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그날, 나는 태자가 아닌 황제를 선택했다: Chapter 611 - Chapter 620

714 Chapters

제611화

조씨가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황후마마.” “말하거라.” 서 황후가 차가운 목소리로 명했다.“태자전하의 부상은 위험하긴 했으나 결국 큰 지장은 없으시지요. 가장 중요한 것은 태자전하께서 이렇게 다치신 덕에 폐하께서 마마의 연금을 풀어주셨으니, 아무런 수확이 없다고 할 수는 없사옵니다.” 조씨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하지만 서 황후의 날카로운 시선이 단숨에 조씨에게 꽂혔고, 깜짝 놀란 조씨는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노비가 말실수하였습니다.”사람에게는 누구나 약점이 있기 마련이며, 서 황후의 약점은 바로 태자 소한이었다. 오늘 서 황후가 이토록 분노한 이유 역시 태자가 다쳤기 때문이었다.“황후마마, 부디 신첩을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신첩, 황후마마를 위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영비를 제거하겠습니다!” 안빈이 황급히 충성심을 보였다.서 황후가 부드러운 어조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본궁이 언제 네게 영비를 제거하라고 하더냐?”“예, 예. 마마께서는 말씀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신첩이 귀신에 홀려 제멋대로 판단한 것이옵니다.” 안빈이 연신 고개를 숙였다.이번에도 서 황후는 금영을 겨냥하라는 말을 단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그저 안빈이 문안을 왔을 때, 조씨를 시켜 영비 때문에 밤잠을 설친다는 말을 슬쩍 흘리게 했을 뿐이었다. 그 뒤의 일에 관해서는 서 황후가 굳이 마음을 쓸 필요도 없었다.다만 서 황후도 안빈이 이번에 이토록 큰 소동을 일으킬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일을 성사하지 못한 것은 차치하고, 태자까지 다치게 할 줄은 몰랐다.서 황후가 담담하게 말했다. “부축해 일으키거라.”그제야 궁녀 환옥이 서둘러 앞으로 걸어가 안빈을 부축했다. 안빈이 두 다리를 덜덜 떨면서 자리에서 일어나자, 서 황후가 말했다. “앉거라.”주저하며 감히 앉지 못하던 안빈은 서 황후의 눈길에 벌벌 떨며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자리에 앉은 안빈은 길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오늘 참으로 아까웠사옵니다. 조금만, 조
Read more

제612화

“마마, 약을 드실 시간입니다.” 그 말에 금영은 미간을 찌푸렸다. 조금 전에 이미 한 사발을 마셨는데, 채 한 시진도 지나지 않아 다시 마셔야 한다니 속에서 절로 거부감이 일었다.정말로 태기가 놀란 것이라면 달게 마셨을 것이다. 하지만 태기에 아무런 이상이 없는데, 이런 약을 자꾸 마셔도 되는지 알 수 없었다. 아무리 태기를 보하는 약이라 할지라도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에 극도로 신중해야 했다. 괜히 약을 잘못 먹어 탈이 날까 두려웠다.금영이 마셔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자, 황제가 붓을 내려놓고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침상 가장자리에 걸터앉은 그는 직접 약사발을 건네받았다. “짐이 먹여주마.”황제가 탕약을 한 숟가락 떠서 조심스럽게 후후 불더니 금영의 입술 앞으로 가져갔다. 붉은 입술을 살며시 벌려 한 모금 마신 금영은 쓴맛에 얼굴을 찌푸렸다. 바로 그때, 입안 가득 달콤함이 퍼졌다. 황제가 재빨리 그녀의 입에 당과를 쏙 넣어준 것이다.그 모습을 바라보는 황제의 눈빛에는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금영이 숨을 고르자, 황제는 다시 직접 약을 한 숟가락 떠서 먹여주었다.또다시 몰려오는 쓴맛에 금영은 마음이 뒤틀렸다. 쓴 약과 달콤한 당과를 번갈아 주며 사람을 다룬다고 여긴 금영은 황제의 손에서 약사발을 단번에 빼앗아 들었다.갑작스러운 그녀의 행동에 황제는 잠시 멍해졌다. “영지야?”그러나 금영은 이미 고개를 젖혀 약을 단숨에 들이켜고 있었다. 한 숟가락 먹고 당과 하나를 먹으며 고통을 길게 끌 바에야, 차라리 매도 먼저 맞는 편이 나았다. 약을 다 비운 금영은 당과 하나를 집어 입에 물었다. 쓴 기운이 얼마나 강했는지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찔끔 고여 있었다.금영은 이번 생에서 뼈저리게 깨달은 바가 있었다. 그 누구라도 자신 삶의 전부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을. 어떤 고통은 스스로 감내해야 하는 것이고, 어떤 일들은 홀로 버텨내야만 하는 것이다.금영은 차라리 다행이라 여겼다. 입궁한 뒤 잠시 방황했으나, 이내 빠르게 이성
Read more

제613화

금영이 내뱉은 말은 전적으로 꾸며낸 것만은 아니었다. 실제로 마음 한구석에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었다.그녀는 이번 생에 이렇게 빨리 아이를 가지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심지어 거짓으로 회임한 것처럼 꾸밀 수 있는 약까지 남몰래 준비해 황제가 입궁을 허락하지 않을 상황에 대비했다. 뱃속 아이의 목숨을 빌미로 황제를 압박해 입궁하려 했던 속셈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손을 써보기도 전에 진정으로 아이가 찾아왔다. 자신의 뼈와 살을 나누어 받은 고귀한 생명이 몸 안에서 자라나고 있었다.한 번 죽음을 경험해 본 사람이, 얼마나 삶을 갈망하는지는 오직 그녀만이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이 자그마한 생명이 복중에서 싹을 틔웠을 때, 그녀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묘한 감정을 느꼈다. 마치 자신이 진정으로 다시 살아 숨 쉬는 느낌이 들게 했다. 생명을 잉태함으로써 비로소 자신이 온전히 살아있음을 실감한 것이다.그녀는 뱃속의 아이를 지키고 싶었다. 단순히 황제의 총애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함이 아니라, 진심으로 이 새 생명을 지키고 싶었다. ‘만에 하나, 언젠가 이 아이를 잃게 되는 날이 온다면….’금영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 비극이 일어나게 놔둘 수 없었다.황제는 그 말을 듣고 미간을 찌푸리며 차갑고도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짐이 그 누구도 너와 아이를 해치지 못하도록 할 것이다.”금영은 황제의 이 다짐만큼은 진심인 것 같았다. 하지만 황궁 속에 도사린 악의는 너무나 많았고, 제아무리 조심해도 방심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바로 그때, 문밖에서 위명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폐하, 아뢸 말씀이 있사옵니다.”황제가 이성적으로 명했다. “들라 하라.”위명은 방 안으로 들어서며 황제와 금영을 차례로 살핀 뒤 입을 열었다. “폐하, 수원을 조사한 결과, 약간의 단서를 잡았사옵니다.” 위명이 말을 이어갔다. “그 기이한 향을 풍기던 토끼와, 내관이 실수로 놓쳤다고 주장한 토끼는 애초에 전혀 다른 개체였사옵니다! 하여 내관의 손에는
Read more

제614화

금영은 눈앞의 황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것이 진정 애정이란 말인가?’ 신이 세상 모든 피조물을 굽어살피듯, 황제의 자비 역시 그와 같았다. 황제의 총애는 결코 한 사람에게만 온전히 귀속될 수 없는 법이었다.하지만 그녀는 황제에게 자신의 ‘애정’을 끊임없이 각인시킬 생각이다. 입궁한 이상, 그녀가 도모해야 할 것은 황제의 환심을 사서 그 신기루 같은 사랑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붙들어 매는 것뿐이었다.상궁이 자신을 훈육하며 가르쳤던 수단들이 떠올랐다. 그 당시에는 태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법으로 배웠으나, 가르침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 법이니 대상을 바꾸어 써먹으면 그만이었다.금영이 눈을 깜빡이자, 맑고 투명한 눈동자에 애틋한 온기가 피어올랐다. “폐하.”가냘픈 부름에 황제가 상념에서 벗어나, 금영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물었다. “깼느냐?” 이어 그가 염려 가득한 어조로 물었다. “혹 몸에 불편한 곳은 없느냐?”금영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황제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던 찰나, 그녀가 다시 고개를 살짝 끄덕였고, 그의 가슴은 순식간에 쿵 내려앉았다. 그는 즉시 엄한 목소리로 밖을 향해 외쳤다. “이 원사를 들라 하라!”금영이 서둘러 황제의 손을 잡으며 만류했다. “폐하, 심려치 마옵소서. 신첩, 그저… 그저 어젯밤 꿈자리가 사나웠던 탓에 사지가 조금 떨린 것뿐이옵니다.” 거기까지 말한 금영의 눈가가 발갛게 물들었다. “꿈속에서 신첩이 그만 아이를 지켜내지 못하고….”말을 끝내기도 전에, 황제가 손을 뻗어 그녀의 입술을 부드럽게 지그시 눌렀다. 조각 같은 수려한 얼굴이 차갑게 굳어 있었다. “짐이 결단코 그런 비극이 일어나도록 두지 않을 것이다.”사실 가슴을 졸인 것은 금영뿐만이 아니었다. 황제 또한 내심 그만큼 커다란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방 안으로 들어온 이 원사는 황제가 조심스레 금영을 부축해 일으켜 세우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 원사는 슬쩍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즉시 고개를 숙였다. 황실에서 수년간 황제를 모시면
Read more

제615화

“용의선상에 올랐다면 어찌하여 더 추적하지 않는단 말이냐?” 황제가 안색을 굳히며 음울하게 말했다.“모두 후궁들인지라… 소신에게 명백한 물증이 없는 한, 경거망동하게 신문할 수 없는 듯하여 움직이지 못하였사옵니다.” 위명이 고개를 숙이며 말을 이어갔다.황제의 눈동자에는 한 점의 온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 “멍하니 서서 무엇 하는 것이냐? 낱낱이 수색하고 신문하거라!”위명은 즉시 명을 받들고 물러갔다. 사실 그 역시 일이 이렇게 흘러갈 줄 짐작하고 있었으나, 황제의 허락을 구하는 절차를 밟아야만 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 황명 없이 감히 제멋대로 후궁들의 처소를 뒤엎고 결박해 신문할 수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그러나 위명이 의심스러운 후궁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아 신문을 시작하기도 전에 커다란 변고가 발생했다.*난초각. 춘화가 밖에서 다급한 걸음으로 들어오더니 금영을 바라보며 고했다. “영비마마, 왕 미인이 죄가 밝혀지는 것이 두려워 자결하였습니다. 그녀의 처소에서 그 기이한 향이 발각되었고, 함께 목숨을 끊은 궁비 한 명도 발견되었습니다. 그 궁비가 몰래 산에 올라 향을 조제할 약초를 채취하는 것을 보았다는 증언이 확보되었습니다.”금영은 잠시 멍한 눈으로 춘화를 바라보다가 믿기지 않는다는 어조로 입을 열었다. “왕 미인이란 말이냐?”금영은 이번 일이 왕 미인의 머리 위로 떨어질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다. 그러나 과거 이 미인에게 일어났던 비극을 떠올리면, 그리 기이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진정 왕 미인이 배후인가 하는 사실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이 사태를 매듭짓고 황제의 무시무시한 진노를 잠재울 희생양이 필요했다는 점이었다.“위 총령이 폐하의 명을 받들어 후궁들의 처소를 수색하였고, 왕 미인의 처소에 이르렀을 때 이미 그녀가 들보에 목을 매단 채 숨져 있는 것을 발견했답니다. 그리고 방 안에서 그 문제의 향이 고스란히 쏟아져 나왔다 합니다.” 춘화가 상세히 전말을 고했다.“마마, 이번 일을… 어찌 생각하십니까
Read more

제616화

금영은 마침내 감추어진 진실의 실마리를 잡은 것 같았다.본래는 여비를 가장 의심했으나, 왕 미인의 죽음을 통해 여비가 도리어 억울하게 누명을 썼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여비의 성정이 안하무인이긴 하나, 이렇게 대담한 일을 꾸밀 위인은 되지 못했다. 이 모든 음모가 진정 안빈의 소행이라면, 서 황후가 제 사냥개를 보호하기 위해 세력이 약한 왕 미인을 내몰아 죄를 뒤집어씌우고 입을 막아버린 것 또한 그리 이상할 것이 없었다.금영은 부상을 입은 태자의 팔을 떠올리며 속으로 서늘하게 비웃었다. 정성껏 길러온 개에게 친 자식을 바친 꼴이 된 서 황후의 처지가 꽤 우스웠지만, 금영은 담담한 어조를 유지하며 말했다.“과거 이 미인의 일로 인해 왕 미인이 본궁에게 깊은 앙심을 품었던 모양입니다. 이제 죗값을 치렀으니 인과응보라 해야겠지요.”서 황후가 악랄한 뱀이라면 현비 역시 호락호락한 인물은 아니었기에, 금영은 속내를 들키지 않으려 했다. 현비는 생긋 웃으며 금영의 안색을 살폈다. 그녀의 표정에서 조그마한 동요라도 찾아내려 애쓰는 기색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금영은 그저 심약하고 지친 기색만을 풍길 뿐이었다.현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 변고가 여비와 무관한 것으로 밝혀졌으니, 폐하께서도 머지않아 여비의 연금을 풀어주시겠군.” 현비가 나직하게 웃음을 흘렸다. “영비는 입궁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모를 테지만, 폐하께서 평소 여비에게 베푸시는 관용은 참으로 지극하시다네. 여비가 나라를 뒤흔들 만큼 엄청난 대죄를 짓지 않는 한, 폐하께선 절대 그녀를 내치지 않을 걸세.”현비가 굳이 귀띔해 주지 않아도, 금영은 황제가 여비에게 얼마나 너그러운지 이미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한 바가 있었다. 현비가 한창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을 때, 황제가 당도해있었다. 방 안으로 들어서던 황제는 현비가 와 있는 것을 보고 살짝 놀란 눈치였다.현비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췄다. “신첩, 폐하를 뵙사옵니다.”황제가 담담하게 말했다. “짐이 분명 영비에
Read more

제617화

이러한 황제의 단호한 처사에 금영은 살짝 놀랐다. 그녀는 이번에도 황제가 예전처럼 여비의 응석을 받아주며 대충 구렁이 담 넘어가듯 눈감아줄 것이라 지레짐작했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든 여비의 발이 묶인 것은 금영에게 결코 나쁜 일이 아니었다.황제가 금영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다정한 어조로 속삭였다. “이번 일로 인해 너도 서러웠을 텐데, 미안하구나.”금영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폐하, 신첩은 전혀 서럽지 않사옵니다. 신첩의 유일한 염원은 오직 무사히 폐하와 신첩의 소중한 아이를 품에 안는 것뿐이옵니다.” 일편단심으로 그의 생각만 하는 여인의 고백에, 황제는 마음속으로 중대한 결심을 굳혔다.*금영은 침상 위에서 꼬박 이레 동안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안정을 취했다. 상선 태의가 마침내 금영과 복중 태아의 기혈이 안정을 되찾았음을 선포하고 나서야, 그녀는 비로소 바깥출입을 허락받을 수 있었다. 처소가 제아무리 넓고 화려하며, 황제가 틈틈이 곁을 지켜주었다 한들 방 안에만 갇혀 지내는 것은 숨을 턱턱 막히는 노릇이었다.마당으로 걸어 나온 금영은 머리 위로 쏟아지는 눈부신 봄 햇살을 바라보았다. 오랫동안 방에 갇혀 있었던 탓인지 눈앞이 아스라해졌다. 금영은 고개를 돌려 해수에게 물었다. “폐하께선 지금 어디에 계시느냐?” 늘 그가 먼저 자신을 찾아와 주었으니, 이번에는 자신이 먼저 황제를 찾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해수가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답했다. “방금 수라간에 마마의 다과를 구하러 갔다가 환옥 궁녀를 마주쳤는데, 폐하께서 오늘 서 황후의 처소에 행차하신다고 하여 특별히 다과상을 준비하러 왔다고 하더군요.” 말을 마친 해수는 금영의 심기가 불편해졌을까 봐 서둘러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하지만 금영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는 황제였고, 서 황후는 명색이 국모였다. 그런 둘이 평생 얼굴을 마주하지 않을 수는 없는 법이었다. 더군다나 최근 태자 소한이 팔을 다치는 중상을 입었으니, 자식의 안위를 빌미로 황제가 황후의 처소를 찾아가 위
Read more

제618화

서 황후는 황제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폐하, 무슨 일이시옵니까?”황제의 입에서 나온 말에 서 황후의 미소는 오래 가지 않았다. “금영이 입궁한 지도 제법 시일이 흘렀으니, 걸맞은 봉호를 내릴까 하오.”금영의 ‘영(寧)’은 정식 봉호가 아니라, 그저 편하게 부르기 위해 본명인 배금영에서 글자 하나를 따온 것에 불과했다. 황제의 총애를 받는 후궁은 대개 따로 봉호를 받기 마련이었다. 현비, 숙비, 여비처럼 이름 외에 별도로 책봉되는 봉호가 그러했다.서 황후는 황제가 참으로 오랜만에 찾아온 이유가 금영 때문인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안색이 굳은 서 황후는 감정을 억누르며 태연한 척 대꾸했다. “이리 사소한 일이라면 폐하께서 친히 결단하시면 될 터인데, 어찌 신첩에게까지 오셔서….”황제는 미소를 지을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황제의 침묵에 서 황후의 마음속에 문득 불길한 예감이 스쳐 지나갔다. 고작 후궁의 봉호 하나를 정하는 일로 황제가 이리 직접 걸음을 한 거로 보아, 그 봉호가 결코 평범하지 않을 터였다.서 황후는 참지 못하고 넌지시 물었다. “폐하께서는 어떤 봉호를 내릴 작정이옵니까?” 황제의 대답이 떨어지기도 전에, 서 황후가 먼저 말을 가로챘다. “금영은 본래 성품이 온화하고 평온한 구석이 있으니, 정비(靜妃)는 어떠하옵니까?”황제가 거절했다. “체통에 맞지 않네. 그 아이는 본래 성정이 활달하니, 고요할 정(靜)자를 쓰면 도리어 그 틀에 갇혀 지내게 될 것일세.”서 황후는 그다지 놀라지 않은 기색으로 다시 의견을 냈다. “금영의 용모가 단정하고 수려하니, 단비(端妃)라 칭하면 좋을 듯하옵니다.”단(端)자는 후궁의 봉호 중에서도 현비의 현(賢)자에 절대 뒤지지 않는 귀한 글자였다. 서 황후는 내심 금영에게 품계가 낮은 후궁이 쓸 법한 격 낮은 봉호를 내리고 싶었으나, 황제가 이렇게 찾아온 이상 어설픈 봉호로는 만족하지 않을 것임을 직감하고 한 걸음 양보해 제안한 것이다.황제는 서 황후를 응시하더니
Read more

제619화

황제가 친히 황후의 처소로 걸음한 것은 그녀에게 일방적인 통보를 하기 위함이었다. 그녀에게 이리 통보하는 것은, 그녀가 황제의 마음속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어서도 아니었다. 그저 금영에게 황후마저 흔쾌히 동의한 봉호라는 명분을 만들어주려는 수작이었다. 국모가 인정한 봉호이니, 아무도 이에 대해 불만을 품지 못할 것이고, 반대할 수도 없을 것이다. 황제가 처소를 떠나고 난 후에도, 서 황후의 안색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하게 굳어 있었다. 그녀는 탁자 위에 정성스레 차려져 있던 다과상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성질을 내며 손을 휘둘러 찻잔과 접시들을 바닥으로 모조리 쓸어버렸다! “황후마마!” 환옥이 다급히 만류하려 했다.서 황후는 난장판이 된 바닥을 내려다보며 문득 광기 어린 웃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이 어찌나 서늘했는지, 방 안의 궁녀들은 저도 모르게 전신에 오한이 일었다. 서 황후가 한 자 한 자 힘주어 내뱉었다. “폐하의 총애는 참으로 천하 모든 이들의 선망을 받게 하는구나. 그런데 그 미천한 것이 과연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금영은 황제가 자신을 위해 황후의 처소에서 어떤 엄청난 파란을 일으키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금영은 오랜만에 얻은 휴식에, 입궁한 이후 겪었던 여러 일들을 깨끗이 지우고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푸른 보석처럼 빛나는 광활한 초원 위를 천천히 거니는 것만으로도 꽉 막혔던 가슴이 탁 트이는 듯했다.그러나 이 여유로운 평화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그녀의 눈앞에 심기를 어지럽히는 인물이 불쑥 나타났기 때문이다. 저 멀리 홀로 서 있는 커다란 나무 아래 한 사내가 멍하니 서 있었는데, 다름 아닌 둘째 오라비 배경천이었다.그녀는 이 둘째 오라비에게 일말의 기대도 없었다.표범에게 습격을 당하던 그 절체절명의 순간, 배명월의 손에 잡혀 끝내 그녀를 구하러 오지 않았던 그의 유약함에 금영의 마음은 차갑게 식어버렸다.금영은 지체 없이 걸음을 돌려 그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마주쳐서 심
Read more

제620화

배경천이 채 두 걸음도 떼기 전에, 금영의 뒤를 지키던 손탁이 손을 들어 배경천의 앞을 단호하게 가로막았다. “부디 걸음을 멈추시옵소서.”“내가 어찌하여 멈추어야 한단 말이오? 내 누이와 심 낭자와 몇 마디 대화를 건네는 것조차 불가하다는 말이오?” 배경천이 억울하다는 듯 반박했다.손탁이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이 자리에는 오직 존귀하신 영비마마만 계실 뿐 공자님의 누이는 존재하지 않사옵니다. 부디 자중하시옵소서.”금영의 모습이 서서히 멀어져 가는 것을 바라보며, 배경천의 가슴속에 무어라 설명하기 힘든 거대한 공허함이 들이쳤다. 그 먹먹한 상실감은 과거 금영이 자신을 마주할 때마다 가시를 돋우며 악다구니를 쓰던 시절의 아픔보다 훨씬 더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한편, 금영은 나란히 걷는 심연희에게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본궁의 기억이 맞다면, 그대는 본궁보다 고작 반 해 정도 늦게 태어났다지? 그러면 이미 계례(笄禮:여자 나이 15세를 전후하여 쪽을 짓고 비녀를 꽂는 의식)를 치렀겠구려?”심연희가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하옵니다.”“방금 둘째 오라버니와 무슨 이야기를 그리 정답게 나누고 있었는가? 혹 양가의 혼담에 관한 일이었소?” 금영이 넌지시 질문을 던지자, 심연희의 고운 뺨이 빨갛게 물들었다. 그 모습에 금영은 속으로 깊은 탄식을 내뱉었다. ‘보아하니 둘째 오라버니에게 연정을 품은 모양이구나!’비록 자신이 배경천을 지독하게 혐오할지언정, 훤칠하고 준수한 그의 외모는 인정하는 바였다. 여인의 마음을 뒤흔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심연희는 금영이 말수가 없어지자, 내심 초조한 기색을 보였다. 아직 출가 전인 여인은 제 감정을 완벽하게 감추는 것에 미숙했다. 평소 배경천과 금영의 사이가 그리 좋지 못하다는 소문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심연희의 불안감이 더욱 짙어졌다.금영이 자기 앞에 있는 여인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적절히 경고할 수 있는 말을 고심하던 찰나, 저 멀리서 또 다른 익숙한
Read more
PREV
1
...
6061626364
...
72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