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파혼 후 시작된 그의 집착: Chapter 881 - Chapter 890

979 Chapters

제881화

그를 비스듬히 내려다보는 현정민의 눈빛에는 사람을 짓누르는 듯한 기세가 서려 있었다.온창섭은 이를 악물었지만, 끝내 부정하지는 못했다.“제 기억이 맞다면, 유란이 어머니 돌아가신 뒤에 당신은 얼마 지나지도 않아 새 부인을 들였어요. 그때는 아직 친자 확인 결과도 나오기 전이었죠?”“그랬습니다.”“어린 나이에 엄마를 잃은 아이인데도, 그 마음은 조금도 헤아리지 않았어요. 서둘러 새 아내를 들이고, 다른 아이들까지 집에 데려왔죠. 아버지라는 사람이 아이의 심정을 단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 있었나요?”현정민의 목소리가 차갑게 내려앉았다.“그때 당신은 유란이가 친딸이라고 믿고 있었잖아요. 그런데도 그 애에게 연민이나 사랑은 한 조각 없었어요. 그런 사람이 무슨 자격으로 사랑을 입에 올려요?”“그땐 양수진에게 속았던 겁니다!”온창섭이 다급히 변명했지만 현정민은 싸늘하게 웃었다.“그럼 그 친자 확인서 얘기도 해보죠. 남이 하는 말은 왜 그렇게 쉽게 믿은 겁니까. 같이 산 아내였잖아요. 정말 그렇게까지 몰랐어요? 죽은 아내와 어린 딸에게 조금이라도 정이 있었다면, 종이 한 장만 믿고 둘을 죄인 취급하진 않았겠죠. 조용히 다시 검사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어요. 지난 세월 동안 수도 없이.”온창섭의 몸이 굳어졌다.“결국 당신은 처음부터 바람을 피운 쪽이었고, 스스로도 찔리는 게 있었던 거예요. 양수진 씨가 내민 그 종이는, 딸을 버리기 위해 스스로를 합리화할 핑계였을 뿐이죠. 아마 당신은 지금까지도 그렇게 자기 자신을 속여 왔을 거예요. 자신의 잘못은 아니라고. 먼저 배신한 건 죽은 아내였다고 말이에요. 당신은 원래부터 정 없고 의리 없는 사람인데 이제 와서 무슨 애틋한 척을 하나요.”현정민의 말은 온창섭이 간신히 붙들고 있던 마지막 체면마저 산산이 찢어 버렸다.사실이었다.그가 마음만 먹었다면, 온유란의 출생을 확인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그는 단 한 번도 그러지 않았다.양수진과 재혼하던 순간부터, 이미 마음속으로는 온유란을 버리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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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2화

그 순간이었다.심장이 마치 높은 곳에서 내던져진 듯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산산조각 난 파편이 가슴 깊숙이 박혀드는 기분이었다.온창섭은 떨리는 손으로 바지를 움켜쥐었다.눈앞이 선명하면서도 흐렸다.그건 온유란이 처음 바느질을 배우기 시작했을 때, 직접 만들어 두었던 바지였다.그녀는 마음 한구석에 늘 희망을 품고 있었다. 언젠가는 아버지가 자신을 집으로 데려가 줄 거라고. 그리고 실제로 온창섭은 훗날 그녀를 다시 데려갔다.다만 그 뒤의 일들은, 온유란이 상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결국 이 바지도 끝내 건네지 못한 채 남아 있었던 것이다.온창섭의 입술이 잘게 떨렸다. 그는 손끝으로 천천히 바지의 결을 쓸어내렸다. 기성품이 아니라는 건 한눈에 알 수 있었다.촘촘한 바느질 하나하나가, 지금의 그에게는 살을 도려내는 칼날처럼 느껴졌다.툭.눈물이 떨어졌다.온창섭은 갑자기 그 자리에 쪼그려 앉더니, 끝내 참지 못하고 오열하기 시작했다. 가슴을 치고, 제 뺨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그는 바지를 끌어안은 채 어린아이처럼 울었다.현정민이 말했던 그대로였다.그는 단 한 번도 온유란을 진심으로 사랑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자신이 실금까지 한 그 처참한 순간에, 온유란은 사람을 시켜 바지를 보내주었다.그는 모든 것을 잃었다. 회사도, 가정도, 삶도.아내와 자식은 등을 돌렸고, 믿었던 사람들에게 배신당했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체면마저 바닥에 떨어졌다.사람들은 그를 비웃었고, 짐승 같은 인간이라 욕했다.그런데 정작 자신이 버린 딸만이, 끝끝내 그에게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품위를 남겨주었다.그런 아이를 그는 이용할 생각만 했었다.정말 사람이 아니었다.그제야 온창섭은 진심으로 후회했다.하이석은 어두운 복도 안에 서서 그 광경을 말없이 내려다보고 있었다.희미한 조명 아래, 그의 눈빛은 한층 더 깊고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이제 와 후회한들 이미 늦었다.*온창섭은 헤이엘을 떠난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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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3화

양수진은 바닥에 드러누운 채 악을 쓰며 난동을 부렸다. 하지만 경찰은 그런 수법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계속 이러시면 공무집행방해로 처리됩니다.”경고가 떨어지자 양수진은 순식간에 기세가 꺾였다.그녀는 급히 온유정에게 온창섭을 찾아가 자신을 좀 봐달라고 사정해 보라 당부했다.하지만 온유정 혼자서는 차마 온창섭을 찾아갈 용기가 나지 않아 결국 동생 온호를 끌고 병원으로 향했다.그런데 두 사람은 병실 문턱도 넘지 못한 채 온창섭에게 쫓겨나고 말았다.“이 잡종 새끼들, 당장 꺼져!”“아, 아빠…”온유정은 겁에 질려 몸을 움츠렸다.“누가 네 아빠냐. 네 엄마가 어느 놈이랑 붙어 낳은 자식인지 내가 어떻게 알아!”“아빠, 저랑 온호는 그냥 아빠 보러 온 거예요.”“보러 와?”온창섭이 차갑게 비웃었다.“내가 입원한 동안엔 코빼기도 안 비치더니? 네 그 뻔뻔한 엄마가 잡혀가니까 이제 와서 살려달라고 온 거잖아. 똑똑히 들어. 절대 안 돼. 감옥에서 썩으라고 해! 나는 그 여자가 평생 감옥살이하는 꼴 꼭 볼 거다!”병실 밖에는 어느새 구경꾼들이 몰려 있었다.“듣자 하니 저 남매는 아버지도 각각 다르다던데. 진짜 기가 막히네.”“온유정 예전에 온유란 가리키면서 잡종이라고 욕했었잖아. 알고 보니 자기가 더 문제였네.”“저 얼굴로 어떻게 여기 나타났대?”온유정은 평생 이런 모욕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결국 동생을 데리고 돌아가던 길, 온호는 갑자기 피시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양수진이 어떻게 되든 관심도 없는 눈치였다. 머릿속엔 오로지 온라인 친구와 게임하기로 한 약속뿐이었다.온유정은 분통이 터져 발을 굴렀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엄마를 꺼내야 했다.온창섭에게 매달리는 건 이미 소용없었다. 그렇다면 온유란은 어떨까.하지만 그녀 곁에는 늘 하씨 가문 사람들이 붙어 있었다. 말 한마디조차 건네기도 쉽지 않은데, 하물며 자기 엄마를 구해 달라 부탁하는 건 더더욱 불가능한 일이었다.그래도 정말 엄마가 감옥에 가는 걸 눈 뜨고 지켜만 봐야 한단 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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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4화

도정숙이 퇴원한 뒤, 서은주도 한 번 문병을 왔다. 육강민과 함께였고, 육수린까지 데리고 왔는데 사실 그녀 역시 하씨 본가에 오는 건 처음이었다.아이들은 넓은 마당에서 뛰놀았고, 하이석 집안 사용인들이 곁을 지키고 있었다. 서은주는 안으로 들어가 차를 마셨다.한편, 현정민은 줄곧 육수린만 바라보고 있었다. 부러운 마음에 눈이 다 붉어질 지경이었다.그러다 슬쩍 온유란의 평평한 배 위로 시선을 흘렸다.속으로만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도대체 언제쯤 자신도 손주를 안아보게 될까.마음은 조급했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온유란을 재촉할 수도 없었다.결국 그녀는 하이석을 흘겨봤다. 그 눈빛은 딱 한마디를 말하고 있었다.쓸모없는 녀석.하이석은 영문도 모른 채 괜히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요즘 딱히 사고 친 것도 없는데, 이상하게 어머니는 자꾸 자신만 보면 못마땅해하는 것 같았다.“할머니.”육수린이 작은 발로 종종 뛰어 들어와 현정민 품으로 안겼다. 그러고는 주머니에서 초록빛 매실 두 알을 꺼내 그녀 손에 쥐여 주었다.“드세요.”“육수린, 너 이거 어디서 딴 거야?”서은주가 미간을 찌푸렸다.순간 육수린은 움찔하더니, 매실을 꼭 쥔 채 육강민 뒤로 숨어버렸다.“아마 뒤뜰 매실나무겠지. 몇 개 딴 걸로 뭘 그래.”현정민은 웃으며 아이를 감쌌다.“애들은 원래 다 그렇잖아.”서은주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육씨 저택에도 마당은 있었다. 봄만 되면 꽃이며 나무며 겨우 새싹을 틔우는데, 죄다 육수린 손을 피해 가지 못했다.정말 꽃밭 파괴범이라 해도 과장이 아니었다.심지어 육진국이 애지중지 가꾸던 텃밭까지 한 번 엉망으로 만들어 놓은 적도 있었다.어느 날은 육진국이 낚시에 쓰려고 모아둔 지렁이 미끼를 꺼내 장난치며 놀기까지 했다.이 아이는 뭐든 따는 걸 좋아했고, 또 입으로 가져가는 버릇도 있었다. 혹시라도 독 있는 걸 먹으면 어쩌나 싶어 서은주는 늘 그 습관을 고쳐주고 싶었다.육수린은 엄마가 화났다는 걸 눈치채고는 계속 아빠 옆에 딱 붙어 있었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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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5화

“하이석이 자기 아버지를 집에서 내쫓았거든.”서은주의 눈이 순간 크게 흔들렸다.“아들이 아버지를 집에서 쫓아냈다고요?”육강민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서은주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하이석은 정말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아버지에게 쫓겨나는 아들은 많이 봤어도, 아들이 제 아버지를 내쫓았다는 얘기는 난생처음이었다.“그래서 아버님은 그냥 그렇게 쫓겨나신 거예요?”“당연히 싫어했지. 근데 하이석을 못 이겼을 뿐이야.”“그 뒤로 계속 밖에서 지내신 거고요?”“가끔 본가에 들어와 며칠 머물긴 해. 그래도 결국 또 쫓겨나.”“성격이 많이 무서운 분인가 봐요?”육강민은 낮게 웃었다.“하이석 같은 아들을 키워낸 사람이잖아. 어떨 것 같아? 게다가 인상도 꽤 험악해. 우리도 어릴 때 같이 자랐지만, 하이석 집엔 잘 안 갔어.”서은주는 그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 입술을 달싹였다.“어쩐지... 현정민 여사랑 아버님께서 같이 있는 걸 한 번도 못 봤다 했어요.”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그녀는 다시 말했다.“하이석 씨는 그렇게 젠틀하고 다정한 사람인데… 그런 일까지 했다는 게 상상이 안 가요. 하씨 집안 얘기 좀 더 해줘요.”육강민은 그녀를 끌어안은 채 눈썹을 슬쩍 치켜올렸다.“지금 내 침대에 누워 있으면서 다른 남자 얘길 하고 싶어?”서은주는 대체 무슨 질투냐는 얼굴이었다.하지만 육강민이 정말 질투한 건 아니었다. 그저 서은주를 괴롭힐 핑계가 필요했을 뿐이었다.그는 그대로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 손끝으로 천천히 몸을 건드렸다. 익숙한 손길에 서은주의 몸이 잘게 떨리며 금세 힘을 잃었다.“애도 낳아봤으면서 왜 아직도 이렇게 예민해?”서은주는 얼른 손을 뻗어 그의 입을 막아버렸다. 더 이상 야한 소리를 못 하게 하려는 듯했다.육강민은 그녀 손목을 붙잡아 천천히 입가에서 떼어냈다.“입 막는 것밖에 못 해?”“그만 말해요.”“그래. 그럼 대화 말고 다른 거 할까?”몇 번이나 정신없이 휘말리고 나서야 서은주는 완전히 기진맥진해졌다.육강민이 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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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6화

하씨 본가 뒤뜰에는 매실나무가 몇 그루 심어져 있었다. 예전엔 하이석 할머니가 그 열매로 술을 담갔다고 했다.온유란도 이곳으로 이사 왔을 때 한 번 따 먹어본 적이 있었는데, 너무 셔서 얼굴이 다 구겨질 정도였다.그렇게 시다는 걸 알면서도, 이상하게 자꾸 손이 갔다.“오늘 건 유난히 더 시네요.”온유란은 미간을 찌푸린 채 말했다.“그래요?”하이석은 그녀의 몸을 천천히 돌려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손끝이 그녀 입가를 부드럽게 스쳤다. 얇게 밴 굳은살이 입술 위를 문지를 때마다 간질거리는 감각이 번졌다.온유란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진짜 시어요.”말이 끝나자마자 하이석이 몸을 숙였다. 따뜻한 숨결이 그녀 입술 가까이 닿았다.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그럼 제가 맛 좀 볼까요.”입술이 맞닿는 순간, 하이석은 그녀 입안에 남아 있는 풋매실의 새콤한 맛을 느꼈다.그 시큰한 맛은 두 사람의 입술과 혀가 얽히는 사이 조금씩 달콤하게 변해 갔다.깊고도 얕은 입맞춤이 천천히 이어졌다.허리를 감싸고 있던 손은 점점 아래로 내려갔고, 옷자락이 살짝 들리며 밤공기의 서늘한 기운 사이로 뜨거운 손끝이 피부를 훑었다.굳은살이 스치는 감각은 유난히 선명했다.허리 부근은 원래 더 예민한 곳이라 온유란은 입술을 깨문 채 간신히 숨을 삼켰다.귓불 끝으로 축축한 열기가 스며들었다.그때, 하이석이 낮게 웃으며 속삭였다.“시지 않고 꽤 다네요.”온유란은 얼굴을 그의 품에 묻은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안으로 들어가요…”누가 지나갈까 걱정됐기 때문이다.하이석은 웃으며 그녀를 그대로 번쩍 안아 들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온유란의 손에는 아직도 풋매실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손끝에 힘이 들어가자 즙이 조금 흘러나왔고 곧 열매는 바닥으로 떨어졌다.그녀 역시 하이석 손에 이끌려 침대 위에 놓였다.하이석은 입꼬리를 느리게 끌어올리더니 천천히 몸을 숙였다.귓불을 가볍게 물고는 일부러 애태우듯 느릿하게 핥고 깨물었다.온유란은 이미 힘이 다 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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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7화

하이석의 싸늘한 눈빛이 날아들자, 방금까지 떠들던 누군가는 순식간에 입을 다물었다.방주헌은 요즘 그야말로 인생이 꽃길이었다.육남혁 결혼식 때 강씨 가문 사람들이 경성으로 올라왔고, 그들과 꽤 화기애애하게 지냈기 때문이다.그는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강학용과 강준석 모두 자신에게 별다른 반감을 품고 있지 않다는 걸.강씨 가문 사람들이 경성을 떠나기 전엔 두 집안이 함께 식사 자리까지 가졌고, 그 자리에서 라미현은 은근슬쩍 두 아이 혼사를 미리 정해 두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다.강씨 가문 쪽에서도 딱히 반대하지 않았다.그래서 방씨 가문은 올해 추석, 정식으로 회성으로 찾아가 청혼할 계획이었다.우선 약혼부터 하고, 이후 두 사람이 더 만나보는 상황에 따라 결혼 날짜를 정하자는 쪽으로 이야기가 흘러갔다.덕분에 방주헌은 요즘 완전히 깃털 펼친 공작새처럼 굴었다. 잘난 척이 하늘을 찌를 지경이라, 남의 지뢰밭도 겁 없이 밟고 다녔다.‘어차피 너희도 나중엔 다 나한테 이모부라고 불러야 하거든.’결혼도 하기 전에 벌써 어른 행세부터 하고 있는 셈이었다.육강민은 가끔 그 꼴이 못마땅했다.어느 날은 대놓고 강정한에게 말했다.“저 쟤 한 대 치고 싶은데요.”강정한도 바로 맞장구쳤다.“언제 칠 건데? 나도 끼워줘.”방주헌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저 둘은 정말 너무했다. ‘아니, 나를 어른으로 보긴 해?’하지만 그는 평생 막내 포지션으로 살아온 사람이라, 결국 육강민 앞에서는 별수 없었다.그렇게 하이석에게 한 번 눈총을 받고 나서는 얌전히 구석에 앉아 콜라만 마셨다.육강민은 이미 결혼 생활을 해본 사람이었다. 그는 하이석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결혼했다고 해서 하루 종일 붙어 있어야 하는 건 아니야. 와이프 없을 때 혼자 시간 보내는 법도 익숙해져야지.”허경빈도 웃으며 거들었다.“그러게. 삼십 년 넘게 솔로로 살다가 결혼한 지 얼마나 됐다고. 형수 없으면 못 사는 사람처럼 굴긴.”하이석은 눈썹을 느긋하게 치켜올리며 그를 바라봤다.“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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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8화

혼담이라니.육남혁은 정말 끝까지 포기를 몰랐다.하이석은 아직 딸 그림자조차 본 적 없는데, 벌써 자기 딸을 데려가겠다고 눈독 들이고 있는 셈이었다.당연히 하이석은 단칼에 거절했다.그러자 옆에서 방주헌이 신나게 부추겼다.“무슨 혼담씩이나 해요. 형, 나중에 하이석 집에 진짜 딸 생기면, 그냥 우진이가 데리고 도망가면 되죠.”육남혁은 고개를 끄덕였다.“좋네.”하이석은 차갑게 웃었다.“그 꼬맹이 다리부터 부러뜨려 놓을 거야.”모두가 잠시 말을 잃었다.*그렇게 몇 사람이 웃고 떠드는 사이, 온유란은 유주만 곁에서 손님들을 맞이하느라 분주했다.오늘 초대도 없이 찾아온 사람들 중에는 과거 유주만에게 치료받았던 환자들 말고도, 뜻밖의 인물이 하나 더 있었다.온유정이었다.온유란은 계속해서 손님 응대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현정민은 그런 며느리가 안쓰러웠는지 일부러 핑계를 만들어 그녀를 먼저 쉬게 했다.어차피 연회는 아직 본격적으로 시작되지도 않은 상태였다.“이쪽으로 가면 돼. 저기 안쪽에 휴게실 있어.”현정민이 직접 길까지 알려주었다.온유란은 휴게실로 향하던 중, 복도에서 온유정과 마주쳤다.그날 하이석 회사 로비에서 헤어진 뒤로 두 사람은 단 한 번도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온유정은 복도 모퉁이에서 갑자기 튀어나왔고, 온유란은 전혀 대비하지 못한 채 하마터면 그대로 부딪힐 뻔했다.그리고 복도 반대편 구석에는 어두운 그림자 하나가 숨어 있었다.그 사람은 조용히 이 광경을 지켜보고만 있었다.온유정은 구김이 진 치맛자락을 슬쩍 잡아당겼다.지금 온유란은 명품 브랜드의 맞춤 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목에는 다이아 목걸이까지 걸려 있었다. 얼핏 보기엔 수수했지만, 보는 눈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 수 있었다.저 목걸이 하나만 해도 최소 2억은 넘는다는 걸.반면 지금의 자신은 고작 몇십만 원짜리 옷조차 간신히 걸치고 있었다.온유란은 그녀를 보자마자 그대로 돌아서려 했다.하지만 온유정이 급히 앞으로 다가와 길을 막아섰다.“언니, 가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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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9화

온유란도 설마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온유정은 그녀의 손에 밀려 옆으로 휘청하더니 그대로 복도 벽에 머리를 부딪쳤다.그녀는 힘이 풀린 채 벽을 타고 주저앉았다.하지만 온유란은 분명 세게 밀지 않았다.온유정이 일부러 자신에게 들러붙어 일을 키우려는 게 분명했다.“언, 언니…”온유정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녀를 붙잡아 두려는 눈치였다.“온유정, 도대체 뭘 원하는 거야?”온유란이 미간을 찌푸렸다.“엄마를 살려줘. 엄마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언니뿐이야.”“내가 안 도와주면?”온유정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그럼 나 나가서 다 말할 거야. 언니가 날 밀었다고. 오늘 언니한테 중요한 날이잖아. 나 때문에 다 망쳐지는 건 싫을 거 아니야?”부딪친 이마엔 벌써 시퍼런 멍이 올라오고 있었다.“진짜 뻔뻔하기 짝이 없네. 양심도 없어?”온유란이 이를 악물자 온유정은 피식 웃었다.“어차피 난 아버지도 누군지 모르는 사생아야. 경성에서 체면 같은 건 진작 다 잃었어. 엄마만 구할 수 있다면 창피한 건 아무렇지도 않아.”그녀는 복도 바깥쪽을 힐끗 바라봤다.“밖은 지금 얼마나 떠들썩할까. 다들 언니 축하하러 왔겠지. 어차피 여기에는 아무도 없잖아? 내가 지금 뛰어나가서 난리치고 경찰 부르면서 언니가 일부러 날 다치게 했다고 하면… 유주만 선생님 마음이 어떻겠어?”온유란은 손끝에 힘을 줬다.찰싹—텅 빈 복도에 뺨 때리는 소리가 유난히 선명하게 울렸다.온유정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 그대로 뺨을 맞았다. 몸이 휘청이며 거의 넘어질 뻔했다.그런데도 그녀는 미친 사람처럼 다시 얼굴을 들이밀었다.“쳐. 더 때려 봐. 몇 대만 더 때리면 나 바로 뛰어나가서 다 말할 거야. 언니가 나 때렸다고.”온유정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온유란은 정말 다시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연달아 후려쳤다.“세상에 이렇게 맞고 싶어서 안달 난 사람은 처음 보네. 스스로 찾아와 때려달라니.”온유정은 얼굴을 감싸 쥔 채 그대로 연회장 쪽으로 뛰쳐나가려 했다.당장 가서 난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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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90화

남자는 웃기만 했을 뿐인데도 온유란은 본능적으로 등골이 서늘해졌다.그는 키가 컸고, 나이는 오십이 채 안 되어 보였다. 머리는 짧게 정돈되어 있었고, 마른 체격임에도 묘한 압박감이 느껴졌다.특히 그 눈이 문제였다.깊이를 알 수 없는 우물처럼 어둡고 가라앉아 있었다.사람을 내려다볼 때마다 마치 날카로운 칼끝으로 살갗을 한 겹씩 도려내는 듯한 느낌을 줬다.바닥에서 버둥거리는 온유정을 내려다보는 눈빛은 차갑고 잔혹했다.마치 맹수가 먹잇감을 내려다보는 듯한 시선이었다.게다가 눈썹뼈 근처엔 깊게 패인 흉터 하나가 있었다. 한눈에 봐도 평범한 인물은 아니었다.온유란은 지금껏 이렇게 강한 기세를 가진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서은주의 시아버지인 육진국 역시 젊을 적엔 대단한 인물이었다고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집에서 낚시나 하고 텃밭이나 가꾸며 손주 재롱 보는 평온한 노인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인지 예전의 날카로움은 이미 세월 속에 많이 무뎌진 상태였다.하지만 눈앞 남자는 달랐다.인상부터가 사나웠다.마치 소설 속 최종 악역 같은 분위기였다.온유란은 속으론 긴장했지만 겉으론 최대한 태연한 얼굴로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바닥에 눌린 온유정은 몸을 필사적으로 비틀고 있었다. 입이 막혀 소리는 내지 못했지만, 커다랗게 뜬 눈으로 온유란에게 살려 달라고 애원하고 있었다.“왜 말이 없지?”남자가 그녀를 천천히 훑어봤다.“내 방식이 마음에 안 드나?”온유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남자는 태연하게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저런 뻔뻔한 인간들은 몇 마디로 쫓아냈다고 끝나는 게 아니야. 잡초 같은 것들이라, 봄바람만 불면 또 기어 나온단 말이지. 그러니 가장 좋은 방법은…”그는 눈을 가늘게 접었다.“뿌리째 뽑아 버리는 거야.”너무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말투라 더 섬뜩했다.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말투와 목소리가 어딘가 익숙했다.온유정은 거의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몸부림쳤다.입 안에서는 계속 흐느끼는 소리만 새어 나왔다.결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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