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나는 태자가 아닌 황제를 선택했다의 모든 챕터: 챕터 371 - 챕터 380

508 챕터

제371화

원래도 곁에 둔 이가 많지 않았던 금영에게 맹운산은 꽤 각별한 벗이었다. 이런 일로 그를 잃고 싶지 않았다.황제는 발걸음을 돌렸다. 점점 멀어져 가는 그를 보며, 손복안이 곁에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폐하, 금영 아가씨를 불러올까요...?"황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손복안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황제의 심기가 단단히 상한 듯했다. 금영이 황제를 이토록 흔들게 될 줄은 그도 미처 예상치 못했다.한편, 자꾸만 주변을 둘러보던 금영을 알아차린 맹운산이 물었다."뭐 찾아?"그러자 금영이 살짝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좀 전에 멀리서 황제를 본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맹운산, 나 잠깐 좀 볼일이 있어서 그런데, 먼저 전각으로 돌아가줄 수 있을까?""궁에서 네가 무슨 볼일이 있어?"맹운산은 의아해하다가도 곧 수긍하는 기색을 보였다. 오늘 여러 일을 겪은 금영이 혼자 있고 싶어 핑계를 대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래."금영은 가볍게 작별 인사를 한 뒤, 걸음을 옮겼다.하지만 한참이 지나도 황제가 사람을 보내 자신을 찾는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왠지 김샌 기분이 들었다.애초에 황제는 금영을 부를 생각이 없었던 듯했다.그런데 바로 이때, 손복안이 멀리서 다가왔다."금영 아가씨."금영은 그를 보자마자 바로 예를 올렸다."손 태감."손복안은 금영을 의미심장한 얼굴로 바라보다가 말했다."아가씨, 폐하께서 앞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금영은 그가 가리킨 방향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러자 황제가 팔각정에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그녀는 가볍게 손복안에게 인사를 건넨 뒤, 그쪽으로 향했다.그러자 해수도 뒤를 따르려 했다. 하지만 손복안이 앞을 가로막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팔각정에 도착하자, 황제가 등을 돌린 채 호수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금영은 정자 안에 들어서면서 낮게 그를 불렀다."폐하."하지만 황제는 뒤돌아보지 않았고, 금영은 곧바로 무릎을 꿇으며 예를 올리려 했다."신녀, 폐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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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2화

황제가 다시 입을 열었다."나온 지 한참 되었느냐?"금영이 답했다."아닙니다, 폐하. 나온 지는 오래되지 않았사옵니다."그러자 황제가 무심히 물었다."전각에서 나오자마자 곧장 나를 찾으러 온 것이냐?"금영은 조금 전 일을 떠올렸다. 하지만 전각에서 나오자마자 맹운산에게 고백받은 것도 모자라 태자와도 한바탕 했다는 것을 밝히기 꺼려졌다.앞으로 황제의 여인이 되어야 하는데, 어릴 적부터 벗으로 지내던 맹운산이 자신을 마음에 두고 있다는 것을 황제가 알게 된다면 달가워하지 않을 거라 여겼기 때문이다.금영은 앞날이 창창한 맹운산의 앞길을 막고 싶지 않았다.금영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네, 폐하. 잠시 밖을 산책하던 도중, 폐하께서 계신 것을 보고 인사드리러 왔습니다."황제는 금영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거짓임을 딱히 알아차리지 못한 얼굴이었다.그는 천천히 망토를 풀어 금영의 어깨를 감싸주었다.따뜻한 온기가 스며들자, 금영의 마음도 함께 누그러졌다.금영은 고개를 들었다. 강하고, 위엄이 있으면서도 다정함까지 갖춘 황제가 눈에 들어왔다. 거기에 권력을 이용해 금영을 억지로 선택하게 만들지도 않았다. 이런 제왕은 확실히 드물었다.황제가 물었다."태자와 파혼한 것이 후회되지 않느냐?"금영은 고개를 저었다."후회되지 않습니다. 한때... 태자 전하를 마음에 두었던 것은 사실입니다만...."잠시 뜸을 들인 그녀가 조용히 덧붙였다."지금은 아닙니다."이제는 확실히 선을 그을 때였다.그러자 황제가 물었다."어째서? 혹... 짐 때문인 것이냐?"금영은 고개를 저었다. 속마음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정이란 것은 먼저 주는 쪽이 지는 법이었다.그러자 황제가 옅게 웃었다. 오늘 맹운산과 함께 있는 모습을 봐서 그런지, 금영의 말이 진심처럼 느껴지지 않았다.금영은 그의 반응에 어딘가 이상함을 느꼈다. 황제는 분명 미소 짓고 있었지만, 그 눈빛은 아니었다.불안함을 느낀 그녀가 말을 이었다."전하의 마음은... 명월에게 가 있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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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3화

황제는 잠시 말을 잃었다. 금영이 먼저 이런 얘기를 꺼낼 줄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다.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금영을 바라보다가, 분명한 목소리로 물었다."없었던 일로 하자고?"그러자 금영이 차분하게 답했다."폐하께선 성군이십니다. 만일... 신녀와 얽힌 사실이 알려진다면, 구설수에 오를지도 모릅니다."황제는 금영이 영지라는 사실을 안 뒤로도 입궁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 침묵을 깨려 일부러 파혼까지 청해 보았으나, 돌아오는 반응은 여전히 미적지근했다. 저로 인해 황제가 깊은 고뇌에 빠져 있음을 금영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그렇다면 차라리 한발 물러서는 편이 나았다. 입궁에는 뜻이 없다는 듯 속 깊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 그것이 황제의 마음을 더 거세게 흔들 수 있는 길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황제는 좀 전 광경까지 목격했는데, 이런 말이 나오자 더 이상 감정을 억누를 수 없었다.그가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너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짐은 그리 못 한다."황제는 소매를 거칠게 떨쳐내며 몸을 돌렸다. 더는 그녀를 마주했다간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을 것 같았고, 자칫 제 이성이 어디까지 무너질지 스스로도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금영은 멀어지는 황제의 뒷모습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도무지 그의 진심을 짐작할 수 없었다. 한발 물러서기로 한 선택이 과연 옳았던 것인지조차 이제는 불투명해졌다. 비록 회귀를 통해 새로운 삶을 얻었다 하나, 그녀 역시 귀신으로 떠돌던 삼 년의 세월을 더했을 뿐인 어린 영혼이었다. 제왕의 깊은 속내를 읽어내기에 아직 충분하지 않았다.*해수는 한참을 기다린 끝에 드디어 다시 금영과 마주할 수 있었다.그녀는 자신의 주인을 보자마자 곧바로 물었다."아가씨, 괜찮으십니까? 저도 바로 따라가려고 했는데, 손 태감께서 막으셔서... 정말 걱정 많이 했습니다. 혹시 파혼한 것 때문에 폐하께서 벌을 내리신 건 아니죠?"금영이 고개를 저었다."걱정 말거라. 그 일로 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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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4화

전각에 발을 들인 맹운산은 누군가의 집요한 시선이 그림자처럼 자신을 쫓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의아함에 주변을 살폈으나, 감히 상석을 올려다볼 엄두는 내지 못했다. 결국 맹운산의 시선이 멎은 곳은 태자가 있는 자리였다. 착각이 아니었다. 태자는 금영과 그를 형형한 눈으로 쏘아보고 있었다. 그 눈빛에는 숨길 수 없는 불쾌감과 서늘한 분노가 서려 있었다.어느덧 한 시진이 흘러 날은 완전히 저물었다. 그 긴 시간 동안 금영은 끝내 전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줄곧 맹운산과 함께 있었던 것이다. 그 사실이 떠오르자, 태자의 가슴속에 억눌린 불길이 타올랐다.기이한 변덕이었다. 배명월을 감싸며 금영을 태자비 재목이 아니라 여겼던 그였다. 스스로 파혼을 청할 작정까지 했었건만, 막상 금영이 먼저 선을 긋고 나서자 왠지 모르게 자존심이 상했다. 특히 이번 파혼이, 단순한 질투나 투정이 아니라 다른 선택지를 택한 결과라는 생각이 들자, 참을 수 없이 거슬렸다. 그의 감정은 어느새 질투로 변해 있었다.그 시선은 배명월에게도 고스란히 닿았다. 찰나에 평정심이 허물어지며 옷자락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고운 비단 위에 날카로운 주름이 잡혔으나, 입가에는 여전히 화사하고 가식적인 미소가 걸려 있었다.“언니, 어디 다녀오셨어요? 어머니와 제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세요?”금영은 문득 배명월에게서 서 황후의 그림자를 보았다. 다정한 낯빛 뒤로 서늘한 비수를 품고 있는 그 기만적인 태도가 꼭 닮아 있었다.금영이 담담히 말했다.“쓸데없는 걱정.”송정희의 미간이 굳어졌다.“동생이 기껏 걱정해 줬다는데,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금영이 시선을 옮겼다.“이 자리에서까지 저를 몰아세우는 거, 괜찮으시겠습니까?”그리고는 입가를 살짝 끌어올렸다.“저야 잃을 것이 없으니 상관없습니다만, 명월이는 이제 막 혼례가 정해진 몸 아닙니까? 이 자리에서 소란을 피우면, 체면이 깎일 텐데요?”미래의 태자비라면 언행에 빈틈이 없어야 했다. 금영이 그래왔듯, 이제는 배명월이 증명할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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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5화

금영이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운명이란 원래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법이라고 했다. 네가 진짜 봉황이 될지 아니면 참새로 남을지는 두고 보면 알겠지.”배명월의 얼굴이 단숨에 굳었다.“배금영, 서출 주제에 감히 날 저주해!”이전과는 달랐다.과거의 배명월은 아무리 금영이 눈엣가시였어도, 겉으로 드러내놓고 짓밟을 엄두는 내지 못했다. 기껏해야 뒤에서 수를 쓰거나, 배경천을 부추기는 정도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금영은 황제가 정한 태자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미래의 태자비는 자신이었으니, 더는 참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해수의 얼굴이 굳었다.“둘째 아가씨, 장녀에게 그게 무슨 말투입니까!”배명월이 날카롭게 쏘아붙였다.“건방지구나! 감히 천한 것이 나를 훈계하려 들어?”그러더니 차갑게 웃으며 비꼬았다.“장녀? 누가 장녀라는 것이냐? 겨우 하녀의 배에서 태어난 주제에! 내가 영안후부에서 자라기만 했어도, 서출 출신 따위가 적녀 행세를 할 수 있었을 것 같으냐!”배명월이 목소리를 높이며 사람을 불렀다.“여봐라! 당장 이 계집을 매우 쳐라!”표면상으로는 해수를 가리키는 것처럼 보였으나, 실상은 금영을 겨냥한 말이었다.주인이 버젓이 있는데 남이 시비를 벌하겠다는 것 자체가, 곧 금영의 얼굴에 먹칠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곧이어 취옥이 행동에 옮기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금영이 날카롭게 외쳤다.“누가 감히 손을 대려 하느냐!”자신의 사람은, 자신이 지킨다. 금영의 신념이었다.그러자 배명월이 비웃듯 말했다.“하! 누가 두려워할 줄 알고! 배금영, 넌 이제 미래의 태자비가 아니야!”금영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태자부로 들어갈 몸이라면, 말과 행동을 가려야 할 것이다. 이리 경망스럽게 굴다가, 아버지께서 또 노하실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해보았느냐!”배명월이 되물었다.“아버지? 아버지께서 나를 벌하신다고? 정말로 막을 생각이셨다면, 진작 나타나셨겠지!”그 말을 듣는 순간, 금영은 마음이 가라앉았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연회장에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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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6화

그때, 한 그림자가 순식간에 금영의 앞을 막아서더니 취옥의 손목을 붙잡아 거칠게 밀쳐냈다.취옥은 믿기지 않는 얼굴로 상대를 바라보았다.“둘… 둘째 공자님?”배경천은 서늘한 얼굴로 취옥을 내려다보며 물었다.“지금 이게 무엇 하는 것이냐!”이어서 금영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괜찮느냐?”놀란 것은 취옥만이 아니었다. 금영 역시 마찬가지였다.그녀는 배경천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생각했다.'갑자기 왜 이러지? 뭐 잘못 먹었나?'하지만 배경천은 금영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겁에 질린 줄로 여기고 곧바로 취옥을 향해 차갑게 몰아붙였다.“누가 네게 이런 짓을 해도 된다고 허락했느냐? 감히 영안후부의 큰아가씨에게 손을 대려 해!”취옥이 당황한 얼굴로 배명월을 바라보며 입을 열려던 순간, 배명월이 먼저 그를 불렀다.“오라버니….”조금 전의 오만한 기세는 온데간데없이, 절로 보호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연약한 목소리였다.그러자 배경천의 말투도 조금 누그러졌다.“이게 대체 무슨 소란이냐?”배명월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게… 언니의 시비가 저에게 무례하게 굴어 취옥에게 벌을 주라 했을 뿐이에요. 언니는 왜 저 천한 계집을 감싸는지 모르겠어요….”말끝을 잠시 흐린 그녀가 다시 이어 말했다.“물론 언니를 탓할 수는 없지요. 언니의 생모가….”배명월은 말을 멈췄지만, 노골적인 멸시를 눈치 못할 금영이 아니었다.“그러니 저보다 시비를 더 아끼는 것도 당연하겠지요.”하지만 금영은 흔들리지 않았다. 오늘은 어쩔 수 없다고 해도, 배명월이 앞으로도 이토록 당당할 수 있을지는 두고 볼 일이었다.그런데 뜻밖에도 배경천이 배명월을 꾸짖었다.“명월아! 너는 곧 태자비가 될 사람이 어찌 이리 함부로 행동할 수 있느냐!”이어지는 그의 목소리가 한층 더 차가웠다.“금영이는 어찌 되었든 네 언니다. 앞으로도 시비들을 앞세워 이런 행동을 한다면, 나도 그냥 지켜보지 않을 것이다!”배명월은 배경천이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자신을 꾸짖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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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7화

하지만 배경천은 아랑곳하지 않고 제 말만 이어갔다."이제 태자비 자리를 잃었으니, 너의 앞날도 쉽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걱정하지 말거라. 언제든지 날 찾아와도 된다. 아무도 널 함부로 괴롭힐 수 없도록 내가 지켜주마."하지만 금영의 태도는 여전히 싸늘했다.“오라버니, 실없는 농담은 이쯤에서 그만두시지요. 날도 어두워졌고 저도 쉬어야겠으니, 이만 물러가 주셨으면 합니다.”금영은 안성당으로 돌아온 뒤로도 여전히 배경천에게 의심을 거두지 못했다. 무언가 씐 것이 아니라면, 너무 수상쩍은 모습이었다.*황궁.신하들이 물러간 뒤, 궁 안에서는 황실 일원들만이 참석하는 연회가 시작되었다. 황제의 처소인 현청전은 함부로 출입할 수 없는 엄한 곳이었기에, 연회는 서봉전에 마련되었다.가장 높은 상석에는 태후가 앉았고, 그 바로 옆으로 황제와 서 황후의 자리가 나란히 배치되었다. 그 아래 양옆으로는 후궁들과 황자들의 자리가 길게 이어졌다. 그러나 오늘 연회 자리에서도 삼황자의 모습은 끝내 보이지 않았다.후궁들 대부분 황제를 못 본 지 오래였고, 모처럼 마련된 자리에 모두 한껏 치장하고 나왔다.하지만 황제는 조금도 그녀들에게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황제."태후가 부르자, 황제가 답했다."태후마마.""무슨 근심이 그리 깊으십니까?"태후가 물었다.하지만 입을 연 것은 서 황후였다."아마도 아까 연회 자리에서 영안후부의 큰 여식이 사람들 앞에서 파혼을 청해 폐하를 난감하게 한 탓인 듯합니다. 참으로 배은망덕한 아이가 아닐 수가 없습니다. 태자는 물론 폐하와 신첩도 얼마나 아껴줬는데...."그러자 황제의 시선이 서 황후에게 향했다.서 황후는 그의 눈빛에 불쾌감이 담긴 것을 예민하게 알아차리고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신첩이 말실수를 했습니다."서 황후는 황제가 금영 때문에 체면을 구긴 일을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아 일부러 차갑게 반응하는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 더는 깊이 파고들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혼사는 깨졌고, 가짜 운명을 타고난 금영을 태자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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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8화

다음 날 이른 아침.영안후가 식사 자리로 불렀다는 얘기를 전달받게 되었다.금영은 영안후부 사람들과 더는 엮이고 싶지 않았지만, 아직 황제가 이번 일에 대해 확실한 처분을 내리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러니 금영이 나서 무언가를 밝히기도 어려웠고, 이 집에 머무는 동안에는 여전히 법도에 어긋남 없는 모습을 유지해야 했다.선대 영안후가 세상을 떠난 뒤, 그나마 이 집안에서 대우를 받을 수 있었던 건 오로지 미래의 태자비라는 신분 덕분이었다. 괜히 책잡힐 일을 만들어 저들에게 괴롭힐 구실을 주고 싶지 않았다.금영이 식당에 도착했을 때, 식구들은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녀가 안으로 들어서자, 영안후가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물었다.“누가 너에게 오라 했느냐?”금영은 잠시 멈칫하며 영안후를 바라보았다. 이내 시선을 돌려 그의 곁에 앉은 송정희와 배명월을 살폈다. 배명월은 마치 흥미진진한 구경거리라도 기다리는 듯한 눈으로 금영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이쯤 되니 금영도 상황을 파악할 수밖에 없었다. 영안후가 자신을 부른 것이 아니었다. 어제 대전에서 벌어진 일로 영안후의 노기는 이미 머리끝까지 치밀었을 터였다. 그런 그가 아침부터 자신을 보고 싶어 했을 리 만무했다.금영은 대꾸할 가치도 느끼지 못한 채 그대로 몸을 돌려 나가려 했다. 그때 송정희가 날카롭게 입을 열었다.“걸음을 멈추지 못할까!”금영의 걸음이 멈췄지만, 돌아보지는 않았다.곧이어 송정희의 차가운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부모를 뵙고도 예조차 올리지 않다니. 궁에서 배운 규율이 고작 그 모양이더냐? 행실이 이리 제멋대로니, 어제 연회에서도 감히 어명을 거스르며 혼약을 물리겠다고 설쳐댔겠지!”배명월이 곁에서 송정희를 달래듯 거들었다.“어머니, 언니 때문에 너무 노하지 마세요. 어제 일 이후로는 아마 언니가 다시 입궁할 일도 없을 테니, 더는 우리 가문의 얼굴을 깎아내릴 일도 없을 거예요.”송정희는 영안후를 보며 쐐기를 박았다.“대인, 금영이 저토록 오만방자하게 구는데도 정녕 그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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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9화

황제가 금영을 아꼈던 것은, 오로지 그녀가 미래의 태자비가 될 몸이었기 때문일 터였다. 하지만 이제 그 자리에 선 사람은 자신, 배명월이었다. 그러니 황제의 총애를 얻을 이 또한 마땅히 자신이 될 것이라 확신했다. 배명월이 서늘하게 덧붙였다.“앞으로는 폐하를 들먹이며 사람을 겁주는 일은 삼가세요.”그때였다. 영안후부의 집사 전충이 밖에서 허둥지둥 뛰어 들어왔다.“어르신! 부인!”송정희가 미간을 찌푸리며 꾸짖듯 물었다.“무슨 일로 이리 소란이냐?”“궁에서... 궁에서 사람이 왔습니다!”전충은 연신 밖을 살피며 다급히 말을 이었다.“지금 막 앞뜰에 이르렀는데, 보니 물건을 잔뜩 실어 왔습니다. 아마도 궁에서 하사품이 내려온 모양입니다!”송정희와 배명월은 서로의 눈을 마주쳤다. 감출 수 없는 환희가 번졌다.배명월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어머니, 폐하와 황후마마께서 제게 하사품을 내리신 게 분명합니다!”“어느 분이 오셨느냐?”송정희의 물음에 전충이 답했다.“전에 큰아가씨께 상을 전하러 왔던 손 태감이십니다.”금영은 본래 구경할 생각이 없었지만, 온 이가 손복안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영안후부 식구들이 모두 앞뜰로 향하자, 금영 역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녀 또한 궁에서 사람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런데 몇 걸음 걷기도 전에, 영안후가 돌아서며 금영을 거칠게 꾸짖었다.“너는 왜 따라오는 것이냐? 벌을 면했다 해도 앞으로는 안성당에 얌전히 틀어박혀 있거라. 괜히 나와서 가문 망신 시키지 말고!”배명월이 영안후의 곁으로 다가가 그의 소매를 가볍게 붙들었다.“아버지.”배명월을 바라보는 영안후의 눈빛은 금세 누그러졌다. 본래도 애틋했던 딸인 데다 이제 태자부로 시집갈 몸이니, 자연히 대우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언니도 같이 가게 해주세요.”배명월의 부드러운 청에 영안후가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그래, 같이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제멋대로 굴다가 제 발로 무엇을 걷어찼는지 똑똑히 알게 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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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0화

영안후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어색하게 물었다.“손 태감, 이 하사품들은... 대체 누구에게 내리는 것입니까?”그는 손복안이 평소 금영에게 하사품을 자주 전하다 보니, 잠시 착각한 것이라 애써 짐작했다.그러나 손복안은 여유로운 미소를 띠며 답했다.“당연히 금영 아가씨께 내리신 물목입니다.”“이, 이럴 리가 없어요! 어찌 또 배금영에게 상을 내린단 말입니까?”배명월이 경악하며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손복안은 무례한 태도에 불쾌감을 느꼈으나, 굳이 겉으로 드러내지 않은 채 미소를 유지하며 응수했다.“이는 폐하의 엄중한 뜻입니다. 혹여 마음에 들지 않거나 이견이 있으시다면....”손복안은 황궁이 있는 북쪽을 향해 공손히 포권하며 말을 이었다.“폐하께 직접 여쭈어보시면 됩니다. 소인은 그저 명을 받드는 몸이라, 폐하의 성심이 어디에 닿아 있는지는 감히 알지 못합니다.”말투는 지극히 부드러웠으나, 감히 황제에게 대들 용기가 이들에게 있을 리 없었다. 이미 무릎까지 꿇고 있던 배명월은 졸지에 허공에 대고 절을 한 꼴이 되었다. 수치심에 눈시울이 붉어지며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졌다.금영은 곁에서 그 꼴을 지켜보며 속으로 서늘한 비웃음을 흘린 뒤, 단아한 몸짓으로 앞으로 나아가 예를 갖췄다.“신녀, 폐하의 성은에 감복하였나이다.”손복안은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금영을 친히 부축해 일으켰다.“금영 아가씨, 어서 일어나십시오.”“손 태감께도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금영의 화답에 손복안이 인자하게 웃었다. 그는 영안후부 내부에 흐르는 비릿하고 지저분한 사정을 이미 꿰뚫고 있었다. 일부러 끝까지 금영의 이름을 밝히지 않아 배명월을 망신시킨 것도 그의 치밀한 배려였다.그는 오랜 세월 황제의 곁을 보필해 온 사람이었다. 금영이 비록 입궁하지는 않았으나, 황제에게 얼마나 각별한 의미인지 진작 눈치채고 있었던 것이다. 다행히 금영의 표정을 보니 자신의 호의를 충분히 알아차린 듯했다.문득 손복안의 머릿속에 태자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보석 같은 금영을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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