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파혼 후 시작된 그의 집착: Chapter 691 - Chapter 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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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1화

육남혁은 칫솔을 들고 한참을 망설였다.연주가 단호하게 이별을 통보하던 말이 아직도 귓가를 맴돌았다.어젯밤 그녀의 “사랑하지 않는다”는 한마디가 가슴을 후벼 팠다.이제는 과거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더는 집착하면 안 된다고 스스로를 다잡았다.진심을 짓밟히면서까지 매달릴 필요는 없다.그런데도 육강민의 말이 자꾸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결국 그는 알 수 없는 충동에 이끌려 칫솔과 자신의 머리카락을 봉투에 넣어 검사센터로 보냈다.“급하신가요?” 직원이 물었다.“아니요.”“그럼, 열흘 뒤에 결과 찾으러 오시면 됩니다.”결제를 마치고 검사센터를 나서자, 평소보다 훨씬 매서운 바람이 얼굴을 파고들었다.거리에는 신년 분위기가 짙게 깔렸고, 길가 가게들은 이미 단장을 마친 상태였다.육남혁은 알고 있었다.결과가 나오게 되면 연주와의 관계도 결론이 날 것이다.하룻빨리 알고 싶으면서도, 그 아이가 정말 자신과 아무 상관 없을까 봐 두렵기도 했다.그래서 일부러 급하지 않다고 했던 것이다.열흘 뒤면, 설 전에는 결과를 알 수 있었다.*신년을 앞두고 내린 큰 눈은 온 세상을 하얗게 뒤덮어, 모든 걸 삼켜버릴 듯했다.육남혁은 동생의 전화를 받고 본가로 향했다.“무슨 일 있어?”“이모가 내일 회성으로 돌아가셔서, 오늘 우리 집에서 저녁 드시기로 했어.”육남혁이 도착했을 때, 예상 밖의 얼굴, 방주헌도 와 있었다.마당에서 육민찬과 함께 눈사람을 만들고 있었는데, 육민찬은 꺄르르 자지러지다가 육남혁을 발견하고는 얌전히 인사했다.“큰아빠 안녕하세요!”옆에 꼬리를 흔들며 앉아 있는 행복이는 마치 충직한 경호원같았다.“큰아빠!”빨간 솜옷에 빨간 모자를 쓴 육수린이 종종걸음으로 달려왔다.육남혁은 몸을 숙여 아이를 번쩍 안아 올렸다.육씨 집안은 형제 둘뿐이라 박명숙은 오래전부터 손녀를 무척 바랐다.이제는 증손녀가 생기니 그야말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존재였다.그만큼 육수린은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존재였다.마당에는 육강민도 나와 있었다.두 형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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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2화

육민찬은 금세 풀이 죽었다.“남혁아!”한주미가 미간을 찌푸렸다.“애한테 그런 말을 왜 해. 그 입 좀 어떻게 못 하니, 진짜.”육남혁은 그제야 조용히 입을 닫았다. 한주미는 헛기침을 한 번 하고 말을 이었다.“어릴 때 우리 집에 자주 놀러 오던 장씨 이모 기억나지?”“네.”“그분 조카딸이 스물일곱인데, 외국에 있다가 이번에 설 쇠러 들어왔대. 그래서 집에 한 번 부르려고 하는데, 겸사겸사 한 번 만나봐.”말끝에 한숨이 묻어났다.“그냥 친구 하나 사귄다고 생각하면 되잖아?”아들 혼사 문제로 한주미는 속을 꽤나 썩이고 있었다.“형, 그냥 한번 만나봐요. 당장 결혼하라는 것도 아니잖아요.”방주헌도 옆에서 거들었다.남 일이라 쉽게 말하는 것이다.육남혁이 뭐라 하기도 전에 한주미가 못을 박았다.“그렇게 정한 거다. 내일 꼭 들어와.”방주헌은 자꾸만 터져 나오는 웃음을 겨우 참았다.육남혁이 맞선이라니, 구경 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강희진이 내일 떠나는 날이라 그럴 기분은 아니었다.육씨 가문을 나선 방주헌은 곧장 강희진의 집으로 향했다.각자 씻고 나온 뒤, 강희진은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고 있었다.물기가 가신 듯해 드라이기를 잡으려는 순간, 허리를 잡혀 그대로 끌려갔다.그렇게 강희진은 방주헌의 무릎 위에 앉았다.“그만 말리죠.”방주헌이 그녀 손에 있던 수건을 빼앗아 한쪽에 던졌다.갑작스럽게 그의 품에 안긴 강희진은, 잠깐 멍해 있다가 이내 몸을 굳혔다.…언제부터 목소리가 저렇게 잠겼지?방주헌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내렸다.강희진은 달라진 그의 호흡과 긴장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방주헌은 이미 한계에 가까워지고 있었다.강희진이 작게 말했다.“나 생리 중이에요.”방주헌은 잠시 멈칫했다.“그냥… 입 맞추고 싶어요.”그의 목소리는 어느새 낮게 갈라져 있었다.그녀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고는 귓가를 지분거렸다.겉보기에 제멋대로인 사람 같아도, 방주헌은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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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3화

연우진이 가출했을 때, 육강민 부부가 많은 도움을 줬다.이후 연우진이 육씨 가문에 드나들며 먹고 놀고 장난감까지 받아 올 때마다 연주는 늘 마음이 편치 않았다.육민찬의 과외를 맡겠다고 약속했지만, 바빠지다 보니 아이 공부를 챙길 여유도 없었다.무엇보다 육남혁을 마주칠까 봐 꺼려졌다.그런데 그녀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육강민이 아무렇지 않은 척 한마디를 던졌다.“이제 곧 설인데도 형은 자꾸 집에 들어오지 않아서 어르신들께서 서운해하세요. 우진이가 오면 어른들도 기분 좋아하실 거예요.”마치 형은 집에 없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연주는 결국 수락했고, 오후에 육씨 가문에 가기로 했다. 서은주는 애초에 육강민이 갑자기 연주를 초대한 것부터가 이상했다.거기다 일부러 형 얘기까지 꺼낸 게 더 수상했다.공항에서 본가로 돌아오는 길, 서은주가 그를 훑어봤다.“갑자기 왜 연주 선생님을 집에 초대한 거예요?”“갑작스러웠나?”육강민이 웃었다.“민찬이가 우진이를 계속 찾는다며.”“그럼 왜 굳이 아주버님이 집에 없다는 얘기를 했어요?”“내가 그랬나?”“연주 선생님이랑 아주버님, 무슨 사이예요?”예전에 육남혁이 연우진을 집에 데려왔을 때부터, 서은주는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다.하지만 그녀 입장에서, 육남혁 일을 대놓고 묻기도 애매했다.“맞혀봐.”육강민이 일부러 장난스럽게 말했다.서은주는 미간을 찌푸렸다.“두 사람 만나는 중이에요?”“아니.”“그럼, 무슨 관계인데요?”“같이 살았어.”“잤어요?”“같이 살았으면 당연히 잤겠지. 한집에 살면서 한 이불 덮고 얘기만 했겠어?”육강민의 지나친 직설에 서은주는 할 말을 잃었다.“오늘 오후에 아주버님 선 보는 날인 거 알죠? 그런데도 연주 선생님 부르는 건, 일 만들겠다는 거잖아요.”서은주는 어이가 없었다.“맞아, 일부러 그런 거야.”육강민은 단순히 연주가 정말로 형에게 아무 감정이 없는지, 확인하고 싶었다.그가 보기엔, 형은 아직도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만약 연주도 같은 마음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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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4화

두 사람이 막 마당으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차 한 대가 육씨 저택 안으로 들어왔다.육씨 가문 차량이었지만, 차에서 내린 사람은 가족이 아니었다.연우진이 먼저 뒷좌석에서 폴짝 뛰어내렸다.파란 패딩에 같은 계열의 니트 모자를 쓰고 있어, 사랑스러움 그 자체였다.육남혁을 보자마자 반가워 달려가려던 연우진이 중간에 멈춰 섰다.곁에 모르는 예쁜 아가씨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뒤돌아보니, 막 차에서 내린 엄마, 연주가 보였다.차 옆에 선 연주는 그대로 굳어버렸다.운전기사가 트렁크에서 준비해 온 선물을 꺼내주고 있었다.육강민의 초대로 오긴 했지만, 그녀 나름의 생각이 있었다.하지만 육남혁이 집에 있을 줄은 몰랐고, 이런 장면을 마주하게 될 줄은 더더욱 예상하지 못했다.놀란 건 그녀뿐 아니라, 육남혁도 마찬가지였다.서로 스쳐 지나며, 두 사람은 예의상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연우진도 얌전히 “안녕하세요, 아저씨.” 하고 인사했다.무언가 말을 하려는 것 같은 눈치였지만,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고개를 떨궜다.기분이 잔뜩 가라앉은 얼굴이었다.“저분들은 누구세요?”육남혁 옆에 있던 여자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물었다.“민찬이 과외 선생님입니다.”연주는 손에 들고 있던 선물 봉투를 꽉 쥐었다.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그래! 육남혁은 더 좋은 사람을 만나야 한다!그가 계속해서 자신만 기다리는 건, 부질없는 짓이다!집 안에 들어선 연주는 이미 억지스러운 미소를 장착한 상태였다.하지만 가슴은 바늘로 찌르듯 쿡쿡 쑤셔왔고, 숨 쉬는 것조차 버겁게 느껴졌다.연우진은 그런 엄마를 가만히 살폈다.어른들 사이의 일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육남혁은 분명 좋은 사람이었다.그래서 예전에 “아저씨가 내 아빠 하면 안 돼요?” 하고 물어본 적도 있었지만, 연주는 단호하게 그런 얘기 다시는 꺼내지 말라고 했다.“그럼, 그냥 아저씨 집에 놀러 가는 건요?”“바쁜 분이셔. 괜히 힘들게 하면 안 돼.”영특한 아이였기에, 그 말의 의미를 충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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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5화

육남혁은 형언하기 힘든 씁쓸함을 삼켰다.둔탁하게 짓눌리는 통증이 가슴 깊숙이 번졌다.먼저 마음을 준 건 연주였다.하지만 결국 헤어나오지 못할 만큼 깊이 빠진 건, 그 자신이었다.연주는 그보다도 냉정했다.연주가 시간을 낼 수 없다고 하자, 한주미도 더 이상 억지로 민찬이 과외를 부탁할 수는 없었다.대신 시간 나면 아이와 자주 놀러 오라고 말했고, 연주는 떠나기 전, 준비해 온 선물을 육씨 사람들에게 하나하나 나눠주었다.그리고 육남혁에게도 건넸다.“이건 교수님 거예요.”‘교수님’, 지극히 예의 바르지만, 그만큼 거리감이 느껴지는 호칭이었다.“고마워요.”“행복하시길 바래요.”그 한마디가, 가슴을 깊게 후벼 팠다.육남혁은 선물을 쥔 채 씁쓸하게 웃었다.그녀 없이 행복을 논할 수는 없었다.자신은 그녀를 마음에 깊이 품고 있는데, 그녀는 그의 마음을 짓밟고 떠나려 한다. 기다린 세월이, 결국은 혼자만의 착각이었던 셈이다.떠나기 전, 연우진은 머뭇거리다가 육남혁에게 다가왔다.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걸, 어린아이도 느끼고 있었다.“아저씨… 안녕히 계세요.”“그래, 잘 가.”육남혁은 아이의 모자를 가지런히 고쳐주었다.“아저씨 안아봐도 돼요?”육남혁은 잠시 멈칫하다가, 몸을 숙여 아이를 가볍게 안아주었다.작은 팔이 조심스럽게 그의 목을 감쌌다.“아저씨, 저 사실 아저씨 좋아요.”“나도 너 좋아.”연주는 시선을 돌렸다.눈꼬리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서은주도 묘한 감정을 느꼈다.차에 오른 연우진은, 평소의 쿨한 모습과는 달리 고개를 떨군 채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그 모습을 본 연주는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 눈물이 앞을 막았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눈물을 훔치고 백미러를 보니, 육씨 저택은 점점 멀어지다가 끝내 시야에서 사라졌다.그제야 억지로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우진아, 뭐 먹고 싶어? 오늘 엄마가 맛있는 거 해줄까?”“엄마…”눈이 빨개진 아이가 되물었다.“우리… 이제 아저씨 못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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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6화

“바람 쐬러 가는 거야?”육남혁은 고개를 끄덕였다.*육남혁은 비행기를 타고 연주의 고향으로 향했다.두 사람이 처음 만난 곳.어쩌면 이 관계도, 여기서 끝을 맺어야 할지도 몰랐다.연주가 살던 곳에는 공항이 없어, 비행기에서 내린 뒤 한 번 더 차를 갈아타야 했다.목적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질녘이었다.버스 창밖으로 흘러가는 풍경이 뒤로 밀려날수록 목적지가 가까워지고 있다는 걸 말없이 일깨웠다. 겨울이 내린 이곳은 적막했고, 찬바람은 쓸쓸하게 불어왔다.연주와 헤어진 뒤로, 이곳에 온 적이 없었지만, 이곳의 나무와 풀, 모든 것이 몸 깊숙이 새겨진 듯 익숙하게 느껴졌다.연주의 집은 낡은 아파트 단지에 있었다.계단 몇 개만 오르면 202호였다.그런데 문에는 봉인 딱지가 붙어 있었다.육남혁은 순간 멈칫했다.그때 위층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추위를 탓하며 내려오던 노부부가 그를 보고 걸음을 멈췄다.마스크를 쓰고 있어 얼굴이 잘 보이지 않자, 두 사람의 시선은 점점 더 수상하게 변했다.“혹시 연씨네를 찾는가?”할아버지가 먼저 입을 열었다.육남혁은 고개를 끄덕였다.어르신은 이상한 눈빛으로 그를 한 번 더 훑어보더니, 아내의 손을 잡고 서둘러 내려갔다.육남혁은 단지 과거와 작별을 고하려고 온 것뿐이었다.하지만 그들의 반응이 마음에 걸려, 그냥 떠나지 못하고 건물 아래에서 담배를 한 대 꺼내 물었다.장을 보러 나갔던 노부부는 조금 지나 장바구니를 들고 돌아왔다.그가 아직도 있는 걸 보고 서로 눈치를 주고받더니, 할아버지가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혹시 친척은 아니지?”“네. 친구입니다. 오랜 시간 연락이 끊겼다가, 출장길에 근처를 지나게 돼서… 곧 설이라 인사라도 드리려고 왔는데…”육남혁은 마스크를 벗었다.멀끔한 인상에 옷차림도 단정해, 아무리 봐도 수상한 사람은 아니었다.그제야 노인은 한숨을 내쉬었다.“문에 붙은 봉인 못 봤어? 지금은 아무도 안 살아.”“그럼… 지금은 어디에 계십니까?”“정말 모르는 모양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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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7화

육남혁은 매서운 바람 속에 한참을 서 있었다.연주가 이별을 꺼낸 건, 설 연휴가 지난 뒤였다.그 말은, 그때 이미 연주네 집에 일이 터진 뒤였다는 뜻이었다.그런데도 그녀는, 단 한마디도 그에게 털어놓지 않았다.그 시간들을, 그녀가 어떻게 버텨냈는지, 육남혁은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었다.조금 전 노부부에게 연주 부모님을 모신 곳을 물어본 그는 꽃을 사 들고 찾아갔다.어느새 날은 어두워졌고, 하늘에서는 잔설만 흩날리고 있어 고요하고 쓸쓸했다.한참을 헤맨 끝에야 묘비를 찾았다.그 앞에는 이미 시들어버린 꽃이 놓여 있었다.아마 연주가 다녀간 듯했다.그가 이곳에 온 이유는, 과거와 작별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서였다.하지만 지금 그의 마음은 허공에 흩날리는 눈송이처럼 갈피를 잡을 수 없이 어지러웠다.그녀가 너무 가여웠다.기억 속의 연주는 화목한 가정에서 자란 밝은 아이였다.그런 그녀가 사고 이후 타국에서의 그 시간을 혼자 어떻게 버텼을지 도무지 상상되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숙여 안경을 벗고, 눈발이 내려앉은 렌즈를 닦았다.씁쓸하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다시 투명해진 렌즈처럼 그의 마음도 순간 또렷해졌다.연주에게 거절당한 뒤로는 늘 흐릿하고 방황하는 기분이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더 분명해졌다.자신은 평생 그녀를 놓지 못할 거라는 걸 이제야 확실히 알았다.*육남혁이 경성으로 돌아왔을 때는 십이월 이십구일이었다.내일이면 새해.육씨 가문 마당에는 새해를 맞아 알록달록 장식이 되어 있었고, 선물을 들고 오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아 집안은 몹시 분주했다.“뭐야? 어디 다녀오더니, 얼굴이 더 안 좋은데?”육강민이 형을 살폈다.“연주 가족에 대해 너도 조사했었지?”육강민은 잠시 멈칫했다.“뭐?”“부모님.”“부모님은… 사고로 돌아가신 거 아니었어?”육남혁은 고개를 저었다.육강민은 미간을 꾹 눌렀다.이건 육지성의에게 부탁해 알아본 일이었다.그런데 손리정이 임신한 뒤로, 그의 일 처리 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졌다.임신하면 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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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8화

바람에 그의 손가락이 크게 떨렸다.그 순간, 심장이 무언가에 찢겨나가는 듯 요동쳤다.숨이 턱 막히는 듯한 압박감에, 호흡조차 버거웠다.손끝에 힘이 들어가며 보고서를 구겨버릴 듯 움켜쥐었다.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한 개비를 물었지만, 라이터는 아무리 켜도 불이 붙지 않았다.몇 번이고 반복하다가, 육남혁은 결국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담배를 입에서 빼내 손으로 구겨버려 던진 뒤, 보고서를 쥔 채 차 문을 닫았다.그리고 곧장 연주 집으로 향했다.*문을 두드렸지만, 인기척이 없었다.모자는 경성을 떠난 건 아닌 듯했다.아마 외출한 모양이었다.전화를 하게 되면 그녀가 놀라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아 그냥 문 앞에서 기다리기로 했다.기다리는 동안, 그는 보고서를 다시 펼쳐 한 글자 한 글자 곱씹듯 읽었다.정오가 가까워질 무렵, 웃음소리와 함께, 연주와 연우진이 돌아왔다.연주의 품에는 장미 한 다발이 안겨 있었는데 유칼립투스 잎이 섞여 있어, 어딘가 빈티지한 느낌이 났다.다른 한 손에는 장을 본 식재료 봉투를 들고 있었다.연우진은 한 손엔 간식을, 다른 손엔 장난감을 들고 있었다.“아저씨?”연우진이 육남혁을 보자 환하게 웃었다.“어떻게 오셨어요?”“할 말이 있어서.”육남혁의 시선은 연주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연우진이 둘을 번갈아 보더니 물었다.“엄마 보러 오신 거예요?”“응.”“일단 들어오세요.”그러더니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비밀번호는 668822예요.”연주는 어이가 없었다.평소엔 그렇게 영특한 애가 남한테 이렇게 쉽게 비밀번호를 알려줄 수가 있지?“너무 단순한데?”육남혁이 낮게 웃었다.“엄마가 너무 덜렁대서 자꾸 까먹거든요.”“맨날 물건도 잘 잃어버리고.”“맞아요 맞아요!”연우진이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엄마 흉보는 데에, 이 둘은 죽이 잘 맞았다.연우진이 육남혁에게 다가와 킁킁 냄새를 맡더니 말했다.“아저씨, 또 담배 피셨어요?”“응, 좀 답답해서 몇 개 피웠어.”“담배 몸에 안 좋다고 했잖아요.”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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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9화

육씨 가문.육강민이 어머니에게 “수저 두 벌 더 준비해 주세요”라고 하자, 한주미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섣달그믐에 누가 우리 집에 온다는 거야?”“그건 곧 알게 될 거예요.”한주미는 혀를 찼다.설마 또 방주헌이 사고 치고 집에서 쫓겨난 건가?연주와 형의 관계, 그리고 아이까지는 육강민이 대신 꺼낼 일이 아니었다.어머니 성격상, 손자가 밖에서 떠돌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눈치가 빨랐던 서은주가 육강민에게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연주 선생님께서 오시는 거예요?”“확실하진 않아.”형이 과연 그 모자를 데려올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였다.‘형, 좀만 더 밀어붙여.’동생 입장에서 속이 타들어 갔다.*매서운 바람이 울부짖듯 몰아쳐 산짐승 울음 같기도, 귀곡성 같기도 했다.방안에는 어른 둘에 아이 하나. 연주는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손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방금 사 온 장미를 꽃병에 꽂다가도 집중이 흐트러졌다.연우진은 다시 육남혁을 보게 되어 무척 기뻤고, 의젓하게 물도 따라주었다.“아저씨, 물 드세요.”“고마워.”육남혁은 할 말이 가득했지만, 정작 입 밖으로 잘 나오지 않았다.아들을 한번 꼭 안아주고 싶었지만, 혹시 놀랄까 봐 참았다.“언제 오셨어요? 오래 기다리셨어요? 왜 엄마한테 전화 안 하셨어요?”육남혁은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여전히 꽃을 정리 중인 연주를 흘끗 봤다.“미리 전화하면, 네 엄마가 널 데리고 도망갈 것 같았어.”연주가 쥐고 있던 장미 줄기가 순간 부러지며 가시에 손끝이 찔렸지만, 이를 악물고 버텼다.“왜 엄마가 저를 데리고 도망가요?”아이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엄마가 육씨 가문과 거리를 두려는 건 알지만, 도망까지 갈 이유는 없었기 때문이다.“엄마한테 물어봐.”연우진은 곧바로 고개를 돌려 연주를 봤다.연주는 순간 당황했다.육남혁의 시선은 너무나 날카로워 모든 걸 꿰뚫는 듯했다.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애써 표정을 정리했다.육남혁은 보고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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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00화

눈을 크게 뜬 연우진은 잠시 멍해졌다.눈앞에서 벌어지는 장면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와…평소 매너 있는 육남혁 아저씨는 교수님이신데, 생각보다 과감한 면도 있었다.이건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장면 아닌가?멍하니 있던 아이는 문이 닫히자마자 작은 발걸음으로 다가가 문에 귀를 바짝 붙이고 안에서 나는 소리를 필사적으로 들으려 애썼다.“역시…”연우진은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는 둘 사이가 절대 단순하지 않다고 굳게 믿었다.*바닥에 내려진 연주는 방금 전까지 몸이 거꾸로 매달려 있던 탓에 머리가 아직도 어지러웠고, 머리카락도 흐트러져 있었다.그녀는 이를 악물고 육남혁을 노려봤다.“미쳤어요? 우진 아직 밖에 있잖아요! 애가 보면 어쩌려고 그래요!”“더 크게 말하면 다 들려.”연주는 즉시 입을 다물었다.다소 무례했던 육남혁의 행동에 연주는 답답함과 무력감에 얼굴이 붉어졌다.육남혁이 가까이 다가오자 연주는 뒤로 물러났지만, 곧 침대 가장자리에 다리가 닿아 더는 물러날 곳이 없었다.“왜 이렇게 급한 거예요?”“나는 너를 몇 년이나 기다렸어. 이제 더는 못 기다려.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아.”연주는 순간 멍해졌다.당황스럽기도 했지만 동시에 경계심도 섞여 있었다. 육남혁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그녀에게 내밀었다.연주는 그게 무엇인지 알고 있었기에 손을 뻗지 않았다.“연우진은…”말이 끝나기도 전에 연주는 그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두 사람의 거리가 순식간에 가까워졌다.연주는 상대의 따뜻한 숨결을 또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육남혁의 시선은 그녀에게 고정되어 있었다.목울대가 천천히 움직인다.그녀에게 아이가 있다는 사실에 육남혁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한때 사랑했던 사람이 다른 사람의 곁에 잠들어 있다는 사실이 그를 아프게 했다.하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달라졌다.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혔다.육남혁은 그녀가 극도로 긴장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그의 부드러운 시선은 한시도 그녀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 했다.커다란 손끝이 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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