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그날, 나는 태자가 아닌 황제를 선택했다: Chapter 391 - Chapter 400

508 Chapters

제391화

월로사를 드나드는 수많은 이를 일일이 기억하기란 불가능한 법이다. 하지만 오늘 마주한 두 사람은 용모와 기품이 워낙 출중했기에, 도사로서도 기억의 편린을 끄집어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황제가 나직이 명했다.“소원을 적을 비단과 지필묵을 가져오너라.”이윽고 준비된 비단 위에 황제가 소매를 걷어붙이고 붓을 들었다. 원앙 무늬가 은은하게 새겨진 비단 위로 두 글자가 적혔다.곁에서 훔쳐보던 금영의 눈에 익숙한 이름이 먼저 들어왔다. 그녀의 아명인 영지였다. 그러나 그 옆에 적힌 낯선 이름에 금영의 시선이 멈추었다.‘임연?’의아해하는 금영을 향해 황제가 차분히 덧붙였다.“이건 내 자(字)다.”도사 앞이라 신분을 감추려는 의도로 보였다. 말을 마친 그가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었다.“영지야, 나와 함께 이 소원 비단을 걸러 가겠느냐?”금영이 망설일 틈도 없이 황제는 그녀의 손목을 가볍게 쥐고 밖으로 향했다. 그 뒷모습을 보던 도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전에도 함께 왔었나? 그때 사내는 훨씬 젊었던 것 같은데... 그새 사람이 바뀐 것인가?’그제야 도사는 자신의 말실수를 깨닫고 가슴이 뜨끔했다.마음이 찔린 것은 금영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다.예전에 이곳을 찾았을 때 이미 황제와 마주친 적이 있었다. 그는 금영이 다른 사내와 이곳에 와 소원을 빌러 왔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을 터였다. 물론 그 대상이 태자라고만 짐작하고 있겠지만 말이다. 만약 이 일로 황제가 불쾌해한다면, 그건 스스로를 탓해야 할 일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금영은 그가 직접 점지한 미래의 태자비였으니 말이다.두 사람이 다다른 곳은 예전에 금영이 비단을 다시 묶었던 나무였다. 비단은 여전히 가지 끝에서 펄럭이고 있었다.“위명.”“속하, 여기 있습니다.”멍하니 서 있던 위명을 대신해 손복안이 헛기침을 하며 재촉했다.“무엇 하고 있느냐? 지난번 묶였던 비단을 풀어 오너라.”그제야 정신을 차린 위명이 나무 위로 훌쩍 몸을 날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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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2화

황제는 금영과 월로사를 찾았던 사내가 맹운산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녀의 마음이 이미 그에게 기울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황제의 가슴속에는 서늘한 분노가 일었었다.그의 말 한마디면 맹운산의 모든 것을 무너뜨리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에게 분수를 깨닫게 하고, 가문 전체가 전율할 만큼 혹독한 벌을 내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얻어낸 결과는 껍데기뿐인 승리에 불과할 것이라는 걸, 황제는 모르지 않았다.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자리도 너끈히 감당해 낸 사람이었다. 고작 사사로운 정을 다스리는 데 제 권력을 휘두르고 싶지는 않았다.황제는 그저 평범한 사내로서 금영의 마음을 얻고 싶었다. 결코 쉽지 않은 길임을 알았으나, 인생에 단 한 번쯤은 도전해 보고 싶었다.오늘 금영을 이곳으로 데려온 것은 지난 일에 대한 불쾌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맹운산과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자신과도 할 수 있음을, 그가 해줄 수 없는 일조차 자신과 함께라면 가능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기 때문이다.황제의 온화하고 깊은 시선이 금영의 얼굴에 머물렀다.“짐은 마음을 분명히 밝혔다.”이어 그가 조용한 목소리로 청했다.“그러니 너도 짐에게 기회를 주었으면 좋겠구나. 평범한 사내로서 누군가를 연모할 수 있는 그런 기회를 말이다.”금영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제왕이라면 본래 따르는 자는 살리고 거스르는 자는 멸하는 법이다. 교지 한 장이면 누구도 감히 거역하지 못하거늘, 천하의 주인인 그가 평범한 사내의 자세로 마음을 구걸하고 있었다.고개를 숙인 황제의 모습에, 꽁꽁 얼어붙어 있던 금영의 마음도 속절없이 흔들렸다.황제는 여전히 금영의 대답을 기다리며 덧붙였다.“언제든 이 관계를 이어가고 싶지 않다면 말하거라. 절대로 너를 붙잡고 늘어지는 추태는 부리지 않으마.”금영이 소한을 대하는 태도를 보며, 그녀가 누군가에게 억지로 얽매이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간파해 한 배려였다.사실 황제의 속내도 편치만은 않았다. 이미 여러 번 자신을 밀어냈던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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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3화

황제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아니다. 네가 싫다고 해도... 너를 보는 것을 멈추지는 못하겠구나.”차갑고 고고해 보이던 이 제왕에게 이런 억지스러운 면이 있을 줄은 몰랐다.황제가 마음을 분명히 드러낸 뒤로 금영도 조금은 대담해졌다. 그녀는 찻잔을 내려놓고 맑은 눈으로 황제를 바라보았다.황제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금영이 장난스레 말했다.“신녀 역시 폐하께서 매우 잘생기셨다고 생각합니다. 해서 계속 바라보고 싶은데, 폐하께서도... 개의치 않으시겠지요?”황제가 낮게 웃었다. 금영은 정말이지 어디서도 지려 하지 않았다. 저 고집스러운 성정은 결코 영안후 같은 무능한 기회주의자를 닮은 것이 아니었다. 다만 자신을 진심으로 잘생겼다고 여기는 것이라면, 짓궂은 마음이 들었다.황제가 목소리를 낮게 깔며 사람을 홀리는 듯한 기색으로 말했다.“그리 멀어서야 잘 보이지 않을 터인데.... 짐이 허락할 테니, 조금 더 가까이 오거라.”그런데 이 말을 듣자 금영은 오히려 살짝 더 멀리 물러났다. 마치 포식자를 두려워하는 작은 초식동물처럼 말이다.황제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왜 도망치는 것이냐? 설마 짐이 너를 잡아먹기라도 할까 봐?”그러자 금영이 망설이다가 작게 중얼거렸다.“물론 잡아먹기야 않겠지만...”“않겠지만?”황제가 되물었다.금영은 더 말하고 싶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온통 직설전에서 있었던 그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올 때는 괜찮았는데, 산을 조금 오른 탓인지 돌아가는 길에는 금영도 점점 졸음이 몰려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금영은 눈을 살짝 감고, 마차 안에서 이리저리 흔들리기 시작했다.황제는 그 모습을 보고 팔을 뻗어 그녀를 제 곁으로 끌어당겼다. 금영은 그대로 황제의 품에 기대어 조용히 잠들었다.하늘빛이 마지막으로 희미하게 남았을 무렵, 금영은 마침내 다시 도성으로 돌아왔다.황제는 품 안에서 여전히 곤히 잠든 금영을 내려다보며 낮게 웃었다.“금영아, 이대로 깨지 않으면 짐이 너를 궁으로 데려가겠다...”그 말을 들은 금영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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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4화

해수와 마부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금영을 기다리고 있었다.해수는 초조한 듯 사방을 연신 두리번거렸다. 금영을 데려간 이가 누구인지 알고는 있었으나, 도무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혹여 황제가 파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여인이 연회에 참석한 것에, 황실의 체면을 깎았다고 문책할 수도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그때였다. 누군가 뒤에서 해수의 어깨를 툭 쳤다. 해수가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며 돌아보았다.“누구야!”몸을 돌린 해수의 눈에 위명이 들어왔다. 그녀는 그제야 길게 숨을 내쉬었다.“귀신도 아니고, 어찌 이리 인기척도 없이 나타나십니까?”그러고는 곧바로 다급하게 물었다.“우리 아가씨는요?”위명의 등 뒤에서 금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해수야, 위 총령께 무례하게 굴지 말거라.”알고 보니 위명의 체구가 워낙 커 금영의 가녀린 몸이 완전히 가려졌던 것이었다.해수는 금영을 보자마자 위아래로 훑어 내렸다. 그녀가 조금의 상처도 없이 멀쩡한 것을 확인하고서야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해수는 그제야 위명을 향해 예를 갖추었다.“위 총령을 뵙습니다.”위명은 가볍게 콧웃음을 칠 뿐 딱히 대꾸하지 않았다. 하지만 속으로는 단정하고 예법을 중히 여기는 금영의 곁에 이토록 무례한 시비가 붙어 있다니,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라 생각할 뿐이었다.위명이 마부를 가리키며 금영에게 물었다.“금영 아가씨, 저 마부는... 믿을 만한 사람입니까?”만약 조금이라도 미심쩍은 구석이 있다면 직접 입단속을 시킬 요량이었다.그는 손복안에게 신신당부받은 바가 있었다. 금영과 황제의 사이는 아직 세상에 드러나서는 안 되었고, 따라서 금영의 행적 또한 밖으로 새어 나가선 안 됐다.“저 마부는 오래전부터 저를 따르던, 그저 평범하고 성실한 사람입니다.”금영의 답에도 위명은 미덥지 않은 듯 마부를 한참이나 노려보았다. 결국 그는 마부를 한쪽으로 끌고 가 무어라 나직이 경고를 던졌다.잠시 후, 마부가 다리에 힘이 풀린 듯 비틀거리며 돌아왔다.위명이 다시 해수를 바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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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5화

해수는 금영이 사사로이 사내와 정을 나눌 리 없다고 애써 스스로를 납득시키고 있었다.그런데 이때, 금영이 고요하게 입을 열었다.“해수야.”“예, 아가씨.”해수가 얼른 답하자 금영이 말을 이었다.“너는 내 최측근이자 가장 가까운 사람이니, 아마 지금쯤 너도 어느 정도 짐작했겠지.”그러자 해수는 울상이 되어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저는... 저는 아무것도 짐작하지 못했습니다!”금영이 그 모습에 옅게 미소 지었다.“네가 짐작한 것이 맞다.”금영이 숨기기는커녕 이토록 명확하게 인정할 줄은 몰랐기에 해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금영이 차분하게 덧붙였다.“지금까지 말하지 않은 것은 나 역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결론이 나지도 않았는데 네가 알게 되면 괜한 걱정만 했을 터이니.”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앞으로 황제와의 접촉은 점점 더 빈번해질 터인데, 미리 밝혀 두어야 훗날 생길지 모를 오해를 방지할 수 있었다.마차가 영안후부 앞에 멈추었을 때까지도 해수는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아가씨께서 정말로...’그제야 금영이 갑자기 태자와 파혼한 까닭을 알 것만 같았다.두 사람이 막 영안후부 안으로 들어섰을 때, 시종 영순이 앞을 가로막았다.“금영 아가씨, 어르신께서 부르십니다.”이곳에 머무는 한 영안후를 피할 수는 없었다. 금영은 곧장 그를 만나러 발걸음을 옮겼다.영순은 금영을 다실 바깥뜰로 안내했다. 뜰에는 기이한 형태의 수석들이 즐비했다. 칼을 들고 전장을 누비던 선대 영안후와 달리, 지금의 영안후에게서는 무장의 기개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겉멋 든 풍류객에 가까운 모습이었다.다실 안에서 화기애애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아버지, 어머니 좀 말려주세요. 자꾸 절 놀리시잖아요.”배명월의 콧소리 섞인 애교와 영안후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이어졌다.“네 어머니 말이 맞다. 너도 곧 시집갈 몸이 아니냐?”문밖에서 들려오는 대화만으로도 배명월의 혼사 이야기가 오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다만 금영은 왜 자신을 이 자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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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6화

송정희의 얼굴이 순식간에 딱딱하게 굳어졌다.“너...!”그녀는 곧장 영안후를 향해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대인, 보셨습니까? 저 아이가 점점 더 말을 듣지 않습니다!”영안후 역시 못마땅함이 가득 서린 얼굴로 입을 열었다.“금영! 네 어머니께 예를 갖추거라!”이어 그는 언짢은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계속 말을 이었다.“태자와의 혼약을 파기하겠다고 한 것도 허락했는데, 어찌 아직도 이리 불만이 많느냐?”금영이 그 가소로운 소리를 들으며 서늘하게 웃었다.“전 제 파혼을 두 분께 허락 맡은 적 없습니다만?”영안후가 당장이라도 탁자를 내리칠 듯 버럭 소리를 질렀다.“저 말대꾸하는 꼴 좀 보아라! 대체 누구를 닮아 저러는지!”그때, 송정희의 어깨에 기대어 있던 배명월이 마치 평화의 사절이라도 된 듯 부드럽게 나섰다.“아버지, 어머니, 진정하세요. 언니 일로 화를 내시다 몸이라도 상하시면, 명월이 마음이 아픕니다.”두 사람의 표정은 배명월의 손길 한 번에 봄눈 녹듯 금세 누그러졌다. 특히 송정희는 배명월의 고운 손을 꽉 맞잡으며 감격스러운 듯 다정하게 말했다.“그래도 다행이다. 너를 다시 찾았으니... 역시 자식은 핏줄을 나눈 친자식이 제일이구나.”영안후도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명월이만 한 아이가 없지.”원래도 편애가 극심했던 집안이었으나, 이제 배명월이 태자와 혼인까지 맺게 되자 그들은 아주 대놓고 배명월의 편을 들며 금영을 이방인 취급했다. 금영은 눈앞에서 펼쳐지는 그 유치하고도 화목한 연극을 보면서도 아무런 감정의 동요를 느끼지 못했다. 부모의 사랑을 두고 구걸하거나 다투고 싶은 마음은 진작에 버렸기 때문이다. 다만 이 구역질 나는 가식의 공간은 일분일초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하실 말씀이 없다면,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금영이 담담히 고개를 숙이자, 그제야 영안후가 헛기침을 하며 본론을 꺼내 들었다.“오늘 너를 부른 것은, 한 가지 물어볼 일이 있어서다.”금영의 동공이 살짝 커졌다. 그저 자신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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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7화

영안후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혼인은 부모가 정하고 매파가 잇는 법, 반박은 용납할 수 없다."금영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리 말씀하신다면,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그래봤자 황제의 명보다 중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하지만 이들이 함부로 자신을 시집보내려 한다는 것을 황제가 알게 된다면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했다.금영은 속으로 조소를 지으며 영안후를 힐끗 보았다. 눈빛에는 앞으로 닥칠 일에 대한 기대가 어려 있었다.영안후는 금영이 이렇게 순순히 받아들일 줄 몰랐기에 살짝 당황했다.그때 송정희가 말을 이었다."너는 황실과의 혼약도 파기했고, 출신도 미천하다. 명망 높은 가문들 중에서 너를 맞이하려 하는 집안은 없을 것이다."그러면서 덧붙였다."아니, 평범한 관료의 집안에서도 너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겠지."금영은 그 말을 듣고 송정희가 이미 마음속에 계산을 끝내 두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자 오히려 어떤 혼처를 골라 두었는지 궁금해졌다.송정희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내 친정 송씨 가문이 얼마나 명망 높은지는 너도 잘 알고 있겠지? 남양에 방계 친척이 하나 있다. 내게는 먼 조카뻘 되는 아이인데, 너보다 두 살이 많으니 너에게는 고종사촌 오라버니뻘이 되겠구나. 내 가문의 사람이라 그런지 인품도 훌륭하고 혼처로서도 아주 제격이다. 혼례를 치르고 나면 그 아이는 남양으로 내려가 가업을 이어받을 것이다. 너도 지체 없이 함께 따라가면 된다.”송정희는 얼굴에 미소를 띠고 말을 이었다.“그리하면 너는 든든하게 의탁할 곳이 생기고, 구설에 오를 필요 없게 되니, 일석이조 아니냐?"그 말투는 마치 금영에게 좋은 앞날을 베풀기라도 하는 듯했다. 그러나 조금만 곱씹어 보면 송정희의 속셈은 훤했다.송씨 가문의 명성이 높은 것은 사실이었으나 분가는 본가와 한참 달랐다. 더구나 먼 친척이라 했으니 어떤 사람인지도 명확하지 않았다.송정희는 금영을 서둘러 도성 밖으로 시집보내 눈앞에서 치워버리려는 것이었다. 동시에 자기 영향력 아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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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8화

영안후는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금영의 태도에는 흠잡을 곳이 없었다.그는 곧 스스로를 달랬다. 금영도 이제는 제 처지를 깨닫게 되어, 평범한 집안으로 시집가는 편이 자신에게 가장 어울린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것이라고 말이다.금영은 더 이상 이들과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이야기는 끝난 듯하니, 저는 이만 돌아가 쉬겠습니다.”영안후가 차갑게 대꾸했다.“앞으로는 내 허락 없이 함부로 밖을 나다니지 말고 얌전히 집에 머물며 혼례를 기다리거라.”하지만 금영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그대로 방을 나섰다. 영안후가 얼마나 냉정하고 무정한지는 이미 회귀 전에 뼈저리게 경험한 터라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그럼에도 마음 한구석에는 형용할 수 없는 쓸쓸함이 남았다. 선대 영안후가 세상을 떠난 뒤로, 이 드넓은 영안후부는 물론이고 천지간에 그녀가 의지할 곳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그녀는 어디에도 뿌리내리지 못한 채 떠도는 부평초가 된 기분이었다.그때, 품 안에 넣어둔 옥패에서 은은한 온기가 전해졌다. 황제가 직접 건네준 것이었다. 금영은 그 온기에 기대듯 옥패를 가만히 어루만졌다.다실 안.배명월은 조금 전 금영이 보인 태도와, 훗날 후회하지 않길 바란다던 그 말을 곱씹었다. 그녀의 깊은 눈동자 속으로 어두운 의혹이 번져 나갔다.금영이 이토록 순순히 혼례를 받아들이다니,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빠져나갈 구멍이 있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배명월은 그 길이 감히 모두가 우러러보는 황제와 이어져 있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상황이 정리되었다고 판단한 영안후가 부인 송정희와 배명월을 번갈아 보았다.“금영도 혼사를 받아들였으니, 부인은 금영과 명월의 혼례 준비를 함께 서두르시오.”“염려 마세요. 두 아이의 출가를 부족함 없이 준비하겠습니다.”"잘할 것이라 믿소."영안후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떴다.그가 멀어지자 송정희가 배명월의 손을 잡으며 다정하게 말했다.“네 혼수는 아주 넉넉히 준비해 두었으니, 아무 걱정 말거라. 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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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9화

금영은 그사이 안성당으로 돌아왔다.해수가 차를 내오며 금영에게 말했다.“아가씨, 목 좀 축이세요.”금영이 찻잔을 들어 올리자, 해수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아가씨, 폐하와 아가씨께서는 정말...”금영이 해수를 힐끗 보았다.“그럼 거짓이겠느냐?”해수는 그제야 정신이 조금 돌아온 듯 길게 숨을 내쉬었다.“그렇다면 아가씨께서 고종사촌 오라버니인지 뭔지 하는 자에게 시집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군요?”금영이 차갑게 웃었다.“사촌 오라버니는 무슨.”사촌은 무슨, 송정희와 그녀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이었다.그러다 문득 멈칫했다. 여태껏 제 생모가 어떤 사람이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모두들 그녀의 생모가 선대 영안후에게 거두어진 고아였다고만 알려주었다. 그녀는 온 곳도 불분명했고 죽음마저 조용했다. 마치 이 세상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면 안 되는 사람처럼 말이다.아니, 흔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야말로 그녀가 존재했음을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흔적이었다. 금영은 그녀가 소중히 열 달을 품어 낳은 결과물이었다.*서봉전.하늘은 이미 어두워졌으나, 서 황후는 잠자리에 들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음울한 얼굴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오늘 황제가 손수 장평군주부에 들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차만 마시고 곧 자리를 떴다고 할 뿐, 그 뒤로는 여태껏 아무런 소식도 들려오지 않았다.황제가 자신의 행선지를 일일이 황후에게 보고할 의무는 없었다. 하지만 예전의 황제라면 어디를 가든 굳이 행적을 숨기는 편도 아니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자꾸만 종잡을 수 없는 일이 생기니, 서 황후로서는 생각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작산 행궁 때부터 서 황후의 의심은 깊어지고 있었다. 황제가 마음에 두었다던 영지라는 이름, 또 황제의 상처에 매여 있던 붉은 비단끈까지, 모든 것이 그녀의 마음에 깊이 걸렸다.그뿐만이 아니었다. 원래도 후궁에 냉담했던 황제는 이제 아예 대놓고 보는 척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새해 첫날에도 황제는 서봉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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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0화

다음 날 이른 아침.영안후부 식솔들은 모두 앞청으로 나가 상을 받았다. 지난번에도 황제가 금영에게 상을 내렸던 터라, 영안후는 이번에도 금영을 앞청으로 불렀다. 물론 영안후는 지난번의 상이 그저 황제의 너그러움을 보이기 위한 일회성 은혜라 여겼다. 그러니 앞으로 금영에게 따로 상을 내리는 일은 더 없을 것이라 확신했다.손복안이 여러 내관을 거느린 채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기세가 제법 당당했다.“최상급 연근 한 광주리, 환남 죽순 한 광주리, 융안 금귤 한 바구니...”손복안이 하사품 목록을 모두 낭독한 뒤 웃으며 말했다.“모두 황제 폐하께 예를 표하시오!”이번에는 딱히 누구에게 내리는 상인지 명시하지 않았다. 주된 이유는 하사품이 대부분 먹을거리였기 때문이다. 설령 안성당으로 보낸다 한들, 금영에게 직접 요리를 하라고 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모두가 은혜에 감사를 표한 뒤였다. 손복안이 웃으며 말을 건넸다.“영안후께 소인이 감히 몇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영안후가 얼른 답했다.“말씀하십시오, 태감.”손복안이 미소를 띠며 말을 이었다.“요즘 명월 아가씨께서 황실로 시집가실 일로, 얼마나 많은 눈이 영안후부를 지켜보고 있을지 잘 알고 계실 줄 압니다. 그럴수록 잡음이 나오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하셔야 합니다.”손복안은 이 말을 끝으로 자리를 떠났다. 그는 영안후부 사람들이 금영을 박대하거나 괴롭히는 일을 방지하고 싶었다. 그러나 영안후는 그 말을 듣고, 손복안의 충고가 앞서 배명월이 했던 걱정과 같은 뜻이라 오해했다.황제는 금영이 혼약을 물린 일을 따지지 않고 넘어갔다. 하지만 만일 금영이 마음을 바꾸어 다시 태자와 얽히기라도 한다면, 그때야말로 영안후부를 불구덩이 속에 밀어 넣는 일이 될 터였다. 그러니 더 서둘러 금영을 시집보내야 했다.영안후는 마음을 정리하고, 내려진 상들을 바라보며 명했다.“이것들은 모두 주방으로 보내거라.”이어 감탄하듯 덧붙였다.“사람들은 금영이 혼약을 물린 뒤로 영안후부가 폐하의 눈 밖에 날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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