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파혼 후 시작된 그의 집착: Chapter 911 - Chapter 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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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11화

그날도 하이석은 평소처럼 먹이를 들고 나가 떠돌이 개들을 챙겨주고 있었다.그때, 누군가 온유란에 대한 이야기를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중에는 예전에 인맥을 통해 부탁을 해왔던 그 아주머니도 섞여 있었다.몇몇 부인들은 담벼락 아래에 쪼그리고 앉아 햇볕을 쬐고 있었다. 평소 하이석 앞에서는 유난히 공손하던 그 아주머니는 가장 큰 목소리로, 과장된 표정까지 지어가며 말을 쏟아냈다.“온유란 말이야. 요즘은 정말 잘나가더라고? 남자친구 회사가 그렇게 크다면서? 그런데도 우리 아들 취직 좀 시켜달랬더니 안 된다고 하고, 경성 호적 하나 마련해 달라는 부탁마저 거절하더라니까. 우리가 예전에 걔한테 못해준 것도 없는데, 완전 배은망덕한 거 아니야?”그러자 누군가 되물었다.“당신이 유란이한테 잘해줬다고?”아주머니는 코웃음을 쳤다.“처음 마을에 왔을 때는 나도 꽤 챙겨줬지.”“그건 걔가 그때 도시에서 온 아가씨였으니까 잘 보이려고 했던 거잖아. 온씨 집안에서 데려갈 줄 알고. 그런데 결국 안 데려갔으니 당신만 헛수고 한 거지, 뭐.”“맞아. 나중에는 그렇게 비아냥거리더니. 설마 다시 일어설 줄은 몰랐지?”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리자, 아주머니는 못마땅한 듯 말했다.“역시 될 사람은 어떻게든 되나 봐. 예전엔 끝난 줄 알았는데 다시 저렇게 올라가네.”“원래 그래. 도정숙 아주머니 아팠을 때 온유란이 여기저기 돈 빌리러 다녔는데 우리 다 안 빌려줬잖아. 지금도 우리랑 웃으면서 지내는 것만 해도 대단한 거야.”“그러게. 애초에 우리 도와줄 의무도 없고.”하지만 아주머니는 그 말이 영 못마땅했다.“그 하 대표라는 사람도 대체 걔 어디가 좋다고 저러는지 모르겠네. 우리 딸이 아직 어려서 그렇지, 좀만 더 크면 온유란보다 백 배는 더 예쁠 거야. 그러니 나중에는 훨씬 더 좋은 사람 만나겠지.”사람들은 그녀를 보며 허황된 꿈을 꾼다며 웃어댔다.하이석은 더 듣고 싶지 않아 돌아서려는 순간, 아주머니가 다시 입을 열었다.“그거 기억 안 나? 예전에 온유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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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12화

하이석이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침실 문이 열리며 온유란이 종이 상자를 안고 들어왔다.“짐은 거의 다 정리했어요. 책만 좀 담으면 돼요.”하이석은 고개를 끄덕인 뒤 한쪽으로 비켜섰다.온유란은 책장에 꽂혀 있던 디자인 관련 서적들을 하나씩 상자에 담기 시작했다.그때 하이석의 시선이 ‘디자인 역사’ 위에 내려앉았다.온유란의 손끝이 잠시 멈췄다. 등을 돌리고 있어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책장을 넘기는 소리는 또렷하게 들려왔다.가녀린 어깨선 아래로 원피스 자락이 부드럽게 흘러내렸고, 얇은 니트 카디건을 걸친 모습은 어딘가 연약하고 부서질 듯한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하이석은 당장이라도 그녀를 품에 끌어안고 싶어졌다.잠시 후, 그 책은 상자에 들어가지 않고 다시 책장 위에 남겨졌다.온유란은 몸을 돌려 미소 지었다.“책이 좀 무거운데, 이것 좀 들어줄래요?”하이석은 종이 상자를 들어 차 트렁크에 실었다.상자 안에는 온유란의 옷가지뿐 아니라 도정숙이 챙겨준 각종 특산물과 용봉무늬 이불 두 채도 함께 들어 있었다.그 이불은 도정숙이 골육종 진단을 받았을 무렵 직접 바느질해 만든 것이었다.떠나기 전날 밤, 온유란은 도정숙과 한 방에서 함께 잤다.반면, 하이석은 침대에 누워 뒤척이기만 할 뿐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머릿속을 가득 채운 것은 오직 사진 속 온유란의 웃음뿐이었다.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걷잡을 수 없이 생각이 뻗어 나갔다.그 남자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동네 사람들 말대로 키도 크고 잘생겼을까? 두 사람은 어떻게 만나게 된 걸까? 어떻게 사랑하게 됐고, 또 왜 헤어졌을까?그때 단체 대화방에서 방주헌이 그를 불렀다.[하이석, 언제 경성 올라오냐? 다 같이 한번 보자.][내일 올라가.][그럼 모레 어때? 마침 주말이잖아. 형수님도 꼭 모시고 와.][알겠어.]방주헌은 다시 육강민을 불렀다.[장마도 끝났는데 이제 산후조리 좀 끝내야 하는 거 아니야?]그러자 육강민이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주헌아, 넌 추석쯤 강씨 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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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13화

“그래야죠. 기뻐해야 하는 게 맞죠.”도정숙은 눈가를 훔치며 애써 웃어 보였다.경성으로 돌아가는 길에 하이석은 내일 방주헌이 사람들을 불러 가볍게 모이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꺼냈고, 온유란도 그러겠다고 답했다.겉으로 보기엔 평소와 다를 바 없어 보였다.하지만 온유란은 이상하리만큼 예민하게 느낄 수 있었다.무언가 달랐다.시골에 머무는 동안 두 사람은 분명 즐겁게 지냈다. 그런데 대체 어디서부터 어긋난 걸까?*하씨 본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기울어 있었다.현정민은 반갑게 온유란의 손을 잡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건넸고, 고양이 하랑이는 야옹거리며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온유란은 하랑이를 품에 안아 들었다.“하랑아, 너 살찐 것 같은데?”하랑이는 순순히 그녀의 품에 안겨 얌전히 몸을 맡겼다.저녁 식사를 마친 뒤 온유란은 뒤뜰에서 짐을 정리했다.짐을 푸느라 방 안이 다소 어수선해지자 하이석은 앞마당으로 나갔다.하정현은 여전히 마당에 앉아 달을 감상하며 차를 마시고 있었다.그는 아들을 보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결혼 후 온유란과 함께 뒤뜰로 거처를 옮긴 뒤로는 저녁 식사 후 앞마당에 오는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그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하이석은 방금 따라 놓은 차를 집어 들더니 단숨에 비워 버렸다.“너…”하정현이 눈살을 찌푸렸다.“그거 내가 마시려고 따른 차야.”하이석은 찻잔을 내려놓고 아버지를 바라봤다. 그 표정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내가 마셨는데, 뭐 문제 있어요?자식은 부모가 가장 잘 아는 법이었다.하정현은 코웃음을 치며 맞은편 자리를 턱짓했다.“앉아.”“시골에서 돌아온 뒤로 계속 이상하더구나. 유란이랑 싸웠냐?”“아닙니다.”“그럼 무슨 일인데? 말해 봐.”마치 고민 상담이라도 해 주겠다는 듯한 태도였다.하이석은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유란이 예전에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답니다.”“오?”순간 하정현의 눈이 번쩍 빛났다. 그는 곧바로 찻주전자 옆에 놓인 해바라기씨를 집어 들고 까먹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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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14화

하정현은 해바라기씨를 까먹으며 말을 이었다.“확실히 세상엔 먼저 다가가는 여자들도 있어. 그런데 유란이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 손에 이끌려 그런 외진 곳에서 자랐잖아. 그러니 감정을 표현하는 데 서툴 수밖에 없지. 네가 말하지 않으면 그 애가 어떻게 알겠냐? 어쩌면 그 애도 널 좋아하면서도 먼저 말을 꺼내지 못하는 걸 수도 있어. 괜히 고백했다가 거절이라도 당하면, 지금의 관계마저 깨질까 봐 두려운 걸 수도 있고.”하정현은 해바라기씨를 까며 아들을 바라보더니 짓궂게 웃었다.“설마 너, 유란이가 널 좋아하지도 않는데 갑자기 사랑한다고 했다가 도망갈까 봐 겁나는 거야?”그러더니 그의 어깨를 툭 두드렸다.“사랑은 말해야 한다. 아들아, 자신감을 가져. 남자는 원래 먼저 움직이는 거야.”하이석은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해 보니 아버지 말이 맞았다.예전과 지금은 달랐다.그때는 말할 수 없는 사정이 있었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한참 뒤, 하정현이 갑자기 배를 잡고 웃음을 터뜨렸다.“평소엔 그렇게 대단한 척하더니, 친아버지를 집에서 내쫓을 때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던 놈이 사랑 때문에 끙끙 앓고 있다니. 아, 진짜 웃겨 죽겠네. 하하하!”너무 호탕하게 웃어댄 탓에 하이석은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하정현은 웃음을 겨우 참으며 말했다.“근데 네 반응은 아주 정상이야.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누구나 자신 없어지고, 질투도 하고, 괜히 예민해지고 속도 좁아지는 법이야. 네 아버지가 다 겪어본 일이라 잘 안단다. 다만 네게도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을 뿐이지.”그때 안채에서 현정민이 걸어 나왔다.“당신! 한밤중에 밖에서 뭘 그렇게 웃고 있는 거예요?”방금 전까지 큰소리치던 하정현은 순식간에 기세가 죽었다.“아들놈이랑 얘기 좀 하고 있었어.”“무슨 얘기요? 당신이랑 아들은 머리 쓰는 수준부터가 다른데.”하정현은 헛기침을 두어 번 하더니 아내의 어깨를 감싸 안고 안채로 향했다.“감정 문제로 고민이 좀 있어서 말이야. 정민아, 내가 말해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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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15화

다른 건 다 괜찮았다. 다만 자신의 속옷까지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는 걸 보는 순간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장마철에는 빨래가 잘 마르지 않을까 걱정돼 온유란은 갈아입을 속옷을 넉넉히 준비해 두곤 했다.그걸 하이석이 하나하나 정리했다는 생각에 얼굴이 뜨거워졌다.온유란은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하이석 같은 남자가 한밤중에 앉아 자신의 속옷을 정리하고 있었을 모습이.그녀는 입가를 살짝 올리며 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바빠요?]그러자 곧바로 답장이 도착했다.[안 바빠요.]온유란은 바로 전화를 걸었다.사실 그 시각 하이석은 한창 회의 중이었다.시골에 다녀온 동안 밀린 업무가 적지 않았고, 애초에 회사 일부 이사들과 고위 임원들은 그가 성세그룹에 이익을 양보한 일을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그런데 회의 도중 자리를 박차고 나가 전화를 받다니.끝이었다. 온유란이 나타난 뒤로 하이석은 일 욕심은 사라지고 연애만 하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하씨 가문의 친척들은 서로 눈치를 주고받으며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회사를 다른 사람에게 맡겨야 하는 건 아닐까 하고.하이석 역시 이 시간에 온유란에게서 전화가 올 줄은 몰랐기에 조금 의외였다.그녀는 원래 분별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근무 시간에 특별한 일도 없이 먼저 연락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그는 복도 창가에 서서 물었다.“무슨 일이에요?”“별일은 아니에요. 그냥 갑자기 전화하고 싶었어요.”온유란은 매화나무 아래 서서 나뭇잎을 만지작거렸다.사실 그녀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냥 문득 생각이 났고, 그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그런데 막상 전화를 걸고 나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점심은 회사에서 먹을 거예요. 저녁에는 데리러 갈게요. 육강민이랑 방주헌도 보기로 했는데, 잊은 건 아니죠?”“기억하고 있어요.”온유란이 웃으며 답했다.그때 현정민이 뒤뜰로 들어왔다.휴대전화를 들고 있는 온유란의 얼굴에는 사랑에 빠진 아가씨 특유의 수줍고 달콤한 표정이 어려 있었다.그리고 그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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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16화

모임 장소로 향하는 내내 온유란과 하이석은 별다른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온유란은 속으로만 자꾸 생각했다.설마 오늘 차림이 별로였나?이 옷도 일부러 시어머니에게 보여 드리고 골랐고, 시아버지마저 예쁘다고 칭찬해 주셨는데, 어째서 그는 자신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는 걸까.룸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육씨 집안 사람들이 먼저 와 있었다.문이 열리자마자 서은주가 반갑게 말했다.“형수님, 오늘 정말 예쁘세요. 얼굴빛도 너무 좋고요.”온유란은 옅게 미소 지으며 서은주와 연주 옆에 자리를 잡았다.반면, 하이석은 육강민 형제들 곁으로 가 앉았다.최근 집에서 육아에 전념하며 지내고 있는 육강민은 얼굴빛이 무척 좋아 보였다.“네가 경성을 비운 동안 업계에 별별 소문이 다 돌더라.”“무슨 소문?”“성세그룹이랑 협력한 일 때문에 회사 어른들이랑 크게 틀어졌다는 얘기부터, 일부러 모습을 감춘 거라는 말도 있었고. 심지어는… 하씨 그룹이 후계 구도를 바꾸려 한다는 소문까지.”하이석이 낮게 웃음을 흘렸다.그러자 육강민은 한마디 덧붙였다.“네 집안 어른들이랑 사촌들, 요즘 뒤에서 꽤 움직이더라. 조심해.”“알고 있어.”그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방주헌과 강희진이 도착했다. 허경빈도 함께였다.원래 허경빈은 이런 커플 모임에 올 생각이 전혀 없었다.그런데 방주헌이 직접 차를 몰고 집까지 찾아와서는, 자기는 이 모임에서 유일하게 남은 싱글이라며 멸종 위기 보호종 취급을 했다.사랑을 충분히 체험하게 해 줘야 한다느니, 소중히 보호해야 한다느니, 사랑의 기운을 많이 받으면 연애도 빨리 시작할 수 있다느니 하며 온갖 궤변을 늘어놓았다.허경빈은 그 말을 듣고 방주헌의 머리를 한 대 후려치고 싶은 심정이었다.그래도 그는 한 번 물어보긴 했다.“강정한 씨도 와?”하지만 강정한은 오지 않았다.그는 원래부터 사람 만나는 걸 즐기지 않는 성격이었다. 차라리 집에서 옥석을 손질할지언정 이런 자리에 나올 사람은 아니었다.덕분에 오늘 이 자리의 유일한 싱글은 허경빈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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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17화

온유란은 내내 게임에 적극적으로 끼어들지는 않았다.그래도 입가에는 줄곧 옅은 미소가 머물러 있었기에, 기분이 좋아 보인다는 건 누구나 알 수 있었다.서은주는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온유란에게 최근 유주만이 병원에서 겪은 재미있는 일들을 들려주고 있었다.그 사이 게임의 중심은 다시 하이석에게로 옮겨졌다.이번에 질문을 던진 사람은 육남혁이었다.“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왜 온유란 씨와 다급하게 혼인 신고를 한 거야?”순간 온유란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하이석은 술잔을 쥔 채 천천히 가장자리를 문질렀다.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한 모습이었다.그 모습을 본 방주헌은 곧바로 육남혁에게 엄지를 치켜세우는 눈빛을 보냈다.역시 우리 형! 제대로 핵심을 찔렀네.이런 게임은 역시 화끈한 이야기가 나와야 제맛이었다.그렇지 않으면 어딘가 게임의 본질을 잃어버린 것만 같았다.모든 시선이 하이석에게 집중된 순간, 그는 대답 대신 먼저 온유란을 바라보았다.오랜만에 친구들이 모인 자리였고, 하이석 역시 오늘 술을 제법 마신 상태였다.겉으로는 취한 기색이 전혀 없었지만, 눈가에는 옅은 붉은 기운이 서려 있었다.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그 붉은 기운이 마치 작은 불씨처럼 번져 와 온유란의 얼굴까지 뜨겁게 달아오르게 했다.그리고 온유란은 그의 낮고 잠긴 목소리를 들었다.“좋아하니까.”진심 어린 눈빛이었다.곧고도 뜨겁게 자신만을 향한 시선.그 한마디에 온유란은 숨이 턱 막히는 듯했고, 심장은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원래도 구경하는 걸 좋아하는 방주헌은 기다렸다는 듯 곧바로 분위기를 띄우기 시작했다.강희진도 이번만큼은 그를 말리지 않았다.오히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두 사람을 향해 호기심 가득한 시선을 보냈다.심지어 옆에 앉아 있던 서은주마저 턱을 괸 채 연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덕분에 온유란은 괜스레 얼굴이 뜨거워졌다.육강민 일행은 하이석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원래 사랑이니 감정이니 하는 말을 쉽게 입에 올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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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18화

하이석은 겉보기에는 다정하고 배려심 깊은 신사 같았다.하지만 본래의 인상은 차가운 편에 가까웠고, 쉽게 다가설 수 없는 거리감이 몸에 밴 사람이었다.그런데 지금의 그는 달랐다.술기운 때문인지 눈가에는 옅은 붉은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시선이 맞닿는 순간, 그 눈동자에 서린 뜨거운 열기가 사람을 당황하게 만들 정도였다.온유란은 그에게 다가가 부드럽게 웃었다.“왜 나오셨어요?”“너무 오래 안 들어와서요.”술에 적신 듯한 목소리는 낮고 잠겨 있었다.“방금 할아버지랑 통화했어요. 내일 저녁에 집에 와서 밥 먹자고 하시던데, 시간 괜찮으세요?”하이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아까 나 안 좋아한다고 했어요?”온유란은 순간 멈칫했다.술을 마셔서 그런가? 왜 유주만과 똑같은 질문을 하고 있는 것 같지?온유란은 다시 룸으로 들어가려 했다.몇 걸음 옮겼는데도 하이석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그녀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설마 할아버지 달래고 나서 이번에는 이 사람까지 달래야 하는 건가?온유란은 피식 웃으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의 곁으로 다가가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그런데 바로 그 순간, 하이석의 손목에 힘이 들어갔다.그러자 온유란의 몸이 그대로 벽에 밀려 붙었다. 동시에 그의 다른 손이 그녀의 뒤통수를 받쳐 주었다. 벽에 부딪히지 않도록 보호하려는 듯했다.눈 깜짝할 사이, 온유란은 그의 품 안에 갇혀 있었다.한 뼘 남짓한 거리에 숨결이 섞일 만큼 가까운 공간.예상치 못한 행동에 그녀의 숨결은 가빠졌고 심장도 덩달아 높이 치솟았다.하이석은 고개를 숙여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가 내쉬는 숨결에는 술 향이 섞여 있었다. 뜨겁고 자극적인 기운이 얼굴 위로 스며들었다.“하이석 씨…”온유란은 본능적으로 주변을 둘러봤다.복도였다. 언제 누가 지나가도 이상하지 않은 곳.“뭘 보는 거예요?”“누가 올 수도 있잖아요.”“나만 봐요.”온유란은 차마 그를 똑바로 바라보기가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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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19화

그는 다시 한 번 낮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온유란.”“네?”온유란은 살짝 고개를 들었다.하이석은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있었고, 다른 손은 여전히 그녀의 뒤통수를 받치고 있었다. 손가락은 그녀의 긴 머리칼 사이를 부드럽게 스치며 몇 번이고 천천히 쓸어내렸다.“내가 말했잖아. 좋아한다고.”그 순간, 온유란은 가슴 한가운데서 불길이 타오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그녀는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 깊은 시선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심장은 금방이라도 갈비뼈를 부수고 튀어나올 것처럼 걷잡을 수 없이 빠르게 뛰었다.그런데도 그녀는 홀린 듯 엉뚱한 말을 내뱉고 말았다.“혹시 진실게임이나 그런 거 하고 있는 거예요?”그 말을 들은 하이석이 문득 웃었다.눈빛에는 다정함이 가득 번져 있었다.“게임 아니에요. 장난도 아니고, 분위기에 취해서 하는 말도 아닙니다. 심지어 취한 것도 아니에요. 나는 지금 아주 진지합니다.”그는 그녀를 바라보며 또렷하게 말했다.“정말 진심으로 좋아해요.”“온유란 씨를요.”그 말은 온유란의 마음속에 불씨 하나를 떨어뜨렸다. 순식간에 불길은 들불처럼 번져 나갔다. 머리는 어질어질했고 온몸은 뜨겁게 달아올랐다.놀라움과 당혹감. 그리고 그 모든 감정 사이로 달콤한 무언가가 조용히 스며 나왔다.“놀란 거예요? 아니면 믿기지 않는 거예요?”하이석은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녀의 표정 하나라도 놓칠까 봐서였다.온유란의 심장은 여전히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귓가에는 자신의 심장 소리만 어지러울 정도로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그녀는 문득 입안이 바싹 말라 오는 것을 느끼고 입술을 살짝 적셨다.그러자 하이석이 가볍게 입을 맞췄다.그의 입맞춤은 뜨거웠다. 두 사람의 눈빛은 부드럽고도 깊게 얽혀 들었다.마치 뜨겁게 달궈진 손이 온몸을 어루만지는 것 같았다.그 시선을 받고 있으면,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그의 앞에 선 것처럼 속까지 훤히 들여다보이는 기분이 들었다.“오늘 정말 예뻐요. 예뻐서 데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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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0화

좁고 어두운 골목 안, 온유정은 상대가 다섯 명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입을 연 남자는 뒤쪽 그림자 속에 숨어 있었다.목소리 변조기를 사용한 듯, 목소리는 날카롭고 기괴하게 일그러져 있었다.“당신들... 누구예요?”온유정은 잔뜩 경계한 얼굴로 물었다.“네 어머니와 동생을 구해 줄 사람들이다.”온유정은 바보가 아니었다. 세상에 공짜는 없었다.“전 가진 게 아무것도 없어요. 대체 저한테 뭘 시키려는 거죠?”“간단해. 넌 한 가지 일만 해 주면 돼. 그러면 네 어머니도 구할 수 있고, 잃어버린 3천억도 되찾을 수 있어.”그 말을 듣는 순간 온유정의 다리에 힘이 풀렸다.목소리마저 떨렸다.“저더러 죽으라는 말이잖아요.”하씨 가문 사람들의 수법이 어떤지는 이미 뼈저리게 겪어 봤다.“정신 감정서를 하나 만들어 주지. 지금까지 겪은 일들 때문에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증명만 있으면 죄를 피하는 건 어렵지 않아. 그 뒤에는 내가 너희를 해외로 보내 주고, 적지 않은 돈도 따로 챙겨 줄게.”“제가 왜 당신을 믿어야 하죠?”“동의하면 오늘 밤 바로 네 동생을 만날 수 있어.”온유정은 상대의 정체도, 배경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그녀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대답했다.“할게요.”남자는 낮게 웃었다.섬뜩한 웃음소리에 온유정은 등골이 서늘해졌다.“난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을 제일 싫어해.”사실 온유정은 처음부터 진심으로 따를 생각이 없었다. 상대가 정말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인지도 알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달리 방법이 없으니 우선 승낙한 것뿐이었다.정말 동생을 구할 수만 있다면, 그가 내건 조건은 나중에 모른 척 넘어갈 수도 있었다.몇몇 남자들이 떠난 뒤에는 온유란 일행도 이미 자취를 감춘 상태였다.온유정은 한숨을 내쉬며 집으로 돌아갔다.그로부터 30분쯤 뒤, 병원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온호가 병원에 있다는 연락이었다.온유정이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을 때, 온호는 목이 터져라 울부짖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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