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그날, 나는 태자가 아닌 황제를 선택했다: Chapter 171 - Chapter 180

340 Chapters

제171화

금영은 바닥에 넘어진 배명월을 차갑게 내려다보았다.그런데 막 입을 열려던 찰나, 한 사람이 갑자기 튀어나오더니 재빨리 배명월을 부축했다.그 사람은 바로 태자였다.“명월아, 괜찮으냐?”놀람과 걱정이 동시에 담긴 목소리였다. 배명월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눈물을 글썽였다. 아까 황제에게는 통하지 않던 수단을 모조리 태자에게 쏟아부은 것이었다.“저는… 괜찮아요….”배명월이 태자의 품에서 몸을 떨며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러니 언니를 탓하지 마세요. 언니가 절 민 게 아니라, 제가 조심성이 없어서… 넘어진 거예요.”하지만 말과 달리 금영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눈빛엔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태자는 배명월을 일으켜 세운 뒤, 차가운 눈으로 금영을 바라봤다.그의 목소리엔 억누르기 힘든 노기가 서려 있었다.“배금영, 대체 이게 무슨 짓이냐? 나는 네가 요즘 얌전하길래, 잘못을 뉘우치며 지내고 있는 줄 알았다. 이제 우리의 혼례일도 정해졌고, 넌 그저 마음 놓고 시집올 준비나 하면 될 것을….”잠시 뜸을 들인 태자가 더 매서운 눈빛으로 금영을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아직도 명월이를 괴롭히고 있다니!”금영이 담담히 되물었다.“이 아이가 그리도 안타까우십니까? 그러면 직접 폐하께 가서 저랑 파혼하겠다고 하시고, 이 아이를 태자비로 맞아들이세요.”태자가 차갑게 쏘아붙였다.“내가 그렇게 못할 것 같으냐?”금영이 눈썹을 치켜 올리며 말했다.“그렇게 해주신다면, 너무 감사할 것 같네요. 부디 좋은 결과가 있길 바라요.”금영의 태도에 태자는 완전히 뚜껑이 열렸다. 그는 배명월을 한쪽에 앉혀 둔 뒤, 곧바로 봉의궁으로 향했다.그 시각, 봉의궁에 있던 황후의 심기도 좋지 않았다. 가장 듣고 싶지 않던 소식이 또 전해졌기 때문이다.“뭐라고? 폐하께서 또 선화전에 들르셨다고?”서 황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역시 내 짐작이 맞았구나. 폐하를 홀린 그 계집이 선화전에 있는 게 분명해.”눈빛을 싸늘하게 굳힌 서 황후가 이를 갈며 말했다.“감히 내 눈앞
Read more

제172화

그 말을 들은 서 황후는 표정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꽤나 심정이 복잡한 것 같았다. 그렇게 한참, 서 황후가 낮고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이 혼사는 폐하께서 직접 정하신 것이다. 네가 아무리 불만이 있더라도, 금영을 태자비로 맞이하는 것 외의 선택지는 없다.”서 황후는 마음속으로 품은 진짜 계획을 태자에게 털어놓지 않았다. 태자는 태자가 해야 할 일에만 집중하길 바랐기 때문이다. 빛 아래에 드러낼 수 없는 일은 그녀의 몫이었다. 물론 대놓고 파혼을 입에 올린다면, 황제도 파혼을 허락하지 않을 수는 없을 터였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태자는 의리를 저버렸다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된다.한편, 태자는 서 황후가 완강하게 나오자 오히려 한편으로 안도감을 느꼈다. 하지만 동시에 분노도 치솟았다. 아까 자신이 파혼을 호언장담했는데, 만약 이루지 못한다면 금영은 더욱 기세등등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그는 한 번쯤은 금영을 단단히 눌러줄 필요가 있다고 여겼다. 태자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서 황후가 입을 열었다.“그런데 소한아, 혹시 귀녀들 가운데 눈에 들어오는 아이는 없더냐? 혼례를 치른 위에 측비 두 명 정도는 들여도 된다.”예전 같았으면 태자는 이런 말을 듣자마자 바로 거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서 황후의 뜻을 거스르지 않았다.“전적으로 모후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적당하다 여겨지는 사람이 있다면, 제 측비로 들여주십시오.”그 말을 들은 서 황후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서씨 가문에서 점 찍어 놓은 귀녀가 있었다. 이번 기회에 그 아이를 태자의 측비로 들인다면, 딱 알맞았다. 물론 가능하다면, 태자비 자리까지 올리고 싶긴 했다.하지만 황제의 성정상 삼대를 이어 황후의 자리에 서씨 가문 출신이 올라가는 걸 허락할 리 없었다. 그러니 당장은 이 방법밖에 없었다.그렇게 마침 태자가 나왔을 때였다. 곁을 따르던 환관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전하, 곧 측비를 들일 준비를 하신다고요?”태자가 걸음을 멈추고 환관을 쳐다봤다. 이 환관의
Read more

제173화

신귀안이 입을 열었다.“전하께선 이 나라의 태자이시고, 훗날….”그러면서 현청전 쪽을 한 번 힐끗 바라봤다. 굳이 입 밖으로 다 꺼내지 않아도, 태자는 그 뜻을 알아들었다.신귀안이 다시 말을 이었다.“전하와 같은 신분이라면 세상 어느 여인을 원하신들, 그것이 곧 그 여인에게는 가늠할 수 없는 성은이 아니겠습니까? 영안후부라 한들 감히 전하의 뜻을 어찌 거절할 수 없을 것이옵니다.”그 말을 들은 태자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자신의 권위를 치켜세우는 달콤한 말에 오만한 기색이 전신에서 자연스레 배어 나왔다. 확실히 일리가 있었다.하지만 배명월은 영안후부의 진짜 적녀였다. 그런 그녀를 겨우 측비의 자리에 앉힌다는 것은 너무도 가혹한 처사였다. 그렇다고 금영을 태자비의 자리에서 내칠 수도 없었다. 금영과는 그간 쌓아온 정이 깊었고, 무엇보다 폐하께서 친히 점지하신 배필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태자의 미간이 절로 좁혀졌다.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던 태자가 다시 신귀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이 일은 좀 더 고민해보마. 대신 너는 앞으로 다시는 이 일을 입에 올리지 말거라.”신귀안이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명을 받들겠나이다.”비록 태자는 직접 시인하지 않았지만, 신귀안은 잘 알고 있었다. 방금 자신이 한 말은 분명 태자의 마음 깊은 곳을 건드렸을 터였다.그 시각, 금영은 자신의 처소로 돌아와 거울 앞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면사를 벗은 뒤, 자신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요즘 들어 이 면사 하나로 두 사람의 인생을 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떨 때는 스스로 자신의 얼굴이 명확하게 생각나지 않을 정도였다. 금영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언제쯤 이 면사를 벗고 당당하게 궁 안을 활보할 수 있을까? 언제쯤 모든 사람에게 자신이 배금영이자 영지라는 것을 밝힐 수 있을까?’금영은 그냥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 더는 숨죽인 채 살고 싶지 않았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금영은 더는 손 놓고 기다릴 수 없다
Read more

제174화

금영은 해수를 힐끗 바라보았다.“그냥 내가 시키는 대로 하거라.”금영은 어째서 이런 일을 꾸미는지 아직 다른 이들에게 털어놓을 생각이 없었다.달구경을 구실 삼아 등월루에 올라, 그곳에서 황제와 우연을 가장해 마주친다는 발상 자체가 지나치게 파격적이었기 때문이다.해수가 분부대로 움직이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금영은 밖으로 나섰다. 회귀한 뒤로 처음 가게 되는 길이었지만, 손금 보듯 훤히 꿰고 있었다. 귀신으로 떠돌던 시절의 기억 덕분이었다.금영은 익숙한 걸음으로 등월루를 향해 나아갔다. 기억 속과 조금도 다르지 않게, 그곳은 몹시 외지고 고요했다. 아직 막 해가 저문 시각이라 황제가 올 때는 아니었고, 아래에도 지키는 사람 하나 보이지 않았다.금영은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 다음, 뒤에 있는 계단을 한 층씩 올라 마침내 등월루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관월대에 이르렀다.그곳에는 낮은 책상 하나와 바둑판이 올려져 있었다. 흑과 백의 돌이 어지럽게 놓인 모습은, 마치 승부를 끝내지 못한 채 멈춘 바둑판 같았다.금영은 방석 위에 앉아 조용히 기다렸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겨울의 앙상한 가지 위에 걸려 있던 달은 어느새 누각 위로 떠올라 먹빛 하늘 한가운데 걸렸다. 그리고 높은 곳에서 찬바람을 오래 맞은 탓에 금영의 몸도 제법 차게 식어 있었다.어쩌면 황제가 나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막 스치던 순간, 누각 안쪽에서 층계를 밟고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려왔다.금영은 잠시 숨을 죽이고 넋을 잃은 듯, 달빛 아래 바둑판을 바라보았다.관월대에 올라선 황제의 눈에 고요히 앉아 있는 그림자 하나가 들어왔다.그는 잠시 멈칫했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이곳은 평소 찾는 사람이 매우 드문 곳이었다. 하물며 한겨울 밤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황제가 낮고 무거운 목소리로 물었다.“거기 누구냐.”금영은 누가 올라온 줄도 몰랐던 사람처럼 흠칫하며 퍼뜩 정신을 차린 척했다. 그리고는 황급히 몸을 일으켜 황제를 바라보며 당황한 목소리로 중얼
Read more

제175화

그 말을 마친 금영은 가만히 황제의 안색을 살폈다. 황제는 그 발언에 상당히 크게 놀란 듯 금영을 응시하더니, 이내 무겁게 입을 열었다.“방금 한 말은 못 들은 것으로 하겠다.”황제는 금영이 진심으로 이런 말을 내뱉을 것이라 여기지 않았다. 그는 금영이 태자를 얼마나 연모해 왔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태자를 지키기 위해 제 몸을 던져 화살까지 막아냈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파혼을 입에 올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조금 전에 자신의 훈계가 지나치게 날카로웠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황제의 슬하엔 공주가 없었고, 부드럽게 훈계하는 것이 익숙지 않았다. 하지만 금영은 아직 혼례도 치르지 않은 어린 귀녀, 이런 나무람에 익숙지 않아 크게 상심한 것 같았다.잠시 자신의 과오를 되짚어본 황제는 목소리를 한결 누그러뜨렸다. 그러나 눈빛만큼은 여전히 완강했다.“너는 짐이 친히 점지한 태자비다. 이 사실만큼은 앞으로도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다.”이 정도 확답이면 금영의 불안도 어느 정도 가라앉으리라 여긴 황제가 말을 이었다.“짐의 뜻은 네가 태자비다운 기개를 세워, 누구도 감히 너를 얕보지 못하게 하라는 것이다.”그는 이미 아랫사람들을 통해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금영은 입궁한 뒤 단 한 번도 자신의 위세를 내세운 적이 없었다. 겸손하고 조신한 것은 미덕이었으나, 지나치게 법도에만 매여 주눅 들어 있는 것 또한 군주의 배필로서는 마땅치 않은 일이었다.금영은 가만히 황제를 바라보다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늘 신녀를 너그럽게 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제외하면, 신녀에게 이토록 따뜻한 말씀을 건네주신 분은 아무도 없었습니다.”그 말에 황제는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금영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명망 높은 영안후부의 여식이라는 이름을 지닌 아이가 어째서 이리도 사랑 한 자락 받아 보지 못한 이처럼 구는지, 가슴 한구석에 서늘한 의아함이 밀려왔다.하지만 이내 한참 전에 들었던 보고가 뇌리를 스쳤다. 영안후 부부가 오래전 잃
Read more

제176화

황제가 물끄러미 금영을 바라보며 물었다.“바둑을 둘 줄 아느냐?”금영이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네. 할아버지와 자주 마주 앉아 두곤 했습니다.”황제는 홀로 지난날을 추억하려 이곳에 오른 참이었다. 하나 금영을 마주하니 세상을 떠난 선대 영안후의 기억이 더욱 짙게 배어 나왔다. 황제가 흑돌 하나를 집어 들었다.툭. 명쾌한 소리와 함께 검은 돌이 놓였다. 어서 두어 보라는 무언의 재촉이었다.금영은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매끄러운 백돌을 집어 든 뒤, 망설임 없이 수를 내려놓았다. 달빛 아래, 흑돌과 백돌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맞붙었다.금영은 알고 있었다. 지금 마주하고 있는 것은 단순한 유희가 아니었다. 그녀는 이미 제 발로 거대한 수 싸움의 한복판에 걸어 들어온 셈이었다. 하지만 그 치열한 수 싸움 끝에 마지막 수를 두며 웃게 될 이가 누구일지는, 끝까지 가봐야만 알 수 있는 법이었다.마침내 금영이가 마지막 백돌을 내려놓았다. 판의 흐름이 송두리째 뒤바뀐 순간이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히 예를 갖추며 입을 열었다.“송구합니다, 폐하....”하지만 황제가 그녀의 사죄를 가로챘다.“앉거라.”금영은 천천히 다시 자리에 앉았다. 황제는 그런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가 한마디를 툭 던졌다.“송구할 것 없다.”금영은 슬쩍 바둑판을 힐끗거렸다. 명백한 그녀의 승리였지만, 금영은 난처한 척 굴었다.그 속내를 알 리 없는 황제가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과연 선대 영안후의 가르침을 제대로 받았구나. 짐을 이기다니, 실력이 제법이다.”황제와 마주 앉은 이들은 대개 제 실력을 숨기기에 급급했다. 감히 황제를 이겼다가 화를 입을까 두려워, 비굴한 패배를 자처하는 것이 그들의 생존 방식이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눈앞의 이 아가씨는 달랐다. 그저 마음이 맑고 곧을 뿐이었다.황제는 오늘 안색이 어두운 그녀를 위해 일부러 길을 터주었다. 애초에 져주기 위해 판을 짰으니, 이 패배는 곧 그의 의도대로 이루어진 승리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기분이 나쁠 리가
Read more

제177화

시린 달빛이 금영의 위로 고요히 쏟아졌다. 그 때문인지 평소보다 더 침착했고, 조금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다.황제가 질문을 던졌다."그렇다면 나와 너의 조부는 누굴 그리워하고 있는 것 같으냐?"금영이 낮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답했다."태평한 세상에 산다 하여 변방의 살을 에는 추위를 잊어서는 안 되며, 제 한 몸이 편안하다 하여 나라를 위해 스러진 목숨들을 잊어서는 안 되겠지요."황제는 눈앞에 있는 여인을 다시금 찬찬히 살펴보았다. 이제 겨우 열일곱, 혹은 열여덟쯤으로 보이는 나이였다. 보통의 귀녀들이라면 감히 품지도 못 할 혜안을 이 여인은 서슴없이 내뱉고 있었다.금영의 담담한 목소리는 황제의 심연에 가라앉아 긴 여운을 그려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서야 황제가 깊은 감탄을 담아 입을 열었다."영안후부의 기개가 오직 너에게로만 이어졌구나."태자비를 고르는 일은 단순히 태자의 배필을 찾는 것이 아니었다. 훗날 태자와 함께 이 나라를 짊어질 국모의 재목을 찾는 일이었다.금영은 방금 보여준 모습만으로도 자신이 그 자리에 오를 자격이 충분함을 증명했다.이때, 위명이 술상을 받들고 조심스레 올라왔다. 그러나 당연히 혼자일 거라 예상했던 황제의 맞은편에 붉은 망토를 걸친 여인이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동시에 머릿속에서 오만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대체 요즘 폐하께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최근 들어 황제의 행보는 지나치게 심상치 않았다. 버려진 전각에서 정체 모를 여인과 하룻밤을 보낸 것도 모자라, 부상을 입었던 설산에서도 또다시 그 여인과 마주쳤다. 게다가 이제는 이 외진 궁 외곽에서까지 정체 모를 여인이 나타났다.'설마 폐하께서 부정한 것에 홀리기라도 하신 건가.'위명의 머릿속에 온갖 괴담들이 떠올랐다. 그중에서도 산속에 잘못 발을 들였다가 진기를 빨아먹는 요괴가 들러붙었다는 이야기가 유독 마음에 걸렸다."폐, 폐하!"위명의 인기척을 느낀 황제가 고개를 돌렸다. 위명이 선 자리에선 금영의 가녀린 뒷모습만
Read more

제178화

금영은 황제에게 술을 올린 뒤, 제 앞의 잔도 조용히 채웠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달빛을 향해 잔을 들어 올린 뒤, 천천히 땅에 술을 부었다. 그렇게 고인의 혼을 기리는 예를 마친 후에야 금영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황제는 금영의 그 모든 움직임을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지켜보았다. 금영이 옅은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향을 맡자마자 이것이 이화백(梨花白: 배꽃 향이 담긴 술)임을 알았습니다. 생전의 할아버지께서 유독 아끼시던 술이지요."궁 안에서 사사로이 제를 올리는 것은 엄격히 금지된 일이었으나, 금영의 이 짧은 몸짓은 법도를 크게 어지럽히는 수준은 아니었다. 더구나 그녀가 기린 이는 제국의 충신이었던 선대 영안후였다.황제는 잔을 들어 단숨에 목을 축였다. 그제야 비로소 금영의 자태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금영은 한 손으로 넓은 소매를 들어 올려 얼굴을 가린 채, 다른 손으로는 면사 자락을 살짝 걷어 올려 조심스레 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달빛 아래 일렁이는 그 섬세한 손길은 황제의 눈에 깊이 각인되었다.금영은 잔을 비운 뒤 다시 황제의 잔을 채웠다. 황제는 거부하지 않고 연달아 석 잔을 비워냈다. 사실 이곳에 오르기 전 이미 술을 몇 잔 걸쳤던 터라, 조금씩 몸속에서 취기가 번지고 있었다.황제는 살짝 몽롱한 시선으로 금영을 바라보다가 문득 한 사람을 떠올렸다.시선이 자신에게 깊이 머무는 것을 느낀 금영은 일부러 고개를 조금 더 숙였다. 아직은 정체를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리고 오늘 밤이 아니었다면, 어둠이 짙은 밤이 아니었다면, 그녀 역시 감히 황제의 맞은편에 앉아 술잔을 주고받을 배짱은 내지 못했을 터였다.황제는 잠시 정신이 아득해졌지만 곧 다시 이성을 찾았다. 그러고는 작은 실소와 함께 눈빛을 차갑게 가다듬었다.하필 이런 때에, 몇 번이고 달아나 자신을 제대로 사람 취급도 하지 않던 그 사람을 떠올려서는 안 되었다.황제는 금영을 바라보며 말했다."밤이 늦었다. 이만 돌아가 쉬어야겠다."그 말을 남긴 채 황제는 먼저
Read more

제179화

황제가 금영을 바라보며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데려다주마."금영은 잠시 멈칫하다가 작게 대답했다."아...."금영의 분위기가 가라앉을 것을 눈치챈 황제가 미간을 살짝 좁혔다."선화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것이냐?"말로는 아니라고 했지만, 역시나 아직도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게 분명해 보였다.금영이 고개를 저었다."아닙니다."황제는 살짝 머리가 아파왔다. 그냥 말을 꺼내면 될 텐데, 금영이 입을 열지 않으니 매번 직접 상황을 추측할 수밖에 없었다.안 그래도 나랏일만으로도 바쁜 몸인데, 어린 여식의 마음까지 헤아리려니, 황제는 살짝 피곤이 몰려왔다.'산 너머 산이군.'황제는 금영의 생각을 모두 알 수는 없었지만, 이대로 그냥 속으로만 삭이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오늘 밤은 늦었으니, 내일 사람을 보내 상황을 정리하도록 하마."금영은 황제가 어떤 대처를 할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진심을 담아 감사의 뜻을 전했다."폐하, 마음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매번 저 때문에 번거롭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마침 그때, 짙은 구름 한 점이 조용히 달빛을 가렸다.등불 없이는 한 치 앞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사람은 셋, 등불은 금영의 손에 든 것 하나밖에 없었다.물론 황제는 처음부터 금영을 혼자 보낼 생각이 없었다. 위명 역시 금영을 데려다주겠다고 나설 처지가 아니었다. 황제를 이 캄캄한 밤길에 두고 홀로 움직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세 사람은 함께 선화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위명은 황제가 금영을 직접 데려다주려 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금영은 등불을 들고 앞장서 걸어갔다. 하지만 조금 거리가 벌어질 때마다 뒤돌아보길 반복했다.그 모습을 본 황제가 말했다."두려워할 것 없다. 선화전에 도착할 때까지 짐이 함께하겠다."어린 귀녀가 어둠을 무서워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불안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등월루까진 어떻게 갔는지 의문이 들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
Read more

제180화

배명월이 입가에 묘한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태자 전하, 정말 저를 태자부에 들이실 거예요?"태자는 이미 내린 결정을 배명월에게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었다."그래."그러자 배명월이 걱정하는 척하며 다시 물었다."하지만 그러면 언니는 어쩌고요? 이 일을 알면 절대 받아주지 않을 거예요. 언니가 저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잘 아시잖아요. 그런 언니가 저와 같은 부군을 섬기려 하겠어요?"태자가 차갑게 대꾸했다."그건 내가 알아서 할 문제다. 그 아이의 생각 따윈 중요하지 않아."금영은 그제야 두 사람을 발견한 듯 어둠 속에서 한 걸음 나아갔다. 그러자 배명월이 세상에서 가장 놀란 표정을 가장하며 외쳤다."어, 언니? 여긴 어떻게 온 거야?"태자 역시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 자리에서 금영과 마주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모습이었다.금영은 태자를 쳐다보며 목소리를 미세하게 떨었다. 큰 상처를 받았지만, 어떻게든 덤덤해 보이려 애쓰는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서였다."전하께서 왜 등월루에 오지 않으시나 했더니... 여기서 제 동생과 밀회를 즐기고 계셨군요."태자의 얼굴이 순식간에 딱딱하게 굳어졌다."밀회라니, 말이 지나치구나."그러더니 작은 한숨과 함께 말을 이었다."어차피 방금 다 들었을 테니, 굳이 숨기지 않겠다. 난 너와 네 동생 모두 태자부로 들일 생각이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너와의 혼사는 폐하께서 직접 정해주신 것이니, 정비의 자리만큼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금영은 눈가를 붉힌 채 상처 받은 얼굴로 물었다."다시 재고하실 마음은 없으십니까?"태자가 뻔뻔한 얼굴로 답했다."너는 미래의 태자비다. 그러니 마땅히 네 본분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 괜한 질투심으로 소란을 피우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그러더니 잠시 뜸을 들이고는 한마디 덧붙였다."더구나 명월은 영안후부의 진짜 적녀가 아니냐? 네가 지금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 사실은 다 명월이의 것이었다. 그러니 오히려 고마워해야 마땅하지. 명월이가 겨우 측비
Read more
PREV
1
...
1617181920
...
34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