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파혼 후 시작된 그의 집착: Chapter 1091 - Chapter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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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91화

송씨 저택.연락처를 주고받은 뒤에야 허경빈은 자신이 들어온 방을 찬찬히 둘러보았다.그제야 이곳이 송지아의 침실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방은 따뜻한 색조로 꾸며져 있었고, 아늑하면서도 단정했다. 침대 머리맡에는 온 가족이 함께 찍은 사진이 놓여 있었다. 사진 속에는 부모와 오빠뿐 아니라 친가와 외가의 조부모까지 모두 모여 있었다.가운데에 선 송지아는 머리를 높이 묶고 붉은색 니트 원피스를 입은 채 눈부시게 웃고 있었다.방 안에는 화장대와 책상이 놓여 있었고, 책상 위와 책장에는 외국어로 된 책이 제법 많이 꽂혀 있었다.허경빈은 책상 앞 의자에 앉아 조금 전 추가한 송지아의 프로필을 눌렀다. 공개된 게시물을 하나씩 살펴보자 그녀가 경성으로 돌아온 뒤 어떻게 지냈는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새해 전야에는 직접 음식을 만들어 부모님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일주일 전에는 친구들과 스키장에 다녀왔다.며칠 전에는 오랜 동창들과 만나 식사를 했다.그 밖에도 소소한 일상의 흔적이 이어졌다.허경빈이 남의 일상을 엿보는 재미에 푹 빠져 있던 순간, 메시지 알림이 화면 위에 떠올랐다.아버지가 보낸 것이었다.[선물은 잘 전해 줬냐?]허경빈은 대답하지 않았다.그러자 한 시간쯤 뒤부터 허진강이 메시지를 쉴 새 없이 보내며 아들의 휴대전화를 폭격하기 시작했다.[경빈아, 아직 살아 있니? 아빠한테 답장 좀 해 다오.][설마 정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니지? 아빠한테는 네가 하나뿐인 외아들이란다. 네가 노후를 책임져 줄 거라는 기대는 애초에 없지만, 그래도 삼십 년 가까이 키웠으니 정이 들긴 했어.][우리 경빈이, 뭐라도 한마디 해 봐. 살아 있다는 것만 확인하자.]아버지의 호들갑에 머리가 지끈거린 허경빈은 결국 짤막하게 답장을 보냈다.[걱정 마세요. 아드님은 아직 멀쩡히 살아 있습니다.]답장은 곧바로 돌아왔다.[내가 뭐랬니. 송씨 집안이 그렇게 막무가내인 사람들은 아니라니까. 저녁에 집에 오면 뭐 먹을래? 아빠가 배달시켜 줄게.】배달 음식이라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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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92화

송지아의 아버지가 불만스럽게 말했다.“나도 그만 이야기하고 싶지. 그런데 우리 지아가 경성에 돌아오자마자 그 녀석은 왜 또 불쑥 나타난 거지?”그는 생각할수록 수상하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아무래도 그 녀석이 계속 우리 집 주변을 맴도는 것 같아. 떨쳐 내도 자꾸 따라붙는 귀신처럼 말이야.”마침 도우미가 잘 우러난 차를 가져와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그러면서 남몰래 송지아를 힐끗 바라보았다.귀신처럼 따라붙는다는 말이 틀리지는 않았다.그 녀석이 지금도 이 집 안에 숨어 있으니 말이다!집안의 도우미들은 모두 입을 꾹 다문 채 감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송씨 부부에게는 더더욱 사실을 알릴 수 없었다.아가씨가 이층에 남자를 숨겨 놓았다. 그것도 하필이면 허씨 집안의 도련님을!두 사람이 그 사실을 알게 된다면 이 집이 발칵 뒤집히고도 남을 터였다.송지아는 차를 마시며 어색한 웃음을 두어 번 흘렸다.아버지는 최근 몇 년 사이 경영 일선에서 서서히 물러났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옛일을 추억하며 같은 이야기를 되풀이하는 일이 부쩍 잦아졌다.특히 딸의 학창 시절을 이야기할 때면 언제나 허경빈이 빠지지 않았다.덕분에 허경빈은 최근 몇 년 동안 한 달에 한 번꼴로 송지아 아버지의 입에 오르내리며 두고두고 욕을 먹었다.그런 아버지와 허경빈을 어떻게 마주치게 하겠는가.송지아가 다급히 그를 자기 방에 숨긴 이유도 바로 그것이었다.“아빠, 엄마. 오늘 저녁에 무슨 만찬에 참석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언제 나가세요?”송지아는 보이차를 한 모금 마시며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그러자 어머니가 웃으며 대답했다.“안 가기로 했어. 네 아빠가 날씨가 너무 추워서 밖에 나가면 무릎이 아프대. 오늘 저녁은 그냥 집에 있을 거야.”송지아는 순간 멍해졌다.도우미들도 일제히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냈다.이제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이층에 숨어 있던 허경빈은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그러는 사이 휴대전화 배터리는 거의 바닥나고 있었다. 송지아의 방에 있는 충전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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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93화

방 안은 서로의 얼굴조차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어두웠다.하지만 허경빈은 자신의 손등 위로 쏟아지는 뜨거운 숨결만큼은 선명히 느낄 수 있었다. 때로는 얕고 가볍게, 때로는 조금 거칠게 흩어지는 숨은 다급할 만큼 불규칙했다.따뜻하고 부드러웠다.송지아의 몸에서는 은은한 차 향과 함께 희미한 단내가 풍겨 왔다.허경빈도 지금껏 살면서 먼저 품에 안겨 오는 여자를 적잖이 겪어 보았다. 하지만 오늘처럼 별다른 이유도 없이 심장이 갑자기 빠르게 뛰기 시작한 적은 없었다.송지아가 손을 뻗어 그의 소매를 살짝 잡아당겼다. 이제 그만 입을 막은 손을 내려 달라는 뜻이었다.“쉿.”허경빈이 아주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그의 뜨겁고 묵직한 숨결이 그녀의 뺨 위로 내려앉았다.허경빈의 손가락이 천천히 풀어지자 송지아는 그제야 겨우 숨을 돌렸다.그러나 두 사람의 몸은 여전히 지나치게 가까이 맞닿아 있었다.“조금 뒤로 물러나.”송지아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며 말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가슴은 아직도 두근두근 빠르게 뛰고 있었다.뺨에는 여전히 허경빈의 손바닥이 남긴 온기가 머물러 있는 것 같았다.뜨겁고 따스했다.허경빈은 순순히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정확히는 아주 작은 한 걸음이었다.기껏해야 손가락 한 마디만큼 멀어진 것에 불과했다.“조금 더 뒤로 가.”송지아가 다시 말하자 허경빈은 또 한 발짝 물러났다.그런 식으로 서너 번을 반복하고 나서야 두 사람 사이에 적당한 거리가 생겼다. 송지아도 그제야 한결 편하게 숨을 내쉬었다.“나는 언제 집에 갈 수 있는데?”허경빈이 목소리를 죽여 물었다.“미안해. 원래 부모님이 오늘 저녁에 외출할 예정이었는데 갑자기 안 나가시겠대. 아마… 저녁을 다 드시고, 드라마까지 본 다음에 족욕하고 방에 들어가셔야 널 내보낼 수 있을 것 같아.”“그럼 대체 몇 시야?”“아마 열 시 반쯤?”허경빈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송지아, 너 일부러 나를 골탕 먹이는 것 같은데.”“맹세하는데 정말 아니야.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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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94화

“조금만 더 기다려. 밖의 상황을 살펴보고 집에 보내 줄게.”송지아는 부모님이 방에 들어가 쉬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허경빈을 데리고 조심스레 아래층으로 내려갔다.두 사람의 모습은 영락없이 남의 집을 몰래 빠져나가는 도둑 같았다.도우미 한 명은 앞에서 망을 보고, 다른 한 명은 소리가 나지 않게 대문을 열어 주었다.허경빈은 송지아에게 이렇게 많은 공범이 있을 줄 몰랐다. 여러 사람이 합심해 자신을 몰래 빼돌리는 광경이 우습기까지 했다.그는 당연히 송지아가 직접 집까지 데려다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대문을 나서자마자 송지아는 그를 자기 집 경호원에게 떠넘겼다.“부탁드릴게요. 안전하게 집까지 데려다주세요.”허경빈이 미간을 찌푸렸다.“네가 데려다주는 거 아니었어?”“밖이 너무 춥잖아. 그리고 우리, 그렇게 친한 사이도 아니고.”그게 무슨 소리인가?친한 사이가 아니라고?조금 전까지 같은 방에 숨어 드라마를 보며 위기를 함께 넘겼으니, 이 정도면 전우애라도 생겨야 하는 것 아닌가.태도가 돌변하는 속도가 책장을 넘기는 것보다 빨랐다.송지아는 두꺼운 패딩을 여미며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귀찮은 짐을 간신히 처리했다는 듯 어서 가 버리라는 몸짓이었다.허경빈은 못내 언짢은 얼굴로 차에 올랐다. 출발한 뒤에도 분이 풀리지 않아 경호원에게 불평을 쏟아 냈다.“댁의 아가씨는 어떻게 사람한테 손바닥 뒤집듯 태도가 달라집니까? 나를 방에 혼자 남겨 놓고 갔을 때 얼마나 답답했는지 알아요?”그러자 경호원이 말없이 차량의 오디오를 켰다.잔잔한 피아노 선율이 차 안에 부드럽게 흘러나왔다.“갑자기 음악은 왜 틀어요?”허경빈이 눈살을 찌푸리자 경호원이 태연하게 대답했다.“클래식은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 도움이 됩니다. 말씀을 많이 하셔서 목도 마르실 텐데, 차 안에 생수가 있으니 드십시오.”허경빈은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그렇다고 오늘 일을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털어놓을 수도 없었다. 한밤중까지 여자 방에 숨어 있었다는 이야기가 퍼져 봐야 송지아에게 좋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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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95화

기분이 가라앉지 않은 허경빈은 복도에 멍하니 서 있었다.그러다 프라이빗 클럽의 중정에서 토끼 귀 머리띠를 쓴 채 눈장난을 하는 어린 여자아이를 발견했다.아이의 작은 두 손은 추위에 새빨갛게 얼어 있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눈을 뭉치며 신나게 놀고 있었다.무척이나 귀여운 아이였다.심지어…허경빈의 눈에는 어딘지 모르게 송지아와 닮아 보였다.그는 정신을 차리려는 듯 자신의 뺨을 툭툭 두드렸다.“허경빈, 너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왜 온통 그 여자 생각뿐이야! 정신 차려. 제발 정신 좀 차리자.”*방주헌이 허경빈을 찾아냈을 때, 그는 복도에서 네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와 가위바위보를 하고 있었다.“약속하는 거야. 내가 지면 사탕을 사 주고, 네가 지면 머리에 쓴 토끼 귀를 나한테 주는 거다.”아이는 사탕이 무척 먹고 싶었는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그런데 첫판부터 아이가 지고 말았다.아이는 금세 입술을 삐죽이며 울상을 지은 채 허경빈을 바라보았다.허경빈이 웃으며 제안했다.“그럼 삼세판으로 할까? 두 번 먼저 이기는 사람이 진짜 이기는 거야.”아이의 얼굴이 다시 밝아지며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두 번째 판에서는 아이가 이겼다.하지만 승부가 걸린 마지막 판에서 아이는 가위를 냈고, 허경빈의 주먹에 지고 말았다.결국 아이는 약속대로 토끼 귀 머리띠를 벗어 허경빈에게 내밀었다.그러자마자 서러움이 한꺼번에 터졌는지 “으앙!” 하고 울음을 터뜨리며 반대편으로 달려갔다. 아마 부모를 찾으러 가는 모양이었다.그 광경을 본 방주헌은 말문을 잃었다.미친 거 아니야?나는 네가 무슨 사고라도 쳤을까 봐 걱정하며 찾아다녔는데, 너는 여기서 어린애나 울리고 있었어?“주헌아? 너는 왜 나왔어?”허경빈은 토끼 귀 머리띠를 든 채 방주헌을 돌아보았다. 심지어 머리띠를 자기 머리 위에 대 보며 물었다.“어때? 잘 어울려?”방주헌은 어이가 없었다.이 자식, 정말 제정신인가?다 큰 남자가 어린 여자아이의 머리띠를 머리에 대고도 잘 어울리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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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96화

결국 허경빈은 송지아의 답장을 끝내 받지 못했다.*다음 날, 설 전날.허경빈이 짙은 다크서클을 달고 거실에 나타났을 때, 허진강은 고양이를 품에 안고 하랑이에게 새 옷을 입혀 주고 있었다.“우리 착한 아기, 예쁘기도 하지.”허진강은 하랑이를 연신 아기와 보물이라 부르며 눈이 가느다란 실처럼 휘어지도록 웃었다. 그러다 아들을 발견하는 순간 미간을 단단히 찌푸렸다.“경빈아, 너 어젯밤에 어디 가서 도둑질이라도 했니? 얼굴은 누렇게 뜨고 눈에는 초점도 없고, 온몸에서 죽을상이 흘러넘치잖아. 설을 맞는 사람 얼굴이 왜 그 모양이야?”“잠을 못 잤어요.”허경빈은 크게 하품했다.“직장 때문에 고민할 일도 없고, 연애 문제로 속 썩을 일은 더더욱 없는 녀석이 왜 잠을 못 자? 유난 떨기는.”집에 있어 봐야 구박만 받자 허경빈은 아예 밖으로 나가 여기저기 돌아다녔다.방씨 집안에는 별다른 재미가 없어 금세 나왔고, 하씨 집안에 도착했을 때는 온유란이 마당에서 따스한 겨울볕을 쬐고 있었다.한쪽에서는 유주만과 도정숙이 해바라기씨를 까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하이석은 그 곁에서 부지런히 차를 따르고 물을 채워 주었다.그런데 하정현 부부는…설 전날부터 옷차림을 두고 다투는 중이었다.허경빈을 발견한 하정현은 구원자라도 만난 듯 서둘러 그를 싸움 한가운데로 끌어들였다.“경빈아, 네가 한번 말해 봐라. 오늘 내 옷차림이 그렇게 별로냐? 내 아내는 자꾸 촌스럽고 못생겼다고 하잖아.”현정민 여사가 콧방귀를 뀌었다.“실제로 촌스러우니까 그렇죠. 경빈아, 이 사람 말은 무시하고 어서 집에 가렴.”“집에는 왜 보내? 경빈아, 네가 공정하게 판단해 봐. 내 옷이 정말 그렇게 이상하냐?”허경빈은 미칠 것만 같았다.어른들의 부부싸움에서 어느 편을 들어도 난처해질 것이 뻔했다. 그는 다급히 하이석에게 도움을 청하는 눈빛을 보냈다.하지만 하이석은 못 본 척 고개를 돌려 버렸다. 부모에게 이리저리 붙들린 허경빈이 곤욕을 치르든 말든 내버려 두었다.자신이 전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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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97화

육씨 집안 본가.설 전날 허경빈이 집에 찾아왔을 때부터 기분이 영 좋지 않아 보였다.서은주는 무슨 일이 있는지 내심 궁금했지만, 육강민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듣자 하니 섣달 스무여드레에 송씨 집안에 갔다가 밤늦게 돌아왔다더라. 아마 거기서 무슨 충격이라도 받은 모양이지.”“송씨 집안이 그렇게 무서운 곳이에요?”“신경 쓰지 마.”육강민은 서은주의 어깨를 감싸 안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겨울밤이 내려앉자 푸짐한 설 전날 저녁상이 식탁 위에 차려졌다. 온 가족은 따뜻한 불빛 아래 옹기종기 둘러앉았다.기분이 좋은 박명숙은 과실주를 조금 마셨다.“리치로 담근 술이라 도수가 높지 않단다. 은주 너도 조금 맛보렴.”출산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연주는 당연히 술을 마실 수 없었다.그때 육민찬이 노부인의 팔을 꼭 붙들고 졸랐다.“증조할머니, 저도 마셔 보고 싶어요.”리치로 담근 술이라니 분명 달콤할 것 같았다. 육민찬은 자기도 한 모금만 달라며 좀처럼 물러서지 않았다.결국 아이의 성화를 이기지 못한 박명숙은 젓가락 끝에 술을 살짝 묻혀 입가에 가져다주었다.육민찬은 입맛을 몇 번 다시더니 생각보다 매운 맛에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그러고는 제 몫으로 놓인 코코넛 우유를 붙잡고 연달아 몇 모금이나 들이켰다. 그 모습에 식탁에 둘러앉은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육진국이 연위성에게 술병을 들어 보였다.“위성, 자네도 오늘 한잔하지 그러나? 취하면 여기서 자고 가면 돼. 방도 준비해 두었어.”“내일 당직이라 술은 마시면 안 됩니다.”연위성이 웃으며 사양했다.다음 날 출근해야 한다는 말을 듣자 더는 술을 권하는 사람도 없었다.저녁 식사를 마친 뒤 어른들은 거실에 모여 설 특집 방송을 보았다. 아이들은 마당으로 뛰어나가 작은 불꽃놀이를 즐겼다.육수린은 손에 든 불꽃 막대를 신기한 듯 바라보며 연신 흔들었다. 서은주는 혹시 불똥에 다치지 않을까 아이들에게 조심하라고 거듭 당부했다.“은주야, 새해 복 많이 받아.”육강민은 서은주의 어깨를 감싸 안고 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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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98화

배달 오토바이가 멀어지고 나자 윤나송과 연위성만 덩그러니 남았다.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고, 차가운 겨울 공기 속으로 견디기 힘든 어색함이 흘렀다.연위성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으며 물었다.“배달 앱에 이름을 이규라고 등록해 둔 겁니까?”“여자 혼자 사니까 남자 이름을 써 두는 게 더 안전하잖아요.”연위성은 윤나송이 들고 있는 배달 봉투를 내려다보았다.“이게 설 전날 저녁이에요?”윤나송은 봉투를 든 채 민망해서 땅속으로라도 숨고 싶었다.“먹을 것을 좀 가져왔어요.”연위성이 육씨 집안에서 챙겨 온 음식들을 내밀었다.윤나송은 순간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홀로 남아 있는 명절 저녁, 자신을 떠올리고 음식을 챙겨 온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마음 한구석을 묘하게 건드렸다.그녀는 음식을 받아 들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먼저 권했다.“잠깐 올라갔다 갈래요?”“괜찮습니다.”“부담 갖지 말고 조금만 있다 가요.”*십여 분 뒤.윤나송은 데운 음식을 식탁에 펼쳐 놓고 먹었고, 연위성은 거실 소파에 앉아 설 특집 방송을 보고 있었다. 두 사람은 간간이 떠오르는 말을 주고받으며 조용한 명절 저녁을 함께 보냈다.“그런데 이 음식은 어디서 가져온 거예요?”윤나송은 한입 맛본 뒤 물었다. 아무리 봐도 호텔이나 식당에서 포장해 온 음식은 아니었다.“육씨 집안에서요.”“육씨 집안 사람들을 알기 전에는 다들 너무 높은 곳에 있어서 다가가기 어려운 사람들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막상 만나 보니 모두 좋은 분들이더라고요.”윤나송이 웃으며 말하자 연위성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육씨 집안 사람들은 모두 그에게 잘해 주었다.하지만 아무리 따뜻하게 대해 주어도 그곳은 결국 자신의 집이 아니었다.특히 명절이 다가오면 세상을 떠난 부모님이 더욱 선명하게 떠올랐다.부모는 자신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최근에는 잠들기만 하면 돌아가신 두 분이 꿈에 나타나곤 했다. 그럴 때마다 신경은 팽팽하게 곤두섰고, 마음은 좀처럼 편안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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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99화

설 전날 밤에는 대부분 늦게까지 잠들지 않았다.자정이 지나자마자 휴대전화의 온갖 단체 채팅방에 새해 인사가 쏟아지기 시작했고, SNS도 축하 게시물로 순식간에 도배되었다.허경빈은 부모님과 함께 새해를 맞을 때까지 깨어 있다가 방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 영화 예매 앱을 열었다.따로 사람을 시켜 알아본 결과, 설도윤이 어느 영화관의 오후 네 시 무렵 상영관을 예약했다는 사실은 확인했다.다만 정확히 어떤 영화를 볼 예정인지는 아직 알지 못했다.정말 치밀한 자식이었다.오후 네 시에 영화를 보면 끝날 무렵에는 마침 저녁 식사 시간이 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둘이 저녁까지 함께 먹을 수 있었다.자신이 보낸 경고 메시지의 뜻을 송지아는 알아보기나 했을까?생각할수록 짜증이 났다.그는 이불을 뒤집어쓰며 애써 생각을 떨쳐 냈다.됐어. 내가 왜 이렇게까지 신경 써야 하지?송지아의 일이 자신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미 충분히 경고했으니 할 만큼은 다 했다.그때 동창들이 모인 소규모 단체 채팅방에서 누군가 허경빈을 태그했다.[경빈이 형, 새해 복 많이 받아요.]허경빈도 짤막하게 새해 인사를 건넸다.그러자 상대가 곧바로 메시지를 보냈다.[정월 초엿새에 동창회 열기로 했어요. 장소도 다 정했고 초등학교와 중학교 동창 몇 명도 부르기로 했으니까 꼭 와야 해요.][안 가!]가뜩이나 심기가 불편한데 동창회에 참석할 마음이 있을 리 없었다.[전에 우리가 알아서 정하면 형은 언제든 괜찮다고 했잖아요. 이제 와서 말을 바꾸면 안 되죠.][나중에 봐서. 친척들께 인사하러 가야 할지도 몰라.]그의 문자에 다른 사람들은 잠시 할말을 잃었다.정말이지 입만 열면 말을 바꾸는 사람이었다.하지만 단체 채팅방의 동창들은 허경빈에게 대놓고 따질 만큼 편한 사이가 아니었다. 결국 아무도 더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허경빈은 한숨을 내쉬며 침대 위에서 이리저리 뒤척였다.지금까지 영화와 드라마를 숱하게 본 경험에 따르면 영화관은 어둡고 사람들의 시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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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00화

서은주는 딸에게 옷을 제대로 입혀 준 뒤, 가느다란 머리카락을 양 갈래로 예쁘게 묶어 주었다.단장을 마친 육민찬과 육수린은 손을 꼭 잡고 집 안 곳곳을 돌아다니며 새해 인사를 드리고 세뱃돈을 받기 시작했다.한편 연우진은 육남혁이 동생의 기저귀를 갈아 주는 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네가 한번 해 볼래?”육남혁이 아들을 바라보며 묻자 연우진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내가 동생 기저귀를 갈 때마다 계속 쳐다보기에 직접 해 보고 싶은 줄 알았는데.”“해 보고 싶기는 해요.”연우진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솔직히 털어놓았다.“그런데 동생이 응가했을 때는 냄새가 너무 심해요.”아이는 진지한 얼굴로 다시 물었다.“저는 하루에 한 번만 하는데, 동생은 왜 하루에도 그렇게 여러 번 응가해요?”육남혁은 말문이 막혔다.모르는 것이 생기면 적극적으로 질문하는 아들을 둔 것은 분명 자랑스러운 일이었다.하지만 하필 설날 아침부터 아들과 응가에 관해 진지하게 토론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그때 연주가 태연하게 한마디 던졌다.“넌 갓난아기였을 때 동생보다 더 자주 응가했어.”이번에는 연우진이 입을 다물었다.육남혁이 막내아들의 기저귀를 모두 갈아 준 순간, 마침 육민찬이 육수린의 손을 잡고 새해 인사를 하러 들어왔다.연주는 남편에게 미리 준비해 둔 세뱃돈 봉투를 아이들에게 건네주라는 눈짓을 보냈다.그런데 육민찬이 먼저 자기 세뱃돈 봉투 하나를 꺼내 육시안의 작은 손에 쥐여 주었다.“동생아, 새해 복 많이 받아.”그는 연주를 올려다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저, 동생한테 입 맞춰도 돼요?”“그럼.”허락을 받은 육민찬은 육시안의 말랑한 뺨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그 모습을 본 육수린도 곧바로 오빠를 따라 했다. 등에 멘 토끼 가방에서 세뱃돈 봉투를 꺼내 육시안에게 건네고는 조심스럽게 뺨을 맞댔다.집안의 막내인 육시안은 온 가족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었다.아침 식사를 마친 뒤 육강민과 서은주는 세 아이를 데리고 밖으로 놀러 나갔다. 육남혁 부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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