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내 아이를 모르는 그가 내 상사라니!: Chapter 891 - Chapter 900

941 Chapters

제891화

이런 서류는 사실 노현우가 직접 가져올 필요까지는 없었다.하지만 노현우의 속셈은 따로 있었다. 이맘때면 김지유가 학교에 없을 테니 àl'aube에 있을지도 모른다고만 생각했는데 오는 길에 마침 마주칠 줄은 몰랐다.마침 오늘 차도 갖고 오지 않은 상황이었다. 정말 둘 사이에 인연이란 게 있는지도 몰랐다.아이들을 데려다주고 김지유는 바로 퇴근했다.몇 시간이나 월급 받으면서 쉰 셈이니 이득이었다. 노현우가 옆에서 함께 걸으며 김지유의 작은 차를 찾아 주차장으로 향했다. "데려다줄까요?""괜찮아요, 저희 집 여기서 좀 멀어요."노현우가 바깥 도로를 가리켰다."번거롭겠지만 저 앞 갈림길까지만 태워줄래요? 비서한테 데리러 오라고 할게요."김지유는 일단 타라고 한 뒤 차를 몰며 물었다."노 대표님, 제 차가 작다고 마음에 안 들어요?"이 시간에 비서를 부르느니, 차라리 데려다주는 게 나았다."그건 아니고 지유 씨가 왔다 갔다 하면 한 시간은 걸릴 텐데 집에 도착하면 늦은 밤이 되잖아요." 노현우가 잠시 뜸을 들이다 덧붙였다."마음이 안 놓여, 지유야."김지유의 손이 순간 멈칫했다.그러고 보니 오후에 마주쳤을 때도 이렇게 불렀던 것 같았다.노현우라는 사람은 가끔 의외로 솔직한 구석이 있었다.그 점이 김지유는 왠지 편하게 느껴졌다.갈림길에 도착하니 일처리가 빠른 노현우의 비서가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 노현우가 문을 열고 차에서 내리며 말했다."조심히 가요, 저 먼저 갈게요."김지유가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남자는 성큼성큼 걸어가 길가에 세워진 차에 오르며 손을 흔들어 답하고는 김지유의 차가 먼저 출발하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자리를 떴다.차를 몰고 집으로 향하는 김지유의 휴대폰에 새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지역 표시도 안 뜨는 익명 번호의 문자였다.[너 좋은 날도 얼마 안 남았어.][김지유, 반드시 지독하게 갚아줄 거야.]김지유는 순간 멍해졌다.누가 장난이라도 치는 걸까. 번호에 전화를 걸어봤지만 연결되지 않았다. 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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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92화

허설아는 연달아 몇 개의 회의에 참석했다. 송원영과는 앞으로 봄날의 라인을 하이주얼리와 일반 골드 제품으로 나누기로 상의했다. 금값 시세가 오르거나 내려도 봄날은 일주일 동안 가격을 변화하지 않고 일주일 뒤 실제 시세를 반영해 조정하기로 정했다.따지고 보면 봄날의 금 주얼리는 다른 금 브랜드들보다 저렴한 편이었다.요즘 핫하다고는 해도 오래된 브랜드들과 경쟁해 시장 점유율을 높이려면 아직 갈 길이 멀었다.봄날과 àl'aube 모두 디자이너 규모도 늘렸다.분기별 메인 제품 디자인은 여전히 권서진이 맡았지만 나머지 제품은 각 팀에서 우수한 디자이너의 시안 중에서 고르기로 했다.회의가 끝난 뒤, 송원영이 나날이 불러오는 허설아의 배를 보며 조심스레 물었다."한번 만져봐도 돼요?""그럼요."송원영이 조심스레 손을 갖다 댔다.감촉이 참 신기했다. 물이 가득 찬 풍선을 만지는 느낌이었는데 안에서 새 생명이 자라고 있다고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손길이 조심스러워졌다."너무 신기해요." 결혼도 출산도 안 해본 여자로서 임신해서 이렇게 배가 불러온다는 건 상상조차 안 가는 낯선 경험이었다.송원영의 손바닥에 아이의 발길이 느껴졌다.송원영이 화들짝 손을 떼며 놀란 눈으로 허설아를 쳐다보았다."방금 저 찬 거 맞죠?""맞아요, 이 아이는 연희보다 훨씬 활발해요. 태어나면 지헌이와 함께 운동하고 공 찰 상대가 하나 생길 것 같네요."요즘 연희는 야외 운동 한 번 하려면 권지헌이 몇 번씩 재촉해야 했다.허설아는 연희를 가졌을 때 참 얌전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번 아이는 활발한 성격인 듯했다. 송원영은 회의 자료를 챙겨 들고 허설아 팔을 부축하며 걸었다."아이한테 나중에 꼭 얘기해 줘요, 원영 이모 노후 책임져야 한다고." 허설아가 웃으며 놀렸다."원영 이모는 본인 아기 낳을 생각은 없고요?""지금은 생각이 없어요. 애 낳을 생각만 해도 너무 괴로워요. 지금은 일단 저부터 잘 챙기는 게 우선이고 다른 건 나중에 생각할래요.""은석 씨 생각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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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93화

김지유는 권서진의 호의를 잘 알고 있었다.평소 김지유는 이런 명품 가방을 메고 다닐 성격이 아니었다. 그런데 아침에 현관에 놓인 가방을 드는 순간, 자동차 매장에서 차를 보던 그날이 떠올랐다.수천만 원짜리 맞춤 정장을 갖춰 입은 노현우가 커다란 곰돌이 가방을 손에 들고 있던 모습은 생각만 해도 어울리지 않았다. 문을 나서려던 김지유는 결국 다른 가방으로 바꿨고 책을 넣기에도 딱 맞춤했다. 강보라의 질문에 김지유가 차분하게 답했다."설마 그 가방 메고 비즈니스 리셉션 갈 순 없잖아.""하긴 그렇네. 그런데 지유 너 참 체력도 좋다. 출근하면서 수업까지 듣다니, 연애할 마음이 없는 게 당연하겠어." 김지유는 답을 하지 않고 물건을 다 챙겨 가방에 넣고는 강보라와 함께 강의실을 나섰다.고개를 드니 건영대 캠퍼스의 무성한 플라타너스 잎이 온 세상을 다 가릴 만큼 우거진 채 머리 위를 뒤덮고 있어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김지유가 솔직하게 말했다."연애 안 하고 싶은 건 아니야. 아직 딱 마음에 드는 남자를 못 만나서 그렇지.""말은 잘하네, 꼭 무슨 눈에 들어온 사람이라도 있는 것처럼. 너희 회사에 엘리트들이 그렇게 많은데 설레는 사람 하나 없어?"김지유가 담담하게 말했다."사내 연애는 국법으로 금지야. 회사에서 동료한테 반하면 그걸로 끝장인 거야."강보라가 자지러지게 웃었다.도서관에 거의 도착했을 때, 뒤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김지유 씨."노준서가 멀지 않은 곳에서 김지유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강보라가 김지유의 팔을 잡아끌며 경계하듯 말했다."저 사람 왜 또 왔어? 설마 진짜로 너 좋아하는 거 아니지?"김지유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최근 알게 된 사실이 있다면 봄날의 경쟁사인 한 유명한 귀금속 브랜드의 매장 건물을 노준서가 디자인했다는 것이었다.건축학과 우수 학생인 노준서는 건축 분야에서 큰 상도 몇 차례 받은 적이 있으니 주얼리 매장 건물 디자인을 맡는 것 자체는 이상할 게 없었다.하지만 김지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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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94화

"준서 선배, 하고 싶은 말이 그거라면 분명히 말할게요. 그럴 기회는 없어요. 저 좋아하는 사람 있거든요."노준서가 순간 넋을 놓고 김지유와 시선을 마주쳤다. 순간 거절하려고 지어낸 핑계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김지유의 눈빛은 당당했고 노준서를 바라보는 눈길에는 경계심마저 어려 있었다.노준서는 순간 막막해졌다.노준서가 이런 식으로 접근한 여자가 한 둘이 아니었지만 이렇게 대놓고 딱 잘라 거절한 사람은 김지유가 유일했다.노준서가 자존심이 상한 듯 언성을 높였다."왜요? 누구 좋아하는데요? 설마 우리 형이에요?"김지유가 미간을 찌푸렸다."그게 무슨 상관이에요?"지금 이 순간 노준서의 반듯하고 점잖은 가면 밑에 숨겨진 못된 본성이 보이는 것 같았다."제가 누굴 좋아하든, 노준서 씨 요구를 거절하든 다 제 마음이에요. 노준서 씨, 선 넘었어요."김지유가 손목시계를 흘깃 확인했다. "저 다음 수업 있어서 여기까지만 할게요."김지유는 더 이상 노준서의 생각은 관심도 없다는 듯 돌아서더니 길을 건너 도서관을 향해 걸어갔다. 노준서는 멀어지는 김지유의 뒷모습을 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김지유에게 접근한 건 그저 àl'aube 사람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발판이 필요해서였다. 혹시라도 àl'aube의 기밀 자료까지 손에 넣을 수 있다면 더 좋았을 테고그런데 김지유의 경계심이 이렇게 심할 줄은 몰랐다.노준서는 휴대폰을 하필 그때 바꾼 게 다행이라며 김지유가 아마 본인 휴대폰에 프로그램이 설치된 걸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태연할 리 없었다.노준서가 답답한 듯 한숨을 뱉더니 나무 밑 벤치에 앉아 방금 도착한 문자를 확인하는 얼굴이 어두워졌다.전화를 걸자 수화기 너머에서 다그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겨우 회사의 서류 몇 개일 뿐이잖아, 대체 할 수 있는 거야 없는 거야?""우리가 계약금도 이미 다 입금했는데 이제 와서 갑자기 못 한다는 소리 하지 마."노준서가 미간을 꾹꾹 누르며 말했다."시간 좀 더 주세요.""벌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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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95화

다른 도시 매장과 쇼핑몰의 계약 협의가 갑자기 잡혔는데 허설아는 임신 후기였고 권서진은 서경시로 결혼식 세부 사항을 논의하러 떠난 터라 송원영 혼자서는 도저히 일손이 부족했다.김지유의 업무량도 부쩍 늘었다.노현우가 출장 장소와 시간을 물었다."그럼 내가 찾아갈까요? 나 주말엔 시간 많아요."김지유는 휴대폰을 손에 들고 화면 속 메시지를 보다가 저도 모르게 씩 웃었다. "노 대표님이 번거롭지 않다면야 당연히 좋죠."하지만 생각해 보니 주말 하루 같이 보내겠다고 굳이 다른 도시까지 따라가는 건 김지유 스스로도 그럴 여력이 없는 것 같았다.김지유가 노현우한테 저녁 약속을 제안했지만 이번에는 노현우가 거절했다. "준서가 집에 가있어서 얼른 들어가 봐야 해요. 내일 경원시에서 봐요."노준서 이름을 본 순간, 김지유는 잠시 머뭇거렸지만 이내 답장을 보냈다."내일 봬요."-마지막 며칠을 더 출근한 허설아는 결국 박희수 손에 이끌려 작은 별채에 눌러앉은 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특히 회사로 출근은 절대 안 된다는 게 원칙이었다.박희수는 아파트 단지에 사람이 너무 많고 오가는 사람도 잦고 오르내리기 불편할까 걱정했다.그래서 요즘 다시 본채로 옮겼고 허설아와 권지헌은 작은 별채에서 지내게 되었다. 허설아는 서재에 틀어박혀 그림을 그렸다.요즘 àl'aube와 봄날이 너무 바빠서 일러스트 그릴 시간이 통 없었는데 마침 한가해진 것이다.박시연이 문을 두드렸다."사모님, 고아현 씨가 오셨는데 뵙고 싶다고 하시네요." 잠시 멍해졌던 허설아는 그제야 고아현을 집으로 초대했던 일이 떠올랐다. "들어오라고 해요.""네."고아현이 서재에 들어서니 흰색 롱드레스를 입은 허설아가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로 태블릿으로 뭔가를 그리고 있었다.화면 속에는 방금 구도만 잡아두고 아직 선이나 색을 작업하지 않은 일러스트 한 장이 있었다.마지막 만남으로부터 벌써 일 년이 지나 있었다.햇볕에 새까맣게 그을린 고아현은 탄탄해진 몸에 딱 붙는 스포츠 원피스를 입고 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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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96화

초원에서 야생동물들과 함께 나날들을 보낸 고아현은 생수가 아닌 물을 많이 마셔서 탈이 난 것이다. 지금은 멀쩡해 보여도 잔병치레가 적지 않았다. 한동안 치료를 받고 나서야 그나마 무탈해 보이는 모습으로 허설아를 찾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허설아가 꺼려할까 봐 걱정된 고아현이 얼른 덧붙였다."전염되는 병은 아니에요, 걱정 마세요.""그런 뜻이 아니라 그렇게 고생한 게 가치가 있었는지 궁금해서요."초원에서의 생활이 화려한 도시 생활보다 편할 리는 없었다.처음 갔을 때는 고아현도 정말 힘들어했다.하지만 동물들이 전하는 선의를 느끼면서 고아현도 마음이 서서히 움직였다.어려서부터 고아현이 가장 많이 들은 말은 언젠가 반드시 권씨 집안 재산을 손에 넣어야 한다는 고연정의 말이었다.그 재산을 위해서라면 고연정은 딸의 평판을 망가뜨리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권정민과 애인 관계처럼 보이게 만들었다.스캔들만큼 파급력이 큰 것도 없었다.그 시기 고아현이 얻은 화제성은 확실히 높아졌지만 그만큼 대가도 컸다.SNS DM창과 댓글창은 감히 열어볼 수 없었다.예외 없이 전부 욕설뿐이었다.어린 나이에 더러운 지름길을 가려한다는 말도 서슴지 않았다.그 모든 걸 정작 자신도 몰랐던 일이라는 해명 따위 아무도 믿지 않았고 입장문을 발표할 때마다 발뺌한다는 소리만 들었다.초원에 가서야 고아현은 인생에 아직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그동안 스스로 좌지우지할 수 없었던 인생을 이제는 자기 손으로 결정할 수 있게 되었다. 고아현이 찻잔을 감싸 쥐고 달콤한 장미차를 한 모금 마시며 웃었다."예전엔 제 처지가 불쌍하다고 세상 탓만 했어요.""제가 지금까지 살면서 한 제일 용기 있는 일이 연예계 은퇴하고 초원으로 간 거예요. 한번은 아프리카에서 덫에 다친 사자를 구조한 적이 있는데 솔직히 그때는 정말 무서웠어요."어쨌든 사나운 대형 육식동물이었으니까.하지만 사자의 눈에 고인 눈물이 고아현의 마음 가장 깊은 곳의 측은함을 자극했다. 동료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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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97화

그 순간 고아현은 자신이 해온 모든 일이 헛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말을 마친 고아현이 웃었다."토끼는 저희도 감히 못 먹었어요, 사자가 물어 죽인 거라 세균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그런데 너무 배고파서 결국 먹었어요."허설아는 듣기만 해도 롤러코스터를 탄 기분이었다."안 무서웠어요?""솔직히 무서운 마음 반, 안 무서운 마음 반이었어요. 그때는 그냥 그곳에서 죽어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고아현은 인생에 혼자 남았다고 생각했다.초원에서 죽어도 슬퍼해 줄 사람 하나 없었으니까.하지만 그 뒤로 오히려 용기와 새로운 삶의 목표가 생겼고 더 많은 일을 하고 싶었다.아직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았다.고아현이 가방에서 솔방울로 만든 공예품 몇 개를 꺼내 허설아의 책상에 올려놓았다."연희 주려고 가져왔어요, 동물 친구들이 저한테 선물해 준 거예요. 소독도 하고 국제 검역까지 다 통과시켜서 챙겨온 거예요."공예품에서는 아프리카 초원 특유의 냄새가 아직 은은하게 남아 있는 듯했다.허설아는 고아현의 이런 변화가 너무 기뻤다."고마워요, 연희가 분명 좋아할 거예요."허설아는 고아현에게 몸을 잘 추스르고 봄날의 신제품 홍보 대사를 맡아달라고 재차 고집했다.고아현도 이번에는 거절하지 않았다."그렇게까지 말씀하시면 할게요."고아현은 허설아라는 사람을 알게 된 게 너무 기뻤다.허설아의 한없이 다정한 모습을 보면 언제든 자신을 비춰줄 것 같은 밝은 달이 떠올랐다.어디를 가든 고개만 들면 보이는 그런 달 같았다.-경원시.일을 다 마친 김지유는 쇼핑몰 사장님의 식사 제안을 정중히 사양했다."친구가 오기로 해서 이번엔 같이 식사하기 어렵겠네요."사장님은 아쉬운 기색을 숨기지 못하며 쇼핑몰을 나서는 김지유를 배웅했다.쇼핑몰 밖에 세워진 차에서 키가 훤칠한 남자가 내렸다.청재킷 차림인 노현우는 평소 빈틈없는 엘리트다운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한결 젊고 풋풋해 보였다.오히려 김지유가 업무 미팅 때문에 흰색 정장 차림이었다.나란히 있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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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98화

노현우는 손바닥을 위로 펼친 채 재촉하는 기색 하나 없이 느긋하게 기다렸다.경원시의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와 길 양쪽에 매달린 등불을 흔들고 김지유의 겉옷 자락까지 나부끼게 했다.노현우의 손바닥은 큼직해서 고개만 숙이면 손금 하나하나가 또렷하게 보였다.김지유는 문득 어릴 적, 산골 마을 어귀에 늘 앉아 있던 할머니가 손금을 봐주겠다고 하던 기억이 떠올랐다.산골 아이한테 손금이랄 게 어디 있었을까.손은 언제나 흙투성이였고 땔감에 긁힌 상처가 가득했으며 손금 틈새까지 씻기지 않는 흙때가 끼어 있었다.김지유한테는 유년기라고 부를 만한 시절이 없었다.연애라는 것도 한 번 해본 적 없었다.굳이 꼽자면 대학 시절의 남부끄러운 짝사랑 한 번이 전부였다.고작 몇 년 사이에 그 시절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도 모자라 이렇게 한 남자가 눈앞에 서서 손을 내밀고 있을 줄은 그때의 김지유는 상상조차 못 했다.뒤쪽 골목에서 누군가 불쑥 튀어나와 김지유와 부딪쳤다.노현우가 빠르게 팔을 뻗어 김지유를 옆으로 끌어당겨 피하게 했다.김지유는 부딪힌 사람이 누구인지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지나가던 행인인 듯한 상대는 벌떡 일어나더니 사과 한마디 없이 허둥지둥 달려갔다.노현우의 팔이 김지유를 감싸고 있었다.따뜻한 손바닥이 얇은 옷 한 겹을 사이에 두고 김지유의 등에 닿아 있었다.고개를 숙인 노현우가 김지유를 내려다보았다."왜 이렇게 말랐어요? 지유 씨 평소에 밥 안 먹어요?"김지유가 눈을 깜빡거렸다."그럼 대표님이 밥 한 끼 사는 건 어때요?""얼마든지요."해프닝을 계기로 노현우는 자연스럽게 김지유의 손을 잡고 근처 식당으로 향했다."전에 이 동네 출장 왔을 때 가본 식당인데 대표 메뉴가 꽤 괜찮았어요. 같이 가서 먹어봐요.""좋아요."식당은 아담했고 여자 사장님은 키가 작고 통통한 체형이었다.사장님은 노현우가 들어오는 걸 보더니 뜻밖에도 한눈에 알아보았다."노 사장님 맞죠? 우리 가게에 한참 안 오시더니 이렇게 다시 뵙게 될 줄은 몰랐어요.""사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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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99화

보고 있으면 봄바람을 쐬는 것처럼 마음이 편안해지는 얼굴이었다.노현우가 멀지 않은 빌딩 하나를 가리켰다."저기가 예전 회사예요. 그때 저 건물에서 일해서 마침 이 근처에 살았거든요.""노 대표님한테 과외 취미가 있는 줄은 몰랐네요."노현우는 놀리는 듯한 말투를 알아챘지만 화내지 않았다.오히려 젠틀하게 받아넘겼다."지유 씨도 과외가 필요하면 동생 외국어 과외는 해줄 수 있어요. 전에 아이엘츠 점수 꽤 높게 받았거든요."김지유는 노현우가 완전히 영어로 진행한 회의를 본 적이 있었다.확실히 나무랄 데가 없이 유창하고 발음이 정확했다.김지유가 눈썹을 치켜올렸다."나도 외국어 잘해서 굳이 대표님까지 모실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지유 씨는 너무 바쁘잖아요. 그에 비하면 내가 훨씬 한가하죠."두 사람의 업무량은 엇비슷했지만 김지유는 학교에 가서 과제를 완성할 시간이 많이 필요했다.그에 비하면 오히려 노현우가 시간이 더 넉넉한 편이었다.김지유가 말끝을 길게 늘이며 말했다."아, 그럼 노 대표님 과외비는 비싸요?""밥 한 끼면 돼요. 비싼가요?"밥 한 끼로 이렇게 수준 높은 과외 선생을 구할 수 있다면 김지유한테는 그야말로 횡재였다.요즘 건영대 학생들도 과외 한 타임에 20만 원 정도는 받았다.김지유가 차를 홀짝였다."과외 비용이 너무 싸서 나중에 다른 걸로 갚으라고 할까 봐 겁나서 안 되겠네요."돈을 안 받는 건 곧 신세를 져야 한다는 소리였다.노현우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여유롭게 웃었다."그럼 횟수대로 비용 받을게요. 자주 가진 않을 거고요.""그 정도면 생각해 볼 만하네요."김지유는 눈이 휘어져라 웃었다.요리 실력이 좋은 사장님은 삼십 분쯤 기다리자 주문한 요리 네 가지와 국 하나를 전부 상에 올렸다.이 시간대엔 가게에 다른 손님이 없었다.사장님은 옆 테이블에 앉아 두 사람이 밥 먹는 모습을 싱글벙글 웃으며 지켜보았다."사장님은 지금 어디서 일하세요? 우리 애가 전에 사장님이 나온 학교에 가고 싶다고 했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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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00화

병원의 일부 사업은 실제로 이미 중단하고 정산까지 마친 뒤였다.그전에 진 빚이 워낙 많은 데다 병원을 넘기는 절차도 복잡해서 노현우는 그때까지도 빚이 꽤 남아 있었다.병원을 넘기고 나서야 빚을 다 갚았지만 병원에 관한 모든 것에서 손을 떼야만 했다.권지헌한테도 따로 생각이 있었기에 병원을 완전히 리모델링해서 다시 오픈할 계획이었다.노현우는 권지헌이 분명 훨씬 잘 해낼 거라고 믿었다.사업에서만큼은 두말할 것 없는 천재였기에 어쩌다 마음이 움직여 자선 사업에 뛰어든 노현우와는 아예 달랐다.사장님은 그 말에 통통한 얼굴 가득 환한 웃음을 지었다."정말요? 그럼 진짜 다행이네요! 사장님이 말씀하지 않았으면 모를 뻔했어요!""나중에 병원에 한번 연락해 보세요. 필요하면 제가 의료팀에 얘기해서 병상이 남았는지 알아봐 드릴게요.""그럼 너무 민폐죠, 그렇게까지 귀찮게 할 순 없어요! 연락처만 하나 주시면 우리가 직접 물어볼게요!"사장님 입장에서는 노현우가 예전에 아이 숙제를 공짜로 봐준 것만 해도 이미 큰 도움이었다.그런데 이제 와서 수술까지 도와준다니 너무 신세 지는 것 같았다.김지유가 웃으며 설명했다."그 병원, 예전에 노 대표님이 세운 곳이라 직접 연락하는 게 나을 거예요."적어도 의료팀 사람들이 노현우를 알고 있을 테니까.사장님이 눈이 휘둥그레져서 넋 나간 얼굴로 노현우를 바라보더니 앞치마에 손을 닦고 놀라서 어쩔 줄 몰라 했다."청담이 노 사장님이 세운 병원이라고요? 그럼 우리가 예전에 공짜로 받은 수술비가 전부 사장님 돈이라는 거잖아요!"노현우가 손을 내저었다."꼭 그런 건 아니에요. 병원에 여러 가지 프로젝트가 있는데 각각 맡은 협력사가 따로 있어요. 저는 그냥 사람들을 모아서 병원을 차린 것뿐이에요."김지유가 옆에서 한마디 보탰다."그리고 본인 돈을 몽땅 쏟아부어서 완전히 망해버렸고요?""경영에는 확실히 재능이 없더라고요."권지헌의 말을 빌리자면 노현우는 병원을 차려놓고도 돈을 못 버는 사람이었다.아동병원에서 심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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