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내 아이를 모르는 그가 내 상사라니!: Chapter 901 - Chapter 910

941 Chapters

제901화

그런 약재들로 담근 술 맛을 본 건 오랜 세월 통틀어 이번이 처음이었다.상상했던 것보다 조금 더 쌉쌀했지만 그렇다고 대단히 고급스러운 맛도 아니었다.술을 한 모금 마시자 따뜻한 기운이 목을 타고 내려가 뱃속까지 훈훈해졌다.김지유가 마시는 걸 보던 노현우도 한 모금 마셨다.가게에 다른 손님이 들어오자 사장님은 손님 맞으러 갔다.술기운이 바로 드러나는 김지유는 술 한 모금에 얼굴이 발그레해졌다.노현우는 그 모습을 보다가 손가락을 들어 발그레한 뺨을 톡 건드렸다.손끝이 약간 뜨끈했다."술 못 마셔요?""마실 수 있어요. 이 정도로 취하진 않는데 술만 마시면 얼굴에 바로 티가 나요."산골에서 나고 자란 김지유는 어릴 때부터 추운 지역에서 살아서인지 얼굴 피부가 남들보다 예민했다.술만 마시면 얼굴이 순식간에 빨개지는 편이었다.그 말에 노현우가 김지유 앞에 놓인 반 남은 술잔을 가져갔다."술 마시면 얼굴 빨개지는 사람은 알코올 알레르기예요. 앞으론 마시지 마요."탕수육을 먹다가 고개를 든 김지유는 노현우가 방금 가져간 술잔을 입에 털어넣는 걸 발견했다.김지유의 입술이 닿았던 자리인 듯했다.잔이 워낙 작아서 굳이 돌려 마실 것까진 없었겠지만 립스틱 자국은 모른 척하기 어려웠다.노현우는 못 본 것처럼 그냥 마셔버렸다.김지유는 얼른 고개를 숙이고 계속 밥을 먹었다.사장님의 음식 솜씨는 확실히 좋았다. 하지만 배부르게 먹었는데도 음식이 많이 남자 김지유가 아쉬운 듯 한마디 했다."집 근처였으면 포장했을 텐데.""지유 씨 이렇게 알뜰했어요?""뭐 이 정도는 기본이죠."김지유는 정말 알뜰했다.쪼들리고 궁한 살림에 워낙 익숙했으니까.지금은 손에 돈이 있어도 절약하던 습관이 더 몸에 배어서 집도 인테리어를 최대한 적게 하고 그냥 살 수 있을 정도로만 가꾸었다.권서진이 보다 못해 한가득 챙겨주지 않았다면 김지유는 회의할 때 입을 옷조차 급하게 사야 했을 것이다.그마저도 사고 나면 한참을 고민할 뻔했다.회사 근처에서 먹었다면 남은 음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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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02화

요즘 김지유는 마치 운세 달력을 확인하지 않고 집을 나선 기분이었다.확인했더라면 분명 '휴대폰 도둑 주의'라고 적혀 있었을 것이다.예전 휴대폰에 몰래 프로그램이 깔렸던 일을 여태 노현우한테 말한 적이 없었다.그런데 마침 말할 계기가 생긴 것이다.다만 노준서를 의심한다는 부분만은 언급하지 않았다.노현우와 노준서는 엄연한 형제였기에 근거 없는 추측을 함부로 얘기할 수는 없었다.노현우는 김지유와 함께 근처 경찰서로 걸어가다가 그 말을 듣고 물었다."충전이요? 그 휴대폰 전에 어디서 충전했었어요?""마지막으로 충전한 건 철한선 여행 때 민박집이었어요. 기억나요?"노현우도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기억나요. 그런데 그날 밤에 지유 씨 휴대폰을 만진 건 나뿐이었잖아요. 다른 사람이 만진 적 있어요?""기억 나지 않아요."김지유는 대충 둘러댔다."전에 쓰던 사람이 충전기에 뭘 해놨을 수도 있죠. 어차피 내 충전기도 아니었잖아요."그때 충전기는 민박집 서랍에 있던 걸 대충 쓴 거였다.때문에 그럴 가능성도 아예 없진 않았다.노현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별일 없어서 그나마 다행이네요."김지유가 농담처럼 맞받아쳤다."그 휴대폰 잘 안 써서 다행이에요. 그걸로 업무를 본 적도 한 번도 없고요. 안 그랬으면 무서워서 잠도 못 잤을걸요.""업무 자료를 빼돌리려 했으면 훨씬 전문적인 프로그램을 깔았을 거예요."노현우가 김지유를 이끌고 길을 건너며 차가 오는 방향을 막아섰다."보통 이런 프로그램은 목적이 분명해요. 카드를 몰래 긁고 업무 정보를 빼돌리고 도청까지 모든 걸 다 할 수 있는 것도 있는데 그건 훨씬 어렵죠."다만 배제할 수 없는 가능성이 하나 있었다.애초에 목적을 갖고 그런 프로그램을 미리 준비해 둔 경우였다.하지만 노현우는 생각만 해도 어이가 없었다.대체 누가 김지유 휴대폰에 그렇게 전문적인 프로그램을 깔았을까?노현우는 왜인지 문득 예전에 노준서가 그런 프로그램에 관심을 보였던 게 떠올랐다.하지만 바로 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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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03화

순간 멈칫하던 노현우는 휴대폰 잠금을 풀지 않고 그대로 김지유한테 돌려주었다."문자가 온 거 같네요."김지유는 화면에 뜬 문자를 보자마자 미간을 찌푸렸다.권지헌 얘기는 전에 노현우한테 한 적이 있었다. 다만 둘이 만나는 사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문자 두 통을 보자 예전에 받고 무시해 버렸던 문자가 떠올랐다.학부 시절 겪었던 일과, 이제는 다 잊은 줄로만 알았던 사람까지 머릿속에 한꺼번에 떠올랐다.현서.문자 말투가 현서와 지나칠 정도로 닮아 있었다.벌써 출소한 건지 김지유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허설아한테 전화를 걸려다가, 임신 후기라는 게 떠올라 방해할 순 없겠다 싶어 그만두었다.김지유가 아랫입술을 깨물자 노현우가 걱정스레 물었다."아는 사람이에요? 미안해요, 방금 본의 아니게 문자 내용을 봐버렸어요.""내가 아는 사람인지는 확실치 않아요. 전에 학교 다닐 때 권 대표님을 짝사랑했다고 말했잖아요? 그때 누가 권 대표님 여자친구 행세를 하면서 나한테 경고 문자를 엄청 보냈거든요.""그 밖에도 안 좋은 일이 좀 있었고요."김지유는 호감 가는 남자 앞에서 제 상처를 들추는 게 싫었다.학교 다닐 때 괴롭힘당한 일이든, 복수하겠다고 미행해 두들겨 팬 일이든 전부 입에 담기 힘든 과거였다.굳이 꺼내고 싶지 않았다.다 알고 나면 노현우가 어떤 생각을 할지도 알 수 없었다.희박한 가능성만 믿고 사람 마음을 시험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노현우가 알겠다는 듯 콧등에 걸친 안경을 벗어 닦았다."그 얘기라면 나도 어렴풋이 기억나요. 학교 다닐 때 한바탕 시끄러웠잖아요. 지유 씨 일이었을 줄은 몰랐지만."학교 측은 사건을 쉬쉬하며 덮어버렸다.학생들 대부분은 사건이 있었다는 것만 알았지 당사자가 누군지는 몰랐다.노현우도 사건이 권지헌과 얽혀 있고 현서가 일을 벌인 장본인이라는 것까지만 알았다.허설아가 현서한테 사과하라고 강하게 밀어붙였던 것도 그 무렵이었다.다른 피해자가 누군지는 아무도 몰랐다.김지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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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04화

노현우 앞에서 지나간 일을 꺼내는 건 아무래도 좀 난감했다.김지유는 전에 캡처해 둔 휴대폰 기록을 들여다보면서도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현서와의 일은 한두 마디로 끝날 얘기가 아니었다.법을 공부하는 사람은 대부분 언젠가 법정에서 설전을 벌이기 마련이었다.법학을 하는 사람치고 말주변 없는 사람도 드물었다.그런데 지금 김지유는 가슴이 꽉 막힌 듯 답답해져서 입을 닫아 버렸다.5월에 접어들어 호텔에는 벌써 냉방이 돌아가고 있었다.입을 꾹 닫은 김지유를 보며 노현우도 말을 할지 말지는 어디까지나 본인 자유라는 걸 알고 있었다.다만 끝도 없이 밀려오는 답답함과 짜증을 주체할 수 없어 자리에서 일어났다."나가서 담배 한 대 피우고 올게요."호텔 흡연 구역은 아래층에 있었다.노현우는 카드키를 하나 챙겨 단숨에 아래층으로 내려갔다.담배에 불을 붙이고 느긋하게 창밖 풍경을 바라보았다.경원시의 풍경은 건영시와는 사뭇 달랐다.호텔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작은 다리와 개울이 어우러진 관광지가 있었는데 한복을 차려입은 젊은 관광객들이 모여 사진을 찍는 모습은 마치 꽃단장한 나비 떼 같았다.노현우가 손에 든 담배를 한 모금 빨았다.흡연 구역에 있던 남자 하나가 말을 걸어왔다."여기 분 아니시죠? 출장 오셨나 봐요?""네, 대주시 사람이에요."남자가 웃으며 물었다."방에 사모님 계시죠?"호텔 내부에서는 금연이라지만 연기 감지기가 없는 곳도 많았기에 방에 아내가 있지 않고서야 굳이 흡연 구역까지 내려올 일은 없었다.노현우는 딱히 부정하지 않고 담뱃재를 톡 털었다.남자는 담배 한 대를 다 피우고 또 한 대에 불을 붙였다."우리 집사람이 방에서 담배 피우지 말라고 쫓아내지 뭐예요."노현우가 남자를 힐끗 보았다.키가 작고 통통한 남자는 얼굴이 동글동글하니 사람 좋고 말하기 좋아하는 성격 같았고 옷차림은 보험 회사 직원쯤 되어 보였다.통통한 손가락에 낀 결혼반지가 살에 파묻혀 왠지 불편해 보였다.노현우의 시선이 반지에 닿자 남자가 싱글벙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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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05화

오히려 노현우가 나타나는 곳엔 늘 권지헌의 이름이 따라붙었다.두 사람 이름이 나란히 오르내리는 일이 허설아와 권지헌보다도 잦을 정도였다.노현우는 연애할 마음이 없었다.다만 어느 여름 폭우가 쏟아지던 날, 버스 정류장에서 막차 꽁무니만 바라보다 놓친 적이 있었다.비가 그치길 기다렸다가 학교로 돌아가야만 했다.빗줄기가 어찌나 거센지 도로에 물이 콸콸 흐를 지경이라 한 발짝도 뗄 수 없었다.우산을 쓴 여학생 하나가 비를 피하러 정류장 밑으로 들어왔다가 떠나면서 가방에서 우산을 하나 꺼내 내밀었다."저기요, 건영대 학생 맞죠? 이 우산 빌려줄게요."여학생이 쓰고 있던 건 건영대 로고가 찍힌 도서관에서 빌려주는 공용 우산인 듯했다.그런데 노현우한테 건넨 건 곰돌이가 그려진 핑크색 우산이었다.딱 봐도 여학생들이 쓰는 우산이었다.노현우는 여학생한테 도서관 우산을 주면 내일 직접 반납하겠다고 말하려 했다.하지만 여학생은 다짜고짜 핑크색 곰돌이 우산을 손에 쥐여주고는 돌아서서 빗속으로 들어가 버렸다.빗줄기가 너무 거세서 여학생 얼굴도 제대로 볼 수 없었고 어느 학부 학생인지도 몰랐다.그렇게 돌려줄 길이 없어진 우산은 지금도 노현우 집 서랍 속에 고이 모셔져 있었다.특별한 마음이었느냐고 하면 딱히 설명하기는 어려웠다.단 한 번 스친 낯선 여학생이었을 뿐이니까.그래도 노현우는 몇 년 동안 이따금 그 여학생을 떠올리곤 했다.억수로 쏟아지던 빗속에서 어쩔 줄 모르고 서 있던 자신의 모습도 떠올랐다.노현우에게 그 우산은 좀처럼 마주하기 힘든 호의였다.김지유와는 달랐다.이제 어른이 된 노현우는 자신이 뭘 하는지도 알았고 김지유한테 품은 호감이 한순간의 충동이 아니라는 것도 분명히 알고 있었다.한참 만에야 노현우가 입을 열었다."좋아한 사람 없었어요. 학교 다닐 땐 공부벌레였거든요."남자가 농담으로 받아쳤다."딱 봐도 범생 스타일이시네요. 맨날 옆 반 예쁜 여학생들이나 쳐다보던 우리랑은 다른 부류죠."남자가 통통한 머리를 긁적이며 어떻게 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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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06화

알고 지낸 뒤로 김지유는 노현우를 계속 노 대표님이라고 불렀다.전에는 별생각이 없었지만 왠지 거리감이 느껴졌다.이미 옷을 갈아입은 김지유는 타이트한 니트 원피스 위에 셔츠 재킷을 걸치고 있어 늘씬하고 가녀린 뒷모습에 여리여리한 팔이 보였다.전화기 너머 권서진은 휴대폰을 목에 받친 채 매니큐어를 바르고 있었다."알아봐 줄게. 설마 걔가 또 무슨 짓 벌이겠어?"현서가 감옥에 들어가기 전에 연민규는 이미 이혼을 마친 뒤였다.아이는 현서 부모가 데려가 키우고 있었다.연중근과 정선주 부부도 아직 얌전히 복역 중이니 현서가 출소한다 한들 당장 새로 기댈 언덕을 찾을 수는 없었다.김지유가 손을 들어 미간을 꾹꾹 눌렀다."몇 년 형 받았던 걸로 기억해서 아직 출소는 안 했을 것 같은데 내가 너무 생각이 많은 걸지도 몰라요."어쩌면 전에 크게 데인 탓에 지레 겁을 먹은 건지도 몰랐다.양준우는 권서진이 편하게 통화할 수 있도록 옆에서 휴대폰을 들어주었다.권서진이 손끝의 매니큐어를 후후 불며 말했다."그럼 최근에 현서 면회 간 사람이 있는지 알아봐 줄게.""그것도 좋아요. 고마워요, 서진 씨."권서진이 피식 웃으며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궁금해 죽겠다는 티를 잔뜩 내며 물었다."그거 아직 안 물어봤네. 노 대표님하고는 어떻게 됐어?"김지유는 얼굴에 난 여드름을 손으로 긁적이며 쭈뼛대다가 나지막하게 말했다."나도 잘 모르겠어요. 노 대표님은…… 괜찮은 사람이에요.""괜찮지. 준우 씨도 사람이 됨됨이가 반듯하다고 하더라. 좋으면 꽉 잡아."김지유는 시선을 내린 채 호텔 아래 관광지를 내려다보았다.위에서 내려다보니 연잎이 무성한 관광지가 한눈에 들어와 그 사이를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는 재미가 있었다."……먼저 끊을게요. 두 사람 재밌는 시간 보내요, 급한 일은 아니니까요."김지유는 전화를 끊고 휴대폰을 집어넣었다.돌아서는데 언제부터 뒤에 있었는지 모를 노현우 때문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노현우 몸에는 담배 냄새가 살짝 남아 있었다. 문밖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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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07화

"머리가 아파서 잠깐 눈 붙였어요."권서진은 투덜거리긴 했지만 정말로 나무라는 건 아니었다."현서 아직 출소 안 했대, 이건 좋은 소식이지? 최근에 누가 면회 갔는지는 바로 찾아보기가 어려워서 월요일에 준우 씨가 출근하면 다른 부서에 물어봐 준대.""네. 고마워요, 서진 씨."소식을 듣자마자 제일 먼저 김지유에게 알려준 게 분명했다.잠시 더 얘기를 나눈 뒤, 김지유는 전화를 끊고 침대에서 일어났다.거실에서 계속 일하고 있던 노현우는 자다 일어나 얼굴이 발그레하고 머리가 헝클어진 김지유를 보며 웃었다."잘 잤어요? 마침 저녁 먹을 때 다 됐으니까 준비하고 밥 먹으러 나가요."점심에 남긴 요리가 사장님 냉장고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당연히 먹으러 가야 했다.김지유는 얼굴이 확 붉어졌다."미안해요, 너무 오래 잤네요……"30분만 자고 일어날 생각이었는데 눕자마자 머리가 지끈거려서 진통제를 먹고 다시 누웠더니 약기운이 도는 바람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잔 것이다.노현우를 그동안 계속 기다리게 했다는 게 왠지 미안해졌다.노현우가 무심하게 슬쩍 바라보았다.하필이면 낮에 담배 피우러 내려갔다가 마주친 남자의 말이 지금 머릿속에 떠올랐다.정 기분이 내키지 않으면 키스해서 빚이라도 받아내라던 말.노현우의 목젖이 꿀렁였다.오후 내내 자고 일어난 김지유는 얼굴이 발그레하고 머리카락은 얼굴에 달라붙어 있었으며 셔츠 가디건도 걸치지 않은 채 타이트한 니트 원피스 차림이었다.몸에 착 붙은 원피스가 늘씬하고 고운 몸매 라인을 고스란히 드러냈다.김지유를 안아본 적 있는 노현우도 들어갈 데는 잘록하게 들어가고 나올 데는 볼륨이 있는 몸매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노현우는 컵을 들어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냉수가 잡생각도 가라앉혀 주기를 바랐다."괜찮아요. 어차피 집에 있어도 일했을 거예요. 가서 준비해요."김지유는 조금 전 자신을 바라보던 노현우의 시선이 왠지 뜨겁게 느껴졌다.그렇게 영문도 모른 채 욕실로 들어갔다.거울을 확인하고서야 자는 사이에 원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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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08화

남자가 노현우를 슬쩍 보더니 가까이 다가와 귓속말을 했다."여자친구가 이렇게 예쁘다고 진작 말하지 그랬어요. 나 같아도 애가 탔겠어요."노현우는 말없이 웃으며 반짝이는 눈으로 남자와 아내를 바라보았다.남자가 얼른 덧붙였다."물론 우리 집사람한테는 좀 못 미치지만요. 애 낳기 전엔 얼마나 예뻤는지 몰라요.""티켓 고마워요. 꼭 보러 갈게요."노현우와 김지유가 가고 나서야 남자의 아내가 불쑥 물었다."뮤지컬 수위가 있다는 거 말 안 했어?"유럽 뮤지컬은 연령 제한까지 있을 만큼 수위가 만만치 않았다.남자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성인 커플인데 수위 좀 세면 어때서?""그건 그러네."-다시 식당을 찾으니 사장님이 두 사람을 보자마자 미리 준비해 둔 요리를 차려주었다.점심에 남긴 두 가지 요리에 새로 끓인 국까지 곁들여 있었다.갈비 연근탕은 냄새만 맡아도 구수하고 달큰했다.사장님이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오후 내내 푹 끓였어요. 마른 오징어도 넣었으니까 밤에 잠을 푹 잘 거예요."노현우가 고맙다며 인사했다.주말 저녁이라 작은 가게가 손님으로 북적였는데 메뉴판에도 없는 음식을 먹는 건 두 사람 테이블뿐이었다.집밥 냄새가 물씬 났다.이 지역 식당 메뉴야 다 거기서 거기였지만 건영시 토박이가 아닌 김지유는 집밥을 먹어볼 일도 드물었다.국을 한 모금 마신 김지유가 실눈을 떴다.좋아하는 음식을 먹고 신이 난 고양이가 눈을 가늘게 뜨는 모습 같았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노현우는 저도 모르게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노현우는 밥을 먹으며 김지유한테 학창 시절 얘기를 꺼냈다."학교 다닐 때 제일 싫었던 사람이 권지헌이었어요.""……네?""지헌이만 있으면 내가 1등을 못 했거든요. 진짜 사람 열받게 했어요."사뭇 진지한 노현우의 표정에 김지유는 웃음을 꾹 참았다."난 또 두 사람이 같이 나타날 때마다 커플로 엮는 사람들 때문인 줄 알았어요."노현우가 멈칫하더니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그러긴 했죠. 그런데 그땐 커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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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09화

마침 그 무렵 김지유도 마음이 여리고 예민했던 탓에 현서의 수작에 넘어가 괴롭힘을 당했다.노현우는 권지헌에게 연락한 적이 있었다.하지만 권지헌한테서는 아무런 답도 얻지 못했다."현서가 감옥에 가기 전에 둘 사이에 일이 좀 있긴 했지. 그런데 그건 김지유 씨 일이잖아.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권지헌 말투에는 조롱하는 느낌이 가득했다.궁금한 게 있으면 직접 물어볼 것이지 다른 남자한테까지 전화를 걸어 캐묻는 노현우가 유난스럽다는 뉘앙스였다.혼자 갈팡질팡하는 모습도 우스웠다.권지헌이 한마디 덧붙였다."누군가를 좋아할 때 제일 중요한 건 진심이야."노현우는 괜히 한바탕 놀림만 당하고 말았다.그래도 권지헌의 말투에서 거리낌 없는 솔직함이 느껴졌다.노현우도 겁부터 먹고 망설이는 자신이 우스웠다.게시글을 다 읽고 나서야 노현우는 김지유의 과거 때문이 아니라 질투라는 걸 깨달았다.다만 김지유가 생각하는 것처럼 마음이 넓고 쿨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차마 인정하지 못했을 뿐이었다.노현우도 평범한 남자였고 스스로도 몰랐던 강한 소유욕까지 갖고 있었다.김지유가 밥을 먹다가 눈에 띄게 멈칫했다."그 일 알고 있었어요?""지유 씨가 말해주지 않아서 교내 커뮤니티에서 글 몇 개 찾아보고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충 알아요. 지유 씨는 잘못 없어요."김지유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나도 딴마음이 있었던 건 사실이잖아요.""그냥 누군가를 좋아했을 뿐이잖아요. 지헌이가 매력적인 남자인 것도 사실이고요. 좋아하는 마음이 드는 건 당연하죠."노현우가 소매를 걷어붙이고 김지유 그릇에 큼직한 새우를 집어주었다."그래도 권지헌보다 나를 좋아하는 게 가성비는 더 좋을 거예요."김지유는 말을 잃었다.노현우의 노골적인 말에 순간 얼굴이 화끈거리며 멍해졌다."그때는 노 대표님을 몰랐잖아요……"사실 그때는 권지헌과도 잘 아는 사이가 아니었다.한때 김지유에게 권지헌을 좋아했다는 사실은 입 밖에 내기 힘든 과거였다.그런데 어둡고 우울했던 그 기억은 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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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10화

무대 위 조명이 어지럽게 움직였다.몽롱하고 야릇한 빛과 실루엣이 고전적인 유럽풍 음악에 맞춰 새로운 멜로디로 바뀌었다.공연 무대에서 보여줄 수 있는 장면이니 노골적이라고 해봐야 이 정도가 한계였다.예술적인 표현에 온갖 암시를 담은 무대 연출일 뿐이었다.노현우는 꼭 아이를 데리고 뮤지컬을 보러 온 부모 같았다.노골적이다 싶은 장면이 나올 때마다 손을 뻗어 김지유의 시야를 가리고 못 보게 했다.손을 떼자 마침 무대 위 남녀 주인공이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김지유는 가늘고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며 여전히 눈앞에 있던 노현우의 손을 덥석 잡았다.방금 포옹 장면은 못 보게 하더니 키스 장면은 봐도 되냐고 말없이 묻는 듯했다.노현우가 소리 없이 헛기침을 했다.사실 김지유는 학부생 때 이 뮤지컬을 본 적이 있었다.건영대 연극 동아리는 해마다 공연을 했는데 지금 보고 있는 작품도 단골 레퍼토리 가운데 하나였다.무대 위 배우들이 서로 껴안은 채 춤을 추기 시작했다.전부 영어 대사였고 상상력을 자극하는 몇몇 장면을 빼면 나머지 연기는 흠잡을 데가 없었다.공연이 끝나고 객석에 불이 들어오자 배우들이 인사를 했다.김지유네 앞줄에 앉아 있던 사람이 갑자기 일어나더니 옆자리 여자한테 프러포즈를 했다.자리를 뜨려던 관객들도 순식간에 걸음을 멈추고 뜻밖의 이벤트를 구경했다.인터넷에서야 프러포즈 영상을 자주 봤지만 현실에서 직접 보는 건 김지유도 처음이었다. 그것도 공연장 안에서라니.주변 사람들의 환호 속에 여자는 프러포즈를 받아들였다.그리고 남자가 준비한 꽃다발을 주변 관객들에게 한 송이씩 나눠주었다.김지유도 탐스럽게 핀 장미 한 송이를 받아 기분 좋은 행운까지 덤으로 얻었다.공연장을 나서니 밖에는 가랑비가 내리고 있어 도시 전체에 몽롱한 물안개가 드리워져 있었다.노현우가 한 손으로 김지유의 머리 위를 가려주고 다른 손을 빗속으로 내밀었다."비가 많이 오진 않네요. 차 부를게요."김지유가 보기에도 비가 세게 오지 않았다.지금 호텔로 돌아가 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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