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파혼 후 시작된 그의 집착: Chapter 1141 - Chapter 1150

1329 Chapters

제1141화

강희진은 밤늦게까지 야근을 해야 했다. 방주헌은 그녀와 저녁 식사만 간단히 함께한 뒤 홀로 집으로 돌아왔다. 거리에는 밸런타인데이의 들뜬 열기가 아직 가시지 않았지만, 정작 그는 제대로 데이트조차 하지 못한 탓에 마음이 영 개운하지 않았다.찬 공기가 내려앉은 어두운 방 안에서 몇 번이나 몸을 뒤척여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그렇게 답답한 밤을 보내고 있는데, 갑자기 허경빈이 들이닥치더니 다짜고짜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주헌아, 사랑한다!”방주헌은 온몸에 소름이라도 돋은 듯 질색하며 그를 밀어냈다.“너 미쳤냐? 이 한밤중에 다 큰 남자 둘이 무슨 사랑 타령이야!”“가자. 내가 술 살게.”“안 가. 내일 아침에 출근해야 해.”“너한테 꼭 해 줄 얘기가 있어.”“난 듣기 싫어.”“그럼 오늘 여기서 너랑 같이 잘 거야.”방주헌은 어처구니가 없어 속으로 온갖 욕을 퍼부었다. 대체 어디서 무슨 자극을 받고 왔기에 저러는 걸까?나중에 자초지종을 들어 보니, 고작 송지아가 허경빈을 한 번 안아 준 것이 전부였다.방주헌은 코웃음을 치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겨우 한 번 안아 준 것 가지고 뭘 그렇게 세상을 다 얻은 사람처럼 굴어?”“송지아는 어릴 때부터 외국에서 살았잖아. 포옹이나 볼 키스 같은 건 걔한테 흔한 인사일 수도 있어. 네가 그렇게 큰 도움을 줬으니, 그저 고마운 마음을 표현한 걸지도 모르고.”그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허경빈의 들뜬 마음에 작정한 듯 찬물을 끼얹었다.“그 공주님은 쓰레기 같은 남자도 손바닥 위에서 갖고 놀 만큼 영리하고 예뻐. 외국에서 보고 겪은 것도 많고. 거기엔 금발에 파란 눈을 한 잘생긴 남자들도 널렸을 텐데, 걔가 초등학생 때 자기 머리채나 잡아당기던 말썽꾸러기를 좋아할 것 같아?”밸런타인데이를 제대로 보내지 못해 속이 상해 있던 방주헌은 괜히 허경빈에게 화풀이하듯 매정한 말만 골라 했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기쁨에 겨워 있던 허경빈은 어깨까지 축 늘어진 채 넋이 반쯤 나가서 방주헌의 집을 떠
Read more

제1142화

허경빈이 양손 가득 선물을 들고 송지아의 집에 도착했을 때, 어린 송민정은 마당에 쪼그려 앉아 강아지와 놀고 있었다. 저녁 햇살이 낮게 기운 마당에는 따스한 빛이 드리워져 있었고, 작은 포메라니안 유미는 허경빈을 발견하자마자 짧은 다리로 쪼르르 달려와 신이 난 듯 꼬리를 흔들었다.“삼촌, 오셨어요?”송민정도 그를 알아보고는 금세 얼굴 가득 환한 웃음을 피웠다.“응. 고모는?”“아직 퇴근 안 했어요. 우리 먼저 들어가요.”송민정은 허경빈의 손을 잡아끌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아이를 따라 거실에 발을 들인 허경빈은 그제야 오늘 모인 사람이 생각보다 훨씬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송지아의 부모님뿐 아니라 친할아버지와 친할머니,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까지 모두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심지어 송윤재 부부도 와 있었다.정작 이 자리에 없는 사람은 단 한 명, 송지아뿐이었다.“어서 앉거라.”송지아의 아버지가 자리를 권하자, 허경빈은 온 가족이 둥글게 모여 앉은 한가운데에 얌전히 자리를 잡았다. 사방에서 은근히 쏟아지는 시선을 받고 있자니, 평소의 여유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홀로 작고 초라해진 기분이었다.탁자 위에서는 찻물이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주전자에서 피어오른 흰 김을 따라 구수하면서도 묵직한 차향이 거실 안에 은은히 번졌다.송지아의 할아버지는 별것 아닌 청전차라며 맛이 어떤지 한번 보라고 했다. 허경빈은 송지아네 가족이 자신의 반응을 기다리는 것을 느끼며 조심스럽게 찻잔을 들었다.따뜻한 차가 입안으로 흘러들자 깊고 떫은 향이 혀끝을 스쳤다. 허경빈도 차의 좋고 나쁨 정도는 충분히 가려낼 줄 알았지만, 어른들 앞에서 섣불리 품평했다가는 괜히 아는 체하는 꼴이 될 것 같았다.한참 동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던 그는 결국 가장 무난한 감상만 내놓았다.“좋은 차네요!”거실 안에 잠시 묘한 정적이 감돌았다.그 지극히 단순한 품평에 송윤재마저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송지아의 어머니는 웃음을 머금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나는 주방에 가
Read more

제1143화

“할머니가 해 주신 버섯 요리, 정말 맛있어요.”허경빈의 바로 옆자리에 앉은 송민정이 눈을 반짝이며 그를 재촉했다. 따뜻한 김 사이로 짙고 구수한 버섯 향이 피어올라 식탁 위를 은은하게 감돌았다.“삼촌도 얼른 드셔 보세요.”허경빈은 아이를 향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젓가락으로 윤기 흐르는 버섯을 집어 조심스레 한입 맛본 순간, 맞은편에 앉아 있던 송윤재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그런데 버섯을 잘못 먹고 중독되면 눈앞에 조그만 사람들이 춤추는 모습이 보인대.”허경빈이 미처 삼키기도 전에 송윤재가 태연하게 말을 덧붙였다.“심하게 중독되면 목숨까지 위험할 수 있고.”허경빈의 젓가락이 허공에서 우뚝 멈췄다.“윤재야!”송지아의 어머니가 미간을 찌푸리며 아들을 나무랐다.“쓸데없는 소리로 사람 겁주지 마.”잠시 멎었던 식탁의 분위기는 이내 웃음 속에서 다시 부드럽게 풀렸다. 음식은 계속해서 오르고 술잔도 여러 차례 오가면서, 저녁 식사는 제법 늦은 시간까지 이어졌다.송윤재 역시 술을 마신 터라, 결국 송지아가 직접 허경빈을 집까지 데려다주게 되었다.밤공기는 차가웠지만 차 안에는 히터가 켜져 있어 공기가 후텁지근하고 답답했다. 따뜻한 바람이 밀폐된 차 안을 맴도는 데다 술기운까지 오르자, 허경빈은 온몸이 안에서부터 뜨겁게 달아오르는 듯했다.목 안은 바싹 말라붙었고, 가슴속에서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열기가 자꾸만 들끓었다. 그는 갑갑함을 견디지 못하고 손을 들어 셔츠 깃의 단추 두 개를 느슨하게 풀었다. 그러고는 차창을 내리며 서늘한 밤바람으로 몸과 마음의 열기를 식히려 했다.차가운 바람이 열린 창문 틈으로 밀려들어 그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가볍게 흔들었다.“창문 열지 마. 그러다 감기 걸려.”송지아는 곧바로 차창을 다시 올렸다. 운전대를 잡은 채 곁눈질로 조수석을 살핀 그녀의 눈에, 발갛게 달아오른 허경빈의 얼굴이 들어왔다.“많이 힘들어?”“응.”술기운에 잠긴 대답이 나직하게 흘러나왔다.“그러게 누가 오늘 그렇게 많이 마
Read more

제1144화

송지아는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춘 채 입술을 꼭 다물었다.눈앞의 남자는 조금씩, 그러나 망설임 없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칠흑처럼 깊은 그의 눈동자에는 그녀의 얼굴이 선명하게 비쳤다. 당황해 어쩔 줄 모르는 표정과 가늘게 떨리는 눈빛까지도 모조리 들킨 듯했다.고요한 차 안에서 송지아의 심장만이 제 박자를 잃고 빠르게 뛰었다.두 사람의 입술 사이에 남은 거리가 마침내 사라지려던 순간, 송지아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허경빈의 입술은 아슬아슬하게 그녀의 입가를 스친 뒤 부드러운 뺨 위에 내려앉았다.뜨거웠다.찰나에 불과한 접촉이었는데도 화상을 입은 듯 그 자리가 화끈거렸다. 맞닿았던 감촉이 사라진 뒤에도 뜨거운 열기만큼은 선명하게 피부에 남아 있었다.차 안은 순식간에 숨 막힐 듯 고요해졌다.서로의 숨소리는 물론이고, 걷잡을 수 없이 뛰는 심장 소리까지 들릴 것만 같았다.그때, 맑고 날카로운 휴대폰 벨소리가 적막을 깨뜨렸다.허경빈은 누군가에게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듯 화들짝 놀라 몸을 뒤로 물렸다. 송지아의 손목을 붙잡고 있던 손도 황급히 놓았다.그는 정신없이 휴대폰을 꺼냈다. 화면에 떠오른 이름은 아버지였다. 허진강은 아들이 오늘 송지아의 집에서 저녁을 먹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허경빈은 거칠어진 숨을 가다듬으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술 마셨냐?”“조금 마셨어요.”“술 마셨으면 절대 운전하지 말고 대리 불러.”“알아요. 이제 곧 집에 도착해요.”통화가 이어지는 사이 송지아는 아무 말 없이 다시 차에 시동을 걸었다. 고요한 엔진음과 함께 차가 천천히 도로 위로 나아갔다.허경빈이 전화를 끊은 뒤에도 누구 하나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방금 전의 일이 지워지지 않은 채 두 사람 사이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창밖의 가로등 불빛만이 유리창을 타고 흘러들어와 침묵에 잠긴 차 안을 느릿하게 스쳐 지나갔다.허경빈은 목이 바싹 말랐다.셔츠 깃을 풀어 헤쳤는데도 답답했고, 식지 않은 열기가 온몸을 달구고 있었다. 귓가에는
Read more

제1145화

송지아는 순간 멈칫했다.최상급 남전옥엽은 과거 1킬로그램당 2억 원이라는 가격에 낙찰되어 녹차 경매 사상 최고 기록을 갈아치운 적이 있었다. 물론 선물에 담긴 마음을 단순히 가격으로 가늠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 정도로 귀한 찻잎은 돈이 있어도 구하기 어려워, 시장에 나오기 무섭게 자취를 감추는 물건이었다.허경빈이 그것을 구하려 했다면 분명 여러 사람을 통해 수소문하고, 적잖은 시간과 정성을 들였을 터였다.“그만큼 우리 집에 인사하러 오는 걸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뜻이겠지.”송지아는 입술을 가만히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따뜻한 조명 아래, 새언니의 차분한 목소리만이 고요한 현관에 잔잔히 이어졌다.“나는 허경빈을 직접 만나기 전까지 네가 그 사람을 무척 싫어하는 줄 알았어. 가끔 초등학교 때 그 애한테 괴롭힘당한 이야기를 했었잖아. 그런데 오늘 우리 집에 온 모습을 보니까 처음에는 무척 조심스럽고 긴장한 눈치더라.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네 오빠가 처음 우리 집에 인사하러 왔던 날이 생각났어.”새언니는 오래전 기억을 떠올리며 희미하게 웃었다.“우리 부모님을 처음 만났을 때 네 오빠가 얼마나 긴장했던지, 앉아서 계속 두 손만 비비고 있었거든. 나중에 왜 그렇게까지 긴장했느냐고 물었더니, 우리 부모님이 자신을 어떻게 보실지 너무 신경 쓰였대. 그만큼 잘 보이고 싶었던 거지.”새언니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부드럽게 덧붙였다.“네 오빠 성격에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을 만나러 가면서 그렇게 공들여 선물을 고르지는 않았을 거야.”겨우 잦아들기 시작했던 송지아의 마음은 새언니의 말 몇 마디에 다시 어지럽게 흔들렸다.허경빈이 자신의 가족들에게 잘 보이려고 조심스레 행동했다는 것.돈만으로는 구하기 어려운 귀한 차를 선물로 준비했다는 것.그리고 차 안에서 자신에게 연애해 보지 않겠느냐고 물었던 순간까지.애써 밀어 두었던 기억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되살아났다. 현관 안은 따뜻했지만, 송지아의 손끝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긴장감이 맴돌았다.가슴속에서
Read more

제1146화

하지만 식사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허경빈은 하이석의 말이 단순한 농담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회색 옷을 입은 남자는 유독 송지아를 세심하게 챙겼다. 그녀 앞의 찻잔이 비면 자연스럽게 차를 따라 주었고, 대화가 잠시 끊길 때마다 관심사를 묻거나 새로운 화제를 꺼내며 말을 걸었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하이석은 상황을 훤히 알고 있는 사람답게 틈만 나면 허경빈에게 눈짓을 보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재촉하는 눈빛에는 하고 싶은 말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뭐 하고 있어? 얼른 나서! 이대로 꾸물거리다가는 정말 다른 사람에게 빼앗긴다고!’허경빈도 송지아와 지난밤의 일에 관해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녀가 별실을 나서자 잠시 망설이다 뒤따라가려 했다.그러나 회색 옷을 입은 남자가 그보다 한발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뒤늦게 송지아를 찾아 나선 허경빈은 복도 한편에서 그녀와 남자가 마주 서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발견했다. 그는 두 사람에게 들키지 않도록 걸음을 멈추고 복도 모퉁이의 벽에 몸을 기댔다.“정말 많이 달라졌네. 지난번에 만났을 때만 해도 아직 대학생이었는데, 어느새 이렇게 어엿한 숙녀가 됐어.”송지아는 별다른 대답 없이 그저 희미하게 웃었다. 따뜻한 조명 아래에서도 그녀의 표정은 차분하고 담담해 보였다.남자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곧장 본론을 꺼냈다.“혹시 좋아하는 사람 있어?”복도 모퉁이에 숨어 있던 허경빈의 몸이 순간 굳었다.그 자리에서는 송지아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그 질문을 듣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어느새 목구멍까지 치솟은 듯한 심장 소리가 상대에게도 들릴 것만 같았다.송지아도 어리석지 않았다. 자신을 대하는 남자의 태도와 방금 전의 질문만으로도 그가 평범하지 않은 감정을 품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알아챌 수 있었다.뒤이어 나온 말은 그녀의 짐작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시켜 주었다.“전에는 네가 설도윤과 사귀는 줄 알아서 계속
Read more

제1147화

“그럼… 내가 방금 한 말, 전부 들었어?”“응.”허경빈은 아무렇지 않은 듯 담담하게 대답했지만, 속에서는 기쁨이 걷잡을 수 없이 차오르고 있었다.송지아가 자신을 좋아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기대조차 하지 않았던 대답을 듣고 나니 가슴이 벅차올라, 애써 누르던 설렘이 금방이라도 얼굴에 드러날 듯했다.허경빈은 곧장 그녀의 앞으로 다가갔다.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잠시 고민하며 입술을 떼려던 순간, 송지아가 한발 먼저 입을 열었다.“아까 한 말은 그냥 그 사람을 단념시키려고 둘러댄 거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마.”허경빈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불과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는 머릿속으로 송지아와 결혼하는 모습까지 그려 보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날 아이들의 이름조차 벌써 몇 개나 떠올린 뒤였다.그런데 이제 와서 그 모든 말이 그저 상대를 속이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였다니.금세 천국까지 치솟았던 마음이 순식간에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송지아는 할 말을 마쳤다는 듯 그를 지나쳐 별실로 돌아가려 했다. 그러나 허경빈이 긴 다리를 내디뎌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그가 한 걸음 가까이 다가오자 송지아는 본능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허경빈이 다시 다가서면 그녀도 다시 뒤로 물러났다.희미한 조명이 내려앉은 복도에서 두 사람의 그림자가 가까워졌다가 길게 겹쳐졌다. 그렇게 몇 차례 같은 움직임이 반복된 끝에 송지아의 등이 서늘한 벽면에 닿았다.더는 물러설 곳이 없었다.그 순간의 허경빈은 평소와 전혀 달랐다.언제나 입가에 장난기 어린 미소를 달고 다니던 얼굴에는 웃음기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진지하게 굳은 표정으로 다가선 그는 피하지도 숨기지도 않은 채 송지아를 똑바로 바라보았다.그 시선은 지나치게 솔직하고 뜨거웠다.“방금 한 말이 전부 거짓말이었다고?”허경빈이 재차 확인하듯 물었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고요한 복도를 따라 울렸다.“일단 좀 비켜 봐. 여기는 언제든 사람이 지나갈 수 있잖아. 누가 보면 곤란
Read more

제1148화

송지아는 허경빈과 벽 사이에 꼼짝없이 갇혀 있었다.커다란 유리창 너머로는 차가운 밤바람이 세차게 몰아쳤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와 그 그림자가 희미한 조명이 내려앉은 복도 벽 위에서 어지럽게 일렁였다.허경빈이 자신을 좋아한다고 고백했을 때만 해도 송지아의 심장은 세차게 뛰었다. 이름 붙이기 어려운 묘한 감정이 가슴 깊은 곳에서 차올라 숨결마저 뜨겁고 가빠졌다.하지만 그의 말이 길어질수록 머리가 조금씩 지끈거리기 시작했다.이 남자에게는 정말 낭만적인 감각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모양이었다.진지하게 고백하던 중에 머리카락이 전부 뽑히면 무슨 모양의 가발을 사야 좋을지까지 고민하다니.송지아는 별실을 나온 지 이미 한참이나 지난 뒤였다. 오빠가 자신을 찾거나 걱정할지도 몰라 허경빈의 말을 끊으려던 순간, 그가 갑자기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미처 무슨 일인지 묻기도 전이었다.송지아의 몸이 앞으로 크게 기울더니, 순식간에 허경빈의 품 안으로 깊숙이 끌려 들어갔다.허경빈은 한 손으로 그녀의 뒷머리를 감싸 안고, 다른 한 팔은 허리 뒤로 단단히 둘렀다. 두 사람의 몸이 빈틈 하나 없이 밀착되면서 얇은 옷감 너머로 서로의 체온과 호흡까지 고스란히 전해졌다.“허경…”송지아의 심장이 놀랄 만큼 빠르게 뛰었다. 당황한 그녀가 그의 이름을 부르려던 순간, 허경빈이 나직하게 숨을 죽였다.“쉿.”곧이어 복도 저편에서 여러 사람의 발소리가 들려왔다.한두 사람이 아니었다.송지아는 온몸을 허경빈의 가슴에 기댄 채 꼼짝하지 못했다. 귀가 그의 가슴에 바짝 닿자 단단한 흉곽 너머로 울리는 심장 소리까지 선명하게 전해졌다.쿵, 쿵.느리고도 힘찬 박동이 귓전을 두드렸다. 맞닿은 몸을 타고 번지는 진동에 그녀의 심장도 덩달아 박자를 잃고 흔들렸다.“움직이지 말고 조용히 있어. 누가 오고 있어.”허경빈이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 댄 채 낮게 속삭였다.깊고 가라앉은 목소리와 함께 뜨거운 숨결이 귓바퀴를 가볍게 스쳤다. 가느다란 불꽃이 여린 살갗을 핥고
Read more

제1149화

“안은 거야?”허경빈은 그제야 송지아를 감싸고 있던 팔을 풀었다. 따뜻한 체온이 떨어져 나가자 두 사람 사이로 서늘한 공기가 스며들었다.그는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네가 누군가에게 들키면 곤란하다고 했잖아.”“원래는 아무 일도 아니었는데, 네가 그렇게 끌어안는 바람에 정말 무슨 사이처럼 보이게 됐잖아!”송지아는 이 남자가 정말 눈치가 없는 것인지,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유 삼촌이 나를 알아보기라도 했다면 우리 사이를 아무리 해명해도 아무도 믿지 않았을 거야. 너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 사람들이 오해하게 만들려고?”“일부러?”허경빈이 어이없다는 듯 자신을 가리켰다.“내가 그런 데까지 머리를 굴릴 수 있는 사람처럼 보여?”송지아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그 말이 이상하리만큼 설득력 있게 들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허경빈은 어색하게 헛기침을 한 뒤 다시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내가 너를 좋아한다고 말한 건, 무조건 나와 사귀라고 강요하려는 뜻이 아니야.”그는 송지아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네게 좋아하는 사람이 없다면 나한테도 한 번쯤 기회를 줘. 그러다 보면 어쩌면…”허경빈의 입가에 자신만만한 미소가 번졌다.“괜찮은 남자 친구 한 명을 얻게 될지도 모르잖아.”송지아는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가까스로 표정을 가다듬은 그녀는 가볍게 고개만 끄덕였다.“이제 나 별실로 돌아가도 돼?”“너 먼저 가. 나는 조금 있다가 들어갈게.”송지아는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인 뒤 먼저 복도를 떠났다.허경빈은 그 자리에 홀로 남아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송지아가 모퉁이 너머로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조금 전의 일을 처음부터 되짚어 보았다.생각할수록 자신의 고백이 형편없게 느껴졌다. 그는 짜증스러운 듯 머리카락을 거칠게 헝클었다.‘미치겠네. 허경빈, 넌 진짜 멍청한 놈이야. 그것도 세상에서 제일가는 멍청이. 고백하는 자리에서 머리카락을 전부 뽑아도 된다는 이야기는 대체 왜 한
Read more

제1150화

송윤재는 식사를 대접한 지 사흘 만에 아내와 딸, 작은 포메라니안 유미를 데리고 다시 남쪽으로 돌아갔다.다른 아이들은 이미 개학한 지 오래였고, 송민정도 이곳에 머무느라 학교에 빠진 날이 적지 않았다. 세 식구는 미처 제대로 작별 인사를 나눌 틈도 없이 서둘러 떠나야 했다.송민정은 결국 허경빈의 집에 찾아가 고양이 하랑이를 만나지 못했다. 떠난 뒤 허경빈에게 영상 통화를 걸어온 아이는 아쉬움을 참지 못하고 눈물까지 흘렸다.“삼촌, 하랑이 꼭 잘 돌봐 줘야 해요. 방학하면 제가 보러 갈게요.”송민정은 눈가를 붉힌 채 몇 번이나 당부했다.“맛있는 것도 많이 사 주고, 장난감도 꼭 사 줘야 해요.”화면 너머로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듯한 아이를 보고 있자니 허경빈도 마음이 아팠다.그는 지금 송지아의 마음을 얻으려는 중이었다. 그러니 자연스레 그녀뿐 아니라 송씨 집안 사람 모두에게 잘 보이고 싶었다.허경빈은 송민정이 고양이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남쪽에 사는 친구에게 부탁해 털빛이 곱고 예쁜 랙돌 고양이 한 마리를 구했다. 그리고 친구가 직접 송윤재의 집까지 데려다주도록 세심하게 준비했다.이 정도면 송민정도 기뻐하고, 송씨 집안 사람들에게도 좋은 인상을 남길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송지아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네가 민정이한테 고양이를 사 줬어?”“너한테까지 벌써 소문이 났어?”허경빈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송씨 집안 사람들이 분명 자신이 얼마나 세심하고 다정한지 이야기하며 칭찬하고 있을 것 같았다.“오빠가 직접 전화해서 알려 줬어.”“일부러 전화해서 나 칭찬했어?”“민정이가 어릴 때부터 온갖 동물을 좋아했잖아. 그런데 우리 가족이 강아지는 키우게 해 주면서도 고양이만큼은 계속 안 된다고 한 이유가 뭔지 알아?”“왜?”허경빈은 그 문제에 관해서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우리 오빠가 고양이 털 알레르기가 있거든.”송지아는 잠시 숨을 고른 뒤 말을 이었다.“지금 병원에 갔어.”허경빈의
Read more
PREV
1
...
113114115116117
...
133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