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그날, 나는 태자가 아닌 황제를 선택했다: Chapter 781 - Chapter 7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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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81화

“예전 선 귀비도 선황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지만, 끝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지요.”태후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눈빛에는 지난날을 떠올리는 듯한 회한이 짙게 배어 있었다.“되었습니다. 지난 일은 더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황제께서는 본래 총명하시니 본궁이 무슨 뜻으로 이런 말을 하는지 아실 겁니다.”“본궁도 황제와 같은 마음입니다. 금영과 염아가 아무 탈 없이 평안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황제가 말했다.“어마마마께 괜한 심려를 끼쳐 드렸사옵니다.”태후가 옅게 웃었다.“그리고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어젯밤에는 사정이 급했으니 원비가 현청전에서 해산한 것도 어쩔 수 없었지요. 하지만 이제 아이도 무사히 낳았으니 되도록 빨리 소녕전으로 돌아가게 하는 편이 좋겠습니다.”태후가 다시 말을 이었다.“여인이 해산한 곳에는 피와 오물이 남기 마련입니다. 사람을 시켜 내전의 물건을 모두 새것으로 바꾸고 향도 충분히 피워 부정한 기운을 말끔히 없애도록 하세요.”황제는 태후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어마마마, 그 일은 소자가 알아서 결정하겠사옵니다. 어마마마께서 심려하실 필요는 없사옵니다.”“몸도 편찮으시니 너무 많은 일에 마음 쓰지 마시옵소서. 소자는 이만 물러가겠사옵니다.”말을 마친 황제는 그대로 몸을 돌려 밖으로 향했다.태후에게 더 말을 이을 틈조차 주지 않았다.사실 황제는 태후에게 이미 지극한 효를 다하고 있었다.황제라는 지위에 있으면서도 태후의 말이라면 웬만한 일에는 인내하며 귀를 기울였다.그러나 태후는 그조차도 성에 차지 않는 듯했다.황제가 떠난 뒤 태후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보았느냐? 황제가 요즘 들어 갈수록 본궁을 안중에도 두지 않는 듯하구나.”곁에 있던 손 상궁이 조심스럽게 달랬다.“태후마마께서 너무 염려하시는 것이옵니다. 폐하께서는 본래 지극히 효성스러우신 분이옵니다. 지금은 그저 원비마마께 마음을 지나치게 빼앗기신 듯하옵니다.”태후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여인 하나에게 마음을 빼앗긴 것뿐이라면 차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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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82화

황제는 그 말을 듣고 웃으며 말했다.“공을 세웠다면 마땅히 상을 내려야지.”금영이 다시 덧붙였다.“이번에는 오라버니가 신첩을 위해 복령을 찾아 준 덕도 컸사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신첩이 무사히 아이를 낳을 수 있었을지조차 알 수 없었을 것이옵니다.”황제는 금영을 바라보았다.그의 눈빛이 순간 깊어졌다.금영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너무 속내를 드러낸 것일까.금영은 뒤늦게 후회했다.조금 더 천천히 했어야 했다.눈앞의 사내는 황제였다.제 작은 속셈 하나 알아차리지 못할 리 없었다.그런 생각이 들자 금영은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폐하, 신첩에게 죄를 물어 주시옵소서.”황제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네게 무슨 죄가 있다는 것이냐?”“마침 조정에도 쓸 만한 사람이 필요한 때다. 배경원은 배정후보다 훨씬 쓸모가 있으니, 선대 영안후의 공을 생각해서라도 벼슬을 한두 단계 더 올려 줄 만하다. 더구나.”황제는 거기까지 말하고 금영을 바라보았다.금영이 남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하지 않게 하려면 영안후부의 위세도 어느 정도 세워 줄 필요가 있었다.황제는 이내 화제를 돌렸다.“금영아, 이리 여러 사람의 상을 챙겨 주면서 정작 네가 받고 싶은 것은 없느냐?”금영이 고개를 들어 황제를 바라보았다.맑은 두 눈에 잔잔한 물결이 이는 듯했다.“신첩은 아무런 상도 바라지 않사옵니다. 그저 폐하께서 오래도록 강녕하시기만을 바랄 뿐이옵니다.”황제는 금영을 힐끗 바라보았다.금영은 유난히 자신의 몸을 염려하는 듯했다.마치 자신이 어느 날 갑자기 승하하기라도 할까 걱정하는 사람처럼 말이다.황제는 굳이 그 일을 깊이 따지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너는 상을 바라지 않는다 해도 짐이 상을 내리지 않을 수는 없지.”금영도 웃음을 지었다.“그러면 폐하께서 마음 가시는 대로 내려 주시옵소서. 폐하께서 무엇을 주시든 신첩은 기쁠 것이옵니다.”금영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덧붙였다.“그래도 상을 받는 것보다 신첩은 폐하께서 신첩과 염아의 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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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83화

눈발을 헤치며 다가오던 이는 무척 빠른 걸음으로 가까워졌다.금영이 계단을 다 내려서기도 전에 그는 이미 계단 아래에 이르렀다.그제야 금영은 다가온 사람이 태자라는 것을 알아보았다.오늘 태자는 기린 무늬 곤복을 입고 어깨에는 은회색 담비 털 외투를 걸치고 있었다.큰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옷자락에 바람이 일었고, 자태 또한 빼어났다.겉모습만 놓고 보면 확실히 태자다운 존귀함과 기품이 있었다.특히 지난 일 년 사이 태자는 예전의 풋풋한 기색을 많이 벗었다.대신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차갑고 묵직한 분위기가 한층 짙어져 있었다.태자는 금영을 보는 순간 목울대가 한차례 크게 움직였다.금영이라고 부르고 싶은 듯 입술을 달싹였으나, 정작 입 밖으로 나온 것은 다른 호칭이었다.“원비마마.”금영은 담담하게 대답했다.“태자 전하께서는 예를 거두시옵소서.”태자의 시선이 복령에게로 향했다.그는 다시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서더니 손을 뻗어 복령의 품에 안긴 아이에게 가져갔다.아이는 붉은 비단 강보에 포근히 싸여 있었다.숨쉬기 편하도록 얼굴 위쪽의 강보 자락만 살짝 느슨하게 덮어 둔 상태였다.태자는 그 천 자락을 가볍게 걷어 올렸다.복령은 화들짝 놀라 금영을 바라보며 도움을 청했다.“마마.”금영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태자 전하!”상대가 태자만 아니었다면 당장 사람을 시켜 아이에게서 떼어 놓았을 것이다.그러나 태자는 이미 허리에 차고 있던 무언가를 단숨에 풀어 강보 위에 올려놓았다.그리고 금영을 바라보며 말했다.“원비마마, 그리 긴장하지 않으셔도 되옵니다.”“아기 황자는 제 아우이기도 하고, 더구나.”태자는 거기까지 말하고 금영을 바라보았다.끝내 뒷말은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이 아이는 무엇보다 금영의 아이였다.태자는 다시 미소를 머금었다.“이 용문옥부(龍紋玉符: 용 무늬를 새긴 옥으로 만든 신표)는 제가 태어났을 때 선황께서 하사하신 것이옵니다. 오늘은 염아에게 주고 싶사옵니다.”금영은 태자의 태도를 가만히 살폈다.표정도 자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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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84화

눈을 밟는 소리가 가까워지더니, 어느새 황제가 두 사람의 곁까지 다가왔다.태자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 금영과 거리를 벌렸다.이내 황제를 향해 공손히 예를 올렸다.“아바마마.”금영도 몸을 낮추어 예를 갖추었다.“신첩, 폐하를 뵈옵니다.”황제의 검은 눈동자가 두 사람을 천천히 훑었다.태자가 먼저 설명했다.“소자가 아기 황자를 보니 너무도 사랑스러워 작은 선물 하나를 주었사옵니다.”황제의 시선이 금영에게로 옮겨 갔다.금영의 손에는 용문옥부가 들려 있었다.금영은 마치 뜨거운 물건이라도 떠넘기듯 얼른 황제에게 용문옥부를 내밀었다.“이토록 귀한 물건을 신첩이 감히 마음대로 받아 둘 수는 없사옵니다.”황제는 용문옥부를 받아 들었다.손끝으로 옥의 표면을 천천히 쓸어 보았으나, 얼굴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금영은 그나마 침착했지만 태자는 숨마저 잠시 멎은 듯했다.“아바마마.”잠시 뒤, 황제가 돌연 웃음을 지었다.그러고는 용문옥부를 다시 금영에게 건넸다.“선황께서 하사하신 물건이라 해도 이제 태자가 염아에게 주었다 하지 않느냐. 그러니 받아 두거라.”금영은 어쩔 수 없이 용문옥부를 다시 받아 들었다.황제는 위명이 들고 있던 대나무 우산을 직접 받아 금영의 머리 위로 기울였다.“가자.”황제의 목소리는 여느 때처럼 낮고 차분했다.조금도 노한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짐이 소녕전까지 데려다주마.”금영에게는 아직 계단 하나가 남아 있었다.그녀는 황제의 팔에 손을 얹고 천천히 아래로 내려섰다.눈이 내리고 있어 계단은 생각보다 미끄러웠다.금영은 순간 발을 헛디뎌 그대로 황제의 품으로 기울었다.가느다란 두 팔이 황제의 허리를 감싸는 순간, 황제의 몸이 눈에 띄게 굳었다.이내 황제는 들고 있던 우산을 옆으로 슬쩍 내밀었다.위명은 곁에 선 채 나무기둥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황제가 미간까지 찌푸렸지만 여전히 무슨 뜻인지 알아채지 못했다.결국 손복안이 앞으로 비집고 들어와 위명을 밀어 내고 우산을 받아 들었다.그제야 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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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85화

태자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면 차라리 나았을 것이다.태자 이야기가 나오자 황제의 속에서 눌러 두었던 화가 다시 치밀어 올랐다.황제는 이를 악문 채 물었다.“오늘 태자를 만나니 그리도 기뻤느냐, 금영아?”금영은 잠시 생각했다.사실 꽤 기쁘기는 했다.전생에 태자는 자신을 저버렸다.그런데 자신은 돌아서서 입궁해 황제의 총애를 받는 원비가 되었고, 이제는 황자까지 낳았다.태자의 속이 얼마나 뒤틀릴지는 생각만 해도 뻔했다.원수가 괴로워하는데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하지만 그 말을 그대로 할 수는 없었다.금영은 황제가 이미 마음이 상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그녀는 두 팔을 들어 황제의 목을 감싸 안았다.맑고 환한 눈으로 황제와 시선을 맞추며 나직이 말했다.“신첩은 오직 폐하 때문에 기쁘고, 폐하 때문에 웃을 뿐이옵니다.”그러고는 황제의 목을 감싼 팔에 힘을 주어 몸을 살짝 일으킨 뒤 먼저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회임한 뒤로 황제는 줄곧 자제해 왔고, 금영 역시 함부로 그를 유혹하지 않았다.하지만 이제는 아이도 낳았고 몸도 거의 회복되었다.금영에게 더는 크게 거리낄 것이 없었다.금영이 이토록 먼저 다가오자 황제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한참이 지나서야 황제는 금영의 입술을 세게 한 번 깨물었다.그리고 이를 악문 채 낮게 말했다.“진심이든 거짓이든 상관없다. 짐은 그 말이 몹시 마음에 드는구나.”말을 마친 황제는 힘겹게 금영을 밀어냈다.두 사람 사이가 조금 벌어졌는데도 금영의 두 팔은 여전히 황제의 목을 감싸고 있었다.금영이 의아한 눈으로 황제를 바라보았다.“폐하?”황제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짐이 태의에게 물어보았다. 아직은 몸을 더 회복해야 한다더구나.”황제는 금영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덧붙였다.“짐도 네가 몹시 원한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너무 욕심을 부려서는 아니 된다.”금영은 아직 나이가 어렸다.제 몸을 제대로 생각하지 못하고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그러나 황제는 금영보다 훨씬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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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86화

소녕전.황제가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비가 찾아왔다.현비는 웃으며 말했다.“원비, 본궁이 그동안 원비와 아기 황자를 보러 오지 않았다고 섭섭해하지 마세요. 폐하께서 일찍부터 누구도 원비의 휴식을 방해하지 못하게 하셨지요. 원비가 몸조리를 잘해야 한다고 특별히 분부하셨답니다.”금영도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현비마마께서 그리 바쁘신 와중에도 시간을 내어 소녕전까지 찾아와 주셨는데, 신첩이 어찌 섭섭해하겠사옵니까. 그저 감사할 따름이옵니다.”금영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물었다.“전에 이황자께서 다치셨다는 말을 들었사온데, 지금은 몸이 좀 어떠하시옵니까?”“원비와 아기 황자의 복을 받은 덕인지, 이제는 큰 탈이 없어요.”현비는 웃음을 지었다가 이내 의미심장하게 말을 이었다.“그러고 보면 참 공교롭지요. 이황자에게 변고가 생기자마자 소녕전 근처에서 불이 났고, 뒤이어 원비까지 놀라 예정보다 일찍 해산하게 되었으니 말입니다.”현비는 금영을 바라보며 물었다.“원비는 이 두 가지 일이 어딘가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금영은 그 말을 듣는 순간 현비의 속셈을 알아차렸다.현비는 자신의 원망과 의심을 서 황후에게 돌리려는 것이었다.가장 좋은 것은 금영이 앞장서 서 황후와 맞붙어 주는 것이겠지.물론 금영도 서 황후를 상대할 생각이었다.하지만 그렇다고 현비와 손을 잡을 마음은 없었다.호랑이에게 가죽을 내놓으라 청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이었다.그 끝이 좋을 리 없었다.금영은 아무것도 모르는 듯 웃으며 말했다.“폐하께서 이미 사람을 보내 알아보셨사옵니다. 궁인이 부주의하여 촛대를 넘어뜨린 탓에 불이 났다고 하더군요.”“그리고 염아도 달이 거의 다 찬 뒤에 태어났으니, 굳이 조산이라 할 정도는 아니옵니다.”현비가 옅게 웃었다.“원비도 입궁한 지 제법 되었는데 여전히 마음이 참 순수하군요.”“본궁이 괜한 말을 한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후궁은 겉으로 보이는 것만큼 평온한 곳이 아닙니다. 원비도 앞으로는 조금 더 경계하는 편이 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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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87화

현비의 곁을 지키는 고위 궁녀 춘로가 그 말을 듣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마마께서도 미리 대비하셔야 하옵니다. 원비마마께서 황자를 낳지 않았다면 총애를 두고 다투는 정도로 끝났겠지만, 이제는 황자를 낳은 데다 폐하께서 아기 황자를 이토록 총애하고 계시옵니다. 훗날 태자가 폐위되기라도 한다면.”춘로는 거기까지 말하고 잠시 입을 다물었다.그러고는 현비의 얼굴을 살폈다.현비의 눈빛에는 어느새 무거운 기색이 어려 있었다.*이레는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어느덧 만월연을 치르는 날이 되었다.사실 따지고 보면 염아가 태어난 지도 벌써 마흔 날 가까이 되어 가고 있었다.금영은 화장대 앞에 앉아 해수에게 단장을 맡기고 있었다.단장을 모두 마쳤을 즈음, 마침 복령이 아이를 안고 안으로 들어왔다.복령은 해수보다 아이를 돌보는 데 훨씬 익숙했다.그래서 요즘 염아는 대부분 복령이 직접 돌보고 있었다.갓난아이는 하루가 다르게 자랐다.고작 한 달 남짓 지났을 뿐인데도 태어났을 때보다 몸집이 눈에 띄게 커져 있었다.금영은 복령의 품에서 아이를 받아 들었다.작디작은 아이를 바라보는 순간, 마음까지 사르르 녹아내리는 듯했다.“염아, 염아.”금영이 아이의 이름을 부드럽게 두 번 불렀다.아기 황자는 아직 금영의 말을 알아들을 리 없었다.그런데도 어미가 곁에 있다는 것을 느끼기라도 한 듯 방긋 웃더니 이내 까르르 소리까지 냈다.복령이 웃으며 말했다.“우리 아기 황자님께서는 참으로 영특하고 사랑스러우시옵니다.”금영은 복령을 바라보았다.“본궁이 준비하라 한 것은 모두 마련했는가?”“마마, 염려 놓으시옵소서. 모두 준비해 두었사옵니다.”금영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가세.”소녕전 밖으로 나오자 손탁을 비롯한 내관들이 이미 가마를 준비해 두고 있었다.하지만 금영은 가마를 타지 않겠다고 했다.그동안 바깥출입을 거의 하지 못한 데다 아직 시간도 넉넉했다.조양전까지 그리 멀지도 않았으니 천천히 걸어가고 싶었다.금영은 직접 염아를 품에 안았다.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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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88화

여비의 손 위에 놓인 것은 장명쇄(長命鎖: 아이가 오래도록 무병장수하기를 기원하며 목에 걸어 주는 자물쇠 모양의 장신구)였다.장명쇄에는 이국적인 정취가 물씬 나는 꽃매듭까지 엮여 있었다.게다가 새 물건도 아니었다.표면에 새겨진 무늬는 오래 손을 탄 탓에 이미 많이 닳아 희미해져 있었다.금영이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현비가 후궁의 낮은 품계 비빈 몇을 거느리고 이쪽으로 다가왔다.현비가 웃으며 물었다.“무슨 일입니까?”금영이 대답했다.“여비마마께서 염아에게 축하 예물을 주시는 중이옵니다.”현비는 여비를 흘끗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런데 여비의 곁에 있던 용빈이 놀란 얼굴로 입을 열었다.“이건.”현비가 곧바로 꾸짖었다.“함부로 말하지 말게!”둘이 이렇듯 말을 주고받는 모양새만 보아도 이 물건에 무언가 사연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정작 여비는 숨길 생각이 없다는 듯 곧장 입을 열었다.“이건 예전에 본궁이 아들을 위해 마련해 둔 장명쇄다.”“아쉽게도 본궁의 아들은 무사히 자라지 못했지. 그러니 이 물건은 아기 황자에게 주겠네. 부디 아기 황자는 아무 탈 없이 장성하기를 바라네.”그 말을 들은 해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낯빛도 금세 어두워졌다.해수는 금영을 바라보았다.금영이 무어라 반응하기만을 기다리는 눈치였다.그러나 금영은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여비마마의 호의는 감사히 받겠사옵니다. 다만 이 물건은 여비마마께도 몹시 소중한 물건일 터이니, 본궁이 욕심내어 받을 수는 없사옵니다.”“여비마마께서 잘 간직해 주시옵소서.”말을 마친 금영은 아이를 품에 안은 채 그대로 전각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안에는 이미 적지 않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후궁의 비빈들은 거의 모두 와 있었고, 황자와 종친들뿐 아니라 황제의 측근 신하들도 자리하고 있었다.금영과 현비가 들어서자 사람들이 잇달아 예를 올렸다.현비는 금영의 곁을 따라 걸으며 웃음 띤 목소리로 말했다.“예전에도 궁에서 아이가 태어나면 만월연을 열기는 했지만, 대개 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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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89화

금영이 말했다.“신첩은 폐하께서 언제 오실지 알지 못했사옵니다. 괜히 늦게 왔다가 여러 사람을 오래 기다리게 할까 염려되어 먼저 왔사옵니다.”황제는 금영의 곁으로 다가와 그녀의 품에 안긴 아이를 바라보았다.그리고 나직이 물었다.“염아는 깨어 있느냐?”금영이 고개를 끄덕였다.전각 안이 제법 더웠기에 금영은 천천히 강보를 젖혀 아이의 얼굴을 황제에게 보여 주었다.아기 황자를 본 순간 황제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번졌다.주변에 있던 대신들도 자연스레 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그때 현비의 곁에 있던 용빈이 웃으며 말했다.“아기 황자님께서는 참으로 사랑스럽게 생기셨사옵니다. 태자 전하께서 어리셨을 때와 꼭 닮으셨사옵니다.”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조금 전까지만 해도 제법 떠들썩하던 대전 안이 순식간에 고요해졌다.사람들의 심장이 일제히 철렁 내려앉았다.지금이야 누구도 감히 입에 올리지 않지만, 원비마마는 한때 태자비가 될 뻔했던 사람이었다.무엇보다 꺼림칙한 점은 따로 있었다.이 아이는 원비가 입궁하기 전에 이미 회임한 아이였다.황제는 조금도 의심하는 기색이 없었지만, 예전의 원비는 태자를 구하기 위해 제 목숨까지 내놓으려 했던 사람이 아니던가.그런데 용빈이 하필 아이가 태자를 닮았다는 말을 꺼냈다.황제가 의심하지 않는다 해도, 대신들의 머릿속에는 저도 모르게 끔찍한 가능성 하나가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황제에게는 오랫동안 자식이 없었다.밖에서는 황제가 예전에 사냥을 나갔다가 크게 다쳐 몸을 상했다는 소문까지 돌았다.그 뒤 조정에서 황제에게 새 비빈을 뽑아 후궁에 들이자고 청했지만, 황제는 그마저 거절했다.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도 황제가 간택을 하지 않는 일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몸에 문제가 있다는데 새 비빈을 들여 무엇하겠는가.괜히 황제의 금기를 건드릴까 두려워, 대신들도 더는 후궁에 사람을 들이라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그런데 그렇게 몸에 문제가 있다고 소문난 황제에게 어느 날 갑자기 아이가 생겼다.게다가 원비는 태자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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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90화

누구를 닮았단 말인가.금영의 목소리는 더없이 고왔지만, 그 말을 듣는 사람들에게는 목숨을 재촉하는 부적이나 다름없었다.이런 이야기를 자신들이 들어도 되는 것인가.그런데 금영이 그렇게 말하고 나니, 사람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태자와 이황자에게로 향했다.전에는 누구도 입 밖으로 꺼낸 적이 없으니 굳이 둘을 비교할 일도 없었다.하지만 이렇게 놓고 보니 정말 그랬다.태자와 이황자는 생김새가 그다지 닮지 않았다.두 사람 모두 키가 크고 훤칠한 데다 빼어난 용모를 지녔지만, 태자는 짙은 눈썹과 또렷한 눈매가 늠름했고 이황자는 유난히 부드러운 눈매에 복사꽃처럼 화사한 눈을 지니고 있었다.사람들이 태자와 이황자를 번갈아 바라보는 것을 확인한 금영은 입가에 떠올랐던 웃음을 슬며시 거두었다.현비가 이런 식으로 자신에게 흠집을 내려 한다면, 괜히 해명하는 쪽이야말로 그 덫에 걸리는 셈이었다.소문으로 공격해 온다면 소문으로 되받아치면 그만이었다.말 한마디로 사람을 궁지에 몰아넣는 재주는 현비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금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이황자 전하와 태자 전하는 생김새가 이토록 다른데, 염아가 두 분을 모두 닮을 수는 없지 않사옵니까.”금영은 현비를 바라보며 웃었다.“현비마마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옵니까? 염아는 태자 전하를 더 닮은 것 같사옵니까, 아니면 이황자 전하를 더 닮은 것 같사옵니까?”현비가 마음만 먹는다면 금영의 아이가 태자를 닮았다고 말할 수도 있었다.하지만 눈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었다.태자는 황제와 닮은 구석이 분명히 있었다.오히려 이황자가 누구와도 그다지 닮지 않았다.게다가 아기 황자와도 닮지 않았다는 말까지 나오면, 금영이 굳이 손을 쓰지 않아도 서 황후가 이 틈을 놓칠 리 없었다.금영은 믿고 있었다.현비가 자신을 깎아내리겠다고 이황자의 혈통까지 의심받게 만들지는 못하리라는 것을.현비가 훗날 이황자에게 태자 자리를 노리게 할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더더욱 그랬다.아주 작은 의심이라도 생기는 순간 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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