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파혼 후 시작된 그의 집착: Chapter 801 - Chapter 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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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01화

온유란은 두어 초간 멍하니 굳어 있다가 나직이 대답했다. “언제든 괜찮아요.”“이번 주 어때요?”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의 뜻을 표했다.두 사람의 관계는 철저한 거래였다. 하이석에게는 결혼이 필요했고, 온유란에게는 그를 디딤돌 삼아 눈앞의 곤경에서 벗어날 기회가 필요했다. 그러니 언제 혼인신고를 하든 상관없을 터였다.“토요일은 시간을 비워 두도록 해요.”온유란은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하이석이 일하러 간 사이, 온유란은 품에 안긴 작은 고양이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혼인신고 이야기가 나오자, 그제야 자신의 가족관계등록부가 아직 온씨 저택에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주민등록증은 늘 몸에 지니고 다녔지만, 몇 가지 서류와 옷가지들은 여전히 그곳에 남아 있었다.어쩔 수 없이 집을 다시 한번 찾아가야만 했다.과거 온창섭이 그녀를 경성으로 데려왔을 때만 해도, 도정숙의 병을 치료해 주겠다는 핑계를 댔었다. 당시의 온유란은 마음 깊이 감사해하며 친아버지에 대한 경계심을 완전히 풀고 있었기에, 짐들을 자연스럽게 온씨 저택에 남겨두었던 것이다.아버지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얼굴을 붉히게 된 것은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일이었기에, 온유란은 미처 짐과 서류들을 챙겨 나올 채비를 하지 못했었다.온유란이 하얀색 폭스바겐을 몰고 온씨 저택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10시 반.온씨 가문은 슬하에 1남 2녀의 자식이 있었다.그중 막내인 아들은 온창섭의 지독한 총애를 받으며 자란 탓에, 학업에는 도통 뜻이 없는 한량이었다. 그래서 2년 전, 그가 대학 입시에 낙방하자 돈을 쏟아부어 해외로 도피성 유학을 보낸 상태였다.온유란의 새어머니는 꽤나 영악한 인물이었다.남편이 제 딸을 팔아 부귀영화를 누리려는 것을 진작에 눈치챈 그녀는, 자신이 경성에 머물다가는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며 전처의 유일한 혈육을 학대하도록 부추긴 악독한 계모라는 낙인이 찍힐 것을 잘 알고 있었다.그 때문에 아들을 보러 간다는 그럴싸한 핑계를 대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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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02화

“놓으세요!” 온유란이 별안간 온 힘을 다해 소리쳤다.온창섭은 그녀가 이토록 격렬히 반항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자신의 팔을 죔쇠처럼 움켜쥐고 있던 그의 손을 온유란이 세차게 뿌리치자 아무런 준비도 없이 힘에 밀린 온창섭은 뒤로 두어 걸음 비틀거리다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하지만 온유정이 기민하게 다가와 그를 부축한 덕에 간신히 중심을 잡았다. “아빠! 괜찮으세요?”“온유란, 너 지금 뭐 하는 짓이야! 감히 우리 아빠를 밀쳐?”“네 입으로 말했잖아. 네 아빠지, 내 아빠는 아니라고.”“뭐라고?” 온창섭이 미간을 찌푸렸다. “너 정녕 나와 완전히 끝장을 보겠다는 게냐? 온유란, 대체 누가 네놈 뒤를 봐주기에 이리 기고만장한 것이냐! 이 경성 땅에서 내가 매장시키겠다고 마음먹은 놈을 감히 감싸고 돌 자는 아무도 없어!”“과연 그럴까요?” 온유란이 비웃음을 흘렸다. 그 미소에는 짙은 황량함과 비장함이 배어 있었다.그녀는 여전히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하이석이 처음으로 그녀를 집까지 배웅해 주었을 때, 제 아비라는 자가 얼마나 비굴하게 꼬리를 흔들어댔는지.“네년이 아주 매를 벌어오는구나. 그 사내놈에게 비참하게 버림받고 나서 나한테 기어와 울며불며 매달리지나 마라. 내가 널 그럴싸하게 포장해 주지 않았다면, 네가 감히 그런 돈 많은 자산가를 만나기나 했을 것 같냐? 내 돈을 그만큼 처먹었으면 밥값은 해야지, 이제 와서 나를 헌신짝처럼 내팽개치고 날아가겠다니, 꿈도 야무지구나!”“제 가족관계등록부랑 서류들, 당신이 가져간 거죠.” 온유란이 서늘하게 묻자 온창섭은 콧방귀를 뀌었다. “난 모르는 일이다!”“당신이랑 온유정, 내 방에 들어간 적 없다고 말할 수 있어요?”“누가 네 방 따위에 들어간대? 시골내기 특유의 퀴퀴한 구린내가 진동을 해서 숨도 못 쉴 지경인데, 더러워 죽겠어!” 온유정이 턱을 치켜든 채 오만한 기색으로 받아쳤다.“나무는 껍질이 없으면 죽고, 사람은 낯가죽이 없으면 천하무적이라더니. 딱 그 꼴이네요.” 온유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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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03화

이어 정적을 깨고 문을 가볍고도 단호하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경찰입니다. 안에 사람 계십니까?”온창섭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그가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자, 고용인들 역시 감히 문을 열 엄두를 내지 못했다.그러나 창문 너머로 이미 집 안에 사람이 있는 것을 포착한 경찰관들은 유리창을 똑똑 두드리며 문을 열어달라는 수신호를 보냈다.“가서 문을 열어라.” 온창섭은 간신히 감정을 추스르며, 온유란을 향해 쓸데없는 소리를 했다간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 악랄한 눈빛을 쏘아 보냈다.이윽고 몇 명의 경찰관이 거실로 들어서자,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순식간에 비굴할 정도로 살가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경찰분들, 대체 무슨 일로 이리…”“가택 침입 및 절도 신고가 접수되어 출동했습니다.”“예? 절도요?” 온창섭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럴 리가요. 우리 집에는 도둑이 든 적이 없습니다. 이건 필시 누군가 허위 신고를 한 게 분명합니다.”“제가 신고했습니다.” 온유란이 불쑥 앞으로 걸어 나왔다. 무자비하게 뺨을 얻어맞은 그녀의 한쪽 얼굴이 붉게 부어올라 있었다.온창섭의 미간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그는 서슬 퍼런 경찰들이 보는 앞이라 대놓고 손을 쓰지는 못한 채,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사납게 으름장을 놓았다. “온유란, 네가 지금 미쳤구나?”“경찰관님, 제가 며칠간 집을 비웠다가 방금 돌아왔는데 제 방이 마치 도둑이라도 든 것처럼 엉망진창으로 헤집어져 있었습니다. 집에 있던 고용인들은 물론이고 아버지와 동생에게 물어도 다들 모른다고만 하니, 도둑이 들었다고 의심할 수밖에요.”“본인의 방 외에 다른 방도 도난당한 흔적이 있습니까?”“그건 잘 모르겠습니다.”“분실된 물품은 무엇입니까?” 경찰관이 수첩을 꺼내 들며 물었다.“제 주민등록증과 서류들, 그리고 10억 상당의 맞춤 제작 목걸이가 사라졌습니다.”“10억 상당의 물품이라고요?”경찰관들이 일제히 서로의 안색을 살폈다. 도난 피해 액수가 이 정도로 막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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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04화

“우리 엄마는 내게 저런 동생을 낳아준 적이 없어요. 쟤가...” 온유란이 싸늘하게 실소를 터뜨렸다. “온가네 둘째 딸이라고요? 그저 당신이 밖에서 낳아온 사생아일 뿐이잖아요. 대체 어디서 구석 귀한 양반 집 규수 행세를 하려는 건지.”가장 치욕스러운 치부가 만천하에 드러나자, 온창섭은 이성을 잃고 날뛰었다. 손을 치켜들며 다시금 그녀를 내리치려 했으나, 이내 경찰관들의 엄한 호통에 가로막혔다.“경찰관님들, 먼 길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십니다. 이건 그저 집안 내부의 사소한 문제이니, 저희끼리 알아서 원만하게 해결하도록 하겠습니다.” 온창섭은 슬그머니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경찰관들에게 찔러 넣으며, 어떻게든 그들을 돌려보내려 애를 썼다.“죄송합니다만...” 경찰관은 그가 내미는 담배를 단호하게 거절했다. “아무리 한가족이라 할지라도 엄연히 절도죄가 성립되는 이상 법을 위반한 것입니다. 절차대로 엄격하게 처리해야 합니다.”“온유정!” 온창섭이 사납게 고함을 질렀다.별수 없게 된 온유정은 왈칵 짜증을 내며 마지못해 제 방으로 가더니, 목걸이를 가지고 나와 온유란의 손에 억지로 쥐여주었다.상황이 정리되자 경찰관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머지 자잘한 문제들은 가족분들끼리 사적으로 원만히 해결하시길 바라며, 저희는 이만…”“경찰관님.” 온유란이 가려는 그들의 발걸음을 붙잡았다.“무슨 일 더 있으십니까?”“온창섭 씨를 고의상해 및 감금 미수 혐의로 고소하겠습니다. 방금 제 뺨을 때렸고, 저를 강제로 감금하려고까지 했습니다.”그 말에 온창섭은 머리끝까지 피가 솟구쳐 미칠 지경이었다!온유정 역시 소스라치게 놀라 멍하니 굳어버렸다.그녀에게도 나름의 독한 구석이 있다는 것은 진작 알고 있었지만, 설마 공권력까지 끌어들여 친아버지를 고소하는 만행을 저지를 줄은 상상도 못 했던 탓이다.“이 배은망덕한 기집애가 어디서 감히 거짓부렁을 늘어놓아! 가족관계등록부고 서류고 다 내주었는데, 대체 얼마나 더 나를 진흙탕에 처넣어야 속이 시원하단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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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05화

지구대 안, 온가네의 변호사단은 온유란을 둘러싸고 온갖 감언이설을 늘어놓으며 회유하려 애썼다.한가족이니, 그저 좋게 좋게 대승적 차원에서 합의를 보자는 논리였다. 하지만 온유란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어찌 됐든 낳아주신 아버님이신데, 굳이 이렇게까지 파국으로 몰고 가셔야 하겠습니까?” 변호사가 난처한 기색으로 말하자 온유란은 엷은 실소를 터뜨렸다. “상황을 이토록 파국으로 몰고 간 사람은, 단 한 번도 제가 아니었어요.”온가네 그 추잡하고 뒤틀린 내막은 변호사들도 진작에 파악하고 있었기에, 부녀간의 정 따위를 들먹이며 합의를 권하는 것은 애초에 씨가 먹히지 않을 짓이었다.얌전한 토끼도 막다른 골목에 몰리면 무는 법이다. 하물며 온유란은 감정을 가진 엄연한 살아있는 인간이었다. 온창섭이 아무리 돈이 많다 한들, 경찰의 공권력 집행까지 제멋대로 주무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온유란은 본래 그저 가족관계등록부와 서류들만 챙겨 나온 후 온씨 가문과 영영 인연을 끊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처참하게 짓밟힌 자신의 물건들을 목도한 순간, 마음 깊이 뼈저리게 깨달았다. 온가네 사람들은 단 한 순간도 자신을 인간으로 대접한 적이 없었다는 것을.어차피 남남이 될 마당에 정까지 버렸으니, 그녀 역시 도리를 지킬 이유는 없었다.과거에는 도정숙의 병원비를 대기 위해 죽은 듯 숨을 죽이며 참아왔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었다.온창섭이 자신을 향해 어떤 저주를 퍼붓든 신경쓰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가슴속이 뻥 뚫린 듯 지독하게 통쾌했으니까!그간 쌓인 울화가 단숨에 씻겨 내려가는 듯, 오늘은 살면서 가장 기쁜 날이었다. 지구대 문을 나선 그녀는 차를 몰고 곧장 재래시장으로 향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생닭을 파는 가판대 앞에 선 그녀가 활기차게 외쳤다. “사장님, 여기 있는 닭 중에 제일 크고 실한 놈으로 한 마리 주세요.”집으로 돌아가, 뜨끈한 백숙을 고아 먹을 작정이었다!*한편, 온씨 저택에서 벌어진 이 전대미문의 소동은 순식간에 경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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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06화

오늘 낮에 있었던 일들의 전말을 하이석은 이미 다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는 구태여 캐묻지 않았다. 그녀는 오늘 충분히 잘해냈고, 지금 무척 기분이 좋아 보였으니까.그녀가 행복하다면 그것으로 족했다. 하이석에게는 굳이 타인의 아픈 상처를 들추는 고약한 취미 따윈 없었다.온유란은 아버지에게 맞고 모욕을 당할 때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는데, 정작 하이석이 건넨 다정한 말 몇 마디에 그만 눈시울이 붉어지고 말았다.“우리가 알고 지낸 시간은 짧지만, 전 알 수 있어요. 당신은 겉으로 도는 소문과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걸요. 이렇게나 좋은 분인데, 왜 하필 저와 결혼을 하려는 건가요?”하이석이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제가 좋은 사람으로 보입니까?”“네.”“내 마음속에서도 당신은 충분히 좋은 사람입니다.”모든 대접을 받을 가치가 있을 만큼.하이석이 그녀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 시선이 너무나 솔직하고 뜨거워서 온유란은 순간 심장이 터질 것처럼 가쁘게 뛰었다.그의 한마디는 마치 고백처럼 들렸다.캣타워 조립을 마친 하이석이 손을 씻으러 간 사이, 온유란은 주방에서 분주하게 움직였다. 막 그릇에 닭백숙 국물을 담아 나오는데, 등 뒤에서 나지막한 발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누군가 뒤에서 그녀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제가 어디가 그렇게 좋습니까?”“전부 다요.”온유란의 이 대답은 결혼이라는 거래와는 상관없는,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었다.하이석의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스쳐 지나갔다. 이윽고 닿아오는 은밀하고 뜨거운 입맞춤에 그녀의 몸이 잘게 떨렸다. 그의 손가락이 가만히 옷자락 밑단 속으로 파고들었다.그의 능숙한 손길에 온유란은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몸이 달아올랐다.처음 겪어보는 낯설고 이질적인 자극과 온몸을 지피는 열감에 그녀는 정신이 아득해질 것만 같았다.이런 방면에 전혀 면역이 없던 온유란은 눈가에 촉촉하게 물기가 어린 채, 어느새 발치까지 흘러내린 치맛자락을 보며 붉어진 얼굴로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끝까지 간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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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07화

어느덧 사방으로 뉘엿뉘엿 저무는 저녁노을이 차창을 타고 들어와 차 안을 온통 붉은빛으로 물들였다.어딘지 모르게 묘하게 축제 분위기가 나는 색감이었다.왕 기사는 운전대를 잡은 채 백미러로 뒷좌석에 앉은 두 사람을 연신 살폈다.이제 곧 혼인신고를 하러 갈 사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만큼 어색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말 한마디 없이 침묵만 지키는 분위기가 다소 민망했는지, 왕 기사가 헛기침을 몇 번 하며 목청을 가다듬었다. “날씨가 참 좋네요. 날도 많이 풀리고, 일 년 중 이맘때가 가장 살기 좋은 것 같습니다. 스치는 바람마저 아주 따스해요.”하이석은 별다른 대꾸가 없었지만, 성격이 사근사근한 온유란은 왕 기사가 머쓱할까 봐 미소를 지으며 받아주었다. “그러게요. 요즘 날씨가 정말 딱 좋은 것 같아요.”왕 기사는 미동도 없이 앉아 있는 제 대표님의 모습을 슬쩍 훔쳐보았다. 그 포스가 흡사 도를 닦는 노승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그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봄은 참 좋은 계절입니다. 마른 나뭇가지에 새싹이 돋고, 늙은 나무에도 마침내 꽃이 피니까요.”순간 하이석의 미간이 팍 구겨졌다.하지만 왕 기사는 눈치도 없이 계속 주절댔다. “게다가 봄철에는 날이 워낙 건조해서 화재를 조심해야 합니다. 특히 오래된 집에 불이 나면 그게 가장 무서운 법이거든요. 한 번 불길이 치솟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고, 아무리 물을 퍼부어도 꺼지질 않으니까요.”온유란도 눈치가 없는 편은 아니었기에, 왕 기사가 은근슬쩍 하이석을 놀려대고 있다는 걸 대번에 알아챘다.두 사람의 결혼이 철저한 계약 관계라는 건 오직 당사자들만 아는 비밀이었다.그러니 왕 기사는 당연히 두 사람이 뜨겁게 연애하다가 결혼하는 줄 알고 이렇게 너스레를 떠는 것이리라. 그녀는 문득 온씨 가문의 집안 분위기를 떠올렸다. 온창섭의 가부장적인 권위가 워낙 서슬 퍼런 탓에, 그 집 고용인들이나 운전기사들은 그 앞에서는 말 한마디 뻥긋하지 못했었다. 이런 장난을 치는 걸 보면, 하이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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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08화

구청 마감 시간이 임박해 마음이 조급해진 온유란은 서류 내용을 제대로 살피지도 못한 채, 마지막 페이지로 빠르게 넘겨 서명을 마쳤다.하이석이 계약서를 수거해 품에 넣고 나서야 두 사람은 함께 구청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퇴근 시간이 다 된 참이라, 창구 직원들을 제외하고는 혼인신고를 하러 온 다른 커플들은 보이지 않았다.사위가 조용한 탓에 어딘지 모르게 엄숙하고 묵직한 분위기가 감돌았다.온유란은 저도 모르게 긴장감에 몸이 굳어졌다.그 순간, 커다랗고 따뜻한 손이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손가락 사이로 스며드는 온기가 그녀의 긴장을 조금씩 녹여주었다. 하이석의 손은 그녀보다 훨씬 커서 온유란의 손을 완전히 포개어 쥘 수 있었다. 그녀가 잔뜩 얼어붙어 있는 걸 눈치챘는지,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다면, 날을 미뤄서 다시 와도 괜찮습니다.”온유란은 성격상 강압적인 태도에는 강하게 버텨도, 이런 다정한 배려에는 유독 마음이 약해지곤 했다.하이석이 이토록 신사적이고 부드럽게 나오니, 도저히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애당초 자신이 큰 이득을 보는 계약인데, 여기서 무슨 조건을 더 따진단 말인가.“이미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오늘 신고해요.”두 사람은 혼인신고 접수 창구로 향했다.그 와중에 하이석의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현정민 여사의 전화였다.아들이 갑자기 짐을 싸서 독립하자 집안이 텅 빈 것처럼 쓸쓸해진 그녀는, 저녁이라도 같이 먹을까 싶어 전화를 건 참이었다.“오늘 저녁에는 선약이 있어서 본가엔 못 들어갑니다.” 하이석이 덤덤하게 말했다.“회사 직원 말로는 네가 3시 좀 넘어서 벌써 퇴근했다던데? 저녁에 따로 비즈니스 미팅도 없다면서 무슨 선약이 있다는 게냐?”“어머니, 제가 지금 좀 바빠서요. 이따가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대체 뭐가 그리 바빠?”“혼인신고 중입니다.”현정민 여사는 순간 멍해지더니, 딱 한 마디를 내뱉었다. “끊어.”이 녀석이 이젠 아주 대놓고 엄마를 놀려먹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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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09화

구청을 나와 차 문을 열자마자 온유란의 눈에 들어온 것은, 자신이 앉던 자리에 놓여 있는 커다란 장미 꽃다발이었다. 운전석에 앉아 있던 왕 기사는 고개를 돌려 마치 자식을 장가보내는 친정아버지 같은 인자한 미소를 가득 지어 보였다. “대표님, 온유란 씨. 축하드립니다.”“감사합니다.”온유란은 품에 가득 안기는 꽃다발을 꼭 쥔 채 자리에 앉았다.굳이 묻지 않아도, 아까 하이석이 왕 기사에게 잠시 자리를 비워달라고 지시했을 때 사 오라고 부탁한 것이 분명했다.비록 두 사람의 시작은 철저한 비즈니스 거래에 불과했으나, 하이석은 단 한 번도 사소한 디테일을 놓치는 법이 없었다.원래 여자란 이런 작은 배려와 세심함에 마음이 움직이는 법이니까.온유란은 가슴 한구석이 간지러워지는 것을 느끼며 품 안의 장미를 조금 더 부드럽게 끌어안았다.“왕 기사, 이제 온유란 씨라고 부르면 안 돼.” 하이석이 묵직하게 말을 얹으며 호칭을 바로잡았다. “이제 내 아내니까.”“아이고, 맞습니다. 제 입이 방정이네요. 너무 기쁜 나머지 순간 깜빡했습니다. 앞으로는 사모님이라고 정중히 모시겠습니다.”붉은 장미꽃 빛이 온유란의 얼굴에 아른거리며 그녀의 뺨을 한층 더 불타오르듯 붉게 물들였다.*두 사람은 근사한 곳에서 저녁 식사까지 마치고 나서야 비로소 헤이엘 저택으로 돌아왔다.새끼 고양이는 푹신한 제 침대에 엎드려 있다가, 주인이 돌아오는 인기척에 반갑다는 듯 뛰어나와 기지개를 켜며 응석을 부렸다.“우리 하랑이, 나 많이 보고 싶었어?” 온유란은 고양이를 품에 안고 둥둥 가볍게 어루만졌다.그러자 하이석은 한쪽 눈썹을 쓱 치켜세우며 물었다. “녀석 이름도 지어준 겁니까?”온유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은 하랑이라고 지었어요.”“제 성을 따랐군요?”“네.” 온유란은 품 안의 작은 생명체를 장난스레 다독였으나, 이내 이어진 하이석의 나직한 목소리에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다.“당신이 먼저 씻을 겁니까, 아니면 제가 먼저 씻을까요?”시간은 이미 늦은 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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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10화

온유란은 몸을 움직일 엄두조차 내지 못했고,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조차 알 수 없었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세차게 소용돌이치는 가운데,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하이석의 뜨거운 입술이 자신의 입술에서 떨어져 내려와 목덜미와 쇄골, 그리고 그보다 더 깊고 은밀한 곳으로 향하는 것을 고스란히 받아내는 것뿐이었다.그의 능숙하고 노련한 손길을 감당하기에 온유란은 너무나 나약했다.그녀의 몸에 닿아오는 그의 강렬한 존재감이 생생하게 느껴졌지만 하이석은 더 이상 진도를 나갈 생각이 없는 듯 행동을 멈추었다. 그럼에도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만큼은 당장이라도 온몸을 불사를 것처럼 뜨겁기 그지없었다. 온유란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더… 안 하 시나요?”하이석은 그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더 하고 싶습니까?”“그런 게 아니라, 그냥…”온유란은 이것이 자신이 아내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의무라고 생각했기에, 그의 친밀한 손길을 거절할 이유가 전혀 없었을 뿐이었다.“조급해하지 말아요. 앞으로 기회는 차고 넘치니까.”그의 능글맞은 한마디에 온유란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하이석은 말을 마치며 그녀의 샤워 가운을 다시 꼼꼼하게 여며주었다. 그제야 온유란은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정작 본인은 홈웨어 단추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완벽한 차림이면서, 자신만 홀라당 벗겨놓았던 것이다.마침내 두 사람은 한 침대에 나란히 누웠다.이성인 남성과 한 이불을 덮고 동침하는 것이 태어나서 처음이었던 온유란은 긴장감에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었다.특히 하이석의 넓은 품에 고스란히 갇힌 채 안겨 있으니, 숨소리조차 크게 내지 못할 지경이었다.그렇게 얼마나 밤을 지새우며 버텼을까, 새벽녘이 되어서야 그녀는 겨우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하이석은 품 안에서 쌔근거리는 그녀의 이마에 다정하게 입을 맞추었다. 이것이야말로 그가 줄곧 꿈꿔왔던 이상적인 결혼 생활이었다.하지만 한밤중이 지나면서 상황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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