들과 음성 통화를 하고 있었다.어릴 적부터 함께 몰려다니며 놀던 오랜 친구들이었다.그리고 공교롭게도 모두 여자 친구 하나 없는 싱글이었다.“경빈이 형, 설 연휴에 시간 좀 내요. 우리 오랜만에 동창들끼리 한번 모이게.”육강민 무리에서는 늘 막내 취급을 받는 허경빈이었지만, 밖에서는 그를 형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누군가 모임 이야기를 꺼내자 채팅창이 순식간에 시끌벅적해졌다. 남자들끼리 만나 봐야 무슨 재미가 있겠느냐며 제대로 동창회를 열자는 이야기가 오가던 중, 허경빈에게 연주가 곧 출산할 것 같다는 연락이 들어왔다.그는 서둘러 통화를 끝낼 채비를 했다.“얘들아, 형수가 곧 아기를 낳는대. 나 병원에 가 봐야겠다. 나머
Read more

제1084화

“집에 식구들이 다 있으니 괜찮아요.”하이석은 그래도 자리를 지키겠다고 고집했다.처음에는 그들과 함께 복도에서 기다리던 다른 산모의 가족들도 하나둘 소식을 듣고 병원을 떠났다.밤이 깊어지자 한주미는 서은주에게 육민찬과 연우진을 데리고 먼저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그러나 두 아이 모두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으며 자리를 뜨려 하지 않았다.육민찬은 마치 자신이 형이라도 된 듯 연우진의 어깨를 토닥이며 의젓하게 말했다.“형, 걱정하지 마. 큰엄마는 분명 예쁘고 건강한 여동생을 낳을 거야. 수린이처럼 아주 예쁜 아이로.”육민찬은 소문난 동생 바보였다.그의 눈에는 세상 어느 여자아이도 자기 여동생인 육수린만큼 사랑스럽지 않았다.자정이 가까워지자 멀리 떨어진 광장에서 새해맞이 숫자 세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그곳에서는 수많은 인파가 모인 가운데 새해맞이 행사가 한창이었다. 마침내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지자 우렁찬 환호성이 밤하늘을 뒤흔들었고, 서울의 거리를 밝히던 네온사인도 일제히 붉은빛으로 물들었다.도시 전체가 새해를 맞이하는 기쁨으로 들썩였다.휴대전화 속 여러 단체 채팅방에도 새해를 축하하는 인사와 덕담이 쉴 새 없이 올라왔다.바로 그 순간, 굳게 닫혀 있던 분만실 문이 열렸다.간호사 한 명이 상체를 내밀며 환하게 웃었다.“축하드립니다. 산모와 아들 모두 건강해요. 먼저 기쁜 소식부터 알려 드리려고 나왔어요. 산모와 아기도 곧 나올 겁니다.”육남혁은 가슴속에서 소용돌이치던 감정을 애써 억누르며 낮게 말했다.“감사합니다.”그제야 복도에 모여 있던 모두가 긴 숨을 내쉬었다.“드디어… 드디어 태어났구나.”박명숙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곁에 있던 연우진을 품에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아이의 말랑한 뺨에 연달아 입을 맞추었다.“우리 우진이가 또 형이 됐네. 기쁘지?”하지만 연우진은 입술만 삐죽 내민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왜 그러니? 졸려서 그래? 아니면 배가 고픈 거야?”연우진은 박명숙을 빤히 올려다보다가 조심스레
Read more

제1085화

새벽 네 시가 넘자 병원은 깊은 정적에 잠겨 있었다. 병실 안에서도 숨소리조차 또렷이 들릴 만큼 고요했다.연위성이 소리 나지 않게 문을 밀고 들어오는 순간, 침대 곁에 엎드려 잠들어 있던 육남혁이 화들짝 눈을 떴다. 병실에는 서은주와 한주미도 남아 연주를 돌보고 있었다.연주는 깊이 잠들어 있었고, 갓 태어난 아기도 작은 침대 안에서 새근새근 단잠을 자고 있었다.“이제 퇴근한 거예요?”한주미가 잠긴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켰다.“배 안 고파요? 먹을 것 있는데 좀 줄까요?”“괜찮습니다. 배 안 고파요.”연위성은 조용히 침대 곁으로 다가가 동생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무사히 잠든 연주를 보는 순간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하지만 그는 방금 추운 바깥에서 들어온 참이었다. 온몸에 스민 냉기가 동생에게 전해질까 봐 손을 뻗지는 못했다.“방금 잠들었어요.”육남혁이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연위성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부터 동생을 깨울 생각은 없었다.그는 잠든 연주를 한참 바라보다가 갓 태어난 조카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동생이 아이를 낳아 엄마가 되었다는 사실이 낯설면서도 가슴 깊은 곳을 뭉클하게 했다.*다음 날.병원에서 근무하는 의료진 모두에게 육씨 집안에서 보낸 출산 답례품이 전달되었다. 병원에 입원한 환자와 보호자들 역시 빠짐없이 답례품을 받았다.육씨 집안에서는 기쁜 마음에 병원 전체에 일괄적으로 돌린 것뿐이었다. 누구에게는 주고 누구에게는 주지 말아야 할지 따로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당연히 하채린에게도 한 꾸러미가 전해졌다.하지만 그녀에게는 육씨 집안의 호의가 마치 자신의 불행을 비웃으며 행복을 과시하는 행동처럼 느껴졌다.병원 곳곳에서는 지난밤의 출산 이야기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재벌가에는 진정한 사랑이 없다고들 하잖아요. 그런데 어젯밤 아내가 출산할 때 육남혁 씨가 얼마나 긴장했는지 몰라요. 아기가 나왔는데도 제대로 보지도 않고 아내가 나오기만 기다렸다니까요. 그 정도면 진짜 사랑하는 거죠.”“시어머니도 그렇고 동서들도 정
Read more

제1086화

육남혁의 SNS 친구는 대부분 학교 동료와 제자들이었다. 게시물 아래에는 한결같이 출산을 축하하는 인사와 덕담이 줄지어 달렸다.그중 유일하게 아직 여행지에서 돌아오지 않은 방주헌만 엉뚱한 댓글을 남겼다.[저도 좋은 기운 받아 갑니다!]그러자 강정한이 곧바로 답글을 달았다.[무슨 기운을 받겠다는 거야?]그제야 방주헌은 움찔했다.허경빈도 놓치지 않고 끼어들었다.[강정한 형, 아무래도 주헌이가 단순히 연말 여행을 간 건 아닌 것 같아요. 아기 만들러 간 거 아닐까요?][허경빈, 너 이 자식! 절대 아니거든!]방주헌은 다급하게 부인했다.두 사람은 남의 출산 기념 게시물 아래에서 한참이나 티격태격했다. 정작 게시물의 주인인 육남혁만 어이없다는 듯 댓글을 바라보았다.방주헌과 강희진은 경성으로 돌아오자마자 병원부터 찾았다. 두 사람은 갓 태어난 아기를 위해 선물도 한 아름 준비해 왔다.마침 병실에는 온유란과 하이석도 와 있었다. 두 사람은 연우진과 함께 침대 곁에 모여, 곤히 잠든 아기를 조용히 들여다보는 중이었다.연우진은 원래도 제법 의젓한 아이였다. 초등학교에 들어간 뒤로는 더욱 철이 들어, 제법 듬직한 형의 모습을 보였다.하지만 방주헌은 남의 아픈 곳을 기막히게 찾아내 굳이 건드리는 재주가 있었다.“우진아, 결국 여동생이 아니었네?”연우진은 콧방귀를 뀌더니 두 팔을 가슴 앞에 단단히 모았다. 그러고는 화가 난 티를 팍팍 내며 몸을 돌려 방주헌을 외면했다.“유치하게 애 좀 놀리지 마요.”강희진은 이럴 때마다 방주헌이 정말 못마땅했다.“우리 우진이, 화났어?”방주헌이 아이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지만 연우진은 여전히 쳐다보지도 않았다.“알았어. 삼촌이 잘못했어. 맛있는 거 사 줄 테니까 화 풀면 안 될까?”“필요 없어요!”연우진은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괜찮아. 이번에는 여동생이 아니었지만, 유란이 이모 뱃속의 아기는 여자아이일 수도 있잖아.”순간 병실 안의 모든 사람이 말문을 잃었다.그날부터 하이석은 연우진이 틈만 나면 온
Read more

제1087화

연위성은 구기자차를 몇 모금 마셨다.그는 줄곧 유주만에게 치료받으며 몸을 돌봐 온 덕분에 상태가 상당히 좋아졌다. 하지만 영구적으로 손상된 부분만큼은 앞으로도 평생 안고 살아가야 했다.유주만은 그런 그에게 농담처럼 말하곤 했다.“예전처럼 완전히 회복되지는 못해도 임무를 수행하거나 결혼해서 아이를 갖는 데는 아무 문제 없어. 그러니 자네도 서둘러 짝을 찾아 봐. 내가 자네 결혼식에서 축배를 들 날만 기다리고 있으니.”그럴 때마다 연위성은 그저 조용히 웃고 말았다.하이준을 아직 법의 심판대에 세우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연애나 결혼을 생각할 여유가 있을 리 없었다.더구나 적지 않은 여자들이 온전하지 않은 그의 손가락을 보는 순간 기겁하며 거리를 두었다. 연애조차 쉽지 않은데, 결혼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연위성은 다시 고개를 숙이고 조카의 이름을 고민했다.그때 고요한 상담실 안에서 휴대전화의 진동음이 울렸다. 곧이어 윤나송이 전화를 받았다.“네, 아빠. 저 이번 설에는 너무 바빠서 정말 집에 못 갈 것 같아요. 일만 끝나면 꼭 내려갈게요.”“정말 거짓말 아니에요. 아빠랑 엄마는 몸 잘 챙기세요. 돈 아깝다고 아끼지만 말고요. 올해 건강검진 결과는 어땠어요? 혈압이랑 콜레스테롤 수치가 아직도 높아요?”통화를 끝낸 윤나송은 연위성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슬며시 웃었다.“왜 그렇게 봐요?”“설에 고향에 안 내려가요?”연위성이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그것도 모자라 부모님께 일이 바빠서 못 간다고 거짓말까지 하고?”이제 설까지 채 보름도 남지 않았다. 상담을 받으러 오던 환자들도 대부분 설 이후로 예약을 미룬 탓에, 윤나송은 요즘 한가하다 못해 여유가 넘칠 정도였다.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설 지나면 저도 스물여덟이에요.”“그래서요?”“부모님이 계속 연애하고 결혼하라고 재촉하시거든요. 설에 친척들 만나러 다니면 하나같이 남자를 소개해 주겠다고 하고요. 얼마나 귀찮은지 알아요?”“모르겠는데요.”윤나송은 할 말
Read more

제1088화

사실 그 이름은 정말 제비뽑기로 정한 것이었다.그 사실을 육남혁 부부가 알게 된다면 과연 무슨 표정을 지을지 알 수 없었다.두 사람이 의미심장하게 눈빛을 주고받는 모습은 연우진의 눈에도 고스란히 들어왔다. 아이는 단번에 무언가를 알아차린 듯하더니, 나중에 연위성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남몰래 물었다.“외삼촌, 아까 그 윤 선생님이 제 미래 외숙모예요?”연위성은 아이의 대담한 질문에 깜짝 놀랐다.“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나랑 그 사람은 아무 사이도 아니야.”“그런데 아까 두 분이 계속 눈빛을 주고받았잖아요.”“그건 그런 눈빛이 아니었어.”“그럼 눈으로 마음을 주고받은 거예요?”아이가 지나치게 조숙한 것도 골치 아픈 일이었다.어린아이의 말이라 누가 진지하게 받아들이겠느냐마는, 연위성은 연우진이 엉뚱한 말을 퍼뜨려 윤나송의 평판에 흠이라도 낼까 걱정되었다. 결국 장난감과 과자를 사 주며 아이의 입을 막으려 했다.그러나 연우진은 선물을 받아 들고도 의심스러운 눈으로 외삼촌을 바라보았다.“외삼촌, 지금 저를 매수하는 거예요?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니라면 왜 제 입을 막으려고 해요?”어린아이에게도 나름의 빈틈없는 궤변이 있었다.이미 연우진의 마음속에서 연위성은 아무리 해명해도 결백을 증명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설을 일주일가량 앞두고 연주는 집으로 돌아가 산후조리를 시작했다.이제 누나가 된 육수린은 거의 매일 육시안을 보러 왔다. 작은 장난감이나 온갖 물건을 들고 와 아기의 눈앞에서 흔들며 놀아 주곤 했다.설이 가까워질수록 경성에서도 귀성 행렬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강희진과 강정한이 회성으로 내려가는 날, 방주헌은 두 사람을 배웅하러 공항까지 따라갔다. 그는 강정한이 지켜보는 앞에서 마치 생이별이라도 하는 사람처럼 강희진을 붙잡고 애절한 이별극을 펼쳤다.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다시는 만나지 못할 사이인 줄 알았을 것이다.“자기랑 이렇게 오래 떨어져 있을 생각만 하면 가슴이 답답하고 심장은 두근거리고 온몸이 괴로워요. 나
Read more

제1089화

허진강도 나름대로 아들을 생각해 어렵게 마련한 자리였기에, 이번만큼은 거절을 받아 줄 생각이 없었다.허경빈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아버지, 이건 아들을 사지로 내모는 거나 마찬가지예요.”“그래서?”“이러다 정말 아들을 잃으실 수도 있다고요.”허진강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받아쳤다.“너 때문에 학교에 불려 가서 이 늙은 얼굴로 망신을 당했을 때부터, 차라리 너를 낳지 말았어야 했다고 생각했다.”방주헌 정도만 놓고 보면 그럭저럭 위안이 되었다. 하지만 육씨 집안 형제들과 하이석까지 아들과 비교하고 나면, 허진강은 가슴을 치며 세상의 불공평함을 한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똑같은 아들인데 남의 자식들은 어쩌면 하나같이 저토록 뛰어난지 모를 일이었다.자신과 아내의 유전자가 나쁜 것도 아니었다. 두 사람 모두 학창 시절에는 반에서 손꼽히는 우등생이었다. 그런데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은 성적도 평범한 데다, 시도 때도 없이 사고를 쳐 속을 뒤집어 놓았다.결국 허진강은 더는 협상의 여지가 없다는 듯 못을 박았다.“잔말 말고 반드시 가.”허경빈은 지난밤 꾸었던 낯 뜨거운 꿈이 떠오르자 송지아를 무슨 낯으로 만나야 할지 막막했다.그러다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경빈아, 너 왜 그러니? 얼굴이 갑자기 왜 이렇게 빨개졌어?”어머니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아무것도 아니에요. 난방이 너무 세서 좀 더운 것뿐이에요.”허진강이 코웃음을 쳤다.“그렇게 덥냐? 얼굴이 원숭이 엉덩이처럼 새빨갛구나.”*허경빈은 송씨 집안에 선물을 전하러 가는 일이 영 내키지 않았다.자신은 물론이고 들고 간 선물까지 문밖으로 내던져질 것만 같았다.그는 단체 채팅방에 사정을 털어놓으며 도움을 구했지만, 돌아온 것은 친구들의 비웃음뿐이었다.하이석은 심지어 이런 댓글까지 남겼다.[얼마 전에 삼촌이 나한테 연락해서 건장한 경호원 두 명만 빌려 달라고 하셨어. 대체 어디에 쓰려는 건지 몰랐는데, 이제야 알겠네. 네가 끝까지 송씨 집안에 안 가면 사람을 시켜서 묶어
Read more

제1090화

그렇다면 지금 송씨 집안에는 송지아와 저 남자, 단둘만 있었다는 뜻인가?허경빈도 바보는 아니었다. 이 상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리 없었다. 송지아의 부모가 두 사람만의 시간을 만들어 주려고 일부러 집을 비운 게 분명했다.하필이면 왜 이런 때 찾아왔을까.허경빈은 목소리를 낮추고 송지아에게 조금 다가가 멋쩍게 웃었다.“내가 아무래도 때를 잘못 맞춰 온 것 같네.”“이미 왔으니 차라도 한잔하고 가.”허경빈은 자신도 대체 무슨 생각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마치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그녀를 따라 거실로 들어갔다.그가 받아 든 것은 진피를 넣은 보이차였다. 찻물에서는 부드럽고 그윽한 향이 피어올랐고, 입안에 머무는 맛도 따뜻하고 깊었다.맞은편의 남자는 허경빈이 송씨 집안에 찾아온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눈치였다. 두 사람은 서로 아는 사이도 아니었기에 어색한 미소만 몇 번 주고받았다.허경빈은 차를 마시며 속으로 자신을 욕했다.분명 머리가 어떻게 된 게 틀림없었다.허경빈, 이 멍청한 자식아!잠시 후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선물도 전해 드렸으니 저는 먼저 가 보겠습니다.”그는 송지아를 바라보며 다정하게 물었다.“지아야, 설날에 시간 되면 같이 영화 보러 갈래?”“좋아요. 연락해요.”송지아가 웃으며 대답하자 남자의 얼굴에 기쁨이 고스란히 드러났다.허경빈은 슬며시 눈썹을 치켜올렸다.지아라고?자신이 알기로 송지아가 경성에 돌아온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런데 벌써 이름을 허물없이 부를 만큼 가까워진 건가?고작 영화 한 편을 함께 보기로 한 것뿐인데, 저렇게까지 좋아할 일인가?그 순간 허경빈은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자신은 송지아의 연락처조차 없었다.그런데 저 남자에게는 있었다.남자를 배웅하고 돌아온 송지아가 그제야 허경빈을 바라보았다.“그런데 갑자기 우리 집에는 왜 온 거야?”“선물 주러 왔다고 했잖아.”“그럼 다 줬으니까 이제 가.”허경빈은 황당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네가 차 마시고 가라고
Read more
PREV
1
...
107108109110111
...
114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